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복을 책임져라!

 

  

 서은국, 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밤사이 몰아치는 빗소리에 ‘밖에 나갈 일만 없다면 집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참 좋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비를 맞고 있다면, 비록 우산이 있다 하더라도 ‘아 집까지 언제 가, 짜증나’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비와 빗소리에 느끼는 내 마음의 상대성에 다시 묻는다. 너는 지금 정말 행복하니?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p10

 

   그래.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사는 것,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소망이다. 그런데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인간인데 이토록 행복감이 박복하다면 이론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행복한 인간만 살아남게 설계되어 있다면 결국 ‘행복’이라는 생존조건은 결과적으로 필연적이었던 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조언이 정말로 참된 깨달음과 인생전환의 계기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흥’ 콧방귀 나게 하는 말이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하고 싶으냐고 화가 날 참이다. 하지만 ‘행복’에 관한 한 그것은 마음가짐이라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의, 인식의 문제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역시나 그런 전개를 할려 치면 이따위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모르냐고?!라고 버럭 소리치고 책을 던져 버릴 참이었는데.........

 

불행한 사람은 긍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을 고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런 식의 행복 지침서를 읽고 행복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p16

 

   시작부터 이러니 책을 던질 수가 없다. 고스란히 손에 들고 어떤 반전으로 향하는지 지켜봐야 했다.

   작가는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자연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생각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역시도 인간은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 추구라고 보았다. 오랫동안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철학자의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저자는 행복 역시도 생존에 필요한 도구라고 말한다. 생명체의 존재는 생존이라는 점에서 보면 행복은 도구이며 단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경험해야 또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저자의 대학생들의 행복감에 대한 추적 연구 결과 약 3개월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이 반복·지속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머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의 질적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생수 한 병은 갈증의 고통을 없애주지만, 갈증이 가신 사람에게 물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돈이나 건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은 사막에서의 물과 비슷하다.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줄이는 데는 효력이 있지만, 결핍에서 벗어난 인생을 더 유의미하게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p115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인데 사람들은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고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 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하며 이 행복의 ‘지속성’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인을 의식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더 행복의 기준이 ‘남’을 향해 있기도 하고 또한 즐거움과 쾌락에 대해 그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하며 도덕적, 이상주의적, 철학적인 ‘행복’만을 쫓기도 하다.

 

행복도 오컴의 날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가치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p186

 

   잘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 또한 ‘생각’ ‘마음가짐’의 다른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어차피 삶에 대한 생각, 행복에 대한 기준은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이다.

   중산층의 정의에 프랑스는 ①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②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을 것 ③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④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⑤ '공분' 에 의연히 참여할 것 ⑥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이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기준이라 한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은 ①페어플레이를 할 것 ②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③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④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⑤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어떤가.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이 ①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②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③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④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직장인 대상 설문결과이긴 하지만 사회분위기가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왔음은 분명하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렇게 생각하도록 이끌어왔기에 우린 스스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①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②월급여 500만원 이상 ③자동차는 2,000 CC급 중형차 소유 ④예금액 잔고 1 억원 이상 보유 ⑤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닐 것.....

   행복이 도구이자 수단이라면, 생존을 위한 도구인데 한국인의 도구는 어찌 보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수단 아닌가? 이렇게 정확한 표준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것을 행복을 유전자로 전수하는 한국인들은 언제쯤 참행복을 느끼는 유전자를 몸 속에 저장하고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프랑스보다, 미국보다, 영국보다 쉽게 수치화 할 수 있으니 의지만 있다면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기가 막히다는 다른 말일 뿐.

