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가운 바람 불 때 읽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에세이를 그다지 즐겨 읽지 않는데도 이 책은 너무 좋았고, 비비언 고닉의 다른 책도 읽어볼 예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2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리즈의 분위기가 너무 좋다. 사건 해결과는 도무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배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가구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런 문장들이 너무 좋다. <로재나>보다도 더 재밌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나의 독서 습관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인스피아 뉴스레터에서 '느림보 독서법'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다. 이 뉴스레터는 느리게 읽는 법과 관련된 책 여러 권을 소개해줬는데 그 중 에밀 파게의 <독서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유유 출판사에서 <단단한 독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단단한 독서>를 구입해서 읽었다.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이 말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언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백미터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올한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정작 기억나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원인 모를 공허함에 시달리며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맞는 건가 의심하고 있을 때 '천천히 읽으라'는 조언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나의 독서 습관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당시 읽었던 소설이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었다는 거다.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1,2부도 재밌었지만 3,4부는 기절할 정도로 재미있어서 새벽 3시까지 책 읽다가 침대에 쓰러져서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느리게 읽기는 개뿔. 등 뒤에서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이 책은 정말 대박이라고 생각하며 조만간 1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던 책은 바로 이것.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인 <로재나>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긴 시리즈물을 시작하고 싶어서 <반지의 제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놓고 고심하다가 마르틴 베크를 선택했다. 올초엔가 전자책 적립금 모일 때마다 한 권 한 권 사들여서 이미 시리즈를 전부 구입해둔 상태였는데 안 읽고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이 책은 '느리게 읽기'에 특화된 책이로구나! 북유럽 특유의 느린 일처리와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합쳐져 소설 속의 모든 일이 그야말로 느릿느릿 진행된다. 국제전화 연결하려면 몇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그나마 국제전화가 가능했으니 다행) 다른 나라와 서류라도 주고받을라 치면 며칠에서 몇 주까지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분실이라도 안 되면 다행.)

일처리 속도뿐 아니라 소설 자체의 템포도 느리게 흘러간다. 셜록 홈즈 같은 천재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주인공이 추리 쇼를 펼치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찰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 대한 탐구일지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그저 잠복하고 잠복하고 또 잠복하는 순간들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표적을 정확히 맞혀서 목표물을 획득하는 명사수가 아니다. 그들은 표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들이 어느 쪽을 향해 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바다에서 살인범이라는 돌멩이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물망을 던졌다가 올려서 뭐가 잡혔는지 살펴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또 그물망을 던지는 어부와 같다. 저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범인 잡겠나, 싶은 생각이 들법도 한데 막상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마르틴 베크에게 조금씩 끌린다. 이 인물에게 왜 끌리는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나는 이 인물에게서 묘한 희망 같은 걸 발견했던 것 같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번뜩이는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쉬지 않고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런 종류의 희망 말이다.

모든 것을 빨리 빨리 해결하고, 안 되는 일에는 후딱 손 떼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온 나에게 이러한 인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굴러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만 같았다. 정답은 느리게 가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살다 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시기가 도래하지만 그럴 때에도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핵심은 꿈이나 희망, 속도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태도'에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리게 읽기'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빨리 빨리 읽으려고만 하다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뻔했기에 느리게 읽더라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읽는 독서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여러 모로 슬로우 리딩과 찰떡궁합인 책이 아닌가 싶다.

+) 그나저나 <로재나> 읽다가 나폴리 4부작이 생각나서 초반에 좀 가슴이 아팠다. 나폴리에선 경찰이 범인을 잡는 건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을 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로재나>의 배경인 스웨덴에서는 경찰이 몇 달간 공을 들여서 진짜 범인을 잡는다. 똑같은 1960년대인데 나폴리와 스톡홀름은 완전 딴나라 세상이다. 이래서 다들 북유럽 북유럽 하는 건가 싶다. 그런데도 마르틴 베크는 계속해서 우울해하는 걸 보니 복지와 치안만이 해결책이 아닌 건가 싶기도 하고. 우연하게도 비슷한 시기를 다룬 완전히 다른 두 소설을 읽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년대라 그런가 북유럽이라 그런가 경찰들이 한 사건에 이렇게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나라 경찰물에서는 보지 못했던 집중력과 여유로움이 느껴져 부럽기까지. 굉장히 현실적이고 템포가 느린 범죄소설인데 나름 매력이 있어서 시리즈 끝까지 볼 예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김영준 지음 / 민음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세이는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소설처럼 줄거리를 요약할 수도 없고 비문학 책처럼 중심 사상을 뽑아낼 수도 없다.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사유가 담겨 있어 이 책의 주제는 딱 이거,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라는 에세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리뷰를 써볼까 싶었는데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 중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글에 대해 시작해보기로 한다.


