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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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의 책을 안 읽어본 독자가 얇은 분량만 가지고 선택해놓고 코 깨지기 딱 좋은 책.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쓰는데 방법이 여하하건 간에 쉽게 줄줄 읽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의 조선생, 프랑스의 프선생 같은 구대륙의 몇 작가들만큼 난해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친절하지는 않다. 물론 내가 읽어본 일곱 권의 책들에 한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작품도 책을 열면 도무지 현대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토니 모리슨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준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자를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조합해 문장으로 엮어서 그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비문맹자라 한다. 그러나 여간한 훈련이나 선천적 능력이 없으면, 쓰고자 하는 내용과 관계없이, 이야기를 원고지 백 장 이상의 분량으로 서술하려면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 책의 첫 부분은 문자의 해독과 조합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훈련이 덜된 인물, 나중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어린 아가씨가 쓴 문장으로 시작한다.

  노예 매매로 거액을 벌어들여 지금은 메릴랜드 근방 대 주블리오 농장의 지주가 된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교도 동 오르테가 집안이 있다. 저택에는 몸에서 정향냄새가 나며 실력 있는 주방담당 노예가 있었고, 이이는 같은 노예와의 사이에 난 딸과 주인 동 오르테가의 씨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젖먹이 아들이 있는데, 이 노예의 맏딸이 바로 플로렌스다. 플로렌스는 열두어 살 때 개신교도 제이컵 바크 씨에게 팔려 우여곡절을 치루고, 바크 씨가 짓다 만 저택의 방 한 곳에 들어가 벽지에 빼곡하게, 편지는 아니지만 특정인을 위해 글을 써놓는데, 이것이 글의 첫 부분이다. 즉 미국문학의 거장인 토니 모리슨이 쓴 <자비>의 첫머리가 노예의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것.
  그러니 독자는 처음부터 매끈한 문장 대신, 덜 훈련되고 인생도 덜 살아 미숙한 시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녀가 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과거 시제tense가 들어가야 하는 곳을 현재 시제로 쓰고, 특정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적절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역자 송은주는 특별히 플로렌스의 문장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고생을 좀 했을 거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송선생을 한 번 볼 기회가 있으면, 소주 한 잔 하면서 혹시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며 드물지 않게 사용하는, 틀린 건 아니지만 어딘지 어색한 어미변화에서 힌트를 받아 번역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런 것은 이미 빌 포크너나 베시 헤드 등에 의하여 시도된 적이 있어서 낯선 건 아니다. 그래도 책을 읽다가 난데없이 이런 장면이 나오면 조금은 갑갑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이 책에선 몇 번 시도하는 플로렌스의 벽지wallpaper 소설 말고는 쉽게 읽히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
