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니 맘이야


오구마 에이지 저, 사회를 바꾸려면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라고 한다. 저자의 <사회를 바꾸려면>은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이 책 역시도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도 사회를 바꾸고 싶은 갈망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인들이 책도 많이 읽는 모양이고. 많은 이들이 주목한 책, 그리고 영향력 있는 학자가 말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무얼까.

  사회를 바꾸려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사회에 ‘바뀌어야 할 요인’이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지금 현재 처한 상황이 문제를 안고 있고 보다 나은 사회를 갈망하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는 왜 이토록 변화를 갈망하는지, 변화에 대한 갈망이 한국사회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영향력있고 이 책이 인기있다고 하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재미있고 쉽게 쓰여진 글이다. 그래서 이해가 빠르게 되고,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감정이입도 잘 된다. 선동기도 다분하고.

  총8장으로 나누어 저자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먼저 “제1장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소제목에선 현재 일본 사회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정치,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고용, 교육, 사회보장 등의 여러 부분에서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나 일본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심각한 나라로 손꼽힌다. 이런 문제들은 산업이 탈공업화로 변화하는데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심각한 경제상황으로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소외감이 증가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현재의 상황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에선 선진국의 사회운동의 형태를 살펴보고 있다. 공업사회 초기에는 노동운동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학생운동, 여성해방운동, 소수자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사회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증가할수록 연대는 옅어져 간다. 탈공업화 사회 불안정한 사회는 이처럼 연대의 부족이 낳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유’를 누리면서 연대 의식이 옅어져 ‘우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며, 자연히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정치 또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해지는데, 운동 또한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p50 


  제3장에선 “민주주의란?” 제목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 전원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였고 현대는 대의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왜일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투표로 대표를 뽑는 것이기에 다른 정치행위, 특히 데모에 대해 소용없음, 부정적 의견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소속감, 함께한다는 것 집단의식의 중요성을 말한다. 통합력이 강력한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살이 줄어든다는 뒤르켐의 실증 내용을 거론하며 저자가 말하고픈 바는 이것이다.

 

데모에는 왜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는 걸까? 설명 10만 명의 데모대가 모였을지라도 “저들은 별스러운 일부 사람들일 뿐이야.”, “비례대표로 그저 한 사람 당선시킬 정도의 숫자에 불과해.”라고 형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설령 소수일지라도 “저 사람들로 우리 사회의 의견이 대변된다고 봐.”, “저기에 내가 느끼는 분노심도 대표되고 있어.”라고 인식될 때에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다르다. 책임 있는 정책대안을 내놓고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p72


  제4장에선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를 다룬다. 시대마다 사상이 있었고 기술의 발전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경제자유주의 등 그 시대의 사조가 변화하며 흘러 왔고 최근에는 자유민주주의가 대세인 듯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오일쇼크,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기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쓰는 발상과 사회기반이 없으면, 사회를 바꾸는 힘이 없다. 다만 일단 그것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기술을 손에 넣은 사람의 발상이 바뀌고, 사회를 바꿔나가게 된다. p121


새로운 발상이 등장하는 시대는 대체로 불행한 시대이다. 인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때가 행복한 경우가 많다. p124~125


