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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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나’

다른 사람, 강화길, 한겨레출판, 2017-08-29.


  왜, ‘다른’ 사람이어야 할까. 그저 ‘나’이기만 하면 안되는 걸까.

  다른 사람이기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다른 사람』은 읽지 말까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오를 대로 오른 짜증이라는 감정이 불편함임을 알았다. 소설속 상황은 마냥 현실같아서 지겨우리만치 그 상황에 ‘또’, 어김없이 ‘또’ 있다는 현실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피폐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책을 덮고 싶을 수밖에.『82년생 김지영』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상황을 글로 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소설『다른 사람』. 문득 이 소설을 보면서 환상소설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걸까.

  단편집『괜찮은 사람』이 확장된 이 소설은 반복적 폭력에 놓인 ‘여성’의 상황과 내면의 목소리를 들춘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 그들 내면에서만 맴돌기에 절대 타인은 알 수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 감정에 우선하여 의미를 부여하기에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각자 가지는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한사람의 것처럼 같기만 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으레 특정한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된다. 대체로 주인공, 화자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되고 그렇기에 주인공은, 화자는 절대적으로 ‘선’이기를, 되도록 막말을 하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하는 언행을 하기를 바라게 된다. 당연한 응원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진아를 피해자로만 바라보던 시선은 한순간 무너진다. 그것은 진아와 수진이 피해자인 동시에 같은 상처를 받는 이에게는 가해자였기에 그렇다. 진아와 수진 그리고 유리가 겪는 고통은 분노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함이 흘러 참으로 비참하고 애절하다. 이들은 현재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데 어김없이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무력화되고 일상화된 폭력에 놓였던 것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한 수진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수진은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사실 늘 원망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밖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원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실 수진은 누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술 먹고 한 번쯤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쟤는 춘자 딸이니까. 바로 세상의 빚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애니까!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목격한 이들이 현재의 폭력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감추고, 감추고, 감추는 것이다. 진아도 수진도 그들 상황에서 오로지 서로에 대한 견제와 미움으로 삶을 버티어내는 모습은 아프게 다가온다. 같은 고통과 상처를 받는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고통의 근원, 원인으로 돌리며 스스로의 피해를 지우려는, 감추려는 모습은 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나를 깨닫게 한다.


나도 유리를 그렇게 험담했었지. 그때는 몰랐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 나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마침내 진아가 각성한 것처럼 같은 일을 겪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야 함을. ‘다른’ 사람일 필요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세상, 그러한 인식들이 사회에 머물기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그런 “다른 사람”일 필요가 없는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선 필요한 일들을 한창 사회가 시작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여준 불편한 현실이 피해자들의 각성을 계기로 달라질 현실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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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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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한 반응

붉은 소파, 조영주 저, 해냄, 2016.05.24.


  가끔 생각한다. 싸이코, 연쇄살인, 실종, 미제 사건…이런 단어에 반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까. 그 광기에 자극되기 때문일까. 정보가 신속하고 빠르게 전달되면서 전세계의 잔인한 살인사건을 자주 접한다. 뉴스를 통해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참혹하고 끔찍스러워 하면서 굳이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즐겁지 않은 그 상황에 빠지는 것.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끝난 사건을 애도하면서 범인이 잡히고 살인의 이유가 드러나고 악인은 처벌받는 결말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온전히 범인을 쫓는 추리에 스릴을 느끼는 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연쇄살인범의 살해 이유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변함없는 클리셰를 보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문체와 구성으로 휘어잡는 이야기가 있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범인을 쫓고 있음에도 긴장감이 없거나 무덤덤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극’의 극대화에만 반응하며 내 몸속에서 잔혹하고 끔찍할수록 반응을 보이는 인자가 있나 섬뜩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맞닥뜨린 연쇄살인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명망있는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의 딸이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사건은 모두 붉은 소파 위에서 일어났기에 정석주는 붉은 소파를 알아볼 범인을 찾기 위해 붉은 소파를 놓고 기다린다. 붉은 쇼파 위에 앉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촬영하며 15년 동안 살인범을 쫓는 삶에 올인하던 중 사건현장 사체 촬영을 제안받게 된다. 현장 사진을 찍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사진과 카메라를 매개로 사건을 추리·해결해 나가며 15년 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간다.

