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화해를 권하는 당신에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뜨인돌,


    백설공주가 자꾸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외로워서라고 그래서 낯선 이들에게서 접촉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사회학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나와는 관계가 없이 친구 없이,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공주의 일상. 지독한 정신적 허기가 백설 공주로 하여금 위험을 잊게 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제키게 했으리라고.

  이 책에서 저자는 관용, 일탈, 지혜의 3장으로 나누어 16개의 동화를 선택해 인간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장 관용에서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거나 가르침대로 살았어도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2장 일탈에서는 규범을 벗어던진 토끼와 거북이, 빨간 모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홍신에 대한 이야기를, 3장 지혜에서는 관계맺음에 서투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관계맺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양상들, 욕망과 결핍과 연대와 우정 등에 관해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한번 보자. 우리가 그동안 여우와 두루미에서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별표치고 반성하고 익혀야 했던 것을 뒤트는 이야기를 한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각자 먹기 불편한 접시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작가는 화해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화해를 해야 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화해는 나쁘다”라고 한다.


사이끼리 강요된 화해는 나쁘다. 화해를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좋을 이유가 없는 사이끼리 사이좋으라고 하는 것은 살짝 변장한 폭력이다.

여우와 두루미가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가? 여우와 두루미가 왜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상대방이 먹을 밥그릇 모양새까지 머리 아프게 따져 보지 않아도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꼭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어야 할까? p19

 

  그래, 여우와 두루미는 꼭 화해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나? 그들이 서로 사과하면 화해가 될까.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어질까. 섣부른 화해가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킨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욕망인가. 또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가. p22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라며 오랫동안 강요받았던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마음을 드러내는 말인가. 이 세상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모자라다. 애당초 싸움이란 것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의 집짓기 현장으로 가보자. 작가는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는 사람일 것이라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런 벽돌집을 짓고 사는 이들은 서유럽 사람들이고 그들 눈에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p58


  빨간 모자에게 큰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질서에 맞게 살라는 이야기이다. 그 질서를 깨지 말라는 것이다. 분홍신에 대한 금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상을 학교에 바란다면 학교는 복장 규제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규제에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도 부당한 것이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익히 들어왔던 ‘교훈’ 은 결국 사회적인 억압에 관한 다른 전달이다. 이 책은 좋은 이야기로 감춰놓은 드러내지 않은 한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동화 속에서 환상을 품지 않게 되는 탓도 있지만 동화의 환상을 깨버리는 어이없는 교훈의 덧씌우기가 즐겁게 읽는 동화의 여운을 가시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또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짚어 보는 것, 동화를 짚어 보는 맛이 있다.

  작가는 ‘왜’라고 묻는 것을 세상이 불편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라고 묻지 않으면 우리는 지배자의 논리에 따른 삶을 살게 되리라 말한다. ‘왜’라는 한마디는 어른들로부터 쉽게 낙인찍히고 소외당한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왜’가 세상을 보다 밝게 이끄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왜’라는 물음이 가진 힘을 함께 알고 나누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임을 작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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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위험한 행위

 

 

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읽다>는 작가의 독서경험과 그동안 읽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그 책에서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작가의 경험은 같은 듯 다르게 전달된다. “만약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게 될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쓰지 못하는 삶도 편치는 않겠지만 읽지 목하는 고통이 더 클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 작가의 독서 경험은 그가 말하는 감성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서는 왜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이유들 중에 작가의 이유는 뭘까. 작가는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오디세이아』,『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며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이라 말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작가는 좋은 독서는 끊임없이 헤매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세계가 내면에 겹쳐지며 새로운 세계, 광대한 우주를 탐색하는 것과 같고 또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투쟁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전개될 이야기를 예측하며 맛보는 스릴과 작가의 의도와 나의 해석에 따른 괴리를 조율하는 정신적 투쟁. 그래서 읽기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기에 책을 통해서 감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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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근육 트레이너의 말

  김영하 <말하다>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보다>에서 일상에서의 사회구조와 세밀함을 보았다면 <말하다>는 작가가 지금까지 진행한 인터뷰, 대담, 강연을 모아 엮은 것이다. 1995년에 첫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니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작품을 썼고 많은 곳에서 강연을 했으니만큼 그 많은 말들 중에서 이 책에 담은 내용은 어떤 특별함이 있어 선택한 것일지 기대하게 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글쓰기의 방법, 문학 등에 관련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강연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주제에 맞추어 재정리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글쓰기로 살아온 작가로서 소설가로서의 정체성과 비전에 관한 강연과 질문들이 많았겠다 싶다. 다시 한번, 김영하 작가가 한국에서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은 작품이 번역된 인기 작가라는 것을 생각한다.

