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13.


  저자, 강준만은 감정독재를 이야기한다.

  원래 인간이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인터넷 등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견고한 감정독재에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장과 함께 감정 독재에 해당되는 50개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며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이에 관한 이론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이론을 연결하여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길을 찾아 진화해왔으며,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 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감정 노동’과 ‘감정 자본주의’가 주요 이슈로 등장한 것도 바로 그런 변화와 무관치 않다. 감정 독재가 심화되면서 자본이 감정을 활용해야 할 ‘감정 식민지화’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감정 독재’와 ‘싸우는 법’은 사실상 ‘타협하는 법’이다. 정면 승부를 해선 결코 이길 수 없으며, 감정과 이성의 와전 분리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정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정열은 감정의 몫이 아닌가. 누구 말마따나 “이성의 적이 아니라 동료로서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타협이 가능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살려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싸우다 불리해지면 “너 몇 살이야?”하는 것은 어떤 것? 이것은 주의전환의 오류.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가 승리하는 것은 만족지연이론. 큰 부탁보다 작은 부탁을 먼저 하는 것이 더 유리한 이유는 문전 걸치기 전략의 유효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감정의 화두를 잘 분석하고 있다. 이론의 틀로 잘 설명하고 있는데 가끔 생각한다. 이론 때문에 행동이 따라가는 건 아닐까. 많은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만들어 그의 심리를 알아보고자 한다지만, 가끔 이론이란 이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분석하여 이론을 만들어낸 것인지 선후가 어느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미 딱지가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러니까 결국엔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하나 분석이 되는 것이라면 참 설명하기 쉬운 인간의 행동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을 텐데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어떤 행동들이 하나의 이론의 틀 안에 갇혀 버리게 되면 그 행동이 강화된다는 점에 있다. 설명이 되고 납득이 되기에 행동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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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감정

 

- 우리는 왜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분노하는가

최현석 저, 서해문집, 2011.


  최현석을 인터넷에 검색하니 최근 핫한 사람의 이름이 먼저 올라와 있다. 셰프. 요즘은 먹는 것, 요리하는 프로가 대세다. 인간의 삶에서 먹는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 이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리프로마다 먹는 음식의 맛을 표현하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 역시도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에 대한 책을 이는 요리사가 아닌 의사 최현석이다. 최현석 의사는 내과 전공이며 자신의 직업의 전문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한 분야의 책을 많이 발간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인간 개념어 사전'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 시리즈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총망라한 과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한다. 총망라한 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 분노, 슬픔, 기쁨, 좋음, 싫음, 공감이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과학적인 방법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 저자가 의사라는 점이 이를 설명하는데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지식의 전달로 그치지 않는다. 감정에 관한 뇌 과학적 연구와 감정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모두 담겨 있다. 인간의 '기본 감정'과 '보편 감정'의 개념, 각 개별 감정들의 원인과 기능, 신경계 메커니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병증 등, 우리의 일상생활 속의 감정들의 모든 모습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감정이란 개개인의 개별적인 경험이지만, 옆 사람들에게 퍼지는 전염성이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웃으면 웃을 만한 이유가 없어도 웃게 되고, 상대방이 화내면 자기도 화가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에서 누군가가 웃거나 즐거운 상황이 아니라 화를 내는, 분노의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영향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분노’가 사회계층의 불평등으로 느껴질 경우에는 집단의 힘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경우엔 이것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혹독한 체험을 통해서 나는 분노를 모아 두는 한 가지 숭고한 교훈을 터득했다. 마치 보존된 열이 에너지를 내놓듯이 우리의 분노도 다스려지기만 한다면 세계를 움직일 힘을 쏟아 낼 수 있다는 교훈이다.”

  감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곁든 책인데 어렵지 않게 서술된다. 서술톤이 조용하고 부드럽다. 다만, 극적인 힘은 약하다. 설명적 서술과 곁들여 감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겪게 되는 감정에 대해 아, 그때 그것이 그런 형태였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이 책이 개념어 사전인 결과이긴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좀더 깊은, 격정적인 감정에 대한 서술의 갈구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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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시 보는 방식.....일기를 읽으며

 

   어릴 적부터 이순신은 위인이었다. 어린 내 기억 속에 너무나 당연했던 영웅 이순신. 우리나라의 위인전은 늘 그랬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명확히 이 사람은 ‘위인’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남과 다른, 뛰어난’ 특성을 갖추고 있어서 ‘아, 그래서 위인이구나’ 하게 만들었다. 한국 위인전은 늘 특별했던 이들이 결국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늘 사람냄새 가득한 이들을 만나기보다는 경직된 듯 보이고 위엄에 가득찬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특히나 한국화폐공사의 모델이신 이순신인데, 아무리 지폐 아닌 동전모델이라도 그 위엄을 잊을리 있을소냐.

