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속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

 

제비뽑기 The Lottery And Other Stories

셜리 잭슨, 엘릭시르, 2014.

 

  공포와 광기의 작가라 불리는 셜리 잭슨의 대표적인 단편집이다. 연결된 이야기로 읽다가 무언가 아리송함을 발견하여 다시 보고 단편집임을 알았다. 단편임을 알았다면 각 단편을 완료된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텐데, 단편이라 생각지 않아서인지 각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다. 묘하게, 그렇게 연결짓는 이미지가 있었다.

   우선 형식에서 마치 장편인 것처럼 각 단편을 5부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다. 각각이 독립적인 이야기라면 굳이 이러한 구분을, 분류의 필요성이 있을까. 아마도 이 구분이 읽으면서 장편이라는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요인일 것이다.

   내용 측면에선 셜리 잭슨이라는 작가하면 떠올려지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저자 특유의 이미지, 셜리 잭슨만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셜리 잭슨을 부르는 또다른 호칭은 마녀. 이 단편집은 1부에서 5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의 앞장엔 조지프 글랜빌의사두키스무스 트리움파투스를 발췌하고 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각각의 단편들에도 이 마녀재판의 이야기를, 이미지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향하는 이야기의 틀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편집의 제목인 제비뽑기는 매년 미국 문학 교과서에 실린다고 하며 평론가들은 작가에 대해 미치광이 아니면 천재라 일컫게 해준 작품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이 심리적 공포와 광기를 묘사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이 단편집은 오히려 가벼움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그 속에, 저자 특유의 조이는 듯한 어두운 이미지가 드러난다.

   또한 작품 속엔 제임스 해리스라는 이름이, 푸른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에 이야기의 연속성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반복된 이 이름과 이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가 의미하는 것, 이것도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단편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까도 이런 사람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사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인되어 있을 때마다 작은 소름이 돋으려 한다. 이 이미지와 이름은 마녀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듯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진 않는다. 단편집마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문제와 관계된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에서 혹은 스쳐가면서도 꼭 그렇게, ‘을 만들어 버린다. 관계의 갈등을 촉발하게끔, 인식을 전환하게끔 하는 것이다.

   단편 마녀에서처럼 평범하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선 아이에게 끔찍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의 모든 단편에서 평범한 모습을 한 채 내뱉는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글로 읽어도 기가 막힌데, 직접 경험한다고 하면 더욱 놀라우리라 여겨진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맘 속에 불쑥 스며드는 공포와 불안, 이것을 조장하는 제임스,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 중 몇은 이들을 통해 환기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욕망을 알아서, 거기에 기대어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매우 충격적이면서 놀라운 작품이라 일컬어지는제비뽑기는 마을의 축제에서 시작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일상의 풍경이 별스럽지 않게 드러나는 가운데 축제의 절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게 눈깜짝할 새, 경악스런 일이 벌어진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며 이뤄지는 제비뽑기 행사. 행사에서 제비뽑기를 굳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왜 제비뽑기가 이뤄지는지 드러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너무도 특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아 더 놀라운 사건이다. 표면에 악이라고 달고 있다면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전혀 선한 얼굴을 들이밀어 나타난 공포에 휩쓸리니 더욱 공포와 광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 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 ”새파랗게 젊은 조 서머스가 모두와 농담을 해대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하건만.“

어떤 곳에서는 이미 제비뽑기를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애덤스 씨가 말했다. 그래봐야 문제만 생겨.” 워너 영감은 단호히 말했다. “요새 젊은 것들이란.” p397

 

