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전사

 

 

스티그 라르손, 밀레니엄: 벌집을 발로 찬 소녀

  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정말은 끝이 아닐 때가 있다.

  머리에도 어깨에도 엉덩이에도 총알이 박힌 채 온 몸에 피범벅이 된 리스베트가 과연 살아날까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떡하든 그 상태로 죽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3부의 시작은 심각한 상태의 리스베트를 병원에 옮기며 치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문제는, 2부의 모든 ‘악’들을 찾아내고 근원을 찾아 처리한 리스베트가 여전한 ‘범죄자’ ‘살인자’로 잡혀왔다는 것이다. 이 심각한 상태의 환자가 살인자인 경우, 과연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는 있는 걸까.

 

   악의 한뼘쯤 되는 살라 역시도 머리에 도끼가 박힌 상태에서 살아나 호시탐탐 같은 병원의 리스베트를 죽이려 한다. 이들 부녀의 연은 정말 질기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또한 살라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운 악의 중심, 세포내 비밀조직 역시 살라는 제거하려 한다.

   악은 그보다 더 막강한 악에 의해 쉽게 제거된다. 그리고 악은 정의와 맞붙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건의 배후와 음모가 밝혀졌다고 해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팽팽하게 유지되는 악의 축과 정의의 축의 싸움은 이제 법정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또한 걱정이 앞선다. 법은, 법을 집행하는 기관은 과연 어느 편일까. 그 자체도 국가기관으로서 ‘공정’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정권은 과거 국가기관이 행한 모든 잘못된 행위에 대해 사과도 법적인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그것을 덮기 위해 안달한다. 하긴 현재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새삼 과거의 일을 덮으려 하는 것이 뭐 놀랄 일인가. 국가기관의 조직 속의 그들은 ‘인간’, ‘인간성’ ‘양심’ ‘정의’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의 행동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맹목적일까. 악의 평범성을 들이밀어 애써 이해를 해보려 한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뿐이다.

 

    반면 리스베트를 돕는 사람들은 ‘정의’ ‘인간성’ ‘양심’을 위해 조직화되어 움직인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이 법정에 등장하여 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리스베트의 변호사를 맡은 미카엘의 여동생 안니카를 비롯하여 경찰 소니아와 모니카, 밀턴 시큐리티 요원 수산네 등. 그리고 역시나 이들과 함께 활약하는 리스베트의 모습은 마치 여전사들을 연상케 한다.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3부에서 장이 시작될 때마다 갑자기 여전사들의 이야기를 끌어 들이고 있다. 밀레니엄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피해자로 등장하는 것은 ‘여성’이었는데 이젠 이들 피해자인 여성을 돕는데 ‘여성’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서 모두가 연합하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역사서들은 단순한 병사였던 여전사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다. 무기 다루는 법을 훈련하고, 어떤 부대에 속하여 남성들과 똑같은 조건하에 적군과 맞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그 이름없는 여성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여성의 참여 없이 이루어진 전쟁은 없었다. 1권 p8

    

 

  역사에서 ‘여왕’은 남자들만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다가 겨우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왕’이라는 점이 주요했다. 리스베트를 돕는 여성들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능력을 지니며 활약하는 터에 이들을 특별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뿐만 아니라 피해 여성들 역시도, 그저 적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던 여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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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이 비엔나

 

 

   이 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인물 두 주인공은 기자 미카엘과 잡지 자료 조사자 리스베트이다. 미카엘이 기자로서 사건을 추리해나간다면 리스베트는 천재적인 해커 실력으로 숨겨진 정보를 발견해낸다.

   미카엘이 기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터뜨린 사회고발로 인해 고소를 당해 기자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미카엘이 밀레니엄 시리즈에서 ‘문제’를 관여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러나 리스베트는 ‘문제’에 관여하지만 본인 자신이 ‘문제의 대상’이 되어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2부가 대표적으로 리스베트의 문제를 선포하고 있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는 바로 리스베트 자신이다. 1부에서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개성강한 리스베트의 모습에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순탄한 삶을 살진 않았으리라는 느낌에 맞게 그녀의 과거는 현재의 사건과 연결된다.