   강제적으로 이순신은 자동 위인이 된 사람이다. 내 스스로 그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가기 보다, 내가 생각하는 위인과 영웅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기 전에 이미 위대한 영웅이며 위인이라는 도식으로 자리잡은 사람...그리고..또 어렸던 어느 날, 선생님은 이순신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원균의 모함으로 죄를 추궁받던 중 전쟁으로 다시 그의 자리에 복귀되었을 뿐이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었기에 죽은 것으로 위장하였다는,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이순신이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래서 그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왔음에도 딱히 재밌지 않은 이야기, 더 들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던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경남에서의 이순신 사랑은 더욱 각별하여 곳곳에 이순신 동상과 이순신 관련 문화유적지 조성이 이어지고 있었고, 연구원에서는 남해안 특별법과 더불어 이순신 프로젝트가 중대한 과업이었다. 이순신이 먹었던 이순신 반상이 만들어져 있고, 이순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금만 이순신과 걸쳐져 있으면 이순신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순신 프로젝트는 거대했고 ‘거북선을 찾기’, 해저유물탐사도 있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차이, 이순신이 전쟁에 사용했던 총통들이 기억나는 것도 대대적인 프로젝트라 본 기억이 있다.  선거철이면 이순신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야기도 부지기수다. 어느 때인가는 이순신의 리더십에 관한 주제로 김훈의 초청강연까지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 관련 보고서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보고서들이 넘쳐나고 이순신 강연이 이뤄지던 그 때에도 이순신은 ‘일’로 만나고 스치는 사람이었을 뿐, 강연의 내용보다 강연자에 더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 이순신!’이라는 공명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느낄 여유도 없었거니와 이미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봤던 난중일기를 읽으며 타인들 때문에도 너무나 기대를 했던 탓일까. 몇 장 넘기고서 ‘이게 뭐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다 인가? 계속 이런 형태인 건가? 반복되는 ‘공무를 보았다’를 보면서 선생님들이 절대로 일기를 쓸 때 쓰지 말아야 할 구절로 강조했던 ‘나는 오늘 ~했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도대체 이순신은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무를 보았다’는 한 줄을 일기라고 적고 있는 건가.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 그의 업무일지였던 것인가. 몇 번 본 난중일기의 내용이 이렇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라는 생각과 더불어 기대의 강도를 0을 놓고 난중일기를 읽었다. 정지된 바늘이 점점 올라갈 때까지.

   남의 일기를 읽는데 감동이고 뭐고를 따지는가. 그저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 아니, 격랑의 날들의 소소한 기록들이 애처롭고 애처롭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데, 공무를 보았다는 그 한줄마저도 마냥 가슴이 아린다. 전장에서 기록한 그의 글 하나하나가 어찌 울림이 없을까. 갈수록 길어지는 그의 문장도 짧은 단문들도 그저 이순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글들은 항상 애처롭다. 그리고 그의 기록들은 대체로 같은 패턴이다. 그의 일기 전반에 흐르는 이순신의 마음이, 알리도 없음에도 나 혼자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이 여겨진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되어 그가 전사할 때까지 씌어진 일기이며 기록의 해는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 무술년(1598)이다.

이순신은 한글이 만들어지고 태어났지만 한글은 여전히 벼슬아치들에게서부터 널리 활용되지 못한 탓에 이순신은 전쟁 중에 초서로 몹시 흘려 쓴 일기를 남겼다. 특히 치열하게 전투가 일어난 해일수록 흘림의 정도가 심하였고 부분 부분 누락된 날들이 있다. 그만큼 치열하고 긴박한 날들을 이 일기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이순신의 일기는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기에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일기가 오독되어 전해진 글자가 많다고도 한다.

이 글은 그날 그날의 일들-그날의 날씨, 일어난 일들, 자신의 느낌과 감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년원일의 순으로 일기를 기록하며 하루에 한줄 기록을 남긴 날도 있으나 대체로 매일 매일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영웅 이순신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누차 들어왔다. 그렇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그의 일기 속에 늘 반복되는 것은 날씨.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임금과 나라와 부하 장수들에 대한 걱정들. 그리고 홀로이 외로움에 가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글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므로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한 것이니, 그런 그의 글을 나중에 묶어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니, 여기에 목차이며 내용의 면면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 무엇하랴. 그가 작정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기록하겠다는 목적적인 글쓰기가 아니었을 터이므로 더더욱.

