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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김영준 지음 / 민음사 / 2023년 6월
평점 :
에세이는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소설처럼 줄거리를 요약할 수도 없고 비문학 책처럼 중심 사상을 뽑아낼 수도 없다.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사유가 담겨 있어 이 책의 주제는 딱 이거,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라는 에세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리뷰를 써볼까 싶었는데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 중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글에 대해 시작해보기로 한다.
글 제목은 <11월>. 11월이 되면 ˝각 매체들은 올해의 기억들을 정리해서 보여 주기 시작한다.˝ 아마 조금 있으면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같은 리스트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기 시작할 것이다. 11월에 ‘올해의 XX‘를 공표하기 위해서 10월이나 9월, 혹은 더 이전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마쳤을 것이라고 저자는 짐작한다. 한 해는 분명 12월까지인데 실질적인 마감은 두어 달 전에 이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한 해는 1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나 버린다. 10월까지 출시하지 못한 신제품은 ‘올해의 것’으로 거론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계인이 아닌, 경제적 이해가 없는 일반인들도 한 해가 이렇게 10개월, 300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으면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누군가 아주 쉬운 산수를 틀리고 있는데 아무도 바로잡지 않는 악몽을 꾸는 느낌 비슷할 것이다.】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흔히들 1년의 상반기보다 하반기가 더 훅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해의 실질적인 중간은 6월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더운 8월을 분기점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하반기는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낀다는데, 이러한 분석에 저자의 분석까지 덧붙여야할 것 같다. 8월을 분기점으로 하반기로 인식하는데다가 10월부터 여기저기서 한 해를 마감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반기가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수밖에! 그렇다면 업계인들은 왜 10월 무렵에 한 해를 결산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다음해 1~2월에 ‘작년의 영화‘, ‘작년의 책‘을 공표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쓴다.
【새해의 입구이자 일부인 진짜 연말은 회고를 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해를 살아가는 느낌을 미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강력한 열망 앞에서는 지난해의 목록 같은 건 별 흥밋거리가 못 된다. 아마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해를 정리하기에 적당한 시점은 아무도 진짜 연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기, 늦가을의 어느 달일 수밖에 없다.】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특히 저 문장.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런 문장들은 외워두었다가 가끔씩 써먹기에 좋아보인다. 왜 1월에 지난해를 회고하지 않는 줄 알아? 그건 바로 그때 너무나 생생하게 새로운 한 해를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시기에는 누구도 지난 것을 회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구!! 바로 이렇게 말이다.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두 달 빠른 결산 관행이 암시하는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여행과 기록을 동시에 하면서 이걸 절절하게 느꼈다. 나는 기억력이 워낙 나쁘기 때문에 그날 있었던 일을 그날 정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 여행 기록을 남기려면 바로 그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쏘다니고 들어와서 새벽 3시까지 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간적으로 나처럼 기록하는 사람한테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26시간쯤 주어져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툴툴대봤지만 하루가 26시간이 되는 기적은 당연히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기록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 기록들을 보며,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저때 저랬단 말야? 아 맞다. 이런 일도 있었지‘ 하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그 당시에 적어놓지 않았다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일들이 일기장 속에 남아있었다. 여행 일기들을 보면서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는데...바로 저 문장을 만났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여기는 정말이지 밑줄 백만 개를 긋고 싶었다. ‘11월‘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이 에세이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되었다.
이 에세이집은 신문 연재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눠서 묶어놓기는 했지만 이것은 느슨한 분류일 뿐. 읽다보면 굉장히 다양한 주제와 사유가 오고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글은 조금 싱겁게 끝나기도 했고 어떤 글은 결말이 좀 독특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글들은 내 기준에서 "100점, 아니 200점!"을 외치게 만들었다. 모든 글이 고냥고냥 80점인 에세이집보다는 몇몇 글들이 뒤통수를 빡 때리고 가는 이런 에세이집을 좋아한다.(그렇다고 다른 글들이 별로였다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대체로 다 재미있었다.)
이 책에 밑줄 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다. '11월'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인 '완전한 소모'편에서 한 문장을 옮겨와보도록 하겠다.