 

    1부에서 사건을 마감하고 새로운 기사거리를 찾던 미카엘에게 새로운 첩보가 접수된다. 성매매와 인신매매에 관한 것이었다.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엄청난 사건임을 알게 된 미카엘은 정보제공자인 다그 스벤손과 미아 베리만과 연락하며 조사를 하던 중 그 둘은 총살된 채 발견된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선 총 하나만이 발견되는데, 지문은 리스베트의 것이었다. 이로 인해 헤어져 있던 미카엘이 리스베트를 찾는다. 살인자로 지목되어 수배된 리스베트를 미카엘은 도우려 하지만 그녀는 꺼린다. 자신의 과거가 언론에 공개된 리스베트는 자신이 잘 아는 방법으로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사건을 추적해가면서 금발의 거한과 살라가 이 사건에 연관되고 리스베트의 전 후견인 비우르만이 이들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사건 속에 리스베트와의 관련성도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성매매, 인신매매의 줄줄이 비엔나는 경찰, 법조계, 권력층이었다. 그 중에서도 비밀에 싸인 이름 ‘살라’.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서도 사건의 대상은 여성이다. 희생자는, 범죄의 대상은 여성 한 개인이 아니라 ‘여성들’이다. 단순 폭력에 의해 살해당할 리가 없다. 살해를 위해 폭력당하기보다 성폭력 때문에 살해당한다. 어린 아이들일 때부터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처럼 매매된다.

   리스베트에게도 이런 과거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후견인에게도 성적학대를 당한 리스베트의 삶은 사회에선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분류되어 지속적인 후견인이 필요한 사람이라 정의된다. 하지만 표면적인 것에 치중된 이 사회시스템에서 진정한 리스베트를 보아주는 이는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 내재한 분노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를 알려 하기보다 ‘결과’에 그녀가 ‘드러낸’ 것에 치중하는 사이, 리스베트는 계속 폭력적인 살해용의자로 덧씌워진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는 얽히고 얽힌 이야기가 넘쳐나 그 추적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했다.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또한 추적 또한 동시다발적이다. 문제를 숨기려는 이들은 숨기기 위해 더더욱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더욱 얽힌 거미줄을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더욱 사악한 이들이 줄줄이 얽힌 거미줄로. 또한 그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된 거미줄로. 거미줄 속에 꿰인 수많은 희생자와 수많은 가해자와 절대 악이 엮인 거미줄이다. 끊임없이 거미줄을 엮는 사회적 악의 존재는 누구인가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의 핵심이었다. 1부가 사건의 명쾌한 해결을 한 것에 비해 2부는 깔끔한 마무리로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대신 3부로 이어진다.

  온갖 악들의 줄줄이에 지칠대로 지친, 익숙함에도 드는 마음들을 3부에서는 통쾌하게 날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동안, 리스베트의 당차고 정의가 담긴 분노에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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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친절


 정세랑, 은행나무, 2014-12-24


   삼남매는 곧 헤어질 시간을 앞두고, 여행을 떠난다. 각자의 인생을 위한 길이 있기에, 그 길이 서로 다르기에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 그 헤어짐의 시간을 앞두고 형제애를 다지고 싶었던 것이라 해두자. 유난스런 말과 행동도 없고, 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는 듯 뚱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한 차를 타고 가는 삼남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특별히 끈끈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는 사이. 그래서 유난스럽지 않은 그들의 여행은 ‘각자 해수욕을 하고, 모기에 시달리고, 해산물을 먹는’ 코스로 이루어진다. 돌아오는 길엔 배고픔에 서둘러 미묘한 형광색을 띠지만 표준적인 바지락 칼국수를 사먹으며 머릿속으로는 얼른 각자의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이 재인, 재욱, 재훈이 함께 한 휴가다.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된다. 사실 가족이라 해도, 형제들이라 해도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들 남매 역시 그렇다. 재인은 대전으로 재욱은 아랍의 공단에 파견을 갈 것이다. 재인과 열 세 살, 재인과는 열 살 차이가 나는 고등학생 재훈만이 서울에서 엄마와 산다. 작은 실수에도 폭언과 때론 극적인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와 함께. 사고가 난 적 있는 재훈은 그 이후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계속 신경을 쓰는 걸 어려워한다. 오죽하면 중요한 말이나 중요한 일에 다른 색깔로 표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재훈이었다. 그들이 알아챈 것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다. 재훈은 자기 마음대로 엘리베이터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재인은 손톱이 부러지지 않았다. 재욱은 시야가 이상했다. 붉어지는 것이다. 아랍의 플랜트에서 일하는 그에게 설계와 설계 사이설계와 실제 사이 간극이 클수록, 잘못 시공되었을 때, 위험이 클수록 시야가 붉어진다. 마치 트러블 감지기가 내장된 것처럼. 그리고 그들에겐 이상한 소포가 배달되어 왔다. 누군가를 구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초능력이라기엔 미미한 이 증상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으며, 누구를 구하라는 말인가.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던 재인은 실험실 사고가 빈번하니 손톱을 배양한 판을 만들어 실험실 사람들의 옷에 넣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재인이 도움을 준 이는 자신의 룸메이트였다. 스토커로부터 공격당하던 친구에게 손톱을 활용하고, 강하고 단단해진 자신의 손톱으로 사고로 아파트에서 추락하던 엄마를 구조하기도 한다. 교환학생으로 조지아 염소농장에 간 재훈은 환각 버섯을 먹은 총을 든 이들로부터 친구 세 명을 구한다. 심지어 그들은 재훈을 괴롭히던 아이들이다. 재욱은 전쟁에 의해 고아가 되고 인신매매단으로 끌려갔을지 모를 두 아이를 구한다.

