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소각의 여왕, 이유, 문학동네

 

지창씨는 딱 한마디만 했다.

“요즘은 나쁜 짓 안 하고 잘사냐?”

“나쁜 짓 안 하고 어떻게 잘살아?”

해미가 끼어들었다.

 

   청소년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묘하게 하나로 정리가 된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보는 ‘문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핍을 끌어안은 채 왜 그다지도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왜 그토록 의젓한지. 인터넷 속 사건·사고 속의 청소년들은 모두 문제를 일으키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성숙이라는 건 아예 물 건너갔고, 반성이란 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설 속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뇌한다. 바쁘고 힘든 삶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다. 그래서, 주인공이겠지.

  여기 소각의 여왕 해미 역시도 그런 청소년의 한 명이다. 그렇게 자라난 해미가 직업으로 모으는 고물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소각의 여왕> 속에 담겨 있다.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해미와 해미 아버지 지창씨와, 지창 씨의 친구와, 고물상 직원이었던 두 명 정도. 그들의 삶은 정리해야 할 수많은 고물들보다도 단촐하다. 그래서 더욱, 쓸쓸함을 부추긴다. 낡은 고물들을 분류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하지만 많은 물량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산업의 변화와 함께 고물 사업도 위기를 맞게 된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고물상의 진리처럼 이 세상에서 점점 사람들은 뭉치려고 하기보다 각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결핍이 가져다주는 것은 남들과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미는 여느 학생들처럼 대학생이기 되기보다 아버지와 함께 고물상을 운영하는 삶을 택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물상의 주인 해미 아버지, 지창 씨의 남다른 점이라면 면허도 없는 해미에게 1톤 포터를 몰게끔 한다는 것이다. 포터를 타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고물을 수집하던 해미는 이제 고물 대신 유품정리사가 된다. 몰래 아버지가 하던 이 일을 해미는 선택한다. 죽음이 휩쓸고 간 공간을 말끔히 치우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고물 속에서 희귀 금속 이트륨을 분리해 내는 꿈을. 폐허가 되어 가는 고물상의 운명에서 뽑아내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지창 씨는 이에 몰두한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고물과 고물상을 팔면서까지 지창 씨는 이트륨을 뽑아내는 기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얻어지는 것은 늘 검은 돌덩어리. 지창씨가 삶을 위해 삶을 팽개치고 집 안에 머물며 기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해미는 죽은 이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엔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슨 과랬더라? 그래, 항공우주공학과.”

“얼마나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그들은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까. 아마도 해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삶에서 보다 멀리, 멀리. 하지만 해미는 정말로 꿋꿋이 삶을 이겨내는 듯 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묵묵히.

  세상은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쓰레기를 내놓아 환경위기가 심각한데 고물상의 운영은 어렵다니. 하긴, 그만큼 수많은 고물들이 쏟아져 나오니 고물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 지점. 고물정리에서 유품정리사가 되는 자연스런 흐름이라는 해미의 말이 어쩐지 애달프다. 마치 인간의 죽음이 고물과도 같은 위치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인간의 삶이 죽음이 고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해미의 어조가 시종일관 무덤덤하고 건조해 서린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버지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 버렸다. 유전병이라는 허파에 바람이 드는 병. 유전병이 아닌 다음에야 해미는 허파에 바람이 들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해미는 건조한 웃음을 날린다. 일찍 세상을 알아버리고 그만큼 세상을 산 아이의 시선이 골목골목, 보이지 않는 방 안까지 스며들어 죽음의 뒷모습까지 끌어내 보여준다.


죽음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여러 명의 의지가 하나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의 의지와 누군가의 동의와 누군가의 묵인.

 

  이 말이 동의되는 것도 참 씁쓸한 일이다. 사람을 믿는 것은 희망을 믿기 때문일까. 믿고 의지하며 세상을 버텨내지만, 결국 믿은 이들에 대해 실망하게 될 때, 그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 그것은 죽음을 이끌어내는 의지와 동인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허망한 이트륨의 추출 성공. 헛웃음을 일으키는 그 소식. 이 소식 또한 뒤통수다. 삶을 더욱 잔인하게 비트는 저 것, 그것, 그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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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함

 

홀, 편혜영

 

 

 글을 읽어가면서 계속 ‘이걸 읽었는데, 어디서 봤더라?’ 묻고 있었다. 분명 이 내용을 알고 있기에 같은 책을 또 읽었나 하며, 나의 기억력을 탓했다. 역시 책은 읽은 후 바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다. 오래 전 기억에 사라져 버린 책들을 다시 읽지 않는 한 “읽었다”와 “읽었던 것 같은데”로 남을지 모른다. 물론 읽은 기억이 있는 책이라 해도 “재밌다”로만 기억될 것이고. 그래서 기록의 이유는 기억과 편리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게으름이 기억력마저도 게으르게 만들었다.

