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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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개띠 작가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 북서부 항구도시 모스타가넴에서 경찰관 아버지와 중산층 주부 어머니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후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작가의 바이오보다는 알제리 현대사를 먼저 훑어보는 것이 좋다.

  오랜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해가 1962년. 알제리의 식민지 추락은 우리나라처럼 몇 위정자들이 식민국의 작위를 얻어가며 합의서에 도장 콱 찍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손에 얻기 위하여 알제리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부족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했다. 이 싸움에서 알제리인의 저항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에 잘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식민국으로부터의 해방 역시 (우리처럼)종전협정에 의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해방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절한 대가를 치룬 알제리는 그리하여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7년이 지난 1962년에야 독립국의 국기를 올릴 수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가해 전투를 하고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당연히 베테랑의 품격을 지킬 수 있었으며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 곳곳에 기념비의 암각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전할 수 있었다.

  알제리의 정식 국호는 알제리인민민주공화국. 사회주의 국가로 시작한 이 나라는 당연하게 국민해방전선(FLN) 일당독재를 유지했다. 초대 국방장관이었다가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부메디엔이 소련, 중국, 동유럽의 본을 받아 석유산업 등을 국유화하는 것은 물론 독재 장기집권을 확립해서 국제유가상승 등으로 1978년까지 잘 살다 갔다. 부메디엔 사후에 집권한 벤제디드 역시 높은 유가 덕택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85년부터 석유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국고가 비기 시작했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독재자는 정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망가지는 법. 1988년부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더니 1989년에는 일당제가 무너지고 이슬람해방전선(FIS)이 등장했다.

  다음해인 1990년에 치룬 총선거에서 해방전선이 의회의원 231석 가운데 188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다.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압승. 이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해방전선이 독재를 시작할 것이 확실한 처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FIS를 불법화하고 이들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반군세력이 무장이슬람그룹을 이루어 10년간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10년 후인 1999년에 대통령에 오른 부테플리카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사면하고 대신 해방군은 해산하여 내전의 종식을 맞았는데, 대 프랑스 독립 전쟁과 달리 내전은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재산을 빼앗는 등의 고통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저질렀다는 데 더 큰 상처를 낼 수밖에 없었다. 부테플리카 정부는 2005년에 이슬람해방군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해 그나마 남아있는 내전의 앙금을 지우려 했고, 실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쨌든 내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 일 이후로 내전에 관하여 논의하거나, 대화하거나, 입에 올리는 일은 암묵적으로 거부당하고, 백안시하고, 피해가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멜 다우드 역시 피가 끓는 10대 시절에는 이슬람원리주의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오랑 대학에 진학해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면서 원리주의의 폭력성이 지나치다는 걸 확인했는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히잡을 쓰기 시작하자 이혼한 경력도 있다. 이제 다우드는 확실하게 종교에서 멀어졌다. 그는 몇몇 원리주의 입장의 이슬람 지도자 이맘들에 의하여 사형선고인 파트와 선언을 받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슬람을 부정하며, 아랍 문자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그럼에도 계속 쓴다. <후리>가 2024년에 공쿠르상을 받았지만 알제리 내전의 참상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알제리에서는 출판은 물론 읽는 행위, 반입도 할 수 없다. 나도 알제리,하면 프랑스 식민전쟁과 독립전쟁, 그리고 용감한 축구를 하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 내전이 있기는 했으나 <후리>에서 읽을 수 있는 처참한 수준이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있었던 일은 언젠가 밝혀진다. 역사가 하지 못하거나 준비중일 때 가끔은 문학이 먼저 밝히려 애를 쓰기도 한다. 이 책이 그런 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후리. 브리태니커 사전에 “천국에서 독실한 무슬림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처녀” 또는 “정화된 아내” “흠 없는 처녀”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실제 생활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영혼. 그러나 후리는 조금 뒤로 미루자.

  주인공 오브. 2018년에 스물여섯 살. 알제리의 아름다운 항구 오랑에서 어머니 하디자와 함께 살고 있다. 직업은 미용실 주인. 길 건너 맞은편에 모스크가 있고, 젊고 잘생기고 정말 하늘에서 내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맘은 아쉽지만 이슬람원리주의에 입각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히잡도 쓰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니며, 몸의 여섯 군데에 한 문신 가운데 그게 드러나는 부위도 있어서 오브를 매우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다. 희생절에 맞춰 셔터를 내린 날 미용실 셔터를 부수고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쓸만한 것은 몽땅 훔쳐간 절도범의 뒷배에 혹시 이 이맘이 있는 건 아닐까 여길 정도로. 읽다보면 이맘이 시켜서 그랬다는 건 아니고, 강도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변호사 엄마를 두어 엄마가 출장을 간 사이, 전부터 사귄 동갑내기 어부 청년과 사랑을 해 몸에 수정란이 착상을 했으나, 청년은 그걸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으로 밀항한 후로는, 갔는지, 갔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임신을 했으니 이것 참. 그럼에도 오브는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딸이라 단정하고 ‘후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품의 제목이 <후리>가 된다.


  오브. 원래 이름은 오브가 아니었다.

  오브가 살던 곳은 하드 셰칼라. 언덕 위에 집이 있고, 건천이 흐르는 척박한 땅에 농장을 지어 살았다. 부모와 언니. 너무 오래 전이라 파편 같은 기억뿐이다. 언니가 물잔을 가만히 들고 있으면서 물잔에 별을 담아 건네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눈을 가리고 숨바꼭질을 하던 것도. 그리도 당연히 그날.