글 제목은 <11월>. 11월이 되면 ˝각 매체들은 올해의 기억들을 정리해서 보여 주기 시작한다.˝ 아마 조금 있으면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같은 리스트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기 시작할 것이다. 11월에 ‘올해의 XX‘를 공표하기 위해서 10월이나 9월, 혹은 더 이전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마쳤을 것이라고 저자는 짐작한다. 한 해는 분명 12월까지인데 실질적인 마감은 두어 달 전에 이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 해는 1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나 버린다. 10월까지 출시하지 못한 신제품은 ‘올해의 것’으로 거론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계인이 아닌, 경제적 이해가 없는 일반인들도 한 해가 이렇게 10개월, 300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으면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누군가 아주 쉬운 산수를 틀리고 있는데 아무도 바로잡지 않는 악몽을 꾸는 느낌 비슷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흔히들 1년의 상반기보다 하반기가 더 훅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해의 실질적인 중간은 6월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더운 8월을 분기점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하반기는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낀다는데, 이러한 분석에 저자의 분석까지 덧붙여야할 것 같다. 8월을 분기점으로 하반기로 인식하는데다가 10월부터 여기저기서 한 해를 마감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반기가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수밖에! 그렇다면 업계인들은 왜 10월 무렵에 한 해를 결산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다음해 1~2월에 ‘작년의 영화‘, ‘작년의 책‘을 공표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쓴다.

【새해의 입구이자 일부인 진짜 연말은 회고를 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해를 살아가는 느낌을 미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강력한 열망 앞에서는 지난해의 목록 같은 건 별 흥밋거리가 못 된다. 아마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해를 정리하기에 적당한 시점은 아무도 진짜 연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기, 늦가을의 어느 달일 수밖에 없다.】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특히 저 문장.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런 문장들은 외워두었다가 가끔씩 써먹기에 좋아보인다. 왜 1월에 지난해를 회고하지 않는 줄 알아? 그건 바로 그때 너무나 생생하게 새로운 한 해를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시기에는 누구도 지난 것을 회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구!! 바로 이렇게 말이다.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두 달 빠른 결산 관행이 암시하는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여행과 기록을 동시에 하면서 이걸 절절하게 느꼈다. 나는 기억력이 워낙 나쁘기 때문에 그날 있었던 일을 그날 정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 여행 기록을 남기려면 바로 그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쏘다니고 들어와서 새벽 3시까지 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간적으로 나처럼 기록하는 사람한테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26시간쯤 주어져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툴툴대봤지만 하루가 26시간이 되는 기적은 당연히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기록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 기록들을 보며,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저때 저랬단 말야? 아 맞다. 이런 일도 있었지‘ 하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그 당시에 적어놓지 않았다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일들이 일기장 속에 남아있었다. 여행 일기들을 보면서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는데...바로 저 문장을 만났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여기는 정말이지 밑줄 백만 개를 긋고 싶었다. ‘11월‘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이 에세이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되었다.

이 에세이집은 신문 연재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눠서 묶어놓기는 했지만 이것은 느슨한 분류일 뿐. 읽다보면 굉장히 다양한 주제와 사유가 오고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글은 조금 싱겁게 끝나기도 했고 어떤 글은 결말이 좀 독특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글들은 내 기준에서 "100점, 아니 200점!"을 외치게 만들었다. 모든 글이 고냥고냥 80점인 에세이집보다는 몇몇 글들이 뒤통수를 빡 때리고 가는 이런 에세이집을 좋아한다.(그렇다고 다른 글들이 별로였다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대체로 다 재미있었다.)

이 책에 밑줄 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다. '11월'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인 '완전한 소모'편에서 한 문장을 옮겨와보도록 하겠다.