  다행히 나의 기억력은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었다. 이 장편소설은 작가의 단편 <식물 애호>를 전개시킨 것이었다. 2015년 현대문학상 <소년이로>수상집에 수상작가 자선작으로 실려 있던 것이었다. 불과 1년 새 기억이 가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다니......후반부로 갈수록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 익숙함은 그 때문이었다.

  작가 자신도 자선작으로 이 단편을 꼽았고 다시 단편에서 확장시켜 장편으로 전개시킨 만큼 이 단편에 애착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긴, 오기 씨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더욱 더 세심하게 그리며 내용을 전개시켰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오이가든>에서 느꼈던 것처럼 전반적으로 공포를 동반한다. 피터지는 끔찍스러움이 아니라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괴기스러움, 기이함. 극도의 불안을 동반하는 심리적인 긴장감이 느껴졌다. ‘홀’이라는 제목만을 보고선 요즘 증가하는 싱크홀을 연상했다가 표지의 ‘집’그림 때문에 집안에서, 가정에서 느끼는 삶의 구멍, 인생의 헛함을 생각했다.

 

기억이 선명해지고 정황이 분명해질수록 오기는 슬퍼지고 서글퍼져서 비통할 것이다. 차라리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기억이 떠오를수록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다시는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p34

 

  사고로 아내를 잃고 반신불수로 누워 있는 사내. 오기 씨. 오기 씨의 시선으로 그에게 안타까움을 보낸다. 더구나 운전자가 자신이었으니 스스로에 대한 자책은 얼마나 더할 것인가. ‘그래도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지요, 오기 씨’라고 응원하는 마음을 계속 갖게 될까. 삶의 의지를 다질까 말까를 고민하는 오기 씨의 사고 이전의 기억들은 그에 대한 응원을 지속하는 것을 계속할까를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 그냥, 오기 씨는 어떻게 될까가 관건이 된다.

  사고 이전의 그의 아내와의 관계, 오기 씨의 행동은 둘만 아닌 듯 아닌 듯 오기 씨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지만, 그 파장은 사고 이후의 그의 삶을 지배한다.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p184

 

  우리는 오기 씨의 성공을 바랄까, 실패를 바랄까. 사고 이후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응원의 마음이 갈림길에 놓여 있는데, 오기 씨가 인생을 살면서 가졌던 저 마음이 내 마음에도 스르륵 자리잡는다. 나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던 건가?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으로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p28

 

  삶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뒤바뀔 순간을 위해 여러 층의 행동들을 쌓는 것 같다. 그러니까 무너질 탑을 쌓아 가는 순간순간의 행동들이라고 해야겠지. 아내의 행동들, 장모의 행동들에 불안감을 느끼는 오기 씨 역시도, 지난 순간순간의 자신의 행적들 때문에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눈에 띄지 않는 듯하지만 내 행동은 세밀하게 기록되어 남는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기록의 페이지가 세상에 펼쳐지는 것.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삶의 헛함은 무엇일까. 그 헛함으로 만들어 버린 구멍은 무엇일까. 사람을 더욱 공포스럽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뜻하지 못한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하나 만들어 낸 떳떳하지 못한 삶의 행동들 아닐까. 아니, 그 행동들이 드러나는 것. 잊어먹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순간, 아무도 모르리라 여겼던 것을 타인에 의해 까발려지는 순간.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p78

 

  어쩌면 오기 씨의 고발자가 되었을 아내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은 오기 씨의 장모다. 오기 씨의 장모는 특유의 분위기로 오기 씨를 옥죈다. 그 장모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오기 씨의 공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한 기억이 선명할수록 더욱 더 커진다. 그래서 오기 씨는 아름다운 나의 집, 정원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 꼼짝할 수 없는 몸과 심리에 놓인 자신을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쓴다.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 p184~185

 

  오기의 불안을, 공포를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작가다. 그러나 또한,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구멍 속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오기를 구멍으로 밀어버릴지 말지를. 오기 씨에게 다시 기회를 오기 씨에게 연민을. 아니면 내 성공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실패에 느낄 안도감을 위해 오기 씨를 더 깊은 구덩이로 쓰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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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점검은 날마다 필요하다


 

    중학생 조카가 <제인 에어>를 들고 나왔다.

