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워터십 다운을 향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Watership Down 

리처드 애덤스, 사계절 2002.


    제법의 작가들이 출간을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 애덤스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역시도 그랬다. 그가 렉스 콜링스라는 편집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만큼이나 책을 ‘보는’, 작가를 ‘보는’ 눈을 가진 이의 역할에 감사한다.

  그렇게 고전에 반열에 오른 <워터십 다운>의 작가 리처드 애덤스가 크리스마스에 사망했다. 그가 52세에 쓴 <워터십 다운>은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로 그가 환경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라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출판사의 거절의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다는 것과 토끼들이 귀엽지 않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독자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너무’ 긴 줄 모르겠고 토끼는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웠다.   이야기는 모두 4권이다. 1부는 택지 개발로 인해 살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이야기, 2부는 토끼들에게 이상향이라 불리는 워터십 다운에 가는 과정, 3부는 에프라파 잠입 작전과 탈출담, 4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에프라파 토끼들과의 싸움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모험이라 불릴 수도 있지만 이 토끼들의 모험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험 소설이 가지는 흥미진진함과는 다르다. 토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기에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듯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하다. 그만큼 이야기 속에서의 역할들이 뚜렷하다. 예언능력을 가진 파이버, 지도력을 가진 헤이즐을 비롯하여 이름처럼 용맹스러운 빅웍, 이야기꾼 댄더 라이언, 지략있는 블랙베리, 굴 파기의 대가 스트로베리, 어리고 소심한 토끼 에이콘과 핍킨 등이 그렇다. 이들 토끼들은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위험을 헤쳐 나간다. 이 상황속에서 지도자의 역할, 헤이즐의 활약이 눈에 띌 수밖에 없지만 예언가인 파이버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댄더 라이언의 역할에도 눈이 간다.

  두 토끼의 역할이 다른 듯하지만 일종의 종교적·정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파이버의 예언적이 능력은 샌들포드 마을의 위험을 감지하고 새로운 곳을 가야 한다는 계시를 전한다. 그리고 댄더 라이언은 토끼들이 힘들어 할 때, 지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때면 토끼들 사이에 전해지는 신화이야기를, 전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토끼들에게 힘을 북돋는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게다. 삶을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신념과 그 신념을 강화시켜줄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토끼들이 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위험하고 불안한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리더 헤이즐의 역량 덕분이다. 헤이즐은 강압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아니다. 자신과 함께 하는 토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문제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지를 잘 아는 리더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다고 할까.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장의 여정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헤이즐은 늘 고민하고 고뇌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헤이즐과 함께 하는 토끼들이 가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인들 상관없이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어디’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위험한 곳 샌들포드를 떠나 공포가 법인 에프라파 마을을 지나 그들이 정착하게 되는 곳.

 토끼들이 조금 더 여정을 계속하고 정착할 마을을 찾게 되는 것은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그 어느 곳이라도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며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했던 것은 토끼들이 자신들이 민주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들은 자신들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길 위의 나날들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길 위에서 토끼들이 익힌 삶에 대한 자세가 정착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토끼들의 모습을 통해 보다 나은 곳이 물리적 환경의 요소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제 저물어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절실한 깨달음을 주게 할 열한 마리의 토끼이다. 특히 헤이즐의 지도력과 헤이즐의 진정한 조력자인 파이버의 관계는 국정농단이라는 이 유례없는 나라에 살게 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을 정화시켜줄 것이다.

