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우박이 쏟아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우박을 보리라 생각지 못했다. 바람이 먼저 불기 시작했고 머리 위로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여느 때와 다른 비라고 느낀 건, 아니 비가 오는 게 맞는 건가 한 건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때문이었다. 바닥을 적시는 빗방울의 밀도가 너무 넓었다. 소리에 비해 바닥을 적시는 물기가 없던 탓이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닥 한번 쳐다보는데 이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을 튕기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알갱이들이 눈에 띄었다. 차에도 떨어지는데 속도 없이 넋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을 보니 삼십여분쯤 지난 것 같은데, 잔상이 길었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42, 한강, 눈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때, 시간 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현실상황은 잊고 마냥 넋을 놓고 있던 그 시간은 좋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야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였다. 사람에게로 떨어지진 않았나, 농작물엔 피해가지 않았나, 내 차는 멀쩡한가…. 그러고 보면 고통을 잊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 후보작들에도 눈이 간다. 여러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작품 하나 하나 깊은 울림을 준다. 각각이 다른 작가이며 다른 주제와 소재인 단편들인데도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것은 고통 아닐까.


내가 여기를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p408, 황정은, 웃는 남자.


  우리 모두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품고, 고통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결코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으면 고통의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삶. 김애란의 <입동>에서처럼 소소한 일상을 살며 그에 맞는 소탈한 행복을 꿈꾸었을 뿐인데 그냥 열심히 살아갔을 뿐인데 한낮에 쏟아져 내린 우박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그런 상처를 입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 나 혼자 만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가 있음으로 행복하다 싶지만 위험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함께 하는 이가 아니라 습관처럼 붙잡고 마는 가방처럼 그 ‘열심히’조차 패턴화되어 있기도 한 삶.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시켜 버리게 되는 그런 삶도.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p407, 황정은, 웃는 남자.


  그리하여 고통tm런 <어제의 일들>은 통째로 잊어버려 버리거나, 지치고 힘들어 억울하다, 억울하다 외치다 마침내 누구도 아닌 이에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괴로워하는 삶.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하는가? - 287,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거고. - p184, 권여선, 이모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꽁꽁 숨어도 보고 타인의 손바닥에 담배를 지지기도 하며 맘 속의 화를 발화해 그 추동으로 잘 살아갈 듯도 하지만. 딱히….   상품처럼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거나, 그저 ‘임시’로 순간에 머무르는 삶으로 머물고 만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p169 , 권여선, 이모


  그래서 이 고통은 기억하는 삶이어야 할지, 기억하지 않는 삶이어야 할 지 모르겠다. 조해진의 <사물의 작별>에서처럼 내가 준 고통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도 잊지 않고 사과해야 하며 타인이 내게 준 고통은 <어제의 일들>처럼 잊어버리는 게 좋은 걸까.

  하지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처럼 어떤 일들에 대해선 그 고통의 밖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가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서로가 행복을 꿈꾸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일진대, 마냥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최선은 아님을 또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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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김종돈 (옮긴이), 노마드북스, 2010.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이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로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그 경험들을 여러 저서를 통해 나타낸 바 있다. 그의 책들은 그 시대의 경험과 생각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작가가 ‘소설’이란 형식으로 이 글을 썼을까.

  프리모 레비의 글쓰기는 직접 경험한 일들에 대한 느낌과 생각, 고통과 슬픔, 비해, 분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하기에 생생하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나 글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실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라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이란 형식을 빌린 것은 프리모 레비의 마음 속에 이 경험들이 허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험이 가득한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바뀌었을 뿐,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한 소설이다. 빨치산 유격대원들이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밀라노로 도착하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그 기간엔 나치에 대항한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유격전을 비롯한 다양한 유격전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제까지의 글들이 경험을 통한 작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기술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등장인물만큼의 수많은 상황과 생각과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달랐으려나.

