[eBook]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 (증보판) - 증보판
김연수.김애란.심보선.신형철.최은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거리만 소개하는 전집 가이드 류보다 훨씬 잘 읽히고, 작가들은 어떤 식으로 서평을 쓰는지 엿보는 재미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예전에 ‘이동진의 빨간 책방’ 시절에 사두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빨책 선정작들을 열심히 따라가면서 읽었는데 이 책은 도저히 못 읽겠어서 포기했다.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으로 뽑은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마이클 온다치의 『워 라이트』에 대한 서평을 보다가 그 책에 흥미가 생겼고 같은 작가의 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라서 『워 라이트』 전에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먼저 펼쳐 들었다. 다행히도 그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게 헛짓은 아니었다보다. 몇 년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예를 들어 이런 서술 때문이다.


【그는 개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으려다, 균형을 너무 늦게 잡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탁자를 붙잡아서 와인 병을 뒤엎었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그들은 그를 참나무 탁자의 굵은 다리에 수갑으로 붙들어 맸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이 말은 현재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의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탁자를 붙잡고 와인 병을 쏟는 순간 그것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들어온 것이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이 부분이 과거 회상이라는 걸 놓치게 되고, 이탈리아 수도원에 있는 ‘그’가 왜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 의해 수갑으로 묶였는지 의아해하게 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해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으며 문장은 과거와 현재를 아무런 연결 없이 뚝뚝 넘나든다. 한 가지 사건도 여러 다른 시점에서 접근된다. (…) 온다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플롯의 뼈대 자체가 없었으며 전쟁 이야기와 추락한 비행기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플롯의 뼈대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혹은 말을 하더라도 주요한 부분들 빼고서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맞추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데 어느 순간 이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 그냥 이 상태로 감상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따라 완벽하게 이해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보여주는대로 읽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네 명이다. 영국인 환자와 간호사 해나, 도둑 카라바지오, 그리고 지뢰 찾는 임무를 맡은 영국군 공병 킵(본명은 키르팔 싱). 이 넷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우연한 계기로 모이게 된다. 이들의 행동은 때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나는 영국인 환자를 왜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가. 물론 소설 안에서 이에 대한 이유가 나오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도둑인 카라바지오가 겪은 일들, 지뢰를 찾는 킵의 일들도,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소설의 말미에 다다라서, 내가 이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몇 년이 훌쩍 지나버린 시점이다. 그 사이에 각 인물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고, 소중했던 사람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고, 또는 자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평상시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국도 아닌 곳에서 매일 매일 죽음과 맞이하는 상황에 몇 년째 놓여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성적인 인과관계, 논리적인 사고구조를 기대해도 되는 것일까. 파편적으로 툭툭 내뱉어지는 말들 사이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거나 감추려는 태도에서 나는 오히려 ‘설명할 수 없음’을 느꼈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을 포기하고 좋았던 장면 몇 개를 뽑아봤다. 영국인 환자에 관한 장면이라 먼저 영국인 환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야겠다. 이 영국인 환자는 사막에 떨어진 불 탄 비행기에서 걸어나온 사람으로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아프리카 북부에서 이탈리아로 이송되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영국인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밖의 것 - 사막의 지리, 사막의 풍습 등 - 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탈리아 수도원에 누워있는 처지가 되어서도 머릿 속으로는 모든 사막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다. 


【"길프 케비르라."

"그래요."

"그게 어디요?"

"키플링 책 좀 줘봐요..... 여기."

『킴』 의 앞장은 소년과 성인(聖人)이 지나간 경로를 점선으로 표시한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인도의 일부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사교 평행선이 나누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산골짜기에 위치한 카시미르.

그는 검은 손으로 누미 강을 따라 훑다가 마침내 위도 23도 30분에 위치한 바다에 이른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쪽 18센티미터 지점까지 더 훑다가 페이지에서 손을 떼고 가슴에 얹는다. 그는 자신의 갈비뼈를 만진다.

"여기요. 길프 케비르. 북회귀선 바로 북쪽,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 위에."】


카라바지오가 영국인 환자에게 ‘길프 케비르(이집트의 남서쪽에 있는 고원)’의 위치를 묻자 그는 키플링의 책 『킴』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인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는 책을 가슴에 얹고는 자신의 갈비뼈를 가리켜 바로 이 곳이 길프 케비르라고 말한다. 이 영국인 환자는 땅이나 지도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이렇게 보여주다니.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지금 어딘지 모르고 길을 잃었을 때, 필요한 건 오로지 작은 산등성이의 이름, 지역의 관습, 이 역사적 동물의 세포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전 세계의 지도가 제자리로 맞춰지지요.】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산등성이의 이름만 알면 전 세계의 지도가 촤라락 맞춰진다니, 진정으로 광기 어린 지리학자다. 


