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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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가 2002년에 낸 《거미》를 올 1월에야 읽고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고른 시집. 요즘 계속 암호와 파편과 괴멸의 골짜기를 이루는 우리 현대시를 읽다가 박성우 차례가 오니 참 개운하다. 시를 읽는 즉시 시인이 하는 이야기를 즉각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고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시. 아니면 언어를 통해 그린 화폭이 큰 수채 풍경화 같은 작품들이 몇 달째 연이어 단어의 기호화와 전위의 기치를 올린 시를 읽느라 쌓인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확실하다, 그동안의 피곤은 기호와 전위 때문이었다.
  평론가 하상일이 책 뒤편에 쓴 해설 “‘별 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에서 첫 마디가 나를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요즘 들어 시를 읽는 일이 여간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난한 독서의 과정을 거쳐 한 편의 평문이라도 써야 할 때면, 너무도 낯설고 기괴한 시의 언어와 구조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109쪽)

 

  아, 현대문학에 대해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전문가인 평론가도 요즘 시를 읽는 일이 나처럼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는 걸 아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요즘 시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이런 사소한 것에조차 기대 위안으로 삼고 싶어 한다면 이게 시인의 문제인가, 독자의 문제인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시를 벗어난다. 많은 시가 시골, 염소를 먹이는 부안 감다리의 살구나무집이기도 하고, 정읍에 있는 닭 놔먹이는 집과 담 없이 이웃한 작은 집이기도 한데 시인의 늙은 모친이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곳, 그러니까 시인이 생명을 시작해 아홉 달 반 동안 입 대신 입노릇을 했던 배꼽과 소통하던 어머니, 궁극의 고향인 셈이다.
  나는 이 시가 제일 좋았다.

 


  옛일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은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전문)

 


  한때 살던 강마을 언덕, 이걸 그대로 읽을 수도 있고 그저 시인의 옛 시절로 생각해도 좋겠다. 그때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었단다. 김만옥이란 소설가가 쓴 책 《내 사촌 별정우체국장》이 순간 떠올랐다. 김만옥은 읽은지 하도 오래라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한다. 아, 가까운 곳에 책이 있다. 지금은 절판이니 구경이나 하시라.

 

  


  별정우체국. 스카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풍경을 떠올리면 딱이다. 요즘에야 현대판 음서니 뭐니 말이 많지만, 민간인이 시골에 작은 점방을 내고 우편업무를 했던 곳이다. 시인이 우체국을 내볼 생각이 간절했다고 하는데, 진짜 우체국 대신 사람들 사이 의사소통과 체온의 전달을 이야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종지가 강가의 아침 안개, 초저녁 풋별 냄새, 싸락눈 치는 밤을 담을 수 없었다는, 시인으로서 크기가 작음을 수줍은 은유로 말한 것이리라.
  지난 시집 《거미》에선 어머니가 미화원으로 일하는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다가, 이젠 사회인이 된 박성우. 그새 장가들어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살았던 모양이다. 근데 가끔 시골에서 어머니가 다니러 오시곤 했던 모양이지? 손등이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했던 아버진 저번 시집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홀로 서울길을 들렀던 어머니가 집에 가시는 길에 아들이 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어떤 통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읍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은 노인들 몇만 듬성듬성 앉아 있다 안전벨트 안허면 출발 안헐 팅게 알아서들 허쇼잉, 으름장 놓던 버스기사가 운전대 잡는다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휴대전화 소리 들려온다 어 닛째냐 에미여 선풍기 밑에 오마넌 너놨응게 아술 때 쓰거라잉, 뭔 소가지를 내고 그냐, 나사 돈 쓸 데 있간디

 

  버스는 시큰시큰 정읍으로 가고, 나는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슬몃슬몃 들어가 본다  (전문)

 


  참 어미 자식 간에 고단하게 산다. 그래도 그잖여? 보기 좋잖여? 박성우의 시들이 이래서 좋고 마음에 든다. 요즘 어느 시인이 있어 아직도 시를 이렇게 구닥다리로 쓴댜. 진짜로 ‘요즘 시’들 계속 읽다가 박성우의 시집을 여니까, 요즘 시들의 우울하고 도착적이고 낯설고 기괴하지만 세련된 시어들에 그새 익숙해졌는지, 이 어수룩하지만 정감 넘치는 시들이 글쎄 촌스럽게 읽히는 거 있잖은가. 아하, 이래서 시인들이 줄창 기괴한 기호학을 선호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도 아직은 박성우 같은 시인이, 아직이 뭐야, 아직이. 박성우 같은 시인은 앞으로도 비록 수가 적을지언정 반드시 존재할 것이고 존재해야 한다.
  장가들어 아이 낳고 사는 시인. 그러나 자본은 시인의 가족들에게도 호의적이 아니라서 백일도 안된 어린 딸을 밥알처럼 떼어 처가로 보내고, “아내는 서울 금천구 은행나무골목에서 밥벌이를” 하고 가장인 시인은 “전라도 전주 경기전 뒷길에서 밥벌이”를 해 “한 주일 두 주일 만에 만나 뜨겁고 진 밥알처럼 엉겨붙어” 자는 세월을 지내야 한다. (<유량>) 그러니 가장이라 해도 집안 살림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시가 나왔겠지.

 


  맛있는 밥

 


  밥벌이한답시고 달포 넘게 비운 집에 든다

 

  아내는 딴소리 없이 아이한테 젖을 물린다
  허기진 나는 양푼 가득 밥을 비벼 곱절의 밥을 비운다
  젖을 다 먹인 아내가 아이를 안고 몸져눕듯 웃는다
  우리 아가 똥기저귀통에 비벼먹으니까 더 맛있지?

 

  아기도 소갈머리 없는 나도 잘 먹었다고 끄으으, 트림을 한다  (전문)

 


  그래봤자 자기 딸 똥기저귀 담았던 그릇인데 거기다가 밥을 좀 비벼 먹은들 그게 뭐 대수랴.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나 같아도 그냥 껄껄 웃고 말겠다. 시를 다 읽자마자 그림이 탁, 그려지잖은가. 젊은 부부의 저녁상과 이어질 느긋한 밤 시간이.
  이번 시집에선 저 앞에 말했듯이 ‘언어를 통해 그린 화폭이 큰 수채 풍경화’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그런 시 한 편 읽고 독후감을 마감하자.