  하지만 끊임없이 사회에는 새로운 발상이 나타나고 있다. 관건은 누가 그 ‘발상’을 주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대표’에 대한 주체가 누구인지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변화해 가는 사회에서, 사회구조에서 ‘우리’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있고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은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인 모색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와 참여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선거만으로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정책을 선언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 법률이 바뀌면 이렇게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만, ‘자유’와 재귀성의 증대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설사 효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해도 의회와 지역에서, 행정과 운동을 통해서, 즉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상과 행동과 관계를 바꿔나가 그것이 연동해가며 사회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p252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은 일본 사회운동의 주된 의제로 확산된 후쿠시마 원전 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에서 원전 운동이 확산된 이유와 그 상징성은 이것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는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부당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그리고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이 체화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는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에서는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와 현대에 필요한 사회운동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 기술한다. 저자는 사회운동이 어떤 이슈로든 대대적으로 공론화되는 계기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슈가 사회 속에서 구조적으로 쌓여 있던 불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경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에 대입해보면 이른바 “갑질”사건이나, 고위층의 기만적인 행위들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제8장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결론을 내린다. 선거가 한창이기도 했고 그래서 대안이 선거뿐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투표가 해답이다”하고 한국사회는 외쳤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선거만으로 정권을 바꿨다고 사회, 또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으론 수긍이 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희망’을 가졌다가 크게 변한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되고 이것은 ‘분노’와 ‘외면’으로 바뀌니까.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를 바꾼다”라는 것에 대해 100% 맞출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을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은 바로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공유된 문제의식을 발판삼아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방식 또한 다양하다. 거기엔 틀은 없으니까. 그저 사회를 바꾼다는데 부합하면 되는 것이다. 투표, 로비활동, 데모, NPO, 인터넷이나 신문 등 방식은 무한하고 다양하다.

  저자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일이고 그러므로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 꼭 있다. “필요없는 데요?” 혹은 “안 바꾸고 싶은데요”라고. 이에 대해 저자는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사회는 바뀌고 있다고, 피해랄 수 없노라고. 침묵하다 침몰하거나 대파국을 맞이하거나 그건 니 맘이라고.


 몸소 나서는 것, 활동을 벌이는 것, 타인과 함께 사회를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훌륭한 사회, 훌륭한 가족, 훌륭한 정치는 기다린다고, 그저 바꾼다고 나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귀찮다, 이상론에 불과하다, 믿을 수 없다, 두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고, 이대로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지내기 바란다.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7~4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벗들에게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안타까운 건 그의 평전을 읽다 보면 평전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보다 그의 글에 홀린다. 그렇게 그 대상에게 츠바이크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역사, 심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써내려간 그의 글은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고 부드럽고 강단있다. 평전의 대상의 실제의 생활과 생각들, 느끼는 바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는 듯 감정과 이성이 마구 휘몰아치며 감정이입하게 된다. 문학적인 느낌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무튼 츠바이크의 글을 읽을 때면 마냥, 마음이 아련해진다.

  <우정, 나의 종교>는 츠바이크가 쓴 글들의 묶음이다. 장례식장에서 발표한 글도 있고 발표하지 못한 글도 있다는데 핵심은 츠바이크의 글들 중에서 ‘인물’에 관한 글을 추린 것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그에게 우정은 종교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책의 제목은 이 말에서 따온 모양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우정이야말로 그의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츠바이크처럼 우정과 의리를 중시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p11~12


  수많은 평전을 쓰게 된 것은 츠바이크 자신이 거기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많은 이들과의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츠바이크가 많은 언어를 익힌 것도, 여러 나라를 다닌 것도 그렇고. 평전을 쓸 때도 인물과 작품과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고 심리를 분석하는 만큼 사람들과의 교우에서도 섬세함과 감성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겸손했다. 스승에게는 늘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스승이나 벗한 선배들에게 존경, 앙모, 감격의 정을 품었다. 이는 그의 성품뿐 아니라 그가 큰 스승들에게 받은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베르하렌, 고리키, 로맹 롤랑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p11


  그의 인물 평전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나눈 우정들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이 책 속에서도 그의 우정에 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프루스트, 프로이트, 베를렌, 롤랑, 톨스토이, 호프만, 슈바이처, 바이런, 말러, 발터, 토스카니니, 릴케, 열 두 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벗들에 대한 짧은 글에서도 이 인물들의 생애와 그들의 감성과 그들에게 가지는 츠바이크의 마음이 섬세한 필치 속에 생생하기에 이들에 대한 평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그러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선택 역시도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고통을 어찌 가늠하겠냐만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만큼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츠바이크의 자살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미 그가 사망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할진대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은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더 이상 친구이자 풍부한 감성과 지식을 지닌 작가를 만날 수 없음에, 그 안타까운 선택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작가다


