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



         한강. 흰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한 책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아니고

 책도 많이 팔리는 나라가 아니다. 

심각한 독서율과 OECD 회원국 월평균 독서량에 대한 

비교 기사를 읽다 보면 평균 독서량보다 많이 읽는구나라고 뿌듯해지는 게 아니라 서글프다. 

책 판매율도 수험서, 영어책, 자기계발서이거나 TV를 비롯한 언론에 

소개된 책만이 높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이 널리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흰’과 같이 최근 분량이 적은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들 책에 비해 ‘흰’은 좀더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소설책의 분량이 줄어든 것이 페이지가 많은 소설책은 독자들에게서 외면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시장의 변화에 맞게 오래도록 장편소설의 적정 분량으로 인식되던 소설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잘 안 읽는다’ ‘어쨌든 안 읽는다’니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책의 표지와 뒷면을 살폈다. 거듭 확인을 했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형식과 구성의 파괴, 변주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하게 되는 익숙한 전개가 아니라 에세이 느낌이 강했다. 함께 곁들여진 사진이 더욱 그 느낌을 강조했다. 최근에 읽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도 문체도 분위기도.....마침 <멀고도 가까운>에서도 리베카 솔닛은 여행을 떠났고 북유럽이었고 어머니가 나왔고.......한강의 ‘흰’을 읽으면서도 북유럽의 느낌이 났는데 역시나 북유럽 쪽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책이 유사하게 느껴졌는데 하나는 ‘에세이’로 하나는 ‘소설’로 불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

  문장으로 본다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참 좋았다. 한강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소설 ‘흰’은 정말이지 ‘희다’도 아니고 ‘흰’이라는 어감에 맞는 글이었다.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느낌으로 와 닿은 이야기. 하지만 소설이 인물과 사건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임을 알기에 익숙한 형식에서 떨어져 있는 한강의 ‘흰’은 계속 멀찍이 떨어져서 봐지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소설이란 무엇인가.

  한강의 이름을 지운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책을 소설이라고 생각할까. 수긍하며 놀라움과 경탄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을까. 덧붙여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신작이라는 글귀는 책 제목을 ‘흰’이 아니라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문학시장에서, 출판계에서 어느 신인 작가가 이런 글을 들고 출판사를 찾았다면, 편집인들은 흔쾌히 출판을 해줄까? 아니,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을 수긍을 할까?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 책이 독자의 마음에 닿기까지 분명 ‘출간’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할 텐데 어느 무명의 작가가 달려 나와 ‘나의 첫 소설을 출간하고 싶어요’라며 이 책을 내밀었을 때 출판사 관계자의 얼굴이, 표정이, 그들의 조언이.... 뛰어 넘어야 할 것은 여러 가지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름 하나로 ‘새로움’ ‘낯섦’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상당히 부러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가 될 수밖에 없는


셜리 잭슨, 힐하우스의 유령



   이 소설이 읽을 맛이 난다면 문장의 맛도 크다. 문장이 좋다. ‘고딕 미스터리’, ‘고딕 호러’의 대가라 불리는 작가 셜리 잭슨의 이 소설을 스티븐 킹은 지난 백 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았고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스티븐 킹은 자신의 작품 <샤이닝>을 썼다.

   저자는 자신의 성격과 상황이 닮은 주인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어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작가 자신은 공포와 광기 속에 있었나 싶다. 소설을 소설로 읽고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렇지 않아도 강렬했던 소설에 대한 느낌이 더욱 배가되었다. 작가 셜리 잭슨이 악마의 소리를 듣는다는, ‘마녀’라는 소문이 있었다니! 셜리 잭슨은 남편이 발령받아 간 노스 베닝턴이란 마을에서 주민들과 잦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힐즈데일 사람들이 상당히 불친절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주인공 엘리너가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찾은 힐 하우스에서 겪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공포’는 일반적인 공포 소설과 다르다. 그 점이 이 소설에 빠지게 되는, 비교불가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원동력이다.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종달새나 베짱이도 꿈을 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 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p35