  이들 애틋하지 않은 세 명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각자의 경험을 떠벌이지 않는다. 그저 히어로 영화를 나누며 담소하며 각자의 생각에 빠질 뿐이다.


 “이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p164


  세상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이들 세 명처럼 그래도 ‘어떤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내게 ‘넌 누군가를 구해야 해’라는 사명감을 심어준다면 나도 모르게 언제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도대체 뭐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능력이나마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래, 그런 것이 마음가짐 아닐까 싶다.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한 제 나름의 납득도 다 달랐다. 재인은 먼 미래에서 경아의 후손이 일을 도모했을 거라고 믿었고, 재욱은 사막에서 잘 보이는 별에 있는 다른 문명에서 온 신호라 여겼고, 재훈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바지락조개를 의심해서 해양과학 쪽으로 진학할까 고민 중이었다.

 여름에 시작되어서 겨울에 끝난 삼남매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삼남매는 가끔 동시에, 혹은 조금 어긋난 순서로 생각하곤 했다.

 이 모든 일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p166~167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무심한 듯한 이 삼남매의 짧은 여행의 경험은 그들이 떠벌이며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서 좋듯이, 그들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계속 그들의 작은 친절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잔잔한 다정함을 쏙쏙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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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동화집
실비아 플라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를 위한 엄마의 동화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따스한 이야기라고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하지만, 실비아 플러스가 쓴 동화라는 걸 아는 순간, 약간은 생각이 달라진다. 아련함과 애틋함이 더해진다.

  실비아 플러스는 천재 시인이라고 불린다. ‘천재’ 그리고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녀는 1932년생이다. 그녀가 공부하고 완성하게 글을 쓰던 시기는 1950~60년대. 그 시기는 여성에겐 무엇이든 제한적이었고, 관대하지 않았던 시기다. 실비아 플러스는 시인으로, 동화 작가로, 소설가로, 화가로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가진 예술가다. 그리고 천재적 재능을 가진 여성 예술가에게 익숙한, 우울증 그리고 자살. 실비아 플러스 역시 서른 살에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방법으로 자살한다. 그래서인지 실비아 플러스를 둘러싼 느낌엔 비운의 이미지가 한웅큼 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실비아 플러스는 아이들을 위해 <이 옷만 입을 거야> <체리 아줌마의 부엌> <침대이야기> 세 편의 동화를 남긴다. 그녀는 시인인 남편 테드와 결혼한 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구상한다. 태어날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야기들을 구상한 그녀다. 내 아이에게 들려줄 동화를 지으며 기뻐하는 실비아 플러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두 아이를 남겨두고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까지 챙겨두고 자살한 그녀의 행동의 간극이 놀랍다. 남편이 외도로 별거 한 이후 몇 개월만의 일이다. 그녀가 자살할 당시의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고 하고, 그녀의 아이들은 추위 속에 자주 아팠다 하고 그녀의 집엔 전화기도 없었다고 한다. 별거와 함께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어 하던 속에 우울증까지 겹친 그녀의 선택은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이 옷만 입을 거야>는 일곱 형제의 막내 맥스 닉스의 이야기다. 어느날 배달된 상자 속엔 겨자색 옷 한 벌이 있었고 아빠 먼저, 이후로 형제들이 차례로 이 옷들을 입는다. 하지만 모두 이 겨자색 옷이 자신들이 하는 활동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차례로 다음 동생들에게 전달하고 엄마는 그 아이에 맞춰 매번 옷을 수선한다. 그리고 기다리던 시간, 드디어 맥스 닉스에게 전달이 되었다. 자기만의 정장 옷 한 벌이 갖고 싶은 일곱 살 아이가 여섯 형제를 거쳐 자기에게로 온 겨자색 옷을 소중히 하며 기쁘게 입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체리 아줌마의 부엌> 속엔 요정들이 등장한다. 체리 아줌마의 부엌은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공간이다. 하지만 냉장고, 세탁기, 토스터, 커피메이커, 거품기 등 가전제품들은 자신의 일보다 다른 이의 일들을 부러워한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부엌을 관장하는 소금 요정과 후추 요정은 다른 일을 ‘경험’하도록 해준다. 냉장고가 자두 타르트를 굽고 커피메이커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달걀 거품기는 블라우스를 다리고 다리미는 와플을 만드는 등 그들은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후추요정과 소금요정의 아슬한 타이밍으로 일을 해결하면서 하루가 마감되지만 각각의 기기들은 그들 일의 소중함을 깨닫는 하루가 된다.

