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9
김지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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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연습>을 재미있게 읽어 김지연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근데 이번에 또 이이를 고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고, 작가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백땡땡하고 헛갈려서 고른 책이다. 즉 백땡땡을 읽으려 도서관에 갔다가 백땡땡인줄 알고 김지연의 <태초의 냄새>를 가져왔다는 것.


  냄새 이야기. 이 감각을 우리말 “냄새”라고 하면 보통 악취를 연상한다. 좋은 쪽으로 냄새는 “향기” 또는 “방향”이라 표현한다. 꽃냄새하고 꽃향기,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번달에 쓴 독후감에 한 번 이야기했듯이 알파치노가 탱고를 추는 영화의 제목을 <여인의 향기> 대신 <여인의 냄새>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보통 ‘냄새’는 안 좋은 상태를 드러낼 때 쓰는 단어로 추락했다. 똥 냄새, 겨드랑이 냄새, 쓰레기 냄새, 땀냄새, 배꼽 때 냄새. 또 아랫도리에서 나는 오징어 꼬랑 냄새 등등.

  김지연의 <태초의 냄새>도 이런 의미에서 제목부터 뭔가 더러운 감각을 포함하고 있다. 근데 앞의 단어 “태초”에 워낙 무게가 있어 독자가 잠깐 잊고 있게 만들 뿐.

  냄새를 맡지 못해도 문제다. 비염이 극심해 후각을 상실한 사람도 있다. 나도 봤다. 그가 말하기를, 아주 독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에 가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다.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지독한 암모니아 가스 때문에 눈이 지물거리기는 해도 냄새는 안 난다나? 염병할 거, 좋기도 하겠다. 근데 음식 맛은 또 기가 막히게 알던걸?


  최근 세계사 적으로 세계인들의 후각이 잠시나마 멈춘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발생해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 COVID-19. 코로나 감염의 대표적인 후유증이 일시적인 후각 상실이었다. 심한 사람은 미각도 상실했다던데. 난 코로나 걸려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며. 김지연이 여기서 힌트를 받은 모양이다.

  K. 어린시절 집안이 쫄딱 망했는지, 부모가 점점 원수지간이 되어 그랬는지 K는 오랫동안 시골/산골의 외갓집에 맡겨졌다. 어릴 때부터 냄새에 민감했던 모양이다. 무당벌레처럼 반들반들한 겉껍데기를 가진 곤충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지그시 눌렀을 때, 곤충이 버둥대며 몸이 터지면서 체액이 비져나와 풍기는 냄새. 이 계집 아이는 그런 냄새에 익숙했다. 곤충만 보면 눌러 죽이고, 개울 속 도롱뇽 알을 보면 흙 위로 집어던져 바싹 말려 죽이던 K. K가 P와 함께 캠핑을 왔다. 캠핑을 간 게 아니라 “왔다”라고 했으니 작품은 현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원래는 K하고 P는 태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제 비행기만 뜨면 되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비행기는 뜨지 않았고, 설상가상 P가 감염이 되어 자가격리를 거쳤으며, K는 P가 격리기간을 끝내자 뒤따라 감염됐다. 그것도 P는 재택근무 중에. 회사의 팀장은 뭐라 생각했을까? 병 걸리지 말라고 재택근무 시켰더니 덜컥 걸려? 그것 참. 하여간 그래서 P는 괜찮은데 K가 냄새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면 또 무슨 조치/검사를 받아야 했던 모양이지?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즉 K가 코로나를 끝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P와 함께 비 오는 바닷가 캠핑장으로 1박2일 여행을 왔다.


  처음부터 냄새 타령이다. K와 P가 차의 트렁크에서 와인을 꺼내 캠핑용 스테인레스 와인 잔에 따라 마신다. P는 혹시 운전할 일이 있을 지 모르니까 K만 마신다. 와인에서 K한테 익숙한 죽어가는 곤충의 냄새가 난다. 차 안에서 마신다. 비 오고 바람부는 날. P의 선배한테 빌려온 텐트 속에서는 쉰내가 심하게 나서 아무래도 차에서 자야할 거 같다. 싸구려 와인 냄새, 곤충 몸 터지는 냄새, 텐트 속 쉰내. 냄새, 냄새, 냄새.

  K의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주 오래 산 사람은 자신만의 냄새를 갖기 마련이라고. 날 때부터 누구나 냄새를 갖지만 살다 보면 점점 더 자신에게 꼭 맞는 냄새를 갖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냄새를 말하는 자. 좀 웃기다. 자기한테는 냄새가 나지 않는 것처럼.

  태초에 냄새가 있었다. 그게 어떤 냄새였을까? 기억 속 할머니가 말한다. 정말 고약한 냄새겠지.

  김지연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새해연습>에서 나오는 글 좋은 일기를 백권 넘게 남긴 할머니?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태초가 생겼을 거라 생각하는 할머니? 다 합하면 사람 사는 일, 그게 일기이거나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다 간 할머니? 설마.