영국인 환자가 가진 유일한 소지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인데 이에 관한 묘사도 꽤나 인상적이다.


【그녀는 그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공책을 집어 든다. 그가 화염 속에서도 가지고 나왔던 책,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이다. 그 위에 그는 다른 책의 페이지를 잘라 붙이기도 했고 자신의 관찰을 적어놓기도 했다.】


【그의 비망록, 헤로도토스의 『역사』 1890년 판에는 지도와 일기, 여러 언어로 쓰인 산문과 다른 책에서 오려낸 문단들이 들어 있었다. 빠져 있는 것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그가 실제로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고, 익명에 계급도 소속 대대도 분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언급들은 모두 전쟁 전이나 1930년대의 이집트와 리비아의 사막에 대한 이야기였고 동굴 예술이나 화랑 미술, 그의 작은 필체로 쓴 일기 항목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영국인 환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자신의 일기장처럼 썼다. 그래서 원래 두께보다 부풀어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나름 손글씨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갑자기 전율이 느껴졌다. 사막을 탐험하면서 자신의 인생 책 단 한 권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계속해서 뭔가를 기록해나가는 일,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이 소설 안에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재미있었다.


책에 대한 리뷰인데 영화 이야기도 살짝 써볼까 한다. 이 책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도 상당히 좋다. 책에서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서 나온다. 영화에서 킵의 비중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떤 영화 감독이 보더라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장대한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강렬하다. 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본 이후로 눈밭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이고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보니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읽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텍스트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에 집중해도 충분히 재미있고, 사막에 대한 텍스트로 읽어도 가치가 있으며, 폭탄에 대한 설명서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킵의 폭탄 제거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런 다면적인 독서 경험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사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읽다가 마지막에는 이것은 역시 전쟁에 관한 소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킵이 주요한 인물로 떠오르면서 소설에 굉장한 긴장감을 준다. 그가 폭탄 제거반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한 번 읽자마자 다신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느껴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언젠가는 꼭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바로 재독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몇 년 정도 뜸을 들였다가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수월하게 이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이클 온다치의 책들도 좀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다는 거야.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에서 무엇 하는 거지? 대체 킵은 과수원에서 폭탄을 해체하면서 무엇 하는 거지? 어째서 영국인들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지? 서부 전선의 농부는 나뭇가지를 자를 때마다 톱날이 망가진다는군, 왜인 줄 알아? 지난 전쟁 동안 박힌 총알 파편이 너무 많아서야. 우리가 몰고온 질병 때문에 나무들도 굵어졌고. 군대는 너희들 머릿속에 생각을 주입해 놓고서도 여기 남겨놓고 떠나서 다른 데 가서 문제를 일으키지. 우리는 모두 여기서 함께 나가야 해.”】


【해나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킵과 나는 둘 다 국제적인 사생아야. 한 곳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곳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이지. 평생 우리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거나 거기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어. 킵은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거지."】


【사람은 낙타와 같은 속도로 걷죠. 시속 4킬로미터. 운이 좋으면 타조 알을 발견할 수도 있었지요. 불운하다면, 모래폭풍이 모든 걸 지워버릴 수도 있었고.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죠. (...)주님이 안전을 길동무로 보내주시기를. 매독스는 이렇게 말했었죠. 작별 인사. 손짓. 오직 사막에만 신이 있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이 사막 밖에서는 오직 무역과 권력, 돈과 전쟁만이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가 멀티태스킹이 굉장히 잘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나의 생활을 보면 멀티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늘상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 외에 다른 것들이 침투해들어오면 루틴이 사르르 망가져버린다. 나에게 루틴은 견고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대충 쌓아놓은 모래성과 같다. 파도가 한 번 휩쓸고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나의 루틴이라니...!


요즘 내가 듣고 있는 강의가 하나 있다. 한 번 들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최소한 한 번은 더 들어야 머리에 남는다. 실시간으로 한 번, 끝나고 나서 한 번 더 듣는데 이렇게만 해도 나의 시간을 상당히 잡아 먹는다. 다시 들을 때는 일시정지를 누르고 필기하고 생각하고 모르는 건 검색하기도 해서 시간이 배로 걸린다. 내가 듣고 싶어서 신청한 강의라서 열과 성을 다하고는 있으나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강의를 듣는 기간 동안 글도 안 쓰고 책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금만 다른 일에 집중해도 금방 손에서 놔버리게 된다.