   행복의 요인은 해도 적어도 절대적 불행의 요인이 제거된다면 행복에 대한 감흥은 달라질 수 있다. 심각하게 불행의 척도만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불행까지도 장려하는 대한민국의 분위기가 한국인의 행복의 기원을 새로 쓰고 있다. 이런 ‘행복’만을 유전자에 새기는 한국인의 미래가 참으로 암담할 뿐이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들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생각과 마음가짐을 달리 해서 만들어 가야 할 일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이다. 이 책의 진화론적 설명을 빌자면,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불행의 요인을 제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될 일이다. 잠재적 불행한 민족을 양성하지 않으려면......죽어라고 개인보고 변해야 한다고 할 일이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화 읽기의 자화상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서정주, 자화상 中 -


  누가 뭐라 한들 아는 것만 눈에 보이고 결국엔 관심 있는 것에 더 눈이 가고 아는 선에서 삐딱하게 봐진다. 결국 수없이 많은 말들을 듣고 많은 글들을 읽는대도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고 내가 아는 것을 더 알도록 보태는 것이지 낯설고 모르는 것에 관심을 옮겨가는 일은 즉각적이지도 쉽게 되지도 않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가 떠올랐나. 어떤 이는 죄인을 어떤 이는 천치를 읽고 가는. 시인의 변절은 그 행동은 시에 맺힌 진정성까지 감하게 하는.

  책이 주는 것, 작가가 말하는 것을 습득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용의 주체는 ‘나’인 것이다. 수많은 책읽기의 방식은 취향의 동류의식을 건들여 기본 베이스를 공고히 해주는 것에 얼마쯤 더 가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읽기를 이야기하는 책을 왜 읽는가를 새삼 생각해본다. ‘다른 방식’을 알기 위함인지 ‘같은 방식’을 찾기 위함인지.



   


  ‘왜’ 시리즈의 제목 때문에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 권의 책의 작가가 다르고 출판사도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세 명이 같은,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출판 일시도 비슷하다.

  동화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네 권을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힘은 사실 상당히 제한적이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생각의 방법과 길은 다양하구나라는 모순된 생각을 같이 했다. 선택하는 동화가 너무 같다는 것이 전자의 이유고 각각의 해석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같은 책을 보고도 누구는 인간 행동의 심리에 중점을, 누구는 역사적인 상황을, 또 누구는 사회구조를 세밀하게 보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관심을 두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잘 흘러가게 되는 것일 게다.


  


  널리 알려진 동화는 한정적이다. 고전 동화의 대표로 손꼽히는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교훈’과 ‘깨달음’의 전도사로 활약하다 어느 지점부터는 주인공을 바꾸는 역할극으로 교훈의 반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점에선 ‘삐딱’한 시선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각의 미묘한 시선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다양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에 있음은 분명한데 그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 것은 그것이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이 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 상태로 경직되어 얼마나 또 오래가게 될런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몰지각하고 비윤리적인 것은 제외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비윤리적이고 몰지각하고 타당하지 않은 ‘견해’를 알고 스킵할 수는 있게 되리라 본다. 생각해보니 책읽기는 결국은 돌고 돌아 내 취향을 공고히 하는 장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훅’ 들어오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선호의 취향을 떠나 수많은 독서가, 독서법이 취향을 뭉치는 일이 되긴 하더라도 다른 것에 대한 고개 끄덕임과 몰상식과 비윤리적인 것을 선별해내는 힘이 되기를. 선별력이 워낙 강한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쓰잘데기 없는 걱정에 책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이 쓸데없는 걱정도 스킵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어공주를 위하여


   김민웅, 동화독법


  동화의 재해석. 사회학자이며 목회자가 선택한 동화의 해석은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삶을 통찰하는 법”이다. 김민웅 교수는 열 개의 동서양고전 동화에서 삶을 통찰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다. <미운 오리 새끼><신데렐라><솔로몬의 지혜>인어공주><토끼전><이솝우화><헨젤과 그레텔><바보 이반><바보들의 나라 켈름><심청전>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 속에서 자신만의 동화 읽기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런 지점에서 저자 김민웅의 동화이야기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우선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분석이 깊다. 동화의 주인공의 역할을 뒤집는 이야기도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전의 이야기가 증가하는 이유는 삶의 형태가 워낙 다양하고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들에게 우리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를 꼼꼼히 읽는 일”이 독법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다르게 읽는 법 역시도 특별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적당히 흘려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면 아는 것 중에서 새로움이 발견된다. 익숙하다고 넘긴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현실이 낙오자, 또는 열패자로 취급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재능과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이라고 반격합니다. 또한 본래 백조인 존재를 몰라보고 괴롭히며 멸시하고 추방한 세상을 향한 보복과 과시이기도 하지요. p49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다. 내면은 외면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역경 속에서도 재능을 펼치며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 같은 것을 미운 오리 새끼는 전한다. 결국엔 백조로 밝혀진 오리에 우리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 차별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미운 오리 새끼를 통해 수없이 읽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 얘기를 꼼꼼히 살핀다.