  K와 P는 장거리 연애중이다. 태국에 가지 못했으니 짧게 여행이라도 해야 한다고 해서 아직 여행할 수 있는 법적 조건에 맞지는 않지만 P의 선배한테 텐트 빌리고, 오빠한테 차를 빌려 K가 사는 도시 근처 해변에 온 거다. K는 원래 S의 애인이었다. 셋이 친했는데 둘은 연인이었고 셋은 친구였다. 그러다가 S가 5년 전에 죽었다. 흠. 코로나는 2019년. 5년 전인 2014년에는 세월호인데. 또? 어제 읽은 <섬에 있는 서점>의 주인 AJ처럼 나도 “큰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마뜩찮건만….

  근데 아니다. 그냥 죽었다. 그 후에 자연스레 P가 S의 자리를 대신했다. 아직 S의 기일이 오면 K는 P와 함께 그의 납골묘를 찾는다. 그건 그거다. 즉 S는 그냥 쓸데없이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진다.

  잠깐 텐트에 가보니 텐트 안에 뱀이 한 마리 들어와 있다(웃긴 장면이다). 기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뱀은 여간해 나가려 하지 않는다. 김이 팍 샌 둘. 이들은 이미 컴컴해지기 시작한 해변에서 드라이브를 선택한다. 와인을 마시지 않은 P가 운전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조명이 하나도 없는 건물을 발견해 그쪽으로 향한다. 가서 보니 10층 아파트 건물. 공사를 하다 중간에 그만 둔 을씨년스러운 흉물. 지방도시에서 간혹 볼 수 있다.

  건물 앞에 차를 세운 P가 건물 7층에 올라가보잖다. 미쳤다. 저녁이라 컴컴하면 건물 속은 깜깜할 테고, 아직 내장은 손도 대지 않았을 터이니 계단 손잡이도 설치되지 않아 발 한 번만 삐긋해도 그냥 아래로 떨어질 것인데 거기를 여자 둘이서 올라가보자고? 소설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그렇게 우기지 마시라.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려다 보니까 이렇게 무리를 하는 거다. 그래야, 딱 7층까지 가야 거기서 비닐을 깔고 자는 남자 고등학생을 만날 수 있으니까. K나 P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 고등학생.

  사건이 터질 거 같지? 걱정하지 마시라. 안 터진다.

  대신 엉뚱하게 K가 고딩한테 묻는다. 배 안 고프니? 밥 먹을래? 이것도 좀 웃기지 않아? 당신 같아도 기꺼이 그렇게 할 거 같나? 나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더라고.

  한 번 더 겁나게 웃긴 게, 고딩이 배달하는 친구한테 주문해 득달같이, 7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것보다 빨리 건물 앞에 곱도리탕을 가져다주고, 그걸 들고 다시 해변으로 와서 먹는다. 그 새 텐트 안의 뱀이 사라졌고, 코로나로 자가격리 기간임에도 방이 하나라 집에 있을 수 없어 폐건물 7층에서 혼자 자던 고딩 아이가 잠깐 텐트 안에서 자다가 집에 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취 속에 빠져버리는 K. 작가 천희란은 작품해설에서 좋은 말을 좌르륵 해 놓았지만 나는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 해설조차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하겠다. 그래서 뭘 주장하는 거야? 어쨌거나 다음엔 꼭 백땡땡을 읽어봐야지. 다음번 책이 백땡땡이라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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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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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케나지 유대인 아빠와 한국인 이민자 엄마 사이의 77년생 외동딸.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재미있어서 두 번째 제빈을 골랐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제빈처럼 유대인 아빠, 한국인 엄마 사이의 외아들이었는데, <섬에 있는 서점>의 남자 주인공은 인도계 미국인, 여자 주인공은 흔히들 백인이라 부르는 종족. 이들이 키우는 입양아는 흑백 혼혈. 역시 복잡하다.


  책은 여자 주인공 어밀리아 로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 전임자 하비 로스가 죽어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다. 신입인지 경력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연봉 3만7천달러에 성과급 보너스 별도 조건으로 도장 찍었다. 문제는 성과급 받는 직원이 이 업종에서 나온 지 한참 됐다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올 겨울 출판 기획에 관한 팜플렛과 가제본 몇 권을 들고, 이걸 다 넣은 숄더백의 무게가 20kg을 가볍게 넘지만 워낙 건장한 에밀리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보스턴에서 기차를 타고 와 다시 페리로 갈아타 도착한 앨리스 섬의 유일한 서점인 “아일랜드 서점”에 도착한다.

  아일랜드 서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매출 35만달러 대부분이 피서객 몰리는 여름철에 집중되는 17평 정도의 2층 책가게다. 1층은 책방과 카운터, 사무실. 2층은 주인 AJ의 생활공간. 이름하여 주상복합? 근데 책방이 조그맣고 까다로운 서점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씩씩한 서른한 살의 긍정왕 어밀리아, 에밀리는 특별히 까칠한 주인에게 강점을 가졌다고 자평한다. 소설 속에서 에밀리의 휴대폰을 제일 먼저 울리게 한 남자는 보이드 플래너건.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에서 만나 잘 안 된 세번째 남자다. 그가 제안한다. 다시 만날래요? 보이드는 오래된 것, 골동품, 집, 개, 사람을 싫어한단다. 이것 빼고는 자기하고 맞는 거 하나도 없는 남자. 에밀리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살 바에는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보이드가 딱 그런 사람이다. 이 말을 독자에게 하고 싶어 보이드를 출연시켰다. 당연히 독자는 이후 보이드의 꽁무니도 구경할 수 없다.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 AJ 피크리. 인도 사람의 경우에 이름이 하도 복잡하고 길면서 발음하기도 어려워 그냥 A.J. 이렇게 쓰는 것이 훨씬 좋다. 나는 A.J.도 귀찮아서 점 안 찍고 그냥 AJ라고 하겠다.

