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정치가들의 모든 모순과 아이러니

   

  오랜기간 동안,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및 혁명적 투쟁사상에 관하여 거부감을 가지도록 길들여져 왔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길들여진 사람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내용은 두가지 반응을 낳게 한다. 첫째는 반동적인 도서로서의 취급이며 둘째는 그 내용의 논리적인 전개 및 사물을 꿰뚫는 학자의 통쾌한 시각에 대한 경이와 새로운 글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감정을 가지고서 글을 읽는 과정이었다면 모순론의 내용에서처럼 반드시 주요한 모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글을 읽도록 이끌어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나에겐 후자쪽이 조금은 강한 듯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부분과 모순론의 차이점, 마르크스주의론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마오쩌둥이 이를 수용, 확장하였는지를 중점으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공산주의 이론가 마오쩌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농사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하지 못했고 16세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며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고 또한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고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사건으로 완전히 고립된 채 사망했다.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은 이론적인 부분에 대하여 중국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함으로써 당시의 중국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보다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오쩌둥에 의해 정의·정리된 이른바 마오이즘 사상의 기본은 교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교조주의자들의 이론과 사물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 상당히 왜곡되고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이론과 상황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교조주의자들의 해석을 질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조건 “나는 옳다. 네가 그르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와 예는 주장에 대한 동조를 떠나 일부분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반박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게 한다.

  발단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인 모순의 운동법칙에서 시작한다. 모순은 모든 현상에 존재하며 또한 모순 속에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 특수한 모순은 다른 사물과 한 사물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사물에는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보편성은 특수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교조주의자들은 보편성만 앞세우고 있다.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의 해결방식은 당연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사회의 특수성에 기초하여 달라져야 한다.

  중국사회의 경우 특수한 모순은 제국주의-특히 일본-와 중국인민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국내의 각 계급의 단결로서 민족해방전쟁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른 점을 마오쩌둥이 정통적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결국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결국 마오쩌둥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초한 수정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명철한 논리를 펼치는 이론들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그가 중국사회에 대한 적용을 어떤식으로 이루어갔느냐였다.

  이에 대하여 여러 책에서는 마오쩌둥이 『모순론』에서 얘기한 이론들을 실질적으로 1940년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전개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정풍운동으로서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오쩌둥의 이론은 전파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고 있으므로 마오쩌둥의 저술의 영향력과 그의 주장의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논리적 전개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과의 접목에서 이 글을 이해하면서 마오쩌둥의 부분적 논거에 수긍하는 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지자로서의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 나름의 해석틀로 수용하고 이해하였고 이를 변화시켰으며 또한 자기화한 것을 적용하였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에 대해 좋은 것을 기억하는 자와 그의 독재를 기억하는 자들이 엉키어 있다. 난 모른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나 그가 만든 것들에 대해서나 그가 파괴한 것들에 대해서나. 독재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의 생의 마지막처럼 자기 속에 고립된 정치가들에 대해서 도대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얼까 궁금하다. 그가 자기이론을 전개하고 적극 실천한 것은 중국사회엔, 중국공산당에겐 독이었을까 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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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사랑한다는 것,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바가바드기타』. 마하트마 간디. 

 

 『바가바드기타』에서 두 가지에 끌림을 가졌다면 인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매혹과 이끌림이 첫 번째요, 바가바드기타라는 낯선 용어와 내용을 그나마 익숙하게 들어 온 간디가 해설하였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인들 그 심오한 진리와 믿음에 대하여 자랑치 않겠냐만 바가바드기타는 종교적이자 철학적인 느낌이 강조되는 듯했다. 물론, 한두 번 읽고서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무교인 사람의 특징으로서 신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정 종교가 없기에 그 포괄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하는데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종교와의 괴리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물론 난 이 말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정일 혹은 그 이상의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것이 물론 베풂으로써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신을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경우가 집착하기 때문에 신을 섬기는 경우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집착들,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기 위해 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지존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슈나 신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이다. 이는 결국 인도 힌두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비교적 간디의 해설로서 내용의 이해를 겨우 한다고 해도 깊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아마도 이렇게 어렵게,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표현하고 있는 이중적인 언어 표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순적인 표현은 항상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 선하면서 동시에 악한 것, 가짜인 것이 진짜인 것 등의 말들은 항상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나 역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 또한 경건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가바드기타에서 11장은 전체 중에서도 가장 시적인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때문에 특히 다른 장에 비해 이들 장에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소제목이 달린 9장도 어떻게 내용을 전개시킬지 호기심이 당긴 부분이다.


