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정산


  

  이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조용조용한 이 기록들은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기에 생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지극히 이 현실적인 기록들이 몽환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상실이란 이름이 뒤덮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작가는 이별을 겪는다.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장례절차를 밟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장례에서 사십구재를 지나 탈상까지의 실제 치러야 할 일들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 소설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큰 사건없이 이뤄지는 전개이다. 아니, 인생에서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사건이기에 이 커다란 사건을 겪은 후의 ‘나’의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나’는 죽은 이를 애도할 시간없이, 내 슬픔을 토로할 시간없이 장례절차를 밟으며 사사로운 것들을 따지고 선택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를 받는 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일, 사망신고서를 제출하는 일, 핸드폰도 해지하고 은행과 보험사에 연락해 계좌를 해지하는 일도 해야 하는 절차를 밝아야 한다. 그 사람이 완전히 사회 속에서 활동했던 모든 것들을 지우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은 자의 몫이자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전의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이 그대로 흘러가야 할 일들엔 신부전증 아버지를 챙기는 일도 포함된다. 아버지와 잦은 말싸움은 기본이고 병원 동행에서 집안일을 혼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버지의 식이요법을 챙기는 일까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를 두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들은 손놓은 채 있던, 엄마에 대한 애도도 없이 멀쩡한 듯 보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가득한 채. “사랑 주던 엄마는 이제 없고, 효도 받으려는 아버지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43년 인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생활엔 어떤 서사가 있기에 그런 것인지. 명령과 복종에 익숙했던 군인 아버지를 엄마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가장이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퇴직 후 엄마의 생활을 간섭하고 힘들게 했다. 엄마의 심장이 고장난 건 아빠의 퇴직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엔 언니의 결혼과 이민과 동생의 박사 진학 등이 있었다. 또한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나’까지 엄마의 생활에 변화와 불안이 한꺼번에 닥친 시기에 엄마는 몸의 문제가 급격히 생긴 것이다. 그런 엄마의 결혼 이전의 모습까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자랐고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는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늘 우리는 누군가가 영영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의 뒷모습을 쫓는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엄마’를 떠올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엄마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에서 ‘인간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맞닥뜨리는 당연한 현실이다. 지금은 나 혼자만 겪는 일인 듯하지만 모드가 겪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 죽음으로 승화된 죽음으로 상실을 소거해 나간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나’는 되돌아가는 것이겠지.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물론, 그렇다고 엄마의 죽음이 슬픈 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슬픈 건 슬픈 거니까.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비단 탈상까지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릴 것이다. 한결같이 왼쪽 밑창이 오른쪽 보다 닳아 있는 엄마의 구두를 보며 엄마가 왼쪽 다리에 힘을 싣고 걸었을 걸 생각하는 일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일상의 일들을 진행하고 그냥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뿐인데도 슬픔의 강도가 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통곡과 오열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되살아나는 슬픔과 상실의 표정들이 생생하다. 아무리 ‘누구나’ 겪는 일이라 위안삼으려 해도 내게 닥친 일은 어떡하든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인 것이다. 작가의 엄마의 죽음에 애도 방식은 ‘엄마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사이공은 없다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장작인 이 소설에 어떤 심사위원은 대상이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이 전개 빠른 추리소설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이 거의 영화화되어서인지 일찌감치 세계문학상을 읽을 때면 소설적인 느낌보다는 영화적인 느낌이 강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게 된다. 역시,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무대를 사이공으로 옮긴 이 소설은 밤이 그려지는 이미지처럼 폭력과 환락이 가득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뉴스에서 접할 이야기,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볼 수 있음직한 내용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실종되고 또한 살해되는 필리핀이 떠오르는 것도, 가장 대대적으로 드러났던 필리핀 납치 살인사건이 함께 떠올려진다.

  볼수록 찐득찐득한 느낌이 가득한 이 소설은 경쾌하지 않다. 당연 살인과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는 내용이 진행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될까. 죽은 사람이 될까, 죽게 될 사람일까. 저자의 시선이 계속 바뀌고 있으니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인물을 응원해볼까.

