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죽고 싶습니다



  오베는 쓸쓸한 남자다. 그 역시 노년의 외로움에 고리를 만든다. 59세가 노인이 맞긴 한가? 항상 함께 해 오던 그의 아내도 곁에 없다. 그리고 인생의 1/3을 보낸 직장에선 그의 나이의 절반쯤인 관리자들이 말한다.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냐”라고.

  오베는 자신의 원칙이 있고 그를 충실히 지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베의 원칙을 ‘흑백’이라 칭한다.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인 아내가 죽고 직장에서도 잘린 오베. 외로움 더하기, 자신이 할 일이 정말없구나라고 느끼는 오베의 선택이 애잔하다.

  한국의 자살사망률은 여전히 세계최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이 기록은 한두 해 세운 것이 아니다. 자살의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이다. 특별히 한국인들만 우울증에 잘 걸리는 기질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노년의 자살도 높다. 노년의 우울증엔 경제적 이와 더불어 외로움과 쓸쓸함이 큰 몫을 차지한다. 오베도 시간에 밀려 이 전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 오베는 환갑도 되지 않았는데.

  오베는 오베는 친절할 수 있는 남자지만 친절한 ‘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친절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의 포장도 없이 단순하고, 직선적이고, 뻣뻣한 행태로 행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러나는 모습에 질겁한다. 한국에서라면 웬 꼰대?라고 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베가 꼰대라고 불리면 억울할 듯하다. 오베가 가지는 삶의 철학은 확고하고 그것은 오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부당한 것을 정의로 둔갑시키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항상 알고 있는 원칙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을 꼭 잡고 있다. 그래서 오베는 답답하게 보이고 다른 이들과 부딪치지만 이 사회에서 어떤 경우라도 잊지 않아야 할 최상의 원칙들이 인간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오베가 융통성없고 고루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오히려 오베는 사람들이 ‘꺼려’ 하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편견없는 사람이다. 다만, 오베는 표현력만을 ‘좀 더’ 길러야 한다.


아마 그녀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p103 


  ‘누군가’는 오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거침없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린치당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린치를 거두어 가는 것고 ‘누군가’인 것이다. 오베는 ‘뒤치다꺼리’를 남겨주는 이웃 사람들오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 곁으로 가는 것을 미룰 수밖에 없다. 여전히, 오베는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슬픔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슬픔은 대신 서로를 더 멀리 밀어낼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p333


  사람들이 원칙을 깨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것을 정리해 주면서 오베는 이웃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그것은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밀어내지 않고 공유하게 되는 그들의 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이들의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라고 하면서도 생존을 들먹이며 공존을 무색케 하고 있다. 공존이라는 말과 방식이 있음에도 어느새 생존이 급박성을 강조하며 ‘경쟁’이 당연한 것처럼 만들고 있는 이 사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서로 잊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의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 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p436


  사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향해 가기 전까지 좀 더 아름답게 살고 행복하게 죽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치열함이라는 게 꼭 필요한가. 남을 죽여야 내가 죽는 상황이 피해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렇게 만들어가는 상황이 지속되지만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돌아보면 작가의 말처럼, 내 사랑하는 이들이, 내 이웃들이 죽고 홀로 남겨진 나 자신이 가장 안쓰러운 모습이 아닌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내가 오베와 같은 사람이 되고 오베의 이웃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슬로우 욕구 5단계의 노인들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제목을 보고 창문 넘어 도망친 노인의 작가 책인 줄 알았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 유사함. 내용 역시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도 될 듯하다. 작가는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로 역사 소설, 어린이책, 유머, 에세이집 등의 여러 장르에서 두루 글을 써온 작가이다. 또다른 이력이라면 15년 동안 수중고고학자였다는 점이다.

   창문을 넘으신 노인에 비해선 까마득한 젊은 할머니, 79세의 메르타 안데르손과 네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다. 메르타 할머니와 친구들 역시 지금, 요양원에 갇혀 있다. 이 다이아몬드 노인 요양소는 메르타 할머니가 지내기엔 너무나 버겁다. 잠은 8시에 자야 되고 간식도 없고 어쩌다 한번 산책이 허용된다. 메르타 할머니는 이에 생각한다. 차라리 감옥이 낫다고. 감옥은 하루 한번씩은 꼬박 산책을 시켜준다니까! 그래서 할머니는 결심한다. 감옥에 들어가기로. 감옥에 들어가야 할 그 좋은 이유를 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공유한다. 그리하여 메르타 할머니의 뛰어난 언변과 열의에 노인들은 모두 은행강도가 되기로 결심했고 실행한다.

