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오꼬.아내와의 칩거 창비세계문학 22
후루이 요시끼찌 지음, 정병호 옮김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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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걸로 보아 후루이 요시키치는 도쿄 토박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1937년에 태어나 도쿄 대학과 대학원에서 독문학 석사를 취득하고 릿교 대학 조교수를 지냈다. 대학원에서는 카프카를 연구하는 한편 로베르트 무질과 헤르만 블로흐의 작품 번역에 관여했다. 자신이 번역을 했다는 게 아니라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일어판 위키피디아에는 후루이 요시키치가 1960년대 말에 무질의 <사랑의 완성,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을, 블로흐의 <현혹>을 번역했다고 나온다. 어느 게 맞는 지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떤가. 오늘 소개하는 <요오꼬>가 다분히 무질과 블로흐의 작풍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정병호 고려대 일문과 교수의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후루이는 1970년에 <둥글게 둘러선 여자들>이라는 작품을 써서 세간의 주목을 받아 곧바로 그해 3월에 릿교 대학 조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단다.

  같은 해 64회 아쿠타가와 상에 이이의 두 작품이 결선에 올랐으니 <요오꼬>와 <아내와의 칩거>였다. 결선에 두 작품을 올린 것도 대단한데, 더 놀라운 건 당선작이 <요오꼬>, 그리고 불과 1표 차이로 <아내와의 칩거>가 준우승했다는 거. 작가는 1971년에 이 두 작품을 묶어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2013년에 창비가 이 책을 정병호 교수에 의뢰해 우리나라 초역, 자사의 세계문학전집 22번으로 출판했고 이후 7년이 더 흐른 2020년 82세의 후루이 요시키치가, 숟가락 놨다. 이로부터 5년이 더 지나 드디어 쇤네가 읽었습지비.

  일본의 문학평론가들은 1960년대 학생운동과 기타 등등 전투적 주장들이 시새푸새해진 반동으로 1970년대 초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의 시대를 ‘내향의 시대’라고 하는 모양인데, 다 그렇듯이 상당기간 다분히 정치적 구호에 복무하던 문학이 이제 인간 개인의 내면과 실존 같은 것을 ‘다시’ 들여다본 시기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듯하다. 말 잘했네. “다 그렇듯이.” 특히 예술이란 게 다 그렇지 뭐. 이쪽으로 기울었던 반동으로 저쪽으로 돌아서고, 또다시 이쪽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 그게 사조 아냐? 당시 이 사조 ‘내향의 시대’의 선두에 후루이 요시키치가 있었고, 그의 대표작이 <요오꼬>와 <아내와의 칩거> 정도라고 이해하면 딱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에 당선, 차선한 작품이라 그런지, 다 읽을 때까지 이런 정보는 몰랐는데, 읽으면서 거 참 대단하군, 쥐뿔도 모르면서 감탄했다는 것은 숨길 필요가 없겠지. 무지하게 헛갈리는 묘사. 섬뜩한 감정, 심리의 포착 같은 것들. 이 가운데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요오꼬>만 소개한다.


  첫 장면. 도쿄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지만 여름 방학 이후로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히키코모리 S가 웬일인지 196X년 10월 중순에 등산을 가 오후 한 시경 K봉우리 정상에 섰다. 그런데 때를 맞춰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온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로 하고 O계곡으로 하산, N계곡과 합류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 지역이 험해 조난 사고도 잦은 곳이다. 사흘간의 단독산행을 마치는 마지막 하산길. 아직 여물지 않은 젊은 남자인 S 앞에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여자 한 명이 보인다. 이 여자가 요오꼬. 독자는 이 장면에서 요오꼬가 외롭게 사는 산골처녀로 여기기 십상이다. 196X년에 젊디젊은 여성 혼자 산행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고 더구나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물끄러미 조그만 돌탑을 바라보느라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이 워낙 자연스럽게 읽혀 여지없이 산골 아가씨로 여길 수밖에. 하여간 S가 보기에 요오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듯 비치고 그러면서도 사람의 얼굴만 가지는 으스스한 기운 때문에” “선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표정까지 깨끗이 씻겨 없어진 듯 얼굴이 허옇게 떠 있는 것이 “울다 지쳐 마당 구석에서 웅크리고 돌멩이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이의” 것과 비슷한 느낌.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저것이 사람인가, 구미호인가 싶었을 텐데, 일본 사람이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몰랐을 것 같다. 그러니 으스스했고, 걷다가 우뚝 서서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이때 외모 묘사가 나온다. 소녀 같은 몸집, 배낭을 등에 맨 채 살구색 아노락 점퍼를 입은 돌보아야 할 환자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 S는 요오꼬가 자기보다 서너살 더 많을 것처럼 보인다. S는 요오꼬를 부축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요오꼬는 아마도 계곡이 합쳐지는 합수골에서 탈진해 무려 세 시간 넘게 그런 상태로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S가 앞에 서고 요오꼬가 그를 따르며 내려오는데 요오꼬가 말하기를 자기가 꼼짝 못하고 앉았던 그곳의 정황이:

  “예를 들면 얕은 잠 속에서 누군가가 현관문을 반복하여 두들기고 있는 것을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 뭐라 표현할까, 그것을 한덩어리의 생각으로 파악하기가 아무래도 되지 않아 속이 타고 답답해서 잠자리에서 몸을 비비 꼬는 듯한, 그러다 멍해져버리는 듯한, 그런 식…이라고” (p.15)


  드디어 산 기슭의 작은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신사로 가는 입구에 작은 현수교가 놓여 있다. 그런데 요오꼬는 이 작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고. 자꾸 아래쪽에서 뭔가가 발목을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S는 화가 났다. 여태 요오꼬 때문에 하산 시간이 늦어져 이제 도쿄로 가는 기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건만 작은 현수교를 건널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으니.

  “이런 다리를 혼자 건널 수 없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산에 올 수 없어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그건 고사하고 자신감을 잃어 길거리도 만족스럽게 걸을 수 없어질 거예요.”

  이 대목에서 독자는 얼른 이들의 대화 세 도막을 메모한다. 작은 일이 아닐 듯 싶다. 복선 아닐까?

  가까스로 둘은 기차를 타는데 성공했고, 기차에 타자마자 요오꼬는 잠에 빠져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이때까지 여자의 이름이 요오꼬인지, 남자가 S인지 서로 모른 채.


  석달 후. 다음 해 1월. 장소는 도쿄의 전차역 플랫폼.

  전차를 타고 가던 요오꼬의 눈에 건너편 플랫폼에 서서 반대방향 전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S가 보인다. 득달같이 전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창문이 뚫린 2층 통행교를 건너 S를 향해 뛰어가는 요오꼬. 마침 도착한 전차에 탑승하려는 S 앞에 도착해 그의 오른팔 팔꿈치를 가볍게 쥐었다. 하얀 코트를 입은 소녀가 S에게 말한다. 언제였죠? 제가 대단히 신세를 졌습니다.

  일본 사람한테 신세를 졌다는 건 우리 사정하고 좀 다르다. 얘네들은 남에게 신세 또는 폐를 끼치는 걸 지극한 실례라고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갚으려 한다. 천 년에 이르는 무신정권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여간 S는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넓게 퍼져버릴 듯한 불안정한 느낌이 드는 여자를 만난 일이, 마치 빗속에서 고양이를 안았다가 그냥 두고 온 듯한 기분과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산행 이후에 계곡에서 있던 일이 자주 생각나고, 이 일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S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둘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앉는다. S는 앞에 앉은 여자가 그때 거기서 자살할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잠깐 짐작해본다. 당시 창백하고 칙칙한 정기를 발산해 희미한 불쾌감을 주던 여자. S는 자살자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노인도, 미성년자에도 속하지 않는 창백함에 휩싸인 인물일 것이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요오꼬가 말한다. 당시에 고소공포증이 있었다가 현수교를 건넌 이후에 없어졌다고. K 봉우리 정상까지 오른 여자가 고소공포증이라니. 요오꼬는 높은 장소가 아니라 계곡 합수골까지 내려와서야 고소공포증을 느꼈단다. 이제 내가 메모한 것 가운데 남은 건 과연 요오꼬가 길거리를 만족스럽게 걸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잠깐 만나 대화를 하고 헤어지는 순간, 요오꼬가 묻는다.

  다음 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날까요?

  이렇게 둘은 다시 만나고, 또다시 만나 연인이 된다. 히키코모리 전력이 있는 S와 틀림없이 신경정신과 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요오꼬. 이들의 사랑과 질병은 어떻게 발전하고 전개될지,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라. 나는 흥미롭고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호 불호가 갈릴 작품일 듯해서 당신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머뭇거려진다. <아내와의 칩거>도 소품인 동시에 명품이다. 후루이 요시키치의 다른 작품은 왜 번역해 나오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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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예전에 재미나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아내와의 칩거>는 요즘 폴스타프 님 생활 아니십니까? 그래서 더 공감을...?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2-11 15:3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이구 미워라. 다 들여다 보고 계시는구먼요! ㅋㅋㅋ
 
