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할 틈도 없이 어느새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개마고원, 2013.

 

   몇 년 전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서울에서 아파트 전세에 사는 것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몇 호선인지 모를 지하철 종점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인 저자는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인터뷰도 하고 글도 쓰고. 개인 블로그는 사회문화에 대한 비평을 주로 싣고 있으며 우수 블로그로도 선정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분이다. 그가 이러한 불로그를 운영하며 연구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며 관심가지는 것은 이렇단다.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사회의 ‘지적 총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생각 아래, 현대사회가 개인의 생활스타일을

어떻게 창출하는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세대담론으로서 이십대가 현 사회를 살면서 가지는 생각과 태도를 바라본다. 기본적으로 이십대가 사회에 대해 가지는 생각, 이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어떻게 틀을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파악한다. 저자는 총 4장으로 나누어 1장에서는 이 글의 발단이 된 이십대의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이십대가 처한 현실을 3장에서는 이십대가 왜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러한 현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며 이십대를 위해 해야 할 일, 이십대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십대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경쟁논리에 갇혀 무수히 자기계발을 통해 이 길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개인적인 자기계발로 바뀌어질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가지는 기본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십대는 현재 극심한 불안에 놓여 있고 그로 인해 사회의 문제들을 자기 일로 생각하기보다 외면해 버리고 개인의 생에만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지방대, 학벌 등 학력 차별을 당연시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에 대한 관심도 적다. 이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별을 당연시하며 ‘차별’을 하고 있는 이십대를 지배하는 담론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엔 이십대를 직접적으로 만나기 어려워 이십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맞닥뜨리니 놀라울 뿐이다. 유머 반 진담 반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10대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전히 있지만, 나도 갈수록 어린 세대와 공감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끔 된다. 서로의 생각의 차이, 방향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가 말했듯이 슬픈 현실이고 분명 바뀌어져야 할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그 길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계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p232

 

   이십대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데 저자는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시작하고 대화를 통해 생각을 이끌어낸다.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고 의문에 대한 토론까지 이어진다. 이십대를 피상적으로 보며 논의를 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방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십대의 전부가 대학생은 아니기에 부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대에 대한 담론이라고 보기보다 오히려 대학생들의 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듯도 싶다. 어쨌든 핵심은 자기계발이 강요되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이 담론에 갇힌 이십대 대학생들의 생각들을 파헤치고 있다.

   그래도, 사회는 젊은 청춘들에 기대를 건다. 어쩌면 그러한 기대에 대한 부담이 클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이십대들의 말은, 이해가 어렵다. 이해가 어렵다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기대로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가’가 되는 것일 게다. 그들의 생각이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이십대의 생각의 편린을 통해서 개인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이끌어 내고 그에 대한 의견을 펼치는 것,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묵자>를 두려워하는가

 

묵자-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사상가


임건순, 시대의 창, 2013.


  <묵자> 이 책은 <묵자>의 원문에 대한 한문풀이 주해서가 아니라 <묵자>에 대한 작가의 완전한 이해를 설명해 주고 있다. 결국 작가는 <묵적>이 아니라 임건순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우리에게 낯선 사상가인 묵자에 대한 소개에서 시작하여 묵자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묵자의 사상이 나왔던 배경과 다른 사상과의 비교를 통해 묵자 사상을 설명해 나간다. 특히 묵자의 사상은 공자 사상에 대한 반론이 많기에 그 비교 대상은 공자의 유가사상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묵자 사상을 설명하며 묵자 사상의 정수들을 추려 이해시킨다. 이후 묵자의 실질적인 원전을 소개하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다만 완전한 원전읽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추려낸 원전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묵자 사상을 이야기하며 유가 사상을 비교 설명한다. 묵자 사상이 공자 사상에 대한 반론적 성격을 띠고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교 설명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묵자 사상이 나름 무리들을 형성하고 다른 사상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결국 소멸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당대의 사회현실의 토대 속에서 분석한 원인들이 와 닿았다.