   쭈뼛거리지도 않고 아주 유머러스하고 시종일관 이게 뭐야, 싶은 이야기가 바로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의 감옥에 가기 위한 처절한 은행털이 계획과 실행 과정에 담겨 있다. 황당하고 무모한 계획, 그러나 끝까지 실행하는 할머니들의 치열한 의지. 그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아니면 운이 이들 노인들에게 전해 내려온 듯한 전개 속에서 황당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 노인들의 범죄 행각의 성공 여부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노인들이 ‘돈’을 노린 범죄를 꾸미지 않는다는 진심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계속 그렇게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노인들 역시도 경찰서에 찾아갔을 것이다.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라는 이미지는 창문을 넘어야 했던 할아버지나 감옥에 가기로 결심하는 할머니 얘기에서 거듭 놀라움을 겪는다. 시설이나 여러 가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을 텐데. 다이아몬드 요양소와 같은 규칙은 이 요양소만의 특성이고 원칙이겠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잘 정비된 복지제도에서 이분들이 왜 이렇게 적응하지 못하시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르타는 유난히 빨리 늙어 갔고 가정을 갖는 꿈은 자연히 포기해야 했다. 아이가 없다는 슬픔은 너무나 큰 것이었지만 메르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 p45


   나 역시 속았다. 어느 곳보다 잘되어 있다는 복지국가 스웨덴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좀더 세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너무나 월등하다보니 스웨덴이 복지제도의 완벽한 이상이라 착각한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p208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다. 소설 속 스웨덴 요양소의 풍경을 살펴보면 어쨌든 노인들은 기본적인 생계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물론 식사 외에 간식이 없고 더 풍부한 메뉴에 대한 요구가 있지만 형편없이 열악한 시설에 대한 불만과 학대, 억압으로 인한 인권유린이나 착취에 힘들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이유가 대한민국이 “기본적인 의식주가 열악하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으로”라는 이유가 더 많다면 스웨덴에선 “자유!”에 더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지금 세상은 무언가 비정상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인들이 나쁜 범죄를 저지르면서야 비로소 자기들 속에 숨어 있던 힘을 체험하고 존재를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p244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말한 5단계가 떠오른다. 인간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이것들이 충족되어야만 자아존중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를 대입하면 우리의 메르타 할머니는 이미 다른 것은 충족되어 있고 자아실현의 욕구를 너무나도 펼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경제적인 활동이 없는 존재로 이미 신체적인 활동력이 떨어지는 존재로 그들을 치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제대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마침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거야! 엄마는 이전에는 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기가 아닌 남들의 마음에 들려고만 했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완벽한 아내와 엄마가 되기 위해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런 다음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세대에 속해 있었던 거지. 아빠는 그런 엄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지냈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했어!”

 “맞아, 너도 알겠지만, 되돌아보면 아빠는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았어. 이제 엄마는 잃어버린 자기만의 삶을 되찾으려고 하는 거야.”p276


  제도의 필요성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제도는 인간의 필요를 뛰어넘는다. 오히려 제도가 인간의 필요를 억압한다. 제도가 순기능을 역행하여 역기능으로 고착되면 인간은 한없이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지금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이거니와 안전에도 위협받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노인들이 나쁜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모는 이 사회는 정말이지 잘못되었다. 인간의 욕구를 한없이 1,2단계에 머물도록 만드는 이 사회에서는 산책을 하루에 한번 가기를 원하던 메르타 할머니처럼 하루에 세 끼를 먹을 수 있어서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다른 메르타 할머니를 만들어 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에게 전하는 메시지


프레드릭 배크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소설 속 아이 엘사는 낯설지 않다. 이제 동화,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엘사와 같은 아이는 독창적이지 않고 전형적으로 느껴진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생각 있고, 생각 많고, 감수성 있는 아이. 그래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는 엘사의 할머니다. 사람들은 할머니더러 미쳤다고 하지만 엘사에겐 조금 엉뚱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엘사는 할머니를 천재라 말한다. 할머니의 과거를 보니 의사로 일하면서 상도 받았고 전세계 구조가 필요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악의 무리와 싸웠다. 그래서 또한 엘사에게 할머니는 슈퍼 히어로다. 그리고 항상 엘사의 편이다. 또한 엘사에게 세상에서 각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니까 엘사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럴듯한 이야기들은 전부 다 미아마스에서 생겨난다. 깰락말락나라의 나머지 다섯 개 왕국은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다. 미레바스 왕국에서는 꿈을 지키고, 미플로리스 왕국에서는 슬픔을 저장하며, 미모바스 왕국에서는 음악을 만들고, 미아우다카스 왕국에서는 용기를 만든다. 미바탈로스 왕국에서는 ‘끝없는 전쟁’에서 무시무시한 그림자들과 맞서 싸운 용맹한 전사들을 양성했다. p29~30


  다만 지금은 문을 열고 볼 일을 보고, 말을 과격하게 하며, 전도하러 방문하는 이들에게 페인트 총을 쏘아대고, 경찰에게 똥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병원을 탈출하기도 한다. 기억해야 하는 일을 벽에다가 적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고장선생님을 향해 지구본을 던질 줄 아는(결국 던지지는 못했다) 성격이기도 하다.