  AJ. 39세 홀아비.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에 대학원생 니콜을 만나 서로 사랑했다. 사랑이 지극했다. 하루는 니콜이 AJ에게 자기가 태어나 대학입학 전까지 자란 고향, 앨리스 섬에 들어가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뭐 해서 먹고 살려고? 섬에 책방이 한 군데도 없거든. 책방이 없는 곳은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영문학 박사 지망생이었던 AJ가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말이다. 이 말이 어느 책 속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섬에 있는 서점>에 쓰여 있다. 근데 잊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AJ가 서점 주인을 하면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은 일단 결혼하고, 니콜이 부모에게 유증받은 돈도 보태 작은 책방을 열어 섬에 들어와 살게 된 것.

  근데 니콜이 죽었다. 21개월 전에 작가의 날 행사를 하고 작가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오다가 마지막 페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과속을 했든지, 길가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사슴을 치지 않으려 핸들을 꺾었는지 그 추운 겨울날 차가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처박혀버렸던 거다. 임신 2개월이었던 니콜이 운전한 차가.

  이제 홀아비가 된 AJ. 도무지 혼자 서점을 운영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 여고생 몰리 클럭을 들였다. 성실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혀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언정. 작가 초청 행사 같은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니콜이 살았을 때처럼 독서클럽 운영 같은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성격은 더욱 까칠해지기만 했고 음식은 인도인이니까 주로 즉석 카레 같은 가공품이나 냉동식품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수준이었다. 대신 다량 복용, 섭취한 것이 신의 눈물, 술이었다. 주종 불문, 청탁淸濁 불문, 강약 불문. 그래서 척 보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하필이면 첫 출장지로 고른 책방이 이런 곳이니 에밀리 팔자도 참.

  에밀리가 명함을 내밀자마자 AJ가 대꾸하기를, 하비는 어디 갔소? 죽었는뎁쇼. 죽었다? 몰랐네. 어찌 전화 한 통 없었을까? 온라인에도 게시했고, 메일도 보냈을 겁니다.

  AJ는 메일 같은 건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버린다. 니콜이 죽은 다음부터 늘 그렇다. 에밀리는 몰랐겠지. 하비 로스로 말할 거 같으면 6년 동안 그가 이 책방에 들를 때마다 몇 시간씩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AJ와 완전히 취향을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 하비였는데 그가 죽었으니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어밀리아 로먼, 에밀리가 알 턱이 없다. AJ와 하비가 공유하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 데이비드 토스터 윌리스의 <한없는 웃음거리>. 이 문단을 읽은 순간 나는 허겁지겁 나 사는 도시의 다른 도서관에 그의 작품집 《오블리비언》을 상호대차 신청해 지금 읽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밀리는 영업을 시작하지만 AJ의 입에서는 거친 말만 쏟아진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찮더군―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뒤로 더 이어지는데 다 인용했다가는 저게 지금 독후감 쓰기 싫어서 이 지랄이지, 이런 말 들을까봐 여기서 멈췄다. 근데 이어지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게 하나 빠졌으니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 없는 노인들이 별볼일 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라고 말한 것이 있다.

  크. 정곡을 짚었다. 어밀리아가 아일랜드 서점에 오면서 적극 추천하려고 했던 책이 자기가 읽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던 <늦게 핀 꽃>이란 건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에 결혼해, 2년 후에 암에 걸린 아내를 보낸 남자의 회고록이었던 거다.

  어떻게 됐을 거 같은가? 당연히 거의 쫓겨났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뭔가가 있을 거 같은데 하도 오래 어밀리아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아 역시 엑스트라였나? 싶은 즈음에 AJ가 어밀리아에게 앨리스 섬에서 두 번째로 근사한 해물전문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대접하기에 이르니 바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늦게 핀 꽃>을 읽은 다음이었던 거다. 근데 그건 그거고.


  AJ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보물이 하나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18세 때 처음으로 출간한 익명 시집 《태멀레인》 초판. 딱 50부만 찍어 이것처럼 표지가 멀쩡하면 적어도 4십만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걸 유리 금고에 보관해 지금처럼 잔뜩 취한 상태에서 가끔 꺼내 별로 잘 쓰지도 못한 시를 읽어보는 걸 낙으로 삼았다. 혼자 살아봐라. 자기가 싼 똥은 반드시 자기가 치워야 하고, 속상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이날도 어밀리아를 보내고 잔뜩 취해 곳곳에 구토를 하다가 시집을 꺼내 몇 수… 읽기나 했나, 그냥 쳐다보고 말았겠지, 금고를 닫지 않고 자빠져 자버렸다. 아이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서점에 들어와 AJ 본인이 벽에다 집어던진 카레 먹던 거, 구토 토사물 같은 걸 깨끗하게 치워놓고 그 값으로 그랬는지 《태멀레인》을 훔쳐가버렸다. 곡소리 났겠지? 조만간에 그것도 팔고, 서점도 팔아 따뜻한 플로리다쯤에 가서 편안하게 죽으려 했건만.

