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광장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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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프만의 허기>를 흥미롭게 읽으면서 곧바로 드 빈터가 쓴 다른 책을 샀고, 이제 읽었다. <바스티유 광장>이 드 빈터의 초기 대표작으로 루이 16세가 1791년에 무사히 오스트리아로 탈출한다는 가정 하에 쓴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렇지 않은가. ‘바스티유’를 발음할 때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혁명의 역동성과 꿈틀대는 거친 기운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그래 책을 받았을 때 기대가 컸는데, 혁명의 와중과 국외 탈출의 극적 장면이 펼쳐질 것에 비하면 책이 그리 두껍지가 않아 좀 갸웃했다. 하여튼 진짜 읽어보니까,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자리한 황폐한 신고전 양식의 건물로 출퇴근하는 역사 교사가 10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논문, 제목을 <바스티유 광장 ― 역사의 우연성에 관한 연구>로 할지, <바렌으로의 도피 ― 역사성 없는 역사>로 할지도 결정하지 않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관한 ‘연구 주제’였다.
  루이 16세의 프랑스 탈출 미수사건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어서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겐을 비롯한 왕당파 일부 세력이 프랑스의 왕정유지를 위해 루이 16세 가족을 망명시키기로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1791년 6월 20일을 D-day를 정해 밤늦게 도피행각을 시작한다. 치밀한 계획이었으니만큼 당시 시간기준으로 매우 엄격한 일정을 잡아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탄 화려한 6두 마차는 매번 조금씩 계획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떤 자료에 따르면 루이16세가 식당에 들어 거한 점심식사 한 끼를 주장하는 바람에 몇 시간이 늦어지기도 했다는데, 하여튼 이런 우연한 지연과 사소한 부주의가 맞물려 왕당파 경비대와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혁명군에게 체포당하기에 이른다. 만일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무사하게 도피를 했다 해도, 이 책에서 드 빈터가 주장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의 공화정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고, 워털루는 그저 벨기에의 한적한 벌판에 지나지 않았을 터이다. 혹시 또 아는가. 인권에 대한 자각과 공화정의 위협으로부터 왕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유럽 열강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 자체가 진압될 수 있었는지도.
  하여튼 나는 오해할 수 있는 독자의 권리로 루이 16세의 국외 탈출이라는 가상역사를 기대하고 있다가 물을 먹은 셈이다. 드 빈터는 탈출 사건에서 역사는, 그것이 대륙, 국가, 민족이란 거대 집단의 것일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사에 있어서도, ① 순리적인 절차를 좇아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② 유대인이란 출신 성분 특성상 역사의 의미심장한 흐름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경험만 가져왔을 뿐이다. 루이 16세가 탈출에 실패하게 되는 자잘한 우연과 시간 지연의 합이 비계가 두꺼워 한 번에 잘려지지 않은 루이의 목 위로 여러 번의 기요틴 날이 떨어지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수용소의 흰 연기로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갖게 된 천애 고아의 방황, 유럽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말이다.

 