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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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오츠의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에 출간했으니 이이가 여든다섯 살이었다. 열두 편의 단편소설 안에 초단편도 몇 편 있다. 평생 장편소설만 60편, 중편 정도의 노벨라가 11편, 무수한 단편소설을 쓴 소설공장 공장장 오츠. 《제로섬》을 읽으면 오츠가 은근히, 평생 퓰리처 상을 받고 싶어했던 것 같다. 즉, 퓰리처 상 후보로만 죽자사자 올라가고 거기서 미역국도 마셔보고, 바나나 껍질도 밟아보고, 김치국물 벌컥벌컥 자셔보기도 했지만 딱 한 가지, 상을 진짜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평생 하루에 몇 시간씩 소설을 쓰고, 그게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솔찮게 돈도 벌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한 시절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면 만족을 좀 해도 좋을 것을. 하기는 사람 욕심에 끝이 어디 있나. 많은 작품을 썼으니 시도하지 않은 장르가 없겠지만 나는 이 가운데 <사토장이의 딸>을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거 같다. “~거 같다”라고 쓴 건, <사토장이…> 읽은 지 오래됐고, 함부로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오츠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시지>도 인상에 남아 있다.

  내가 읽은 오츠의 작품 속 남자들은 가끔 여성혐오자도 있지만 또 가끔은 진실하고 순진하고 용감한 경우도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만큼 들어 인생의 황혼에 선 오츠는 그동안의 유행을 좇아 거의 마지막 책인 것처럼 보이는 《제로섬》에서 남자들, 출연하는 모든 남자들이 백인인데 그들 모두 노골적인 괴물이거나, 똥덩어리거나, 실수투성이거나, 패배자이거나, 비열한이다. 작년에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다는 거다. 이렇게 세월이 변했다고. 안 그러면 책이 덜 팔리는 모양이라고.

  오츠는 기본적으로 고딕 그로테스크 작가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솔직한 소감은, 너무 나이가 들어 쓴 글이라는 것. 특히 고딕을 쓰려면 뇌가 팽팽 돌아야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다. 사실 벌써 은퇴를 하고 명예롭게 뒷방에 앉아야 했던 건 아닐까. 오츠를 위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람 사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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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오츠가 쓴 고딕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고요;;

Falstaff 2026-02-10 15:23   좋아요 0 | URL
그쥬, 그쥬? ㅎㅎㅎ

yamoo 2026-02-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뽈님의 근래들어 최고로 짧은 독후감이네욤~~ㅎㅎ

Falstaff 2026-02-10 15:23   좋아요 0 | URL
읏, 그렇군요. ㅎㅎㅎ
 
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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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머니의 자서전. 그러면 화자 ‘나’는 작가 또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상의 인물일까, 작가 또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상의 인물의 어머니일까? 화자 ‘나’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테르 리처드슨. ‘나’의 어머니 이름은 수엘라 클로테르 데바리외.

  ‘나’의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수녀원 문 앞에 버려졌다. 프랑스에서 온 원장 수녀는 아이를 받아들여 이름을 ‘수엘라’라고 짓고, 자기 이름을 뒤에 붙인 다음, 자신의 성姓을 좇아 데바리외라 했다. 도미니카 연방의 앤티가 섬은 오랜 세월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18세기 들어 영국 연방에 흡수, 19세기 초에 영국의 정식 식민 연방에 속했다가 1978년에 독립했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프랑스어의 카리브 사투리, 영어의 카리브 사투리, 크롤어 등을 사용하는데, 좀 있는 사람들은 대개 표준 영어를 쓰는 것 같다. 내가 뭐 아나, 책을 읽어보니 대강 그렇더라는 것이지.

  서인도제도의 슬픈 역사는 당연히 백인 유럽인들이 섬에 발을 딛자마자 시작했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인들은 서인도제도에 플랜테이션 농장을 지어놓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평생 농업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카리브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할 수도 없었거니와, 항해시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들어온 유럽인들의 잔혹한 노예 경영과 이에 대항해 벌인 싸움에서 원래 카리브인들은 거의 전멸을 당했다. 그냥 전멸이 아니라 멸종에 비슷한 수준. 하늘도 양심이 있었는지, 유럽인들이 유독 도미니카 연방에서는 백년이 넘도록 느슨한 관심만 쏟아 극소수의 카리브 사람들이 이 섬의 오지에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인구의 3퍼센트, 약 3천명 정도라고 한다.

  화자 ‘나’의 어머니 수엘라 클로테르 데바리외가 바로 이 카리브 원주민 여성이다.


