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마크툽 Maktub

 마크툽이란 단어를 보면 ‘툽’에서 오래 머문다. 

이내 ‘툭’으로 바꿔버리는 이 단어는 

뜻을 알기도 전에 손에서 놓아 버리는 느낌을 준다. 

‘툭’ 그렇게.

 

 그래서 마크툽은 슬픈 단어다. 아픈 단어다. 안쓰러움이 묻어 나는 단어다. 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니. 운명이, 존재가 흔들림 없이 정해져 있는 이 느낌. 내가 살아가는 동안의 기록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간다. 난 온 힘을 다해도 ‘툭’ 그 끝을 만날 수밖에 없다.

  파울로 코엘료가 묶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이 단어로 묶은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이미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뽑아내고 싶었고 그래서 <마크툽>이라 이름 붙인 이야기들은 뭔가.

  여기에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이 11년 동안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과 친구나 다른 이들로부터 들은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공자이야기나 선집에서 많이 보듯이 제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스승님께서 인생의 가르침을 전한다.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전한 이야기들이 파울로 코엘류에겐 보다 더 깊이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인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늘 비슷한 깨달음을 전한다. 늘 어리석고 모자란 우리들은 사건을 접하며 1차원적인 사고에 머물지만 스승들은 더 큰 깨달음과 시각을 던져준다. 가끔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애매한 것들도 분명 있다. 깨달음이란 또한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이 책의 목적은 인간 영혼의 풍요로움이라고 파울로는 말한다. 그래서 내 영혼은 풍요로워졌나?!

  풍요로워진 것은 모르겠고 조금은 깊어지긴 한 것 같다. 슬픔과 아픔이 버무려진 인생의 ‘툭’을 생각하게 되니까.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조금의 허무는 왜인지 지금 내 인생이 원하는 바로 가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슬펐던가. 인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힘차게 전진하지 않고 기뻐하지도 않은 채 이미 움츠러져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에 대해 미련이 많다는 것, 후회가 많다는 말과도 닮아 있다. 어찌 살았기에. 가끔 이런 때에는 내게 종교가 있어 이 의미를 맹목적인 종교의 느낌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허나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

  듣기 싫었던 말이 “네 어깨에 진 짐을 내려 놓아라, 하나님을 믿으면 다 알아서 해 주신다”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종교를 가진 이들은 모른다. 그 말은 자신들의 영역에선 마음을 평온케 해주는 말이겠지만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내 맘에 평온을 주지 못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로였겠지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요렇게 되어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겠지. 이 불쌍한 어린 양이 하루빨리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오도록 해 주세요라고......교회에만 나가면 모든 일에 해결되는데 헤매고 있느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의 위로를 들은 것이 아니라 전도사를 만난 느낌이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쓸쓸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다. 믿지 않으며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은 또 뭔가. 위로의 한마디를 파울로는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말한다. 오, 그 말은 잘된 번역이 아니에요라고. 번역을 거슬러 온전히 그 느낌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마크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랍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잘된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신은 자비롭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만 펜과 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p30

 

  인생의 스승이 하시는 말씀에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이 마크툽이 과연 내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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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기원전이란 말은 참으로 아득하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마저도 실체가 없는 미지다. 다만, 이 기원전 BC라는 단어에선 동양이 아닌 서양의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대해 다른 나라들보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 나라의 풍경이 떠올려진다. 문명의 발상지가 서양만 있던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기원을 그리스로마로 만들어버린 건, 신의 이야기 그리스로마신화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리스로마신화를 처음 접한 건 이야기 가득한 토마스 불핀치의 책이었다. 처음의 감흥이었는지 이후로 토마스 불핀치 것보다 재밌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널리 알린 공로자가 토마스 불핀치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쨌든 무수한 판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했다. 그림책, 만화책, 동화책 등등등.

  같은 이야기일텐데도 ‘원전’이란 말에 혹해 아폴로도로스의 책을 집었다. 이 원전이란 말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단단한 뼈대일 테고 기원이겠지만 어쨌든 뭐가 다르랴 하면서. 하지만 결론은 달랐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전달하는지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원전’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단단한 기원을 주는 느낌이었다. 형태에서 그것이 전해졌는데 성경식 형태와 같아 보였다. 또 신들의 탄생이나 자손들의 가계보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보통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야기’로 이어져 온다면 이것은 사건과 사실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다 간결한. 그래서 어쩜 이야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불친절하게 여겨질 것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사람이라는 아폴로도로스가 쓴 이 책은 ‘신’이 존재하는 듯이 역사서인 듯한 서술의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가 생략됨이 없이 잘 전개되어 있다는 점도 이설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참고하며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의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책은 그만큼 기원이며 원전이며 객관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저자 자신도 이 책의 목적이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다루기보다 그에 대한 ‘정리’라는 말에서 왜 이 책이 이렇게 서술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에 맞게 잘 쓰여진 책이다.

