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12.6=2016.5.17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9-30.


  몇 년 전 찰나 언니가 여성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른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했다. 201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은 있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고 나서야 그때, 찰나 언니가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공허하게 외치다가 어느 결엔가 묻혀버렸을 내 조상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한 그들이 원했을, 여전히 한탄스럽지만 제법 나아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후세에게 금세 부정당할 이는 결국 누구인가? p145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여성운동사의 계보를 이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그러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의 변화와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다.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알려 하지 않거나, 무심했던 사건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작업이고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인물, 이태영 변호사. 함께 일한 스승인 유명한 임신 전문 한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부 아들 낳는 처방만 바라는 것을 보고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를 비판하며 호주제 폐지제를 위해 애쓴 고은광순 한의사. 강간과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에 씌어진 모멸적이고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도록 노력했던 이들과 피해자들. 이들의 지난한 희생과 노력으로 변화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법률도 있고 그렇기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또한 있다.

 계보를 살펴보면 느끼듯이 단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한 무수한 피해자가 있었다. 그 피해의 터 위에서, 더 이상 피해를 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간과 세월들이었다.

  

이번 살인 사건에서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지 여성을 일부러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다. 또한 살인범도 사회구조의 희생자였고 정신병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p140 


  위 단락은 작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논평이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똑같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나왔던 말과 너무나 똑같다. 이 말은 1989년에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당시에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사건은 1989년 12월 6일 캐나다 공과대학에서 여학생들만을 강의실로 몰아넣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 한다” 27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여전히 캐나다 시민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도 이 사건 이후의 파장은 거셌다. 총기규제 검토뿐만 아니라 여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규정하기 꺼리던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 바로 위 단락과 같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후 일단, “절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했다. 무엇이 그토록 강남역 사건이 “절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묻지마 범죄”이고 그저 “정신병자의 실수”라는 주장이 단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형태로 규정되어 쾅쾅쾅 도장받듯이, 그러니 끝났다는 듯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특정 단체, 정부, 언론 등을 통해 사건의 본질 규정과 이로 인해 벌어진 분위기에 대한 타당하고 명확한 추론과 분석은 차치하고 그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결론”냈으니 더 이상 그 말은 말라는 듯한 분위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여성혐오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토록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한다는 성마른 논평과 주장들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비단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주목한다. 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여성문제에 관한 한 같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차별에 관해 개혁적이고 차별이 덜하다는 나라들, 그냥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조차도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개별 사안에 대해 먼저 관련 법개정을 이루거나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변화를 이루었다 뿐이다.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싶다가도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라야 그 일을 다르게, 바르게 볼 시선과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은 어찌 이토록 시공간을 초월해 같을까.

  그러한 ‘사건’ 속에 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사건’을 통해 잘못된 점에 대해 온갖 모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계보가 아직 더 있으리라 본다. 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과 전작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아쉬운 점이라면 이야기를 담는 형식에 대한 것이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돋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생각할 때 교정과 편집에도 신경을 쓴다면 좀더 내용을 충실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쭉날쭉한 글자크기, 의미없이 느껴지는 문장정렬 등이 사실 지나치게 급하게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특히 이런 주제의 책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가지고 보는 독자들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올 다음의 책들은 조금 더 짜임새 있는 편집형태로 책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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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016.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취임식이 있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기사와 더불어 영부인에 관한 기사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77년생 최연소 대통령의 24세 연상 53년생 부인이기에 브리짓 트로뉴에 대한 시선은 여느 영부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넘어섰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세일 때부터 서로 알아온 그들의 관계는 2007년 결혼으로 더욱 단단하게 묶여졌다. 마크롱 부인은 최근 조롱과 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이전의 대통령 역시도 부인과는 20세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 때엔 별말없던 언론들도 공격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도 부인과 나이차가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 부인을 둔 트럼프의 능력을 치하하던 이들은,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마크롱 부인을 공격한다. 하나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또다른 하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여성혐오의 행태가 소멸되는 의식수준은 언제쯤 오려나. 한편,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가정하면, 선거과정에서의 무차별적 공격의 소리들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얘기가 길어졌다. 「대니」를 보면서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크롱 부인의 자녀들은 마크롱을 “대디”라 부른다니 호칭도 유사하다. 대니는  24세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다. 아기를 돌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렇게 되어 있는 대니는 자신과 같이 아이를 돌보는 예순아홉살의 할머니를 만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마치 마크롱처럼 대니는 할머니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를 시작한다. 친절과 배려를 가득 담은 채. “아름다워요.”라고 말한 것은 시작이었다.  