  대신 누군가 어린 갈색 천사를 책방에 두고 갔다. 경찰에 신고하고 보호시설로 보내려다가 아이가 너무 예뻐서 AJ가 직접 키우기로 했는데, 앨리스 섬의 착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책방에 오면 그냥 오나, 책도 한 두 권씩 사가기 시작했다. 이건 크고 작은 여러 도서모임 결성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독서회도 이 아일랜드 서점에서 열리게 되는데, <늦게 핀 꽃>으로 인연이 이어진 어밀리아 로먼, 그리고 나이틀리 출판사의 책들도 많아지면서, 일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연히 사랑도 싹이 트다가 점점 커지고, 우리의 어린 갈색 천사, 이름을 마야 태멀레인 피크리로 지은 갈색 천사도 점점 성장해가며 아름다운 앨리스 섬, 아름다운 주민, 아름다운 서점,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다.

  우리 독자들은 그냥 즐겁게 읽으면 된다. 세상에 이런 낙원은 절대로 없으니 이런 곳에서 살아볼까, 하는 꿈만 꾸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누구나 읽는 동화책 정도로 여겨도 마땅한 착한 책. 개브리얼 제빈도 될 수 있으면 재미난 묘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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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4-29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게 지금 독후감 쓰기 싫어서 이 지랄이지,˝ 싶은 순간 멈춘 폴스타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4-29 15:52   좋아요 0 | URL
뭐 사는 게 다 거기가 거기 아녜요? ㅎㅎㅎ

다락방 2026-04-30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되게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폴스타프 님 리뷰 읽으니까 또 읽고 싶어졌어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동화도 읽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책 영화로 나와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6-04-30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럼요, 동화도 읽어야지요. 잠깜이라도 위안을 받는 게 좋잖습니까, ㅎㅎㅎ
 
결투 노벨라33 세계 중편소설 전집 16
조셉 콘래드 지음, 이은경 옮김 / 다빈치 노벨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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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출신 영국 작가가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에 나폴레옹의 육군을 일컫는 대육군의 경기병에서 진짜 있었던 전설적인 결투 실화를 배경으로 중편소설 정도의 작품, 노벨라를 썼다. 흥미로운 건 조지프 콘래드의 나와바리인 바다 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 역시 항해가 나오고, 바다도 나오고, 바다를 면한 사람들이 배 타고 해적질과 밀수질도 하면서 육지사람과 모종의 음험한 작업을 벌여야 조지프 콘래드를 읽은 것 같다면 그건 일종의 편견이랄까 일반화랄까? 

  소설가 미치너가 뽑은 영국의 최고 소설가 네 명을 그의 책 <소설>에 소개했다. 일단 영국 소설가라서 우리나라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자마자 줄창 배우는/배웠던 <더블린사람들>을 쓴 제임스 조이스는 나오지 않는다. 영어로 썼지만 아일랜드 사람이라서. 하여튼 네 명 가운데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은 여성이고, 두 남성 소설가는 영국 밖에서 나서 영국 여권을 가지고 산 사람들, 헨리 제임스와 조지프 콘래드. 조지프 콘래드는 처음 읽을 때 좀 뭔가 불친절한 기분이 들고는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단단한 모험담이랄까, 특유의 이국적 스케일이 재미있어졌다. 어렵게 얘기할 필요 없다. 내가 그의 팬이라는 말이다. 아직도 이이의 전작품이 모두 우리말로 번역해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이를 읽기 시작한 것도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겨우 한 15년~20년? 이름도 낯설었다니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결투는 통상 결투자들이 각각 입회자를 두고 대결을 벌이는데 이때 그들이 상대의 목숨을 거둘 목적은 아니라는 것. 서로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때, 결투를 벌이지 않으면 명예를 지킬 수 없다는 엉뚱한 인식이 박인 옛 사람들 고유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만일 한 편이 완전한 승리, 예컨대 상대방의 무기를 완전히 상실하게 하고 완벽하게 제압했지만 승리자가 패배자를 죽이지 않을 경우, 앞으로 남은 구만리 같은 세월 동안 언제라도 패배자에게 이제 좀 죽여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뜻을 전할 경우 망설이지 않고, 명예를 위하여, 스스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이런 경우는 거의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미하일 레르몬토프도, 알렉산드르 푸시킨도 결투를 벌이다 치명상을 입고 치료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양반들이 결투만 안 했어도, 하긴 했는데 죽지만 않았어도 러시아 문학은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너무 일찍 갔어!

  이렇게 죽는 경우보다는 사실 부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나는 여태 부상으로 끝나도 결투가 종료되는 걸로 알았는데, 콘래드의 <결투>를 보니까 아니다. 부상에서 회복하면 이를 복수하기 위하여, 전에 생긴 문제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고 재 도전이 가능한가보다. 사실 결투라는 행위는 결투로 사건을 종결하려 벌이는 야만스러운 일이건만. 그리하여 내가 아는 장면을 보면 둘 다 죽지 않으면 입회인들이 양 당사자에게 화해할 것을 요구하고 거의 그렇게 한다. 뭐 그렇다고 진짜 이들이 지금부터 우리는 원수지간이 아니라 친구 먹기로 하는 거다, 이런 사이가 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서로 눈길이 마주치면 겁나게 서먹한 사이, 그러나 그놈의 명예를 위하여 서로 째려보지는 않는 그런 관계 정도의 화해를 의미한다.