  작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없어 작가의 말투나 몸짓은 모르겠다. 오래 전 TV의 여행프로그램에 나왔던 것은 기억하는데 작가의 말투는 가물가물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들을 그의 말로 전환해 듣기는 실패했다. 음성지원은 멀리고 가고 글을 통해 오히려 작가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글을 읽었다. 어쨌든 제목은, <말하다>니까.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p28


  작가는 건강한 개인주의를 위해서는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을 통해 완성”되는데 그렇기에 “감성근육”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가 말하는 감성근육이란 결국 더 많이 깊이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쓰는 일들일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감성근육을 키우는 방법으로 어쩌면 글쓰기만한 방법이 있을까. 아마도 작가의 감성근육은 읽고 생각하는 것과 더불어 글쓰기에서 길러지고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자기해방이다. 글을 쓰는 동안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자 권리라 외친다. 이러한 생각으로 글쓰기를 하는 작가이기에 다양한 상상력과 독특한 문체로서의 작가의 글을 만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p57.


  그리고 작가가 되는 데는, 글쓰기를 위해서는 ‘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것만이 작가를 만든다고 말한다. 모든 작가가 독자였고 주변 작가들에게도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했단다. ㅎㅎ.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드는 것은 ‘작가가 될 수 없는 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라고 말하는 작가의 한 가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김영하가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운명이기 때문일까? 언젠가 어느 글에서 작가가 점을 보았는데 전혀 글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은 때였는데 작가를 언급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는 이렇게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p121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개인 블로그나 컨텐츠가 많이 있으니까 재능을 펼칠 여건이 많고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발견할 기회도 많다. 하지만 예전에는 ‘글’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어떤 분야의 재능은 꼭 누군가에게 정해진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것을 배워야 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에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발을 담궈볼 기회도 갖지 않으려 하거나 금세 풀이 죽어 ‘내 길이 아닌가봐요’ 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듯 온전히 기술과 기법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전혀 아니다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분명 글쓰기는 작가가 말하듯 ‘감성근육’을 키우면 다가가기 쉬워질 것이다. 아니 감성근육을 키우다 보면 가까이에 다가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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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리지를 못하네

 

           김영하, <보다>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보다>, <말하다>, <읽다>의 삼부작 첫 번째다. 작가의 말에서 왜 ‘보다’가 제일 첫 번째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보는’ 것은 깊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데 거의 전제와도 같다.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가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208

 

  그래서, 말하고 쓰기 위해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이 책에서 작가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본다. 일상에서 맞닥뜨린 것에 섞여 사물을 사건을 바라보는 김영하식 시각을 전해준다.

  증가하는 스마트폰 사용과 중독을 작가는 어떻게 볼까. 그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다며 그것은 부자나 권력자에 비해 사회적 약자가 스마트 폰을 받지 않았을 때 ‘타격’이 크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 전화가 ‘중요한 전화’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진 자들이 애플과 삼성과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며 가난한 이들의 시간까지도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헌납하며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의 삶에서 힘의 논리로 감싼 ‘자유’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세상의 불평등은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의 불평등 속에서 미래는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긍정적이진 않다. 적어도 우리들 아버지들의 미래에 대해선 말이다.