    “그 책은 너 취향 아니잖아? 읽으려고?”

    “어. 지금 롤점검 중이야. 게임을 할 수가 없어”

   그래도 게임 대신 선택한 것이 책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TV가 없던 시절엔 나름 열심히 책을 읽더니, 중학교에 들어가고 핸드폰도 생기면서 책하고는 거리를 쌓았다. 특히나 감성적인 애도 아니라 문학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관심이 없는 남학생이다. 그래도 책갈피가 반페이지에 있는 것으로 봐선 거기까진 읽은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라 해서 읽는데 재미없어. 초반엔 그나마 재밌는데 갈수록 더 그래”

  “좀 더 읽다 보면 재밌을 거야. 연애 얘기도 나오고”

   “뭐? 연애?”

  여학생들이라면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그 말에 더 이상 읽을 이유가 없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질 하는 조카를 보며 급 방향을 선회했다.

  “읽다 보면 재밌어. 추리도 좀 나올 거고”

  제인 에어를 추리라고 소개하다니. 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덕분에 제인 에어가 생각나고다시 들여다볼 마음이 들었다. 여학생이라면 제인 에어는 몇 번을 읽었을 텐데. 제인 에어의 어릴 적 학대에 마음 아파하고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사랑이야기에 마음 졸이고, 돈필드 저택을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어떤 운명을 향해 나아갈지를.

  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장점은 생각이 날 때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제인 에어를 읽을 당시엔 <폭풍의 언덕>과 비교하며 작가 샬롯 브론테와 그녀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생애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책 속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각자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브론테 자매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고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남겨놓고 있다. 1800년대의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읽고 있고 읽고 싶은 책, 읽어볼 만한 책으로 꼽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중학생이던 때, 제인 에어를 읽고 세인트 존을 좋아한다는 친구가 있어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제인 에어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분리해서 보면 그 친구의 선택이 전자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해가 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선택해 주는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받던 시대, 강요받던 여성이 자신의 결정으로 사랑과 결혼을 이루는 이야기는 수많은 여성들에겐 얼마나 환상적으로 다가왔을지.

  제인 에어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아이기 때문에 겪었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것이 수많은 여성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일 것이다. 지금 따져보자니 로체스터의 행동들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준다. 사실 세세하게 따져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을 떠나 로체스터의 행동은 현대에서는 비난에서 그치지 않는 범죄 수준이다.

  나이가 들어서 때때로 예전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느낌, 이미지, 문장, 이야기, 그리고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나’가 그리워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책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읽었을 때 머리가, 냉소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듯 보게 되는 책도 있었다. 제인 에어도 가끔 생각날 때, 다시 읽게 되면 중학생 때 느꼈던 로체스터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변해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180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 제인 에어의 시점으로 읽어 나가면 다시금 그 마음으로 보게 될지 어떨지.

  인생이란 어떤 책을 읽어야 되는 나이가 있긴 한가 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이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래서, 조카에게 제인 에어의 페이지가 조금 더 넘어가게 도와준 롤점검에게 큰 공을 돌리고 싶다. 나 또한 덕분에 제인 에어에 대해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롤점검은 매일 하면 좋겠다. 특히나 방학 즈음, 그 시간만큼이라도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어떤 책을 읽고 감흥을 느끼는 건 개인차, 취향이기도 하지만 ‘시기’라는 것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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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 , 박선경 (그림) .

 

 

 

    의도한 것인지 이기호의 소설은 읽기 전부터 웃음이 유발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웃음이 길고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에 함정이 있다. 이 책도 그 중에 하나다. 제목에서 주는 느낌,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속에 담겨진 웃다 앓을 이야기들. 그런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는 소설.