  광기에 물든 힐 하우스는 진짜일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엘리너는 11년 동안 간호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언니와 소유권이 반반인 차를 타고 집을 떠난다. 방황과 정체된 삶에 언니 부부와의 갈등이 한몫했고 또 하나는 힐 하우스의 심령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조수가 필요하다는 몬터규 박사의 편지 때문이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지난 생애에 대해 자책하지만 32살에 비로서 자신의 결정으로 힐 하우스를 찾아가는 엘리너의 마음은 경쾌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엘리너는 자신보다 더 젊고 매력적인 시어도라를 만나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될 뿐이다. 힐 하우스 상속자 루크 샌더스와 몬터규 박사 부부와 함께 힐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이들이 겪는 기이한 현상들은 실제인 걸까.


힐 하우스의 선과 공간은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집의 정면에 악마적 분위기를 드리웠다. 그 원인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나 광기 어린 배치와, 고약하게 비틀린 각도와, 하늘을 등진 지붕을 보노라면 절망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힐 하우스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p73


  이 어둡고 음산한 집이 주는 공포를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받고 싶지만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다. 12살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엘리너는 자신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도 이 현상들에 몹시 두려워하고 공포의 강도도 거세진다. 폴터가이스트는 독일어러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영’이란 뜻이며 이유없이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집이 흔들리거나 물체가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를 기꺼이 버리는 짓이죠.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이지, 그 중간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p244


  엘리너는 벽에 피로 쓴 자신의 이름이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들을 들으며 더욱 공포와 광기에 휩쓸린다. 그러면서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이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끝없는 자신의 불안이 이런 현상을 보게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려울 때면 세상의 이성적이고 아름다우면서 두려움이 없는 면이 분명하게 보여요. 의자와 탁자와 창문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죠. 꼼짝하지 않아도 카펫의 섬세한 짜임새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물들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우리는 자신을 아무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두려워하죠. p245


  엘리너가 힐 하우스에서 겪는 공포를 보며 오래전 한국영화 알포인트가 떠올려졌는데 점점 죄어오는 공포 속에 미쳐버리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나를 둘러싼 공간이 주는 공포, 그것도 가장 편안해야할 집이 주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줘야 할 가족이 주는 소외감, 손을 내밀고픈 이들에게서 받는 외면. 이 모든 것들이 심리적인 방황의 이유가 되어 한 인간을 더욱 더 폐쇄적이게 만든다. 인간이 광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일까, 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주르, 사랑하고픈 나의 조국


봉주르, 뚜르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 책을 읽었을 때 나의 놀람은, 호기심이 아니라 분명 놀람은, 변화였다. 아, 세상이 변하긴 했구나라는 것이었다.

  문득 달력을 보다 엊그제가 6.25였음을 알았다. 보지않고 듣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월의 25일에 대해 관련 다큐나 기사, 뉴스들을 접하지 못한 것 같다. 분명 어느 때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해도 들리고 보게 되던 때가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내가 익숙해졌거나 기사들이 예년에 비해 덜했거나 한 것 같다.

  내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호국 보훈의 달이면 보훈과 관련한 독후감 쓰기, 그림그리기, 글짓기 대회 등이 열렸고 방학이면 주어진 주제에 따른 스크랩하기 같은 것이 있었다. 6.25 때의 사진이 가득찬 사진집이 방학과제용으로 따로 나오기도 했다. 그때에 읽어야 했던 책들은 북한 주민들은 모두 해골과 같은 모습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은 어쩌다 남한의 병원에 입원하게 된 기자가 병원식을 보고 자신을 위해 일부러 고급 음식을 내오는 것이 아닌지 놀라는 대목이 나온다. 기껏해야 된장을 푼 배춧국의 최고의 식사로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점점 남한에 놀라고 동화되는.