 이 이야기는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보다 못한 오리일 뿐이고 백조는 그 성장과정에서 이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고귀한 백조입니다. 서로 다른 생명체로 어울려지는 존재들이 아니라 누구는 못나고 누구는 잘난 겁니다. p50


 엄마 오리가 세상을 처음 보여줄 때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나 끝끝내 이 미운 오리 새끼는 그런 세상과 마주하는 의지와 지식을 길러내지 못합니다. 그가 관심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농장의 오리 집단에서 쫓겨나듯이 도망나올 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지고 말았습니다. p54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힘든 ‘미운’ 오리의 역경에 공감한 나머지, 같은 가족 안에서도 구박받는 그의 삶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백조와 오리를 차이 짓는 저 구분을.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결국 되돌아보면 오리는 ‘재능’과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져있던 ‘자격’을 타인들이 그제야 보았을 뿐인 것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 오리일지라도 결국엔 백조에게는 비견되지 못할 ‘태초’에 '애초‘에라는 낙인. 언제부턴가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낸 사회 속에서의 우리의 상황이 ’오리‘이다. ’미운‘오리가 아니라 그냥 오리. 백조인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될 수 없는 오리. 그렇게 사회가 이 명명 속에서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라지만 그 부당함이 오히려 제 정체성이라는 듯 변함을 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결코 피해가지 못할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오리들의 역사.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종교와 연결짓는 것 또한 특이하여 눈여겨봐졌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있는 것인지 내가 보지 못한 이와 같은 인어 공주에 대한 해석들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어공주의 질문은 성서 안의 종교적 질문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되고 싶은 언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나, 이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모든 인간의 질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는 이에 대해 신을 믿고 그 구원의 손길에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할머니 인어의 이야기는 그런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혼이 생겨나는 것을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장 귀중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어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147~148


  동화 속 많은 공주들이 자신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왕자’를 만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 이야기 중에 유독 인어공주만이 슬픈 결말을 맞았다.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공주의 입장에선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의 해피엔딩 결말이 성립한다. 같은 신분, 계급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까 인어공주는 결국 그들 사회 속에선 같은 신분이 아니니까. 아무리 육지보다 몇 배는 넓은 바닷속의 공주라 한들, 그것을 밝힐 수 없고 그래서 공주가 아닌 그저 말못하는 시녀일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육지로 경계를 넘어선 인어 공주의 ‘변화’와 ‘변혁’을 결국 죽음으로 귀결지어졌다. 신분을 넘는 사랑, 국적을 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더군다나 성에 대한 적극적 표현을 하는 것은 음탕한 악녀의 짓거리로 지탄되었습니다. 그건 마녀의 가슴을 찔러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먹은 여자들의 소행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성, 쾌락, 여자의 육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었고 그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서구 중세의 종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여성의 성적 갈망과 성적 정체성의 성장을 억압했어요. p159~160


  그래, 동화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적극적으로 왕자에게 다가간다. 바다가 생활터전이 인어공주에게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은 옷을 입지 않는 것일 테지만 또 누군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을 모습이다. 성스러운 공주와 비교해서 더욱 더.