 또한 아마도 보편적 복지 형태인 겸애에 대한 사상과 반전 사상에 대한 묵자 사상이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묵자는 그러한 사상들을 직접적으로 실천하였으니 그러한 하나하나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도 와 닿을 수밖에.

 오래도록 익숙했던 유가 사상에 이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유가 사상을 반복하여 비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사상의 느낌을 더할 수 있다. 물론, 제목을 봤음에도 잊어버리고 이 책이 묵자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나 싶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은 당대의 현실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사상적인 흐름에 대한 이해를 통해 특정 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음을 알았다.


 누가 <묵자>를 두려워하는가.

 오래도록 <묵자>와 <묵가>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단지 사상의 어려움 때문에 이 사상을 소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책은 너무 쉽다.

 <묵자> 사상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 없게 느껴진다. 모든 사상가들의 사상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봐야 하지만, <묵자>는 정말 직독 직해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묵자>원전이 아니었다. 더구나 원전에 아주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책을 펼쳐보니 많은 부분 작가의 풀이가 좌우하고 있었다. 원전에 대한 한문풀이 번역이 아니라 <묵자>가 가지는 주요한 사상에 대한 정리와 해석을 하고 있는 책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언급된 <묵자>의 느낌이 강도를 더해서 전해졌는데 아마도 딱딱한 느낌으로 서술되었다면 <묵자>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많을 듯하다. 그것은 마치 이른바 ‘일베’들이 좌파에 대한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그만큼 <묵자>는 좌파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 단지 사상뿐만 아니라 실천에 대한 강조까지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진보당의 사상과 공약들을 보고 있는 듯했다. 신영복 선생님도 <묵자>에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책은 <묵자>의 사상만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묵자, 즉 묵적에 대한 설명과 묵가 무리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오늘날 이 사상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이 사상이 왜 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묵자 사상 자체가 공자와 함께 하고 있기에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도 설명을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더불어 당시 다른 이들의 사상의 핵심과 비교를 해주고 있어 묵자만이 가지는 특색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상당히 쉽게 설명되고 있긴 한데 간혹 너무 어린이들에게 말하는 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들이 여럿 보였다. 그로 인해 내가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니, 이거 어린이용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 작가 자신이 야구논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블로그 글이나 쉽고 유행하는 말들을 사용한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장점은 너무 쉽게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오히려 그렇게 쉬운 말투가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반복적인 설명과 강조로 인해 묵자의 대표적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학습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나, 조금 머리가 커졌다고 이것이 완전히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 즉 원문을 보다 많이 살펴보고 해석을 하고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쉽게 <묵자>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 <묵자> 원전에 대한 욕심이 강하게 들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다리 냅둬!


장자는 말했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고....


 


장자, 오강남, 현암사, 1999.


  혼란의 시대에는 단순명료해질 수 없는 걸까. 사상의 맞물림들이 아득하다. ‘혼란’이라는 단순하고 절대적 상황에서 내적인 단순함이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의 사유가, 그의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문장들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역시 정확한 출생연대가 기록되지 않고 있는 장자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당연 학창시절엔 공자와 맹자에 묻혀 조금 더 나아가서는 노자에 밀려 있던 사상가다. 내 기억으로는 어느 순간 장자의 열풍이었고 그러한 바람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던 때도 있더랬다. 그저 시대적 상황과 함께 생각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글이구나, 싶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대략 보다보니 그들 사상의 진보를 떠나 통찰을 떠나 사상가들의 행적은 비슷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탓일까. 내겐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앉아 생각해보면 별 차이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어 대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서로의 사상들의 논박의 물고 물림의 관계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깊이 있게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처럼 읽었나 보다. 가벼운 바람처럼......

  

  장자는 다른 여타의 사상가들처럼 본명은 따로 있다. 주(周)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로 알려져 있었더랜다. 도가(道家)의 사상가로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전해져 노자 사상의 종속물로 생각하다 이번 기회에 분리를 시키게 된다. 동양철학사에서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그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면야 저~지하에서 나를 얼마나 야속타 할꼬.