  그런 식이었다. 읽었고 읽어야 했던 북한이 소재가 된 동화들은 어김없이 남한의 자유와 경제를 찬양했고 북한의 억압과 가난을 세세히 묘사했다. 개인의 성격마저도 북한 사람들은 포악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책에선 반공, 반공이 떠나지 않았다. 북한군인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들이 늘어선 사진을 스크랩하며 반공과 멸공과 남한의 사상을 찬미하는 사진첩에서 사진을 오려 하얀 스케치북에 옮기며 ‘아, 잊지 말자 6.2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그대로 따라 써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숙제들. 그런 책들만 읽고 그렇게 세뇌당하며 보내야 했던 나의 유년과 학창시절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지금은 아닐까. 더러 접하는 소식들에 의하면 지금도 여전한 부분은 있다.

  어쨌든 ‘봉주르, 뚜르’ 같은 책이 나왔고 이 책을 볼 수 있다는 게 좋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를 상상했는데 분단에 관한 이야기를 맞닥뜨릴 줄 몰랐다. 그리고 어릴 적 숙제로 만나야 했던 호국보훈용 책의 서술과 결말이 아니라서 좋았다. 소년의 호기심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며 추리의 형식으로 풀어 나간 것,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단 현실을 잘 다룬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의 무대가 ‘프랑스’인 것이 마구 마구 공감이 되었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라면 북한 어린이를 만난다는 것이 쉬울 리도 없고 어른들의 등쌀에 교류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고 안타깝게도 제3국에서 두 어린이의 교류가 있는 이야기가 더 ‘안전하다’라고 느꼈다. 무엇에 대한 안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고 먹먹함이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제어하게 만드는 이 모든 사회구조. 그것을 뛰어넘는 봉주와 토시의 우정. 동화에 맞게 어른들이 떠드는 이념과 시선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제3세계를 빌어 또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프랑스 뚜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과 그래서 더 환상같기도 한 느낌이 교차되었다.

  분단과 이민의 문제를 정치적인 것을 떠나 일상에, 사람의 마음에 파고드는 문제로 환기시키는 책이었다. 희멀건 배춧국이 아닌 소고기국을 주는 병원이 있어 잘 사는,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의미있는 풍자에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허례와 같은 의식을 강조하지 않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을 만나면 정말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이라 감당해낼 수 있는 잔혹함은 없다

  

 

 국수경 엮음, 2011.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버거운, 일상에서 도피하고픈 어른을 위한 것은 무엇이기에.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제목은 그림형제의 동화에도 자주 붙이는 수식어다. 그림형제의 동화자체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고 그들 또안 여러 버전을 만들어 출판했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수많은 동화들에서 뽑아내어 엮은 책이다. 그래서 저자가 아니라 엮은이가 된다. 그 동화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잔혹’보다는 외설적이고 더 역겹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형태로 이 책을 엮은 의도가 뭘까. 많은 분량을 담고 있지 않기에 이 책이 재빨리 읽히지만 읽고 나서도 재빨리 읽은 만큼의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재밌다는 느낌도 놀랍다는 느낌도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해라는 느낌도. 정확하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먼저 그림형제의 전집을 읽은 탓도 있고 이야기의 끝에 붙여진 ‘교훈?’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동화들을 뽑아내어 이야기의 서술을 달리 하면서  차별점을 이 한줄의 교훈에 둔 듯하다. 하지만 이 교훈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이 책이 가진 장점이 감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장점도 없다고 느껴지지만.

  예를 들어 이런 형태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는 “백설공주는 난쟁이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면서 이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금새 침실 기술에 능숙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난쟁이들과 백설공주는 즐거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핵심은 “어리석은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라는 것. 개구리 왕자에선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참사랑은 추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엄지공주로 알려진 엄지둥이의 사랑에서는 Small은 Beautiful이 아니라고 외친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이끌어낸 한 줄은 또 어떤가. 세월이 흐르면 여자는 마귀로 변한다라는 것이다.

  엮은이의 한줄 교훈이 와 닿고 재밌기보다는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에서 굳이 나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점잖떠는 듯한 느낌도 받게 된다. 화장실에서 보는 낙서같기도 하고 도색 잡지류에서나 봄직하기도 하고 외설싸이트에나 올려져 하하, 호호, 낄낄거리기 위한 말같기도 하다. 어디에서든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사람은 얻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책들을 들이밀어도 깨달음이나 가슴치는 반성을 하지 못한다. 나쁜 짓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들켜 강제로 난 이렇게 반성을 합니다를 급하게 외친 듯한 이 한줄 평들.