   작가 셜리 잭슨은 미학적 의미에서, 문학적인 은유로서의 마녀이외, 실제로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 마녀로 취급당했다 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호러 미스터리에, 집단 광기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일 게다. 제비뽑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집단적 광기의 덤덤한 표출은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녀로 덧씌워진 셜리 잭슨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의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제비뽑기의 모습과 겹친다. 특정한 집단의 논리가 제임스 해리스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한발만 달리 뻗으면 극과 극의 논리를 겪게 되는 광장에선 310,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광장은 90여일 동안 진정한 축제였고 평화로웠다. 토론과 주장이 맞물리며 옳고 그름, 다름을 논의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고 다지는 자리였다. 논리와 신념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의 신념을 인정하는 방법을 아는 자, 상식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의 행사는 순조로웠다. 어느 순간 불거진 광장의 이야기에 제임스 해리스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몇몇의 제임스 해리스들이 등장하여 순수한 신념을 가진 이의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다만, 그들은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제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들을 광기에 물들게 했다. 타당한 논리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책임을 가진 지위와 역할은 던져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도 망각한 채로 제비뽑기를 준비하던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실과 진실을 인지하며 어쩌면 생각을 재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이들의 결말을 방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특정 단어만을 반복한 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선동으로 사람들을 공포와 광기에 담가놓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마녀사냥을 부르짖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가지는 집단 광기와 공포의 잔혹함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추상적인 공포에 기대어 희생양을 삼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특정한 이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마녀사냥이라는 말 속에는 어리석은 이들과 공포를 이용·조장하여 제 이익을 꾀하는 이에 대한 분노도 더해진다. 어쨌든 역사 속 마녀재판이라 불리는 사건들 속엔 분명 억울한 마녀가 존재했다.

   특정인이 부르짖는 이 마녀재판이라는 말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마녀재판이라는 말 속에 담긴 억울함이 호도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과연 마녀재판일까.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지만 제비뽑기가 전하는 충격만큼이 전달되지 않는다. 짜증만이 날 뿐이다. 어떤 이들의 사전엔 단어의 정의가 제멋대로, 내 이익대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학력은 학벌은 정의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지 않는다. 욕망과 탐욕이 공포와 광기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씁쓸하다. 참으로 기쁜 날인데, 참으로 시원스러운 날인데 조금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은 몰상식과 몰인간성을 여전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단어 사전을 들고 권력과 재력으로 무장하고선 그것을 더 연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성을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불쾌한 제임스 해리스들, 푸른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지금도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제비뽑기를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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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Four Ways To Forgiveness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2014.

 

   지난달 지구와 닮은 7개 행성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책이 떠올랐다. 지구와 닮은 행성이란 의미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발표는 자주 접한 듯한데 후속보도가 없다.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들을 찾는 지구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학적 사실에 대한 발견, SF에서 보듯 지구인의 영토 확장? 지금의 심정이라면 지구가 아닌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프다. 어쩌면 혼란일수도 어쩌면 더 확고한 질서가 잡힐 수도 있을 그곳. 엉망이 된 터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조금은 진정이 될지 모를 39일이다. 외국도 아닌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일은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미래 세계에 대해 희망보다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SF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어슐러 르 권의 연작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우주 공간의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개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과학 발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소설 속 행성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배지의 인상을 준다. 황량하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린 터전으로 보인다. 1995년에 발표한 연작 단편집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각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지구 밖 행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경이 그러할뿐 인간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권력과 투쟁이 있는,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가 필요로 한.

   작가는 SF와 추리소설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수상전력도 화려하다. 이 책 발표 당시 그 의미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 “미국의 가장 영예롭고 존경받는 작가라는 찬사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매료된 이 책의 이야기는 무얼까.