  스토리를 시간 순서대로 조금만 설명해보기로 하자.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도 아닌, 17세기의 미국. 메릴랜드 지역은 이 이전에 스웨덴의 영토였다가, 네덜란드로 소유권이 넘어가고 이후로도 복잡하게 유지되어 온 땅. 그리하여 종교 역시 침례교와 퀘이커교도, 기타 교조적 개신교 분파와 그들에게 허식 덩어리 이교도로 인식되어 온 가톨릭까지 잡탕을 이루었고, 유럽 각지에서 온 백인들이 쉴 새 없이 원주민들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해 서로 거대한 땅을 소유해 경작을 시작하던 시기. 호손의 <주홍글자> 비슷한 시대라고 짐작하시면 크게 틀림이 없으리라. 다만 <주홍글자>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장면,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와 수많은 물라토, 크리올, 삼보, 메스티소, 로보. 치노, 코요테 등의 인종들이 생겨났다.
  이때 영국의 구빈원에는 제이컵 바크라는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뒀고, 아버지는 아이를 내버려둔 채 나가버려 돌볼 친척도 없는 아이는 당연한 코스를 밟듯 구빈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글자를 습득하는 행운을 잡는다. 나이가 조금 들자 운 좋게 법률회사 사환으로 들어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재기를 드러내 특히 상업 방면으로 좋은 자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라, 훗날 한국에서는 독고탁이란 소년에게 이런 일이 집중해서 벌어졌듯,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삼촌이란 작자가 미국에서 자손 없이 숨을 거두며 좋은 기후대의 기름진 땅 120에이커를 제이컵에게 상속해버린다. 그래 제이컵은 아메리카 동부 해변의 바베이도스에서 조금 살다가 드디어 상속받은 120에이커의 농장으로 거처를 옮기며 농업과 상업을 겸업하기에 이른다. (난 눈을 뒤집고 봐도 주변에 이런 삼촌, 고모, 외삼촌, 이모가 없으니 얼마나 불행한가.)
  제이컵은 주로 모피와 담배를 금과 바꾸는 중개상을 한 인물로, 이제 정착을 하려니 아내를 얻어야 할 일. 그리하여 조국 잉글랜드에 건강하고 순결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한다, 광고를 내고 현지 변호사 입회하에 일차면접, 이차면접, …, n차 면접까지 거치고 나서 다시 17세기 기준의 순결한 아가씨라는 공증을 받기 위해 순풍산부인과에서 3백년 후 1980년 영국의 스무 살짜리 세자비 간택녀 다이애나 아가씨가 받게 될 처녀막 검사까지 마친 레베카 아가씨를 배필로 맞아들이기에 이른다.
  레베카가 삼등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오기 전에 그나마 백인치고 마음씨가 따듯한 제이컵은 선장의 사생아로, 낳자마자 근 스무 해 가까이 배에서만 살아왔던 유색인 처자 소로Sorrow를 데려와 별로 쓸모는 없지만 농장 일에 투입을 했고, 최근에는 원주민 소녀 노예 리나를 쇼핑해 와 역시 가사일과 농장 일을 거들게 한 상태. 레베카가 메릴랜드에서 내린지 20분 만에 뚝딱 결혼식을 마치고 농장에 가서 보니 아무 죄 없는 리나와 왠지 모르게 서먹서먹. 세월은 둘 사이에 우정을 쌓게 하고 맏딸 패트리시안의 출산을 리나가 적극적으로 도운 다음 더욱 가까워진다. 물론 이후에 곧 죽을 세 명의 아들을 출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후. 제이컵 씨는 저 위에서 소개한 동 오르테가 씨의 식사 초대를 받는다. 지주가 중개인을 직접 만나자는 건 체면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기 위함인 걸 알면서도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겉멋만 잔뜩 들은 가톨릭교도가 자신이 데리고 있는 노예를 넘겨주고 대신 채무를 변제해달라는 거였다. 당시 이 지역이 포르투갈 관리 하에 있었는지, 요구를 거절하고 소송을 한다면 몇 십 년이 걸려야 하고,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몸에서 정향 냄새를 풍기는 요리사를 점찍는다. 동 오르테가가 거절할 것임을 짐작하면서. 제이컵이 요리사에게 한 발 가까이 접근하자, 요리사가 얼른 낮은 목소리로 제이컵에게 거의 간청하는 목소리로 속삭이기를, “세뇨르, 저는 안 돼요. 저 애를 데려 가세요. 제 딸을 데려가요.”