  사진작가 정석주가 사건을 추리해가는 결정적인 단서는 붉은 소파가 아니라 사진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 사진을 찍는 과정, 촬영 사진 등 사진에 관계된 활동을 통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추억과 마주하고 사건의 진실을 조합한다. 사진은 찰나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간 순간에는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도 왜곡되기도 하고, 또한 선명해지기도 한다. 찰나의 순간들.

  정석주에게는 사진이란 인생이다. 사진에 희노애락이 펼쳐진다. 정석주에게 사진은 외면이자 집착, 거짓이자 진실이 된다. 추억과 그리움, 아픔과 상처의 표상이지만 또한 치유의 표상이기도 하다.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전문가’라는 말이 가지는 위엄을 느끼기도 한다.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것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란.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데 모두 의뭉스러워 보였다.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드러나고 범인이 드러나는 순간의 느낌은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연쇄살인사건이었으니 범인은 역시 사이코일 것이라 짐작했고 사이코가 행한 살인의 이유는 놀랍지 않았다. 카메라는 어떤 물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잘 가리기도 한다.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사물, 인물은 맨눈으로 볼 때에 비해 ‘다르게’ 보인다.

  어떻든 소설 속 연쇄살인범에 대해 덜 놀란 것이 그의 행위가 잔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정도에 무뎌지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조금 식상해서다. 소설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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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모시빛 2018-03-26 20:30   좋아요 0 | URL
가지고 있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추리,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더욱...저는 그렇더라구요..
 
유령의 자연사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령 현상에 대하여
로저 클라크 지음, 김빛나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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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죽지 않는다


유령의 자연사, 로저 클라크, 글항아리, 2017-11-03.


  『유령의 자연사』를 자연스레 유령의 자연사(自然死)로 인식했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손이 뻗었다. 유령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정말로 유령에게 죽음이란 있는 것인지 그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등. 유령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타국에 대한 관심만큼의 다른 나라에 대해 가지는 관심처럼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며 뻗치는 유령의 세계. 많은 것이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가운데 유령의 죽음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自然史에 다소 멈칫했지만 막연하지만 단순하게 대상화했던 유령과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힘’이 ‘필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유령의 죽음에 대한 물리적인 실체를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유령이 영국에서 특히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유령 출몰이 많은 것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입증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목격자, 증언이 많을 뿐이다. 과학적인 입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들였지만 유령 존재에 대한 과학적 입증을 할 방법은 결국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유령에 대한 믿음과 관심을 가진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령이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고 유령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령의 죽음은 결국 소멸이다. 그것은 그 유령을 ‘보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그 유령은 ‘발견되지 않았다’가 되는 것이다. 유령이 언제 발견되고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죽은 혼령이라는 맥락에서 유령은 한국귀신인데 생각해보면 귀신이나 유령이나 출몰하는 장소나 이유는 같다. ‘귀신을 보았다’에 대해 ‘심리적 요인’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거나 공동묘지나 사람이 죽거나 살해된 장소에 유령이 대부분 ‘발견’된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볼 때 유령 발견에 대한 역사에 심리적인 역사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심리를 좀 더 조직적으로 ‘이용·활용’하는데 어쩌면 기인 역사의 영국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유령들의 잦은 영국 출몰은 충분히 이해가 됨직하다. 앤 블린과 ‘몽스의 천사들’은 매우 유명한 유령들이며 문학속에도 수많은 유령들이 존재한다. 유령 문학이 많은 것은 유령을 목격한 이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관심에 비례하는 것이니까.


수 세기 동안 유령의 존재는 인식되어왔고,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


  한국의 곤지암에 위치한 정신병원이 CNN으로부터 ‘탁월하게’ 소름끼치는 장소로 선정된 후 단순 폐업하고 건물을 인수할 자가 없던 병원이 유령 출몰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는 과정은 저자가 말하는 바에 딱 들어맞는다. 오래도록 유령은 등장했고 한편으로는 ‘오락’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거대한 자본과 맞물려 ‘유령’이 콘텐츠화되면서 유령은 특정한 이가, 또는 미디어가 그려내는 대로 그 모습을 갖추어 특정 장소를 누비게 된다. 시대마다 유령에 대한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이유 외에도 유령이 필요한 ‘목적’은 존재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종교, 미디어, 사회적 지위”로 들었다. 유령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공포심을 안겨주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유령의 존재를 조작·조장하며 국가도 종교도 그들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유령에서부터 엘리멘털, 폴터가이스트, 타임슬립 등 다양한 종류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도 효율적인 유령 활용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왕정복고 이후의 유령들은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잃어버린 문서나 소중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섭정 시대의 유령들은 고딕풍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들은 강령회에서 질문에 답을 내리는 존재였고, 유령을 보는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아들여졌으며, 유령을 목격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연법칙의 현현이라고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폴터가이스트가 발견되었다.