  토끼들이 나오는 우화, 어린이용 동화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놀랄 것이다. 이 책은 토끼들의 생존의 이야기이며 정치와 체제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토끼들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불을 밝힌, 뛰어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대

한민국이 2017년엔 새로운 나라로 정착할 수 있기를. 그리고 헤이즐과 같은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라스푸틴이나 한국판 라스푸틴이 아니라 파이버와 같은 조력자가 탄생하기를. 각각의 장점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기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면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기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속에 리처드 애덤스는 이 모든 것을 심어놓고 한세기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그의 영혼도 평안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빨강의 로맨스


빨강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Red-시로 쓴 소설 

  한국에서 빨강에 대한 공포와 금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이라고들 말한다. 붉은 악마의 물결이 휩쓴 그때부터 “빨갱이”라는 말의 순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에 대한 노골적인 수사와 몰이는 유효하다. 빨강의 열정에 편승하여 빨강색 옷을 입고 빨강색 간판을 달고 빨강빨강 전도하던 이들이 그 몰이의 대표적 주자이다. 그것이 코메디 같아서 어떤 이들에겐 빨강이 종북의 상징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 어쨌든 여러 모로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 빨강이다.

  빨강이 의도치 않은 자의적 해석과 이미지 투영으로 빨강은 탄생 이래 영원히 그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빨강에 드리워진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가 ‘괴물’이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의 대가로 세 개의 머리와 몸을 가진 괴물이 키우는 소들을 훔치는 과업을 수행한다. 괴물의 이름은 게리온이고 붉은 섬이라는 뜻의 에리테이아(Erytheia) 섬에 살고 있다. 그가 키우는 소떼들 역시 붉다. 

  이 이야기에 상상의 나래를 더해 그리스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는 빨강 소떼를 돌보는 이상한 날개가 달린 빨강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시의 전문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T.S. 엘리엇 수상자인 작가 앤 카슨은 게리온의 이야기를 재창작한다. 빨강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를 시로 쓴 소설로 엮어 낸다.

  상상력이 스테시코로스에게 빚을 진 측면이 있겠지만 형식과 이야기의 구조와 완결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이 이야기는 게리온의 시선에서 고전의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소설의 문장보다 시적 언어로 쓰여진 까닭에 함축적이고 미학적이다. 언어를 음미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어린 게리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기에 ‘괴물’의 성장기를 지켜보게 된다.

  우리가 아이에게 ‘괴물’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아이가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행하는 그것처럼 광기적인 절대 악의 모습을 지니지 않아도 또래와의 사귐에 소극적이거나 학교 생활에 부적응하게 되면 그 선에서의 다름을 이유로 괴물이라고도 부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린 게리온은 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행하는 이미지보다 그 나이의 아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괴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지도 모른다.

  다르다. 외면적인 다름을 말하자면 어린 소년 게리온의 어깨엔 작은 빨강 날개가 있다.


네가 약한 아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넌 약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준 후

그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p52~53


  게리온은 커다란 코트로 자신의 날개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게리온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빨강 토마토 위에 10달러 지폐를 찢어 머리카락을 만들어 자서전을 만든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그리고 사춘기에 이르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었고 삶의 세계는 몇눈금 하강했다.“

  다시 한번 제목을 보자면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엔 “로맨스”라는 부제가 있다. 이 로맨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건데 로맨스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필시 게리온의 로맨스라고 짐작할 만한데 그 어디에도 게리온의 이성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좀더 한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바라보면 명백히 헤라클레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삶의 세계의 눈금이 하강했다라고 할 헤라클레스와의 만남은 사춘기의 게리온을, 이후의 게리온의 삶을 변화시킨다. 둘은 사랑의 날을, 로맨스의 나날을 보낸다. 함께 화산을 보러 가며 여러 곳을 여행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내 무심해진다. 게리온에게 실연의 상처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가 아니다.


그의 얼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당한 걸 잠시 잊었다가

이내 기억했다. 토사물이 요동치며

게리온에게로 떨어지다가 그의 썩은 사과 속에 갇혔다. 아침마다 충격이 되돌아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p109


  오랜 시간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지만 헤라클레스 옆에 앙카시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새 연인. 우연한 만남 가운데에서도 세 사람은 서로 어울리고 게리온의 빨강 날개를 보게 된 앙카시는 빨강 날개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빨강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신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미칠 것이다. p173