  등장인물들은 남성들이 압도적이다. 그리하여 이들 언어의 세계는 상당히 격하고 성적이다. 퇴폐적이며 부도덕한 언어가 시종일관 가득하다. 그들이 삶 역시 자신들의 언어가 내뱉는 방식으로 생활한다. 아니, 그들 생활에 맞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당한 거래와 윤리를 비켜내고 그들이 얻어 내는 것은 단순하게는 ‘돈’이겠지만 ‘돈’이란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을, 재화를 얻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투자하고 여기서 얻은 수익을 쾌락을 향유하는데 바친다. 낯선 사이공에서의 느낄 수 있는 쾌락을 천국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쾌락을 위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쾌락의 방식엔 당연 술과 여자와 약물들이 빠지지 않는다. 기가막히게도 술과 약물의 등가는 그렇다치고 이것들과 등가되는 여자는 무어란 말인가. 좋게 해석하자면 그들에게는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봐야 하나.

  그들은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천국에서 그들은 권태와 욕망, 허세와 거짓말의 언어 속에 파묻혀 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고 그것만 하고 싶었고 뭐 그렇다.

  하지만 이들이 이 생활을 더 누릴 수 없는 것은 고리대금업자 기승의 실종이다. 천국에 살 수 있도록 관리해주는 기승의 실종은 이들을 천국에서 추방하도록 만든다. 부랴부랴 대수와 순철과 도식은 기승의 행방을 추적한다. 이 와중에 기승의 아내는 살해된 채 발견되고 도식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사를 받기에 이른다. 물증이 없어 풀려나지만 기이한 일은 계속된다. 베트남 여성 ‘린’이 한국행을 위해 도식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준비과정에서 기승과 순철 역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런 상황이 주어지고 이야기를 풀어 가려면 항상 예측가능한 전개가 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 공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패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똑똑하게 보여지는 그 부패한 경찰과 대사관들이 등장한다. 왜 이다지도 천국의 삶의 방식은 패턴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 네 명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사는데 이유가 없을 리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이유들도 조금은 익숙하다.


도식은 기승의 사업을 믿지 않았다. 기승이 말하는 달콤한 배당금보다는 기승과 순철 그리고 대수와 함께 사이공의 밤거리를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식은 투자의 대가로 기승과 대수와 순철을 얻었다. 그들과의 싱거운 농담, 즐거운 한때가 투자의 대가라고 도식은 생각했다.

기승과 대수, 순철 그리고 도식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식은 그들과 술을 마시며 서로의 공통점을 곱씹었다. 목표를 손쉽게 달성한 남자들. 한때는 건실했던 남자들. 목표를 이뤘지만 그 대가로 뭔가를 잃어버린 남자들.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미련한 남자들. 하지만 그 뭔가를 애타게 되찾으려 애쓰는 한심한 남자들.

한때는 건실했던, 하지만 지금은 미련하고 한심할 뿐인 남자들이 기승과 대수, 순철 그리고 자신이라 생각했다. p196~197

 

  익숙한 패턴이라 흥미 유발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상, 누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누가 왜 죽이는지, 이런 류의 소설에선 그것이 궁금해진다. 이 속에서 뒤통수를 때릴 인물들이 가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뿐이다. 거듭 배신자는 있고 부패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돈으로 얽혀 있던 이 네 명의 남자들 중 도식만이 살아남았다. 과연 그는 끝까지 살아남을까? 그리고 그에게 영주권취득을 위해 결혼을 제안한 ‘린’은 누구인가.

  무심히 넘기다 하나 시선이 모아지는 점이라면, 주무대인 사이공이다. 왜 사이공을 그렸을까. 우리에게 이런 류의 행태가 익숙한 곳은 필리핀이라서 건너뛴 것일까. 거기다 지금은 사라진 지명, 사이공. 베트남 여인이 한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도식에게 접근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그녀 ‘린’. 베트남, 과거 월남이라 불리던 이곳. 이곳에서 베트남인들을 학살하던 한국인. 무수한 라이따이한을 만들어낸 한국인. 지금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마치 ‘베트남 처녀 팝니다’같이 펄럭이는 플랜카드. 이 모든 것에 주체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한국인, 한국남성. 베트남 여성 ‘린’은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에 대해, 남성에 대해 대척점에 있는 것일까. 그렇담 그것은 복수일까 정의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만 불편한가


 