 


  산사(山寺)

 


  배롱나무 그늘 늘어진 절간
  요사 마루엔 노스님이 낮잠에 빠져 있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댄 호미와 괭이는
  흙범벅이 된 몸을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코빼기도 없는 고무신이 삐죽
  흙 묻은 코빼기를 내미는 절간,

 

  연잎에 엎드린 청개구리만
  목탁을 두 개나 들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노스님 몫까지 하느라고
  울음주머니 목탁을 불퉁불퉁 두드리고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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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6-01 1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시 풀이 너무 재미집니다ㅋㅋㅋ(댓글에 방언을 쓰고싶은 리뷰ㅋㅋ)
질문:어떤 통화에 어머니가 말씀하신 ‘소가지‘는 뭘까요?
사전 찾아도 알쏭달쏭하네요🤔🙄

Falstaff 2021-06-01 10:37   좋아요 5 | URL
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신 거 같아서 고맙습니다.

‘소가지‘는 전남지역에선 소가지, 전북과 충남 남부에선 흔히 ˝쏘가지˝라고 발음하고요, 성질부리는 걸 말합니다.
엄마가 5만원 두고 왔다는 걸 들은 아들새끼가, 아 엄니는 돈도 없음서 뭐하러 그런 걸 두고 가, 하는데 속으론 좋은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유감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걸 엄마가 야는 뭘 그렇게 승질이냐, 승질이, 라는 뜻으로 소가지.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6-01 10: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암호와 파편과 괴멸의 골짜기가 싫어 시를 점점 가까이하지 않는것 같아요~~
올려주신 박성우시인의 시도 좋고
그것을 풀어주신 폴스타프님의 해석이 맛깔납니다^^
엄마한테 소가지 부렸지만 금방 그 돈으로
웃었을 아들이 연상돼요 ㅎㅎ

Falstaff 2021-06-01 11:14   좋아요 3 | URL
그리고 암호, 파편, 기호.... 같은 시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죽도록 우울하다는 거라서 읽기가 더욱 불편해요. ㅠㅠ

ㅎㅎㅎ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파랑 2021-06-01 1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거미>도 좋던데 이 작품의 시들도 좋네요. 정말 뭔가 오래된 느낌이 나서 더 인상적이네요~~ 너무 어려운 시는 정말 의미를 모르겠더라구요 ㅜㅜ

Falstaff 2021-06-01 11:34   좋아요 3 | URL
그것보세요.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편하고 잔잔한 시들을 좋아하는데, 시인들은 갈수록 혼돈의 안개로만 빠져드니 말입니다.

.....근데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하더라고요. 많은 전문가들 말씀이 그렇대요. 씨...

행복한책읽기 2021-06-01 11: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넘 재밌게 읽었어요. 박성수 시인 시들은 참 편안하고 구수하구요, 폴스타프님 시풀이 넋두리는 찰떡처럼 쫀득쫀득합니다. 투덜이 스머프가 떠올랐어요. 아주 찰진 ‘소가지‘에요. ^^

Falstaff 2021-06-01 12:31   좋아요 3 | URL
오호호호.... 오늘 제 글을 재미나게 읽으신 분들이 많으셔서 기분이 아주~ 째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글쎄 시적 성찰이나 완성 같은 고귀한 말씀이 진리인지 잡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딴 거 보다 박성우 처럼 옆에 있는 듯한 시들이 훨 친근하고 좋습니닷!!!

noomy 2021-06-01 12: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어무~ 좋습니다! 시란 역시 읽는 순간 눈앞에 그려져야 한다니까요~ ㅎㅎ

Falstaff 2021-06-01 12:27   좋아요 3 | URL
그죠, 그죠. ㅋㅋㅋㅋ
6월 첫 날부터 기분 좋습니다. 어제 밤엔 소갈비 궈 먹었지, 오늘 회사 점심 땐 우거지 해장국 나왔지, 서재 들어오니까 다 즐거워 하시지.
좋다!
이제 마지막 하나, 로또만 남았다!!!!!

그레이스 2021-06-01 1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산사
시 너무 좋아요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와~!

Falstaff 2021-06-01 14:09   좋아요 2 | URL
ㅎㅎㅎ 딱 그림이 그려지잖습니까.
참 근사한 풍경화입니다. ^^

그레이스 2021-06-01 14:37   좋아요 1 | URL
맞아요~

mini74 2021-06-01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미소가 ㅎㅎ 예전 생각도 나고요. 어무이 맘이 가슴에 팍! 하고 와닿습니다. 재미있게 그리고 조금은 뭉클하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1-06-01 20:05   좋아요 2 | URL
음, 그러십니까. ㅎㅎㅎㅎ
좋은 모습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좋군요!!!

붕붕툐툐 2021-06-0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 너무 재밌고 좋아요!! 진짜 하나하나 머리 속에 다 그려지네요~ 완전 찜, 찜!!

