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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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곳. 지옥보다 더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전하는 것을 의무라 여기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던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지 4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악몽들이 잊혀지지 않고 몸에 마음에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살았을 시간들이 애틋하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 책은 그가 자살하기 두 해전 출간되었다. 1964년부터 20년 동안 이탈리아 일간지에 기고한 에세이들이다. 제목은 『고통에 반대하며』이지만 그리하여 또다시 그와 뗄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관한 글일 거라 예상했지만 수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기존의 그에게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아우슈비치의 고통과 같은 음울함이 아니라 따스하고 호기심 깃든 이야기들, 냉철한 비판과 비평들이 나타나 또다시 애잔함을 더한다. 그에게,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마음과 역량이 있는데 그가 써내려가고 써내려가야 했던 글들이란, 그 기억들이란. 이렇게 그의 생애를 알기에 책 처음에 나오는 에세이부터가 눈길을 끈다. <우리집>. 특징없는 집을 곱씹으며 드러나는 집과 고향, 그 지난 때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전해진다.

  그 외 이 에세이들을 보면 화학 전공자이자 화학자로 일한 저자의 경력 때문인지 ‘화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거미, 나비, 귀뚜라미, 벼룩, 딱정벌레, 다람쥐 등등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읽은 책과 작가들에 대한 비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타영역의 점유’, 다시 말해 타인의 직업에의 침입, 남의 사냥터에서 벌인 밀렵, 동물학·천문학·언어학 영토에서의 약탈에 다름 아닐 터인데,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임에도) 지속적인 매력에 이끌려 영원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모든 학문 영역, 즉 몰래 엿보고 싶고 꼬치꼬치 캐묻고픈 충동을 자극하는 영역의 점유라 할 것이다. p6


  굳이 말하건대 화학자라서인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비평할 때면 자신의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이다. 에둘러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이런 류의 글들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화학자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묻기에, 물론 호기심에 찬 어조이거나 거만한 태도이거나, ‘두 문화’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도 하며.

  그래서였나 보다. 이 책 속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많았던 것은. 그래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타인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명확한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서, 그 자신도 글쓰기에 대한 많은 조심과 염려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말을 하는 것과 그저 다른 표현 수단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힘을 보여주며 더불어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p61


  조용조용하게 다가오며 일상의 것들에 대한 과학자식 사고가 더해진 글쓰기로 보였던 글들 속에 종종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작가의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가 스며있는 것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작가에게 글쓰기는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그 고통의 파편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은, 조금 더 권태로워지고 싶은 발버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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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그럴 리가!



  제목에서 1920~30년대의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의 모던걸의 이미지가 그냥 생각났는데 연유는 모르겠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기울여 선 자세의 누군가를 그린 표지 속 소설은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이야기라고, 더 나아가 청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당연, 그런가? 그럴 리가!

 의미의 차이인 듯하다.

  이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당선작 선정  이유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현실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래서 현실 속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가. 소설 속 주인공은 스물셋. 그녀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법은 아르바이트다.

  

내가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바이트였다. 날씨연구소 문을 열 때나 인형극이 끝나고 아이들과 배우들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안내할 때, 평범한 스카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써서 올릴 때, 준비해 간 한류 스타 사진에 일본 아줌마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볼 때 ‘아, 내가 대학생이구나’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마치 바리케이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린 길이라는 걸, 유령이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처럼. 학생인 나와 캐스터인 나와 인형극 배우인 나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알아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룰이다. p40


  스물셋의 대학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생활비와 학비로 쪼들리며 전전하다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 이름이 아니라 익명 또는 별명으로 일하는 곳은 ‘날씨연구소’다. 정말로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날씨를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손님의 마음상태를 잘 예측하고 들어주는 칵테일 주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주인공이 잘 예측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등장인물과 손님들은 하나같이 제 이름이 없다. 역시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그들이 이 ‘날씨연구소’를 벗어나면 그 별명 외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도 각각의 일들을 하는 서로 다른, 서로를 통일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부정하고픈 주인공이 바라보는 사회도 역시 뿌연 안개가 가득한 익명일 것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164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베개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은 당연 주인공의 일상과 감정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그저 흘러 가버릴 경험이 아니기에 스물셋의 ‘그녀’에겐 더욱 그렇다. 단골인 일본 손님이 갑자기 바에서 사망하는 일이나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 언니에게 당하는 사기, 예술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인 듯 행하던 유부남 영화감독 등. 이 영화감독의 언사들을 보면서 마침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감독이 생각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왜인지 이 영화감독의 모습도 영화나 소설 등에 조금은 익숙하게 등장하는 유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내 방의 벽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가 사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진실도 허세가 되고, 허영도 현실처럼 보였다. p100 