  저자가 만든 것인지 출판사가 정리한 것인지 신들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좋았다. 비슷한 이름이나 연대가 가물가물한 신들의 서열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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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것, 것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저, 오마이북, 2012.

 

  이 책이 기분 나쁜 건, 하나다. ‘너 때문에’라며 탓을 돌리다 문득, ‘내가?’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가 90이상이고 난 0.00001%만 하련다. 그게 솔직히 맞다고 본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0.00001%에 발목 잡혀 버린다. 나의 %가 결정적인 한방일 수 있음을 넘치지 않고 잘 버티는 컵에 내가 떨어뜨린 한방울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상황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든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한두 명의 개인이 바뀌면 그 사회는 그 몫만큼 바뀌게 된다. 나 혼자만 바뀌어도 세상은 한 사람만큼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기에 나의 변화는 항상 주변의 변화를 몰고 온다. p5~6


 지금, 우리는 망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이라니, 주욱 지금이었다. 지금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망가진 사회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모든 것들이 개판이다. 망가진 것은 내 책임이 아니었으니 복구의 책임도 내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열심히 지켜봤다. 사실, 망가진 것들을 탓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었겠나 싶다. 아니 그거라도 해야지.

  수많은 지표들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고 그나마 유일하게 총기사고는 거의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치안이 안전한’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당장 총기자유가 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체감하는 입장에선 치안이 안전한지 잘 모르겠다. 그것만이 자주 없을 뿐이라는 걸 아니까. 망가진 것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는데 하나씩 정리되어 보니 이토록 많았었나 싶은 것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꼽는 것이 더 쉬울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털 메인화면 뒤로 재빨리 숨어버린 당장의 전기, 가스 민영화 소식이나 ‘혐오’와 ‘분노’를 기반한 사건들,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안전사고들도 ‘망가짐’을 더하는 요소가 되겠지.

  망가짐의 이유는 결국 망가진 ‘의식’이 결정적인 건가. 망가뜨리는 주체와 더불어 망가짐을 방치하고 망가짐에 익숙한 사고들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진행된다. 약자가 되는 것은 권리는 사라지고 권력이 힘을 펼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뭐, 권리를 챙기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것을 어쩌라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물고 물린 이 약자의 삶과 권력의 세상.

  우리가 망가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패배주의에 물든 공명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상실된 것도 있지만 인터넷 상에서 비난이 속출하고 조롱이 난무하는 것은 공명심마저도 망가져 있기 때문이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패배의식 때문이다. 공명심은 느끼고 싶지만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짓이 ‘만만한 상대 물고 늘어지기’다. 이는 한국 주류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p87~88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외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많이 들어온 소리지만 투표해야 한다고. 지금 당장은 총선도 끝난 마당이라......마냥 투표를 끝내 놓은 시점에서도 ‘가시적’인 것이 아직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긴 하다. 당장 내년이 대선인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과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저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안타깝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모든 사회학 서적들은 ‘투표’를 강조한다. 나 또한 모든 것들에 결국 답은 투표이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무 자주 듣고 자주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이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진실성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진 사회에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일단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가 우선될 것이다. 당장 내가 취업하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명퇴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무얼 더 가지거나 내가 현재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눈 앞이 아득한 상황에서 내 안정을 먼저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눈 앞의 안전을 확보해야 그 다음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본능인걸.

  그래도 저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니 내 삶이 절박할 때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내 삶을 다른 이가 보아주길 원한다면 말이다. 이렇듯 역지사지의 심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가자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 희망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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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날들에는...

    

 

 

『꿈의 해석』. 프로이트. 조대경 완역.

   

   꿈을 재생하려 할 때 우리는 느슨하게 연관된 꿈의 요소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우리는 꿈에 결여된 논리적 연결의 과정을 삽입한다. 우리의 기억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유일한 길이 객관적인 확인이고 이러한 이 회상인 꿈에 관하여는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이 마당에서 우리는 꿈의 기억이라는 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자고 일어나 지난 꿈이 생각나지 않을 때 가끔은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무언가 나의 현재 생활에 암시를 주는 듯한 꿈이었다고 느껴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때문에 아주 생생한 꿈이거나 혹은 가물가물한 꿈의 기억이거나, 어느 때라도 내가 꿈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꿈에 관한 인간의 무의식을 서술하는 프로이트의 저작이 흥미가 당기는 것은 이러한 평소의 생각들과 체험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당연히 왜 꿈을 꾸고서 이를 잊어버리는지 꿈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 제1장은 꿈에 관한 학술적인 문헌들에 관한 소개와 그에 대한 의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꿈에 관한 많은 다른 학자들의 의견과 이에 대한 비판들, 프로이트의 견해 등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기에 서장은 읽기에는 딱딱하였어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이 실제 꿈 해몽과 같은 착각으로 사례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를 통해 나의 지난 꿈들에 대한 해몽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물론 조금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오히려 학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더 집중된 것은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이라는 실질적인 분석들이 전적으로 성적인 문제에서부터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거부감 때문이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가지고 있는 생각 외의 꿈에 관한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통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나의 생각들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무엇이든 대립된 의견이 있다는 것은 안다. 다만 이러한 상반된 의견 속에서 이론에 대한 근거와 논리를 알고 분명하게 접근하는 것이 짧은 나의 견해를 정리하는데 보다 큰 도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사고에 꿈의 분석에 관한 프로이트의 절대적인 견해가 세뇌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르게 생각해 보기 전부터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거의 지배적이었고 이것이 단순한 그의 견해이며 이론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 완전한 진실로 사실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비록 비판하는 능력이 크게 있지는 않지만 치우친 사고를 멀리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과 각각의 논지는 사고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꿈에서의 도덕적인 부분에 대한 접목이 그러했다. 꿈과 도덕적 의식의 작용과는 무관하다는 의견도 타당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한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도 동조되는 부분이 있다. 어느 하나를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주장하기는 어려우나 꿈에 관한 한 도덕적인 부분의 작용에는 어느 정도 이들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보다 수긍이 간다.