두 행성은 식민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주인과 노예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결정된다. 소유주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검고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나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정복하며 자산으로 취급한다. 자산들이 불리는 이름은 먼지놈’ ‘분필’ ‘흰둥이등이다. 당연, 여성은 구분조차 없는 남자의 자산으로 취급되었고 소유주의 부인이어도 그저 열등한 특권 계급이었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은 정부의 일부가 아니에요. 여자들이 해방을 이뤄냈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죽었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장군이 아니었고, 대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을에서 여자들은 하찮은 존재 그 이하이고, 일하는 짐승이고, 새끼 낳는 가축이에요. 여기선 조금 나아요. 하지만 좋진 않아요. 전 베소의 의료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전 의사예요. 간호사가 아니라. 보스들의 지휘 아래, 전 이 병원을 운영했어요. 이젠 남자가 병원을 운영해요. 이젠 우리의 남자들이 소유주예요. 그리고 우린 언제나와 같은 처지고요. 자산이죠. 이러자고 우리가 그 기나긴 전쟁을 싸워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특사님? 우리는 새로운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우린 그 일을 끝내야 해요. - <사람들의 남자 , p226~227>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가 만든 식민행성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 관례를 그대로 적용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그 방식이란 집단 내 경쟁과 권력 다툼을 통해서다. 기시감이 느껴지듯 그 방법 속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고 그 어떤 외부 정도도 차단된다. 식민행성의 여성의 지위는 주행성보다도 열악하다. 심지어 남자노예일지라도 여자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지어 살인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다른 점이라면 식민행성이므로 주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한다는 점이랄까. 식민행성의 여성들이 더욱 그 갈망이, 행동력이 강하다는 점이랄까.

 

예이오웨이에서 사람들은 그 자산들을 자유계약인(freedpeople)이라 불렀다. 자유민(free people)이 아니라, 자유계약인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역사책이 말했다. ‘왜 우리가 자유민이 아니지?’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 <한 여자의 해방 p. 310> -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위한 갈망은 30여년의 해방전쟁 상태를 만든다. 당연 혁명군도 반혁명군도 존재한다. 배신도 음모도 빠질 수 없다. <배신>의 이야기는 전직 혁명대장 압버캄의 이야기다. 그는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의 혁명을 이끌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쫓겨났다. 압버캄이 누명을 썼다거나 혁명의 새 시도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상태로 노숙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전직 혁명대장의 끊임없는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가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의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로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의 해방>은 웨렐의 노예로 태어난 라캄이 여성 해방운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식민행성과 노예라는 구조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들 모두는 주어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글을 읽는 것도 아는 것도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모순을, 불평등을 인식하는 계기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노예에게 지식을 배제시키는 이유일 것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강압하고 세뇌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혁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에로드가 말해줬을 때는, 예이오웨이라 불리는 곳에서 플랜테이션들의 자산들이 자신들의 소유주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는 어떻게 자산들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 주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소유주와 피소유자가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나의 세상은 쇼메케 영지가 전부였고, 쇼메케 영지는 그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그걸 뒤엎고 싶겠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려 짜부라질 텐데. - <한 여자의 해방 p283>-

 

   한 인간의 변화는 인지를 통해서 또한 인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그저 그렇게 구축한 세상에 대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인식한 순간 그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 소설 속에서 그 방법은 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오해와 반목을 풀어가고 함께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해야 할 것,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이해의 소길을 구가하려는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뻔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던 이들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은, 갈등은 결국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 가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한번에,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점진적인 변화의 형태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바뀌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에도 헌법 수정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수정안은 예이오웨이 해방 18년에 투표에 부쳐졌고, 거의 비밀투표였다. 여기까지의 사건들, 그리고 그 뒤의 사건들은 대학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세권짜리 <예이오웨이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처럼, 나 역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두 세계의 역사, 우리 평생의 위대한 혁명들, 희망들, 우리 종족의 끝없는 잔학한 행위들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작은 열쇠가 문 옆에 있을 때는 그 문을 연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문은 절대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거나 자유롭기 시작하고,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거나 끝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제껏 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왔고 자유롭게 죽을, 내 친구를 위해. - <한 여자의 해방 p372>-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았지만, 난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위치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책 속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대에 과거회귀가 웬 말인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심각한 무지와 문맹의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는 때이다. 글자를 안다고 문맹이 아니랄 수 없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이다. 여전히 지식이란 것을 학력을 통해 갖추었으나 무지와 문맹이 가득한 사람들의 쇼를 보며 생각한다. ,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책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무지와 문맹을 바탕으로 한 탐욕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무지는 자신을 사납게 방어하고, 문맹은 나도 잘 알듯 날카로워질 수 있다. - <한 여자의 해방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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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같은 시와 삶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3월의 꽃샘추위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린 곳도 있다. 남쪽 지방에선 겨울에도 보지 못한 눈이 삼월에만 연달아 내리던 때도 있었다. 3월은 봄인데, 꽃샘추위라고 부르기엔 괴상한 날씨, 그것은 점점 이상기후라 불렸다.