  제이컵이 생각하기를 아직 살았으면 맏딸 페트리시안과 비슷한 나이 정도 됐으니 아내에게도 위안이 되리라 싶어 그 자리에서, 가톨릭 신부에게 글쓰기를 배운 플로렌스를 집안의 노예로 데려오게 된다.
  여기서 난데없는 모리슨의 실수. 또는 나의 오독misreading. 제이컵은 동 오르테가가 속물이라 단 하나도 배울 게 없음을 단박에 알아챘지만, 그가 사는 저택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 오르테가를 방문한 거 맞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라고 저택을 짓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집을 남긴다는 걸 되살려 갑자기 숲의 나무를 몽땅 베고 그 자리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다. 원주민 출신 여인 리나는 숲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게 불길하다고 예언을 했고, 소설에서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적중한다는 소설작법 제 2장 3조에 의거, 한꺼번에 많은 인부와 자재들이 들어왔고, 이를 운송하기 위한 마차를 끄는 짐말 역시 농장에 들어오는데, 작가 토니 모리슨은, 이때 첫딸 페트리시안이 말의 발굽에 머리를 채여 죽었다고 얘기한다. 오르테가의 저택에서는 죽은 페트리시안의 또래라는 걸 염두에 두고 플로렌스를 데려왔으면서. 내 오독이었으면 좋겠다.
  불행은 언제나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서, 저택 건설 중에 우리의 제이컵 바크 씨마저 천벌을 받았는지 천연두에 걸려 숟가락을 놓고 만다. 천연두는 지금이야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당시엔 치명적 전염병이라 제이컵이 죽자마자 매장을 하고 곧바로 아내 레베카도 앓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레베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에 자신만의 처방으로 아픈 사람을 고쳐준 적이 있는 저택 건설 당시의 대장장이를 찾아오라고 플로렌스를 보내게 되고, 흑인 소녀애가 혼자 험한 시절, 험한 길을 헤치며 온갖 난관 끝에 기어이 그를 찾아 마님의 병을 돌보기에 이르는데, 왜 플로렌스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저택의 방 하나를 골라 글씨도 읽지 못하는 대장장이가 읽어보라고 벽지에다가 빼곡하게 글을 써놓았을까. 그것도 글을 다 쓰기가 무섭게 저택 전부에 불을 싸지를 거면서.
  그건 직접 확인하시라. 왜 제목을 <자비>라고 했으며, 자비로운 행위가 도대체 어떤 일이었는지도. 그러면 쉽지 않은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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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께서도 ‘적어도 친절하지 않다‘고 하시는데, 제가 가입해 있던 고등학교 시절 독서 서클에서 호기롭게 선정했던 책이 바로 [비러브드]여서, 다들 테이블 가운데 놓인 다과를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딩 친구들이 책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못나눴던 기억이 가물가물^^ 얇은 책이라 하셨는데도 리뷰보니 내용이 일차원이 아니네요. <비러브드> 먼저 재도전하고 <자비>를 나중에. 저는 숙제 하나 또 얻어 갑니다.