【다이어트는 자기의 지방을 태우지만, 간소한 삶은 물건을 내버릴 뿐이다. 지방은 본래 태우라고 쌓아 두는 것이므로, 다이어트는 지방의 본질을 존중하고 목적의 실현을 돕는다고 할 여지도 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관계 단절이 있을 뿐 물건의 특성을 존중한다거나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보려는 관심은 들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물건뿐 아니라 다른 대상에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간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얻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개인적으로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고 있지만 작가의 이 뼈 때리는 문장에 깊이 공감한다. 나 역시 미니멀리즘 한답시고 왕창 버려도 보고, 하루 한 개씩 버려도 보고, 물건 3개를 버린 후 그 세 가지의 기능을 모두 갖고 있는 물건 1개를 사들이기도 해보고, 하나를 사도 비싼 거 사보자면서 싸구려를 버리고 브랜드 제품을 구입해보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깔끔해보이는 흰 색 플라스틱 수납함 여러 개를 주문해서 진열해놓을 때보다 과자 상자와 선물 상자를 활용해서 얼기설기 수납할 때 가장 만족감이 높았다. 결국 ‘버리기‘보다 ‘있는 것 잘 쓰기‘가 핵심이고 이걸 잘 하려면 ‘잘 쓰지 못할 것 같은 물건은 애초에 사지 않기‘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미니멀해진다. '버리기'만으로는 크게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걸 경험상 깨닫고는 있었지만 글로 표현하지는 못 했는데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딱 정제된 문장을 보니까 너무 좋았다. 내가 쓰려던 문장이 바로 저런 거였다구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존 르카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을 눈여겨보게 되었던 이유는 당연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연상시키는 책 제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저자는 존 르카레의 한국 정식 계약본 출간을 추진했던 편집자였다. 나는 존 르카레의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존 르카레 편집자의 에세이는 언젠가는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며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이북 적립금 쌓였을 때 구매했던 것이다.
존 르카레에 대한 글은 좋기도 했지만 조금 슬프기도 했다. 일단 잘 안 팔렸다는 것ㅠㅠ. <팅테솔스>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존 르카레 책은 더이상 번역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져갔을까? 가슴이 싸늘했다.
존 르카레 에이전시는 한국 시장에서 르카레 전작을 모두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그 목표는 실현되지 않았다. 현재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존 르카레 책을 내고 있다. 그런 걸 보면 <팅테솔스> 영화의 성공 이후에도 존 르카레의 책이 획기적으로 잘 팔리지는 않았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다. 한 출판사에서 통일된 표지 디자인으로 존 르카레의 전집을 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을 해보지만 현실은 정말 녹록지 않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쓴 글들은 정말이지 다 좋았다. 윌리엄 트레버에 대한 글들도 너무 좋아서 아직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을 읽지 않은 내 자신에 화가 나면서 '나는 아직 안 본 눈'이라는 사실에 뿌듯함까지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실린 에세이 중 짧은 글보다는 긴 글이 훨씬 좋았다. 윌리엄 트레버에 대한 글도 긴 글이었는데 굉장히 좋았다.
출판에 관한 글들을 보면 진지한 사유와 함께 실질적인 조언도 함께 던져준다.
【편승이 가능해 보인다고 과욕스러운 탑승 리스트를 만드는 건 어리석다. 리스트가 회의에 부쳐져 검토되는 것은 편승 전략을 원점에 돌리는 일이니까. 당신이 정말로 그 책을 내고 싶다면 회의를 최대한 건너뛸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단행본으로 내면 안 팔릴 것 같은 책을 내고 싶다면 ‘잘 팔릴 것 같은‘ 리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자신이 진짜 내고 싶은 책을 끼워넣어야 한다는 것. 다만 절대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회의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가 열리면 대부분의 의견은 묵살, 기각, 보류된다는 건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역시 언제나 과욕은 금물.
<전함 포템킨>에 관한 글도 정말 재미있다. <전함 포템킨>의 현지 발음은 ‘빠쬼낀‘ 비슷한데 편집 일을 하면서 ‘포템킨, 뽀쫌낀, 포촘킨, 포티옴킨‘이라는 표기를 마주쳤고 제대로 된 용례는 ‘포툠킨‘!!!이라는 문장이 왤케 웃긴지 모르겠다. 편집자만이 던질 수 있는 업계인의 고급 농담 같달까.
힐링 감성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었다. 다음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구매해서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