  이러한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었을까.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어른이라고 ‘잔혹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안다. 위트도 아닌 설렁한 교훈 한 줄이 쓰여 있다고 해서 이 책이 인생의 교훈을 알려주는 책이 될 수 없듯이 어른들에게 쓸데없이 교훈을 들이밀지 말라. 온갖 나쁜 것들을 습득하게 하고 억지 깨달음을 주입시키지 말라. 잔혹함에 익숙해지면 어줍짢은 교훈의 말같은 것은 일찌감치 사라져 버리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개 가득한 남해 금산



이성복



  바다로부터 산으로 오르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숨을 헉헉거릴 때도 있었지만 귓가에선 계속 이 구절이 맴돌았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남해금산 中


  내가 밟는 어느 돌 속에 여자가 묻혀 있을까. 오랜 시간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었으니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지 오래되었을까.

  그렇게 남해 금산 돌무더기를 오른 첫 해, 뒤따르는 바다 내음보다 디디는 돌에 더 깊이 마음을 새겼던 때가 있었다. 돌 속에 묻혔는지 떠나갔는지 모를 한 여자 때문에. 그 여자는 떠나갔고 돌 속에 따라 들어간 마음으로 금산을 오르면 가까이 있는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함께 나 또한 푹 잠기어 있을 수 있었다.

  산 꼭대기, 반대편에 이르러서야 등산길이 아닌 찻길이 있음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금산을 가리라 했다면 찻길로 바로 들어서 한뼘 한뼘 디디고 올라온 돌무더기를 잊었을 것이다. 바다로 가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 선 것이 금산을 생각하기엔 좋은 운이였다. 이후로는 찻길로 금산 보리암으로 가게 되는 걸 보면.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은 금산의 돌을 밟아 올라가며 느끼는 여운이 시와 맞물려 오래 각인되어 있다. 표제어인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도 이 시를 다시 한번 더 보게 된다. 시집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이미지, 단어들이 있다. 이 시집에선 치욕과 어머니, 누이란 단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덮고 난 뒤에서 쓸쓸한 정서와 막막함이 감도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요!

- 치욕의 끝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이 이 먹먹함이여! 우리의 삶엔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다지도 치욕을 떨궈내지 못하고 바스라져 가는 걸까. 그 치욕은 한 개인의 삶일까, ‘우리’의 삶이었을까.


  “삶은 내게 너무 헐겁다”,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묶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소설 테스가 연상되는 ‘테스’라는 시를 보며 “누이만 아는 비밀”을 연결지어 테스가 겪은 일과 같은 치욕을 떠올려 보았다가 결국 그것은 먹는 일, 밥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됨을 떠올렸다. 테스의 일생이 떠올려지면 이 이야기의 치욕과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또 반복되는 ‘먹는’ 이미지들이 삶의 비애와 치욕의 원인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밥벌이를 위해 참고 당해야 하는 일련의 모든 견딤과 치욕들. 결국 살아가기 위해 치욕을 견디지만 그 치욕이 더욱 치욕스러워지는 ‘삶’이라는 공간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 찢긴 기억의 천막(天幕)에는 흰 피가 눈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나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그래서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희망을 꿈꿀 것인가. 희망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것인지, 어떤 모습을 희망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 여전히 먹먹한 채로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빗속에 젖어서도 공사장에서 못을 빼면서도 그렇게 그 자리에 묵묵히 있다.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강


  시가 입속에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될 때는 감각적인 한 구절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 하나가 좋아서 한 시구를 되뇌게 된다. 하지만 <남해금산>처럼 시집 전체가 한 이야기로 엮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집도 있다. 어렸을 때는 감각적인 구절 하나에 이게 뭐지, 이런 표현을, 이라며 쳐다보던 시구들에 이제는 이미지를 찾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푸욱 잠기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기보다 안개 가득한 먹먹함이라는 것을 남해금산은 느끼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