    3월이 봄이란 걸 안다. 그만큼 3월 초엔 꽃샘추위가 있을 것을 안다. 추위는 매섭지만 꽃샘추위라는 귀여운 말에 가려, 곧 따쓰해질 것을 알아서인지 놀랍거나 불안하거나 하지도 않다. 봄이라는 따스한 기운은 그렇게 마음 속에 스며 새겨지는 모양이다. 3월만큼, 봄이라는 느낌은 2월에도 느껴진다. 2월이라는 달력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봄을 느끼며 상승한 기온과 좀더 따뜻해진 햇살을 느낀다. 그런 2. 이제는 2월하면 한 작가가 떠오른다. 실비아 플라스. 안타깝게도 이 강렬한 이미지는 211일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에서 온다. 다른 어떤 말도 작가의 작품 구절도 아닌 작가의 생애에 대한 한 문장. “그날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고. 봄에 느끼는 꽃샘추위의 느낌일 거라고 그날을 생각한다. 211일의 날씨가 실비아 플라스를 삼키고 추위보다 더한 고독와 배신과 우울이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날.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예술가의 비극적 마지막이 강렬하게 박혔지만 작가의 시 또한 강렬한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실비아 플라스 시전집은 1956년 이후에 쓴 224편의 작품과 1956년 이전에 쓴 시 가운데 50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실비아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남편이었던 테드 휴스가 엮은 것이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지운 채 실비아의 작품을 정리했다고 한다.

   실비아는 문단에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실비아의 시가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시대, 여성에게 가해진 이 모순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비평가들이 실비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시의 언어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죽음과 자살 시도, 남편과의 이혼 같은 것)과 연계하는데 비해 1980년대 페미니즘 문학비평가들은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분노의 목소리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재평가하여, 여성 문학의 신화혹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부각한다(p657).”

   실비아의 시를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지만큼은 강렬하다. 전체적으로 음울한 잿빛 이미지를 심어준다. 시를 읽다보면 반복적으로 뇌리에 남는 단어들, 울분과 결의의 소리들에 명징한 자의식을 찾고자 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쨌든 몇 년을 같이 산 전남편이자 시인인 테드 휴스는 실비아의 시쓰기에 대해 말하길 내면의 상징과 이미지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했다. 실비아의 내면 속에 가득찬 것은 고뇌일까. 어릴 적부터 시를 쓰던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내면을 찾아들어갔을까. 외적인 사건들이 실비아의 생애에, 시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아버지와 남편과의 관계들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오로지 그것에 갇혀 있지는 않을 실비아의 시는, 읽고 있다 보면 마음이 힘겨워진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 아빠

 

   실비아 플라스의 대표작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충격을 안겨준 아빠의 구절이다. 20164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아침의 문은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나치와 유대인으로 설정하며 더 극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대한, 사물에 대한 시선. 내면의 갈등은 끝이 난 것인가. 오래도록 길들여지고 관념화되어 버린 믿음이 조각나는 것, 감정과 이성을 끝없이 되뇌며 마침내 분노와 울분으로 내뱉는 말. 신화화된 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신화를 쌓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삶의 고됨이 고통이 울분에 찬 말로써 해소될 수 있을까. 갈등, 공포, 고뇌, 울분들. 그 모든 것들을 내면속에 넘치도록 담고서 삶을 지탱한 실비아의 자의식은 시대와 실비아를 둘러싼 관계들과 그녀 자신의 관념의 산물이다. 실비아가 지향하는 삶은, 자아는 어디로 향하기를 원했을까.