   물론 이는 꿈의 기능일 수도 있고 지극히 도덕적 생활에 대한 각인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적 생활이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과 인지가 작용하는 한 인간은 이에서 벗어난 사고가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무언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는 꿈에서까지 이어지는 상황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꿈과 심리적인 것의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교육받아 온 의식은 꿈에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꿈의 도덕성에 관한 의견의 대립을 넘어서 이 두 저자들은 부도덕한 꿈의 원천을 밝히려고 노력하며 이 원천을 정신생활의 기능에서 찾는가 신체적인 원인이 정신에 주는 해로운 영향에서 찾는가에 의하여 새로운 대립이 발전한다. 도덕성이 꿈으로 연장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꿈에 전적인 책임을 과하는 것은 유보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죄악스러운 꿈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며 사람은 특히 수면 전의 마음을 정화할 의무가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념들의 출현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양립될 수 없는 도덕적 충동들은 눈을 떴을 때와 꿈을 꿀 때의 마음의 심리를 어떠한 결과로 이끄는가?

 

   꿈이 무엇인가, 꿈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한 이론들에서처럼 꿈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서 논의하고 있듯 꿈과 심리적,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연결을 타당하게 본다. 결국 꿈이란 심리적인 부분의 정화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일상의 생활 속에 꿈이 관여하고 있는 형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들, 내가 행한 행동들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연결고리가 꿈으로서 뱔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하고 거기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때 꿈은 나의 심리를 알고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의 반영은 나의 도덕적 생활에 대한 더욱 강한 의무를 지우게 되고 이는 생활에 적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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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몇 차원적 인간인가

    

   마르쿠제는 현대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통 존재로 하는 일차원적인 '고도산업사회'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이 되는 내적 차원을 상실하고, 의식의 일원화에 이른다. 결국 인간은 문화가치와 기성질서가 동일화하는 일차원적인 문화와 사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점점 사회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이 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

   3부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고도산업사회의 모습인 1차원적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2부에서 이러한 사회에서 획득된 1차원적 사유의 상태를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이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이 사회를 개조한 새로운 세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만,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선진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은 모든 “과학적・기술적인 합리성과 조작은 새로운 사회 통제의 형식으로 함께 결합”되어 인간을 소외시킨다. 1차원적 인간은 이렇게 다차원적 사고를 배제한 채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노예화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리 전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듯하다. 저자에 대한 이해없이도 목차를 훑어보거나 몇 장을 읽고 나면 아, 이 사람은 마르크스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철학과 정치, 경제사가 마르크스의 생각과 저작에서 뗄 수 없는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거의 방식이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적 사상의 이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들, 그러니까 독일 출신의 철학가들의 책을 읽으려면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읽어야 한다. 1차적인 내용의 흐름을 알고 세세한 것까지를 완벽히 습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시간이 부족하다. 핵심적인 한 문장만을 뽑아내기 위해 무수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마르쿠제의 저작들은 1968년의 혁명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그때의 학생들은 무엇으로부터 행동력의 힘을 얻었을까. 어떠한 형태로든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처럼 ‘필요’한 이들의 힘은 그것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라고 마르쿠제를 말한다.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려니 온통 공부와 연구한 이력만이 넘쳐난다. 그의 일생은 학자적인 관심과 연구의 나날인 모양이다. 특히 그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어느 특정한 시대를 살았다는 건 그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역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의 철학이 그의 사상이 그의 생애가 어떠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시도 이주와 망명의 연속된 생활이었음을 보건데....

   1968년 일어난 세계적 학생 운동의 분노 물결에 마르쿠제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의 영향력이 컸음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운동’ 역시도 ‘사상과 철학’이 동반되어야 함을, 행동력에 미치는 ‘인식’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철학자로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기술적 진보에 매몰되어 인간에 대한 몰가치화를 양산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풍요를 잃어버리고 몰살당하면서 욕구마저도 제거된 채 그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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