  글쎄.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학업과 경쟁에 시달리어 소위 일탈을 일삼는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이 세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에 밀리어 마냥 주체적 생각없이 한량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이것을 이 세대 청춘의 모습이라 부르며 너도 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서 모두가 같이 겪는 무게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 현실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규정지어 새삼 충격을 받는 일이 없는 듯하다. 놀라움과 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규정화된 청춘의 모습과 일상만이 남아, 그렇다 한들 그것이 당연한 듯이. 그 어떤 일들을 경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 속에서 어떤 청춘들은 그 듣기 싫은 ‘청춘의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래 안고 있던 베개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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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가 필요해


요슈타인 가아더,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


    “운명을 꿰뚫어 보려는 자는 운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철학을 이야기로 풀어 쓰는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이다. <소피의 세계>가 그의 대표작이듯 이 책은 철학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최근작이 아니라 1990년대 <카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소피의 세계>작가의 소설이라 하니 이야기가 흘러 철학의 문제로 가겠거니 생각하게끔 되지만 이 책이 <소피의 세계>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명백히 선후관계를 따지면 이 책이 <소피의 세계>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거란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열두 살 소년의 엄마 찾기 여정이다. 자아를 찾아 떠난 엄마를 한스는 아빠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아테네로 찾아 나선다. 이 머나먼 여정에서 한스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얼까. 열두 살 아이가 등장하는 것처럼 신나는 모험이 있다. 다만 여느 모험과는 다르다. 또한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판타지와 미스테리가 가득한 이야기다. 그래서 잠시 한눈을 팔면 옆길로 빠진다. 마냥 환상 속에 머물러 버릴 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두 부자의 최종 목적지가 아테네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엄마를 찾으러 가는 여행이 철학여행이 되는 것은 철학으로 이끄는 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 여행에서 한스의 아빠는 이 역할을 맡는다. 동화나 청소년 소설에선 아이는 알지만 어른은 절대 알지 못하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을 보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아이들이 보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어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아빠는 비록 한스가 혼자서 맞닥뜨리는 빵집이나 난쟁이들의 모습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역시나 보지 못하지만, 한스에게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철학자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얘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우주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어. 다만 우리는 우리뿐인지 그렇지 않은지 결코 알 수가 없는 거야. 은하는 마치 외로이 떨어진 섬들과 같거든.”

아버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걸 한 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해사로서의 인생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로서 나라에서 봉급을 받았어야 했다. 아버지도 언젠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에는 별의별 장관이 다 있지. 그렇지만 철학 장관은 없어. 큰 나라들마저도 그런 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p27 


  한스가 낯선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일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가 만나는 난쟁이와 그의 안내, 빵집의 제빵사. 그로부터 건네받은 꼬마책. 지금의 열두 살이라면 이런 책보다는 그저 핸드폰을 들고서 여행을 했겠지만 한스는 수상한 빵집 제빵사 루트비히에게 받은 꼬마책을 읽는데 푹 빠진다. 루트비히가 건넨 롤빵에 있던 돋보기로 봐야만 읽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책, 꼬마책. 거기엔 1790년의 이야기, 카리브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온 선원 프로데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52장의 카드, 이것은 프로데의 친구들이다. 환상의 섬인 만큼 이 신비로운 일이 가능했고 여기에 조커가 등장하여 흥미진진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중에 불쑥 불쑥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와 같은 질문들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비현실적이게 만들었다가도 현실적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가야, 널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나는 여기 앉아서 내 인생 이야기를 적고 있고, 네가 언젠가 도르프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쩌면 너는 발데마르길의 빵 가게를 느릿느릿 지나가다가 금붕어가 든 유리 어항 앞에 멈춰 서겠지. 너는 네가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무지갯빛 레모네이드와 마법의 섬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 도르프에 올 것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1946년 2월이고 나는 아직 젊다. p48 .


  아이가 그 먼 여정을 가는 바람은 4살 때 헤어진 엄마를 만나는 것이었으니만큼 엄마를 만나게 될까. 엄마는 자아실현을 위한 모델일을 잘 하고 지속적으로 하려 할까. 아빠는 여전한 철학적 질문을 쏟아낼까. 그리고, 오래전에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한스의 할아버지는 어디에, 살아는 계실까. 수상한 빵집과 더불어 또한 불쑥 튀어나오는 난쟁이를 만나게 되는 한스의 여행은 꼬마책 속에 등장하는 환상의 섬과 오버랩되며 그 명확한 경계를 흐리지만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놀라운 동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천사나 화성인처럼 비정상적인 존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그들에게 세상이 수수께끼로 보이지 않는 다른 데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 다르게 느끼고 있다. 나는 세상이 놀라운 꿈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꿈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고 있었다. p191