   장수의 병무일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개인적인 토로인 것 같고, 개인적인인 토로라 생각하면 업무와 관련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다. 전쟁에서 어떻게 적은 무찌를 지에 대한 구체적인 병술일지도 아니거니와 기록된 글들을 읽다 보면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같이 느껴지는 기록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전쟁의 상황, 늘 긴장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그의 일상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신의 심정을 기술하면서 달이 밝은 밤에도 비가 오는 밤에도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그는 근심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 어지러운 나라에 중책을 맡은 책임감,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그의 일기는 자신의 마음을 가누기 위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타인의 일기를 읽는 이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의 일기를 읽다 보면 답답한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원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싶다. 그저 원균이란 자의 행태가 말이 간계하다라는 글만 적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원균의 행동과 처사가 그토록 다른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그를 날이면 날마다 욕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글이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으로 적는 일기에 객관적인 사건의 개요를 요구하는 나는 참....

   날들마다 날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더욱 애잔한 마음이 가득한 느낌이다. 전쟁과 날씨, 그리고 병영의 소소한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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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쓴 자서전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상권은 아들 인과 신에게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온 개인적인 행로를 들려주기 위해 쓴 글이다. 백범의 나이 53세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쓰여진 글이다.

   이 글은 백범의 일생의 기록이다. 일제시기와 독립 후의 격랑의 세월 속에서 살았던 백범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므로 사회적 상황 속에 놓인 한 개인이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는 고대로 감동의 기록이다.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과정의 담담한 서술들은 그의 행동에 대한 감동이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행동을 하게끔 이끄는 그의 내면 속에 자리한 생각들도 역시 감동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그의 소원에 관한 글이 아닐까. 하나하나 두루두루 곱씹는 맛이 좋다. 백범의 나의 소원! 또한 그것이 그의 일생과 더불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상권은 그의 일생의 기록이므로 그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중년의 삶들을 회고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권은 그의 행적의 기록이지만 그가 행한 구체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느낀 그의 생각과 감정들을 함께 기술하고 있어서 백점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함께 파악할 수 있다. 상권이 보다 개인적인 생애에 관한 기록이라면 하권은 백범의 활동을 보다 조직적인 관점, 임시정부 활동과 그 당시 활약하던 다은 인물들과의 관계를 중점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개인이 속한 조직의 활동 내역이라 불릴 만하다. 백점은 하권의 집필에 관하여 자신이 활동한 50여 년의 기록을 보며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고 하고 있다.

  개인의 생애에 대한 자서전에 관한 한,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쓰여진 백범의 자서전 상권은 마치 한편의 소설을 보는 것처럼, 현실에서 일어난 것인가 하듯이 드라마틱하다. 그의 글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없이 쓰여진 것 같은데도 글들이 휘날리는 듯하다.

   사실적인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러한 행동 이면에 있던 백범의 생각을 함께 말하고 있어 그의 행동의 동기, 생각들을 일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시간적인 흐름으로 정리한 것이 일제시기와 임시정부수립 이후의 활동들에 관한 역사를 함께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개인의 성장의 기록이자, 독립운동의 역사를 파악하게 되어 미흡한 공부를 더하는 느낌이었다. 개인의 기록이라 정확한 인명이나 시간이 헷갈릴 수 있음을 주해자의 설명에서 정정하며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기에 더욱 그렇다.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어떻게 불리든, 그는 그. 본질이 달라질까. 아니 어쩌면 그를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그의 행동력이 달라질지 모른다. 스스로 개명하며 그의 신념과 의지를 붇돋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우리의 어린 왕자 속에서도, 김춘수의 꽃에서도 누누이 강조되듯이. 우리가 누군가를 부를 때, 그는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렇게 창수는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동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나지만 김구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살아 있다.

  백범의 일생을 보다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의 생을 뜨악하며 바라보면 그가 일제시기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가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생활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아이들은, 모두 5명. 세상에 태어난 김구의 아이들 2남 3녀 중 딸들은 모두 어릴 때 사망하고 아들 또한 독립 전에 사망한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는 아비의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살아 있는 아들들에게 띄우는 그의 생애의 기록이 그리하여 더욱 애잔하다. 그가 이러한 기록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들들에게 띄우는 편지로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 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범의 입을 통해서도 가족과의 삶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입장이, 신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때문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은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일본에 사죄했다. 힘들고 힘들던 그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무릎 꿇어버린 안준생에 통탄하다가도 그저 모두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몇 번을 개명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김구와 그의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대가 낳은 개인의 불행에 울분만이 솟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나오려다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냐.

   김구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 개인의 생애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다. 그의 생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다. 그의 연보를 보다 보면 그것이 고대로 그 시기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개인과 나라의 일체화가 그의 생애를 통해 대변된다. 그들에게 오늘의 삶을 빚지고 있다는 상투적인 말이 고스란히 내뱉어진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줄곧 자신이 못생겼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노년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그 온화하게 보이는 얼굴이 꽤나 잘 생겼다고 생각하던 터라 그의 이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을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책 속에 나타나는 흑백사진 속의 아주 작은 그의 얼굴은 또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숟가락을 부수며 엿을 바꿔 먹던 어린날의 개구쟁이가. 그런 어린 아이가 굳은 신념을 가지고 굳건한 활동을 이루어가는 변화를 보며 파동도 없이 흘러가는 내 삶과 신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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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하워드 진,  김민웅 옮김, 일상이상,  2012.