  프랑스 대육군 보병군단 내 경기병 연대의 두 장교. 이들을 소개하겠다.

  아르망 뒤베르 중위.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의 부관으로 있으나 원대는 제4경기병대. 큰 키에 밝은 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닌 잘 생긴 부르주아의 아들. 이따금 폭음을 할 줄 알지만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피카디리의 하늘 아래서 자란 북쪽지방 사람이다. 전쟁의 폭풍 속에서도 상황을 생각하는 냉철한 사고력을 지니고 있으며 품위를 중시하는 전형적으로 잘 교육받은 귀한 집 자재. 이런 집 소년들은 어린 시절부터 무기, 특히 검술에 관해서도 가문의 검술교사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사격 솜씨는 좀 떨어진다.

  가브리엘 플로리앙 페로 제7경기병대 중위. 혈관 속에 언제나 펄펄 끓는 피가 흐르는 체질. 작은 키이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거친 사나이. 전쟁도 집단 싸움으로만 여기는 인물로 대장간집 아들이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지만 와인이 무르익어가는 지방의 햇살 아래서 취한 채로 태어난 키 작은 가스코뉴 촌놈. 자신이 판단해 비슷한 계층의 사람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한다면 곧바로 결투를 신청해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나운 인간이다. 페로 중위는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장가도 들지 못한다.


  이들은 평생 다섯 번의 결투를 벌인다.

  첫번째 결투. 뒤베르 승리.

  두번째 결투. 페로 승리.

  세번째 결투. 무승부

  네번째 결투. 뒤베르 승리

  최후, 다섯번째 결투. 안 알려줌.


  또 웃기는 게, 군인들끼리 결투할 경우에는 계급장의 차이가 있으면 안 된단다. 처음 1라운드에서 만났을 때는 둘 다 중위.

  군부 고위층이 판단해도 교육을 잘 받은 뒤베르가 확실히 참모 능력이 있고, 작전 계획과 실행에도 탁월해 페로보다 진급이 빠르다. 이것 또한 페로가 불만을 품는 이유가 된다. 첫번째 결투를 시작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보태, 뒤베르의 이른 진급이 이를 더욱 증폭시켜 뒤베르가 분명 상관들에게 정직하지 않은 수단을 써서 진급한 것이라 주위 장교들에게 구라를 풀면서 페로 역시 본격적으로 진급을 위해 더 용맹하게 공을 세운다. 오직 하나. 뒤베르한테 얻어 터진 것을 갚아주기 위하여.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래서 두 번째 결투 당시에 둘의 계급은 대위. 페로가 성공했다. 뒤베르의 옆구리를 칼로 폭 쑤셔 몇 달 동안 침대 신세를 지게 만들었으니.

  세번째 결투는 여러명이 입회한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칼을 써서 죽기살기로 칼부림을 해대는 거친 싸움이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베었는지 두 사람의 군복도 전부 찢어지고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칠갑 한 귀신 꼴을 한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던 입회인들이 강제로 뜯어 말렸다. 무승부.

  다음 결투 역시 페로가 자기 입회인을 보내 끝장을 보자고 신청해서 벌어졌다. 이번엔 정말 아예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한다는 의미로 경기병의 말을 타고 창 또는 검을 써서 와다다 달려가 붙는 방식이다. 하지만 단 일격에 뒤베르의 검이 페로의 이마를 깊게, 그러나 치명상은 아닐 정도로 베고, 얼굴 조직엔 신체 어디보다 혈관이 조밀하게 얽힌 관계로 상처가 깊지는 않지만 너무 피가 많이 흘러 페로가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뭐가 보여야 더 싸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뒤베르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별로 없이 승리. 네 번째 결투할 때 이들의 계급이 대령이었다.


  네번째 결투와 최종 다섯번째 결투 사이에 있던 것이 1812년 러시아에서의 회군. 숱하게 많은 병사들이 희생된 엄동설한 속 후퇴 당시 이들은 임시로 재편한 병제 아래 같은 대대 속 전우가 된다. 러시아 전장에서 고생을 하며 맞닥뜨린 카자크 병사를 퇴치하기 위하여 둘은 평생 처음으로 함께 협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들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건 아니고.

  프랑스로 돌아온 이들은 장군으로 승진한다. 전투에서 치명상을 당해 뒤베르가 누이의 집에서 요양을 하던 동안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와 백일천하, 잠깐 동안의 권세를 쥐었다가 워털루에서 극적으로 역전패를 당해 세인트헬레나로 다시 유배를 가고, 친 황제파 군인 특히 장군들을 대상으로 살생부가 만들어진다. 이 살생부에 페로의 이름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된 뒤베르. 그는 경찰장관에게 찾아가 겨우 페로의 목숨을 구한다. 자기가 그를 두려워해 죽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저 중부지방,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곳에 유배 비슷한 처지에 떨어진 페로가 이런 소식을 알 턱이 없다. 세월만 죽이다가 관보에서 다시 뒤베르의 이름을 본 순간, 아차, 생전의 맞수 뒤베르를 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페로는 즉각 주변에서 두 명의 입회인을 그에게 보낸다.