  앙카시는 헤라클레스와의 삼각점에서는 연적이지만 게리온의 영혼에겐 구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빨강 날개를 감추었던 게리온이지만 앙카시를 통해 빨강 날개의, 자신에 대한 ‘특별함’을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빨강 날개, 날개는 날아오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특별함을 깨달은 게리온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를 것이다.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처음부터 자신의 영웅적 자질에 대해 썼다. 신화 해석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영웅의 여정, 모험담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웅성을 부여받은 이가 온갖 고난을 헤치며 마침내 자신의 ‘소명’을 알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영웅에겐 여행이 필수이다. 그러니 게리온 역시도 여행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로맨스”의 의미에 한발짝 들어가면 서구문학에서 로맨스는 중세의 기사모험담을 말한다. 그러니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로맨스>는 게리온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게리온을 절망에 빠뜨린 건

그가 날개 달린 빨간 사람으로서 인생 초년에 일상으로 받아들인

조롱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정신의 완전한 이탈이었다. p134~135


  게리온은 외면이 남과 다르다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힘겨워했다. 어린 게리온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은 게리온의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게리온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적인 상태에 이른다.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해 갖는 부정, 차별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암흑으로 잠식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름’의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어지고 있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의 주체를 뒤집음으로써 ‘영웅’과 ‘괴물’과 ‘다름’에 대한 생각의 전이를 하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독을 묻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Prilis Hlucna Samota (1980년)

보후밀 흐라발, , 문학동네, 2016.


  고독보다는 가슴이 저려온다. 책 속 주인공 한탸에게 작가 보흐밀 흐라발이 얹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더 깊은 울림을 더한다. 자조적이고 연민이 가득한 이 책에 대해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한 말을 찾아야 하지만, 누군가 묻고 답해야 한다면 일단 급한대로 가장 간단한 말, “재밌어”라고 외치고서 누군가를 붙잡아 둘 것이다. 이것은 너무 한탸같은가. 상당히 매혹적인 소설이다. 장편 소설로는 분량이 짧은데 스토리와 문체와 어조가 모두 흡인력 있다. 여운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더욱 더 책을 붙잡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보후밀 흐라발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공감된다.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며 마흔 아홉에 처음 소설을 쓴 작가. 노동자, 철도원 점원, 보험사 직원, 단역배우, 폐지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간 작가. 정부의 감시와 검열에 출판금지를 당하면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글을 쓰며 지하 출판을 한 작가. 체코 출신 작가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찬사를 들은 작가. 그리고 비둘기….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p9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더니, 소설을 다시 한번 읽으니 첫 문장부터 슬픔이 가득찬다. 시대가 만든 개인의 상황은 삶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공산주의 체제 하의 체코 프라하. 법학을 전공한,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한 젊은이는 대학을 떠나 안정된 삶으로 정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안전한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 보흐밀 흐라발은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책 속의 한탸와 너무도 닮았다.

  폐지를 꾸리는 일의 단순성에 대해 논한다면 이 일을 하고 있는 한탸는 절대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지하실로 수없이 떨어지는 폐지를 그저 ‘버리는’ 일 없는 한탸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폐지를 분류하고 해체하여 묶어 내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다. 폐지를 압축하고 파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면 그것을 ‘어떻게’ 버리든 그것은 한탸의 마음이다. 한탸가 그렇게 하면서 활자를 글자로 보지 않고 의미로 읽어 내며 많은 교양과 지식을 쌓는다. 그렇기에 그는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 속에 물리적으로 갇혀 있으나, 갇혀 있지 않은 채 바깥 소식의 일들을 폐지로 들어오는 책들을 통해 접한다. 그의 작업장엔 수많은 책들이 방문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장서가, 전쟁 후에는 나치 문학과 사회주의 책들이 들어온다.     