멀티태스킹이란 일종의 저글링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손이 열 개고 스무 개인데 나는 너무나 진실하게 딱 두 개의 손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남들이랑 똑같은 개수의 저글링 공을 돌려도 나는 금방 뭔가를 놓치게 된다. 나의 루틴이라고 생각했던 책 읽기, 글 쓰기, 영어 공부, 저녁 산책 이런 것들을 최근에 너무 많이 놓아버렸다. 얼른 다시 주워서 저글링 돌려야 하는데 한 번 떨어진 공을 줍기가 쉽지 않다.


온갖 변명을 다 써놨는데 한 마디로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책을 못 읽어서 마음이 번잡스러울 때 꼭 책장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전자책만 사니까 전자책 책장을 들춰본다.) 거기에 쌓여있는 수백 권의 책들, 그 중에서 아직 안 읽고 왠지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들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읽지도 않을 거면 왜 샀니~~~? 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얼른 전자책 리더기를 끈다. 미안 미안, 얼른 읽을게.


그래서 최근에 도대체 뭐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해봤다. 우선 책을 한 권 읽기는 읽고 있다.


이 책, 시사인에서 보고 읽기 시작했다. 미국에 파견된 독일 기자가 쓴 책인데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좌파 세력이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우며 동시에 어떠한 열린 토론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의 각 장에는 잘못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직업을 잃거나 강연이 취소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는 실수든 고의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발언을 한 것 자체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람들을 자르기 전에 열린 논쟁을 했었어야 한다고,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린 논쟁이 분노의 말들에 질식당하고 인종차별주의자, 이단, 코로나 음모론자, 푸틴 지지자 등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면, 여기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반민주주의자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기도 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왜 소위 말하는 '독단적 좌파'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이해가 가기도 해서 오락가락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열린 논쟁, 열린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말은 좋다. 말은 좋은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인 동물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해서 든다.


인종차별에 대해서 얘기할 때 나는 흑인도 백인도 아닌 아시안이라서 아시안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유독 집중하게 되는데 아시안들은 '적극적 우대 조치'의 피해자에 가깝다는 분석도 매우 흥미로웠다.


【확실히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은 소외된 ‘유색인종’ 집단에 넣기 어렵다. 대다수 아시아인은 미국의 경쟁적 분위기에 아주 잘 적응하여 지내고, 이른바 ‘적극적 우대 조치’의 피해자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2018년에 아시아계 대학생을 대변하는 한 조직이 하버드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조직은 하버드대학이 성격 같은 모호한 선발 기준으로 아시아계 지원자를 배제했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학은 이런 혐의를 부정했지만, 〈뉴욕타임스〉는 “학업 성적만을 기준으로 선발했더라면 2013년 아시아계 대학생의 비율이 19퍼센트가 아니라 43퍼센트였을 것”이라 보도하면서 대학의 내부 조사 자료를 공개했다.


이 책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위기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발언하기가 두려운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같은 과격한 우파의 득세, 글로벌 다국적 기업들의 위선적인 행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게다가 미국에서 현재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여러 학자들, 책, 논문 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살펴보기에 좋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푸코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서 매우 흥미로웠고, 내가 이쪽 방면으로는 그동안 책을 너무 안 읽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반성했다. 비판적 인종 이론, 교차성 이론 이런 거 굉장히 생소했다. 하여튼 책 좀 많이 읽고 공부를 해야하는데 자꾸만 독서 말고 다른 할 일들이 생겨서 난감한 요즘이다.


【만약 감정이 주장을 대체하면 감정은 거대한 효과를 내는 정치적 무기가 된다. 주장은 반박할 수 있지만 감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또는 소셜미디어에서 비난받는다면 그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 위장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의심받는다. 동시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의 높이가 최근에 특히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라는 개념과 함께 체계적으로 하향되었다.】


【“백인하고만 사귀는 백인은 이런 말을 들을 겁니다. ‘너희는 인종차별주의자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나 만약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과 사귀면 모험을 즐기는 남자라고 비난받습니다. 다른 사례도 있어요. 만약 백인이 흑인 동네에서 이사를 나오면 ‘백인 탈출’로 비난받고, 백인이 흑인 동네로 이사를 가면 젠트리피케이션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이런 식의 모순은 문제가 있어요. 백인의 인종차별을 폭로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논리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어요.”】


【공화당은 민주당이 세금 인상과 유니섹스 화장실로 나라를 채찍질하려 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급진적 이념 부대라고 프레임을 씌울 기회를 얻었다. 비록 아주 일부만 사실이지만 좌파 진영의 목소리가 매우 크고 언론의 큰 메아리를 얻기 때문에, 공화당의 이런 공격은 효력을 발휘한다.