나탈리 골드버그, 글쓰며 사는 삶

   나탈리 골드버그는 미국에선 글쓰기 강사로 명망이 높다. 미국의 대표적인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도 출연하였던 만큼 사람들이 이 작가에게 열광하는 요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당연하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작가의 명성을 높여준 책이다. 이 책의 성공 이후 작가는 이전보다 더욱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으니 <글쓰며 사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 <글쓰며 사는 삶>은 글을 쓰며 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살자는 글쓰기에 관한 책일까. 두 가지가 다 버무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삶을 궁금해 하며 이야기 듣기를 원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더불어 ‘작가의 인생’을 살아보고픈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작가의 삶’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 삶에 대한 동경을 나탈리 골드버그는 흘리며, 그러니까 ‘써라’라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하고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된다는 건 보고 생각하고 존재하는 삶의 모든 것을 바꾸는 일이다. p5


  <글쓰며 사는 삶>도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하며 멈추지 말고 일단 써라!라고 부추기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선과 명상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기 책은 정리되고 정제된 어감, 이를테면 선과 명상이 주는 차분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들뜬 느낌이 가득하다. 한편으로는 응원가에 가까운 형태라고 해야 할까.

  나탈리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방법이나 원칙들도 살펴보면 익숙하게 들어온 글쓰기 방법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글을 잘쓰는 방법에 관한 책들은 너무 많이 있고, 글을 쓰기 위한 태도에 관한 책도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많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같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렇게 확실한 방법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글을 쓰지 못하는가. 그것 또한 같다. “안 쓰니까”

  쓰고자 하는 열망만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니 않으니,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않으니 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글쓰기 책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한발 떼기가 힘든 글쓰기에 대해 그게 뭐 별건 줄 알아?라고 외치는 것이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기 독려법인 듯하다. 그리고 항상 조금 업된 느낌으로 그녀는 외친다.

  “길게 생각할 거 없어, 망설이지 마, 그냥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

  

  처음 시를 썼을 때 느낀 완전함과 생동감, 스스로 뭔가를 창조했다는 기쁨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던 때가 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글을 쓰면 그저 행복했다고. 그렇지만 자신도 글을 쓰고 나서 한동안 무력감이 찾아온 적도 있고 글을 써서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노라 말한다. 하지만 무력감이라는 건 첫 해를 잘 견디면 몸에 적응 돼서 쓰러뜨릴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독이란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걸 말하지만, 글이 작아지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글은 열정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또 외친다. 이런 이미지가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외치라고.


 매일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작가다.” 스스로 그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그냥 씨앗 하나를 심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우리의 삶은 거대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다. 무거운 펜을 들어 막막한 페이지 위에 올려놓고 실제로 쓰기 시작하면, 이 세상의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p123


  글쓰기가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독후감 숙제만 나와도 귀찮아하던 사람들이 자신만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어하는 열망이 생겨나는 것은. 영상매체로 인해 책을 보는 이들은 급격히 감소했음에도 글을 쓰고자 하는 이 열망들은, 나탈리 골드버그와 같은 글쓰기 책을 통해 글쓰기를 부추기는 사람들 때문일까. 작가 자신은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 길로 떠나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생각해보면 삶을 옥죄는 것은 열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망이 없는 삶 역시, 삶을 끊임없이 옥죄고 흔들어 놓을 것이다.


글쓰기는 자유의 길로 떠나는 위대한 여정이다. 남들의 눈에는 헐렁한 옷을 입고 밋밋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이며 글을 쓰는 모습이 지루하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을 길들이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저, 

작가 수업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지만,

나쁜 소설은 작가에 관한 진실을 알려 준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작가수업을 읽고 놀란 건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글쓰기에 관한 책 중 맘에 드는 책이라는 점. 두 번째는 작가가 1892년생이고 이미 사망했고 이 책은 1934년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오래된 책의 역사에 놀랐다. 오랜 시간 동안 이 책은 전세계에서 사랑받았고 글쓰기의 지침서이자 필독서인 책이다. 글쓰기에 관한 동일한 형태의 기법과 태도를 말하는 글쓰기 책들과 다른 이 책이 가진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홀리고 있을까.