  이 환상의 세계가 52장의 카드가, 조커가 흐릿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선에서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갇힌, 익숙한 선에서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물론 그것을 질서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너머를, 본질을 본다면 더 깊은 깨달음과 더불어 더 넓은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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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 윤선아 옮김 / 강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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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짙어지는 글씨


  글을 읽고 작가에 대해 알고 나면 글의 내용이 달리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로서의 감성과 감각보다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낯선 작가를 아는 방식은 작품보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각인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프란츠 베르펠이란 작가는 단번에 ‘말러의 남편이야’가 되어 버렸다.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작가 역시 당대에 무척 시달렸던 모양이다. 워낙 알마 밀러의 사랑이 유명하다 보니, 아니 많은 예술가들을 사랑했기에 프란츠 베르펠 역시 그녀의 몇 번째 남자인가가 관심사였을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으로 이후 클림트, 코코쉬카, 건축가 그로피우스 둥 먾은 연인을 가진 여자로, 그래서 팜므파탈로 더욱 알려져 있다. 팜므파탈의 남편이 된 프란츠 베르펠에게 온갖 연인들을 뒤로 하고 프란츠 베르펠과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그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했을 것은 분명하다.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1936년 10월 아침, 레오니다스가 그날 받은 편지 한통으로 인해 안절부절하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부 차관이자 이제 오십인 레오니다스는 그 편지를 이십 여년 전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보내온 편지라 생각하지만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던 그때 자신은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는데 자신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자존감도 없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한다. 그가 자존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숙사 옆방의 유대인 친구에게서 받은 연미복 한 벌로 무도회를 가게 될 기회를 얻은 후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면서다. 그곳에서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를 얻은 후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 아멜리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멜리가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그와 결혼했던 만큼 자신의 성공길은 아내가 보장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옛 연인으로부터 한 청년의 후원을 부탁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직감을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은 거짓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아내의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달래기 위해 아내에게 편지를 보여주게 되고 다시 예측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베라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할 경우 아멜리가 터트릴 분노와 그녀의 복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멜리가 당장 이혼 소송을 제기할 거라는 사실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만만하게 누리고 즐기는 재산, 바로 이 재산의 상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p168


  한 남자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통. 그때부터 남자는 그것을 들킬까 두려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제 생을 돌아본다. 이 소설에서는 그 남자의 내밀한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남자의 생각과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만나 제 성공을 위해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버리고 성공길을 달리는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메뉴이긴 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 시대적 배경을 더하고 주인공의 성격이나 특징을 조금만 더하면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작가는 그렇게 몇가지 터치를 함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을 급선회하게끔 하며 독자에게 다른 생각거리들을 안겨준다. 주인공이 편지내용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편지를 받고 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고뇌한다. 햄릿이 살아온 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 바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주인공, 레오니다스라는 인물의 위선과 철저한 기회주의적 사고다. 그리고 주인공이 편지를 받은 1936년의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시대였다. 작가 역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것이 1938년이었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시대에 고급 관료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레오니다스가 나치 정권에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한나 아렌트식으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해야 할까…. 철저하고 당연하게 전형적인 기회주의식 사고와 실천에 앞장서는 레오니다스이기에 그가 18년 전에 결혼을 빙자한 외도를 일삼은 일은 그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내적 고민의 대사들이 구구절절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반성으로 이어지기보다 결국 그저 그런 결론으로 치닫기 위한 세밀함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지나치도록 세밀한 그의 내적 갈등을 따라가다 문득, 깨닫는다. 아, 레오니다스. 이 사람 자신, 유대인이라니…….


“용서라는 말……” 베라가 그의 물음을 실마리로 삼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상투적인 빈말에 지나지 않아요. 난 그 말을 싫어해요. 후회할 만한 일을 했다면 그건 각자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있을 뿐이에요.” p199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이 발화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한 문장의 말이 입으로 나올 땐 생각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지만 생각은 수많은 가지를 확산하더라도 막상 내뱉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일부를 그 사람의 모든 의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생각 속엔 보다 바람직한 생각들도 있고 타인을 위한 배려도 있고 잘못에 대한 반성의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스치듯 지나가게 하고 욕망의 돌출과 생의 편리가 그 생각들을 누르고 결과가 되고 마는 말로 나타난다. 어쩌면 말로 나올 것이 정해진 채로, 그 정해진 결을 향해 생각들이 전진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만.