내 이제,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 신비스런 지식과 아울러 특별한 지식을 일러주리니. 이를 앎으로써 그대는 악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는 학문의 왕이요, 신비스러움의 왕이요, 순수요, 다스림이요, 곧장 알 수 있는 것이요, 다르마의 본질이요, 실천하기 쉬운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이로다.


  물론 종교적인 부분, 믿음이라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러나 믿음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비판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나의 믿음이라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신념에 공감할 때 비로소 나의 마음 속에 진실한 믿음이 생겨나리라 본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비판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헌신적인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나를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우선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것은 집착을 버리라는 것으로 일관된다. 그러면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종교에서나 집착에 대한 경계와 집착을 버리는 것이 곧 새로운 믿음에의 길임을 강조한다.

  바가바드기타 역시 이에 충실하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도 단순한 진리에 대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진실한 실천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특정한 문구에 대한 경배나 감탄을 넘어서 그것이 행위로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신에 이르는 길이 보여 지고 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진리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지식이란 실천과, 행위와 함께 하게 될 때 진실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신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길이 내면적인 변화로써 신적인 삶의 환희와 자유, 즉 해탈로 인도하는 길인가의 여부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겪게 되는 무수한 이율배반적인 사건들, 그 속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는 개인의 이익과 진리, 보편적인 타당성과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결국 이를 벗어나는 것은 그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 된다. 다시 집착을 버리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르는 것, 신의 말씀을 깊게 이해하며 그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서 신에게 이르는 길은 결국 ‘신’을 알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은 오로지 ‘바크티(헌신)이다.

  바크티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지식을 아는 것도 아니요, 지식을 알고자 하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이야기하듯 지식은 경전 이전에 마음을 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의 해탈은, 비판 이전에 열린 자세를 견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바가바드기타는, 나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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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어라, ‘실험과학’이 아닌 ‘도덕과학’을

 

 ☞ 「과학의 사기꾼」 요리하기(cooking)  

 

  ‘과학’이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과학의 발달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의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 오면서 우리는 일상에 존재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전문가가 아닌 경우에야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렇기에 깊은 의심을 품거나, 그 의심을 증명해 보려는 노력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과학의 사기꾼」은 그러한 의심에 대한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즉, 과학분야에서 일반인들이 모르고 감춰졌던 부분에 대한 실제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실험이 강한 부분에서 간과한 비객관성, 비관찰성과 수많은 오류들, 그리고 그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과학사에서 진보하고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라 불리는 사건들의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사례에서는 역사책에서, 전기 위인전에서 봤던 위인들이 이야기와 노벨상이라는 엄청난 권위의 상을 받은 과학적 사건들의 허구와 조작이 나타난다.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은 많은 업적들이 사실은 객관성을 잊어버리고 자료를 조작하거나, 혹은 은폐하거나, 남의 것을 가로채기했다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사례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에 의해 공공연히 묵인되어 왔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법칙으로 진리로 읽혀왔던 어떤 사건이 문제였고 누가 문제를 그대로 방관했는가?


☞ 장난질(hoaxing)?

 