  서인도 제도에서 원주민을 멸종시킨 유럽인들은 황망했을 수밖에. 노예들을 다 죽여버렸으니 이제 사탕수수는 누가 심고, 소는 누가 먹이나? 그리하여 이들이 선택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들어 도미니카가 정식으로 영국 연방으로 편입되자 영국 사람이 많이 유입해 들어왔고, 이 가운데 스코틀랜드 출신 리처드슨 가도 있었다. 이 집안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아프리카 여성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다. 흑백 혼혈이라서 구리 같은 금속 색깔의 피부와 붉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아들 앨프레드 리처드슨은 커서 자신에게 백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티는 내지 않았지만 늘 염두에 두었던 듯 남과 차별을 둘 수 있는 돈과 권력을 좇아 반은 군인, 반은 경찰 정도의 지배층이 되었다. 이이가 화자 ‘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는 영국인에게 거의 멸종을 당한 카리브족 어머니와, 영국인과 아프리카인의 아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나마 숱한 ‘나’의 아버지의 아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계약 아래 태어났다. 하지만 세상에 나오는 순간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

  이제 홀아범이 된 아버지는 집에 빨래를 해주는 여자에게 두 보따리를 건넸다. 더러워진 아버지의 옷이 든 보따리, 그리고 하나뿐인 건 아니지만 유일하게 결혼해서 얻은 딸이 든 보따리. 세탁부 유니스 폴은 부모 어떤 쪽의 친척도 아니었다. 그냥 세탁부. 이미 여섯 자녀를 두었고, 막내가 아직도 아기라서 젖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 유니스는 ‘나’를 자식들과 똑같이 다루었다. 다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고 작은 섬에서 흑인 가족으로 살려면, 아니, 생존하려면 잔혹함이 유일한 재산이었고, 유니스는 자기 자식한테 하는 것처럼 ‘나’도 잔혹하게 대했다.


  아버지가 ‘나’를 버린 건 아니다. 유니스의 동네에서 여자아이로 유일하게 ‘나’를 학교를 보냈다. 문 하나와 창문 네 개가 있는 작은 건물. 남자 아이들만 있는 교실이었지만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법을 몰랐고 지금도 그렇단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어머니가 죽는 것뿐인데 ‘나’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선생은 감리교 선교사에게 교육받은 기독교 원리주의자 비슷한 아프리카 여자였다. 선생에게 자기 출신과 피부색은 굴욕과 자기혐오의 근원인 것처럼 보였다.

  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영어를 사용했고 아이들끼리는 프랑스 사투리를 썼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 아주 잘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늘 그러듯이 공부는 잘하지만 선생하고 문제가 생겼다. ‘나’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선과 악만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선생은 내가 공부를 잘하는 이유를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판단해서 그랬다. 어머니가 카리브 족이라서.

  이후 ‘나’ 수엘라 콜로테르 리처드슨이 일흔 살이 넘어 살 때까지 ‘나’는 언제나 옳았고, 정의로웠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으며, 세상 모든 것이 틀려 처먹었다.

  ‘나’는 검은 피부색을 가진 식민지 여자. ‘나’의 어머니는 꿈에서만 만났다. 흰 드레스를 입고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발뒤꿈치. 그 위로는 모른다. 딱 발꿈치로만 존재를 드러내는 어머니. ‘나’와 같은 이름을 썼던 카리브 원주민, 흑인, 식민지, 노예의 후예, 나자마자 백인의 수녀원 앞에 버려진 아이, 딸을 낳고 곧바로 생을 버린 여성.


  독자는 벌써 알아챘다.

  “내 어머니의 자서전” 내 어머니는 정말로 ‘나’의 어머니이면서 ‘나’이기도 하다. 도미니카 연방, 더 넓게 확장하면 서인도제도 또는 피식민지 시절을 겪은 모든 유색인 지역, 특히 검정 피부를 지닌 곳에서조차 버림받은 여성이다. 결국 이 자서전은 수엘라 클로데르 데바리외나 수엘라 클로데르 리처드슨이 쓰는 자서전이 아니라는 것을.

  일흔 살이 넘은 ‘나’의 기억. 그 속에는 단 한 명도 옳거나, 옳음과 비슷하거나, 옳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없다. ‘나’가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용감하다는 건 알겠는데, 과하다. 과해도 너무 심하게 과해서 내 눈에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글솜씨가 하도 뛰어나 독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아 버리는 것. 자신도 모르게 아예 처음부터 킨케이드가 의도하는 대로 완전히 수엘라 클로데르 리처드슨을 해석하고 이해한다. 아마 실제 살면서 주위에 수엘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내 삶이 피곤해질지 전혀 생각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나’ 수엘라의 사고는 언제나 자기가 우선이다. ‘나’의 가장 막강한 무기는 자신의 정체성, 버려진 식민지 검둥이 여성이라는 것. 그러나 ‘나’가 권세 있고, 부유하고, 오래 사는 남자가 정식으로 결혼해 얻은 딸, 도미니카 연방의 앤티카 섬에 사는 많은 여성 가운데 월등하게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교육받았고, 적어도 독자가 읽기에 여러 방면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산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백인 의사와 혼인해 오래도록 함께 사는 동안, 자서전을 쓰는 일흔 살이 되도록 거의 반세기를 카리브 족들의 커뮤니티에 가서 살았다. 가난한 의사 봤어? 아내보다 나이가 적어도 스무 살 많은데 늙도록 아내 괴롭힐 수 있는 남자 봤어? 얻어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사랑하지도 않는 돈 많고 늙은 백인과 결혼해 한평생 배부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으면서도 자신보다 불행하게 산 여성, 아니 여기서 젠더가 왜 나와, 불행하게 산 앤티카 사람들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한다. 모든 게 자기 중심이다. 사람도, 환경도, 역사도. 그러니 내가 ‘나’를 소시오패스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역시 문제는 문장이다. 독자를 현혹시키는 문장. 저메이카 킨케이드, 글 하나는 정말 기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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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6-02-10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시대에 역행하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폴스타프님,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스무 살 어린 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 이것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어쨌거나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Falstaff 2026-02-10 15:26   좋아요 0 | URL
수이 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돈 많고 늙은 백인과 결혼˝한 인간은 나이만 먹었지 철딱서니 없는 백인 의사가 아니고요 주인공인 수엘라였는데, 제가 좀 헛갈리게 썼나 봅니다. 수엘라가 백인 커뮤니티에 속할 수 있어서는 아닌 거 같고, 하여튼 백인 의사가 갖고 있는 복지 시스템과 완전하게 분리된 결정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 기억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설 전에 부모 성묘하러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수이 님 댓글 보고(도로 꽉 막혀서 밀릴 때입니다) 화들짝, 이제 집에 와서 답글 썼습니다. 운전 중이라 즉각 답신하지 못했습니다. 설 잘 보내셔요!!