  언제부턴가 기사를 읽고 나면 기사만큼이나 댓글을 확인하게 되었다. 얼핏 보게 된 댓글이 내 생각과 감정과 너무나 다를 땐 놀라서였고 같을 땐 반가워서였다. 그리고 재밌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단순하게 확인했던 이러한 댓글에 대한 의심들이 나도 모르게 생겨날 땐 나말고 이미 의심에 의심을 더해 확신까지 하는 이들이 있었고 물증을 채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순하게는 뻔히 보이는 홍보용 댓글들 때문에 알바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한나라의 정치문제에 이런 댓글 알바단이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이 놀라운 일은 여전히 법적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 댓글부대에 대한 관심 역시 높다. 역시 작가는 장강명. 기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에 더욱 기대게 하는 이 소설에서 어떤 단서를, 물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은 소설인데 여기에 실제 사건들의 윤곽을 알 수 있을까. <댓글부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댓글부대 조직이 어떻게 댓글로 사람들의 여론을 호도하는지에 대한 것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활발히 댓글들을 읽어 왔다면 또한 특정한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다면, 보아 왔다면, 이 소설 속에서 그러지는 패턴들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확실하냐’‘라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여전히 접어 둔 채, 왜 이런 댓글부대들의 활약에 휘둘리는가’에 치중된 이 소설을 보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한들 댓글부대의 활약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면 좀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들을 가지면서도 그 힘을 알고 있는 ‘이들’에 놀란다. 사실 2012년만 해도 SNS 등, 인터넷과 모바일 등의 매체를 통한 여론전엔 야당이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선거’라는 것은 ‘매체’라는 것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모든 문명의 기기는 그것의 용도만큼이나 이용자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도.


  어쨌든 댓글부대의 내용은 참으로 단순하다. 인터넷 여론 조작단 ‘팀-알렙’의 세 청년이 여론 조작을 위한 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상품평이나 유학 후기를 지어내며 댓글조작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합포회’라는 조직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이 들어온다. 바로 진보 사이트에 타격을 입혀 달라는 것이다. 팀-알렙 멤버 찻탓캇은 진보성향 일간지 ‘K신문’ 기자에게 온라인 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제보를 한다. 이 제보와 이들이 현실에서 벌이는 여론과 댓글조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 작업을 수행하는 팀-알렙의 세 청년들은 어떤 인물인가. 삼궁, 찻탓캇, 01査10은 사회 낙오자이다.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들이 ‘지잡대’ 출신이라거나 이거나 ‘어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비사회적인 병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베 유저들이고 그들에게 여자는 ‘김치녀’다. 그럼에도 이들은 댓글조작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안마방이나 유흥업소에서만 여자를 만난다. 이들은 치밀한 기획으로 이 일들을 이뤄낸다. 인터넷 세상은 넓고 게시판은 많다. 그들이 달아야 할 댓글들은 많고 가야 할 사이트는 많다. 그러나 이들이 먼저 타깃을 삼은 곳은 진보 성향을 띤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다. 그리고 10대들을 대상으로 이들을 세뇌하기 위한 ‘마케팅’을 벌인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사회적 낙오자이며 비틀리고 뒤틀린 이들이 벌이는 이 댓글조작의 세계는 한판의 심리게임과도 같은데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섬세한 심리의 세계에 통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몇 마디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혼란을 주어 잘 이끌어가는 한 까페를 파괴해낸다. 어떻게 치고 빠지는지 특정 사이트에 따라 어떤 말들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이들을 보면 놀라웁다. 이러한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활보했으면 더 큰 문제가 되었을까. 이런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며 배제시켜버리는 이 사회가 문제일까. 아무튼 이들의 탁월한 능력들에 인터넷 카페, 커뮤니티 세상은 ‘이성’을 잃고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팀-알렙의 세 명들은 일찌감치 사이트의 특성도 다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의 법칙이란다. 그러니까 여초 사이트의 유명한 사람은 ‘네임드’라 불리는데 이들은 남들보다 더 쿨하고 시크하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남을 알게 모르게 까 내리고 은근한 잘난 척을 하는 만큼 추종자와 워너비 외에 벼르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남초 사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게시판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댓글 달리면 좋아하는 심리 역시 자기가 인정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보기에 별 대단치 않은 글이 관심을 받게 되면 질투를 넘어 ‘이건 옳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그래서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글로 추천과 댓글을 받으면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 통달한 팀-알렙은 타이밍을 잘 알고 있노라고.