  책의 주제. 이제는 좀 식상한 이야기지만 출간한 1981년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도 그런 기분이 들었던 듯하다.
  시대는 1970년대 말. 역사 교사 파올 드 비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으리으리한 별장에서 사는 로마 가톨릭 집안 출신의 아내 미커와 두 딸, 하나와 미르얌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유대인이다. 파올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을 이용해 연구자료를 구하러 파리 국립중앙도서관의 국립고문서관에 다녀온 이후 조금씩 의도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망가뜨려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내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해 또다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지만 파올은 새벽이 올 때까지 각종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시간과 자신을 죽이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이걸 지켜봐야 하는 아내 미커의 복장이 어떻겠는가. 갑작스레 찾아온 남편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거의 6개월 동안 대책 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니. 미커는 파올이 논문을 진전시키지 못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잠시 친정에 다니러 가면서, 식탁 위에 메모를 적어 두어 파올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게 해준다. 여름방학 기간에 다시 파리에 가서 자료를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 바로 이때 집으로 걸려온 프랑스 여자 폴린의 전화. 내일 암스테르담애 도착할 것이니 함께 고흐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에 가고 싶다는 것.
  폴린이 누구인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프랑스 국립고문서관에서 자료를 모을 당시 머물던 호텔의 아르바이트 직원. 파올과 같은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이란 동질성으로 금세 오해를 풀고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며칠 만에 호텔이 아닌 폴린의 아파트에서 몸을 섞게 된다. 폴린은 열다섯 살이 많은 파올의 결혼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연인관계를 유지 시키고 싶지만, 이게 말이 쉬운 거다. 다행히 파리-암스테르담 간 거리가 있어서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파올은 여러 형태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데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증상도 절반은 여기서 비롯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파올과 폴린의 사랑은 활활 불타올랐고, 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는커녕 파리 각지에 놀러 다니며 온갖 추억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스티유 광장에서 세 장의 사진도 찍었고, 여기서 사달이 났다. 후줄근한 광장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보고 서 있는 폴린의 왼쪽 어깨 뒤에서 서 있는 한 남자의 불투명한 시선.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추위를 견디지 못해 혹은 혹독한 기후 때문에 눈에 물기가 맺혔을 뿐일까? 교무실에서 이 사진을 보고 있는데, 지나던 늙수그레한 동료 교사가 사진을 보더니,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느냐고 묻는 거였다. 이 수학교사의 눈에는 폴린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한 파올이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난 것으로 판단한 것. 그렇게 사진 속 눈에 눈물 그득한 남자와 파올이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43년 당시 임신한 유대인의 출산을 비밀리에 돕던 산파를 수소문해 드디어 자신을 받은 친절한 할머니를 찾아낸다.
  이 칠십 대의 시골 할머니는 정확하게 파올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두 시간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 필립을 기억해낸다. 아들이면 외할아버지 필립과 친할아버지 파올 가운데 어떤 이름을 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부부에게 한꺼번에 아들 둘이 생겨 고민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까지. 문제는 단숨에 풀리고 만다. 자신의 친형 필립이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으며, 바스티유 광장에서 사진을 찍는 파올을 보고 뭔가 가슴이 찡한 감정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는 결론. 이것이 프롤로그에서 장황하고 화려한 문체로 한없이 엄살을 피우던 파올의 이유 없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나머지 원인이었다. 어쨌든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파올은 암스테르담을 떠나 파리로 가야 하는 건 어김없는 사실.
  소설이 되기 위하여 때를 맞춰 파리에서 젊고 아름다운 유대 여인 폴린이 암스테르담으로 왔고, 밤을 며칠 함께 보낸 다음 같은 기차의 옆자리에 타고 파리로 향한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문은 모두 여덟 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암스테르담 역을 떠나 지나간 세월 동안 파올이 아내 미커를 만나고, 미커와의 가정생활을 역사학자답게 시대별로 구분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묘사하고, 폴린을 만나 뜨거운 사이가 되고,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관한 토의를 하고, 자신을 받은 산파를 만나 가족관계를 알아내는 사이에 드디어 독특한 냄새가 진동하는 파리 북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권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힘들더라도 기회가 생기면 지나치지 말라는 권유 정도는 할 수 있는 책이라, 결론만큼은 일러드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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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0-25 09: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78쪽 분량안에 이 내용이 다 들어있다니 놀라워요. 더군다나 결론이 궁금해졌고요😆ㅎㅎ
루이 16세 목이 잘 안잘렸고
그걸 또 반복해서 자른 당시 혁명의 분위기라.. 상상하기조차 무섭네요!!(근데 궁금;;)

행복한책읽기 2021-10-25 09:47   좋아요 4 | URL
지두 저 대목에서 허걱했어요. 기요틴을 내리치고 내리치고 내리쳤단거잖아요. 으으으으😖😖😖😖

Falstaff 2021-10-25 09:50   좋아요 3 | URL
저도 루이 목에 비계가 많이 껴서 기요틴이 몇 번 떨어졌다는 건 이 소설을 통해서 처음, 햐... 이런 건 알지 못해도 좋은데 말이지요, 처음 알았습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10-25 09: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런. 또 낚였네유. 우째 이리 길고도길게 써서 플친들 시간 옴팡 들이게 하고선. 메롱이라니. 지는 이제 안궁금하지롱요.^^

