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왕으로 배터지는 사회



정수복 외, 사회를 말하는 사회

 



 마치 재밌는 놀이마냥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적 특징들을 잡아내고 그에 대해 분석한 책들이 증가했다. 책의 내용보다도 한국사회에 대한 그 명명들이 재미가 있어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까 궁금했던 참에, 이렇게 그 명명들을 다 모아 엮은 책이 나와 주었으니 이름하여 ‘사회를 말하는 사회’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학자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분석한 것을 주제에 맞게 총정리한 것이다.

  전문가들이라지만 쏙쏙 문제를 찾아내어 지칭하는 네이밍 센스가 재밌다. 하지만 이 모든 명명을 보고 있다 보면 정말이지 웃프다. 결국 한국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니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니까.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1장에선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제목 아래 소비사회, 자기절제사회, 낭비사회, 잉여사회, 하류사회, 탈학교사회, 허기사회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에 부여된 사회의 특징들은 한국사회의 ‘결핍’에 관한 내용들이다.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말은 히딩크가 축구를 하면서 성적과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 더욱 회자되는 것 같지만, 이 사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배가 고프게 만드는 사회인 것 같다. 소비사회이니까 더욱 더 소비를 하게끔 더욱 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더 낭비하게끔 하고 잉여사회에 잉여자로 살게 함으로써 사회경제생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결핍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과 비교하고 끊임없는 결핍으로 인해 허기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것이 경제적 결핍이든, 정신적 결핍이든 이 사회는 결핍이 만연한 사회다.

  2장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위험에 대한 분석이다. 많은 학자들이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 분노사회, 감시사회, 과로사회, 탈감정사회, 피로사회, 탈신뢰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라 지적한 울리히 벡은 위험에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 사회적 약자들의 위험 지위가 낮다고 말한다. 돈과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현대사회는 감시사회인데  ‘감시’의 정당성은 판단하는 기준은 “감시하는 주체와 감시당하는 객체 사이의 ’관계‘이며, 특히 그 양측의 '힘의 관계’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가 정당성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이들 개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도덕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불균형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힘의 상태를 균형 상태로 맞추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감시는 일종의 ‘힘의 균형을 위한 사회적 장치’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p85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적 ‘감시’는 정당성이 없다. 권력이 힘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한 이 빈번한 감시와 사찰의 사회다. 제 역할을 해야할 언론도 감시의 대상과 방향을 권력의 눈으로 보고 있는 사회다. 이러한 ‘역감시사회’가 정치적으로 독재이며 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와 같다고 말한다.

  3장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승자독식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주거신분사회, 팔꿈치사회, 영어계급사회, 절벽사회, 제로섬사회에 대해 말하다. 이런 특징은 공동체가 해체된 사회의 단면이다. 성공과 1등에 집착하는 사회, 승자만 계속 승자로 살아남는 사회다. 그래서 또한 이 사회가 부품사회라 불리는 이유를 안고 있다. 신자유주의 확산과 과도한 경쟁으로 각박하고 야박한 이 사회에서 안락한 노후는 보장되지 않고 1% 기득권 집단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4장 ‘어느 날 차단되었습니다’는 분열사회, 네트워크사회, 단속사회, 루머사회, 무연사회, 싱글사회, 신 없는 사회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 사회는 온라인 상에서만 접촉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조명한다. 현대사회는 네트워크나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접속하고 접촉하는 듯하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양상은 많은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다.


 글래드웰은 ‘강한 결속’과 ‘약한 결속’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소셜미디어가 소소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중대한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주장한다. p201~202


  사회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생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늘의 사회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경제적인 풍요와 정보의 발달, 생활의 편리가 있지만 결핍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로하고 분노하고 피로하고 감시당하며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사회속에서의 우리들이 분노와 회한을 떨치고 자기 성찰과 자기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다 비판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에 이 사회가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도대체 주렁주렁 나오는 이런 사회에서 무엇보다 해결해야 할지. 무엇에서 희망을 보아야 할지. 그럼에도 결국 답이 ‘나 자신’의 성찰이 되어야 하는 것은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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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한다