   이 소설집도 최근 여러 편의 소설집의 계보를 잇는 짧은 소설의 묶음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로 페이지가 정해진 소설의 흐름이 어느덧 짧은 이야기로 바뀌는 건가. 최근 출간된 여러 편의 소설에서 이런 경향을 봤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자의, 출판계의 의중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후자일 수도 있는 게 특정 출판사에선 아예 짧은 소설 위주의 시리즈를 기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것을 봐선 이런 분량의 소설을 작가에게 요구했겠거니 싶다. 이런, 그 출판사가 이 출판사였다. 정이현의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같은 스타일. 소설의 분량인들 무슨 상관이랴. 글이, 이야기만 좋다면 그것에 마음을 주면 되는 것일 뿐.

  어쨌든, 이렇게 짧은 소설의 계보에 이기호도 참여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전반적으로 몸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예사스럽지 않다. 움직이고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 그 모습이 어째 뒤뚱뒤뚱 허둥지둥 위태롭기만 하다. 소설의 세계가 상상이 아닌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타게도 안쓰러운 모습들을 보인다. 이기호의 전작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현실적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낮은 곳으로 임하라>의 청년들의 이야기가 맴돈다. 소설집의 제목이 짧은 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문장이었다. 계속되는 취업의 실패를 겪는 청년들의 표정이 이 제목과 겹쳐진다. 그래도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겠지. 부모에게서 사업자금을 얻어낼 형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다행이지 않은가, 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으니까.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게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가르침이었다.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 설령 눈높이를 낮춰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월급에서 학자금 융자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라…….

강원도에 갔다 온다 한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거기 가면 눈높이 따윈 없겠지,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p25~26


  한편, 현대 사회 속에서 가상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이는 사람들은 많이 볼 수 있다. SNS의 세계에서 자신을 가상하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들. 이에 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이 인터넷상에서 가상의 나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관해서 정이현의 짧은 소설집에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그 두 이야기를 비교하는 맛도 좋을 듯하다.

 인생은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 같은 것일 게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쉽다고 세상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계는 삶의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들만을 한다.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그러니 ‘넌 왜 그러고 있니?’ 같은 뉘앙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린다. 돌아보면 모두 힘겨운 삶에 허덕이고 있으면서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너만 왜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무언가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버팅기며, 들어갈 틈을 주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p184

 

  힘겨운 삶을 버팅기며 살아가면서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일까.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 그것이 포기의 낙심의 말로써가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의 말로써 건네고 듣는 말로.

 

그 형 딸아이 말이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내 오촌 조카가, 제 아빠 얼굴을 쓱 한번 문지르더니 귀에서 뭔가를 쑥 빼내는 거야. 그러면서 “아빠,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더라고. 그게 뭔지 알겠어?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그래, 그게 바로 보청기였어. 알고 보니 이 형이 교통사고 당했을 때, 그만 청력도 많이 손상되었다나 봐. 그런데도 그 귀로, 그 청력으로, 이십 년 넘게 가수 생활을 한 거였지……. 그걸 이 세상에서 오직 딸만 알고 있었던 거고. 나? 나는 형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어. 그저, 그 형이 고장 난 귀로 살아온 이십 년을 생각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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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변경합니다

 

장 퇼레, 자살가게


   이런 가게가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죽는 방법을 검색하며 함께 죽을 사람을 찾는 요즘의 분위기에서 온라인을 벗어난 오프라인에서 

‘자살’ 방법을 친절히 안내해주는 가게가 등장한다면!

  자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살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들을 위해 철저한 맞춤서비스를 행하는 가게가 있다. 이 가게는 가문 대대로 자살용품을 판매해왔고 여전히 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수익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용자가 많다는 얘기다. 

  이 상점의 판매물품을 한번 보자. 어떤 목매달기 총과 칼, 밧줄, 독약은 물론이고 독이 묻은 사과와 투신용 시멘트 등 죽을 수 있는 모든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해 손님들을 위해 친절과 적극적인 서비스를 행한다. 죽지 않으면 전액 환불!까지도 해주는 극강의 서비스 마인드로 상점을 운영하는 이 가게에 가업을 이을 아들 알랑이 태어난다. 주인인 미시마 튀바슈는 칼과 총의 전문가이고, 아내인 뤼크레스는 독극물 전문가이다. 장남 뱅상과 딸 마릴린이 있기에 굳이 알랑이 태어나지 않아도 가업을 이을 자식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저 알랑은 오직 자살용품을 시험해보다 태어났을 뿐이다.