  대니에겐 할머니의 손주를 돌보는 일은 “견디어 내는 것”으로 보였다. 슬개골연골연화증으로 늘 통증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딸과 사위는 떠맡기듯 제 아이를 보내며 할머니의 힘듦을 외면하고 있었다. 땀흘리며 힘들어 하며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할머니의 외침은보육이 특정한 누군가의 ‘희생’의 몫임을 보여준다. 그런 할머니를 향한 대니의 친절과 연민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까. 멈출 수 없는 감정들로 손을 뻗어가는 할머니의 마음 역시도.


나는 수도 없이 대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짓 단호한 척, 명령하는 어조를 골랐던 나를 후회하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내 늙음을 부끄러워하고, 내게는 없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덩굴손처럼 집요하게 마음을 휘감고 뻗어가는 것에 당황했으나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p45~46


  사십년이 지나도 할머니와 얘기한 것을 기억하길 원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 말하는 이 스물 네 살의 안드로이드에게 필요한 것은 할머니의 농담과 진담 섞인 말에서 튀어나온 ‘돈’. 끝을 짐작케 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단어가 둘 사이에 놓여 둘의 나이차보다, 안드로이드와 사람이라는 차이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사십년이 지나서도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갖겠다던 대니는 사라져갔고, 혼자만 안고 있는 사실에 기대어 할머니는 남은 나날을 견디어 간다.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p47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어릴적 “공상과학글짓기”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는 기분이다. 명징한 SF라 하기엔 부족한듯하면서도 딱히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색한 이 소설속 세계는 현실과 잘 버무려진 SF 세계다. 세련되고 풍족한 물질의 세계, 자동화 시스템이 펼치는 찬란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공상과학에서 기대한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이다. 여전히 그 세계는 비루하고 비참하다. 그럼에도, 그래서, 관계맺음은 이어지고 단절되고 기억된다.

 「쿤의 여행」과 「루카」처럼 문학상을 받은 대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제 몸을 지배하는 쿤을 떼어내고 새롭게 세상을 마주할 힘을 얻은 「쿤의 여행」속의 나처럼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자신의 그림자같은 힘을 지닌 또다른 존재나 기계를 짊어지고 있거나 마주하고 있다. 「러브 레플리카」의 경 역시도 그러하다 생각된다. 이 소설 속에서 공상과학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배경 속 인물이지만 경과 거식증 이연의 관계에서도 이 모습이 보인다. 결국 ‘경’은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실물을 얹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제게 붙은 이 복제품의 실물을 떨쳐내려 한다면, ‘경’만은 실물로서의 복제품이 아닌 타인의 삶을 복제하고 있을 뿐.

  작가가 그리는 이 소설의 세계. SF의 세계. 미지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도 결국은 현실세계의 복제품이다. 잠시 외형이 변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같을까 싶을 정도의 현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감정 역시도 다를 리 없다. 관계들에서 오는 슬프고 아릿한 이 감정의 흔적은, 기억은 그 어느 물적 토대 위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어떤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은 백 년 전의 어떤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통을 느끼며 통속적인 삶에 매달려간다. 모멸감으로 말하자면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을 흘러다니던 종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로워지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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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웁게 훌쩍

 

여행자의 인문학-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이서현 (사진), 다산3.0 | 2016-01-25.