  역사상 위대한 천문학자로 알려진 프톨레마이오스가 실제 별자리관측을 하기보단 다른 사람의 연구업적을 이른바 ‘빌려’, 자신의 학설을 펴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어떠한 진리든, 법칙이든 무언가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고 다른 것을 참조한 것에서 이뤄진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붙인 제목처럼, 점점 더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단순한 실수인지 그렇지 않으면 천재의 영감인지가 말이다.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할 정도로 끈질기고, 객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로 알려진 갈릴레이. 지동설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일화는 갈릴레이의 위대성을 더욱 부각시켜줬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일화가 실제로는 의심스럽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떨어지는 사과하면 떠오르는 뉴턴의 성격과 관련한 이야기, 아인슈타인의 이야기 등은 그동안 특정한 업적에 의해 그 사람들의 참모습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찬 채로 조작되고 위인으로 덧씌워진 것인지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연구에서 거짓없이 연구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연구의 오류나 문제점을 시인하고 계속적으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들을 더 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준다. 과학자로서의 실험과 연구를 생각하게 하는 아인슈타인이 실제 연구와 증명을 위한 노력보다는 특정한 이론에 대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이론들이 지금에서도 위대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그러한 가설이나 이론을 세운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나,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의 뒤따름이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이나 업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명한 학자에 대해 그 연구에 대한 신뢰는 지식에 대한 찬탄과 동시에 실제로는 그들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포함된 것이리라 본다. 때문에, 『과학의 사기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사의 발견된 연구들이 심각한, 혹은 사소한(?) 수치상의 누락이나 조작들로 가득하고, 실제 검증된 연구와 실험이 생략된 법칙과 이론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이르면서 잘 알지 못하는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인류의 과학학문발전에 기여를 했지만 이러한 조작된 기여가 과연 인류에 어떤 공헌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이라는 분야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유전학이나 의학분야의 연구와 같은 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사건과 같은 일을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슈틀러와 쿠글러가 항체를 통해 암의 치료법을 찾아냈다는 연구를 보자. 암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연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연구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줄기세포로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단순히 개인의 업적에 눈이 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다듬기(trimming)


  위대한 힘들이 위대한 결과를 보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의 단순하고 불순한 ‘의도’에 의해 참담하게 무너졌는지는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서머린의 경우에서도 그렇듯이 개인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아주 단순히 싸인펜을 살짝 덧칠하는(실제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러한 모습이 과연 연구의 진정성을 얼마만큼 생각하였느냐는 물음을 가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학이라는 특성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연구와 실험을 중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특정분야에 권위자의 영향력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과학’이라는 분야가 가지는 ‘그들만의 요리잔치’의 문제와 윤리의식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그 학문영역의 특성상 실체를 검증하는데 있어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의 행동력과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이들은 결국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연구결과와 연구주제가 이상적이거나 과학사에 큰 역할을 한 것일수록 의심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의심에 따른 검증결과를 드러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과학자의 조작과 실수, 사기를 정당한 연구로 검증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로 치부되는 것이 과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을 꼬집고 있다. 때문에 연구의 실질적인 목적과 존립이유를 망각한 채 ‘같은 식구를 음해’하는 일로 간주되고 그러한 일을 한 사람이 오히려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 피해야 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의 이해를 위해 공모하거나 사건을 눈감아 주고, 혹은 남의 업적을 제 업적인 양 가로채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의 부재, 공명정대하고 올바른 것,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의식의 전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과학이라는 연구를 수행할 때 비이커와 과학사전을 들고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도덕’교과서를 옆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였을 때 결국 인간생활의 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이다. 무엇에 우선하여 가치를 두는가에 대한 의식교육이 끈임없이 강조되고 과학이라는 영역의 한정되고 비공개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기 위해선 이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보다 더 바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과학에서의 사기와 조작문제는 사라질 수 있다. 과학이 가지는 무서운 힘의 영향력을 새삼 알게 되고 또한 과학이라는 정교하고 실험적인 학문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의 이러한 사례들에서 강조할 것은 결국 개인의 윤리의식의 확립과 과학전반의 학자들의 윤리의식 확립이다.

  결국 바른 연구결과는 정확한 연구와 더불어 개인의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 이뤄진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하인리히 창클이 전하고자 하는 바다.