Falstaff 2021-06-01 20:58   좋아요 1 | URL
시집 한 권 읽고 대충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있으면 본전, 두 편이면 횡재, 세 편 이상이면 대박이거든요.
‘요금 시‘가 든 시집의 경우엔 한 편이 대박인데 그것도 찾기 힘들더라고요.
한 권 사 두시면 두고 두고 읽으실 만할 겁니다.
저 전라도 강진 시인 김영랑도 한 번 생각해보시고요. ㅎㅎㅎㅎ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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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세라 워터스의 책을 읽으려 마음먹은 것은, 흥미롭게 읽은 <나이트 워치>에 이어서 출판사 열린책들이 창사 30년 기념행사로 베스트셀러 열두 편을 선정해 소위 리커버 판으로 내놓았는데, 여기에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었고, 무려 912쪽의 두꺼운 책을 정가 만 원, 할인가 9천 원으로 판매를 했음에도 그걸 발견하지 못해 품절의 딱지를 쓰고 말았으나, 거의 완벽하게 새 책 같은 헌책을 6천 5백 원 주고 살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핑거 스미스>가 다른 건 다 빼고 무지하게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며, 그게 워터스가 초기에 쓴 소위 빅토리아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라는 얘기를 주워들었으니 어찌하여 그토록 재미난 이야기 시리즈의 나머지를 안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낮추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전형적으로 잘 쓴 대중문학인 <핑거 스미스>를 헌책으로 읽은 바에야, 어떻게 <벨벳 이야기>와 <끌림>의 새 책을 선택하겠는가. 새 책이라야 ① 한 페이지에 서른 줄을 넣던 걸 스물다섯 줄로 줄 간격을 늘이고, ② 한 줄의 글자 수를 줄이는 편집과 ③ 제목을 영어로 쓴 거밖에 없는데 정가를 무려 13퍼센트 인상하는 출판사의 특출난 상도덕도 나로 하여금 헌책을 사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 ③이 제일 큰 이유였을 것이다. 얘네들이 가격 13% 올리는 걸 너무 우습게 알아. 짜식들아, 봉급 13% 오르려면 요즘 같은 시대에 적어도 3년은 걸린다. 하여튼 이래서 합정동 알라딘 헌책방에서 한 권에 만 원씩 주고 사서 읽었다.

 

  이 책은 1870년 템스강 하류 켄트 지역에 있는 영국 최고의 굴oyster 산지 윗스터블 출생의 아가씨 낸시 애슬리 양의 이야기다. 영국에서도 굴이라고 다 같은 굴이 아니라, 윗스터블의 굴로 말씀드리면 일찍이 에드워드 7세 폐하께서도 늘상 옆구리에 달고 다니는 어여쁜 정부 케펠 부인과 함께 잉글랜드 전역에서 가장 알이 굵고, 즙이 많으며 풍미가 있으면서도 섬세한 맛이 나는 특별한 굴을 자시러 왕림했다고 한다. 참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목, 벨벳 애무하기. 자, 애무하려고 하는데 벨벳이라? 사람의 신체 가운데서도 마치 굴처럼 즙이 많으며 풍미가 있고, 심지어 감촉마저 굴과 비슷한 장소가 있으니, 굳이 발음은 하지 마시고 그게 어딘지 상상만 하시라. (사이)… 맞다. 당신이 상상한 곳. 거기가 벨벳이다.
  윗스터블에서도 유명한 굴 전문 식당 “애슬리 굴, 켄트 최고의 맛”의 주인장 에슬리 씨에게 일남이녀가 있었는데, 이중의 막내딸이 우리의 주인공 낸시 애슬리 양. 열여덟 살 먹을 때까지는 이 굴 식당에서 굴 껍데기 까는 일을 하다가 딱 하나 취미 붙인 것이 연예장演藝場, 일종의 서커스에서 공연, 특히 춤과 노래를 즐기는 것이었다. 인근 켄터베리의 연예장의 매니저인 트리키 리브스의 조카 토니가 언니 앨리스의 남자친구였던 관계로 돈 안 내고 좋은 자리에서 만날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만 남장여자 키티 버틀러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이게 낸시 양의 인생을 뒤집어 놓는다. 만일 연예장 공연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아했더라도 키티 버틀러의 남자 복장과 노래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당시가 19세기 말이니까 불과 1년 후엔 남자친구 프레디와 결혼하고, 2년 후엔 엄마가 되어 가을부터 봄까지 쉬지 않고 굴을 까고, 찌고, 튀기고, 삶느라 날이면 날마다 퉁퉁 불은 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당시 잉글랜드의 평균 수명 29.9세에 달하면 한 많은 한 세월, 내가 언제 한 오백 년 살잖느냐, 궁상 한 번 떨고 숟가락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낸시는 키티 버틀러를 본 순간 그가 웨스트엔드의 신사이며, 특히 짧게 친 견과류의 갈색 머리카락과 그로 인해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보고는, 온몸에 경련, 까지는 아니고 전율이 머리끝부터 아랫배 깊숙한 곳까지 찌릿! 뼈마디가 녹작녹작하니 그냥 반해버리고 말았다. 이날 이후 낸시는 매일같이 자기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홀로, 당시에 아가씨 혼자 무려 기차를 타고 켄터베리까지 가서 버틀러 양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버틀러 양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리하여 기관차의 질주에 드디어 시동이 걸린다. 이제쯤 얘기해도 좋겠다.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삼부작은 여성의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구성한다. <핑거 스미스>를 대폭 각색해 영화로 만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포함해서. 연예장에서 남장 여인, 즉 매셔인 버틀러를 본 순간 낸시의 몸을 관통한 전율은 성적 접촉을 기대하는 사랑, 사실 그게 진짜 사랑이긴 하지만 그런 몸의 갈망을 전제로 한 사랑이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순간에 마치 확 불이 붙는 성냥의 황 같아서 이들은 금세 친밀해졌고, 이걸 우정이라고 착각한 식구들은 친구를 집으로 초청하기에 이르는데, 그리하여 진짜로 굴 식당에 일차 왕림하게 된 버틀러 양은 식구들과 예상외로 친밀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낸시에게 벼락같은 부탁을 해버린다. 런던에서 온 기획사 대표 월터 블리스 씨가 자신을 런던의 극장에 데뷔시키겠다고 오퍼를 했다는 것. 그래서 낸시더러 자신의 의상 코디네이터가 되어 함께 런던에 가자고 하고, 당연히 낸시는 사랑하는 키티 버틀러를 따라 당시 세계의 수도, 런던행 열차를 타게 된다.
  차링크로스역에서 내려 마중 나온 월터 블리스의 마차를 타고 런던 시내를 드라이브하는 두 젊은 아가씨들. 이들의 눈에 차례로 허메저스티스, 엠파이어, 알함브라 극장 같은 호화로운 초대형 극장을 둘러보게 한 후 이런 거리와 비교해 좀 추레해 보이는 브릭스턴의 덴디 부인의 하숙집 계단꼭대기 한 칸짜리 방에 숙소를 정한 키티와 낸시. 낸시는 집에서 늘 그래왔듯이 자연스럽고, 키티는 별로 경험이 없는, 한 침대에서 둘이 자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여기서 키티는 낸시에게 요구한다. 이제 자매, 자기의 여동생이 되어달라고. 실망하는 낸시. 그러나 낸시는 키티가 사랑하는 방식대로 키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리라. 아니면 아예 키티를 사랑하지 말든지. 그러나 그건(키티를 사랑하지 않는 일) 끔찍하리라는 걸 아는 낸시.
  그러나 이렇게 내버려 둘 작가 세라 워터스가 아니다.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가는 키티 앞에 매우 많은 다른 매셔, 즉 복사본들이 등장해 경쟁이 심해지고, 낸시 역시 춤과 노래에 자질이 있었던 터라, 이를 발굴한 블리스 씨는 둘이 함께 남장여자로 공연을 하게 해 대박을 친다.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돈 좀 번 낸시는 키티에게 진주목걸이를, 키티는 낸시에게 비싼 이브닝드레스를 선물한다. 비싼 속옷과 이브닝드레스의 진짜 목적은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벗기 위한 것이라서, 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 이들은 어느 무시무시하게 추운 날, 드디어 드레스를 벗었고, 굴 까기의 달인 낸시는 급기야 굴 껍데기를 벗기듯 드레스를 벗고 벨벳을 애무하기에 이른다.