Falstaff 2021-04-23 14:17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적도 있으시군요. 그래도 알찬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빌러브드>도 재미있고, <솔로몬의 노래>도 잘 읽힙니다.
저는 토니 모리슨이 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조금 더 불친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까짓 것이 소설밖에 더 됩니까. 그냥 읽으시면 되지요 뭐. ^^

2021-04-23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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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리의 시집은 처음 읽는다. 시집을 읽으면서 이규리만의 독특한 울림, 단어로 써놓고 보면 별 특색 없이 다가오지만 이이의 문법을 통해 전해지는 고독, 고통, 죽음, 상실, 불확실, 단절 등 삶의 비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는 발견했다고 오해했을 수도. 그리하여 시집의 총량은 매우 우울. 무엇이 시인을 우울하게 만들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시집을 다 읽고 마음속에 허탈과 허무의 후유증이 남는다면 그건 문제일 수도 있다.
  이이를 소개하는 많은 자료가 시인의 생년을 밝히지 않았으니 나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이의 연배가 둘째 누나 정도인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요즘 젊은 시인인 줄 알았다가. 시인으로 등단을 좀 늦게 해서 그런 듯.



  상자



  상자들을 두고 그들은 떠났다


  아래층에 맡겨둔 봄을
  아래층에 맡겨둔 약속을
  아래층에 맡겨둔 질문을
  아래층에 맡겨둔 당신을


  아래층이 모두 가지세요


  그 상자를 나는 열지 않아요


  먼저 온 꽃의 슬픔과 허기를 재울 때
  고요히 찬 인연이 저물 때


  생각해보면 가능이란 먼 것만은 아니었어요  (전문)



  하여튼 내가 읽은 바는, 그들이 떠나 이제 이 집 또는 건물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들은 가버리고 ‘나’한테 적어도 네 개의 상자가 남았는데 ‘나’는 그걸 열지 않는단다. 봄, 약속, 질문, 당신. 즉 그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거의 모든 것 중에서 ‘나’에게 남겨진 부분들. 그들도 봄, 약속, 질문, ‘나’의 일부분을 다른 상자에 담아 가져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니까. ‘나’한테 남아 있는 것들도 모두 아래층에 맡기고는 그냥 가지라고 해버린다. 인연이 저물 때, 그들과 ‘나’ 사이엔 더 이상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이제 봄, 약속, 질문 등의 친밀한 이미지가 제외된 완벽한 고독과 폐쇄에 놓이게 된다. 이래놓고 가능이란 꼭 멀지만은 않단다. 즉 발 끝에 이런 벼랑이 놓일 수 있다고? 아, 나의 시 독법은 여전히 유치하구나.
  이 시에서 의문 하나. “고요히 찬 인연이 저물 때”에서 ‘찬’은 무슨 뜻일까. 가득은 아니지만 빈 곳을 어느 정도 채운 상태[盈]일까 아니면 냉정한 인연일까.
  이번엔 표제 시 <당신은 첫눈입니까> 전문을 읽어보자.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전문)



  뭐 눈이 다 그렇지. 보기엔 좋은데 더듬어보는 순간 부질없이 녹아버리는 것. 그리하여 시인에게 눈, 특별히 첫눈은 부질없는 것을 의미할 때도 있다. 이 시를 굳이 소개하는 건, 시집에서 이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정체를 고통스럽게 날것으로 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로 이규리는 ‘슬픔’, ‘허무’, ‘우울’, ‘어둠’을 꺼내고 그걸 첫눈인 것처럼 뭉쳐 자신의 방에 두었다고 한다. 부질없는 슬픔, 허무, 우울, 어둠.
  하긴 시인에게 나이가 무슨 대수냐. 이게 2020년 12월에 출판한 시집이니, 시인의 연륜 역시 대단한 공력을 지녔을 때. 이미 세상을 살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시인은 마치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보였던 ‘힘든 것’들의 소묘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시 연배 탓일까, 다행스럽게 이규리의 시들은 심지어 내가 읽기에도 그나마 무난하다. 기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 가운데 어느 하나 우울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때는 섬뜩하기도 하다. 예컨대.



  종이꽃



  순두부를 뜨는데


  태어나기 직전의 말랑말랑한 목숨


  슬픈 익명이
  미끄러진다


  그때, 이렇게 몽글몽글했을까


  순두부를 뜰 때면 숟가락을 피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미끄러진 태아에 대해 생각해


  희고 말랑한 것 말갛고 혹한 것


  순하지 않은 순두부
  울음을 터트린 순두부


  말랑말랑한 볼을 하나 둘
  꼬물꼬물하는 손가락을…… 아홉 열, 가시덤불에 던졌으므로
  나는 열 번 형장에 올라야지


  열여섯은 파랑 서른둘은 격랑
  아들은 99.9퍼센트 친자관계가 성립합니다


  구름의 손으로 떨어뜨린 글자
  누군가 서류를 쓰윽 들이밀며


  이들은 친자관계가 성립합니다


  낙하 혹은 낙화


  종이꽃은 꽃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었는데
  몽글몽글 순두부


  아마포가 나를 확 덮어버리는데  (전문)