  이 책을 통해 댓글의 세계와 사이트의 세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저 무심히 넘겼던 인터넷 커뮤니티 내의 권력과 알력들에 대해서도 특정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는데 일반적인 것 이외에 필요한 절차가 있다는 것도. 단순한 정보공유 이외에 사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뭘 하고 사는지도. 한바탕 어지러운 인터넷 세상을 돌고 온 느낌인데 앞으로 인터넷 세상의 분란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나는 이성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을까. 하긴 커뮤니티를 하지 않으니까, 딱히 그들 조장에 휘말릴 일은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심각한 정치, 사회기사들의 댓글은 잘 가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모든 여론을 다 반영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잘 가려서 판단할 수 있을까.

 틸-알렙은 분란을 일으키는 법을 아는 만큼 휘둘리지 않는 법도 알고 있을까. 지금 한창 떠드는 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도 청와대 관계자의 아이디가 일베사이트에 있고 댓글을 올렸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댓글조작단이 특정 사이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수많은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는 사이트 운영에 정부가, 아니 정부 대리인인가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참담하다. 앞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뒤에서는 저런 손가락질로 자판을 두들기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라니. 그러한 사람들이 또 많다니, 사람들 얼굴에 ‘나 댓글쟁이요’ ‘나 **사이트 이용자요’라 표시되지 않으니 팀-알렙에게 요청하여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팀-알렙이 인터넷 커뮤니트에 분란을 조장하는데 쓰이는 말들 중 하나, “이거 나만 불편해요?” 이 댓글들을 제법 보았던 것 같다. 그냥 무심히 넘긴 적도 있고 ‘불편한 이유를 대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적도 있던 댓글. 욕설이 없는 지극히 정중한 내용임에도 기사와는 맥락이 다르거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글들이 튀어나올 때, 칭찬의 내용에도 “이건 알바다” “알바 꺼지세요” 라는 글들을 볼 때. 아니, 어떨 땐 댓글 하나하나 다 의심스러워질 때도 있다. 분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아닌데, 지금 이 세상 나만 너무 불편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모두의 ‘계나’는 어디에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p161    


   

한국이 싫다고 외치는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 여성의 호주 이민 성공기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왜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지를.

   헌법에는 행복추구권이 있으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적’과 ‘인종’으로 소속감을 강조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주인공 계나는 마침내 깨닫기를, 자신이 처음에야 그저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가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호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자신은 한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계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는 곳이다.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11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신이 지금까지 충분히 살았지만 한국과는 맞지 않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행복감과 연결된다. 계나가 느끼기에 한국은 정글 같은 곳이다. 자신은 까다롭긴 해도 정글 속에서 사자와 맞짱을 뜨는 것보다는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그 결심으로 인해 계나가 부딪치는 것은 부모의 반대,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물론이거니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다. 그럼에도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별 일을 겪는다. 어찌 보면 호주로 떠날 때 역시 계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호주에서의 생활에서도 ‘두려움’ 없는 미래가 보장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계나는 호주에서 쭈욱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한국이 싫었던 처음의 감정보다 더 적극적인 마음, 보다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이고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보다 호주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보다 재미없다. 책을 덮고 난 후의 첫느낌은 그랬다. 아니, 지금까지도 재밌지는 않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확 끌어안고픈 문장도 없고 구조나 스토리에서 놀라움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제목. 이 책의 제목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이들 열에 아홉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 한국이 싫다! 이 말은 ‘일하기 싫어’, ‘직장 다니기 싫어’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준다. 포괄적이고 아주 아프고 슬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싫다니.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나도 다 그런다. 이런,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정말, 정말 문제가 많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암흑, 구렁텅이에 홀로 있지 않다는 안도감은 더욱 큰 절망감과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이 책이 재미없는 이유는 ‘생각보다’라는 데 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 처절한 공감의 마음을 내용이 채워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보다 더욱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목만큼이나 보다 강렬하고 보다 확고하게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감정을 이끌어주길 바랬건만, 그냥 싱거운 간이 된 국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부분적으론 제목을 통해 사회비판을 국민들의 기분을 대변했다는 데 대해선 공감한다. 그러나 이 짧은 장편 소설을 순식간에 읽혀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하기보다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기서 통쾌라는 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말함이다. 스토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 보기에 왜 주인공은 지속적으로 어설픈 어퍼컷만을 날리는 느낌일까. 강력한 한방이 아니라.