 

  참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책을 살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무덤덤했지만 뜻을 알고 나니까 오프라인 책방이라면 못 샀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척 야한 장면도 마구 나오는데 영국인들은 베드씬도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는 인종이 아니다. 전철에서 읽기 곤란한 수준.
  그건 그거고. 촌 바닷가 윗스터블에서 세계 화폐의 중심지이자 자본주의의 얼굴이며 사회주의 운동의 수도, 거대한 우범지역인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낸시. 낸시는 오직 하나, 자신이 애인으로 키티를 사랑한다는 것이 중요한 반면, 키티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회와 시민들의 시각, 커밍아웃 이후에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과 따돌림 같은 것에 아주 민감하다. 그러니 이들 사이의 사랑은 언제가 될지 시간문제일 뿐 처음부터 폭파가 예정되어 있던 것. 아니나 달라,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게 되는데, 세상에는 애초에 아름다운 이별이 없다고는 하나, 가장 안 좋은 방법으로 종막을 고하고 저 거친 황야, 런던이라고 하는 정글 속에 홀로 내동댕이쳐지는 낸시가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달래가는지, 재미 하나는 죽여주는 작품이니 직접 확인해보심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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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31 09: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책표지 보이게 들고 전철에서 읽으셨으면 ㅋㅋㅋㅋㅋㅋ
이 작품은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만들었는데, 그 드라마도 무척 재미나요. 근데 폴스타프 님께 추천은 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31 09:26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마치 미니 시리즈 보라고 하신 말씀 같아서, 뜻을 저버릴 수 읎잖아요, 얼른 작은 애 불러 다운 받아달라 해야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31 09: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자제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도 책이 못집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31 09:52   좋아요 2 | URL
검색할 때 제목은 <티핑 더 벨벳>이고요, 자매품으로 <핑거스미스>도 재미납니다. 미니시리즈라고 해도 두 작품 다 3부 안으로 끝났던 거 같아요.

Falstaff 2021-05-31 09:53   좋아요 3 | URL
제 집은 애초 삼강오륜이 거꾸로 서 있는지라 박찬욱의 <아가씨>도 엄마, 아빠(나), 작은 아들, 셋이서 아주 재미있게, ˝아, 탁월해, 탁월해!˝ 하면서 봤는 걸요.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31 11:04   좋아요 2 | URL
저는 <핑거스미스>가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 모드 역 맡은 여자가 너무 이뻐서...근데 이 여자가 <디 아더스>에서 벙어리 하녀로 나오더라구요.

coolcat329 2021-05-31 09: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bbc드라마로 이거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ㅋㅋ

Falstaff 2021-05-31 09:34   좋아요 3 | URL
저..... 야~한가요? ㅋㅋㅋ

coolcat329 2021-05-31 11:01   좋아요 3 | URL
2003,4년인가 봤는데,
당시 파격적인 소재라 좀 충격을 받긴 한듯 한데요...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ㅎㅎ

다락방 2021-05-31 1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도 엄청 재미있게 보았거든요. 오옷 뭐야 재밌어 재밌어 이러면서 봤는데 벨벳 애무하기도 이 리뷰 읽으니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으앗. 사야겠어요. 근데 제가 세라 워터스의 책을 하나 더 사둔게 있긴 한데 설마 이건 아니겠죠? 아아 사야겠어요. 읽고 싶습니다. 완전 재밌을것 같아요. 그리고 저 이 리뷰 읽기 전까지 벨벳 애무하기가 그런건줄 몰랐습니다... 세상 순진한 다락방인 것입니다..

다락방 2021-05-31 10:50   좋아요 1 | URL
구매함 검색해보니 [나이트 워치]랑 [게스트]를 사두었네요. 아니, 벨벳.. 은 왜 안사뒀을까요? -.-

Falstaff 2021-05-31 11: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지금 워터스의 <끌림> 읽고 있거든요. 중간 좀 못미쳤는데요, 이건 아직까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깁니다. 월요일 오전이라 더 그렇겠지만 하품만 뻑뻑 하고 있습니다.

벨벳은 암만해도 시청각으로 봐야 제격일 거 같아요. 흐흐흐흐.... 얼른 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6-02 11:13   좋아요 0 | URL
다 부장님이 <나이트 워치> 산 거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 부장님 비서할까부다... ㅋㅋㅋ

다락방 2021-06-02 12:28   좋아요 0 | URL
아니 저도 모르는 걸 어찌 기억하세요 잠자냥님? @.@

잠자냥 2021-06-02 13:24   좋아요 0 | URL
<나이트 워치> 제가 리뷰 쓴 적 있는데, 그때 뭔가 사겠다고 하셨던 거 같기도...(근데 그 글에 사셨다는 댓글은 안 보이는데... 뭐지? 독심술인가?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02 15:04   좋아요 0 | URL
하아- 제가 안그래도 이거 왜 샀나, 혹시 잠자냥 님 때문인가.. 의심하긴 했었는데 의심이 사실로 드러났네요. 다 잠자냥 님 때문입니다.. ㅠㅠ

잠자냥 2021-06-02 15:13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 제가 비록 부장님께 40평대 아파트를 장만해 드릴 수는 없지만, 그 40평 아파트를 책으로 가득 채울 만큼 낚시질은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충성!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처음으로 올렉 볼코프를 만난 건, 미국 마이너 음반 레이블 '버진'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통해서였다. 이 판이다.