  한탸의 고독은 선택이다. 한탸는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혼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독서는 한낱 기분전환이아 소일거리가 아니다. 한탸는 책을 통해 배우고 사고한다. 자신은 책을, 글을 해체하는 일을 하지만 그 글들은 그의 고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래서 한탸는 이 일을 벗어날 수 없고 책과 함께 하는 일에 만족한다. 퇴직해서도 압축기를 구입해 이 일을 하기를 꿈꾸기도 할만큼…. 그는 예수와 돈키호테와 노자와 니체와 괴테, 고갱과 노발리스, 실러, 횔덜린 등, 수많은 작가와 글들을 만나며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만차에 대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탸는 끊임없이 자신이 삽시 오년째 폐지 더미를 파쇄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내년이면 삽시 육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삽십 오년이라 서술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탸가 삼십 오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 내년은 오지 않았으며, 지금은 삼십 오년째이니까. 그러니까, 내년은 오지 않을 테니까.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던 때처럼 한탸는 도시로 나갔다가 자신의 것보다 수십배 큰 압축기를 보게 된다. 그 기계를 압축하는 사람들은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갖춰 입고 일하며 콜라를 마시며 휴식 시간엔 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일하고 있다. 한탸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놀라운 이 광경은 늘 폐지로 교양을 쌓아 온 한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세계가, 끝나가는 구나, 라는…. 자신이 새로운 기계와 일하는 그들처럼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 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 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 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권의 책도 펼쳐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리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압축통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들이 무감각한 흙덩이인 양, 그렇게 일했다. p98~99


  저항할 겨를없이 당연한듯 한탸의 지하실에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에 한탸의 선택을 이해하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p131


  그렇다. 고독 속에 있었지만 한탸는 반복된 일에 찌들어 있지 않고 유머를 잃지 않은 노동자였다.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지식인이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순간 살아온 한탸의 삶은 그 희망에 기대어 정말 고독마저도 감미로웠다. 현실에서는 바퀴벌레와 쥐의 등장에 나자빠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공간을 상상하며 한탸와 같은 몽상을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탸는 그의 세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흥미를 가미시켜주었다.

  삽십 오년 동안 폐지 속에 묻혀 있던 사나이. 그곳에서 가져온 책들이 자신의 아파트에도 넘쳐나는 책중독자가 되어버린 사나이. 책과 함께 하기에 늘 너무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있던 사나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책은 노발리스의 책이다. 노발리스는 <푸른 꽃>을 쓴 독일 시인이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사망한 시인이다. 한탸가 읽은 수많은 책, 좋아하는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노발리스였을까. 현실과 꿈의 세계가 명확치 않은, 평범한 것에 고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담음으로써 낭만화를 발견한다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낭만화고 있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쾌활한 사나이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p131


  한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좋아하는 글귀를 읽으며 지복의 미소를 짓지만 그 누구도 그의 미소를 볼 수는 없다. 한탸는 그가 좋아하던 폐지 더미처럼 파쇄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묵묵한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로도, 고통스런 사회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필시 현실을 반영한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설속 인물의 종말까지도 작가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물론 환상적인, 몽환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경계 어디쯤에 있는데도 작가의 능력이 지극한 현실적, 사실적인 느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양, 너무한 쓸쓸함과 아픔이 뒤따르는 것일 것이다. 한탸 자신이 너무도 쾌활한 사나이었기에 더더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1982년)

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옮긴이, 열린책들, 2016.


  자연스레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난다. “호밀”이 들어간 제목도 그렇거니와 남자 아이가 등장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그 당시 자신이 쓴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고,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독자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찰스 부코스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헨리 치나스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인데,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을 내세운 찰스 부코스키의 이야기라고 대체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는 건, 거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의 거리 속에서 살아온 작가의 모습,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어쩌면 근원과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이야기이기에 거칠게 표현하는 작가에게 있어서도 조금은 완화된 표현과 연민과 그리움이 깃든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어린 헨리 치나스키가 겉도는 삶을 살아가는 시초는 역시 사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소년은 그저 끔찍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버지도 끔찍하고 교실도 끔찍하고,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끔찍하기만 하다. 또한, 그 자신 역시도 끔찍함의 대상이 된다.