‘깨어 있음’은 민주당에 절대적으로 치명적이라고 뉴욕 출신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대다수 사람이 ‘깨어 있음’을 싫어합니다. 오직 진보적 활동가들만 좋아하죠. 미국인의 정치 선호도를 보면 민주당은 안전한 과반수로 승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찰 예산 삭감하라!’ 같은 구호 또는 학교 이름을 둘러싼 상징적 다툼 때문에 공화당은 민주당 반대 캠페인에 쉽게 성공합니다.”】


---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책은 사부작 사부작 사들이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리즈다. 전자책 적립금 쌓일 때마다 한 권 두 권 사모아서 지금 열 두권을 모았고 딱 한 권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음사 <잃.시.찾> 전자책 세트가 있고 20퍼센트 할인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럴 거면 낱권씩 사지 말고 세트로 살 걸ㅠㅠ적립금 모아서 한 권 두 권 모은 거랑 가격면에서 별 차이가 안 난다ㅋㅋㅋㅋㅋㅋ게다가 한 권씩 찔끔찔끔 사느라 너무 피로했다... 세트로 살걸.


그렇지만 즐거운 일도 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피라미드> 전자책이 출간되었다. 이거 종이책은 몇 년 전에 나왔는데 여태까지 전자책이 없길래 전자책 나올 계획이 없는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자책 출간 알림이 떠서 깜짝 놀랐다. 문학동네에서는 몇 년 전에 나온 세문전 책들도 계속 전자책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전자책 애용자인 나는 이럴 때 감동한다. 이제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도 전자책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둔황>은 이미 종이책으로 읽었다. 어어엄청나게 감동한 책은 아닌데 이상하게 계속 생각이 난다. 언젠가는 둔황에 가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둔황 갈 때 들고 가게 제발 전자책으로도 나오면 좋겠다.


---


요즘 마음이 바쁜 이유 중에 하나는 여행이다. 하반기에 어딘가로 여행을 좀 가고 싶은데 여행 가기 전에 그 지역과 관련된 책을 먼저 읽고 싶은 거다. 여행 계획도 안 짰는데 책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허둥지둥이다. 왜 여행을 여행대로 즐기지 못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나만의 난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행복한 건 사실이다. 여행 가기 전에 그 지역 역사나 식문화 관련된 책 읽는 게 매우매우 즐겁다. 얼른 여행 계획 짜고 독서 리스트도 짜야해서 마음이 분주하다. 과연 6월에는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얼마나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열심히 읽고 쓰는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건 꽤 오래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네. 스파이를 상대로 스파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여우와 함께 달리지 않으면서도 여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질문에 대한 존 르 카레의 길고 긴 대답.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정적인 긴장감으로 끝까지 몰고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이하 "죽은 자")>는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런 건지, 우리나라에서 존 르 카레의 판매량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그런 건지, 현재 절판 상태다. 다행히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에 <죽은 자> 전자책이 있길래 빌려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조지 스마일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한다. 스마일리는 뚱뚱하고 키도 작고 아무튼 외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대단한 미인인 앤 서콤이 조지 스마일리와 결혼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는데 결국 앤은 '지금 조지 스마일리를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미스터리한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났다(몸만 떠난 거지 이혼한 건 아니다). 조지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이 지나가고 나면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


<죽은 자>는 스파이 소설이면서 추리 소설이다. 소설 초반에 어떤 남성(=S)이 죽는다. S는 외무부 고위급 직원인데 과거 옥스포드 대학교를 다닐 무럽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이 있다는 투서가 외무부에 날아들었다. 외무부 측에서는 S의 사상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기 위해 정보부 직원을 부른다.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스마일리다. 면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S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S가 남긴 유서와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S는 스마일리와 면담을 하고나서 매우 분노했으며 그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영국 정보부는 스마일리를 불러서 도대체 면담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을 하는데 스마일리는 어리둥절이다. 면담은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며, S에게 과거 공산당 가입 이력은 현재 당신의 커리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스마일리는 S가 면담 때문에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스마일리와 S의 자살 사건이 얽혀들기 시작한다. 추리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이 그렇듯이 S의 자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나 많다. 자살 몇 시간 전에 '다음 날 아침에 울릴 모닝콜'을 부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S의 자살을 파면 팔수록 괴이한 일들이 끝도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존 르 카레의 주특기, 초중반은 사건을 파헤치면서 나름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후반부에 미친듯이 휘몰아치기 전법이 또다시 등장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추운 나라")>도 그랬는데 <죽은 자>도 예외는 없었다. 모든 비밀이 한꺼번에 밝혀지면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구간이 있다. <추운 나라>에 대한 평가가 워낙 좋아서 <죽은 자>에 대한 기대는 살포시 내려놓고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라는 의무감으로 읽었는데 <죽은 자>는 내 기대보다 훨씬 재밌었다. 서구권이나 동구권 가리지 않고 뼈 때리는 대사 날리는 솜씨는 데뷔작부터도 여전했다.