 이 때가 1990년대가 막 시작할 당시.올렉 볼코프, 소위 58년 개띠, 막 서른 살이 넘어 처음으로 신대륙에 도착해...가 아니라 모스크바 필하고 녹음한 것을 미국에 보내 서방세계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취입한 것으로, 한 마디로 방방 떴다. 물론 나중에 같은 소비에트 출신의 혜성같은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등장으로 본전도 못 찾고 흐지부지 없어졌지만.

  오늘 이이가 갑자기 생각이 나, 너튜브 검색을 해보니, 하 참 격세지감이다. 하긴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뭐 할 말이 없지만. 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비가 작품 3-1, 들어보시라.


  저 흰 머리의 퉁퉁한 아저씨가 올렉 볼코프. 머리 숱은 별로 차이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으, 지나간 세월은 저이하고 비슷하게 나도 할퀴었을 것. 세월이 다 그렇듯, 조금은 슬프다.

 Oleg Volkov를 검색하면 슈니트케 스튜디오와 쇼스타코비치 실황은 나오는데 내 음반, 쇼스타코비치 스튜디오 녹음은 검색하기 쉽지 않다.

  생상 협주곡 2번은 워낙 곡이 화려하고 커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전설적인 연주를 별개로 치면 내 허접한 귀엔 어떤 연주라도 다 좋게 들린다. 물론 이 밤에 듣기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링크를 걸어본다. 이어폰 꼽고 들어보실 분은, 좋은 꿈 꾸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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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5-30 0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앱으로는 못 보네요. 그래도 반응 없는 까만 회면도 운치 있습니다. 우연히 멀리 회상하기에는.

Falstaff 2021-05-30 06:31   좋아요 3 | URL
옙. 시간 나면 한 번 검색해보셔요. 피아노는 워낙 쟁쟁한 연주자들이 많아 이름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재야에 묻힌 실력자들 또한 제일 많은 거 같습니다.

새파랑 2021-05-30 0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모르는 음악가도 많지만, 그만큼 좋은 음악도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아침부터 좋은 🎹 음악~!!

Falstaff 2021-05-30 08:4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즐겁게 감상하면 다 좋은 음악이지요!!!

coolcat329 2021-05-30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초 물주고 커피 두 잔 -곡 길이가 한 잔으론 안되더라구요-마시며 일요일 아침을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채웠습니다. 엘레지는 참..비 내리는 차 안에서 듣고 싶을 정도로 가슴을 적시네요. 생상곡 협주곡 2는 처음 시작부터 피아노 연주가 굉장히 긴장되네요. 2nd movement 라고 새로 시작되는 곡은 또 어쩜 그리 발랄경쾌한지~~너무너무 잘 들었습니다 ~^^

Falstaff 2021-05-30 21:58   좋아요 1 | URL
어흐흐... 이 페이퍼 생각하면 흑흑흑..
어제 쐬주 한 잔 하고 쇼스 탁 들은 김에 피아노협주곡까지 가서 올렉 볼코프 생각하고, 그래 CD 올리기 귀찮아 너튜브에서 검색한 건 좋았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취기가 뺑 돌아 완전 취중 업로드 한 거였습니다. ㅠㅠ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보니 어마 뜨거라, 어제 뭐를 올렸잖여? 해서 와봤더니, 이건 뭐 중딩들도 쪽팔려 쓰지 않을 문장으로 범벅을 해놔서 말입지요.
아이고..... 세상에나.
그래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음악까지 다 들어주셨다니 이 아니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 생상의 피아노협주곡 2번의 호로비츠 연주 음반은 진짜 브릴리언트라 언외로 하자는 의미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여차하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표현해놓았네요. 아 씨.... 조만간에 술을 끊든지 목을 끊든지 해얄 텐데 참...... ㅠㅠ

coolcat329 2021-05-30 22:02   좋아요 1 | URL
아~기분좋게 약주하시고 올리신거군요. 어쩐지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에 슬프다...라는 문장이 평소 제가 생각하던 폴스타프님같지가 저 문장을 두 번 읽었네요 ㅎㅎ

아주 살짝 감상적인 마음을 내비치신거 말고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니 너무 자책마셔요~~ㅋㅋ

호로비츠연주를 들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1-05-31 09:11   좋아요 1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취중에 댓글 안 달고, 페이퍼 안 쓰려고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에휴....
 
장미 박람회
외르케니 이슈트반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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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4월에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족의 아들로 태어난 외르케니 이슈트반 기외르기는 부다페스트 경제-공과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다가 진로를 약간 바꿔 가업인 약학을 전공했다. 1941년, 29세 때 단편선 <바다의 춤>을 출간해 이름을 얻었지만 이듬해 2차 세계대전 중 돈 강 근처로 참전했다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군인도 아닌 작업노예 수준으로 전락하고, 그것도 모자라 소련군에게 생포되어 모스크바 근방의 노동자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는 1946년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이후 1956년, 우리에겐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로 알려진 헝가리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작품을 출간할 수 없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아직 약사 자격증은 멀쩡한지라 그냥저냥 먹고 살면서 작품도 쓰며 남은 생을 보낸다. <장미 박람회>는 그가 죽기 2년 전인 1977년에 쓴 짧은 소설로, 주요작품 리스트에는 들지 못하는 거 같다.