 

    이런 여행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잠깐, 이런 여행? 아니 이런 장소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생각했지만 준비부족이랄까, 딱히 인문학적인 여행은 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기인 연휴에 끼어 부랴부랴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강렬한 인상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황금연휴기간답게 공항 인파는 많았고 비행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당연 소란스러웠고 선반에 짐을 싣는 소리들이 굉장했다. 가만, 이제 여행의 출발인데 짐을 싣는 소리라니. 부스럭 부스럭. 비행기를 꽉 채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의 손엔 면세점 쇼핑백이 한가득 했다. 선반 위로 올라가는 짐은 이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면세품이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랐는데, 마치 면세품을 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휴식이라면 여행지에서 만큼은 편안함을 즐겨야 하는데 인문학을 붙들고 있느냐 하겠지만 저자의 여행만큼 편안해 보이는 휴식은 없어 보인다. 장소가 주는 마음의 편안함일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고즈넉함과 여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누그러지는 그런 느낌들 말이다. 문학속에서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상상의 나래와 비교하는 맛 또한 추가되니 일석이조다. 저자는 그런 여행의 기록을 담아 <여행자의 인문학>을 썼다.

   예술가들과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는 유럽의 스무 곳. 저자는 가는 곳에서 그들을 떠올리고, 아니 그들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다. 이미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조성해 놓은 곳도 있고 유달리 한국인의 방문이 잦다는 곳도 있다. 어쨌든 낯선 곳임에도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 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 기분은 좀 더 들뜨게 되는 모양이다.

 

고원에는 히스꽃과 잡초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입니다.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못다 한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도 벌판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p15~18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마저도 인상적이니만큼 어쩌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베아트릭스 포터의 유언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에 대한 욕구일지도.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의 생가나 문학관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고 미흡해 보인다. 각 지자체의 관광 사업 수단쯤 여기는 행태도 보이고 그저 보여주기식으로만 건립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경외나 배려가 찾아보기 힘든 성장에 급급한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다. 하긴 예술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나라이니만큼 뭘 기대하겠는가.

 

우리가 근대화한다며 모든 걸 싹 밀어버릴 때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걷던 워더링 하이츠 가는 길 돌담에 이끼가 낄 때까지 기다렸으며, 우리가 눈 돌리면 잊는 사이버 잡담에 한눈팔 때 종이신문을 들췄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셜록 홈스와 스크루지와 햄릿과 피터 래빗과 해리 포터다. p58

 

  책 한 권에 스무 곳의 여행지를 돌아보고 관련 지역의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들 에피소드, 감상들을 엮으니만큼 각 지역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개 정도로 짧다. 조금 가볍게 예술가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정도랄까. 그 감상에 더해 작가나 지역에 대한 매력과 궁금함이 일면 더 깊이 그곳에 대해, 예술가들에 대해 알이 위해 다른 책을 들척여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술기행으로서 가벼운 산책정도의 느낌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긴 연휴가 끝났는데도 사방 벽들을 보며 벌써부터 너른 들판이 그리워진다.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휴식이 필요한 나날인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휴식을 맞이하지도 불편한 일상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나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원적인 분노와 답답함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가벼웁게 살짝. 그동안 눌렸던 답답함을 조금은 버려도 좋으려나. 


나의 날들을 줄곧 따라다니는 저 샘물 소리. 샘들은 햇빛 밝은 맑은 들판을 거쳐 와 내 주위에서 흐른다. 이윽고 내게 더 가까운 곳으로 와서 흐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내 안에 갖게 되리라. 마음속의 그 샘, 그 샘물소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함께 흐르리라. 그것은 망각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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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누운 배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저, 한겨레 출판, 2016.07.14.

 

   배가 누웠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얼핏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리뷰를 본 것 같았는데, 커다란 배가 기울어졌다는 것 외에 세월호 사건을 연관짓자면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제 이익과 이해에 따라 결정되고 중구난방이라는 점일 것이다.

   단지 급박한 시간에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해봤지만 이 소설은 한겨레수상이라는 기대만큼의 충족을 주진 않았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경영혁신 사례집으로 유용하다, 라는 것.