  그럼에도 작가가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핵심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인간의 선악과 폭력성에 관한 줄기찬 물음. 살아 있음을 대한 부끄러움. 이 살아있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늘 그가 전쟁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음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생의 의지를 말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살아있음을, 살아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라면 빨치산으로 활동한 이력을 들어 종북좌빨이라 낙인찍었을 작가의 이력. 나치에 대항한 많은 빨치산과 레지스탕스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많은 탈영병이 있고 길을 잃은 이들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이지 않기 위해 그러나 죽이기 위해 빨치산이 되고 레지스탕스가 되려는 이들의 여정은 당연 까마득하다. 굶주림과 공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막연함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떠도는 이들의 삶은 안쓰럽다. 생각보다 전투적이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은 이들의 방랑이 그대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이 책의 제목은 유대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에서 따왔다. 유대인 사형수가 처형전에 적은 가사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희망한 것은 바로 노래가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래는 이렇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유태인 학살임을 알기에 등장하는 유태인의 대화는 여러 모로 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태인 풍자극이나 사람을 만나면 유대인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모습이 그 시대를 지배했던 유대인이라는 공포가 유대인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세계 곳곳에 수많은 유대인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유대인의 최종지가 늘 수용소, 죽음이 되는 그 공포에서 그들은 나치에 대항한 여러 활동을 계획하기도 하고 서로가 의지하며 가족이 연인이 부부가 된다. 어깨에 총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어느 순간 바이올린을 켜는 게달레 빨치산 대장 같은 사람도 있다. 전쟁통에도 공포 속에도 사랑은 있고. 당연 배신도 있고. 일상의 삶 또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전쟁의 카테고리와 마주한 순간 이야기는 훨씬 더 암흑이 되고 만다. 전쟁이란 이름은 쉽게 동지가 되었다가 쉽게 적이 되기도 한다. 필요라는 이름으로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그 필요와 필연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의 최종지, 나치는 패망했음에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유격대의 여정의 끝은 어디가 될까. 암흑에서 시작해서 암흑으로 향해 가는, 그런 암흑을 마주하기에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깊은 내면의 성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인물로 인해 자연적으로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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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뜨거운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창비, 2009.


  분명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변했다. 민주주의가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피로 쟁취해야 하는 이미지에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수준높은 우아함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다시 쓴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의 국민 의사표현 방식으로으써 새롭게 ‘문자’에 대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문자를 특정 집단의 테러로, 폭탄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라 명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정보혁명 시대에 맞춘 새로운 의사표현 수단으로서 문자를 정의하며 당당하게 개인의 번호를 노출한 만큼 문제테러범, 폭탄투하범이라 규정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어쨌든 분노는 좋다. 분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힘이다. 다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깨어 있는 시민의 폭압적 권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대응방식은 변화했고 여전히, 정치인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은 채다.

  100℃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계승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평탄할 새가 없었다. 전쟁과 독재가 연이어지고 폭력과 폭압 속에서 짓눌리며 살아야 했다. 경제마저도 피폐한 상황에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또한 폭압아래 허물어졌다. 그 피폐한 삶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으며 목숨과 민주화의 가치를 바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갔고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시뻘건 피를 빼내는 일이 당연한 듯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던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댄 이야기만이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전해졌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전히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독재가 휘두르고 있었으니, 국민들이 분노의 함성을 일으키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이었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영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이는 가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학생 영호의 이야기라기보다 영호의 어머니 이야기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정말 강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100℃는 그리고 있다. 아들의 학생운동에 반대하며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서린 어머니가 진정,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게 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강력하고 불합리한 억압이 만드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이없게도 무너지는,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경험한 이들의 분노와 허탈은 얼마나 강했을까. 그럼에도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꼭, 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역사가 잘 이어져가기 위해선 또한 피흘렸던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자행된 폭압적인 시위 진압방식을 보며 이 나라의 독재적이고 무식한 권력은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민들이 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개인은 희생했지만 타인을 죽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야만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 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불을 더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00℃』가 보여주는 세계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1980년, 1987년. 그리고 또한 무수한 나날들. 그리고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겨울부터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가 좀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식으로 점점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 영원히 ‘완성’ ‘완결’형이 아닌 만큼, 계속 지켜보고 관심을 쏟으며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이 만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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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결말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이미지프레임, 2004.


  시각은 변한다. 재밌게 둘리를 보던 시절을 지나, 둘리 때문에 웃고 울던 때를 지나 고길동에게 연민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말썽많은 객식구를 갑작스럽게 돌봐야 했던 고길동의 밉살스러움이 이해가 되기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면,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강산은 여러 번 변했고 강산이 변한 만큼 세상은 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변해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순정만화가 더 좋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그림체의 만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세월은 취향에도 변화를 주기 마련이어서 공룡둘리의 나이듦을 보고 싶었다. 아기공룡은 다행히, 누구의 관점에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멸종하지 않았고 나이들었다. 익살스럽던 그 아기공룡의 현재는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 둘리. 그런 이야기를 닮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주민등록증만 주어진다면 어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는 둘리.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영락없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인 공룡 둘리다. 여전히 둘리가 만화의 세계라면, 둘리의 이야기가 환상이려면 둘리의 손가락에서 발휘될 초능력의 존재다. 그렇게 둘리의 손가락을 제거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완전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 손가락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프레스기에 잘리게 함으로써 둘리는 엄연한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신자유주의, IMF를 지나 구제금융이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 당시의 피폐한 분위기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가려져서 그렇지 여전히 이 억압적 노동환경은 진행되고 있으며 둘리의 친구들의 삶 역시도 둘리와 다르지 않다. 몸을 파는 또치의 삶, 공갈젖꼭지는 벗어버리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희동이, 친구들을 해부용으로 팔아넘기는 철수. 어릴 때 보던 그 아이들은 모두 변했다. 낯선 것에 호기심과 연민을 가지고 돌보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던져준 환경에서 그 환경의 길들임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도우너의 사기로 인해 빚에 쪼달리다 사망한 길동이나, 그래서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철수 또한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가 놓인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게 하는데서 더욱 변화하게 한다. 더 구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좀처럼 명랑만화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없는 황량한 둘리의 시대.