 

  제목이 장미 박람회이고 책의 표지가 붉은 장미색이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헝가리 TV 방송국에 코롬 아론이란 이름의 신출내기 방송 조연출이 자신의 이름을 달고 찍는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죽음을 앞둔 세 명의 환자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을 넘어가는 장면을 찍는 아이디어를 낸다.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말기 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다큐. 그러나 우리 것은, 기억하기로는 죽음을 마치 시처럼 애틋하게 표현해놓았었다. 죽음의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화면이 암전 비슷하게 바뀌다가, 몇 년 몇 월 며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멘트로 마감했지 아마. 코롬 아론은 다르다.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후 장례식에 이어 매장하는 장면까지 모두 필름에 담겠다는 제안.

 

  * 어머나 세상에. 벌써 필름에 담는다, 라고 하니 좀 어색하다. 1977년 작품. 디지털 캠코더가 아니라 VHS 필름 돌아가는 아날로그 캠코더 시절이었던 것을.

 

  코롬(성姓)의 괜찮은, 그리고 어찌 생각하면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결재를 받지 못한다. 그걸 사회주의 국가의 경직된 사고방식인 것으로 여겨 감히 문화부 장관한테까지 편지를 보내고 난리를 죽였으나 역시 관리들의 것도 거기서 거기라 코롬은 결코 답장을 받지 못하는데, 이게 웬일이니, 다큐멘터리 제작부의 울러릭 부장이, 열 받아서 오전부터 농약 같은 독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코롬에게 와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더니, 어이 애송이, 그래 다큐멘터리 제목으로 “우리들은 죽는다.”가 뭐니, 라고 훈수를 두어 결국 “장미 박람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방송하게 된다.
  코롬이 타큐를 구상할 때부터 세 명의 죽음에 이르는 환자를 교섭해왔는데, 울러릭 부장이 승인을 통보하자마자 이 가운데 한 명인 더르버시(헝가리의 a는 ‘ㅏ’ 발음 대신 음성모음인 ‘ㅓ’로 발음하는 모양이다) 씨에게 연락을 하니, 안타깝게도 지난주에 숨을 거두어 화요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래 이 출연진에선 과부가 됐고 당장 현금 출연료가 필요한 더르버시 부인의 인터뷰만 딴다.
  두 번째 출연자는 말기 소화기 암으로 완쾌의 희망이 없는 화훼장식 노동자 미코 부인. 남편은 헝가리 혁명 당시 기관총을 들고 몇 번 집에 오더니 이후 2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유럽을 거쳐 미국에 자리 잡았다는 소문만 들리고 소식 한 장 없는 여인. 이런 집은 대개 두 개의 우환이 있는 법이라 녹내장이 심화되어 빛만 겨우 알아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이 엄마의 심통과 성질이 보통이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 교섭자는 같은 방송국에서 방송 밥을 먹는 작가 J. 너지. 6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저승이 어떻게 생겼는지 일차 왕림한 바 있으나 숨은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아온 인물. 숱한 여성편력과 경쾌한 농담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상에, 아무리 겉으로 그렇게 보이더라도 당신 주위에 진짜로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인간, 세 명만 대보라. J. 너지 역시 어찌 그러하겠는가. 그가 요즘 심장에 또다시 예기치 못하지 않은, 즉 벌써 낌새를 챈 이상 증상을 느껴 코롬의 다큐를 자신의 마지막 무대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한 명은 벌써 죽었고, 두 명은 곧 죽으려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고, 설마 죽음이 계급에 따라 차별이야 하겠느냐마는, 또 다른 한 명은 돈은 모르겠으되 생각하고 생활하는 방식에 먹물이 잔뜩 든 남자 인간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에 맞게 집에서 죽음을 맞고, 먹물 역시 자신한테 어울리게 4인용 병실을 2인용 병실로 변경한 곳에서 의연하고 계획에 맞춘 죽음을 공연하게 된다.

 

  죽음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들한테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테제일 터. 그것을 외르케니는 출연자 가운데 특히 미코 부인과 J. 너지를 통해 어둡거나 무섭지 않은, 오히려 경쾌할 수도 있는 터치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외르케니 자신이 저널리즘에 글을 발표하는 것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고, 이어서 라디오, TV 방송국을 거쳐 희곡과 시나리오 등을 썼으니 방송국 이야기가 친숙할 것이다. 아울러 작중 J. 너지와 비슷한 질환을 앓았고, 그와 비슷하게 결혼 역시 세 번을 해 J. 너지를 더욱 능란한 캐릭터로 소개할 수 있었을 듯하다. 또한 이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책 《일분 이야기들》로 헝가리 문단에 극히 짧은 소설을 최초로 소개한 바 있다고 하니 작가의 기준으로는 <장미 박물관>이 짧지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짧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노벨라 정도.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위에 소개한 스토리를 다른 등장인물들과 에피소드를 가지고 만들어나가니 글 읽는 속도감이 대단하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슨 거창한 정의를 내리려하지 않는다는 점. 죽음은 그냥 죽음이다. 미리 생각할 필요 없다. 죽을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죽게 되니까 그때 가서 걱정을 해도 조금도 늦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아, 미리 땡겨서 죽을 걱정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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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28 10: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랑 다른게 이야기는 뮌가 우울한 이야기군요 ㅜㅜ 뻘소리지만 표지랑 제목이랑 폴스타프님과 왠지 안어울리는 느낌이 드네요 ㅎㅎ

Falstaff 2021-05-28 10:43   좋아요 4 | URL
ㅎㅎㅎ 이게 블랙코미디로 읽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리 생각하면 괜찮습니다만, 얘기하신대로 전 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새삼 느끼는 건데요, 헝가리에 글 잘 쓰는 작가들이 은근히 많더라고요.

다락방 2021-05-28 1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후훗 이번 책은 제가 사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샀기 때문이지요.

그럼 이만..

Falstaff 2021-05-28 13:26   좋아요 1 | URL
이 책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함 시작해보셔요. ㅎㅎㅎㅎ

레삭매냐 2021-05-28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로 단박에 30쪽 읽었습니다.

상당히 흥미진진한 내러티브네요.
당장 읽고 싶으나 오늘 도서관이
쉬는 날인지라... 아-

Falstaff 2021-05-28 13:27   좋아요 1 | URL
도서관이 금욜에 쉬는군요!
낼 백신 접종하고 집에 올 때 들르셔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coolcat329 2021-05-28 1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소련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게 참 기적같네요.