  마치 대화를 하듯 지속적으로 혼자 내뱉는 주인공의 말은 친한 친구가 내게 하는 이야기, 토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 지점이 그래서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불편하게’ ‘통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왜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대화 형식으로 하기엔 여성이 훨씬 나을 듯해보였을 지 모르겠다. 대화, 혹은 수다는 ‘여성’에게 좀더 부각된 이미지이니까. 그래서 분위기는 읽히나 한국 사회에서의 20대 후반의 여성이 가지는 고민과 부딪치는 현실문제가 좀더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책 제목이 가지는 무게감에 비해서 내용이 조금 가벼이 여겨지는 탓에 된장녀의 이미지가 조금 드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20대의 보편적 고민과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처절함이나 치열함이 덜 느껴지는 것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이 싫은 이유에 대한 보편적이고 문제 비판적인 흐름에서 계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과 선택으로 이어져서일까. 한국이 싫다는 데 대한 생각은 비슷할 수 있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난 전자에 더해져 보다 비판적 시각을 원했나보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수많은 “한국의 계나”로 보이지 않고 특정한 “계나”만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내겐 제목만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계나를 지지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계나 이상의 계나를 생각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가? 그럴 리가!



  제목에서 1920~30년대의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의 모던걸의 이미지가 그냥 생각났는데 연유는 모르겠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기울여 선 자세의 누군가를 그린 표지 속 소설은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이야기라고, 더 나아가 청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당연, 그런가? 그럴 리가!

 의미의 차이인 듯하다.

  이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당선작 선정  이유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현실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래서 현실 속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가. 소설 속 주인공은 스물셋. 그녀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법은 아르바이트다.

  

내가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바이트였다. 날씨연구소 문을 열 때나 인형극이 끝나고 아이들과 배우들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안내할 때, 평범한 스카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써서 올릴 때, 준비해 간 한류 스타 사진에 일본 아줌마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볼 때 ‘아, 내가 대학생이구나’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마치 바리케이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린 길이라는 걸, 유령이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처럼. 학생인 나와 캐스터인 나와 인형극 배우인 나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알아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룰이다. p40


  스물셋의 대학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생활비와 학비로 쪼들리며 전전하다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 이름이 아니라 익명 또는 별명으로 일하는 곳은 ‘날씨연구소’다. 정말로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날씨를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손님의 마음상태를 잘 예측하고 들어주는 칵테일 주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주인공이 잘 예측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등장인물과 손님들은 하나같이 제 이름이 없다. 역시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그들이 이 ‘날씨연구소’를 벗어나면 그 별명 외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도 각각의 일들을 하는 서로 다른, 서로를 통일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부정하고픈 주인공이 바라보는 사회도 역시 뿌연 안개가 가득한 익명일 것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164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베개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은 당연 주인공의 일상과 감정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그저 흘러 가버릴 경험이 아니기에 스물셋의 ‘그녀’에겐 더욱 그렇다. 단골인 일본 손님이 갑자기 바에서 사망하는 일이나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 언니에게 당하는 사기, 예술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인 듯 행하던 유부남 영화감독 등. 이 영화감독의 언사들을 보면서 마침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감독이 생각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왜인지 이 영화감독의 모습도 영화나 소설 등에 조금은 익숙하게 등장하는 유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내 방의 벽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가 사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진실도 허세가 되고, 허영도 현실처럼 보였다. p100 


  글쎄.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학업과 경쟁에 시달리어 소위 일탈을 일삼는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이 세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에 밀리어 마냥 주체적 생각없이 한량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이것을 이 세대 청춘의 모습이라 부르며 너도 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서 모두가 같이 겪는 무게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 현실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규정지어 새삼 충격을 받는 일이 없는 듯하다. 놀라움과 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규정화된 청춘의 모습과 일상만이 남아, 그렇다 한들 그것이 당연한 듯이. 그 어떤 일들을 경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 속에서 어떤 청춘들은 그 듣기 싫은 ‘청춘의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래 안고 있던 베개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p2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