 결국 그들이 정치라고 표현하던 것은 ‘지배’였고, 행정이라고 부르던 것은 ‘군림’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시대는 점점 암울해져 이런 지배와 군림에 저항하면 제재를 당하고 ‘가만있으라’는 전근대적 가이드라인도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가만있지 않겠다’ 다짐하며 거리로 나서고 촛불을 켜든다. 그리고 주저하는 자신을 향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절규를 일깨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할 때 빚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이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이들의 지독한 침묵이었다고.” p5~6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났는데 표면적인 건 폭염이었다. 그리고 비가 온다는 기대감에 흐린 하늘을 보고 잠시 희망이 샘솟았다가 멀쩡한 하늘을 보고 다시금, 짜증이 몰려 올려 하고 있다. 표면은 무슨, 불쌍한 기후에 짜증을 전가하지 않기로 했다. 표면이든 내면이든 요 며칠의 이 짜증의 원인을 제목이 정확히 말해준다.


“대한민국은 왜 헛 발질만 하는가 -

정치와 행정이란 이름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저들에게 분노한다!”


  변상욱, 페이퍼로드, 2014.



  핫이슈의 홍수 속에 간간히 등장했다 사라진 ‘민영화’, 신공항 논쟁과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는 뜬금없는 결정, 더 뜬금없는 사드배치, 연이은 뜬금 대구공항 이전. 정치권에 대한 로비자금은 허구헌날 나오는 얘기고. 국민들의 희망의 전기를 위한 특별사면이 이뤄진다고 하고. 도대체 죄인을 사면하는 것이 무슨 희망이라고, 나오는 이들이야 뻔한 것을..........거기다가 날도 더운데 개, 돼지거리는 ‘교육부’의 관리까지. 연이어 온몸에 스팀을 높여 습도를 생성한다. 지랄도 풍년이라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엊그제 뉴스기사(2016.7.10)를 보다가 마우스를 확 집어 던졌다. 내 컴퓨터가 무슨 죄람.....

  청년수당이 5일만에 1천명이 지원해서 복지부가 수당 지급을 막을 것이라는 기사였다. 정부 부서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복지부의 존재감 있게 일하는 뉴스를 접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청년활동지원사업(청년수당)은 서울시의 사업으로 주민등록 기준 서울에 1년 이상 거주한 만 19∼29세 가운데 주 근무시간 30시간 미만인 청년이면 신청할 수 있다. 대상자에게 최장 6개월간 월 50만원 활동비를 현금으로 주며 매달 활동계획서에 맞게 활동했는지 보고서를 내고, 주요 지출 내용을 첨부해야 한다. 대상자 선정 기준은 가구소득(건강보험료 기준)과 미취업기간(고용보험), 부양가족 수(배우자와 자녀)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가속화됨에 따라 단기간이라도 안정된 생활과 새로운 활동 도약을 위한 지원으로 보이는 이 사업이 시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복지부가 "서울시가 사업을 강행하면 직권취소를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사회보장기본법 위반이란다. 때문에 서울시가 법을 위반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시정명령, 취소·정지 처분, 교부세 감액 조치 등의 엄정한 법적 대응으로 맞설거란다.

  정부가 지자체의 복지사업을 장려하지는 못할 망정 막는 이 한심한 행태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여러 뻘짓을 쳐다보는 중에서도 이 뻘짓을 보며 변상욱의 책제목이 딱 떠올랐던 것은 정부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권력자의 지배와 군림에 대한 사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며 언론인인만큼 언론의 문제적 행태에 대해서도 꼬집으며 다양한 헛발질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이 책을 살펴보면 큰 틀이나 작은 틀에서나 이명박,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가지는 비판은 한결같다. 이쯤되면 문제점에 대해 완전히 틀이 잡힌 정부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도 다르지 않다. 아주 오래도록 우리가 이 상황의 목격자이고 피해자이고 가해자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지독한 선한 침묵자였기에.

  언론은 투표가 답이라고 하고 계속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참여가 아니라 ‘투표’만 독려하는 것에 대해 꼬집는다.