근데 제목과 내용이 정말 안 어울리네요. 어두운 내용인데 블랙 코미디로 읽을 수 있다니 궁금해집니다.
동유럽 소설들이 깊이가 있는거 같아요.

Falstaff 2021-05-28 20:22   좋아요 0 | URL
소비에트에 의하여 저질러진 수용소 내 야만행위가 요즘 알라딘의 이야기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솔제니친 등의 소설가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아주 완곡하게 고발되고 있던 것입지요. 근데 그건 포로병이나 정치범들에 관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요...
제가 유대인들에 대한 소련의 폭력을 처음 읽은 것이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였습니다. <원수들, 사랑 이야기>나 <쇼샤> 보시면 스탈린이 히틀러하고 적어도 맞고 상대는 됐다는 걸 알 수 있습지요. 바셰비스 싱어, 글 참 아리게 쓰는 좋은 작가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ㅋㅋㅋㅋ
 
족장의 가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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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이 364쪽까지인데 딱 여섯 문단으로 되어 있다. 이런 소설작품은 2014년에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 이후 처음이다. <소멸>은 근 5백 쪽에 육박하는 작품이 딱 두 문단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이 읽기에 더 까다로웠다. 혹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상당히 낯선 문장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길이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지어 마지막 여섯 번째 문단은 70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한 문장 안에서도 화자가 수시로 변한다. 그러면서 리듬을 탄다. 모르긴 해도 원문 자체가 운율rhyme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역자 송병선은 운율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고심하다가, 전적으로 내 생각에, 우리말도 시조나 가사에서처럼 조調 또는 조성調聲이 있어 글자 수를 조절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감안한 것 같다. 눈으로 활자를 좇아가며 읽다가 나도 모르는 새, 실제 발음은 하지 않지만 성조를 따라 말하는 것처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고 긴 문장이 어떤 수준인가 하면, 거의 대부분 완전한 복문complex sentence이다. 복합문 사이에 화자가 바뀌는 건 얘기했고, A 화자가 B 화자‘들’로 바뀌기도 하고, 한 문장 안에서 화자의 젠더가 바뀌기도 한다. 한 ‘문단’ 안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이나 그림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히 대화가 극도로 생략되어 있는 글에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지만 유효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무대는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가상의 나라다. 족장, 이라고 하는 건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경험했듯이, 19세기 초에 독립을 쟁취한 후 정권을 틀어쥐는데 성공한 군인 출신의 독재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대개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권력을 향유하다가 뒤를 잇는 또 다른 대령에 의하여 실각하는 전철을 밟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족장은 젊은 시절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수면이 흔들리는 걸 보고 운명을 읽어주는 무꾸리로부터, 접견실 옆에 있는 집무실에서 잠을 자다가 자연사하고, 죽을 때 평생 매일 밤 자던 모습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누운 상태이며, 계급장 없는 리넨 군복을 입고, 각반을 하고, 황금 박차를 달고, 오른팔을 구부려 머리 밑에 놓아 베개로 삼고 있는 형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죽느냐, 나이는 불명확하지만 107세에서 232세 사이였단다. 그렇다. 일단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한 번 생을 살았다 하면, 보통이 그냥 백년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족장이 권력을 잡고 백년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백년 이전까지가 다섯 번째 문단이고, 백년 이후가 72쪽 분량의 한 문장으로 된 마지막 여섯 번째 문단이다. 호세 이그나시오 사엔스 델라 바라라고 하는 대통령 비밀경찰이 마지막으로 하여튼 뭔가 힘 좀 있는 국민 거의 대부분한테 말로 하기 힘든 죄목을 뒤집어 씌워 다 몰살시킨 8월 12일, 장군님, 각하의 집권 100주년을 축하하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운명인 벤디시온 알바라도에게, 벌써 백년이 되었답니다. 제기랄, 벌써 백년이래요,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가네요, 중얼거리며 거의 완전하게 뒷방으로 물러나가, 또다시 백년이 넘게 권좌에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나라가 완전히 거덜이 나서, 자신에게 테러를 가할 반역자들도, 테러할 이유도 없어져 다 허물어져가는 대통령관저에 암소들과 닭들이 거의 폐허로 만들어 놓은 속에서 백여 년 전에 무꾸리의 세숫대야에서 본 형태로 죽을 때까지다.

 

  독재자에 관해서 책을 쓰고 싶다면, 20세기를 살았던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가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남북 아메리카를 통틀어 19세기, 20세기에 관해 말하자면 이렇다.


  “민주적 지도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민주적인 반면, 독재자는 거의 다 비슷한 방식으로 독재다.”