 얘기를 달리하면 지금의 글쓰기 책들 역시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을 읽고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글쓰기 습관을 들이고 방법을 터득해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 책만큼의 흡인력과 매력을 못 느꼈을까.

   이 책은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을 주면서 작가의 글쓰기 방법에 대한 신뢰를 준다. 마냥 ‘쓸 수 있다! 써라!’라는 격려와 주술식 선동이 아니라 차분하게 보다 글을 잘 쓸 수 있기 위한 진솔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먼저 제시해서 공감과 함께 몰입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글쓰기 책에서 원하는 것이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한 제시일 거라고 생각하게끔 된다. 그것이 글을 잘 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하지만 사실 가장 큰 글쓰기의 어려움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 바로 “심리적인 어려움”이다.  

 

단 하나의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 듯한 이 침묵의 기간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일단 저주 어린 주문에서 풀려나면 거침없이 술술 써내려 갈 수 있다. 글쓰기 교사는 문제의 근원을 정확히 파악해 거기에 맞는 조언을 해주어야 한다. 이번에도 역시 영감의 번개가 내려쳐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문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많은 경우 이러한 어려움은 완벽이라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상태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 더러는, 과도한 허영심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작가는 외면당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다 결국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손 댈 수 없게 된다. p33 


   문제의 근원. 도러시아 브랜드는 문제의 근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또한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거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는 언어가, 그 해결의 방법이 도러시아 브랜드의 것이 나에게 좀 더 와 닿았을 것이다. 또한 작가가 되기 위한 습관이나 환경,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독서법, 예술적 시각을 훈련하는 것 등 대체로 비슷한 조언들과 설명에도 훨씬 쉽게 긍정이 되는 것도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매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유명한 작가들의 사진들을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명언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나 좋은 작품이 탄생하느냐는 그대와 그대의 삶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그대의 감수성이 얼마나 예민한지, 분별력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대의 경험이 독자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훌륭한 글쓰기의 요소를 얼마나 철저하게 익혔는지, 말의 가락을 가려짚는 귀가 얼마나 발달해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성실히 훈련에 임했다면 일관성 있고 균형 잡힌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p194~195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 책의 제목을 살펴본다. <작가수업> 그리고,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드는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든 삼지 않든 우리 모두 말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라고 했다. 맞다.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는 작가가 되든 그렇지 않든 우린 말에 길들여져 있으니 조금이라도 말에 대해, 글에 대해 잘 아는 방법이 이 말을 길들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반복적으로 이 얼굴을 마주쳤다. 한동안 이 작가의 사진이 인터넷에 자주 노출된 것 같다. 익숙한 얼굴인데 누굴까, 누구더라 하며 글보다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하게 한 찰스 부코스키. 역시나 작가의 인생을 엿보다 작가의 삶에 더 관심이 집중됐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부코스키의 테마 에세이로 묶인 1부작이다.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작가의 이야기와 고양이에 관한 시가 담겨 있다. 작가는 길 잃은 고양이들을 버릴 수 없어 많은 고양이들을 키우지만, 본질적으로 애정이 없다면 고양이들은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양이들은 길잃은 고양이, 다친 고양이, 죽을 뻔한 고양이들이다. 작가는 그 고양이들에게서 자신을 본다.