 

 

 

   33가지.

  하워드 진은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라는 이 책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내놓은 잘못된 정책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들, 또 공산주의라는 이름 속에 갇힌 사고로 인해 벌어지는 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장에서 미군들이 보여준 비극적이고 천박한 행동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는 노동자의 역경,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부시 대통령,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곤경에 처하자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 클린턴, 2000년 미국 대선 당시에 표심을 잡기 위해 지키지도 못한 약속을 내걸은 대선 후보들의 실체를 파헤친다.

   1980년부터 2010년까지 그가 잡지 ‘The Progressive’에 올렸던 글들을 모은 것으로 이 기간 동안 나타나는 역대 미국 대통령과 수구언론 등 권력층이 벌이는 꼼수들은 하워드 진의 눈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국가안보란 무엇인가?” 등 국가, 국민 그리고 정치, 정책에 관해 우리가 답답하게 느끼는 부분을 질문하여 그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워드 진은 결국 자유와 평화와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는 ‘시민’의 힘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항상 깨어있는 시각으로 기득권, 정치권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잘못된 정치와 정책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대안은 보다 시민의 힘이 모아져야 하는 것, 조직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민주주의의 진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워드 진은 촘스키와 더불어 세계적인 실천 지성으로 통한다. 촘스키를 좋아하는 나에게 촘스키와 같이 거론되는 무엇이든 다 관심이 간다. 하워드 진은 뉴욕 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이민자로 아버지인 에디 진(Eddie Zinn)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어머니인 제니 진(Zenny Zinn)은 동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주민 가정, 하워드 진은 빈민가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부모는 미국에서 만나서 결혼했을 때 제한된 교육만을 받은 상태였고 집에는 책이나 잡지가 하나도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뉴욕 포스트에서 각 권마다 10센트와 쿠폰을 보내 20권의 찰스 디킨스 전집을 마련해줌으로써 아들에게 문학에 대한 시야를 틔워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워드 진은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시인인 엘리아스 리버만이 세운 창의적인 글쓰기 과정을 통해 작문을 배웠다고 한다.

   하워드 진은 세계적 진보 지식인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생애의 경험에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청년 시절에는 해군기지 조선소에서 육체노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폭격수로 참전하였다가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반전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육군 항공대의 490폭격비행단에서 폭격수로 복무하면서 베를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을 폭격했다고 하며 1945년 4월, 서부 프랑스의 로얀에서 있었던 초기의 네이팜 탄을 사용한 폭격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하워드 진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의 평등,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학에 몸을 담으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되었다. 자신이 일하고 있던 보수적인 색채의 흑인 대학교인 스펠만 대학교 학생들의 학습권을 위해서도 싸웠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으며, 백인과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흑인 활동가들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스펠만 대학교의 학교당국은 이러한 진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1963년에 종신교수임에도 하워드 진을 해고한다.

   그의 저서에는 그의 이러한 활동과 생각이 정리되어 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2010년 1월 27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워드 진의 책을 읽었던가. 뚜렷이 생각나는 책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어 그의 책을 읽은 듯한 착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여러 다른 책들에서 그의 인용문을 많이 봐온 때문이었다. 이것이 한 권을 제대로 읽은 그의 첫 번째 책이다. 잡지에 기고한 글을 묶은 것이라 하는데, 옛날 대통령의 이야기가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인 듯하다. 글이 재밌고 편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음모론으로 치부되며 궁금해 할 일들, 역시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생각은 그렇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생각들을 명확하게 꼽아 내니 읽는 이로 하여금 즐겁게 한다. 풍부한 사료와 자료들과 더불어 날리는 풍자와 해학이 시원하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거짓말만 일삼는 자기 이익만 관철하려 애쓰는 기득권에 정치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글들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정치권, 기득권의 행태가 동일한 양상이고 그렇기에 그에 대한 질책 역시 같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같은 패턴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행동을 얘기했는데 여전히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정녕 책을 읽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이런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까. 재밌게 책을 읽고서 늘 이렇듯 같은 이야기를 말하는 책들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데 여전한 ‘시민’과 여전한 ‘사회’는 무엇 때문인가 생각하게끔 된다.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달라져 왔다라고 말하기엔 빨리 변화는 사회로 인해 그 느림이 미학이 되지 않게 여겨진다. 우리는 알고서 속고 있는 것인가, 속아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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