 한때 벼슬을 한 적도 있긴 했지만,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왕의 부름을 마다하고 저술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초나라 위왕이 대표적인 사람으로 장주를 재상으로 삼기 위해 사자를 보내 귀한 선물들로 그를 꼬시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장주는 “천금은 큰 이익이고 귀족과 재상이란 지위는 존귀한 자리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도시 밖의 예식에서 희생으로 쓰인 소를 본적이 없는가? 수 년 동안 배불리 먹인 후에, 그 소에게 무늬가 있는 옷을 입히고 조상의 묘로 끌고 간다. 그 순간에 그 소가 자신이 단지 버려진 송아지이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즉시 나가라.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평생토록 나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나의 뜻을 유쾌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장주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보면 제자들이 그에게 후한 장례식을 치러주려고 하자 “나는 하늘과 땅을 속 관과 겉 관으로 생각하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생각하며, 별들을 구슬들로 생각하고 만물들을 장례 예물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장례 용품에 어찌 빠진 것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에 무엇을 추가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을까 두렵습니다.” 장자는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힐 것이고, 땅 아래에서는 나는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먹힐 것이다.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개미와 땅강아지에게 주려고 하니,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편파적이냐!”고 했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장자를 야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구절을 읽고 그냥 넘겼다가 다시 글을 읽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런듯하다.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장자는 총 33편 6만 4606자로 이루어져 있고 <내편>, <외편>, <잡편>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위진 시대 사상가 곽상(郭象)이 편집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가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편에서는 장자가 10여 만 언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곽상이 편집한 것, 즉 오늘날 전해지는 [장자]는 원문이 일정 부분 소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실된 것인지, 곽상이 편집하면서 빼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자들은 이 중 <내편> 7편은 장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외의 편들은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기록한 일종의 논문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내편>은 1편 「소요유(逍遙遊)」, 2편 「제물론(齊物論)」, 3편 「양생주(養生主)」, 4편 「인간세(人間世)」, 5편 「덕충부(德充符)」, 6편 「대종사(大宗師)」, 7편 「응제왕(應帝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자[의 구성을 볼 때, 이 책은 [장자]의 <내편>을 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가 직접 썼다는 <내편>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외편>과 <잡편>의 몇 구절을 뽑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뼈대는 <내편>에 대한 저자식의 풀이이다.


  중요한 것은 제일 처음에 제시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처음이라 보다 꼼꼼하게 읽어서인지 제1편 소요유 편이 제일 인상에 남는다. 제목도 “자유롭게 노닐다~”이다.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만들어줬고 그와 더불어 다른 장자 책의 해석과 풀이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편에서 나오는 바람이야기가 왜 닿는지. 지금 이 책을 읽는 시점에선 소요유 편의 붕새와 메추라기 이야기와 더불어 바람이야기가 내 맘에 얹어진다.

 오래 전 한문으로 쓰여진 다른 나라의 글을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장자에 대한 해석을 단 많은 책들이 있듯이 결국 세상의 모든 책들은 자기식대로 소화하고 읽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의 특징은 물론, 장자에 대한 오늘날의 시각, 현대적 의미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요즈음의 책들이 다 그러하니 이 책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기엔 미흡하다. 그렇다면 뭘까.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데 이 책은 장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보다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라면 멈칫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장자 원전 자체가 지나치게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기독교적인 해석이 들어가 더욱 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더욱 몽롱해진다는 이야기다. 좀더 명쾌함이 필요하지 않나.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 이해, 영적인 해석에 덜 노출된 나 혼자만의 문제일까.

 원문을 해석하고 풀이하면서 반복적으로 단어를 쓰는 경향이 있다. 해석의 폭이 일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좁다고 해야 할지, 거듭 반복된 문장과 단어가 내용에 대한 일관됨을 견지할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는, 미흡하다는 느낌이 반복적으로 들게 했다. 프레임의 차이일 수 있을 것이고 몇 번 거듭됨 때문인지 강신주와 왕멍의 장자 해석이 더 일깨움으로 다가왔다. 글이란 어찌어찌 해도 코드라는 것이 있구나 생각한다. 나의 이 ‘코드’를 물리치는 책을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의 충동을 몰고 온 여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Writing Down the Bone

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욱 옮김, 한문화

.