 국민의 정치참여의 핵심은 투표참여가 아니라 정치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에 나서라 하지 않고 투표에나 나서라고 한다. 왜 국민에게 정치를 권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따져야 한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절차가 권력일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정치가 아니라 지배이다. 진정한 민주정치는 국민이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고루 나누는 것이다. p286


  투표를 해봐서 안다. 한때는 투표가 적극적인 참여라고 생각했었지만 ‘투표’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공정성이 의문시되기까지 하는 이때, 과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개, 돼지 발언에 대한 파면 요구나 이 발언에 항의하며 최저임금 인상 시위도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참여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위하는 족족 연행되거나 시위 자체가 무산되긴 하지만. 정부의 헛발질이 반복되고 강도가 높을수록 ‘분노’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분노의 수위가 깊어지면 헛발질을 멈출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결과로 보고 싶은 날이다.


 연구진은 권력을 주면 3가지 변화가 발생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다.’ ‘아래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둔감해진다.’ ‘자신과 측근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p16


  저자는 권력자가 헛발질하는 이유, 그러니까 여론이 따가워도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페이싱 효과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의미 있는 만남이었고 상대방과 소통이 잘 되었다고 착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해 만족스러우면 당연히 상대는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해 만족스럽지 못한 게 뻔한데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현상이다. 그러니 측근에게 둘러싸여 칭찬에 익숙한 권력자는 소통이 안 되고 자기 생각만 주장하며 실수를 거듭한다. p16


   이것이 모든 권력을 가진 이의 특징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쥔 이에게도 ‘개인차’가 있음을 믿으며 그 믿음이 없다면 사회참여의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정치·사회 참여하는 민중들이 많을수록 권력자의 행태가 변화할 수 있으며, 그런 활동으로 ‘모셔야 하는 권력자’를 선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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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는 진단을 따른다

 

우에노 치즈코 저,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4.


  치료는 정확한 진단을 통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시작된다. ‘원인’을, ‘진단’을 잘못하면 되면 치료의 방향은 당연 달라지고 결과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처방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진단의 결과에 의한다. 우선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

  진단을 외면하며 치료의 방향을 자꾸 달리 하려는 상황을 또 맞닥뜨린다. 하지만 충분히 예견한 결과여서 놀랍지는 않다. ‘강남역 살인사건’ 얘기다. <검찰,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 아닌 정신질환 탓, 중일일보> <檢 "'강남역 묻지마 살인' 여성 혐오 범죄 아닌 정신분열증에 의한 범행, 조선일보> <강남역 살인사건은 피다 버린 담배에서 시작됐다, 뉴시스>  2016.7.10일자의 기사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보도의 주체는 검찰이다. 한 정신질환자의 치료부족으로 인한 사건이라고 수사의 결론을 지었다. 애당초 살인자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 이후 피해자에 대한 추모분위기에 즉각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말해 왔던 만큼 결론은 ‘여성혐오가 아니에요’가 될 것이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새롭게 추가된 것이 ‘여성이 살인자에게 담배꽁초를 버려서 사건이 시작됐어요’라니.

  정부는 이상하게도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줄기차게 싸움을 붙이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이 아니라 외면해 왔다. 성별 싸움은 오래전부터 행해 왔던 것이고 보육료 문제는 전업주부와 워킹맘간의 싸움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싸움을, 노인과 청년층의 싸움 등 국민들 간 경쟁과 싸움붙이기의 달인이었는데, 이번 ‘여성혐오’ 상황에 관해서는 죽어라고 싸우면 안돼 하고 타이르고 있다. 여성혐오범죄라는 수사결론은 정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나?  

  한창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에 대한 공론의 장을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소모적인 논쟁이든 대안을 가진 논쟁이든 최소한의 성별혐오에 대한 문제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분위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더욱 논의가 되어야 한다. 보다 대안적인 차원과 열린 인식은 어쨌든 격한 논쟁을 벌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목소리, 주장이 인터넷 상에서만이 아니라 표면 위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격한 반응도 있고 타인의 의견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은 분위기도 있지만. 

  어쨌든 여성혐오의 역사는 길고 여성혐오의 종류도 많고 여성혐오의 방식도 많고, 그냥 많다.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이 책은 상당히 재밌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 않은 것은 ‘쉽게 눈에 띄는’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혐오는 일상에서 언제든 일어나고 있고 당연 예술작품에도 드러나 있다. 있는 것을 굳이 없다고 소리치는 심리까지도 이해가 된다. 너무 부끄럽기 때문 아니겠는가.