  아, 나 순두부 좋아하는데(하긴 싫어하는 음식 있으면 세 개만 대봐라). 이 시를 잊을 때까지는 순두부를 먹지 못할 거 같다. 순두부가 ‘태어나기 직전의 말랑말랑한 목숨’이라니. ‘순두부를 뜰 때면 숟가락을 피하는 것’이고, 순두부가 출산 직전의 목숨이라면 숟가락은 뭐? 나중에 열 번 형장에 올라야 한다니까 아이를 세상에 억지로 꺼내는 겸자도 될 수 있고, ‘낙하 또는 낙화’라고 했으니 낙태수술 할 때 쓰는 이상하고 끔찍하게 생긴 도구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제 나오려는 목숨을, 마지막 연을 보라, ‘아마포가 나를 확 덮어버’린다고 했다. 여기서 아마포는 당연히 숨이 멎은 다음 얼굴에 씌우는 천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순두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애초에 이 시집에서는 즐겁거나 행복한 결합은 없다. 이규리의 결합 방식을 보자.



  거즈의 방식



  진물이 말라붙은 거즈를 보면
  그들은 어느새 한몸이 되어 있다


  굳이 누가 원했다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그렇게 말도 없이 애를 낳고 살림을 차리고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쏙 빠지고 이야기만 남지 않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데려와 생각날 때마다 흔드는 이들은
  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행한 상처만 기억하니까
  불행할수록 기억이 많아지니까


  마데카솔 광고는 처음처럼 돌아온다 돌아온다는데
  누구라 처음을 알까


  고쳐 앉으며 돌아누우며 비루한 지상의
  상처를 믿어보는 것


  영리한 사람은 기억하고 선량한 사람은 이해하겠지
  물집이었던 시간에
  칸칸 세 들어


  우린 이전을
  이미 살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전문)



  한 몸이 돼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이어 진물이 흘러 거즈를 가져다 붙여야 한 몸이 된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붙은 진물과 거즈마저 의미가 없어지고 이야기만 남는다고 주장하는데, 시인도 둘이 한 몸 되어 살아봤을 터, 나 같으면 이야기도 없어지고 현상만 남았다고 할 듯. 그러나 독자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시인은 세월이 흘러봤자, 자기들이 상처고, 진물이고, 거즈였을 때도 알고 보면 그저 각자가 맺힌 물집에 불과했었다고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이규리의 시들은 내게 덜 낯설었다. 심지어 비록 오독misreading이겠지만 시를 읽고 말하고자 하는 걸 찾아내려고 하기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내 정서하고는 맞지 않는다. 시들이 과하게 고통스러워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 다만 시인은 나 같은 독자도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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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라 라구나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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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내려마시고 출근. 구수함. 아내는 산미도 있다고 하는데 난 따지지 않기로 했음. 아침마다 커피 내리는 인간은 마누라 아니고 나라는 걸 밝히고자 함. 아내는 내가 내려서 갖다 바쳐야 맛을 아주 조금 보고 어쨌느니 타박만 함. 내가 이러면서 삼십 년 넘게 살았는데 상장 한 장 못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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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21 0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내 분이 커피내리시는 줄 알았는데 이젠 배우셔서 직접 내리시나요?ㅎㅎ
저는 커피가 아침 식사랍니다~~
폴스타프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Falstaff 2021-04-21 09:09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쿨캣님도 재미난 하루 보내세요. 세상에 재미가 최곱니다! ^^

수이 2021-04-21 1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많이 받으시잖아요, 사랑이 상장임!

Falstaff 2021-04-21 10:29   좋아요 4 | URL
솔직히 사랑도 받는 거 같지 않아요. 흑흑...
대신 귀여움은 좀 받지요. ㅋㅋ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21 1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말씀을 듣고 나니 십 년을 조금 넘은 저의 불만은 소리없이 사라집니다... ㅋ

Falstaff 2021-04-21 15:30   좋아요 1 | URL
아이고, 말씀 들으니 이거 참, 뭐라 해야 하나... 보람차군요!! ㅋㅋ

mini74 2021-04-21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근따윈 필요없다니 아주 효율적인 남편이시군요 ㅎㅎㅎ

잠자냥 2021-04-21 18:14   좋아요 2 | URL
당근대신 당근술을 달라!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4-21 21:1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당근 따윈 좀 갈아서 쐬주에 타서 줬으면 좋겠습니다. 딸꾹!
생전 안 먹던 우거지 감자탕에 쐬주 각 두 병씩 했더니 으아, 에일 반 리터 한 캔 했으면 천국이겠고만요. ㅎㅎㅎ
 



  안 믿기시지? 근데 정말입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 5>에 나옵니다. 혹시 제가 사기치는 거 아닌가 싶으세요? 그럼 직접 읽어보세요.