Falstaff 2021-10-25 09:51   좋아요 3 | URL
이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드 빈터는요 <호프만의 허기>가 좀 더 좋더라고요. ^^
 
트맆티콘 - 삶과 죽음의 세장면
막스 프리쉬 지음, 김형국 옮김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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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티콘”을 우리말로 하면 “세 폭 제단화” 기독교의 제단 뒤쪽에 그려진 세 폭짜리 그림이란 뜻이다.

 

트립티콘


  막스 프리쉬의 희곡 <트립티콘>도 이 형식에 맞추어 모두 세 장면으로 되어 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가운데 그림이 제일 크고, 제1과 제3 화의 사이즈가 작다. 이 희곡도 1장면과 3장면을 합한 것보다 제2 장면의 분량이 조금 더 길다.
  작품의 주제는 죽음. 또는 사후세계. 1장면은 70대 남자가 죽어 장사를 지내고 많은 조문객이 과부를 위로하기 위해 집을 방문해 차려놓은 식사를 하며 애도를 표한다. 고인이 평소에 앉아 있던 흰 의자엔 죽은 고인이 앉아 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2장면은 죽음 이후의 세계다. 새벽, 아침, 오전, 오후, 저녁, 황혼, 밤의 구분이 없는 저승일지언정 봄이 왔다는 걸 죽은 이들이 다 알고 있다. 고인들은 이승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나이로 고착되어 있어서, 고서점을 운영하던 노인의 아버지는 영국계 정유회사 셸의 제복을 입은 젊은 모습으로 여전히 늙은 아들에게 낚시질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타박을 한다. 이 젊은 아버지 옆에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뼈만 남은 할머니가 있으니 바로 젊은 아버지의 아내, 고서점 주인 영감의 엄마다.
  3장면은 암에 걸려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신느와 이이의 아직 죽지 못한 연인 로제. 한때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이별을 해야 했던 커플. 이들 사이에 놓인 죽음이란 거대한 장벽을 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미 죽은 프랑신느가 다시 살아올 수는 없는 일이니, 속주머니에 품고 있는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로제가 프랑신느 있는 곳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어떤 그림일지 대강 보이실 듯. 새로운 것도 없고 기발한 점도 없다. 다만 3장면에서 죽음이란 방식으로 결별을 완성한 커플이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것이 좀 서늘한 정도.

 

  이제 막스 프리쉬의 3대 소설, <슈틸러>, <호모 파버>, <내 이름은 간텐바인>을 읽었고, 희곡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안도라>와 <트맆티콘>까지 마쳤으니 이걸로 된 듯하다. 적어도 당분간 다시 프리쉬를 찾는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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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22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치오의 이 세폭제단화가 이 소설과 연관이 있나요?

Falstaff 2021-10-22 08:59   좋아요 2 | URL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트립티콘‘이 뭔지 몰라서, 혹시 독후감 읽는 분들께서도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봐 트립티콘이 이런 거다, 라는 의미에서... ^^;;;

coolcat329 2021-10-22 09: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형식은 뭔가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을거같네요.
1장은 이승 2장은 저승 3장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과거 회상.
저 혼자 생각해봤네요.
양쪽 그림이 가운데 그림에 꼭 맞게 포개지듯 뭔가 이 희곡에도 그런 맞아떨어지는게 있을거 같아요.
마지막 당당한 문장 아휴~부럽습니다.
저는 슈틸러 갖고 있는데 참 손이 안가네요.

Falstaff 2021-10-22 09:26   좋아요 2 | URL
슈틸러는 그래도 재미있는 편일 텐데요. ㅋㅋㅋㅋ
천천히 읽으셔요. 취미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실 필요 1도 없습니다. ^^

유부만두 2021-10-23 15: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뜬금 댓글 입니다;;;;

전에 팔스타프님께서 ‘서부전선 이상없다’ 민음사판을 혹평 하셨더랬는데요, 집에 있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아 … 이대로도 좋은데, 더 좋았어야 했단거죠??