  부끄럽다는 말에 너무 발끈하지 말자. 여성혐오가 ‘남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여성혐오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혐오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여성들 자신이 ‘여성’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성차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길들여진 여성들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여성혐오’라는 말에 남성들 스스로를 ‘가해자’로 치부한다고 발끈하지 말자. 저자의 말대로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남자들은 여자들을 괴롭히는 존재다’가 아니니까.


여성혐오는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의 깊고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핵이다. 성별이원제의 젠더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너무나도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탓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p12~13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저자의 주장대로 어떤 형태로든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속되어 온 여성혐오의 미러링으로 남성혐오가 촉발되었든 어쨌든 이 사회에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공존하고 있고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문제는 드러났는데 이에 대한 대안은 커녕 논의의 장조차 치워버리려는 상황에서 이 고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완벽한 해결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 의지가 있느냐이다. 저자는 ‘여성혐오’를 치료하려면 여성혐오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저자는 여성혐오의 실체를 아는 것에서부터 여성혐오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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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p51

 

   

  시인으로 등단하여 문화평론가, 강사, 번역가, 방송구성작가 등 여러 직업을 경험한 조병준의 포토 에세이 <정당한 분노>는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의 글에 매그넘의 사진이 실린 이 책에서 제대로 분노를 만날 수 있다.

  매그넘은 세계 각국 사진 작가들이 공동 운영하는 사진 에이전시라고 한다. 1974년 유명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등에 의해 설립되어 전세계에 사진을 공급하고 있다. 매그넘의 사진들은 세계 각국의 산업, 사회, 정치, 재난, 전쟁 등의 사건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저널리즘 사진이다. 매그넘은 라틴 문학에서는 위대함이라는 의미를 총의 내포적 의미로 강인함을, 샴페인 양식에서는 축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 책에선 이런 매그넘의 사진을 보는 기쁨이 있다. 물론, 사진의 내용이 기쁜 것은 아니지만.

표지는 체 게바라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체 게바라에 투여된 이미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이 책의 제목과 사진들과 글의 내용들을 짐작할 수 있다.

 

분노.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단어에는 힘이 담겨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분노가 얼마나 치명적인 부정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을 때,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철해진 머리로 생각을 해도 그 분노가 정당한 분노일 때,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비명 지를 때,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가 아니라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라는 이름의 탱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때, 약하디 약한 살과 피만 가진 인간이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분노뿐이다. p13

 

   분노보다도 꽉 막힌 슬픔이 마구 흘러 들어온다. 사진도 글도 이 세상에 대해 그토록 슬프고 억울하고 아프게 살아간 이들에게 느껴지는 죄책감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억울함과 슬픔이 무력감과 겹쳐진다. 한편,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동질감에 나름 위안을 가진다.

 

분노. 그렇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 800킬로미터의 길을 걷는 동안, 나를 채웠던 감정들 중의 가장 큰 부분은 분노였다. 처음엔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라는 이름의 에너지가 언제나 그러하듯, 그 분노는 부메랑처럼 내게로 다시 날아왔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편협함, 나의 허약함, 나의 탐욕스러움, 나의 비겁함, 그리고 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의 속성들이 다 내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큼 큰 고통이 또 있을까. 이미 수많은 성현들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분노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아주 쉽게 그 진행방향을 자기 자신을 향해 전환할 수 있다. p102

 

   작가는 10년 동안 인도와 유럽을 방랑하고 2년간 인토 마더 데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고 한다. 방랑을 시작한 건 삼십 대의 어느 날이었고 거울에서 ‘주어진 인생 앞에 굴복하기 시작한 사내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은 그 사내가 그 길 위에서 본 또다른 얼굴들일 것이다. 이 글들은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던 사내가 보는 눈이었다. 거울 속 사내의 눈이었다면, 이 글들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이 글과 작가가 만난 풍경과 사람들은 결국 볼 수밖에, 만날 수밖에 없는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과오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을 향한 분노는 우리의 숙명이다. 인간은 얼마나 약하면서도 오만한 존재이던가.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때로 나 자신을 향한 ‘정당한 분노’는 우리의 의무가 될 때도 있다. 때로는 내 스스로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죄는 내게 있음을, 따라서 벌도 내가 받아야 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분노의 부정적 에너지가 내 인생을 끝없이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03~104

 

   그리고 거울을 보던 사내는 길 위에서 체 게바라를 떠올린다. 길을 걷는 동안 내도록 ‘분노’의 감정을 느낀 그 사내는 ‘분노’를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불의에 부패에 부도덕에 맞설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한다.