수이 2026-02-10 16:17   좋아요 0 | URL
소설 읽어볼게요. 읽어봐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듯 싶어요. 하지만 뭔가 저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불끈 했습니다. 폴스타프님도 해피 구정!
 
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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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 사람이 웬 피라미드?

  알바니아보다 험난한 역사를 지닌 나라도 별로 없을 듯하다. 오랜 세월 주변 강대국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돌아가며 식민 지배도 받은 끝에 겨우 독립을 했건만 소비에트의 연방국으로 전락해 한 번도 역사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나라. 기꺼이 독립을 했지만 오랜 세월 독재자의 압제를 받아 나라는 찌그러져버렸다.

  알바니아는 오랜 세월 공산주의자 엔베르 호자가 통치하다가 1985년에 죽었다. 차라리 그가 5년만 더 살았으면 좋았을 지도 모르겠는데, 이때 알바니아는 여전히 소비에트의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독재자 호자가 죽어 거창한 규모의 국장을 치루었지만 독재를 종식하지는 못했던 거다. 호자가 죽고 3년 후에 그의 건축가 딸이 수도 티라나에 이집트의 피라미드 또는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조형물을 본따 ‘호자 박물관’을 흉물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기까지 가장 완고하고 억압적으로 국민을 통치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섰을 1990년에 이스마일 카다레가 굳이 파리로 망명을 선택해야 했을 정도로.

  가뜩이나 공산주의,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산주의를 빙자한 경찰국가 또는 독재적 국체를 혐오했던 카다레는 파리에 자리를 잡고 자신이 떠나온 알바니아의 독재 정권에 관해 뭔가를 말하고 싶었는데 이때 눈을 돌린 것이 호자 박물과의 흉물스러운 조형물의 원형. 이집트의 피라미드였다. 소설가 카다레의 머리 속에서 나름대로 피라미드와 전체주의를 연결하기 시작했던 것. 그리하여 소설 <피라미드>를 쓰고, 정말로 시간적 무대를 B.C 26세기로 하는 작품을 쓰기로 했지만 이 작품은 절대로 역사소설이 아니라 무대를 과거로 한 현대 소설로 보는 게 옳겠다.


  가장 큰 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푸왕. 그가 새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젊고 현명한 파라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잠깐 궁리해봐도 자기가 피라미드를 세워도 이집트한테 조금의 보탬이 될 거 같지 않다. 사각뿔 모양의 거대한 무덤이 도대체 이집트의 왕권과 백성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 오히려 건설을 위하여 거대한 국부가 쓰일 터인데 그것으로 백성을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지 않는가, 이건 계산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근데 문제는, 새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자기가 죽으면 묻힐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 안 하면 안 되는, 순식간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라고 습관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대신들이었다. 아버지 파라오 시절부터 늘 아부나 하던 간신 나부랭이들. 저것들을 싹 나일강의 악어밥으로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할까? 그럴까, 말까?

  그리하여 하루는 파라오 쿠푸가 왕실 점성가, 최측근 대신 몇 명, 늙은 고문관, 대제사장이자 건축 총책임자 등을 왕좌 아래에 집합시켜놓고 창 밖으로 까마득하게 사막 너머로 피라미드를 보며 말한다.

  “대감들, 꼭 피라미드를 만들어야 되겠소? 내가 파라오가 되면서 이미 신격을 얻었거늘.”

