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불편한가


 

  언제부턴가 기사를 읽고 나면 기사만큼이나 댓글을 확인하게 되었다. 얼핏 보게 된 댓글이 내 생각과 감정과 너무나 다를 땐 놀라서였고 같을 땐 반가워서였다. 그리고 재밌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단순하게 확인했던 이러한 댓글에 대한 의심들이 나도 모르게 생겨날 땐 나말고 이미 의심에 의심을 더해 확신까지 하는 이들이 있었고 물증을 채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순하게는 뻔히 보이는 홍보용 댓글들 때문에 알바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한나라의 정치문제에 이런 댓글 알바단이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이 놀라운 일은 여전히 법적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 댓글부대에 대한 관심 역시 높다. 역시 작가는 장강명. 기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에 더욱 기대게 하는 이 소설에서 어떤 단서를, 물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은 소설인데 여기에 실제 사건들의 윤곽을 알 수 있을까. <댓글부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댓글부대 조직이 어떻게 댓글로 사람들의 여론을 호도하는지에 대한 것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활발히 댓글들을 읽어 왔다면 또한 특정한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다면, 보아 왔다면, 이 소설 속에서 그러지는 패턴들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확실하냐’‘라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여전히 접어 둔 채, 왜 이런 댓글부대들의 활약에 휘둘리는가’에 치중된 이 소설을 보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한들 댓글부대의 활약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면 좀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들을 가지면서도 그 힘을 알고 있는 ‘이들’에 놀란다. 사실 2012년만 해도 SNS 등, 인터넷과 모바일 등의 매체를 통한 여론전엔 야당이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선거’라는 것은 ‘매체’라는 것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모든 문명의 기기는 그것의 용도만큼이나 이용자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도.


  어쨌든 댓글부대의 내용은 참으로 단순하다. 인터넷 여론 조작단 ‘팀-알렙’의 세 청년이 여론 조작을 위한 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상품평이나 유학 후기를 지어내며 댓글조작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합포회’라는 조직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이 들어온다. 바로 진보 사이트에 타격을 입혀 달라는 것이다. 팀-알렙 멤버 찻탓캇은 진보성향 일간지 ‘K신문’ 기자에게 온라인 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제보를 한다. 이 제보와 이들이 현실에서 벌이는 여론과 댓글조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 작업을 수행하는 팀-알렙의 세 청년들은 어떤 인물인가. 삼궁, 찻탓캇, 01査10은 사회 낙오자이다.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들이 ‘지잡대’ 출신이라거나 이거나 ‘어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비사회적인 병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베 유저들이고 그들에게 여자는 ‘김치녀’다. 그럼에도 이들은 댓글조작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안마방이나 유흥업소에서만 여자를 만난다. 이들은 치밀한 기획으로 이 일들을 이뤄낸다. 인터넷 세상은 넓고 게시판은 많다. 그들이 달아야 할 댓글들은 많고 가야 할 사이트는 많다. 그러나 이들이 먼저 타깃을 삼은 곳은 진보 성향을 띤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다. 그리고 10대들을 대상으로 이들을 세뇌하기 위한 ‘마케팅’을 벌인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사회적 낙오자이며 비틀리고 뒤틀린 이들이 벌이는 이 댓글조작의 세계는 한판의 심리게임과도 같은데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섬세한 심리의 세계에 통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몇 마디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혼란을 주어 잘 이끌어가는 한 까페를 파괴해낸다. 어떻게 치고 빠지는지 특정 사이트에 따라 어떤 말들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이들을 보면 놀라웁다. 이러한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활보했으면 더 큰 문제가 되었을까. 이런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며 배제시켜버리는 이 사회가 문제일까. 아무튼 이들의 탁월한 능력들에 인터넷 카페, 커뮤니티 세상은 ‘이성’을 잃고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팀-알렙의 세 명들은 일찌감치 사이트의 특성도 다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의 법칙이란다. 그러니까 여초 사이트의 유명한 사람은 ‘네임드’라 불리는데 이들은 남들보다 더 쿨하고 시크하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남을 알게 모르게 까 내리고 은근한 잘난 척을 하는 만큼 추종자와 워너비 외에 벼르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남초 사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게시판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댓글 달리면 좋아하는 심리 역시 자기가 인정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보기에 별 대단치 않은 글이 관심을 받게 되면 질투를 넘어 ‘이건 옳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그래서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글로 추천과 댓글을 받으면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 통달한 팀-알렙은 타이밍을 잘 알고 있노라고.