인어공주의 비련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그 적극적 실현 그리고 사랑의 진실이 억눌리고 외면되는 현실의 슬픔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인어공주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계속 용납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가, 라고 또한 묻고 있지요. 인어공주와 같은 아픈 이야기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어공주가 잃어버린 목소리는 바로 그 희생당한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지 않나요? 그에 더하여 이 세상 도처에 생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운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p186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는 만들어 질 것이고 읽힐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 속엔 여전히 꼼꼼히 읽어봐야 보일 억압된 민중과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명’과 ‘자기 방어’에서 더 나아가


왜 아무도 성냥팔이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동화로 보는 심리학


류혜인, 이가서, 2013


  

  동화로 보는 심리학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책은 많이 보아 온 동화에서 심리학 이론을 이끌어 낸다.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화를 읽으며 자신의 전공을 적용시켰다. 한번쯤 의아하게 생각해 봤을 동화 속 궁금한 지점에 익숙하게 행하고 있는 ‘이론’으로 명명한 행동들이 나타나 있다.

  가령 백설 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질문은 나쁜 일을 당하면서도 계속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백설 공주에게 갖게 되는 답답함 중 하나다. 나쁜 사람일지 모른다고, 제발 문을 닫고 열어 주지 말라고! 라고 외치지만 이미 백설 공주는 냉큼 달려 나와 기어이 낯선 이와 만나고 또다시 해를 입는다.

 이러한 백설 공주의 행동을 저자는 '접촉 위안‘이라 말한다. 인간은 신체적 접촉을 하면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피부에 있는 C-촉각 신경섬유가 신체접촉 시 가장 활성화되어 뇌에서 엔돌핀과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안정되고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오두막에서 홀로 외로운 백설 공주는 낯선 이의 방문에서 이러한 접촉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로 유명한 해님 달님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왜 호랑이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그것은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상대가 거절하지 못하는 작은 요구에서 시작해 점점 큰 부탁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역시 거절하지 못하는 전략이다. 

  성냥팔이 소녀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것은 방관자 효과로 설명한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보게 되는 현상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적어지는 현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자. 한 아이가 벌거벗었다라고 외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두 임금님의 옷이 멋지다는 동조 현상을 보였다. 이 현상은 ‘인간의 옳게 행동하고 싶은 욕구’와 다수의 의견이 곧 하나의 압력이 되어 ‘집단 규범’으로 작용할 때 일어난다. 전자의 경우 자신이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따라 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내가 가진 정보가 부족하고 그래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후자는 그 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온달이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피그말리온 효과로 설명한다. ‘믿는 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피그말리온 또는 로젠탈 효과다.

  같이 밥먹기에 실패한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보자. 여우는 왜 두루미에게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주었을까? 이것에 대해 저자는 여우가 단지 ‘착각’한 것이라 말한다. 바로 자신의 생각이 보편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행동하리라는 잘못된 믿음 ‘허구적 합의 효과’ 탓이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이해할 때 자기를 기준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부와 마신에서 마신은 자신을 구해준 어부를 죽이려 한다. 이것은 좌절-공격 가설로 설명한다. 자신이 예상치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부당하게 차단될 때 좌절감을 느껴 공격성을 나타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심리가 여기에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아, 지금 나는 방관자 효과’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야, ‘난 접촉 위안이 필요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때 그 행동들은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란 행동이 일어난 이후의 결과에 대한 해석이고 어쩔 땐 변명같이 들리기도 한다. 심리학을 통해 어떤 행동을 예측해서 그 심리를 피해 갈 거야라고 할 일은 없으므로. 왜 아무도 성냥팔이 소녀를 도와주지 않냐고! 방관자 효과라서. 그때서야 ‘맞아, 맞아 그래서 그랬어’라며 우리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뒤늦은 안심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동화속에서 이끌어낸 심리학이론이 낯설지 않은 건 너무 많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이렇게 읽어 내는 심리학이 누군가에 대한 또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자기 방어’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으로 전개될 수 있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돌아다니는 왕자들의 정체


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페이퍼로드, 2013.