Falstaff 2021-10-23 16:17   좋아요 1 | URL
민음사 판이 아니라 열린책들 판입니다. 2014년 말에 저는 열을 받아 열린책들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항의를 합니다만, 아직 한 마디의 답변도 받지 못했습니다.

++++++++++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 라는 훌륭하기 그지 없는 책을 이제 막 완독했습니다. 읽기가... 라기 보다는 읽어내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레마르크의 필력이야 어디 한점 까탈을 잡을 수 있을까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최고의 텍스트로 최악의 책을,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열린책들이란 훌륭한 책방에서 찍었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교정 교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제가 내린 결론으로, 한국 소재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외국인이 교정 교열을 담당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2. 이런 개판 무인지경의 교열작업을 했음에도 정말로 책을 내기 전에 어떤 책임자도 스스로 마지막 정독을 해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3. 책이 나온 다음 번역작업을 한 홍성광 씨 역시 자기가 직접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책이 나왔을까, 혹시 무슨 실수라도 없었을까,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한 번도 자기가 번역한 책을 들춰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홍성광씨가 책을 보았다고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요. 이런 정도로 엉망인 책이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시중에 돌아다니게 놔두었으니까요. 이 사람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번역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도 의외입니다.
4. 위와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며, 이 책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한 출판사 열린책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량 회수를 권유합니다. 손실을 피할 수 없겠으나 출판사의, 한 기업의 자존심이 있다면 완전한 재교열 후에 제 2판을 찍어 다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5. 마지막으로, 여태까지의 의견 또는 비판이 마땅하지 않으시다면 반론을 하시기 전에 꼭, 먼저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다 읽은 다음에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6:1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열린책 이에요, 제 오타입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6:21   좋아요 0 | URL
아직 전 초반이라 괜찮다 느끼는건지;;; 다른 번역판 무엇으로 가야하나요? ㅠ ㅠ

Falstaff 2021-10-23 16:26   좋아요 0 | URL
다른 번역판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ㅠㅠ

유부만두 2021-10-23 16:31   좋아요 0 | URL
아...이런...

서부전선 망했네요

Falstaff 2021-10-23 16:57   좋아요 1 | URL
우리글의 특징은
초성(자음), 중성(모음), 종성(있을 경우에 한해서. 자음) 이런 순서로 나열되지 않습니까. 근데요, 이 책을 열독하시다보면,
모음, 자음. 이런 순서의 문자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ㅋㅋㅋ

제 의견은, 그래도 댁에 책이 있으면 읽는 편이 더 낫다, 입니다. 텍스트가 정말 훌륭하잖아요. 얼마나 훌륭한지는 읽어보시면 저절로 동의하실 듯합니다.

유부만두 2021-10-23 17:23   좋아요 2 | URL
계속 이어서 읽고 있습니다. 아, 좋은데요?! 계속 나오는 콩 이야기도, 그 선생 이야기나 훈련소 이야기도,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읽는지 후회막급입니다.

 
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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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지금 이십대라면, 그리고 소설가가 되려 하는데 <왼손잡이 여인>을 읽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아마도 절망했을 거 같다.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는데 뭘 더 보탤 수 있을까, 라는 좌절감에 빠져 한 달 가량 술독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체조선수가 몬트리올에서 나디아 코마네치의 퍼포먼스를 직접 본 기분과 비슷했을 것 같다.
  스토리와 문장이 다 절편이다. 다행히 난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다. 그간 페터 한트케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단정해놓고 이이의 작품은 별로 읽지 않았다. 201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스웨덴 한림원이 잘난 척하기 위해 잘난 척하는 작가한테 상을 줬다고 불만을 갖기도 했다. <소망 없는 불행>,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그리고 희곡 <관객모독> 이렇게 네 권만 라이브러리에 들어 있을 뿐. 그래 이 책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그저 싼 맛에 골랐다가, 언필칭 대박이다. 한트케를 멀리 한 지난 세월이 아쉽다.