  이 책을 통해 댓글의 세계와 사이트의 세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저 무심히 넘겼던 인터넷 커뮤니티 내의 권력과 알력들에 대해서도 특정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는데 일반적인 것 이외에 필요한 절차가 있다는 것도. 단순한 정보공유 이외에 사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뭘 하고 사는지도. 한바탕 어지러운 인터넷 세상을 돌고 온 느낌인데 앞으로 인터넷 세상의 분란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나는 이성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을까. 하긴 커뮤니티를 하지 않으니까, 딱히 그들 조장에 휘말릴 일은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심각한 정치, 사회기사들의 댓글은 잘 가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모든 여론을 다 반영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잘 가려서 판단할 수 있을까.

 틸-알렙은 분란을 일으키는 법을 아는 만큼 휘둘리지 않는 법도 알고 있을까. 지금 한창 떠드는 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도 청와대 관계자의 아이디가 일베사이트에 있고 댓글을 올렸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댓글조작단이 특정 사이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수많은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는 사이트 운영에 정부가, 아니 정부 대리인인가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참담하다. 앞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뒤에서는 저런 손가락질로 자판을 두들기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라니. 그러한 사람들이 또 많다니, 사람들 얼굴에 ‘나 댓글쟁이요’ ‘나 **사이트 이용자요’라 표시되지 않으니 팀-알렙에게 요청하여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팀-알렙이 인터넷 커뮤니트에 분란을 조장하는데 쓰이는 말들 중 하나, “이거 나만 불편해요?” 이 댓글들을 제법 보았던 것 같다. 그냥 무심히 넘긴 적도 있고 ‘불편한 이유를 대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적도 있던 댓글. 욕설이 없는 지극히 정중한 내용임에도 기사와는 맥락이 다르거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글들이 튀어나올 때, 칭찬의 내용에도 “이건 알바다” “알바 꺼지세요” 라는 글들을 볼 때. 아니, 어떨 땐 댓글 하나하나 다 의심스러워질 때도 있다. 분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아닌데, 지금 이 세상 나만 너무 불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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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계나’는 어디에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p161    


   

한국이 싫다고 외치는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 여성의 호주 이민 성공기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왜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지를.

   헌법에는 행복추구권이 있으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적’과 ‘인종’으로 소속감을 강조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주인공 계나는 마침내 깨닫기를, 자신이 처음에야 그저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가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호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자신은 한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계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는 곳이다.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11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신이 지금까지 충분히 살았지만 한국과는 맞지 않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행복감과 연결된다. 계나가 느끼기에 한국은 정글 같은 곳이다. 자신은 까다롭긴 해도 정글 속에서 사자와 맞짱을 뜨는 것보다는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그 결심으로 인해 계나가 부딪치는 것은 부모의 반대,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물론이거니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다. 그럼에도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별 일을 겪는다. 어찌 보면 호주로 떠날 때 역시 계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호주에서의 생활에서도 ‘두려움’ 없는 미래가 보장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계나는 호주에서 쭈욱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한국이 싫었던 처음의 감정보다 더 적극적인 마음, 보다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이고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보다 호주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보다 재미없다. 책을 덮고 난 후의 첫느낌은 그랬다. 아니, 지금까지도 재밌지는 않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확 끌어안고픈 문장도 없고 구조나 스토리에서 놀라움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제목. 이 책의 제목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이들 열에 아홉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 한국이 싫다! 이 말은 ‘일하기 싫어’, ‘직장 다니기 싫어’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준다. 포괄적이고 아주 아프고 슬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싫다니.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나도 다 그런다. 이런,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정말, 정말 문제가 많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암흑, 구렁텅이에 홀로 있지 않다는 안도감은 더욱 큰 절망감과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이 책이 재미없는 이유는 ‘생각보다’라는 데 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 처절한 공감의 마음을 내용이 채워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보다 더욱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목만큼이나 보다 강렬하고 보다 확고하게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감정을 이끌어주길 바랬건만, 그냥 싱거운 간이 된 국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부분적으론 제목을 통해 사회비판을 국민들의 기분을 대변했다는 데 대해선 공감한다. 그러나 이 짧은 장편 소설을 순식간에 읽혀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하기보다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기서 통쾌라는 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말함이다. 스토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 보기에 왜 주인공은 지속적으로 어설픈 어퍼컷만을 날리는 느낌일까. 강력한 한방이 아니라.