   회사의 이야기다. 직장인이라면 공감갈 직장의 업무처리 과정의 수직관계, 상사와의 관계가 누운 배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직장생활의 단면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라고 볼 수밖에. 일의 처리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고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예상 가능한 바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어느 회사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라는 대꾸가 바로 튀어나갈. 그러니 당연히 어느 회사나 똑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심사위원은 이 소설을 ‘미학’이 아닌 ‘사실’ 소설이라 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소설이 사실을 아닌 것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은 압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수필과 어떻게 다른가, 수기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미학이 배제된 소설이 아니라서, ‘혁신’적이라 말하고픈 건가.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거소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잔망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74~75

 

   혁신. 혁신. IMF 이후에 기업은 이 혁신을 부르짖었지만, 혁신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기업을 나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 속 회사에 닥친 ‘위기’를 혁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위의 문구처럼 하나같이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의 정확한 개념도 성립되지 않은 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은 항상, 말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지난 정권도 혁신을 부르짖었고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태의연함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말의 난무는 허무함을 끌어올린다.

   <누운 배>는 화자가 일하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갑자기 쓰러진 배를 가리킨다. 배는 똑바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이기에 옆으로 누운 배는 일으켜 세움이 마땅하다.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선 무수한 대책회의가 필요하고 담당자의 문책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극대화하는 것인 ‘이기심’이다. 내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의 이익보다 선행한다. 다른 말로 대체하자면 이 이익과 이기를 모든 모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와 계급구조의 모순들. 배는 쓰러졌고 배가 쓰러졌음이 타당한 문서로 성립하는 과정은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책임회피와 보험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최종적으로 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알리는데 일조한다. 도장 쾅. 원인과는 상관없는, 배제된 서류의 낙인이 배의 상태를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누운 배를 세우기 위한 회장의 한마디로 모든 직원들은 전전긍긍 배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겨를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고철같은 배는 세워져야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세우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125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표피에만 머무르며 영혼없는 일터를 오간다. 수직적인 기업의 문화가 기업이익에만 매몰하는 행태가 그러한 직원들을 양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혁신은 멀고, 혁신 역시도 표피에만 머무른다. 이런 생활이 반복될 때 일하는 인간은 단지 일을 하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출근하고 월말이면 급여를 받지만, 자기성취와 행복감은 알지 못한 채 ‘요령’만을 파악하게끔 하는 기업문화. 그런 구조는 대한민국의 기업의 당연한 문화로 너무나 오래 자리잡았다.

   화자가 맞닥뜨린 일은 <누운 배>에 대한 처리과정이지만 작가는 누운 것은 배만이 아님을 말한다. 일방적으로 매몰되고 마는 기업 속의 개인들. 천편일률적인 기업 조직 속에서 또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면서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똑같이 되어가는 것에 안도를 할지 모를. 여기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질문보다 가장 앞서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썪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다 그렇게 산다고들 말하지만 다 그렇게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p306

 

직  장인의 삶이란 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이긴 하다. 이상을 쫓자면 놓쳐버릴 현실에 울고 현실을 쫓자면 놓쳐버릴 이상에 운다. 어떡하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다음에는 어느덧 회사에서 내쫓겨버릴 상태에 처할 뿐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느끼지만, 깨달음은 결정은 한순간일지 모른다. 어디에 발을 더 두느냐에 따라서 여전히 누운 배로 머물 수가 있다. 썩고 썩고 썩은 채 누워 있는 배가.

   소설 속 문대리처럼 사람들은, 개인은 이렇게 조직을 벗어나고 또다른 조직에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더 나은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개인은 끊임없이 누운 채로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런 발버둥이 무색하게 희망과 선택과 결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같은 조직들 속이라면야 얼마나 허무한가. 누운 배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이 무수한 개인들 면면의 노력만큼이라도 커다란 시스템이 얼른 누워있지 않은 채로 탁 버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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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왜!