  1999년 12월 31일.

  산에서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수염 난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해방군이라도 하는. 수염 난 사람들은 하드 셰칼라 주민 약 천 명을 건천으로 데려갔으며, 오브의 가족들도 언덕 위로 데려 올라갔다. 내전이 끝나는 날. 그러나 모든 원리주의자들이 전쟁을 끝낸 건 아니었다. 아니면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마을을 통째로 점령하고, 종교적 판단에 의하여 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에게 파트와를 선언했는지, 아니면 저 태초의 이브라힘처럼 자기 아들을 목 베어 신에게 바치려 했는지, 이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목을 베는 참수를 말한다.

  한 남자가 다섯 살 먹은 오브의 머리를 잡았다. 칼이 예리하지 않았는지, 남자가 초보였는지, 아직 완력이 덜 성장한 청년이었는지, 칼날은 오브의 왼쪽 귀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귀 아래까지 부욱 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지나가며 후두와 성대와 식도와 혀를 갈랐음에도 효과적으로 경정맥과 경동맥을 절개하지 못한 상태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브. 오브는 아프지 않다. 아마도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었거나 죽음 바로 이전의 실신 비슷한 상태였는지 모른다. 눈에 옆에 누워 참수의 칼을 기다리는 언니가 보인다. 그런데, 언니가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무엇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눈을 감는다. 오브는 죽어가면서 무슨 뜻일까 잠깐 생각하고는, 절대 다시 뜨지 않을 눈을 감는다. 절대, 절대로 뜨지 않을. 적어도 이곳 언덕의 건천에서는.


  몇 시간 후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목의 절반이 잘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오브의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암전. 어딘가 판판한 곳에 실려지고, 몸이 움직이다. 누군가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 것 같다. 또다시 암전. 그곳은 가장 가까운 도시, 그러나 멀리 떨어진 동부의 작은 도시 렐리잔에 있는 병원이었으며, 귀에 자기 말이 들리냐고 묻던 여자는 지금 오브의 두번째 엄마를 맡은 용감한 하디자였는데, 또다시 붉고 푸른 빛과 함께 몸이 흔들린 다음에, 오브는 성대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것 말고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턱 아래로 이어지는 17센티미터의 꿰맨 자리 때문에 오브는 위고의 <웃는 남자>와 위치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웃는 소녀>가 되고 말았다.

  오브는 두가지 언어로 말한다. 밤night 같은 언어와 초승달 같은 언어. 안의 언어와 밖의 언어. 소위 말하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다. 디즈니 만화 도널드의 목소리와 비슷한 걸 작은 소리로 낼 수는 있다. 호흡하기 위하여 인후에 박은 튜브를 통해 숨도 쉬고 말도 나온다. 일주일에 한 두 번 튜브를 갈려면 소독액으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 먼저 목에 꽂힌 튜브를 뺀 다음 완전히 살균한 튜브로 갈아 끼운다. 혀와 식도에 큰 문제가 있어서 음식은 액체 상태로 갈아 그저 목을 넘길 뿐이다. 이렇게 21년을 살았다. 그래서 2021년이 됐고, 스물여섯 살의 미혼 임산부가 되었으나 아직 엄마 하디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오브는 저 변두리 의사의 처방을 받아 매우 위험한 임신중절약 세 정을 가지고 있어, 자기 속의 후리를 없앨 작정이다. 엄마 하디자가 자신의 성대 수술 가능 여부를 묻기 위하여 브뤼셀의 외과의사에게 간 며칠 안 되어.

  그러다가 마음을 바꾼다. 아직도 계속되는 종교와 남자들의 폭력, 비이성적 사고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게 틀림없다. 자신한테 저질러졌던 폭력, 범죄, 참수라는 형태로 드러난 이브라힘의 희생제의가 있던 곳, 하드 셰킬라에 가 보아야겠다. 마음먹은 오브. 이슬람 국가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 여행을 해? 그것도 희생절에? 결코 쉽지 않은 길.

  슬픈 이야기. 슬픔이 슬픈 이야기로만 되어 있으면 진정한 비극이 아니다. 좋은 비극이 되려면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어야 하는 법. <후리>가 그렇다. 슬프고 아름답다. 하기 힘든 이야기를 용기 내어 드러낸, 그래서 극동의 한 독자가 지역의 아픈 내력을 알게 해준 작가가 고맙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에 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문학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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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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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석좌교수가 쓴 작품 해설을 조금만 빌려오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데이먼 갤것은 196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입법수도인 케이프타운에서 대학을 다니며 드라마를 전공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1963년생 토끼띠가 유난한 것처럼 남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인지 이들은 세계적인 암덩어리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황금 같은 20대에 넬슨 만델라가 27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되고 몇 년 후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하여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들은 그들의 피부색과 관련 없이 모두 일정부분 아파르트헤이트 적 요소를 띨 수밖에 없다고 왕교수는 주장한다. 일찍이 존 쿳시 번역 등으로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전문가가 쓴 해설이니 믿어 마땅하리라.