  마치 대화를 하듯 지속적으로 혼자 내뱉는 주인공의 말은 친한 친구가 내게 하는 이야기, 토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 지점이 그래서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불편하게’ ‘통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왜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대화 형식으로 하기엔 여성이 훨씬 나을 듯해보였을 지 모르겠다. 대화, 혹은 수다는 ‘여성’에게 좀더 부각된 이미지이니까. 그래서 분위기는 읽히나 한국 사회에서의 20대 후반의 여성이 가지는 고민과 부딪치는 현실문제가 좀더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책 제목이 가지는 무게감에 비해서 내용이 조금 가벼이 여겨지는 탓에 된장녀의 이미지가 조금 드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20대의 보편적 고민과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처절함이나 치열함이 덜 느껴지는 것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이 싫은 이유에 대한 보편적이고 문제 비판적인 흐름에서 계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과 선택으로 이어져서일까. 한국이 싫다는 데 대한 생각은 비슷할 수 있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난 전자에 더해져 보다 비판적 시각을 원했나보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수많은 “한국의 계나”로 보이지 않고 특정한 “계나”만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내겐 제목만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계나를 지지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계나 이상의 계나를 생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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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 체한 여자


  

   이 책은 대표적인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페미니즘 테제’에 대해 다룬다. 이들을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이들 여덟 명의 작가이자 사상가들이 당대 사회에서 펼친 페미니즘 논쟁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외쳤던 시몬 드 보부아르, 남녀의 성적 차이를 주목한 뤼스 이리가레, 페미니즘에 관해 과학적 시선을 도입한 샌드라 하딩, 페미니즘적 도덕심리 이론을 주장한 캐롤 길리건, 여성적 글쓰기를 제기한 엘렌 식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로서 페미니즘적 차이의 정치를 옹호한 아이리스 영,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며 ‘퀴어’이론으로까지 확장시킨 주디스 버틀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 담론을 제기한 줄리 그레이엄과 캐서린 깁슨.

  우리나라 여덟명의 학자와 교수들이 이들 페미니스트이자 사상가들 주장의 핵심과 문제, 비판, 대안을 이들 생애와 더불어 기술한 책이다. 이론이란 어떻게든 쉽게 이해하려 해도 지끈거리는데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들 사상의 문제점과 다른 이들의 비판, 그리고 대안을 잘 설명하고 여러 생각거리를 잘 짚어주고 있다.

  결국 이 모든 핵심 테제들은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이다. 이들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치열한 논쟁으로 젠더 논쟁이 더 활발하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들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주요한 논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뛰어넘어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노력, 성적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과 생각들이 이들이 이러한 테제를 생각하게끔 했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논쟁.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없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논의가 전개되고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존재’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당혹, 분노, 좌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항해케 하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중구난방 확장되는 이야기 중에 제법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쉽게 건너뛰지 못하고 시선이 머무름은 일차적으로 내 탓이긴 하지만 본질과는 다른 접근에 내 분노의 수위가 분산된다. 더 힘을 쏟고 모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난제 앞에서 누군가 자꾸 문제를 희석시키는지. 이와중에도 어의없는 편가르기와 ‘어그로짓’에 재미들려 걸신들린 듯 하는 이들의 행태가 여당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저질러 놓은 일이 하루하루 흘러 넘쳐 폭발할 지경에 이른 2016년 현재, 분명 지금 한국인의 관심은 대통령과 최순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사건이 폭발한 시점부터 여러 날이 지나 감각에 무뎌질 때도 됐을지 모른다. 어디까지 해쳐 먹었니라고 할 건들은 반복적으로 종류만 다르게 해서 나타날 것이고 불통, 악랄함, 공감능력 결여를 넘어 무능과 멍청이, 칠푼이, 꼭두각시 대통령의 이야기는 더욱 축적되어 가고 알면서도 모른체한 인간들에게 또 속아 저런 것들에게 정권을 맡겨 아름답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한 반푼이 국민이 된 상처가 결코 아물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이 판국에.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이 설쳐서라니! 그래서 앞으로는 여자 대통령은 뽑아서는 안된다라니! 역시 여자는 안된다라니! 정권에 아부하고 또는 조종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이권에 매달린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유독 특정한 ‘여성’ 정치인들만을 골라 잡아 여자라서 저 모양이고 여성가족부가 문제라는 말이 기승전-결로 이어질까. 대단하게도 이 세계를 뒤흔들고 말아먹는 역할을 담당한 건 남자들이었음에도 특정한 몇몇의 ‘악녀’들을 선정해 잘 굴러가는 나라와 남자를 망하게 했다는 오물은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명백히 남성과 여성의 성차이는 있다.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이 고정된 이미지와 성차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되어왔으며 차별이 아닌 차이, 다름으로 인정하자고 흘러 왔다. 이 차이는 다름이지 능력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힘’의 사회에서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공감’의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는 분야가 자본주의 사회에 더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서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였나? 애당초 ‘여성’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딸’에 더 방점을 둔 선택이었고 호도였다. 아마도 아들이었으면 추종세력들에겐 더 좋았을 것이다.