  알랑은 출생부터 이 가게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태어났다. 그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애가 웃네!”라고 하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좋아하지만 이 가게에선 발끈한다. 웃는 게 아니라 입가 주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튀바슈 가문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구요”


"벌받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서 자살자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쟤가 뭐란 줄 아십니까? 아 글쎄, '자, 살자!' 고 하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p39


  알랑은 가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웃는 인상으로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가게 인사법은 “명복을 빕니다”라고 가르쳐 주고 손님들 앞에서 흥얼거리지 말고 웃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가게는 음침한데도 화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푸른 하늘 그림을 그리고 좋은 꿈꾸라고 인사한다. 탁월한 긍정과 낙천적인 알랑의 행동에 가족은 걱정이 한가득일 수밖에 없다. 보통의 가정에 괴짜 하나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듯 괴짜 가족에 보통의 아이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가족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욱 더 알랑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고치는 개구쟁이 아이가 어떠한 구박에도 주눅들지 않고 여전히 개구쟁이짓에 빠져 있듯이 알랑은, 자기만의 개구진 활동에 열심이다.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가족들에게 알랑의 행동들이 ‘튀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알랑과 어떻게 다른가. 큰아들 뱅상은 반 고흐에서 딴 이름인데 그는 식욕부진증 환자로 한시라도 붕대를 감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거라고 믿으며 어두운 그림만 그린다. 뱅상은 삶을 끝장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유원지, 자살 테마파크 모형물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선 돈을 내고 사격장에서 과녁이 되거나 감전사, 익사 등의 방법으로 죽을 수 있다.

  마릴린은 먼로의 이름을 연상하게 하지만 먼로와는 달리 통통하고 거북스런 몸매를 가지고 있다. 마릴린은 이런 자신을 창피해하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티셔츠에 ‘사는 게 지겨워’라는 문구를 달고 있다. 마릴린은 생일선물로 받은 주사기를 가지고 침샘에서 독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자살자에게 죽음의 키스를 판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엔 그 사람에게 키스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어쩐지 음침하고 우울할 것만 같은 이 가게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알랑의 문제적인 행동들 때문에 시종일관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고 코믹한 느낌이 가득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작가 장 퇼레의 글솜씨가 책을 보는 내내 웃게 한다. 그런 마음이 된 듯 가족들 역시도 어느덧 원하지도 않게 알랑의 긍정에 중독되어 삶에 대한 희열을  찾아가고 심지어는 알랑이 없는 동안엔 알랑을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서툴거나 부족하면 서툴고 부족한 그대로 삶은 스스로 담당하는 몫이 있는 법입니다. 삶에 그 이상 지나친 것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다들 그 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삶이 말살하려 드는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좋은 면에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요. 목매달 밧줄이나 권총 따위는 여기 이곳에 맡겨두고 말이죠. 요즘 손님처럼 겁에 질리고 불안에 떨 때 밧줄이든 뭐든 목에 걸고 어디 한번 잡아당겨보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 깨지는 건 순간이죠. 무릎 아프지 않으세요?" p154


  자살가게에서 이런 말을 할 거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자살가게는 희망을 파는 가게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알랑에게는?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있다는 알랑의 묘사에 웃음띤 알랑을 상상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그 묘한 느낌을 흔들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냉소와 슬픔이 섞인 그림이었다. 가족들에게서 느낀 것이 코믹이었으니까. 이 결말을 생각했을까. 얼마간 자살가게의 살자가게로의 변화는 예측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한 손으로 버티며 꾸준히 올라간다. 이제 가족과의 거리는 불과 3미터 남짓. 스웨터를 입은 등짝과 바지 위로 네온의 광고문안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알랑은 붕배를 단단히 틀어쥔 채, 지난 일들에 대한 그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움도 없는 덤덤한 마음으로 저 위 가족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흔들흔들 오르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들 모두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갑작스런 신념, 저 얼굴들에 빛나는 환한 웃음이야말로 알랑의 일생일대 걸작이나 마찬가지다. 2미터가 남자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튀바슈 부인은 난데없이 어린 시절 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듯 가까워지는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알랑의 임무는 완수된 것. 순간……그는 손을 놓는다! p209


   희망에 전염된, 다시 웃음을 찾은 가족들과 사람들은 이제 찾은 행복한 기운을 잘 유지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알랑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울에 허덕일 때,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이 힘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마음이 되어 알랑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허무란.

 

    "……잠이나 좀 잘래."

     어차피 내일이면 또 살아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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