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문학사상


  비가 오는 날 어느 절간 처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는 게, 잠을 재워줄 소리로 느껴진다. 풍경소리. 풍경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 풍경소리에서 느껴지는 조근조근한 조용함이지 않을까. 이러한 풍경을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때,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풍경소리인양 대체하며 하늘을 처마인듯 쳐다보며 이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라고 하니, 풍경소리의 한 문장처럼 나도 어딘지 머쓱.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촛불이 좋아요. 네. p13


  시작부터 한 구절에 눈이 꽂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마냥 차분한 듯도 들뜬 듯도 한 이 기분, 종잡을 수 없는 복합적 상태로 책을 읽고 있겠다 했지만, 집중이 될까 말까 한 생각이었는데 <풍경소리>가 주는 차분함에 어느새 긴장의 마음 틈들이 메워져가는 듯했다.

  왜 번뇌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로 들어가는지. 깊숙하고 깊숙하고 조용한 어느 곳, 그곳으로. 갈수록 믿고 의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종교 자체가 내뿜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의탁해 힘을 내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의지인가. 어쨌든, ‘묘음’을 들려주는 이 <풍경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30년 내공의 작가가 가진 힘이라면 마냥 젊은 작가의 동질의 언어에만 반가워하지 않고 이들의 언어의 맛을 계속 느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인생살이의 삶의 언어를 터득한 세대들의 목소리라면 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대 단절의 소리는, ‘왜’라고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일까? 너는, 너희는, 당신은,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는 건대요?

  

   왜라고 묻고 싶을 땐……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군.

   예?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 이요?

   그래요.

   그렇군이라고 말한다고요?

   그래요.


 성불사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만 여기, 이 대한민국의 현실의 삶은 성불사가 아니므로 나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왜, 왜, 왜!라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해할 성질이 아니기에.

 성불사에 온 듯 갑작스럽게 “그렇군”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풍경소리>에 취해 갑자기 전환할 수 없음을 안다. ‘머쓱’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쩌면 그때는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이 오면,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오면, 오히려 왜라는 질문보다 “그렇군”이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 역시 여기는 살만한 데가 못되는군.”


  달라지고 싶어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러 가는 미와의 성불사에서 머문 날의 이야기는 ‘달라지고 싶다’는 미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도 같지만 ‘묘음’이 이끌어들인 짧은 여행같기만 하다. 소설인듯 아닌듯 끄적거리는 미와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글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도 증폭된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떨림이 눈가로 스칠듯 말듯. 경건함을 밑바탕에 두고 담백함의 밀도가 꽉 찬 이 느낌이 성불사로 당장 달려가고프게 이끈다.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묘한 근원의 소리를 알아가는, 깨쳐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또한 반복된 소리에 미칠듯한 심경 또한 자신의 탓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수한 소리들 속 특정한 소리의 강박과 집착에 묶여 있다. 단순한 욕망이라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는 그런 소리타래들에서 벗어나고픈, 달라지고픈 우리의 마음은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면 정화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성불사의 밤은 각자의 방에서 잠든 그들을 달빛과 함께 꼭꼭 품었다. 객실의 미와도 촛불을 끄고 잠든 지 오래. 나만 깨어 그들을 굽어보지만 나는 원래 잠을 모르는 터라 깨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 사물이 딱 정지해 고요하고 적막해도 모든 소리의 연원인 나마저 잠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p79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보면 한없이 불편해진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든 업무적인 상황에서든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시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듯 성불사에서는, 아니 어느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저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에 대한 욕구가 솟아나는 걸까. 태양은 어느 곳이나 뜬다는 말을 진리라 친다면 태양은 어느 곳에나 같은 빛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리다. 어느 곳에든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시선에게 왜 그림자를 지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일 게다. 왜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란 물음을. 무언가 정의롭지 않다는 물음을. 한동안 돌려져 있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그런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시선은 동일했다는 것에 조금의 위안을, 언제나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것에 격한 안도와 변화의 의지를 다지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며 결국 ‘내’가 행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도 된다. 그렇더래도 오늘의 이 <풍경소리>는 한동안 지속되어 마음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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