  그저 시간이 이들의 상처를 아물려 이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 바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을 낸 문학사상 뿐만 아니라 왕은철 교수까지 작품의 제목인 “약속”을 스와트 가족이 하녀인 살로메에게 살로메와 아들 루카스가 살고 있는 비뚤어지고 지붕이 새는 방 세 칸짜리 낡은 집의 소유권을 주자고 가족,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아내 레이철의 죽음의 침상에서, 레이철의 요구에 남편 마니가 확약했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물론 문학사상과 왕은철의 주장은, 작품 속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이 “약속”이 흑인 하녀에게 다 쓰러져가는 집을 증여하기로 부모 들이 합의한 것이라는 막내딸 아모르의 굽힘 없는 증언 때문에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엄마 레이철이 죽은 후에 남은 가족, 아빠와 아들 안톤, 딸 아스트리드와 아모르. 아빠와 아스트리드는 아예 처음부터 이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아빠), 무시하기로 마음먹거나(아스트리드),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결국 뭉개버리거나(안톤),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의 약속을 지키려 든다(아모르).

  그러면 작품 속에 실제 약속의 장면은 어땠을까? 39~40쪽에 나온다.


  [나한테 약속해 줄래, 마니?

  그래, 약속할게.

  난 정말이지 살로메가 뭔가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모든 일을 해줬잖아.

  알겠어. 아빠가 말한다.

  당신이 꼭 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직접 말해 줘.

  꼭 약속을 지킬게. 아빠가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1986년 엄마가 죽기 두 주일 전에 막내딸 아모르가 집이 잘 보이는 불탄 나무 아래 바위가 겹친 곳에 웅크려 앉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는 주장하는” 부부간의 약속 전부이다. 일종의 마지막 유언을 마친 엄마와 아빠는 “마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처럼” 서로 엉겨 울었다. 아모르는 이 장면을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즉 기독교의 신적 존재를 걸고 한 약속 정도로 깊게 각인한다. 게다가 이 “약속”을 들은 장소는 아모르가 전에 벼락을 맞아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전기 충격으로 새끼 발가락 하나를 잃은 곳이다. 그래서 열세 살의 아모르한테 이곳에서 들은 약속이 더욱 성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다. 살로메에게 줄 “뭔가”를 더욱 크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바위 틈에서 내려와 걷다가 또래 흑인소년 루카스를 만난다. 살로메의 아들. 41~42쪽에 이들의 대화가 나온다.


  안녕, 루카스, 그녀가 말한다.

  어떻게 지내, 아모르.

  네 엄마 일은 정말이지 안됐어, 그가 말한다.

  (중략)

  이제 너희 거야, 그 집. 아모르는 말한다.

  루카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본다.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그 집을 너희 엄마에게 주라고 했어. 기독교인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

  우리 집이라고?

  그건 이제 너희 집이 될 거야.


  독자 나는 39~42쪽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 난리 났군.”

  내가 짐작한 난리는 아빠가 죽어가는 아내 레이철에게 하녀 살로메한테 “집”이 아니라 “뭔가”를 주겠다고만 약속했음에도, 살로메와 어린 루카스는 주인 나리가 자기들한테 집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기독교인이니만큼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것 같았다. 즉 “약속”이 아닌 “오해”가 이렇게 시작하리라 여겼다는 말이다. 아모르의 거짓말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아모르가 자기 마음대로 확대시킨 약속이 진실인 양 말했기 때문에. 말이 곧 또다른 약속이니까.

  아빠 마니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죽음의 침상에서 나한테 유언 비슷하게 요구한다. 살로메가 무엇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이럴 때, 당신 같으면 “싫어, 안돼.” 할 수 있겠어? 아마도 틀림없이 그저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지 않을 심정으로 “약속할게.” 했을 것이다. 만일 정말로 살로메의 집을 그냥 주자고 했을지언정. 방을 나선 순간 잊을지라도. 그리하여 마니가 장례식 후 식사 자리에서 전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갤것 또는 아모르는 끊임없이 말한다. 아빠가 엄마한테 약속했다. 살로메한테 살로메와 루카스가 살고 있는 집을 주기로. 거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스와트 집안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지붕이 새고 비뚤게 서있어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을 주는 아주 사소한 적선일 수도 있는 약속. 아니, 갤것이 말하는 게 아니다. 아모르가 주장하고, 선한 루저 안톤 오빠가 동의하고, 나머지 가족과 친척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약속이다. 갤것은 그냥 그걸 백지에 옮겼을 뿐이다.

  다시 왕교수의 해설.

  “(갤것이)대학에서는 드라마를 전공했다. 그의 소설에서 희곡이나 영화에서 쓰이는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는 이유다.”

  왕교수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했을까?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다중 시점 작품이라서? 문장이 조금 별나서? 그건 요즘 작품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건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이쪽으로 포인트를 맞추는 것 같다.

 과감하게 추리하자면, 갤것은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오독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아내 레이철과 남편 마니의 대화는 큰 괄호 […] 안에 들어 있다. 아모르가 부부의 대화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집 밖에 있는 바위 틈에서 유리창 안쪽의 엄마 아빠가 나눈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즉 큰 괄호 안의 내용으로 “인식”했다. 어쩌면 아모르는 대화를 나누는 부모의 입모양과 대화 후에 서로 울며 포옹하는 장면 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약속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만. 어쨌건 아모르가 주장하는 약속은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거짓을 엉뚱하게 진실로 인식하고, 혹은 거짓임을 알지만 자기가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한 반작용으로 자신 혼자 그걸 지키려 평생을 외롭게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로.

  그러니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독자여, 작가에게 휘둘리지 말자.