  그죠? 알라딘은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었다는 겁니다. 거기서 그저 종교가 이슬람이었던 거네요.

  실제로 삽화에서 알라딘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시겠습니까.



  이게 불쌍한 엄마 앞에서 큰소리 뻥뻥치는 알라딘의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만주족 청나라 후예답게 변발을 했습니다. 복장도 거의 완벽하게 중국식입니다만, 엄마의 차림새를 두고는 딱히 뭐라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마술사가 지니를 훔쳐 성과 아내를 데리고 저 멀리 떠나간 다음에 절망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손가락에 반지 요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고개를 수그렸다고 해도 변발이 무려 무릎 근처까지 내려옵니다.


  저도 이거 읽었을 당시에 얼마나 놀랐는데요. 뭐라? 알라딘, 재스민 공주의 서방님께서 그래 중국 남자였단 말여? 하고 말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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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4-20 20: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화의 원정의 그 정화가 신밧드란 설도 있던데요. 도대체 내가 본 그 알라딘과 신밧드의 모험 속 인물들은 누구였던걸까요 ㅎㅎ 글 너무 재미있습니다

Falstaff 2021-04-20 21:04   좋아요 4 | URL
정화는 결혼을 할 수 없는 환관...이었다고 쓰려 했는데, 알라딘도 자녀가 읎지요 아마? ㅋㅋ

새파랑 2021-04-20 22: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을 천하의 문제아라고 지적하신줄 알았습니다 ㅎㅎ 생각해보니 디즈니의 알라딘 모습이 변발이었던 것 같기도 ㅋ

Falstaff 2021-04-21 08:39   좋아요 2 | URL
디즈니 알라딘이 설마 변발....이 아니라
˝봉두난발˝
이었던 거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20 2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정말 신기하네요. 알라딘이 변발이라니...디즈니에서는 터번쓰고 아랍 전통 복장 아닌가요?

coolcat329 2021-04-20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삽화가가 누군지 열린책들 책소개 보니 1850년대 당대 최고의 삽화가 6명의 공동작업이라네요. 삽화 출처도 있고 알라딘은 변발 중국인이네요. 오~~이런 재미난 이야기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04-21 08:43   좋아요 2 | URL
오, 유명 삽화가였군요!
19세기니까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겁니다.
엄마하고 찍은 사진 보시면, 엄마 침대가 해먹이거든요. 해먹은 습기 많고 더운 남서쪽 지방에서나 썼을까, 본토, 특히 회교들 사는 사막지대인 서북쪽은 건조해 그냥 좌식생활을 했잖아요.
하여튼 알라딘은 왕서방이었습니다!

붕붕툐툐 2021-04-20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새파랑님도 같은 생각함. 알라딘이 중국 자본이라는 줄!ㅋㅋㅋㅋㅋ 변발의 알라딘 너무 매력적임!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4-21 08:44   좋아요 1 | URL
그죠? 생각도 못했는데 이걸 읽으니 나름대로 매력도 있더라고요!!
 
올드 스쿨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미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자존심 센 사립학교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 ‘나’가 다니던 곳. 그냥 그곳을 올드 스쿨이라고 해두자.