  교장선생님은 할머니의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로 엘사의 눈을 멍들게 한 남자아이에게 “겁쟁이들이나 여자를 때리는 거야”라고 얘기했지만,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조금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겁쟁이들이나 여자를 때리는 거라니 말이 됩니까!” 할머니는 교장선생님한테 고함을 질렀다. “여자를 때리면 쓰레기가 되는 게 아니라 아무나 때리면 쓰레기가 되는 거요!”p98


  이런 전형적이지 않은 엘사의 할머니는 소설 속 주인공으론 익숙하지만 또래아이들과는 다른 엘사와 만나 시너지를 낸다. 이런 할머니가 한국에 있다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할 것이고 당장 정신병원이나 경찰서 행이 될 거다.

  할머니는 정신병원과 경찰서가 아니라 하늘나라로 갔다. 엘사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지만 할머니가 보낸 편지를 발견하며 조금씩 마음을 치유해 간다. 할머니가 남긴 편지들은 엘사와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 거주 주민들 모두에게 띄운 것이고 이 편지로 인해 할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얘기하던 판타지 동화의 세계처럼 아파트 사람들의 사연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감정적으로도 더 가까워진다. 그들은 모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고 여전히 그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p329


  그런데, 할머니가 남긴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 그저, 할머니는 미안하다고 전해달랬다. 할머니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미안했던 것일까.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할머니와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래, 할머니는 엉뚱한 사람이고 슈퍼 히어로니까.


 현실 세계 속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슬픔과 상실감과 심장 아리는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가시겠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슬픔과 상실감은 변함이 없는데, 그걸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슬픔으로 마비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가방에 넣어서 두고 올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선다. p330


  마침내 할머니의 ‘미안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도 할머니는 엘사와 마찬가지로 슈퍼 히어로니까. 할머니는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상처를 겪는 현장에 있었고 그곳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고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할머니는 엘사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더 이상 그들을 돌보아 줄 수 없다.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는 이는 이제 없다. 어쩌면 할머니는 너무나도 그들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영원히 그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없는 할머니인데. 그러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할머니는 그들이 그들의 아픔을 어딘가 두고 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니까.


인간은 관심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거든, 엘사. 누가 뭐에든 신경 쓰기 시작하면 너희 할머니는 ‘잔소리’로 간주했지만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어. 그냥 존재하는 거지……. p493


  또한 자신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삶에서 할머니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말.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들도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브릿마리가 읊는다. ‘그게 안 되면 존경해주길. 그게 안 되면 두려워해주길. 그게 안 되면 미워하고 경멸해주길.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무엇에라도 접촉하길 갈망한다.’ p4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아버릴 것 같은 날의 행복


프랑수아 를로르, 이지연 (그림)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폭염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삶이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까지야 어쩌랴 해도 온갖 감정의 세레나데에서 허우적대다, 마침내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딱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하루 하루가 잘도 흘러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가 아니라 결국엔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 욕심으로 인한 마음의 방랑을 폭염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심란으로 가려주어 오히려 폭염에게 감사해야 할 때인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해 머언 길을 떠난 정신과 의사 꾸빼 씨처럼 나 역시, 지금 이곳을 떠나 되돌아오면 행복을 끌어올 수 있을까.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행복이라,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고 시도하다가는 머리가 깨질 겁니다. 행복은 기쁨인가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요. 기쁨,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고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단지 순간의 행복일 뿐이지요. 주의하세요.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쾌락은? 아, 그래요! 모든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것도 분명히 오래 가진 않아요. 그렇다면 행복이란 작은 기쁨들과 작은 쾌락들의 합계가 아닐까요? 내 동료 학자들은 ‘주관적인 행복’이라는 용어에 동의합니다. 물론 당신도 그 개념에 대해선 벌써 알 겁니다! p155