  소설가라면 ‘거의 다 비슷한 방식’ 말고 거기서 조금 다른 것들을 발굴해냈을 터이지만, 사실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독재정치를 다룬 소설가들 역시 거의 비슷하다. 마르케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독보적인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라틴 아메리카의 붐 문학적 요소.
  놀라지 마시라. 거의 미라처럼 늙은 독재자가 경비부대마저 도망쳐버려 거의 폐허가 된 대통령 관저에서 독수리와 콘도르에게 뜯어 먹혀 얼굴 반 너머가 유실된 채 발견된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대통령의 사망을 여간해 믿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저 먼 예전에도 고독한 독재자는 지금과 똑같은 복장과 자세로 자연사한 것처럼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죽은 것은 족장이 인생의 가을을 맞은 초기로 상당히 생동감 넘치는 나라의 지도자였으며 그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던 시절이었다. 첫 번째로 죽기 십 수 년 전에 가짜 대통령 마차를 타고 원주민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치던 파트리시오 아라고네스라는 자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잡아 오라 해서 만나보니, 이게 자신의 분신이라 할 정도의 도플갱어. 장군은 파트리시오를 보더니 모두 예상한 것과 달리 사지를 찢어 죽이는 대신 과감하게 채용을 해버린다. 대가는 월급 50 페소. 그래도 왕이 되는 재앙 없이 왕과 같은 삶을 누리는데 뭘 더 바랄까.
  장군은 대역을 자기가 누리는 모든 편의를 똑같이 누리라고 허락한다. 하렘에 있던 수많은 애첩들도 포함해서다. 그리하여 애첩들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들을 무려 2천 명 가까이 생산해내는데,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앞선 작품에선 돼지꼬리가 달리기도 했지만, 칠삭둥이들이다. 이렇게 장군이 모든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나가는 와중에, 장군의 어머니가 사는 교외 저택에서 돌아오는 마차를 향해 탄압철폐, 독재자에게 죽음을, 등등의 전단이 수십만 장 뿌려지는 것을 본 얼마 후, 장군이 아니라 페트리시오가 장군 대신 독을 칠한 단도에 치명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죽음의 자리에 마지막으로 장군을 만나게 되는 페트리시오. 무꾸리가 일러준 대로 입히고 자세를 잡고 해서 결코 암살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자연사로 죽은 것처럼 보이게 연출될 페트리시오는 장군, 대통령, 또는 족장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각하는 그 누구의 대통령도 아니며, 대포 덕분이 아니라 영국인들이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에 권좌에 있는 것이며, 미국놈들이 전함에서 두어 개의 포탄을 쏴서 각하가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해주었습니다. 미국놈들이 흑인 갈봇집을 여기 두고 떠날 테니 우리 없이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두고보자 할 때, 각하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디서부터 명령을 내려야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때부터는 의자에서 내려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제가 죽어가는 이 순간을 이용해서 저와 함께 죽으십시오.”

 

  이렇게 죽은 적이 있어서 백년이 넘게 흐른 후 진짜 족장의 죽음을 앞두고도 남은 사람들은 섣불리 장군의 장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다. 족장 암살미수 사건 이후 숱하게 많은 국무위원과 장교들이 잔인하게 처형된 전력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족장이 가짜 죽음을 연출했는지 누가 알 것인가 말이지.
  이건 무수한 에피소드 가운데 그저 간단한 한 장면이다. 기억하시라. 글쓴이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그가 어디 한 가지 에피소드에 집중하는 사람인가. 족장만 해도 그렇다. 일찍이 시골의 매춘부 아들로 태어나 낳자마자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질병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운명이었으니, 지금이라면 외과 수술 한 번으로 고칠 수 있고, 혹시 재발한다 하더라도 정말 230세까지 살았다면 많아봐야 네 번만 재수술하면 그만일 질병인 탈장을 앓는 인물이다. 소장이 서혜부에서 중력방향으로 탈출해 고환의 위쪽으로 내려오는 질환으로 내려온 소장 때문에 책에서 불알이라고 표현하는 음낭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상태. 순우리말 토산불알과는 좀 다르지만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마르케스는 짓궂게도 시간 날 때마다 족장의 음낭을 거론하고는 한다. 이외에도 작가 특유의 과장법과 은유와 턱도 없는 망상과 상징의 해일이 밀려드는 걸 실감하실 수 있으나, 조심하시라. 길고, 길고 또 긴, 거의 유례가 없는 문장의 해일이 당신을 덮쳐버릴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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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27 09: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희망도서로 받아놓고 못읽고 그냥 반납하게 생겼어요 ㅠ
Falstaff 님 리뷰가 더 재미있어 보이네요.
문장의 해일 보다는...^^;;

Falstaff 2021-05-27 09:57   좋아요 4 | URL
아휴, 다른 작가라면 혹시, 정말 혹시 모르지만, 제가 아무리 잘 써도 어딜 감히 마르케스한테 비비적거리겠습니까. ㅋㅋㅋ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거 보면, 제가 속물 맞습니다. ㅋㅋㅋ

청아 2021-05-27 10: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까레니나법칙이 독재에도 통하네요! 어쩐지 읽기에 겁이나는 작품이지만 덕분에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ㅋㅋㅋㅋ

Falstaff 2021-05-27 10:53   좋아요 4 | URL
미미 님한텐 껌일 거 같습니다만... ㅋㅋㅋㅋ

까레리나 법칙은 제가 대충 만든 겁니다. 원래는 아시아 개발형 독재(이광요, 박정희), 라틴의 군부독재, 유럽 파시스트들의 다중의 힘에 의한 독재로 구분해보려다 에구, 귀찮아서 걍 까레니나한테 갔습죠. ^^;;

coolcat329 2021-05-27 14: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단하네요. 백년의 고독에도 2페이지 걸친 하소연이 나와 깜놀했는데 이 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

Falstaff 2021-05-27 14:10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저도 처음 경험해보는 경우예요. 단편소설 두 편 분량이 한 문장으로.. @@
근데 읽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역자가 아주 고민을 한 듯하더라고요. 무지 힘들었을 거예요.

coolcat329 2021-05-27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는 콜레라만 더 읽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 족장이 넘 끌리네요.ㅋㅋ

Falstaff 2021-05-27 16:05   좋아요 2 | URL
이젠 안 읽겠다고 마음 먹고는 다시 읽고, 진짜 읽나봐라 하고나서 또 읽고, 더 읽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해놓고 또다시 읽는 게, 이게 팔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쩔 수 없어요. 흑흑흑..... 저도 소설가 하나 있습니다. 흑흑흑흑흑.......

새파랑 2021-05-2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섯문단이 사실인가요? ㅡㅡ 70페이지의 문장이라니...이건 좀 무섭긴 한데... 문장의 해일을 경험해 보고 싶긴 하네요 ^^

Falstaff 2021-05-27 19:48   좋아요 2 | URL
옙!
한 문장이 72쪽입니다. 확인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해일에 휩쓸리셔도 추호도 제 탓은 안 하시깁니다! ㅋㅋㅋㅋ

전 취미가 번지 점프예요.(요즘엔 비싸서 거의 안 하지만....) 그러니 한 번 도전해보심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붕붕툐툐 2021-05-27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건 폴스타프님이기에 이렇게 읽어내신 거지, 저는 해일이 다가오기도 전 이미 저멀리 던져버렸을 거 같아요. 진정 존경합니다~~

Falstaff 2021-05-28 08:46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아닙니다.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걍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