  작가 토바이어스 울프는, 동막골 팝콘 스타 강혜정의 남편 타블로의 스탠퍼드대 은사다. 1945년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유대인 의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성공회에 다니는 바람에 유대인이란 특별한 의식 없이 지냈다고 한다. 토바이어스 조너선 안셀 울프가 다섯 살 됐을 때 부모가 이혼해서, 토바이어스는 엄마와 함께 새아버지를 따라 미국 서북단 워싱턴주의 북 캐스케이드산맥 속의 작은 마을에서 살며 사춘기까지 보내게 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토바이어스가 스탠퍼드대에 다니고 나서야 친부와 다섯 살 많은 형 조프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마치 ‘나’가 동부 해안의 고등학교에 다닌 것처럼 독자를 현혹한다. 책 좀 읽은 독자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겠지만, 울프는 책 중간에 ‘나’가 픽션을 쓰는 방식이 ‘자기 고백적’이라서 독자들이 여차하면 작가가 직접 경험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고 언질을 주기까지 한다.

 

  하여튼 ‘나’가 다녔던 학교는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속물적인 교육기관으로, 학교에서 칭송받는 인재들은 주로 레슬링이나 축구선수, 인정사정없는 토론의 명인, 총명한 학자, 성악가, 체스 챔피언, 치어리더, 배우, 음악가, 재치꾼 등이었고 이 가운데서 특히 글쟁이, 글 좀 쓰는 친구들이 대단한 성가를 누렸던 곳이다.

  교사들의 구성도, 먼저 교장은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미국의 위대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사사했으며, 교장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주임 메이크피스 씨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던 의무대 운전병으로 헤밍웨이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다들 읽어보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나오는 제이크의 낚시친구 빌의 실제 모델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선생은 한 마디로 하지 않았지만 교사나 학생이나 다들 그렇게 믿던 것. 이들 외에도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남부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당시 1학년 여학생과 결혼하는 바람에 대학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올라와 이 학교에 정착한 현대문학 전공의 램지 선생(먼 훗날에 교장까지 승진하는 인물)도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부인과 함께 봉직하고 있다.

  이 학교의 전통은 일 년에 세 명의 작가, 시인등의 문인을 초빙하는 행사. 이때, 학교는 최고학년인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나 소설을 응모하게 하고, 장원을 한 학생에게는 교장이 아끼고 아끼는 정원garden에 초빙 작가, 시인과 산보하면서 문학과 인생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한다. 물론 유명 작가를 초빙하는 일에 비교적 큰돈이 들기는 하지만 애교심 넘치는 졸업생들은 전통으로 굳어진 행사를 위하여 활수滑手한 기부를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등학교라고 해도 명문이다, 명문.

  그리하여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대선이 끝나고 겨우 한 주 뒤, 1960년 11월에 방문했다.”


  즉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은 시인이 로버트 프로스트이다. 이 학교에는 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뜻의 제호를 한 교지 ‘트루바두르’를 발행한다. ‘나’는 조지 켈로그와 편집자의 자리를 놓고 투표까지 벌였으나 딱 한 표 차이로 고배를 마시고 출판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조지와 ‘나’, 돈 많은 명문가의 아들로 사실 이 정도의 학교는 졸업하건 말건 자신의 인생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제프 퍼셀, 그리고 ‘나’의 룸메이트 빌 화이트, 이렇게 네 명이 1960~61년 학기의 최대 라이벌이었고, 이 네 명 모두 위대한 시인 프로스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아, 프로스트가 부어주는 향유로 어깨를 적시고 싶어 한다.

  이렇게 최고학년이 되자 창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예비 작가들은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뿜어대며 특징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내 생각에도 문예 창작은 대학에 전공 학과를 둘 것이 아니라 예술 고등학교나 이 비슷한 특화 고등학교에서 보다 일찍 창작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여튼 로버트 프로스트는 몇 편의 시 가운데 트루바두르의 편집자 조지 켈로그를 우승자로 선정하고, 드디어 학교를 방문해 온갖 잘난 척을 다 하고 돌아간다.