바깥, 뒤쪽 블라인드 사이로 아버지의 장미가 자라는 것이 보였다. 빨갛고 하얗고 노란,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이었다. 해는 아주 낮게 걸렸지만 아직 지지는 않았고, 마지막 해조차 아버지의 소유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는 아버지의 집 위로 비치니까 나한텐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기분. 나는 아버지의 장미 같았다. 아버지의 소유물이지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물건…….p51


  헨리의 아버지는 키우는 장미에겐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미에겐 가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미는 장미하고만 어울릴 테니까. 헨리의 아버지는 가난하기 때문인지 가난을 경멸한다. 나아가 가난한 아이들과 헨리가 어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헨리보다 잘난 아이들과 비교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헨리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도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고 그런 모습을 헨리에게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사랑받지 못한 헨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헨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독일 이민자 가정 출신이란 아웃과도 같은 말이다. 헨리는 친구들로부터 일찌감치 ‘아웃’의 대상이 된다. 이유가 없이도 미워하고 이유를 만들어 미워한다.

  그런 헨리가 가장 진정으로, 순수한 칭찬을 받은 것은 글짓기 수업일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그 글짓기가 상상으로 채워진 글이기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p115


  다니던 학교에서는 쫓겨나고 아버지로 인해 형편에 맞지 않는 학교로 진학해 사는 모양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헨리에게 또다른 위기가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유모를 피부병이다. 그것은 학교를 그만둘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치료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드릴을 이용한 치료 과정은 끝이 없었다. 서른둘, 서른여섯, 서른여덟번. 더는 의료용 드릴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결코 있었던 적 없었다.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분노도 사라졌다. 내 쪽에선 체념도 없었다. 오로지 혐오, 내게 일어났던 건 혐오뿐이었다. 아무것도하지 못하는 의사들에 대한 혐오였다. 그들은 무력했고 나도 무력했지만, 유일한 차이는 내가 희생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삶을 누리고 잊어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똑같은 얼굴을 들고 다녀야만 했다. p210


  더욱 더 껍질 속으로 들어가고 냉소적이 되어가는 헨리에게 있어 그나마 위안이라면 책이라고 할까. 헨리는 다양한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며 자신의 영혼을 채운다. 헨리는 그것을 마법이라 표현한다. 비록 밤에는 불을 끄라고 호통치는 아버지로 인해 글을 읽을 순 없지만. 그렇게 밤에는 글을 읽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가 어떡하든 헨리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의 욕심과 허영 때문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헨리의 적응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일한 백화점 물류창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교수에게도 학교에서도 낙인찍힌 자가 되지만, 세상은 또한 그러한 괴짜에게 기이한 이에게 관심갖는 이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헨리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아무 흥미가 없었고 종종 열등하다고 느꼈으며 가난했고 주욱 가난하게 살 것이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세계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슨 헛짓거리인가. 부모가 성장기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런 다음 자기 혼자 나설 준비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이 제복을 억지로 입혀서 엉덩이에 총을 맞도록 내보낸다. p384


  그렇지만 그가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는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 모르고, 그것을 헨리의 친구는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한다.


「현실로부터 숨어 버리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로 그게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p375


  작가가 될 생각이 없다,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서 헨리의 마음이 드러난다. 적어도 글쓰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헨리가 지속적으로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헨리는 떠돌이 개에게도 늘 괴롭힘을 당하는 고양이에게도 이제 막 거미에게 잡아먹히려는 파리에게도 관심을 쏟았다. 이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이민자들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을 향한 헨리의 관심은 그들에 대한 연민이자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헨리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치도록 세상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자살은 귀찮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건 3년 치 식량이 있는 콜로라도의 동굴이었다. 엉덩이는 모래로 닦으면 된다. 무엇이든, 이 지루하고, 사소하고 비겁한 존재 속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든. p302


  일찌감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학교와 사회에서의 위선적인 일들을 겪으며, 세상의 온기보다는 자신의 냉기에 더 익숙해 있던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냉기를 세상의 위기를 허위를 날려버릴 따스한 온기였을까. 헨리에게 마법이 되는 책이 없었다면 헨리가 그나마의 삶을 버틸 수 있었을까.