하얀

고다이바처럼, 나는 벗어버린다.

과거의 유물과 과거의 핍박을.

 

그리고 이제 나는

바다의 광채 같은 밀밭을 휘젓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벽에서 녹아내린다.

그러면 나는

화살이고,

 

새빨간 눈,

아침의 큰 솥 안으로

자살하듯 돌진해서 뛰어드는

 

이슬이다.

- 에어리얼

 

   실비아의 생이 유동치지 않고 평안하게 머물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해 못내 울분을 토하고 있을 듯하다. 남겨지게 만들어버린 실비아의 아이들과 더 풀어내지 못한 울분들. 벗어버렸을 그 에어리얼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절반만 드러낸 채 시인은 떠났다. 시인의 생애도 시인의 언어도 꽃샘추위처럼 서늘하고 매섭다. 또한 그 한기가 청아함을 비장미를 씁쓸함을 준다. 서린 말들이 한없이 이어지는 시어들 속에서 푸욱푹 눈발 속에 빠지듯 실비아 플라스의 시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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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상황을 바라는 몸짓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Big Little Lies

 리안 모리아티, 마시멜로, 2015-10-12.


  커져버린 거짓말이라니. 처음부터 이 상황에선 ‘거짓말’ 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누구라도 소설 속 상황에서 ‘거짓말’은 당연한 공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후의 생각이란 “거짓말”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불러오는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 폭력이란 거짓말을 일으키는 핵심이다.

  리안 모리아티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은 세 가지 궁금증에 대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발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가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아마벨라를 괴롭힌 아이는 누구인가. 흥미롭고 유쾌한 잡담처럼 풀어놓는 대화와 삶의 이면을 바라보는 내면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져 살인사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음에도 유쾌하게 읽어나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스토리가 영화나 드라마화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드라마화가 진행 중인 소설이다. 니콜 키드먼과 리즈 워더스푼이 등장하는 미드로, 2월 19일 오늘자 방영이라고 나온다.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맺음은 예비학교에서 이루어진다. 호주의 피리위라는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도시의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계로 말이다.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마흔살의 재혼녀 매들린, 싱글맘 제인, 미모와 재력 모두 갖춘 셀레스트의 각각의 이야기 또한 흥미있고 그들의 관계 역시도 몰입감을 준다. 성격도 나이도 다른 세 명의 여자가 친분과 유대를 쌓아가며 또다른 학부모 그룹과 가지는 갈등이 이 사건의 전면에 나온다. 아이를 둘러싼 파워게임, 아이도 어른도 외모와 재력과 권력의 힘을 자랑하고파 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힘을 가진 이에게 더 친분을 형성하고파 하는 익히 알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전개된다. 그 과정의 이야기가 유머스럽게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라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상황, 이혼한 부부가 한 학교의 학부모로 만나 벌어지는 일이 얽혀져 있다.

  아이의 세계나 어른의 세계에나 평행하게 전개되는 거짓말. 우린 타인의 말에 대해 자의적으로 의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삶이, 말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그것은 식탁 위에,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거짓말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거짓말은 늘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하게 된다.

  폭력은 늘 거짓말을 끌어들인다. 학대받는 아동들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교사의 ‘폭력’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폭력을 경험한 공포 때문이다. 폭력을 당한 여성이 폭력의 가해자인 남편을 고소하지 못하는 것 역시 공포다. 또한, 오랫동안 이 사회는 가정폭력의 일상성을, 문제없음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 후에 일어나는 “잘 될거야”와 “참아야 하는 것”이라는 자기암시적 거짓말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 친구의 폭력을 참고 그 가해자를 발설하지 못하는 아이나 폭력의 일상화된 모습을 목격하며 저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자신이 폭력당하고 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셀레스트, 어릴 적부터 당한 학대와 폭력으로 인해, 또는 어쩌다 당한 한번의 폭력으로 인해 그 공포와 분노가 성인이 되어서도 내재화되어 떨치지 못하는 인물들 모두, 폭력의 피해자는 얼마나 같은 모습인가.