 

  이 여자 마리안느는 서른 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도자기 회사의 지점에서 판매 책임자로 근무하는 남편 부르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스테판과 함께 테라스 형태로 지은 방갈로에 살고 있다. 부자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정도의 중산층으로, 언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날지 몰라 방갈로에 세 들어 있다. 부르노가 몇 주일 만에 스칸디나비아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작품은 시작한다.
  아내가 공항으로 남편을 마중 가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인 아이를 재우고 나서, 부부는 오랜만에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정찬을 즐긴다. 가슴이 팬 드레스를 입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칼바도스를 곁들여 훌륭한 식사와 늙은 종업원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는 일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기묘한 방식에 의해 인류 전체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일이라 규정하는 남편 부르노. 봉건적 봉사정신의 완숙미를 보여주며 서비스를 하는 종업원에게 부르노는 빈 방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이왕 나온 김에 호텔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리안느는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 즉각적인 생각.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핀란드에서 자기 회사 제품의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공포감에 휩싸였다는 남편의 말 때문인가? 아내와 함께 견고하게 묶여 있다는 감정, 이런 걸 느끼면서 그러나 남편은,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말을 나눈다. 사람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에서.

 

  당신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 당신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리라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부르노, 가세요.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요.
  영원히 말이지?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리라는 것뿐이에요.
  난 우선 돌아가서 호텔에서 따뜻한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어. 그리고 오후에 짐을 가지러 가겠어.

 

  이렇게 남편은 호텔로 돌아가고, 아내는 집에 도착해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남편의 트렁크 두 개를 채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와 놀아주다가, 남편이 오고, 악수를 한 다음, 트렁크를 들고 떠난다. 마리안느는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아이들 놀이터의 CCTV와 연결이 된 TV를 쳐다보는 마리안느의 두 눈에 이제 눈물이 고인다. 밤이 온다. 마리안느는 이불을 싸들고 아이의 방에 가 아이의 침대 옆 바닥에 눕니다.
  다음날 아침, 마리안느는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 사장에게 편지를 해 프랑스어 번역 제안서를 보낸다. 우체통이 단지 끝 공중전화박스 옆에 있어 그곳을 지나다 기다리고 있던 부르노를 만난다. 부르노는 여자를 전화박스로 몰아넣고 한 대 치려고 했으나 전화박스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 실패한다. 부르노는 화가 난다. 무척 화가 난다.

 

  나를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아. 그러다간 당신도 어느 날엔가 죽고 말 거야.

 

  부르노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집에서 쫓겨난 거다. 마리안느의 친구이자 아들 스테판의 담임선생인 프란치스카의 집에서 지내라고 한 것도 아내 마리안느다. 그러나 이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자는 말한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해라. 너희들이 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너희들로부터 자유스러울 것이다.

 

  집에 돌아온 마리안느는 집안의 가구를 다시 배치하고, 대청소를 마친다. 아들이 도와준다. 일을 다 마치고 어린 아들과 눈이 마주친 마리안느가 웃는다. 스테판이 말한다.

 

  웃지 마세요. 일부러 웃으려고 애를 써서 웃는 거잖아요. 나도 슬프단 말이에요. 슬픈 건 엄마뿐만이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마리안느, 한 여자가 자발적인 긴 고독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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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0-21 0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도와준다….이 문장이 아픕니다.

Falstaff 2021-10-21 09:3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저는 참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실지 궁금하군요.
읽으면서 여러차례 감탄을 했었습니다.

새파랑 2021-10-21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른 한트케 작품과 다른가 보네요. 전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한 작품만 봤는데 너무 어렵더라구요 ㅜㅜ
이건 무조건 찜~!!

Falstaff 2021-10-21 10:51   좋아요 4 | URL
뭐든지 그렇지만 한트케도 독자하고 잘 맞는 게 젤 중요한 듯합니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지요.