   행복은 상대적이었다가 절대적이 된다. 이 삶에서의 행복이란 자꾸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생각이 흘러간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원인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꾸빼 씨가 행복여행을 통해 배운 행복에 대한 의미들은 결국 마음가짐,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전한다. 잘 알고 있는 말들이 어느 순간을 대하면 모두 잊혀진다는 것이 행복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무색케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멀리의 것, 타인의 것을 찾고 비교하느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 행복이라고 거듭 이야기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 역시 거듭된다. 반복적으로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의지와 기억력 부족만을 탓할 순 없다. 꾸빼 씨의 배움에도 나와 있듯이 바로 이러하니까!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이 행복에 대한 의미로 인해 의기소침해졌다면 꾸빼 씨가 찾아온 다른 배움의 의미를 또 끌어당겨 와 억지로라도 행복할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행복의 의미를 발견했으니 위의 말로 그 의미를 지워버려야지. 거센 폭우로 이 폭염을 지워버렸듯이 그렇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사이코패스인가?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프로이트˝ p380

 

   

  그러고 보니 작가 정유정의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청소년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 여행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까지. 그 사이에 ‘심장’이 있었고 ‘7년’이 있었고 ‘28’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나 역시 매니아처럼 작가의 책을 읽어 온 것 같다.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유정 작가가 책을 낸다면 굳이 안 읽는다고 발악할 독자는 아니어서 빗발치는 <종의 기원>의 여론에 힘입어 책을 읽었다. 열렬한 독자층을 거느리고 장르문학의 대가로 우뚝 선 작가답게 이번 신작에 기대하는 이들 역시 많았던 모양이다. 출간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출간 후에도 ‘역시 정유정’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종의 기원>.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인지 <종의 기원>은 심심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좀처럼 “악”의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내 속의 악이 더 악랄한 걸까. 줄거리가 예상 가능하게 흘러 간 것이 흥미가 약한 요인이었다.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이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유진의 행동이, 전개가 예상한대로 흘러가 긴장감이나 몰입감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유진의 행동을 예측하다니, 나 사이코패스인가?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장르가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워낙 넘치고 있기에 웬만한 살인의 이야기엔 극적인 느낌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밥먹으라는 말이 귀찮아 엄마와 이모를 죽인 19세 남학생 사건도 발생한 터라. 살인의 이유와 목적은 익숙한 패턴이고 구성의 쫄깃함이 소설이나 영화를 흥미있게 돋우는 장치가 된 것 같다. 허나, <종의 기원>은 1인칭 시점이 차이가 있다. 어차피 정유정 작가의 소설 속에서 늘 범인을 찾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독자도 주인공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누구와 대립하는지 알고 있으며 명확히 안티를 알기에 주인공이 그 대립에서 이기기를 응원하게 되었을 뿐이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63

 

   그 대립이 약했던 탓일까. 몰입이나 흥미가 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응원할, 감정을 이입할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악을, 내 안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건가. 나는 유진에게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공감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기에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유진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살인의 대상이 자신에게 가까운 엄마와 이모, 그리고 함께 생활해온 친구였다는 이유로 유진을 더욱 ‘악한 본성’의 소유자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악의 어떻게 점화되는가가 작가의 의도라면 “얼마나” 악한 지는 부차적인 요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유진 역시 시작은 자기도 모르는 어느새 살인을 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니까. 그래서 최초의 살인의 기억을 유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좀더 악랄하려면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인물이 되려면 자신이 “살인”의 느낌을 기억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작가의 말대로 하면 작가의 소설에서 가장 ‘악’은 바로 유진이다. 그렇게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애를 쓴다. 그 기억을 모두 잊은 채 마치 기억처럼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진을 조금이라도 옹호라는 측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불만을 가진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206

 

   내 이런 불만을 알기라도 한 듯 작가는 기억을 잃은 채 살인을 한 유진의 행동에 대해 변명까지도 만들어두었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문제가 공감능력의 상실이라고 한다는데 유진은 공감능력이 없었던가? 이렇게 유진의 공감 능력을 따져보는 건 유진이 절대적 악인이라고 생각하려는 이유일까, 그 반대일까. 작가의 의도는 반대인 듯하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 p379

 

   상황에 따른 변화가능성. 본성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발현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 그러나 생존이 더 우월한 본성이고 핵심이라면 생존가능한 방향으로 선과 악을 행한다. 그리고 그 생존가능한 방향이라는 것은, ‘살인’이라는 진화심리학자의 말은 왜인지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아니, 유진의 재판이 진행된다면 유진의 행동에 대한 변론의 말처럼 들린다. 자, 그렇다면 유진의 행동들 어머니와 이모와 해진을 죽인 것은 진화과정이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한, 자신의 경쟁자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 몇 백번을 생각해도 그렇다. 안타깝지만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으로 그것이 그 상황에 더 발현되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를 가진 우리 모두는 유진이라는, 유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최초의 살인은 왜인가. 그것도 생존을 위한 악의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 그 진화의 한 방식으로 문화 또한 선점해왔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만드는 ‘나’의 생존. ‘어떡하든 살아남으라’라는 말이 한없이 공허하게 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