  아이를 둘러싼 엄마들의 갈등관계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오히려 풀어진다. 진실의 순간은 오해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서로의 유대가 강화된다. 오해로 인해 반목했음에 대한 사과가 이뤄지고 피치 못하게 면면의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이루어진다. 엄청난 사건 앞에서야 또다른 엄청난 사건은 드러나는 아이러니. 폭력의 희생자 셀레스트는 말한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폭력을 말하는 것일까. 폭력을 감추는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그냥, 그런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헬리곱터 엄마들의 종횡무진 난리부르스를 다룰 것 같은 이야기의 시작에서  사회에 넘쳐나는 폭력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아이와 어른의 동일한 행동을 나타낸다. 폭력을 행한 당사자로 지목되면서도 친구의 거짓말을 묵묵히 감내해내는 아이, 시끌벅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살인자가 되어 버린 이를 감싸는 진실을 알고 있는 어른들. 사람들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언어적이든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가슴에 맺히는 폭력을 행사하고 또한 그에 맞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동원한다. 이 맞물려가는 일련의 일들은, 그 사소한 거짓말 속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위한 몸부림이 숨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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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마시는 이유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2016-05-16.


  인생의 그 모든 비극의 끝자락에서 위로의 선봉장은 술밖에 없을 듯이 여겨진 때가있었다. 술기운만이 버텨낼 힘을 줄 것 같은 때. 술이 망각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망각해야 할 것은 뚜렷하고 자잘한 망각에 부딪칠 때, 술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술에게도 기만당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더 이상 술에 대한 환희와 찬가는 없어지는 때. 술은 희극의 기쁨의 정점에 맞이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늘 비극과 함께 하고 비극속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 술의 경험을 모르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등장인물들이라니. 술에 대한 찬가라고 하기엔 비애가 가득한 인사말, “안녕. 주정뱅이“. 실제의 사람들에게 건네기엔 욕설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한 인사가 소설 제목으로 전달되면서 느낌이 다르다. 그들의 술은 어떤 맛일까.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 나날들 마다의 술과의 만남은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세 고교 동창의 십여년 후의 만남을 그린 「실내와 한 켤레」의 문장이다. 친구는 치명적인 가스에 가까운 분위기를 남긴다. 그런 친구들은 삶의 어느 곳곳에서 튀어나와 그 치명적인 가스에 질식하게 만든다. 그 모든 술과의 만남 이전에 치명적인 가스로 타인을 질식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은 나 아닌 사람에 의해 파멸할 수 있을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그 사람은 가족이기도 배우자기이고 친구이기도 관계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봄밤」의 영경은 제 남편이었던 이에 의해 제 아이를 빼앗겼고 수환은 아내에게 버림받고 신용불량자마저 되었다. 「이모」속 이모는 제 가족에게서 오랜 동안 피폐해질 정도로 착취당했다. 「카메라」의 관주는 연인의 말 한마디를 품고 그것을 지키려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생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이토록 잔인한 운명들은 술을 불러오게 만든다. 그래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술에 의지해 망각하려 하고 비애를 달래려 한다. 그러한들 쉬이 잊어질 리 없는 삶의 비애를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견딘다는 말이 갖는 무게는, 비애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도 않으려 한다. 모든 불행을 부여잡고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하는「봄밤」의 영경처럼, 이 생애에서 행운의 몫은 아직 남아 있을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p230


  치명적인 가스를 퍼붓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게 닥친 불행이 「층」의 외침처럼 내 탓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행은 받아들여야 하고 감당해야 하고 견디어야 할 뿐이다. 온 힘을 다해 불행 가운데 행운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누구든 한발짝 물러나 이렇게 말하기 때문 아닐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p242


  아니, 사실은 술보다도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당신의 도움이,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움되지 않으리라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한, 이 세상살이에 주정뱅이는 넘쳐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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