  이미 이 책을 읽은 분은 모르겠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이 갤것의 <약속>을 선택하시려면 내가 주장하는 바를 꼭 기억하셨다가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아모르는 “살로메가 무언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걸 자기 마음대로 집의 소유권으로 확대해 그 가족으로 하여금 믿게 했거나, 아예 듣지 못하고 보기만 한 것을 그렇게 인식해 그걸 약속이라고 평생 알고 살았거나, 마지막으로, 스스로도 자기가 말한 약속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남은 생을 그렇게 곤고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만일 내 주장에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열린 결말을 가진 소설로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작품일까? 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 스와트 집안 사람들이 누구 한 명 빼놓지 않고 전부 선병질 적 기질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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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2-27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하면서 이렇게 궁금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건지, 아님 오독한건 아닌지 하고요.
만약 이 책 읽으면 저도 그 부분에 대해 꼭 생각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2-27 15:25   좋아요 1 | URL
넵. 꼭 읽어보시라고 말씀 드리지 못하겠지만 혹시 기회가 닿으면 한 수 훈수 바랍니다. ^^

잠자냥 2026-02-27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에 쓴 리뷰를 살펴보니 전 이 부분을 이렇게 썼더라고요.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 마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이 아플 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살로메에게 무언가 꼭 주고 싶다고. (....). 그런데 이 장면을 때마침 그 방 안에 있었던,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아모르는 가족 중에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 소녀가 목격한 것이다. 아모르는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한 그 약속을 아빠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또래인 루카스에게 장담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저도 이 작품 읽으면서 내내 소녀가 집을 주겠노라 약속했다고 믿어버린 게 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자기 말을 지키려고 더 그렇게 산 게 아닌가 싶었어요. 작가는 약속이 진짜로 존재했든 아니든, 약속을 지킬 의무와 상관없이 그 집이 있는 땅은 본디 흑인들의 땅인데 백인인 너희들이 약속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 같았고요. 암튼 제 생각입니다.

Falstaff 2026-02-27 15:29   좋아요 0 | URL
자냥 님은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했잖아요.
문제는 쇤네 경우에.... 어? 이걸 약속한 게 아닌데... 이거에 너무 함몰되다 보니까 진짜 주제를 계속... 뻔히 알면서도 놓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죠.
출판사와 왕교수는 무슨 마음으로 저런 카피를 날렸는지 거 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잠자냥 2026-02-27 15:38   좋아요 0 | URL
집을 준다고 했다고 아모르 옆에서 들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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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롤드 핀터는 1930년에 동런던에서 동유럽 출신 유대인 가족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아쉬케나지이다. 청소년 시절인 1942년부터 48년까지 6년 동안 동 런던에 있는 해크니 문법학교에 다니며 영어, 연극,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졸업 후에 왕립연극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중도에 때려 치운다. 아마도 징집영장을 받았고, 이에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해 징역의 갈림길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벌금형만 받고 끝낸 다음에 다시 몇몇 연기 학교에서 배우 수련을 받으면서 배우와 극작가를 겸한다. 인생의 절정기를 향해 질주하는 시기가 와서 자연스레 사랑도 하고, 결혼도 몇 번 하고, 아이도 낳고, 연극도 적극적으로 해서 실질적으로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생일 파티>를 공연해 대박을 친다.

  핀터가 비록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그리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영국 역시 골수 우익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런던 사람들이 “히틀러한테도 배울 게 있다니까!” 하며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장면은 소설책에서도 몇 번 나왔을 정도였으니. 핀터도 해크니 거리에서 이들한테 린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일 폭격기에 의한 공습. 이런 폭력을 당한 경험 또는 상처는 핀터의 작품 속 특유의 “폭력과 공포, 위협” 같은 요소를 갖게 만들었단다.

  좋다. 근데 문제는 이이의 작품이 영국의 국가대표급 “부조리 연극”이라는 거다. 부조리극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래서 절판된 핀터의 책을 도서관에서 구해 읽어본 것인데, 사실 “부조리극” 딱 한 가지 조건만 가지고도 실제 공연을 보지 않은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가 무지하게 힘들 터, 여기에 핀터 특유의 폭력과 공포, 위협을 팍팍 가미한 “희극”이기까지 했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정직하게 얘기해서, 나는 두 희곡을 읽으며 이것이 희극, 코미디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읽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도무지 영국의 국가대표급 부조리극은 아닐 거 같은데, 뭐 이렇게 궁시렁거리다가 작품을 다 읽고 해설을 들춰보니, 아이쿠, 다시 읽어야겠구나, 뒤통수 팍, 얻어맞은 거 같았다. 그렇다고 진짜로 다시 읽어볼 정성까지는 없고, 이미 읽은 것을 뇌 속에서 재배치했을 뿐이니 그게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 감상일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극작가의 작품에 대한 독후감은, 아 어떡하지? 안 쓸 수도 없고, 그래 생각나는대로 조금만 써볼 터이니 읽는 분들도 그냥 가비얍게 훅 한 번 읽고 지나가시라.


  희곡 두 편이 실렸다. <벙어리 웨이터 Dumb Waiter>와 <핫하우스 Hothouse> <벙어리 웨이터>를 위주로 쓰겠다. 앞쪽에 실리기도 했고, 조금 더 주목받은 작품이다. 1960년 1월에 햄프스테드 연극 클럽에서의 초연이 끝나자마자 영국왕실의 요청으로 왕립극단이 3월에 다시 공연했을 정도로 주목받았나 보다. 우리나라 청와대에서는 연극 공연 안 하지? 하긴 대통령이 뭐간디, 가서 보면 되지.