  하필 이때 뒤베르는 마흔 살의 장군으로 누이의 장원에 칩거하며 누이가 소개한 어여쁜 스무살 아가씨와 혼인을 준비하고 있던 순간인데, 죽음의 입회인이 도착했으니, 그렇다고 결투에 응하지 않으면 자기 명예가 땅에 떨어질 터, 이제는 진짜로 죽기 살기의 단판 싸움을 피할 수 없어, 자기가 사격에 약한 것을, 아니지, 페로가 명사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각자 총 두 자루, 두 번의 사격이란 조건으로 마지막 전투장소인 결투지, 숲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가 짧고 재미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내가 첫빠따로 읽었다. 도서관 책을 처음 읽을 때는 기분좋다. 차마 5별을 주지 못했다. 4.5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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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6
리처드 예이츠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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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예이츠. 1926년생 미국 남자. 뉴욕주 연커스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여러 후견인 아래에서 컸다. 작중 주인공 휠러 부부 가운데 아내 에이프릴처럼. 26년생이라 1945년경에는 당시 기준으로 전쟁하기 딱 좋은 열여덟~아홉 살이 되어 대 독일 마지막 춘계 대공세에 투입되고, 전쟁이 끝난 후 1년 더 유럽에 주둔했다가 1946년에 돌아왔다. 이건 또 작품 속 남편 프랭크 휠러의 경험과 같다.

  예이츠는 영국 유명 배우의 딸 실라 브라이언트와 결혼해 잘 먹고 잘 살다가 딸 둘을 낳고 1959년에 이혼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주인공 부부는 결혼해서 딸과 아들을 낳고 살다 컬럼비아 대학을 나온 프랭크는 뉴욕의 알아주는 극예술대학을 졸업한 아내 에이프릴과 사는 동안 가끔 격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불행한 파국을 맞는다. 아마 이혼을 하고나서 아니면 이혼 즈음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독자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실감난다.

  나는 하필이면,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책을 읽을 때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쓴 <말리나>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 <말리나>는 한 20년 전에 사놓고 읽다가 포기, 한 번 더 읽다가 포기해서 지금 세번째 도전하는 중이다. 오직 읽기에 집중하느라 집에서 메모하지 않고 글자, 단어, 절, 문장 하나씩 해체해가며 읽고 있다. 근데 이 책/작가와 비교하면 세상에나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같은 1926년생인데.

  예이츠는 승전국과 물산이 넘쳐나는 시절에 동물원 산보하듯 중산층 속물들의 사는 모습을 까발린 반면에 보르크는 패전국 오스트리아 빈 사람들의 우울한 사람 관계를 붓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더 재미있게 읽은 것일 지도.


  당시, 그러니까 1950년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사회는, 남자는 밖에 나가 일을 해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형태였다. 이런 중산 계급이 몰려 사는 곳, 1955년의 코네티컷 주 서쪽에 있는 ‘로럴’이라는 동네. 이곳에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마추어 극단인 “로럴 극단”을 만들어 첫 공연으로 로버트 셔우드의 <화석 숲>을 올리기로 하고 주1회 연습에 돌입했다. 아마추어라도 대충 즐기려는 보통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아 정말 극 다운 극을 공연해보겠다는 의지로 뭉친 극단이어서 뉴욕에서 그래도 이름이 있는 연출자를 초빙했다. 암만해도 처음 해보는 연극이라 버벅거리던 배우들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게 이 극단, 첫 공연의 기본적인 문제점이었다.

  하여 단원들은 주 1회였던 연습을 2회, 3회, 급기야 4회 이상으로 늘렸지만 상황은 여간해 좋아지지 않아 배우들은 자신들이 실패하리라는 사실만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서로 미안해하는 서먹한 눈인사를 나누면서. 어쨌거나 드디어 공연 전날 드레스 리허설을 했다. 그런데 웬일? 공연 복장을 갖추어서 그런지 연극 자체의 흐름에 올라타 분위기가 제대로 유지되는 거였다. 마치 배우들이 영혼을 다 쏟아 부었달까 싶을 정도. 이 이상을 어찌 더 바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꽉 차올랐다. 리허설이 끝나고 연출이 말했다.

  “솔직히 저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밤 여기 무대 위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아주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내일 밤에도 이렇게 합시다. 그럼 우린 아주 기막힌 공연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로버트 셔우드가 썼다는 <화석 숲>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 희곡이 어떤 내용인 줄 알아야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런데 셔우드의 희곡작품은 원서밖에 없었다. 이런.

  그러나 다음날 밤. 공연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제일 중요한 건 남자 주인공을 할 배우가 급성 대장염에 걸려 도저히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다시 차 타고 집에 갔다는 거. 대역으로 누가 나왔나 하면, 나이들고, 배 나오고, 안경 끼고, 머리 벗겨진 연출가. 관객이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그렇게 되지 못할 인물. 연출과 배우는 또 엄연히 다른 것이라 극을 처음부터 망쳐버렸던 것. 초보 배우들 역시 처음부터 계획이 무너지니 잘 하던 것들도 버벅거릴 수밖에. 극예술대학을 졸업한 에이프릴 휠러도 1막 앞부분에서는 상대역이 바뀌었을지라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자기 역을 소화했지만 조연급을 비롯해 거의 모든 배우와 스탭들이 엉뚱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헛갈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연극은, 망했다.