  롤러코스터 같은 진지하고 세밀한 고민의 균열이 이루어내는 힘은 줄거리를 뛰어넘어 레오니다스에게, 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에 휘감겨진다. 우울한 회색빛이 조금 깔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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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의 시대에 그저 좋은 사람이란 될 수 없다


셀레스트 응.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줌파 라히리, 애완의 시대, 트라우마, 자기연민과 자기암시, 꿈, 가정, 피임…

  아이들은 순수한가?, 그래서 결국 리디아를 죽인 자는 누군가. 리디아는 어떻게 죽었나.

   책을 읽는 중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이다.


  “리디아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즈음이다. 1977년 리디아가 사망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핵심은 ‘누가, 왜, 리디아를 죽였는가’로 모아진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그저 좋은 사람>이 떠오른 건 미국의 이민자 가정의 두 남매의 분위기가 이 소설의 남매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언뜻 미국은 이민자 가정들이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소재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 소설마다 미국의 유수한 상들을 휩쓸고 미국 평단의 반응이 좋게 나타났다. 하긴, 평이 좋으니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이런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또다시 느끼는 건 그런 이민자의 이야기를 쓴 작가들은 역시, 이민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읽은 책에 한정해서이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거의 100%였던 듯하다.

  이 책의 작가 셀레스트 응 역시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셀레스트 응의 아버지는 나사 소속 연구원이고 어머니는 화학과 교수라는 점을 볼 때 미국사회에서 나름 안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른바 금수저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 가정이 전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 지식의 결여로 인한 소외감이나 무시는 비교적 덜했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가미된 이야기인 걸까. 소설의 주인공들은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그들의 세 아이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가정에서 둘째딸인 리디아가 어느날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생각난 것처럼, 이 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긴 했다만, 이 소설의 소재는 익숙하다. 당연하겠지만 이민자 가정이 겪는 문제,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문제란 왕따와 정체성의 고민이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익숙한 소재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비틀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어 간다. 아마도 6년 동안이나 이 소설을 수없이 수정한 것이 보다 유연하고 흥미있게 소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 힘은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로 시작되는 추리와 미스테리한 형식에서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분명 함께 범인을 찾는 이야기인가 싶어 각을 잡고 범인을 추리하자라고 할라치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는 갈등과 욕망.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


한번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란 20대 젊은이 중에 이유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느낌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한번도 자신을 탐색해보지 못한 채 성장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도, 동력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은 온갖 걱정과 무기력을 채워진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주어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려 애쓰지만 그 일 또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에 완전히 책임질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p70 <애완의 시대 중>


  <애완의 시대>가 생각난 것은 이 시대의 이 가정의 부모들에게서 베이비 부모 세대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들 모두에게서 애완을 보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고 길들여지는 이 애완을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이 가족에게 <애완의 시대>를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 피임도 절대적인 한 방법이다. 피임! 우리의 능력있고 강단있는 메릴린에게 필요한 것, 애초에. 자기결정권이란 말은 쉽다. 하지만 자기결정권의 궁극은, 최상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최상일 때 아닐까. 결코 상황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의 결정을 따르리라” “너의 결정이 최고의 방법이다”라고 말한들, 공허함이 돌 뿐.


황금빛 찬란한 바닐라 향이 나는 인생을 꿈꿨을 테지만 결국 딸은 떠나버리고, 연필로 밑줄 친 꿈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이 작고 슬프고 텅 빈 집에, 작고 슬프고 텅 빈 인생에 갇힌 파리 같았을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메릴린은 날카롭고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슬픈가? 아니, 화가 났다. 엄마의 인생이 발하는 그 보잘것없음에 맹렬하게 화가 났다. 이거야, 메릴린은 분노에 싸여, 요리책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엄마를 기억하려면 이게 필요해. 내가 간직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p120~121


  사망한 것은 리디아인데, 리디아만큼이나 가족 모두가 사망한 것이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한바퀴 돌고 나면 정말이지 막내 한나의 존재가 각인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순수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들과 ‘다른’ 것에 항상 거리를 두다 못해 ‘낙인’을 찍는데 앞장선다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순수하기에 순수한 놀림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행동들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정말로 아이들은 순수한가. 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에, 안타까움과 울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른은 그렇게 변해가는가. 그들의 사고는 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식을 변질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눈이 파랄 수 있지? 어쨌거나 중국인 아냐?”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엄마가 미국인이잖아.”

    “갈색 눈이 우성이라고 생각했는데.” p269


  우리는 누구나 ‘나’가 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의 ‘나’가 아니라 나의 나가.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누구’를 분리하여 말해질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사회에 가정에 있느냐가 전적인 지분을 가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으로 나를 휩쓴다. 그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아닐까. 그것은 마냥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맥락의 말. 중심과 가치를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땐, 웃지 않는 거야. 꼭 기억해야 해. p366

 적어도 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진 않는다고, 절대로. 적어도 난 두려워하진 않아.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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