<추운 나라>와 <죽은 자>를 다 읽고 나서 이번 주말 내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테솔스")>를 읽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연달아서 세 권째 읽으니 이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존 르 카레의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서로 너무 끈끈하다. 끈끈하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대하더라도 끈끈할 수 있다. 어쨌든 굉장히 강렬한 관계가 다수 등장한다.


<죽은 자>에서는 스마일리-멘델, 스마일리-피터 길럼의 관계가 그렇다고 느꼈는데 다 읽고 나면 스마일리-X(혹시나 모를 스포를 위해 X로 처리)의 관계가 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X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X가 스마일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가 <죽은 자>의 줄거리에 있어서 핵심 오브 핵심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추운 나라>에서는 리머스와 피들러의 관계가 아주 핵심적이었고, <팅테솔스>에 다다르면 아주 난리도 아니다. 스마일리-카를라, 스마일리-피터 길럼, 빌 헤이든-짐 프리도 등등 끈끈한 관계가 너무나 많다.


피터 길럼에게는 카밀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고 조지 스마일리에게는 부인인 앤이 있는데 이런 관계들은 선명하지가 않다. 앤 스마일리에 대한 내 인상은 뭐랄까, 그녀가 유령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실체가 있는데 앤은 소문과 회상으로만 존재한다. 게다가 조지와 앤의 관계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앤은 문란하고 조지는 그저 견딜 뿐이다. 반면, 위에 서술한 조지 스마일리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굉장히 선명하게 그려지고 그들 사이의 서사도 탄탄하다. 특히 스마일리와 카를라의 대면 장면은 분량이 굉장히 짧은데도 <팅테솔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특징들이 소설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 시절 남성들만 드글드글한 영국 정보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튼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연달아 세 권째 읽고 있으니까 웬만큼 무감각한 나조차도 이 남자들의 끈끈함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죽은 자> 후반부...)


그리고 또 하나. 존 르 카레는 소설의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수미상관 서술 방식을 좋아하는 듯 하다. <팅테솔스>는 다 읽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와 <추운 나라>는 처음과 끝이 묘하게 이어진다. <추운 나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베를린 장벽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주인공이자 서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조지 스마일리로 시작해서 조지 스마일리로 끝이 나는 소설이다. 이러한 수미상관 방식은 엔딩 장면을 시작으로 다시 책의 처음을 회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지 <추운 나라>는 책 덮자마자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고, <죽은 자>를 다 읽고나서는 조지 스마일리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활약하는 <팅테솔스>로 급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팅테솔스>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영화가 사알짝 어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마찬가지다.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은 절대 아니다. 온갖 스파이 용어들이 튀어나오고 여기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작전명을 두 개 세 개씩 갖고 있다.('짐 프리도'가 '짐 엘리스'인데 나중에는 '하예크'로도 나온다. 한눈 팔면 나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다.) 머리가 좀 지끈거리기는 하는데, 너무 재미있다! 영화를 먼저 봐서 결말을 아는데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후반부에 휘몰아칠 걸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심장이 떨린다. 이래서 아는 맛이 무섭다고, 존 르 카레 소설의 후반부는 숨도 못 쉬고 보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글은 원래 <죽은 자>의 리뷰로 쓰기 시작했는데 <죽은 자> 말고도 <추운 나라>, <팅테솔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페이퍼로 바꾸게 되었다. 아직 <팅테솔스>도 다 안 읽었는데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얼른 <팅테솔스> 읽고 그 뒤로 이어지는 카를라 시리즈도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나저나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 절판인 것도 아쉽고, 존 르 카레 전집이 없는 것도 아쉽다. 몇십 년 전에 쓰여진 소설을 여전히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독자가 있으니 어떤 출판사든지 전집 출간을 좀 고려해주면 좋겠다. 아무튼 열심히 읽고 열심히 리뷰 남겨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