  이 책은 글쓰기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한 기술에 대한 글이기보다는 글쓰기를 잘하기 위한 마음가짐, 의식에 관한 조언이 주가 되고 있다. 이러한 조언을 위해 저자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수련하고 있던 ‘선명상’의 방법적인 것을 글쓰기를 위한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가 전하는 글쓰기의 방법은 보다 많이 비우고 덜어내고 느낌대로 따라가라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목차를 구성하기 보다는 에세이 형태로 짧게 글쓰기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하여 60가지가 넘는 소꼭지로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독려하고 있다.

 책을 처음 읽은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 새 검열관이 들어왔다. 처음엔 음~하며 읽었던 듯한데 북리뷰로 쓰려다 보니 제법 많은 검열관이 이 책을 검열한다. 글쓰기가 안됨에 대한 반발일까.

 이 책의 장점이라면 자연스러웠다는 정도. 작가가 제시하는 글쓰기 책이라고 하기엔 명료한 느낌이 들지 않은 책. 물론, 혼을 빼놓을 순 있겠다 싶다. 그것은 이 책이 조금 몽환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가 글을 쓰는 방식이 그러한 모양이다. 동양철학, 선명상을 글쓰기에 접목하고 있다고 말하듯이 곳곳에 그 느낌이 들어 있다. 그런 탓에 오히려 ‘나도 글을 쓸 수 있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느껴졌다. 몽환적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단, 한번이다. 다시 읽으니까 검열관이 살아나며 냉철하게 봐지더라...

  우선, 이 책은 글쓰기를 내세운 명상(?) 수련 책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마치 글쓰기를 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신비체험을 하는 것인 마냥 깊은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맞다. 그렇게 몰입과 황홀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글쓰기다. ‘선’을 접목한 글쓰기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글쓰기가 모든 영감의, 생각을 비우는 형태의 명상수련법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니까.

  두 번째, 다른 책들도 그렇고 나도 쓰게 되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녀의 글쓰기 방법이 다른 글쓰기 책과 차별점이 무얼까. 선을 공부하는 그녀의 체험이 가미된 ‘생각하라’ ‘몰입하라’ ‘버려라’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마침 다른 글쓰기 책을 읽었고 그 책은 그녀의 책보다 이전에 출간된 책이었다. 말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 즉 글쓰기 방법이라 소개하는 내용이 독특하다거나 하지 않다는 것.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책은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내용을 좀더 깔끔하게 정리했으면 한다. 나열된 제목처럼 나탈리는 글쓰기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매우 많았던 듯하다. 하지만, 읽다 보니 반복적이다.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그녀 자신이 첫 문장에 사로잡혀, 영감에 사로잡혀 검열관은 냅두고 마구 글을 써내려간 듯한 느낌이다. 조금 검열관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관련된 내용과 메시지, 제목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을 듯 보인다. 글쓰기의 방법론은 적게 나왔지만, 방법론과 글쓰기를 위한 마음가짐, 작가에 대한 인식 등의 카테고리를 나누어 생각들을 전개해 나갔다면 글의 내용이 좀 더 깔끔하게 와 닿았을 것 같다.


 ‘선’,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명상하는 서양 여자.


 서점을 가면 글쓰기 책이 즐비하다. 세상은 글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 마냥, 글을 쓰는 것이 인생과 직결되는 것처럼 글쓰기 책이 연이어 생산되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글쓰기 책은 증가하는 이 현상은 뭐지? 넘치는 글쓰기 책 중에서 나탈리의 글쓰기 책이 많이 거론된다. 왜지? 이 책은 1986년도 출간이고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이 나오지 않은 걸까. 당시 이 책은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또, 백만부의 판매고까지 올리며 전세계에 번역, 출간되었다 한다.