  속으로는 이런 말도 보탰을 거다. 반대만 해봐라, 즉각 죽은 목숨일 터이니.

  늙은 대신들 속에는 불여우가 쉰 마리씩 들어 있다. 파라오가 이 말을 꺼내기 전에 몇 주 전 이미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신전 두 곳을 폐쇄했고, 희생제의를 금하는 법령까지 반포해버린 바 있기 때문이다. 새 파라오는 틀림없이 총명하고 사리판단에 능한 청년이구나.

  이들은 서둘렀다. 대신 두 명은 왕태후 켄트가우스한테 즉각 면담을 신청하고, 한 명은 색주가로 납시어 꽐라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으며, 노신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몇 명은 고문서를 보관하는 지하실에 내려가 애꾸눈의 늙은 서기 아푸르를 만났다. 피라미드를 짓지 않는다면 자기들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며, 무엇보다 평생 보필한 이집트의 명운마저 보장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러니까 기원전 26세기의 이집트를 지금의 이집트와 같이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 5천년 동안 사하라 사막은 남쪽으로도 커졌지만 북진 속도도 만만치 않았다. 로마 시대. 당시 로마에는 백만 이상의 인구가 모여들어 농업생산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직 건설과 음모, 암살, 검투, 그리고 군비확장으로 날 새는 줄 몰랐다. 근데 이들을 어떤 수로 먹여 살렸을까? 내가 발견한 해답은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 속에 있다. 로마 시민들이 먹는 밀은 거의 전부 이집트 평야에서 수입했다. 수많은 군벌 가운데 가장 힘이 센 군단장은 게르만이나 갈리아 또는 저 동방의 시리아 너머에 있었을 지 몰라도 가장 세력이 막강한 군단장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집트에 주둔했다. 이들이 폭풍이나 기근을 핑계로 로마로 밀을 보내주지 않으면 수백만 로마 시민들이 쫄쫄 굶다가 폭동을 일으키고는 했으니.

  그러니까 기원전 26세기의 이집트는 주변 경쟁 국가, 경쟁 국가라기 하기도 어색하니 눈치 국가로 하자, 이런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가 갈수록 이집트의 부는 더욱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내력도 있을 터. 있기는 있지만 어디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니 현명한 늙은 대신들은 그걸 찾으러 묵은 파피루스 먼지가 가득한 지하 자료실로 내려가서 외눈박이 늙은 서기에게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이제 새삼스레 목소리를 가다듬어 부탁을 해야 했던 거였다.

  파피루스가 종이 같지 않아 군데군데 훼손된 곳이 많아 속 시원하게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교활한 대신들도 한 시절엔 총명한 두뇌를 가진 적이 있어서 드디어 피라미드의 본질과 존재이유 같은 근본 이념을 그나마 밝힐 수 있었다. 이 늙은 여우들이 정말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일까? 천만의 말씀. 오직 머리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파피루스에 적혀 있는 것을 새로이 발견했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무거운 것도 있는 법이다.


  이틀 뒤에 대제사장과 대신들이 파라오 쿠푸를 알현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직진했다. 파라오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존이시어. 피라미드 건설의 의도는 무덤이나 죽음과 관계가 없나이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숨기지 못하는 쿠푸. 하지만 대신들은 계속한다.

  피라미드를 건설하자는 것은 한 시절 위기의 시대를 맞았을 때 나왔다. 즉 파라오의 힘이 약화된 시기에 시작한 것이 피라미드 건설이었다는 것. 위기의 원인은 기근이나 늦은 나일강 범람 또는 흑사병 창궐이 아니라 나라가 너무 풍요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지금 보고하고 있는 이 원인을 밝혀낸 사관들은 전부 사형 또는 유형에 처해졌지만 자신들의 목숨은 보전해주기 바라면서 말한다고 주장하는 노신들. 이들이 계속 말한다.

  도가 넘치게 풍요로워진 이집트에서 사람들은 독립심과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파라오의 권위에 더 반항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앞서 경험했던 어떤 위기보다 심각해서 왕의 직접 수하에 있던 점성술사와 마술사인 소베코테프는 백성들의 안락한 생활을 떨쳐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이때 하렘의 환관 문지기 레네페레프가 나타나 말한다.

  이집트가 누리던 부의 일부를 고갈시킬 수단. 상상을 초월하는 과업을 시도하자고. 메소포타미아가 말도 안 되는 운하를 건설하느라 국부의 거의 전부를 쏟아 부어 미미한 이익만 내고 있는 것에 착안한 거였다. 하렘 문지기가 말하기를 일이 커질수록 백성의 체력소모가 심해지고 이에 따라 정신이 피폐되어 심신을 지치게 하고 파괴할 수 있는, 철저히 쓸모 없는 일이지만, 국체를 보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업. 게다가 언젠가는 마무리되지만 절대로 끝나지 않는 일이며, 결과물이 눈에 확실히 보일 수 있는 것. 그건 이집트의 제일 가는 건축물이어야 하며, 신전도 왕궁도 아닌 무덤이어야 한다고. 파라오가 즉위하면 동시에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한다. 완공과 더불어 기념비적 건축물은 백성 모두의 자랑스러운 랜드마크로 기능하다가 파라오가 죽으면 그 속에 안치하고, 안치와 동시에 새로이 파라오가 즉위하면 또다시 새로운 피라미드를 건설하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일이다.