   <침대이야기> 속에는 온갖 재미있는 침대가 나온다. 주머니 침대, 간식 침대, 탱크 침대, 코끼리 침대, 높이 뛰어오르는 침대, 하늘을 나는 침대, 바닷 속을 가는 침대, 북극 침대 등 상상할수록 즐겁고 재밌는 침대 이야기에 푹 빠질 수 있다. 침대 맡에서 신기한 침대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 속에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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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 가고 싶네


 안보윤, 알마의 숲


   소년은  삶을 접으려 한다. 어느 숲 속 소나무에 밧줄을 매달고 소년은 머리를 넣는다.

  힘겹게 발목이 빠지는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소년이 챙겨간 것은 밧줄과 이어폰.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처럼 소년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의 말은 이승을 떠나는 소년에게 전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그치고 비난하면 아이들은 더욱 과격해지죠. 화해와 용서의 움직임으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제자리에 멈춥니다.”

 “웃기고 있네”


  이승과의 교신을 거부하듯 이어폰을 눈 속으로 집어 던진 소년은, 그렇게 고리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그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왜 소년이 자살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 아들 자살도 못 막아”라는 기사들이 실리도록. 소년이 고리 속으로 머리를 넣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목표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산장이었다.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호한 어느 지점, 소년은 숲 속 알마의 산장에서 알마라는 소녀와 소녀의 삼촌과 올빼미를 만난다.

  

 나는 아침마다 반 뼘씩 자라난 감정의 가지들을 쳐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생이었다. 혹독하게 감정을 잘라낼수록 삶의 가능성이 커졌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증후군이라 이름붙이는 겁니다. 따님의 증상이 워낙 특이해서요. p38~39 


 알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알마는 감정을 키우지 않는다. 기쁨에서 슬픔에도 눈물은 나오니까.


 늘 궁금했었다, 왜 하필 눈물일까. 분노로 뇌압이 상승하면 죽는다든가 웃음소리의 데시벨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죽는 방법도 있는데 왜 하필. 그런데 알았다.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은 거세되었다. 나는 누구도 애틋해하지 않고, 무엇도 아쉽지 않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무엇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텅 비었다. 나를 지키는 엄마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엄마의 병을 눈치채고도 놀라지 않고, 엄마와 헤어질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가래떡이 되어 나타났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이 병이 내게서 빼앗아간 건 인간의 영역이었다. 나로 하여금 짐승의 영역에서 살도록, 이기심과 본능 외에는 필요치 않은 황폐한 영역에서 살도록 했던 것이다. 비겁하다, 비겁하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눈밭을 뛰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p123~124 


  이런 알마이기에 소년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을 두려워하는 소년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지탱하는 알마 사이에 유대는 형성이 될까.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될까.


죽음이 왜 두려워? 무섭고 두려운 건 삶인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어, 사실은 알마도 그렇잖아,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봐, 그래서 죽어버릴까봐 조마조마하잖아,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책 읽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잖아. p128


  알마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박감으로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산다. 오히려 알마에겐 정열적으로 살아갈 수 없이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소년은 그토록 청소년의 마음을 잘 아는 ‘엄마’가 자신의 아들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힘겨워한다. 삶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되는 것은 알마가 될까. 소년이 될까. 소년의 힘겨운 삶은 알마가 겪는 것에 비하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어리석고 멍청하고 성급하게. 하지만 알마의 숲으로 가게 된 것은 소년의 힘겨운 마음과 상처 때문이다. ‘누구에 비해서 부족하기에’ 소년의 상처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소년의 상처는 소년에게는 그 상태 그대로 절대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p132


   알마의 삼촌은 소년에게 말한다. 그 숲에서 소년은 ‘노루’로 불렸고 다시 소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문’이 열려야 한다. 소년 자신도 모르는 새 통과해 온 그 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언제 죽을 모르는 알마가 생을 절박하게 즐기는 것처럼, 그 숲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 아닐까. 새삼 알마가 삼촌이 존재하는 알마의 숲이 있기는 한 걸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순 있는 걸까. 어쩌면 소년의 환상에서 만들어 냈을지 모르는 몽환의 그 숲에서 소년은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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