  말안장에 앉으면 돈이 마구 쏟아지는 정유라가 송환되어 5월의 마지막날 한국으로 입국한다. 대한체육회도 한국마사회도 어떻게 흘러온 구조인지 권력에 아첨하고 돈놓고 돈먹는데에 전력을 쏟는 사이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확정되기도 하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닫힌 환경이 아니라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수립할 수 있는 정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39살 마필관리사는 자살을 선택했다.

  역시 구조적 환경이 만든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 때문이다. 태생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인간이 있기도 하고 한계단이라도 위에 서 있으면 ‘갑’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다. 구조가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마저도 도태되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둘리에 관한 이야기 외에 여러 편의 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같이 현실과 그 현실을 이용하고 현실에 이용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아픈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회에선 역시 쉽사리 병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저 비품취급받는 의자처럼 우리의 존재가 구조속에 갇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되는 것.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이 삶의 위안이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에도 사회의 변화는 처절하고 아프게 흘러간다.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룡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기를. 공룡시대의 끝은 종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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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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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열망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5.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런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풍경화같은 표지가 고요하고 여유로운 느낌과 약간의 쓸쓸함도 깃든 듯한데, 제목으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또한 대체로 산문집이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해 보고 느낀 것들을 다루기에, 소설적 상상력이 아닌 일상의 줌파 라히리의 생각을 맛볼 수 있는 책이려니 한다.

  한마디로 하면, 이 책은 작가가 새로운 언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의 이야기다. 그 과정은 집안에 들어 앉아서 마냥 책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기간 또한 길었다. 아마도 이 산문집의 묘미는 작가가 이탈리아어로 이 산문을 썼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산문이라서인지 소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문장의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탈리아어를 안다면 잘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번역본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 언어의 벽. 그래서 작가처럼 이렇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강하게 든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을 읽고 싶을 때, 번역된 책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면 늘 원서를 직접 읽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다음날이면 실천할 의지를 잊어버린다. 그저 세상엔 너무나 많은 나라가 있고,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있기에라며 효율성을 생각하며 늘 번역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작가는 왜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을 했을까. 외국어를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이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영어권 국가에서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반사이니까. 작가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직접 로마로 향한다. 이탈리아 친구도 없다는 작가의 이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그것은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잠시의 방문으로 스치듯 강렬하게 자리잡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던 작가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다.

  그것은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이전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주요한 이유가 된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에서의 안정감이 위험하”기에 이탈리아어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자유로운 영어가 아닌 변화와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이탈리아. 작가는 영어로 된 책을 읽지 않고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읽으며 생활한다. 작가로서의 열망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모험은,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를 익히는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에의 의지도 심어주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가 이 산문을 쓴 후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와 민족과 인종 간 이해와 평화를 도모했다고 상을 건넸다. 그런데 네루다나 권터 그라스도 받았다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 언어의 사고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가 이 유명한 작가에게 이러한 상을 수여하는 것은 감사함일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는 일’인 만큼 매우 절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니까.

  여전히 작가가 로마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에서 생활하는 이 여정은 마치 여행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의 잠시의 방문처럼 가볍게 로마에 얹어져 있는 느낌이 드니까. 어떤 느낌일까. 주로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작가 자신이 이주민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난 나라도, 확실한 문화도 없다. 난 글을 쓰지 않으면, 말로 일하지 않으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고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75~76


  작가의 글쓰기.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보아오던 이민자의 정체성이 완전히 작가 자신의 감정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규정지어 얘기하는 것을 작가는 탐탁치않게 여기겠지만 인도인으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그 상황이 어릴 때부터 줌파 라히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알듯한 느낌이었다.


 내 불완전을 잊기 위해, 삶의 배경으로 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다. 어떤 의미에서 글쓰기는 불완전에 바치는 경의다. 사람처럼 책은 창작 기간에는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p94


  이 산문집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차분하고 고요하다.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저 ‘말’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작가로서의 감정과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산문집이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것은 소설과 비교한 문장에서 느끼는 것이고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줌파 라히리의 생각은 여전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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