  

386세대로 불리는 이 도덕적 아버지들은 노무현 정권에서 그들 자신의 무능과 직면한 후, 급속하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약속하는 물질의 세계로 전향한다. 때마침 너무나 상징적이게도 여자의 얼굴을 한 박정희가 권좌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부자 아빠의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독재자의 딸이 무능해서일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더 이상 아버지의 자리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는커녕 아빠조차 되기 힘들다. 부자 아빠든 가난한 아빠든 이제 아버지의 자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p165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주저앉아야 하는가. 암울한 미래가, 자리 자체가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해 순응하고 말아야 하는가.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지만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p148)기에 삶의 운명도 숙명도 견디어 내는 것, 견디어 가는 것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맞게 되는 돌이라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p154


  그런데, 우리의 운명은 택시 같은 것일까. 버스와의 경쟁에서 힘에 부친 택시업계는 정치권을 압박해 대중교통인정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통과시켰다. 그러나 맞불 버스파업과 함께 대중들이 ‘택시=대중교통’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정을 내린 택시의 운명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상황이 정치권에 의해 이렇게도 어영부영한 채 끌려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어떤 결정을 내렸지만 그 삶의 아우라를 무엇이 막고 있다면 크나큰 꿈도 세밀한 꿈도, 아무것도 꿀 수 없게 된다. 결국 삶은 유예되어야 할까.


우리는 모든 문제를 본원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세상 모든 문제에 단순하고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런 깔끔한 해결책이 없는 영역도 있다. 택시가 그렇다. 택시는 교육이나 정치가 그렇듯이 한 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다. 택시는 음주 문화, 육체노동자 천시 풍조, 무질서한 교통, 높은 강력범죄율 같은 문제를 떠안고 있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누군가 이걸 간단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p177


  작가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두루 보며 자신의 시선을 정리한다. 가벼운 농담과 진중한 고민들 속엔 보지 못한 생각들,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에 얽힌 사회 구조와 우리의 모습들을 작가의 시선을 통해 보면서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들을 새롭게 얻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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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불러본다


구본형, 김영사, 2016.



  구본형 선생님의 전작에서 좋은 구절들을 뽑아내는 작업을 할 때만 해도 이 책이 출간될지는 몰랐다. 막상 책으로 출간되어 나온 것을 보니 작업에 참여해서 조금은 뿌듯하다. ‘나에게서 구하라’는 구본형 선생님이 쓴 20여권의 책에서 평소 구본형 선생님이 남긴 메시지에 맞는 구절들을 뽑아 엮은 책이다.

  IMF의 현실에서 조직 속의 나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재능을 펼치고 꿈꾸는 삶을 살아가도록 마음속에 ‘변화’의 열망을 심어주고 그에 따른 노력의 방법들을 실천하며 열과 성을 다해 알린 변화사상가이자, 변화경영시인의 대표적인 글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덕분에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고 실제로 꿈을 찾으려 한 많은 이들이 인생의 전환을 맛보았고 인생의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본의 아니게 백수의 길로 이끄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을, 구본형의 책들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서 또다른 책들을 찾아 읽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 실린 구절들보다 더 좋은 글들이 다른 책들에 훨씬 많다. 구본형은 ‘변화’라는 주제를 화두로 삼아 글을 썼지만 그 흐름들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보다 깊어지고 실천적인 방법을 알려 주는 책도 있고 영혼을 각성하게 하는 울림을 주는 글들도 있다. 

  삶과 유리되지 않은 그의 글들은 자신이 몸소 실천한 방법들이라 더욱 신뢰가 간다. 그의 책들은 대체적으로 ‘자기계발’로 분류되지만 구본형의 책은 보통의 자기계발서가 주는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때론 자기계발서로 분류하는 것이 억울할 법도 하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의 문체가 마음을 울리는데 상당히 맑은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깊다.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만 남발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그냥 인생을 먼저 겪은 이가 읊조리는 산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현실을 놓아버리게도 그러면서도 놓아버리지 못하게도 만드는 힘이 있다. 한마디로 현실과 이상에 대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이끈다. 마냥 충동적이게 하지 않으며 진중하고 깊이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직접 걸었던 길이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서 구하라’는 책의 제목은 참으로 어울린다.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고,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보라. 당신은 스스로를 좋아하는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욕망을 찾아 떠나라. 당신의 미래가 복제된 작은 도토리를 심어라. 그리고 하루에 두 시간은 이 꿈을 키우기 위해 써라. 밥 한 그릇과 옷 몇 벌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을 파는 것은 노예다. 결국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삶을 살며, 언제나 상황의 희생자일 뿐이다. 세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욕망에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욕망에 평생을 걸어야 한다. 선택은 다른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선택된 욕망에 모든 것을 내주어라. 사랑해줘라.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규정할 수 있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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