  완전한 실패. 더 실패하려도 실패할 것이 없을 정도의 실패. 하지만 중산층 출신 배우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 극예술대학을 졸업한 에이프릴은 이들과 속내가 다르다. 다를 수밖에. 객석에서 에이프릴의 연기를 지켜보던 남편 프랭크는 무대가 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우 대기실에 찾아간다. 서먹서먹. 그래도 남편이니 위로의 한 마디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둘 것을. “나는 괜찮으니 조금만 나 혼자 내버려둘래? 더 말하지 말고.” 그래도 남편은 좀 미진한 거 같다. 또 종알종알. 너는 잘했어. 다른 배우들이 문제였지. 아 씨, 입 좀 닥쳐주지 않으실래요? 이렇게 본격적인 부부싸움의 순서를 밟는다.


  이 문제 하나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소설은 연극의 실패와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에이프릴의 자존감 상실에서 시작한다. 남편 프랭크는 아버지가 전에 다니던 녹스 사무기기, 아마도 제록스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인 거 같은데, 녹스 사무기기에 취직하여 당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최강의 미국 회사 답게 출근해 하루 종일 빈둥빈둥거린다. 그래도 3만5천 달러의 연봉을 받고, 뉴욕의 좁은 아파트에서 탈출해 코네티컷 서쪽의 신흥주택가 레볼루셔너리 힐 이스테이트 옆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다. 녹스 사무기기는 자기 두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원해서 취직하고, 출산한 건 아니었다. 프랭크의 인생에서 그때 이후로 죽 일어난 모든 일은 실제로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느 다른 가장처럼 자신도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지독하게 따분한 직장에 취직했고, 단정하고 건강한 삶의 중요성에 대한 성숙한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비싼 중산층 동네로 이사했으며, 첫째 아이가 실수로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기 위하여 둘째 아이를 낳았다.

  이 동네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일 걸? 내 말이 틀리면 세 명만 나와봐.

  이게 프랭크가 하고 싶은 주장이었겠지.


  하여튼 연극은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고, 어린 시절을 여기저기 떠돌며 여러 어른들에게 후원을 받아 자란 에이프릴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날도 부부싸움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뉴욕시로 출근하려 차고에서 차를 후진해 경사진 언덕 위 도로까지 몰고가는 남편 프랭크의 후줄근한 모습을 창밖으로 내다본 에이프릴은 생각한다.

  불쌍한 사람. 저렇게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해야 하는 남자. 가고 싶지 않은 직장에 아침마다 차를 몰고 역까지 가고 거기서 기차로 갈아타고, 또 지하철을 타서 출근해 하루 종일 빈둥거려야 하는 남자. 남편이 짠하다.

  에이프릴은 한 가지를 생각해낸다. 만일 내가 돈을 벌면 어떨까? 남편은 그냥 쉬라고 하지 뭐. 내가 돈을 벌어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만일 그런 게 있다면 말인데, 하라고 하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쉽지 않을 거야. 프랭크가 유럽이라면 환장하게 좋아하니까 이 기회에 영구히 유럽으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파리에 가서 살면? 전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미국의 외교관도 있고 문화관도 있으니 거기에는 하다못해 타자수나 속기사가 필요하겠지. 자격증이 있으니 내가 벌면 되지.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자유롭게 사는 거야!

  이게 생각보다 대박이다. 아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박이다. 그리하여 직장 프론트 아가씨와 바람을 피우고 들어온 프랭크한테 프랑스 이민에 대해 설명하고, 그동안 회사가 재미없어 미칠 지경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엄살을 떨어온 처지라 에이프릴의 제안에 반대할 이유를 대지 못하는 프랭크. 그래서 부부는 이번 가을에는 반드시 파리로 이민을 가겠다고 뜻을 함께 한다. 프랭크는 속으로 미치겠지.

  그러나 하늘은 이 부부와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울 마음이 없다. 연극이 끝나고 부부싸움 열라 했지? 그 1차부부대전이 끝나고 화해의 밤을 맞아 이들은 기념으로 한 침대에 올랐는데 에이프릴의 페서리에 문제가 있어서 그만 셋째 아이가 탁! 착상을 해버렸던 거다. 아싸, 됐다! 프랭크가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까?

  빼먹으면 아쉬운 등장인물이 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옆의 작은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업자 기빙스 부인의 아들 존 기빙스. MIT를 졸업하고 서부 해안에서 수학을 강의하던 영재인데, 영재에게 자주 보이는 정신병변이 있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상태가 좀 나아져 의사가 존에게 (부모집은 안 되고) 친한 친지나 이웃의 집에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그래서 이 휠스 부부의 집을 방문해 이들과 불과 몇 분 만에 사태를 파악, 정확하게 문제점까지 딱 말해버리는데, 그게 이 부부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가는 롤러코스트로 작용한다.