  먼저 “벙어리 웨이터”가 뭘까? 장소는 지하실 방. 지하실의 특징은? 창문이 없다는 거. 즉 들어온 문이 아니라면 이곳에서의 탈출이 아예 불가능한 장소라는 의미다. 벽쪽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그래서 등장인물도 단 두명이다. 벤과 구스.

  벤은 왼쪽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고, 구스는 오른쪽 침대에 앉아 다분히 부조리 연극 답게 이유 없이 신발끈을 묶었다가 풀고, 풀었다가는 구두 속에서 난데없이 성냥갑을 꺼내기도 하고 담배갑을 꺼내기도 한다. 부조리극 좀 읽어본 독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성냥과 담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관단총이나 장갑차 정도가 신발 안에서 나와야 이게 뭐지, 할 수준이지 그것 가지고는 뭐.

  이들이 이 지하실 방에 들어와 뭔가 먹기도 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무엇을 먹으면 일정 분량의 잉여분을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그래서 구스가 무대 왼쪽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퍼더덕 푸닥거리 해산을 한 번 하고, 매화타령을 했으니 쪼그려 쏴 식 수세식 변기의 줄을 당겼고, 줄을 당겼지만 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구스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다시 등장한다. 찜찜하겠지? 그래서 또 화장실에 들어가 줄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번에도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독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 두 출연자들의 직업이 무엇인고 하니, 살인청부업자다. 벤이 신문기사를 구스한테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기사인가 하면, “87세의 노인이 길을 건너려고 한 거야. 그런데 차들이 너무 많았지. 알았어? 노인은 그 길을 어떻게 건너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는군. 그래서 화물 자동차 아래로 기어갔다는 거야. 화물 자동차가 출발했고 그를 치었대.”

  이런 식으로 주로 죽는 이야기. 사람에 국한하지 않는다.

  “8살짜리 어린애가 고양이를 죽였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 응? 8살짜리 어린애가 고양이를 죽이다니! 남자아이가 죽였대? 여자아이였어. 여자아이가 어떻게 죽였어? 그 아이는― 쓰여져 있지 않은 걸”

  “잠깐만 기다려봐. 이렇게 쓰여 있어 ― 11살 된 여자아이의 오빠가 공구실에서 그 일을 목격했다.”

  노인의 죽음. 여자아이가 고양이를 죽인 일을 벤이 마치 중요한 사건인양 구스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사실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라서 여기까지 진도가 나갔건만 형광등 비슷한 독자인 나는 이들의 직업이 청부살인자인 줄도 몰랐고, 이 드라마가 심지어 “희극” 코미디인 줄도 몰랐다. 그러니 이게 재미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만일 정말 무대극이었다면 배우들이 나누는 대사의 억양이나 말투, 발음 같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행위의 과장 같은 걸로 벌써 몇 번의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희곡은 드라마를 보는 행위가 선행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아, 그러나 내가 사는 촌구석에서 해럴드 핀터의 작품이 무대에 오를 날이 있기는 있을까? 땅 팔고 (땅? 땅도 있어? 아, 그건 없어서 못 팔겠다), 아파트 팔고, 주식 팔고, 기타 등등 다 팔아서 서울 18평 아파트 전세라도 들어갈까?


  궁상은 이만큼 떨었으면 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벙어리 웨이터 Dumb Waiter가 뭘까? 벽에 달린 작은 엘리베이터. 주로 음식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을 주방에서 만들어 올려 보내거나 내려 보낼 때 쓰는 작은 음식 이송용으로 쓴다. 저번에도 얘기했는데, 앨리 스미스의 <호텔 월드>에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장난으로 거기 들어갔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사하는 그런 거. 동네 웬만한 2층짜리 중국집 가도 짜장면, 탕수육. 이거 타고 올라온다.

  살인청부업자 벤과 구스한테도 이 벙어리 웨이터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명령지가 도착한다. 이럴 때마다 두 킬러들은 신경이 곤두서겠지? 근데 엉뚱하게도 벙어리 웨이터 말고 무대 오른쪽의 방문 아래로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밀봉된 봉투. 벤의 지시에 따라 봉투를 뜯어보는 구스.

  뭐가 들었어? 성냥이야. 성냥? 응. 이리 줘봐.

  아까 구스가 신발끈을 묶었다가 풀었을 때 신발 속에 성냥갑이 들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등장하지 않는 빅보스 또는 자신들의 정보를 알아낸 적들이 성냥 몇 개비를 봉투에 담아 준 거다. 빅보스라면 큰 문제는 아닌데 만일 이들이 성냥갑만 있고 성냥개비는 없다는 걸 알고 마치 적선하듯 성냥개비 열 개를 준 거라면? 이거 심각한 일이다. 희극에서 말이지. 긴장해야 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불안과 폭력의 공포를 느껴야 마땅하다. 코미디니까. 근데 문제는 아직도 독자인 내가 이 드라마가 코미디인 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

  이런 상황이니 극이 재미있고 없고 따지기 전에, 도대체 지금 두 등장인물이 어떤 내용을 연기하고 있고,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는 거다. 지금 이들이 머물고 있는 지하 안가가 버밍엄이라서 축구팀 웨스턴빌라와 토트넘 훗스퍼의 시합을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만 따따부따 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성냥개비 열 개라니.