 사람들은, 이 책에서 어떠한 글쓰기의 맛을 느꼈을까. 실질적으로 글쓰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떠나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을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나탈리는 폴란드계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결혼과 이혼 과정을 거치며 살다가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면서 인생의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그림도 그리고 있다. 그녀의 글쓰기와 그림보다 선행하는 것은 ‘선명상’으로 보인다.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맛도 약간 몽환적, 동양적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이 명상을 통한 수련으로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듯하다. 글쓰기의 내용도 명상이 상당히 접목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사상을 널리 전하며 여전히 명상을 수행하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강의를 하면서 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쓰기에 대한 직진 안내서



내 인생의 첫 책쓰기 - 인생 반전을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

오병곤, 홍승완, 위즈덤하우스, 2008.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책쓰기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왜 책을 써야 하는지와 책을 쓸 때의 원칙, 구체적인 책쓰기 실천방법, 그리고 책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클리닉을 단계별로 제시함으로써 책을 쓰는 동기부여에서부터 실천까지 일관성 있게 가이드해주고 싶었다. p11


  저자들은 이 책의 목적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서 7장의 뼈대를 만들고 책을 써야 하는 이유와 책을 쓰기 위한 구상방법, 재료, 글쓰기방법, 출판을 위한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중간 중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한 질의를 코멘트해주는 ‘책쓰기 클리닉’을 삽입하여 감칠맛을 더한다. 이 책쓰기 클리닉은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한 뒤데 붙여져 있다. 즉,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부분을 글쓰기, 책쓰기 과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또 하나, 첫 책을 낸 저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실제 책을 내본 저자와 출판사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생에서 왜 책을 쓰는 이유가 중요한지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들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이야기로 ‘책쓰기’가 인생의 변화에, 전환에 매우 큰 영향력이 있음을 열렬하게 설득하고 있다. 책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마치 정말 그래야 할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방법적인 노하우를 알려준다 해도 주술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듯하다.

 글쓰기, 책쓰기에 갖는 어려움에 대한 친절한 고민상담란을 두고 있어 많은 이들이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구나 하는 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또한 책을 쓴 저자들의 경험담을 보여주어 좋았고, 마찬가지로 출판사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실상 글쓰기 책은 너무 많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바라고 책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수많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나와 있다. 한번도 글을 써보지 않은 이가 글쓰기 책을 내기도 한다. 글쓰기의 매력이 무엇이기에를 느끼기 전에 대부분 자신은 이렇게 글쓰기를 했다라고 말을 하면서 방법을 전하는데 사실 많은 책들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은 차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하려는 핵심이 비슷하고 실제 글을 쓰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공통적이기에 그에 대한 방법 역시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기대가 덜한 탓일까. 그저 그런 글쓰기 책이라고 생각했다가 오,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특히 글쓰기보다는 책쓰기에 집중이 된 책이라 ‘책을 써내야 한다’는 나의 의무로 인해 흡인력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구성이 짜임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일기가 있어서 재미있긴 했지만 출간일기가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실제 진행과정을 정리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책을 쓰는 과정의 일정별 체크리스트를 보여주면 시간계획을 세울 때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처음엔 장뒤에 붙은 책쓰기 클리닉이 내용과 너무 중복되는 측면이 있기도 해서 이 부분을 뒤에 한챕터로 몰아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 읽고 나서 핵심을 다시 되새기는 측면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관련 방법과 연결된다는 측면으로 보면 이 구성도 나쁘진 않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저자들을 내가 알고 있다. 도서관에 책방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 내가 저자를 제법 알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명의 저자가 쓴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많이 보지 않았는데, 이것을 구별해 낸다니. 그만큼 저자들의 글쓰기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인 오병곤의 평소 하는 말투나 전하는 메시지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홍승완의 경우도 강연에서 하는 말투나 메시지가 드러났다. 결국 책이란,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풀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 다 ‘구본형’이라는 사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애제자로서 사부가 전한 메시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열심히 공헌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잘 모르고 보면 낯선 저자들이긴 하지만, 잘 보면 친근한 느낌이다. 책쓰기라는 어렵고 힘들다는 과정을 편하게 이끌어가는 주축이다.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좀, ‘푼수?’같아 보이지만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쓰기 책 만큼은 경쾌함과 묵직함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