  재미있는 소설. 다만,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같은 나이의 부부임에도, 프랭크는 아내에게 말을 낮추고, 에이프릴은 남편에게 존칭, 가끔은 극존칭을 쓴다. 다른 부부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세 살이 더 많은 친한 이웃 캠벨 부부도 마찬가지다. 그게 눈에 거슬린다. 1955년에 미국인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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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영혼
조지 엘리엇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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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쓰기 깝깝하네. 다른 이도 아니고 작가가 조지 엘리엇, 여성 가운데 (오정희 빼고) 제일 좋아하는 작가라서 이이의 책이 나왔다는 거 알고는 득달같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첫빠따로 읽었는데, 푸시시… 김이 새 버린 거다. 책 표지부터 자잘한 글씨를 이용해 큰 해골바가지 하나를 그려 놓아 이 책이 저 바다건너 잉글랜드 대표작가인 조지 엘리엇이 쓴 고딕 소설이라는 걸 광고하고 있어, 그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읽은 다음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희망도서 신청할 때부터 이게 뭥미? 했었다. 그래도 거부감은 없었다. 이이가 활동하던 19세기에는 작가의 젠더를 불문하고 고딕 소설 쓰는 게 일종의 붐을 이루었으니 대표적인 작품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개스켈도 고딕 소설을 썼음에야! 이 전통은 20세기까지 흘러 미국의 국가대표 소설가 이디스 워튼 역시 한 고딕 했고.

  또 하나 엘리엇의 특기라고 하면, 청춘 남녀, 간혹가다 청춘은 아니지만 하여간 남녀가 오진 고생 끝에 그들은 “결혼해서 아들 딸 쑥쑥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 아니라, 굴곡을 겪으며 결혼에 도달한 커플이 결혼한 다음에 복닥복닥 부부끼리 갈등을 겪어가며 서로 미워하고 뒤를 밟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 수 있을까, 마치 세기의 원수들이 만나 살을 대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려내는 데 관한 한, 진짜 세계 챔피언 아닌가? 하여간 조지 엘리엇, 하면 은근히 속으로 기대하는 게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지. 이제 더는 조지 엘리엇의 작품을 읽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새롭게 그이의 단행본이 나왔으니 이 아니 기뻤겠느냐고? 아이쿠, 미끼였는 지도 모르고 덥석 물었던 거다.


  <벗겨진 베일>과 <제이컵 형> 단편소설 두 편을 실은 소설집.

  <벗겨진 베일>의 클라이맥스는 죽은 자 가운데 삼일만에…, 아니고 죽은 자 가운데 삼십분 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죽음 너머에서 되돌아오는 장면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아니, 내가 뭐라고 부른다고? 그렇다. ㅆㄴㄹ. 이왕 심판하러 그 멀고 먼 길을 돌아왔으면 심판 당해 마땅한 인간 하나 정도는 목이라도 댕거덩 처 죽이고 다시 자빠지든지 뭘 하든지 했어야 좋을 텐데, 그리곤 그만이다. 물론 이렇게 ㅆㄴㄹ이 되도록 일이 꼬이는 게 만든 건(어떻게 꼬였는지는 안 알려드림) 조지 엘리엇의 특기가 십분 발휘되었다고 쳐도 아이고,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고, 괴기스럽기는 한데 촌스럽게 괴기스럽고, 그리고 이거야말로 이미 우리나라 모 종교에서 실용신안 특허를 낸 일종의 “피내림”이란 거 아니었을까?

  <제이컵 형>은 고딕 소설의 또다른 전형 가운데 하나인, 약간 기형적인 체구와 완력을 소지한 인물의 등장이 돋보인다. 이 인물이 주인공의 친형인 제이컵. 어깨에 쇠스랑을 짊어지고 다니는 막강한 완력의 소유자. 말 그대로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주먹의 사나이. 기억하시지? 대서양 건너 미국 땅의 카슨 맥컬러스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딕 소녀. 엄청 키가 크잖아. 열 서너살 밖에 되지 않은 꼬마 아가씨가. 근데 제이컵은 지체장애까지 있어서 천하장사의 몸에 열 살 수준도 되지 않은 지능밖에 없어 사탕 같은 단 것을 좋아하고, 형제 중에서도 제과 수업을 받은 데이비드를 제일 좋아하는데, 아뿔싸, 데이비드로 말하자면 나중에 쫌스러운 사기꾼이 될 예정이다. 여기서 제이컵이 맡은 배역은 당연히 데이비드 포에서 에드워드 프릴리로 성공적으로 변신해 자그마한 출세가 눈 앞에 닥쳤을 때 다정하게 나타나 깽판을 치는 역할. 뭐 재미는 있지만 스타일이 좀, 조금 오래 전 스타일이라 별로 즐겁지도 않다.

  뭐 그렇다는 거다. 여러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최고의 평점을 매겼으니 유독 이 책이 나하고 맞지 않을 뿐일 확률이 높다. 괜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분들한테 기회를 뺐을 수도 있는 쓸모없는 독후감이 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2백쪽에 이르는, 각 1백쪽임에도 한 글자도 메모하지 않고 읽은 오랜만의 책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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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4-2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지루했습니다… 철 지난 이야기 같긴 하죠. ㅎㅎ

별다섯 줄줄이는 아마도 츌판사로부터 공짜로 제공받은 분들 아닐지….🤣

Falstaff 2026-04-25 07:29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래서 지원도서 안 받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 못 할까봐서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