  그래, 그래. 다시 읽어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기는 하겠다. 좋아, 시간도 많은데 그렇게 해보지 뭐. 하지만 그렇다고 독후감도 다시 쓰겠다는 건 아냐. 같은 책을 읽고 느낀 걸 다시 쓰는 일이 여간 피곤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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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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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읽지 말든지, 읽더라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많은 팬들은 우리나라 출간 기준으로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를 먼저 읽고 약 1년 후에 《사이버리아드》를 읽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이욘 티히…》를 통해 스페이스 유머의 진수를 만끽해 상대적으로 후속작인 《사이버리아드》는 덜 재미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나는 읽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그래서 《이욘 티히…》보다 《사이버리아드》를 더 재미있고, 훨씬 더 “황당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읽었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아쉽다. 이 책도 한 5년 정도 더 지난 다음에 읽었으면 훨씬 좋았지 않나 싶어서. 나름대로 이 책을 언제 읽을까, 궁리하다가 지금 순서에 읽어야 성탄절 딱 열 달 전인 2월 25일, 성모님이 동정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씨톨을 착상한 성임절, 기쁘다 구주 배셨네, 더 쉽게 얘기해서 내 생일날 아침에 업로드 할 수 있을 것이라, 아예 노골적으로 날짜를 꼽아 읽었다. 심보가 고약했으니 책이 오히려 더 재미가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니까. 남들 다 맞는 로또도 한 장 안 맞아요!


  독후감을 쓰기 전에 이욘 티히가 누구인지 알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전 은하계에 알려진 저명한 우주여행가이며, 먼 은하계 여행선의 선장, 운석과 행성 사냥꾼, 지치지 않는 열정의 연구자이며 8만 3개에 이르는 지구 유사 행성의 발견자,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대학교의 명예박사, 작은 행성 보호 단체 및 유수 단체의 회원이며 은하수 및 성운 훈장 수훈자로 지구별의 역사를 수놓은 소수의 위대한 모험가 클럽의 일원이다.

  그는 알려진 것만 해서 스물여덟 번의 우주 모험을 떠났으며, 그때마다 일지를 작성해 모두 스물여덟 편의 《우주 일지》, 우주 사전 및 간략한 보기로 구성한 부록을 포함해 전체 4절판으로 87권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지만 이를 제대로 편집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쉽게 공개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그렇다고 티히의 업적을 암흑 속에 방치해두는 건 곤란하다고 판단해 이 가운데 열두 편의 우주일지를 선별, 요약해 공개한 것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이욘 티히…》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출간되지 않는 바람에 여러 위작 판본까지 나오는 등 티히의 명성을 실추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26번째 일지는 확실히 위작인 것이 판명되어 원본에서도 삭제되었다고. 심지어 《이욘 티히…》는 실제로 이욘 티히가 자기 손으로 쓴 일지가 아니라 Lunar Excursion Module(LEM)이라고 하는 인공지능이 장착된 기계가 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단다. 아이고머니나. 근데 모르긴 해도 LEM, 렘,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 책 《이욘 티히…》에서는 티히 선장의 일지 열두 편과 나이 들어 쓴 것으로 보이는 회고록의 회상 네 편, 인공 지능을 가진 우주 생명체 창조의 꿈을 아주, 아주 조금 이룬 <디아고라스 박사> 이야기와 <우주를 구하자>는 대 우주 호소문을 실었다. 당연히 열두 편의 일지는 위에서 말한대로 원본 일지를 몽땅 싣지 않고 축약한 것으로 보이며, 은하계 안과 밖을 광속 이상의 속도로 누비고 다닌 선장 입장에서는 좀스럽게도 한갓 행성인 지구별의 여러 잡스러운 체제와 문학과 철학과 정치와 기타 등등을 비유해 놓은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독후감 초장에 얘기했듯이, 만일 이 책 《이욘 티히…》를 《사이버리아드》에 앞서 읽었다면 무릎을 치며 가갈갈갈 웃으며 재미나게 읽었을 것을, 눈으로는 분명 희극적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버리아드》에서 이미 LEM 식 코미디 촌편에 익숙해 있어서 머리로는 훨씬 덜 재미있었다는 거. 어떤 장면에서는미국이 만든 달 탐사 모듈, 렘LEM이 인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기 바라면서 썼을 콩트를 오히려 심각하게 읽고 싶어 하는 걸 감지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숱한 사람들이 영생을 원하지? 몸의 영생은 미친 놈들이나 바라는 거고 영혼의 영생. 정말로 사람한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는 얘긴데, 삶은 시궁창 속에서 지옥 같은 날들로 고통스럽게 지내지만, 사는 동안에 진심으로 주님한테 귀의해 끊임없이 십일조 바쳐가며 기도하기만 하면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 그곳에서 영생하리라는 꿈을 꾸지 않나? 아니라고? 당신은 아니더라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천국을 바라며 영혼의 영생을 기원한다는 걸 부정하지는 못하리라, 안 그려?

  좋아, 좋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달 탐사 모듈 LEM에게 들은 다음에 잘 써먹는 구절을 다시 한번 쓰자면, 단위야 어떻게 되든 10의 600제곱 크기의 공간을 염두에 두고 티히의 우주일지를 대신 써준 LEM은, LEM이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하는 25세기에, 한 엉뚱한 인간, 디캔더 교수가 영혼수집 기계를 만들어 실제로 자기 마누라의 영혼을 뽑아 주먹만 한 티타늄 상자에 집어넣어 티히네 집으로 가져왔다는 거다. 그래 티히에게 제안하기를, 이렇게 인간한테 영혼을 추출해 놓으면 실제로 인간의 오랜 꿈인 영혼의 영생을 이룰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를 상업화하면 대박을 칠 터, 안타깝게도 자기 호주머니가 비었으니 티히 선생이 자금을 대고 추후 이익금의 49퍼센트를 취하시라, 제안을 한다. 그가 티히에게 자기가 이룬 성취를 말한다.