【다이어트는 자기의 지방을 태우지만, 간소한 삶은 물건을 내버릴 뿐이다. 지방은 본래 태우라고 쌓아 두는 것이므로, 다이어트는 지방의 본질을 존중하고 목적의 실현을 돕는다고 할 여지도 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관계 단절이 있을 뿐 물건의 특성을 존중한다거나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보려는 관심은 들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물건뿐 아니라 다른 대상에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간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얻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개인적으로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고 있지만 작가의 이 뼈 때리는 문장에 깊이 공감한다. 나 역시 미니멀리즘 한답시고 왕창 버려도 보고, 하루 한 개씩 버려도 보고, 물건 3개를 버린 후 그 세 가지의 기능을 모두 갖고 있는 물건 1개를 사들이기도 해보고, 하나를 사도 비싼 거 사보자면서 싸구려를 버리고 브랜드 제품을 구입해보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깔끔해보이는 흰 색 플라스틱 수납함 여러 개를 주문해서 진열해놓을 때보다 과자 상자와 선물 상자를 활용해서 얼기설기 수납할 때 가장 만족감이 높았다. 결국 ‘버리기‘보다 ‘있는 것 잘 쓰기‘가 핵심이고 이걸 잘 하려면 ‘잘 쓰지 못할 것 같은 물건은 애초에 사지 않기‘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미니멀해진다. '버리기'만으로는 크게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걸 경험상 깨닫고는 있었지만 글로 표현하지는 못 했는데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딱 정제된 문장을 보니까 너무 좋았다. 내가 쓰려던 문장이 바로 저런 거였다구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존 르카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을 눈여겨보게 되었던 이유는 당연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연상시키는 책 제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저자는 존 르카레의 한국 정식 계약본 출간을 추진했던 편집자였다. 나는 존 르카레의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존 르카레 편집자의 에세이는 언젠가는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며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이북 적립금 쌓였을 때 구매했던 것이다.

존 르카레에 대한 글은 좋기도 했지만 조금 슬프기도 했다. 일단 잘 안 팔렸다는 것ㅠㅠ. <팅테솔스>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존 르카레 책은 더이상 번역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져갔을까? 가슴이 싸늘했다.

존 르카레 에이전시는 한국 시장에서 르카레 전작을 모두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그 목표는 실현되지 않았다. 현재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존 르카레 책을 내고 있다. 그런 걸 보면 <팅테솔스> 영화의 성공 이후에도 존 르카레의 책이 획기적으로 잘 팔리지는 않았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다. 한 출판사에서 통일된 표지 디자인으로 존 르카레의 전집을 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을 해보지만 현실은 정말 녹록지 않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쓴 글들은 정말이지 다 좋았다. 윌리엄 트레버에 대한 글들도 너무 좋아서 아직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을 읽지 않은 내 자신에 화가 나면서 '나는 아직 안 본 눈'이라는 사실에 뿌듯함까지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실린 에세이 중 짧은 글보다는 긴 글이 훨씬 좋았다. 윌리엄 트레버에 대한 글도 긴 글이었는데 굉장히 좋았다. 

출판에 관한 글들을 보면 진지한 사유와 함께 실질적인 조언도 함께 던져준다. 

【편승이 가능해 보인다고 과욕스러운 탑승 리스트를 만드는 건 어리석다. 리스트가 회의에 부쳐져 검토되는 것은 편승 전략을 원점에 돌리는 일이니까. 당신이 정말로 그 책을 내고 싶다면 회의를 최대한 건너뛸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단행본으로 내면 안 팔릴 것 같은 책을 내고 싶다면 ‘잘 팔릴 것 같은‘ 리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자신이 진짜 내고 싶은 책을 끼워넣어야 한다는 것. 다만 절대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회의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가 열리면 대부분의 의견은 묵살, 기각, 보류된다는 건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역시 언제나 과욕은 금물.

<전함 포템킨>에 관한 글도 정말 재미있다. <전함 포템킨>의 현지 발음은 ‘빠쬼낀‘ 비슷한데 편집 일을 하면서 ‘포템킨, 뽀쫌낀, 포촘킨, 포티옴킨‘이라는 표기를 마주쳤고 제대로 된 용례는 ‘포툠킨‘!!!이라는 문장이 왤케 웃긴지 모르겠다. 편집자만이 던질 수 있는 업계인의 고급 농담 같달까.

힐링 감성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었다. 다음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구매해서 볼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