 

    책을 읽으며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게 된다면 그 부분이 전공이거나 관심두는 부분이거나. 보통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내 관점에 따라 책을 선택하거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

  작가는 고전 동화와 소설에서 자신의 관심 분야를 이끌어 내어 집중한다. 책에 쓰인 27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기만의 줄거리와 주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주제와 줄거리에 맞게 이야기를 선별하고 배치한다. 작가의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는 ‘역사’다. 동화와 소설이 쓰여진 당대의 인물과 역사적 배경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구전되어 온 동화가 어떻게 탄생되고 변형되는지를 사료들을 제시하고 있어 동화와 소설을 환상과 허구가 아니라 타당한 역사적 현실로 인식하게끔 한다.

  책의 제목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뿐만 아니라 백설공주 등 많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들은 백마를 타고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일도 겪지만 공주를 만나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어쨌든 모험을 통해 성공과 사랑을 거머쥐는 수많은 백마 탄 왕자님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걸까. 저자는 이들 왕자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떠돌이 구혼자”라고 말한다.


작은 나라에 후계자가 될 왕자가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영토를 분할하여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한 왕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웃 나라 외동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처가의 왕국을 물려받아 공동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들은 공주가 한눈에 반할 수 있도록 현란한 말솜씨와 에티켓, 기사도를 몸에 배도록 수련해야 했다. 유리관 속의 백설 공주가 자기 스타일의 여성이 아니어도, 심지어 100살쯤 연상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100년 동안 이를 닦지 않아 입 냄새가 진동해도 꾹 참고 키스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아, 슬프지만 이것이 바로 소녀들이 한 번쯤 꿈꾸던 백마 탄 왕자, 프린스 차밍의 정체인 것이다. p16~20


  이 목적을 명확히 해주는 대표적인 왕자가 딱 떠오른다. 영화 겨울왕국의 열두번째 왕자인 한스. 많은 동화책에서 왕자들의 이러한 목표가 드러나지 않아 수많은 세월 동안 백마탄 왕자님에게 환상을 품고 산 이들에게 뒤통수를 딱 때리는 역사적인 상황이 알려주는 진실을 작가를 통해 알게 된다.

  잔혹한 늑대로 잘 알려진 빨간 모자 속 늑대에겐 어떤 역사적 상황이 있을까. 이는 실제  ‘평화상실형’을 받은 인간이다. 중세에 중죄를 범해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누군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기에 불안한 이들은 숲으로 도망가게 된다. 평화상실자는 바르구스라고 했는데 늑대를 뜻하는 말이며 실제로 죄인에게 늑대 머리를 덮어 씌워 추방하기도 했었다고 하고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을 늑대인가이라 여겨 추방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니까 동화 속 늑대는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죄인이었던 것이다.

  많이 알려지고 또 많이 해석되고 있는 백설 공주 속에서 찾아보는 역사적인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작가는 백설 공주 속 못된 왕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농경 사회 속에서 여성은 생산력이 중요하기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여성에 비해 쓸모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늙은 왕비의 이야기는 결국 이 땅의 여성들이 인구 생산의 도구로 인식하는 시대에 살던 여성들의 애환이 가득 담긴 이야기라는 것이다.

  빨간 구두 이야기에서 왜 그토록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는 것이 금기가 되고 죄악이 되는가. 여기에는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그 답을 알려준다. 종교 개혁 이후 사회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풍조가 팽배했다. 그렇기에 춤추고 술 마시고 극장에 가는 것은 큰 죄악이다. 특히 빨간색은 사치와 방종의 상징이기도 했고 여전히 검은 양복에 검은 스타킹과 검은 구두만 착용하는 칼뱅주의자 신도들이 네델란드에만 50~60만 명이 있다고 한다.

  이런 형태로 작가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을 들려준다. 그렇게 해서 더욱 깊은 이해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화들이 교훈을 가득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동화에서 너무 교훈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데, 변화무쌍한 사회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안쓰러운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마냥 환상적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감내하고 인내해야 했던 무수한 날들의 기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