  “저는 전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들이 목표했던 바를 성취했을 따름입니다. 티히, 당신도 그런 걸 읽으신 적이 있을 텐데요…, 종말, 끝 앞에서의 공포, 가장 풍부히 무엇이든 열매 맺을 수 있는 정신의 소멸… 오랜 생애의 끝에 말입니다. 누구나 이걸 되풀이하고 있죠. 그들의 소원은 바로 영원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 접점을 만들었죠. 티히, 어쩌면 그들은요…? 가장 뛰어난 인물들, 천재적인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p.462~463)


  티히의 생각은 이렇다. 영혼이 영원히 영생한다면, 불과 3만년 후에 닥쳐 인류 멸종을 확정시킬 대 빙하기도 이 불쌍한 영생의 영혼들이 목격을 해야 할 것이고, 그래도 우주 공간에서 사라지지 못하고 남아, 태양이 팽창해 지구를 불덩이로 만들고, 급기야 태양이 자신의 중력으로 지구를 확 빨아들여 휘리릭 소멸시키는 꼬라지도 보아야 할 터이다. 우주선 선장만 몇 십 년 했던 이욘 티히는 기가 차지도 않는 거였다. 30에서 50억년 후 태양이 폭발하여 왜성으로 찌그러진 다음에도 여전히 우주를 떠돌 영혼은 암흑 천지에 영하 2백도에 육박하는 찬 공간을 유영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불쌍한 유령일 터인데, 디캔더 교수님,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이욘 티히는 딱 잘라 대답한다.

  “사람들은 영생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냥, 단순하게, 죽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냥 살고 싶은 겁니다”(p.464)


  이런 것 말고도 다양하고 교묘하게 인간의 문화와 문명과 체제를 비틀어버린다. 이렇게 재미있는 텍스트를 불쌍하게도 전에 읽었던 작품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마는 독자가 비단 나 한 명일까? 그렇기를 바란다. 다들 나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읽기 바란다.

  난 그저 노래나 한 번 더 부르고 독후감을 끝내야겠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 만백성 찬송하여라!”

  "Exultate, Jubi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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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물고기 묘보설림 4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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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웨이롄, 이 중국인 작가의 중국식 이름은 ‘윌리엄’이다. 그래서 중국 내에서는 왕웨이롄 또는 왕 윌리엄으로 불리고 밖에서는 윌리엄 왕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1982년생 중국 작가. 태어난 곳이 어딘가는 검색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 검색 센터 바이두는 산시성 시안시 후이구라고 썼고, 중국학 센터와 위키피디아에는 칭하이성 옌현에서 낳았다고 했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뭐하러 이런 걸 따지느냐 하면, 《책물고기》에 첫번째로 실렸으며 이이를 스타 작가로 발돋움시킨 대표 단편 가운데 한 편인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의 배경이 칭하이성의 차카염호 부근이기 때문이다. 차카염호. 해발 3천미터 이상 높이의 청정 소금호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색은 푸른 하늘과 흰 소금이 전부. 물 속을 들여다보면 동시에 흰색과 파란색을 볼 수 있겠지. 건조한 공기와 높은 염도로 인해 풀과 나무가 별로 자라지 않는다. 식물이 없으니 동물도 없다. 정말 없는 건 아니고 흔히 동물이라 말하는 것들은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

  왕웨이롄은 이곳에서 나서 더링하, 시닝, 시안에서 자라고 대학은 저 남쪽 수천 킬로미터를 내려가 광저우시 중산대학에 입학, 인류학과 중문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여러 대학과 문학단체에서 찍은 다양한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거 같다. 북부인 출신으로 남쪽 지역인 광저우에서 자리잡는 애환을 그린 <아버지의 복수>와, 역시 북쪽에서 유학온 여학생과의 첫사랑과 재회 이야기를 쓴 중편소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같은 작품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으리라.


  첫 작품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를 읽으며 탁 드는 생각이 글을 참 섬세하고 깔끔하게 쓴다, 하는 거였다. 앞에서 말했듯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고지대의 황야. 말로만 황야가 아니라 진짜 황야. 늘 청명하고 눈이 부시다 못해 여차하면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강하고 청명한 햇살이 비치지만 봄이면 손톱을 내려다보지 못할 정도의 황사가 몰아치기도 하는 아름다운 지옥. 그래도 소금호수가 있어 사람들은 소금을 채취하고, 소금산업 덕에 마을도 생기고, 술집도 생기고, 노래방도 생겼지만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사람마저 황폐해버리고 말게 되는 곳. 문화가 없어 건전하게 즐길 거리 역시 찾지 못한 주민들이 제일 쉽게 찾게 되는 즐거움이 술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중국 북서부 고원이니 춥기는 오죽이나 추웠을까? 하지만 술 마시는 자, 결코 실수를 피하지 못하리니 애초부터 불행을 담보하고 알코올로 목젖을 적시는 것이라.