  몇 달이 흘러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 방학이 오고,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 돌아온 ‘나’의 목적은 두 번째 초빙 작가인 에인 랜드를 위해 단편을 쓰기 위해서였다. 책에서 ‘나’는 그저 에인 랜드의 <파운틴 헤드>를 뒤적이다가 한 방에 작품 속으로 푹 빠져버리는 것으로 그렸는데, 정작 학교를 방문한 랜드는 <아틀란티스>를 자기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둘 다 번역되어 시중에 나와 있다. 나는 내년에 읽을 예정) 에인 랜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드물지 않던 러시아 유대인 출신의 미국인으로, 작품 속에 가히 니체가 말하는 초인들이 등장해 일체의 타협 없이 자기 주관대로 행동한다. 아무 정보도 보태지 않으면 남자 작가일 것 같지만 작은 키에 단단한 몸매를 지닌 여자다. 책에서는 이이의 성격과 언행을 좀 과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랜드를 본 적이 없어 실제로도 그런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이 경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네 명의 문사들은 다 미역국을 마시고, 같은 이름을 써서 ‘큰 제프’라고 불리는 제프 퍼셀의 사촌이 장원을 한다.

  이제 마지막 경연. 초대받은 작가는 다른 이도 아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는 헤밍웨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인 건 동의하지만 다분히 과대평가를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심정인데, 어쨌든 1960년대 초반에는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경배를 받고 있었다. 가슴에 부얼부얼한 털이 가득한 이 늙은 작가는 <올드 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직접 작품에 나와서 한마디 하는 건 아니고, ‘나’가 제출한 작품을 장원으로 뽑아놓고, 램지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모르긴 몰라도 술을 엄청 퍼마신 다음에, 전화선을 통해 일방적으로 지껄인 말을, 램지 선생이 다시 정리한 형식으로 얘기한 것만 나온다.


  <올드 스쿨>의 주요 시간적 공간은 1960년 11월부터 1961년 7월까지. 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1945년생. 그럼 작가의 나이로 치면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다. 자신의 작문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최고학년이 될 수 없어서 헤밍웨이에게 원고를 보여줄 수는 없었을 때. 그런데 왜 시기를 이렇게 잡았을까? 헤밍웨이가 늘그막에 럼에 맛을 들여 거의 중독상태에 빠진 건 아시지? 그러다가 도가 지나쳐 알코올성 우울증 증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1961년 7월 2일에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려 영광에 찬 한 생애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다. 즉, 헤밍웨이가 했던 가상의 연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면 모를까, 아니면 ‘나’로 하여금 헤밍웨이 초빙 경연에서 장원을 차지했더라도 결코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터다. 그런데 만날 확률이 거의 최고조에 올랐을 때, 난데없이 자살로 뜻을 이루지 못해야 더 극적이고 여운을 남길 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헤밍웨이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졸업을 하고 만다.

  정말? 정말 그래서 졸업을 하고,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중에 스탠퍼드대에서 석사를 하고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됐을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이미 책을 읽은 몇몇 분께서 저 구석에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여.


  문학을 지망하는 소년의 심각한 일탈이 가장 중요한 일화가 된다. 그건 작가 자신의 진짜 경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일탈인지,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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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0 0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0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뭔지 그게 뭔지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요!! 🙄

Falstaff 2021-04-20 09:47   좋아요 4 | URL
아니됩니다.
미리 아시면 책 못 읽습니다. ㅋㅋㅋㅋㅋ
(아, 이 재미란! 이 맛에 책 읽고 독후감 쓴단 말입니닷!!!!) 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0 10: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해서 저는 오늘 낚였습니다. 이 책 예전에 친구가 이야기해서 살까 했더니 사지 말고 그냥 도서관 가서 빌려 읽어 해서 아 응 하고 말았다가 깜박했어요. 도서관에 있나 가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4-20 10:11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한 건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4-20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낚시 냄새가 나는군요 ㅎㅎ

Falstaff 2021-04-20 11: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낚시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