  친구는 전쟁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헨리는 그를 배웅한다. 늘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길을 걸을 때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헨리는 멕시코 소년과 마주치며 기계로 권투 게임을 한다. 그리고 이겨야겠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냥 중요하다고만 생각한다. 그것은 생존일까.


길을 걸으며 나는 혼자라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도 혼자가 아니었다. 굶주린 잡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쌍한 동물은 끔찍할 정도로 앙상했다.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나올 듯했다. 털은 대부분 빠져 버렸다. 남아 있는 털도 마르고 뭉쳐서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 개는 사람들에게 매 맞고 위협당했으며 버림받아 겁을 먹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였다.

나는 멈춰서 무릎을 꿇고 한 손을 내밀었다. 개는 뒷걸음질 쳤다.

「이리 와봐, 난 너의 친구야…… 이리 와, 이리…….」

개는 더 가까이 왔다. 무척 슬픈 눈을 갖고 있었다.

「야,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 p288~289


  헨리. 그는 친구라는 말도 알았고 손을 내밀 줄도 알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 헨리. 아, 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쓸데없음의 여름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문학동네, 2015.



   여름이 작가에게 선사한 것은 무엇이기에 작가는 ‘여름’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까. 장편 소설에서도 계절 느낌이 묻어났는데 단편 역시도 그렇다.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참 이상하게도 여름과 너구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동물들에게 사계절은 존재함에도 너구리가 여름 속에 있는 동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은 아니라 어떤 동물에게는 털이 있는데, 강아지도 고양이도 털이 있지만 여름이라고 특별히 잘 지내지 못한다거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구리가 그 털을 몸에 덮고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라는 하릴없는 걱정을 한다. 이거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쓸데없음의 헌신일까. 참, 그런데 너구리를 본 적은 있던가.

  작가의 등단작이자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인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미카엘을 만난 그 짧았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꼽추 미카엘을 만난 그 길었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은 그런 것인가. 짧게도 길~게도 느껴지는. 나 역시도 시작은 짧은 여름날의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올 땐 기인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단편집의 소설 하나하나가 짧은 여름을 겪으리라 생각하며 발을 들여놓았다가 푸욱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온 듯하다.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왔다라… 그 느낌이 결코 맑고 경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여름의 더위에 무료함과 무력함이 겹쳐지는 절정에 있는 것 같다. 무엇에 눈을 돌리려고 하나 열정과는 다른 그 행동의 기저에는 권태가 잔뜩 자리잡아 있다 칙칙함을 한여름의 열기가 말려주는 듯 싶다가도 이내 습기로 흩트려 놓기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현실의 이야기인데 비몽사몽간에 겪은 일인 듯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다. 내 주위에서 이러한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함께 나는 어떻게 물들어 갈까.

  한낮인데도 작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잠들어 있는 듯,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잠에 취한 것인가, 술에 취한 것인가.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고 여기서의 일상성을 일반적인 상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모두 사회에서 가늠하는 지위를 무겁게 걸치고서 그들의 언행은 그 무게에 걸맞지 않다. 아니,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래, 사회적 지위란, 사회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직업이란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외피일 뿐이고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든 어쨌든 사력을 다해서 그것을 이루었을 것인데 사력을 다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인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그것이 권태와 고독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우스워진다. 하나같이 정형화된 것처럼 일탈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란 성인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어른을 보는 것 같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힘이 들거나 겪을까봐 힘들어 한다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일들을 겪고 싶어서, 겪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 그래서 총소리 같은 게 난다면 그들의 삶이 완전한 전환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총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총소리 같은 것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누군가를 향해 총은 난사해댈 것만 같은 불길함이 스치기도 한다.

  여름은, 습기 가득 먹은 여름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의 글이 반짝반짝 햇빛을 쪼인 것이 아니라 습기 가득 먹은 여름 날씨 같다. 마냥 그리워하는 일상이 가득한 그들. 그것이 개이거나 로봇이어도, 아니 개와 로봇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고 하지만, 작가의 소설 자체가 꿈같다. 현실이 아닌 꿈, 한여름밤에 꿀 꿈, 그런 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