  존재에 대한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유령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유령을 발견하는 상황들도 좀더 발전되어 왔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유령의 법칙을 살펴보면 유령 또한 소비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의 목적에 맞게 변화·구현된 유령은 인간의 감정, 욕망의 정도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있다. 실체를 규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와는 별개로 ‘유령’은 소멸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한스 홀처의 말처럼 결국 “유령은 어찌 됐든 인간 또는 인간의 일부이며, 따라서 정서적 자극의 영향을 받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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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신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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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뮌하우젠증후군을 앓는 당신


당신의 신, 김숨, 문학동네, 2017.


  『당신의 신』에는 「이혼」「읍산요금소」「새의 장례식」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는 이혼과 폭력이다. 소설 속 여자들은 모두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여자의 남편들도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부부가 겪는 일이지만 남자보다 더 힘겨운 이혼 전후의 여자의 트라우마가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이혼의 원인이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혼한 남녀를 대할 때 사람들이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이혼녀’에게 더 큰 시선을 두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딸들이 이혼을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결과로 만들었다면 그들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이혼을 생각만 할 뿐 실행하지 못한다. 모두에게 이혼의 이유는 어김없이 ‘남편의 폭력’이고 도망치지도, 이혼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자식’이다. 한사람에 의해 폭력은 자행되고 그 폭력은 반복되어 되물림된다. 자식을 위해서 이혼하지 못하지만 자식들은 그 상황 자체가 지옥일 뿐이다. 한 사람이 참는 것으로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자신의 가정을 꾸려서도 그 폭력성을 보인다.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도식화는 우스울 정도로 여자는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남자는 그 스스로 폭력적인 남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객관적 통계로도 드러난 ‘어머니’들의 모습이자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금 달라진 세상이라고, 묘사가 있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이혼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이혼함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참고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이제 이혼 후 감당해야 삶에 대해 세세하게 끄집어내고 있다.

  『당신의 신』속 남편들은 그들이 자식일 때 당한 폭력을 아내들에게 행함으로써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하고 그후에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정녕 여성에게 결혼이란 ‘맞아 죽기 위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만 같다. 결혼은 ‘아내’라 불리며 남편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의 존재를 만든다. 이혼한 후에는  이혼녀라는 명명으로 남성들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을 만든다. 이혼녀에겐 성희롱과 추행이 당연하다는 듯 성폭력이 뒤따르고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늘 따갑다.