  지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는 그 자신이 가진 성별 특성의 능력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무성적 존재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혼이기에 여성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기대한 바 없었다. 만약 그녀가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미혼이라는 점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장애로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 한국사회는 ‘미혼 여성’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더 정확한 말로 아직 ‘애’라고 생각하는 나라니까. 남자의 보살핌 속에서 그 역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니까. 그랬던 시절이 뻔한데 왜 새삼 ‘여자’란 탓을 하는가. 애당초 여자란 것을 알았음에도 ‘모른 체’ 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듯 ‘여성’임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기다가 왜 ‘여성’이라고 화를 내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켰으면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일들이 설명된다는 듯한 말과 비아냥에 오히려 그동안 대통령이 저지른 짓이 묻힐까 안타까울 정도다.

  먼 나라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는 시점이니까. 하지만 국정수행을 잘못했을 경우 나올 말은 여전히 ‘여자’라서 안 된다에서 ‘역시 여자라서 그것밖에’ ‘여자는 안돼’라는 말일 것이다. 국정수행을 잘못한 무수한 남성 대통령에게 ‘오, 남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여성 전체로 매도하는 이 습관적 여성 차별은 뼛속 깊이 DNA에 박혀 있는 것일까,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것일까.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지금의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똑같은 이야기가 몇백년, 몇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이란 주제 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끔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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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하고 정책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일찍이 이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고 외쳤던 스테판 에셀이 생각난다. 앞장서서 “분노”의 실천을 했고 그리고 “분노만으로는 안된다”며 대안을 제시했던 사상가의 목소리가 앞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내 온 몸에 깃든 이 분노의 메시지를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흘리고 있을 때면 이내 핀잔을 듣곤 했다. 가끔은 그러한 반응에 더욱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정치’라는 게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취향의 문제를 떠나 ‘금기’가 되는 것을 수없이 겪었다. 취향의 문제이거나 혹은 성격의 문제로 취급당한 정치이야기는 한편으론 ‘시비거는’의 단어와도 동일했다. 어느 틈에 ‘정치’라는 이야기가 이런 다양한 단어를 함축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정치이야기는 곧 박근혜 비판으로 인식되는 현장은 세대가 다를 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세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말로 취향의 공동체 속에 진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자리에서나 정치 이야기는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할 듯도 하다. 그 이야기의 정점은 대통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정치이야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불편한 것이었을까.

  정치는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안녕을 위한 이야기라고 누누이 변명, 해명, 증명, 반박해야 하는 일은 참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정치는 정책이며 제대로 된 ‘정책’에 대한 나의 욕구가 분노조절장애자로 성격이상자로 낙인찍히는 상황에서 차라리 속시원히 “그래 나 성격 더럽다!”라고 외쳤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 내가 잘못했다. 더 열내지 못한 것도 지친 것도.


 우리가 세계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대다수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운명론자가 된다. 모든 희망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세계와 유럽에 종속됨으로써 빚어지는 해악을 인식하는 혹자들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 즉 우리 프랑스를 탈세계화하고 탈유럽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면했다고 여기는 종속보다 고립과 폐쇄가 더 큰 해악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


  무력감. 체념. 오래도록 뼈에 깊이 새겨진 단어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떠들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라며 자기계발에나 힘쓰라던 사람들 속에서 떠들기만 하는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이제 와서 후회가. 더 실컷 떠들 것을.


  사회에서 인간은 “정책”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담배값 인상 정책이 미치는 영향만 해도 정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니 정책은 정치와도 같다. 이것을 아는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결정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선 특정한 이익집단이 주무르는 정책들이 횡행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닥뜨리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라 외쳤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또한 포기하지 말라고도 했다. 연대, 연대, 연대! 그의 외침에 동감한 많은 이들이 나서서 분노했고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노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역시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정치를 사랑하기 위한 13가지 제안을 한다. 웰리빙정책, 불평등문제, 교육, 실업, 소비정책, 청소년정책, 문화예술 등등 필요한 개혁과 문제들을 규명하고 해야 할 이루어야 할 정책들에 대해 제시한다. 특히 웰리빙 정책은 “양과 타산과 소유의 헤게모니에 맞서 우리는 대규모의 삶의 질 정책”으로 물질적 측면이 좀더 부각되는 웰빙과는 다르다. 그의 제안들은 물론 유럽이라는 사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이라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소소한 것들 모두 우리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이끌어낸 온갖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제 우리 역시 “정책”에 대해 다시 환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삶을 이끌 정책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여기, 스테판 에셀이 제안하는 정책들과 그것에 대한 메시지가 방향을 일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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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날의 드로잉