  즉 왕권, 왕의 독재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국가의 부와 힘을 낭비하며, 건설 중에 국민을 감시하고 사찰하고 마음껏 고통을 줄 수 있는 장치로서의 피라미드. 이스마일 카다레는 현재의 알바니아를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이 소설 <피라미드>는 제1장만 가지고 충분하다. 이하 나머지 장은 모두 디테일에 관련되었을 뿐. 재미있는 비유, 풍자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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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2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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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극작가 이오네스코의 개인사를 조금 아는 게 좋다. 1909년 루마니아에서 루마니아인 아빠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서 나 곧 파리로 이사해 어린시절을 보냈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여겼으나 사춘기 무렵 다시 루마니아로 돌아가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쿠레슈티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다. 1909년생이면 애매하다. 1차 세계대전은 아마 파리 소년 시절에 이오네스코를 그저 스쳐 지나갔을 터이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의 영향을 받은 1930년대의 루마니아에서 20대 혈기방장한 청년 이오네스코가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오네스코는 그러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하고, 친구들 거의 모두 역시 다르지 않아 불화를 겪다가 다시 파리로 가버린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조금 알아두면 좋은 이오네스코의 개인사는 그의 학력이나 연애경험 같은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출생한 지식인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이 부당한 권력인 파시즘에 동조해 가는 것을 목도한 일을 말하는 거였다.

  애초에 파시스트 독재는 민주주의의 기치를 휘날리며 시작한다. 다분히 민족주의적 주장으로 민족 자긍심을 한껏 올려놓는 선전 선동을 통해 권력을 잡고, 이때부터 앞뒤 가리지 않는 애국주의와 비타협적 선동으로 자기 진영을 무한정으로 확보한다. 일종의 집단최면을 시전하여 투표율 90퍼센트 이상, 찬성률 80퍼센트 이상의 투표 결과로 공고한 권력을 쥔 다음, 국가의 모든 정책을 자신 또는 자신을 둘러싼 일단의 권력집단 마음대로 한다.

  이때 좀 골 때리는 일도 벌어진다. 옆에서 보면, 권력이 말도 되지 않는 주장과 선동을 하면, 평소라면 반대를 하거나 적어도 비웃어버리고 말 시민들도, 파시즘적 주장에 거부감 없이 동조하고, 어느새 그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거다. 이런 현상은 정치 성향이 높은 국가에서 한 정당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른바 압도적 지지당이 될 경우에는 여전히 발생한다. 우리나라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론이지. “나는 사람한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로 대통령이 된 인간은 자기한테 충성하는 사람만 골라 쓰다 골로 갔고,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가장 큰 핍박을 받은 정당의 지도부는 박과 전하고 거의 다르지 않은 입법권력을 사용하고 있다. 웃기지? 브레히트의 말대로 “파시스트들의 가장 나쁜 유산은 그들에게 저항했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파시즘의 씨앗을 심어놓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밖에 없어서 그러니, 그이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것들이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도 이런 현상을 말한다.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한 거친 물결이 도시에 흐르기 시작한다. 진짜 물 H2O가 아니라 사상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거대하고 폭력적일 만큼 거친 흐름이라고 여기면 딱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흐름이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이라는 것. 거의 누구나 안다. 옳은 방향의 흐름이 아니고, 건전하지도 않고, 여차하면 절망의 구렁텅이 또는 세계사적 폭망의 시절로 질주하게 될 것임을. 당연하지. 지금 이오네스코가 말하는 거칠고 폭력적인 흐름이 파시스트들의 창궐을 뜻하니까.

  이들 가운데 특히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단결을 위하여 엉뚱하게 그들과 어깨를 걸고 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기도 했던 유대인을 악의 노예로 콕 집어 극한의 탄압을 시도했다. 조금 있으면 수정의 밤이 있을 터이고 순정 게르만 예술만을 인정하기 위하여 온갖 예술품과 책을 베벨 광장에 쌓아놓고 불태워 버릴 것이며, 이에 절망한 이오네스코는 같은 해인 1933년에 나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루마니아를 떠나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처음부터 나치 파시즘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저 정신이상적 행위를 비판하고, 아니면 적어도 뜻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건만, 이들의 거친 선전과 선동에 시민들은 하나 둘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파시즘에 동조하는 속도가 더 가팔라지고 어느 새 많은 시민들은 스스로 파시스트 사무실을 찾아가 같은 일원이 되기를 자원하는 지경에 이른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혁명기를 거친 혁명가들의 놀라운 선동 방식을 그대로 배우고 발전시킨 파시스트들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는 시민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제 소수로 남은 외젠 이오네스코는 파시즘에 가담한 사람들을, 사람에서 코뿔소로 변신metamorphosen 하는 것으로 은유했다.