  주인공 ‘나’는 아내 샤링에게 한눈에 반해 훗날 소금채취선을 운행하는 샤오마와의 경쟁을 물리치고 결혼에 이른다. 행복한 부부에게 항용 그러하듯이 곧 샤링은 임신을 했으나, 사실인지 아니면 주민들이 하는 말에 불과한지 모르지만 지역에 팽만한 높은 염도가 사람에게 독이 되어 샤링은 유산을 했고, 이후 부부의 사이는 급격하게 냉각되고 말았다. 이런 시기가 계속되던 몇 년 후, 고등학교 동창생 샤오딩이 연인과 함께 이곳에 며칠 들른다.

  ‘나’는 몇 년 전 술 마시고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 좋은 자오형과 거의 매일 대취하곤 했다가,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날 그만 자오형이 소금호수에 빠져 죽은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정을 나누었지만 졸업 후 시간이 꽤 흘러 이제는 조금 서먹한 친구 샤오딩은 대도시에서 이름이 나지는 않았어도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는 화가로 지내고 있으며, 탄광 채탄부 생활과 젊은 시절의 황음으로 간이 많이 안 좋아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나’ 역시 자오형의 죽음 이후에 거의 술을 끊었다. 하지만, 하여튼 드러운 동양인의 술 접대 문화. 이들은 오랜만에 만나 소금 호수 구경을 가고, 채취선 샤오마까지 어울려 오랜만에 대취한다. 사고는 없었다.

  샤오딩과 함께 온 선글라스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 진청. ‘나’와 진청 사이에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어찌 서로의 눈길이 오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며칠 후 샤오딩과 진청은 떠나고, 이때 진청과 아내 샤링이 가까이 지낸 것이 전환점이 되었는지 부부는 다시 사이가 좋아져 두번째 임신을 한다. 샤링은 전과 같은 슬픈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친정으로 몸을 피하고 몇 달 후 사내 아이를 순산한다. 그동안 ‘나’와 진청은 몇 번의 편지 왕래가 있었고, ‘나’는 필요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편지를 불태우는데 아내는 이제 소금호수에서의 일을 그만 두고 친정이 있는 도시에 와서 자리를 잡자고 말한다.


  별스럽지 않은 서술이지만 문제는 문장이다. 섬세하고 청징하며 깔끔한 문장들. 그것들이 만든 문단. 확실히 중국 소설도 한 세대가 흘렀구나. 지난 달에도 딩옌을 읽었다. 이들에게는 각자 적응하지 못하는 벽이 있었지만 선배작가들처럼 좌우, 빈부, 지배/피지배, 혁명/반동의 벽이 아니다. 이들은 확실하게 현대인이며, 문화적으로 문명인들이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중국 작가들 가운데 특별히 글이 좋아 나라 밖에까지 번역 소개하는 것이겠지만 현대 중국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왕웨이롄, 윌리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마찬가지이기는 하다”라고 말하는 건 뭔가 조금의 이의가 있다는 뜻.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의 두 주인공이자 문학청년 ‘자화’와 ‘루제’는 세월이 흘러 자화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루제의 영향을 받아 작가이자 광저우 지방의 교수가 됐고, 의과대학을 다니던 루제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의대를 졸업한 후 베이징에서 의학박사까지 하고도 종합병원에서 병원 사무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졸업한 후 10년 동안 만나지 않았다가 그동안 루제가 이혼을 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자화에게 한 번 왔다 가라고 초청 비슷하게 한 것. 아직 미혼 상태를 유지하던 자화는 당연히 베이징에서의 뜨거운 하루를 염두에 두고 도착해, 이제 30대가 된 완벽한 성인이자 인생의 절정기를 달리는 자유로운 남녀가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현재를 즐기고 기약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그런 내용이다. 이야기의 반을 훨씬 넘는 분량이 이들이 갓 대학에 입학한 청춘 시절의 풋풋한 연애와 이별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제 미시마 유키오의 독후감을 쓰면서 짧게 말했듯이 미시마는 글을 쓸 때 독자를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미문이 쏟아져 나오는데 반해서, 글 좋은 왕웨이롄은 어떻게 써야 글이 아름답고 깔끔하게 읽힐까, 이걸 고민하며, 고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습관적으로 염두에 두고 쓴 글 같다는 거다. 그리고 우습게도 왕웨이롄은 바로 이 작품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속에서 맹렬하게 습작에 몰두하고 있는 루제의 습작을 읽고 비슷하게 말한다. 루제가 읽는 사람을 너무 의시하면서 글을 쓴다고.

  둘이 헤어진 뒤에 자화는 루제의 SNS에 수시로 들어가 루제가 미니홈피에 올린 시를 읽고, 자기가 방문한 흔적을 지운다. 누구나 이런 경우 한 번씩 있지? 그래서 나는 그냥 이쯤에서 문단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싶은데, 작가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계속한다.

  “(자기가 방문한 흔적을 지운) 그 이유는 무엇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시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전에는 눈에 확 띄었던 재기가 번잡한 수사에 가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글을 쓸 때 남의 눈을 의식했다. 마음속의 열정이 부족해질수록 더 스스로를 치장했고 그것이 오히려 글을 망쳤다. 그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p.253)

  위 인용을 읽어보니까, 나를 포함한 누구나 타인이 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자기가 쓸 때에는 이걸 눈치채기가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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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홀릭 2026-0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왕웨이롄은 현재 광저우에 있는 중산대학 중문과 교수가 돼서 잘 살고 있답니다.

Falstaff 2026-02-26 15:47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