  

 

  가을, 바람이 쌀쌀해져서인지 춥다는 생각과 함께 떠올린 것이 실비아 플라스다. 글쎄. 그것이 너무나도 추운 날, 무섭고 매섭게 추운 날 죽은 것과 연관이 있을까. 실비아 플라스의 글보다도 그녀의 생애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찌라시에 관심갖는 모양새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남편이라 불리는 사람과 남편의 연인의 죽은 방법까지가 더해진. 그렇지만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뇌리에 각인되어 떠나지지가 않았다.

  죽음이란 언제나 누구의 일이든 안타까운 일이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른 죽음에 대해선 더 아쉬워한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그녀가 가진 재능이 너무 탁월했기에 그 재능을 더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고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더구나 어쩌면 당연 피할 수도 있었을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 마음이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일 게다. 어린 날부터의 자살시도와 고독, 남편과의 별거, 아이를 둔 상황에서의 극단적인 자살이란 방식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잠시 내리고 강렬하게 보이게 하지만 그 놀라움에 적응이 되고 난 후엔 그녀가 가진 재능에 대한 놀라움에 빠진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그녀의 재능 중에 한가지 그림, 미술이 얹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줄곧 그녀는 시인이었으니까. 작가였으니까. 이 책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린 드로잉 46점과 편지글과 일기가 엮인 책이다. 얇은 분량의 이 책은 1956년도의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1956년은 그녀가 남편 테드 휴스와 결혼한 시기였고 그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한 때다. 그때 그린 그림들이다.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난 테드와 비밀리에 한 결혼이다. 결혼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까 불안을 가지면서도 결혼했고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그녀가 그려낸 그림들은, 펜과 잉크로 그려낸 드로잉들.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녀는 그렇게 무언가를 그리고 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잘 그린 그림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를 때엔 사실적인 그림, 실물과 같은 그림을 보면 ‘오우, 잘 그렸다’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젠 사실적인 그림에 대해서만 잘 그렸다라고 하진 않는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좋다” “잘 그렸다”라는 말이 나오는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 있다. 그런 그림은 그러니까 감성을 건드리는 거라고 보면 될까.

  아주 뛰어난 화가라는 생각은 들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림도 잘 그리네라는 생각을 하기엔 충분했고 그림을 그릴 때의 그녀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가 궁금했다.


테드와 이곳저곳 다녔는데 내가 펜과 잉크로 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테드는 옆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때로는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어. 내가 그림 그리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좋대. 내 그림도 좋아하고. 내가 펜을 움켜잡고 재빨리 스케치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데. 베니돔에서 그린 그림, 보고 싶겠지만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 생애 최고의 걸작들이야. p47


  정말로 그녀가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을 누린 시기가 있었을까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보건대 마냥 의심하며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1956년 이후야 어쨌든. 프랑스에서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림을 그릴 때의 정경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림들과 몇 편 남긴 편지들로만 보면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림에 대해 만족하고 확신에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제 막 결혼한 그녀에겐 가장 행복이 충만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시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드로잉집은 시와 다른 그녀의 감성을 볼 수 있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원천을 ‘그림’이라고 했다.


1958년 3월 22일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는 열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예술적 원천을 찾았어. 바로 그림이야. 앙리 루소나 고갱, 파울 클레, 데 키리코처럼 원초적 기운이 넘치는 작가들. (매주 청강하는 ‘현대미술사’ 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하는 대로) 미술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름다운 책들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어. 일 년 동안 간헐 온천수를 병에 꼭꼭 담아놓았던 것처럼 참신한 생각과 영감이 마구 샘솟고 있어.” p10


  소소한 것들에도 영감을 가지며 그림을 그리던 실비아 플라스. 그 행복한 때의 기억들과 예술적 열정을 기록했던 그녀의 생애의 한순간을 보면서 죽음 때문에 각인되었던 회색빛 이미지로만 그녀 전체를 덮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그녀는 행복을 느끼며 이처럼 더많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더 많은, 더 좋은 시들을 그림들을 소설들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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