  최초의 폭력은 어디서 기원한 걸까.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던 아들들은 왜 같은 아버지가 되고 마는 것일까. 아버지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어머니를 연민하고 혐오하던 딸들은 왜 폭력당한 채 살아가는 것일까. 왜 이혼을 하고서도 삶을 온전히 버티어내는 것에 힘겨워할까. 제 폭력에 힘겨워 하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이혼」속 남편은 시를 쓰는 아내를 향해 말한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 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새장 속 십자매를 향해 ‘죽어’라고 말하는 폭력당한 소년의 한마디 말은 십자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을 곁에 두고 영혼이 파괴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 자들이 하는 저런 말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좋을 런지…. 여성을 ‘모성’이라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신처럼 받드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은 환멸스럽다. 그들이 정의하는 ‘모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성(母性)이 어머니의 것이라면 남편들은 왜 아내에게 어머니의 것을 보이기를 강요하는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고 받아내는 제 어머니의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하는 그들, 나약함을 가장하며 더할 수 없는 영혼 파괴자의 신인 그들이 제 영혼의 안전을 염려한다. 제 영혼의 안전을 그들이 파괴한 것에 대고 찾는다. 이에 대해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만 남편의 말 속에 갇히고 만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결혼은 누군가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다. 그래서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에 맞서 “이혼이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혼’이 불행인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게 된 원인 속에 이미 불행이 있다. 가정폭력이라는 이름, 그 떨치지 못한 폭력과 불행의 트라우마가 ‘결혼’을 통해 재생산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명쾌하게 ‘이혼’이 결혼으로 인한 불행을 단절시키는 것을 끝나지 못함이 얼마나 크나큰 비극인가. 아내는 남편들을 위한 신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들의 ‘어머니’도 아니다. 그들의 ‘폭력’은 아내가 ‘신’이 되어 어루만져주고 ‘신’이 되어 참아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루게릭병으로 인한 신체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스티븐 호킹이 사망했다. 천재 물리학자로 칭송받은 스티븐 호킹의 사망 소식에 문득 소설 속의 저 말이 떠올랐다. 25년간의 결혼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스티븐 호킹이 재혼한 사람은 그를 돌봐주던 간호사 일레인이였다. 신체적 고통과 함께 이혼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호킹 박사를 간호하고 돌봐주며 호킹 박사의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처럼 행동하던 일레인. 그러나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신’이 되기 위해 결혼한 것일까. 그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일레인처럼 『당신의 신』속 남편들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환자들 마냥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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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지 않겠다


이해 없이 당분간, 김금희 외, 걷는사람, 2017-08-06.


  어느 순간부터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일정한 분량을 요구하는 문학상에서도 장편 아닌 중편 정도의 소설로 바뀌고 있다. 여전히 일정한 분량의 단편 소설을 신인의 등단 심사로 하고 있지만, 출판계에서는 적어도 지속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펴내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짧은 이야기는 이미, 등단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장르’인 건가?!

  다양한 문학상에서 이름을 봐온 많은 작가들이 아주 ‘짧게’ 말하고 있는 책, 『이해없이 당분간』. 22명의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나름 어느 작가의 작품이 좋은가를 가늠부터 하면서 책장을 넘기면 그 짧은 이야기에 뭔가 아직 남은 건 아닌가 하며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소설이라기보다 수필같은 느낌을 받는다.

  짧다는 건, 22명의 작가가 글을 썼다는 건 22번의 휴지를 둘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휴식을 두고도 이 책은 터무니없이 속독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난 후 책의 제목만 남았다. 이해없이 당분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이해없이 당분간 살자, 뭐 그런 말을 혼자 되뇌였다. ‘이해해라’ ‘이해해줘’ ‘이해해야지’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고 다짐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때론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할 때 어떤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도대체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힘겨워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이리라. 그리고 늘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나 자신에게 두었던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나를 배려없음과 이기심가득한 인간이 되려는가, 채찍질하며 어떡하든 ‘이해’하려 몸부림치려던 때,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음을 이제 알아간다. 그것은 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착한’에 대한 강박이었을까.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지 않아’를 고수하며 편한 마음을 느꼈던 이후로 억지로 이해하려던 작위적인 형태를 버렸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일도 있는데 이런 이해에 대한 강요가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남은 책을 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이해없이 당분간’ 살겠다라고.

  마침 인터넷엔 전직 상사가 실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행태를 알고 있기에 호탕할 수밖에 없는 웃음이 나왔고 “역시 이해가 안되는 Ⅹ”이라 외치며 하루종일 피식거렸다. 실검을 장식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더 실소가 늘어갔다. 이해되는 건 그 개인의 욕망, 역시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나를 뽑아줍쇼’로 자리를 유지하는 자의 결코 변하지 않는 그 행태.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에 맞춰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그런 것은 역시 안중에 없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선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찍어버리는 유권자들에 또한번 이해하지 않겠다가 반복된다.

  하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얼마나 알겠는가. 가까이서 본다 한들 알기 쉽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은 허무하게 들린다. 누군가를 ‘그럴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개인적인 관계와 관찰에 따른 나의 ‘느낌과 판단일 뿐, 그것이 진정 맞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그럴 사람 아니다”가 누군가에게는 “그럴 사람이다”를 완전히 반박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별개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연이어 인터넷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가까이서 보지 못하여 ‘그럴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란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죄’에 대한 이해력은 지니고 있기에 개인에 대해 ‘이해하지 않겠다’는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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