 

가난, 전쟁, 질병, 소외, 폭력, 억압, 차별, 탐욕…….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수많은 불의와 불행들을 우리는 자꾸 외면하려 합니다. 혁명을 꿈꾸기에 세상은 너무 단단해졌다고 한숨만 쉬며,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눈 감고 살겠노라고 비겁하게 도망칩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p188

 

good reason, '합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선한 이유‘로 풀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혁명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건 거기에 ’선한 의도‘, 즉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애정이 담보되어 있었기에 당신의 븐노는 정당한 분노가 될 수 있었고, 당신의 혁명은 신화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무쪼록 제가 이 사진들에 첨부한 중언부언들에도 또한 그렇게 ’선한 이유‘가 담겨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거기에 ’선한 의도‘가 먼저 담가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걸 알 만큼은 저도 세상을 살았습니다. p189

 

   폭격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찌르는 햇볕이 나왔지만 반갑기보다는 답답하다. 비가 내리는 동안 만들어 낸, 휩쓸고 지나간 상처들이 눈에 쟁쟁하게 보이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또다른 일들이 마구 만들어진다. 천재지변은 인재를 넘지 못한다고 하는 이는 ‘인재’를 만들어낸 주체가 아닌가. 천재지변을 더욱 강화시키는 인재의 모든 주체자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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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생각의 지도-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조, 최인철 옮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관해 문과와 이과생의 반응이 다른 유머코드를 조금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느끼게 된다. 똑같은 장면을 두고도 서로의 경험과 이해에 따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어느 순간 너와 나에 대한 성격과 성향을 확정짓게 된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도 이와 같은 것 아닐까. 내가 배워 온 것대로 내가 아는 선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게 되는 것.

   동양과 서양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한다.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 지 많이도 이야기되기도 한 것 같은데 이미 우리의 뇌리에는 동양과 서양은 무조건 다르다가 지배해 버린 듯하다. 문화적 차이인지, 유전적 차이인지에 관한 논쟁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다르다’.

   이 책은 동양과 사양의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저자인 리처드 니스벳은 문화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는 입장이며 심리학자로 이것을 심리적 차이로 접근·분석하여 총9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이런 항상성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어떻게 사고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고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지를 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20

 

    리처드 니스벳은 서양은 개인주의적 관점을 동양은 개인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부각시키며 이것은 일찌감치 아이들의 교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자인 도드 코헨과 알렉스 건즈의 연구 결과 또한 동양인들은 사건에 대해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반면 서양인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 즉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개인은 구체적 맥락 속에 있는 존재로 구체적인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는데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 차이를 ‘저맥락’ 사회와 ‘고맥락’ 사회로 구분 설명했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떠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와 저자가 실험한 연구들을 종합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제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또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세상사는 양극단 사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동과 조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p105~106

 

   어쨌든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가. 저자는 이것은 서로 다른 생화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서로 다른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체제를 초래했다고 설명한다. 경제적인 차이가 사회구조의 차이로 사회구조적 차이가 사회의 규범과 육아방식을 만들어내며 환경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을 결정지었다고.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가 결국 지각과 사고 과정(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다. 그래서 이런 차이가 뭐 어쨌단 말인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사회의 인종적 다양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옹호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공존함으로써 교육적 환경과 업무 환경이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 어떤 문제든지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 방식과 기술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든지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해결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때 문제 해결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222

 

   차이는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도 '우위'의 문제도 아니다. 각각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익숙하게 배우고 살아온 대로 기준을 정해 상황을 해결하고 판단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잘 알며 어느 때인가는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말로 서로 이해와 존중하며 살아나가는 것 같았는데 점점 서로 자문화를 강조하며 갈등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 이성과 감성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가 왜 차이를 차별과 공격으로 인식하고 인식한 대로 적대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강대국의 논리, 혹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어떤 문화권의 목소리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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