 고대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사에 위대한 학자들에서부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단순한 요리와, 장난, 정교한 다듬기의 모습은 결국 이들의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문제였음을 강조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나타나는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한 의문에 대한 것은 조금 눈감아 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수많은 과학업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과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들은 연구의 내용이 가지는 실제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엔 설명이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단지 어떤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역시 조작과 속임이 있다는 큰 아우트라인을 잡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이 ‘과학’서로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작가의 의도는 멘델의 유전법칙이 이렇고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초우라늄이 어떤 것인가?, X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들에서 일어난 사기와 조작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가 핵심이니 말이다. 우리는 과학에 대해 좀더 엄격한 잣대를 과학자에 대해서도 더한 엄중한 기준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험과학의 문제가 아닌 ‘인간과학’의 속임에 대해 끊임없는 경고를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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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청년논객이라 불린 저자 한윤형은 박가분과 함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시끄러웠다. 자숙한다며 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글을 접겠다고 했는데, 당분간인지 완전히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의 글을 안 읽었는데 꼭 그것이 영향이 아니라, 어차피 읽을 책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예전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 그냥 생각났을 뿐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도 없고,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고, 여성을 위한 나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도 없고....요즘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아,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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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존 브래드쇼, 오제은 역, 학지사.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는 총4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놀라운 아이‘가 어떻게 하여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되는지, 또한 어린 시절 상처가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인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제2부에서는 인간의 성장발달단계에 따라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초기, 갓난아기, 유아기, 학령전 아동기, 학령기, 청소년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성장하도록 돕는 교정훈련을 제시하고 연습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제4부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치유를 통해 놀라운 아이로 변화되는 힘을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는,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충족되었어야 할 의존적인 욕구들이 채워지지 못한 것을 당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해한 결과들은 슬퍼했어야만 했던 것을 미처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해결된 채 남아 있는 욕구들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즉 표현되었어야 할 감정들이 한 번도 표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99


  저자는 1부에서는 개념을 설명하고 2부부터는 2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바로 눈앞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인 당신을 치유하는 듯한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어떠한 상처가 내면에 남아 있는지를 이것이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거나 타인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처받은 내면 아이에 대한 이해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도록 각 장마다 설문지, 선언문 등을 첨부하고 실제 작업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은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거소가 관련된다. p109


     우리가 ‘머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일종의 ‘자아방어기제’이다. 사람은 대상에 집착함으로써(뭔가를 강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느낄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느낀다는 것은, 상처받은 아이의 수치심 중독 속에 갇혀 있는 얼어붙은 거대한 감정의 저장고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당신이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우하기 원한다면, 근본적인 고통을 다루는 ‘실제적인 작업’을 해야만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다. p110


  2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술된 장과 3장의 초기 고통치료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읽었다.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중요함을 저자는 강조하면서 인지적인 중독이 감정을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라 말하며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과 관련된다며 두 개의 문을 가진 방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각 문마다 그 위에 표시가 있다. 한쪽 방에는 ‘천국’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방에는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써있다. 대부분의 상호의존적인 성인아이들은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쓰인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고에 머물러 감정을 분출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당연, 저자의 의견에 동조한다. 다만, 사고중심주자로서 이 머리만 머무른다는 것의 장점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머리에 머무른다는 것이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것도 아니라는 점도. 그 둘은 결국 같이 이어지는 경험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가 내면의 아이를 돌보고, 변화시키고, 또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이 저자가 서문에서 내세운 바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을 통해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상처받은 내면아이’보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키우는 부모’로 시선이 더 많이 갔다. 이 책은 부모의 양육방법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점철되며 부모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아이들이 받게 되는 상처는 모두 부모와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양육방식과 훈련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저자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치유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일단 보다 많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묵상의 형태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주하여 상처받은 아이를 찾아내고 그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그 아이로 하여금 그때의 감정을 풀어내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신생아 때의 기억에 대해서 정말로 그 시기 아이들의 기억이 남아 있을까. 적어도 돌 이상의 경우는 조금 수긍이 가지만 신생아인 아이가 상처받은 경험을 지속하여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수록 의문이 든다.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아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아이에 대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든 생각은 이것은 마치 가족치료처럼 부모와 아이가 함께 치료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관심가지고 잇는 것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면서 부모의 양육방식과 훈련에 관한 것도 저자가 언급하고 있긴 하다.

  책을 덮고 난 느낌은 영적인 것. 그리고 명상을 접목한 저자의 치유 방식이다. 명상의 기능을 알긴 하지만, 교과서적인 교재의 느낌에서 목회적인 책으로의 전환됨이 이 책이 가진 느낌을 상쇄시켜주는 점이 아쉬웠다. 종교적인 색채가 전면에 내세워졌던 책이라면 오히려 기꺼이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의 치달음은 뜨악하게 했다는 점이 있다. 어쩌면 종교적인, 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듯한, 그러한 색깔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들을 좀 더 잘 버무렸어야 할 것이라고, 차라리 그러한 관점임을 표면적으로 밝히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저자의 여러 가지 전공들 또한 보다 더 정교하게 버무려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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