  1막은 지방의 작은 도시, 작은 광장이다. 카페와 가게가 있고 손님들이 모여 담소도 하고, 차도 마시고, 야채를 저쪽 가게에서 샀는데 될 수 있으면 우리 가게에서 사달라고 하는 등 정상적인 일상을 살고 있다. 이때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 또는 막 뒤에서 큰 짐승의 짓는 소리가 부르르르 들리기도 하고 파시즘의 폭주를 나타내기 위하여 많고 많은 짐승 가운데 무거운 코뿔소를 골라 무거운 짐승이 뛰어가는 둔한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군중들은 코뿔소가 한 마리였는지 두 마리였는지를 놓고 말다툼을 하기도 하며, 코에 뿔이 하나 있는 것은 아시아, 둘이 있는 것이 아프리카 코뿔소라는 등, 거꾸로 하나가 아프리카, 둘이 아시아 코뿔소라는 등 말다툼을 벌인다. 즉 이들에게 코뿔소는 북쪽 유럽지역에서 거의 보지 못한 동물이다. 당연히 익숙하지도 않은 덩치 큰 야수. 누구나 공감한다. 근데 어떻게 하다가 코뿔소가 거리에서 돌아다니게 되었을까?

  2막에서는 코뿔소가 늘어난다. 1장의 무대는 주인공 베랑제가 다니는 회사.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근무하는 그냥 보통의 회사인데 당연히 바쁘다. 아마도 출판 관계 회사인 것처럼 보인다. 근데 평소 성실하게 근무하던 뵈프 씨가 갑자기 몸이 아파 출근을 하지 못하겠다고 뵈프 씨의 아내가 근무시간 조금 넘어 찾아왔다. 뵈프 씨가 코뿔소로 변신해버린 거다. 세상에. 그렇게 마음 여리고 성실하고 근면했던 뵈프 씨가 코뿔소라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이때는 벌써 창밖에 내다보면 코뿔소가 떼로 질주해다닌다.

  2막 2장은 베랑제의 절친 장의 방. 1막에서 코뿔소가 아시아 산이니, 아프리카 산이니 가지고 말싸움을 해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베랑제가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기 위해 방문한 건데, 장은 침대에서 베랑제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 근데 정상이 아니다. 부르르르… 콧김을 자주 내뿜는다. 정의로운 남자 장이, 한 때 정의롭기도 했던 남자였지만 이제는 코뿔소로 변신하는 중이다. 그래서 베랑제는 온전한 양식과 정의감을 지니고 사는 장이라는 남자가 코뿔소로 변신하는 과정을 전부 목격한다.

  3막은 베랑제의 방. 놀랍게도 장의 방과 비슷하게 생겼다. 베랑제의 건강이 좀 언짢다. 이곳에 먼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선량하고 합리적인 성격의 뒤다르 씨가 베랑제한테 문병 겸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하자고 찾아온 거다. 직장에서도 여러 사람이 벌써 코뿔소로 변신했단다. 조금 있다가 같은 직장의 여직원이자 도시에 나타난 첫 코뿔소를 베랑제와 함께 목격한 데이지가 음식을 싸들고 베랑제의 방에 들어왔다. 아직 연인은 아니다. 이제 무대에 남은 인물은 오직 세 명. 관객은 파시스트 국가 안에서 여전히 양식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연상할 수 있다. 이들의 변신 여부는 각자 읽어서 알아 내시면 좋겠다.


  작품은 재미있다. 근데 희곡은 눈으로 읽고, 머리로 극장 무대를 연상하는 장르.

  2막 2장 장의 방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3막, 장의 방과 거의 비슷한 무대에 역시 비슷한 침대에 계속 누워 있는 베랑제. 두 명의 등장인물이 더해지지만 이들의 동선이 거의 없다. 방이 좁아서 그런가? 넓은 방이라도 마찬가지겠지. 이걸 어떻게 생동감있게 연출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콱 막혔다. 작품 자체의 재미와 은유와 언제나 재미있는 변신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대를 연출한다면 어떤 방식을 선택했을까, 이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더라는 거. 책 한 권 까다롭게 읽는다고? 근데 이게 희곡 읽는 진짜 재미. 휴대폰 앱 “북적북적”에 별점 4.5 눌렀다. 내 연출 상상력의 결여 때문이지 이오네스코의 작품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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