 자, 여기 아름다운 고양이가 있소. 혀는 쭉 내밀고 눈은 사팔이죠. 꼬리는 바짝 잘렸고. 아름다운 녀석이지. 지능도 있고. 우리는 걔를 수의사에게 데려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소. 차에 치였거든. 의사가 이러더군. “이 고양이는 차에 두 번 치였네요. 총도 맞았고. 꼬리는 잘렸어요.” 나는 말했소. “이 고양이는 나요.” 이 녀석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나타났소.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 둘 다 거리에서 온 건달들이었으니까. p75~76


   독일에서 태어나 세 살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그는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한다. 잡역부, 철도 노종자, 트럭 운전사, 주유소 직원, 경마꾼, 집배원 등등의 일들을 하며 글도 썼지만, 처음 글을 발표한 이후 10년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매일 술을 마셨고 내출혈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며 삶을 전전했다. 25세에 글을 썼고 글이 잡지에 발표되었다면 새로운 감회로 더욱 정진하여 글을 썼을 법한데 10년 동안 침묵했고 술을 마시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어서야 다시 글을 썼다. 그래도 성실한 부분은 있었던지 14년간 우체국을 다녔고 “우체국 의자에 앉아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우체국을 나와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는 찰스 부코스키. 그 때의 나이가 쉰 살이었다.

  이런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평가는 거칠고, 이색적이고, 반항아의 이미지인 모양이다. ‘위대한 아웃사이더‘라고 불린다는데, 글을 읽다 보면 왜 이런 이미지가 있는지 알게 된다. 전세계 독자들이 찰스 부코스키에게 열광하는 것은 생경하고 날 것의 느낌과 버무려진 섬세한 감성의 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투박하고 툭툭이며 내뱉은 말 속에서 담긴 애정과 자조에 연민의 느낌을 받게 되면서.

   고양이와 함께 한 처음의 시작이 어떠하였는지 몰라도 분명 그에겐 고양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몰염치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역겨워하며 그에 반한 모습을 고양이에게 투영시키고 있다. 작가는 오래도록 인간들로 인한 상처를 받을 걸까. 알콜중독자마냥 끊임없이 술을 들이키는 것은 그의 성향인 것인지, 겪어 온 삶에서 살아가기 위해 축적된 방어의 형태였을까.

   뼈가 부러지고 총알을 몇 번이나 맞고 불구이기도 하며 사팔이인 고양이를 향해 그는 자신이라고 외친다. 거리의 삶을 알고 있고 건달처럼 떠돌았던 삶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고양이는 살아남았고 이제 뛰어다닌다. 마치 자신이 의사에게 더 이상 술을 먹으면 죽을지 모른다는 경고 속에서 살아 남아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말대로 그 고양이나 그나 “독하게 미친 녀석”들이다.


 의사는 걔가 다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막 뛰어다녀요. 혀를 내밀고 사팔눈을 뜨고. 독하게 미친 녀석. p76


   거칠다는 느낌의 다른 말이, 치열한 생존의 느낌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또한 거칠어 질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일면들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고양이와의 교감 속에 언뜻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냉소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작가 자신도 외골수 아니던가.


나는 차로를 올라갔다.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똥을 싸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고양이가 되고 싶군.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고 가만 앉아 밥을 기다리고. 엉덩이만 핥으면서 빈둥대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화만 내고 외골수라서. p139


   그는 동물들이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길 잃은 고양이들이 계속 기어들어 와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성향에 맞는 통조림을 사기 위해 다양한 식료품을 사러 다니고, 아름답게 근사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이 고양이들은 “좋아”의 에너지이다. “특히 모든 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 이렇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들 때”면 더욱 더.

  그에게 인간은 초조하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세상에 딱히 호들갑을 떨 일이 없다는 걸 알고 그는 “세계의 힘에 찢기고 있을 때면” 고양이를 바라본다. 그저 보기만 해도 그의 긴장을 가라앉게 해주는 존재가, 고양이이다.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의 글쓰기는 멋스럽게 꾸미는 글이 아니라 탁탁 박히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솔함이 그의 삶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그의 삶과 같이 느껴지는 맹크스 고양이에 관한 글은 그 자신이 왜 고양이에게 진한 애정을 가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