붕붕툐툐 2021-10-21 12: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낯익다 싶었는데 <관객모독> 작가였군요! 이 작품은 연극으로 본 적이 있거든요! 저도 이 작품 찜!!ㅎㅎ

Falstaff 2021-10-21 13:07   좋아요 3 | URL
넵. 관객모독은 희곡으로 읽어도 괜찮았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10-21 1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우 한트케 저도 합이 안 맞아서 버린(?) 작가인데 이 책까지만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디아 코마네치에서 빵! 터집니다. ㅋㅋㅋㅋ 요즘 젊은이들은 저 코마네치 잘 모르겠죠?

Falstaff 2021-10-21 13:08   좋아요 4 | URL
저도 이 문고판 책값이 싸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ㅋㅋㅋㅋㅋ
이름만 조금 들어봤겠지요, 나디아 코마네치. 당시엔 정말 경악이었는데 말입죠.
보고, 보고, 또 보고 아우... 근데 너무 오래 전 이야기를 했나 싶기도. ㅋㅋ

coolcat329 2021-10-21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안느가 왜 그러는건지 이해가 안가는데 코마네치 수준이라니 저도 찜하겠습니다. 책 읽으면 마리안느 이해가 가겠죠?😙

Falstaff 2021-10-22 08:19   좋아요 3 | URL
마리안느의 행복 또는 자아 찾기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선 네드라가 깔끔하게 이혼해버지만 마리안느는 자신의 일을 갖고자 하는군요. 이하 생략! ㅋㅋㅋ
 
엘살바도르 아파네카 이사벨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7월
평점 :
절판


예가체프 두메르소를 많이 좋아해서 그랬는지 이 커피는 진하게 내렸는데도 그리 인상 깊지 않더라고요. 오늘 처음 마셔봤는데 좀 더 마셔봐야겠습니다. 신맛이 원하는 만큼 안 나는 것도 같고 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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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0-20 18: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가체프 두메르소! 제가 알라딘 원두 중 첨으로 500g짜리 추가 구매한 원두입니다!

Falstaff 2021-10-20 19:25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반 킬로씩 구매하는 게 훨씬 덜 귀찮더라고요. 예가체프 두메르소, 괜찮지요!

잠자냥 2021-10-20 21:01   좋아요 2 | URL
스탬프 마니 줘서 깜놀했어요. ㅋㅋㅋ 이런 식이면 스탬프 바꿔서 할인 쿠폰 금방 받겠다 싶더라고요?!
 
카이트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프랑크 베데킨트. 독일 최고의 악녀일 수도 있는 ‘룰루’의 창조자. 룰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곡 <지령地靈 : 땅의 정령>과 후속 작 <판도라의 상자>를 쓴 이다. 작곡가 알반 베르크는 이 팜므파탈의 대표선수 격인 룰루에게 매혹되어 1937년 오페라 <룰루>를 작곡했지만 완성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지령>과 <판도라의 상자>는 읽어보지 못했으나 <룰루>는 여러 버전의 DVD와 CD로 보고 들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쇼킹한 작품이다.
  프랑크 베데킨트, 벤쟈민 프랭클린 베데킨트는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의사와 헝가리 이민 출신 미국 국적 여배우 부부가 다시 독일로 돌아온 후, 하노버에서 태어난다. 1864년생. 60갑자가 처음 시작하는 해, 갑자년이다. 아빠가 의사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한 부르주아는 아니지만 비싼 장난감 가지고 놀고, 좋은 사립학교 졸업하고 선진국으로 유학시킬 정도의 지원은 가능한 부유층 가정이었다. 그래서 가족이 마지막 거주지로 정한 스위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뮌헨 등지에서 법학을 전공한다는 전제로 베데킨트 역시 아빠의 무한 지원을 받았으나, 법학보다는 문학, 미술, 음악, 연극에 훨씬 매력을 느껴 학업을 멀리하다가 급기야 일체의 금전적 지원이 끊기고 만 적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법, 스물세 살에 부자간에 화해를 해 다시 법률 공부를 하는가 했더니, 1888년, 일 년 만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세상 하직하는 바람에 이제 법률 공부를 작파하고, 자기가 상속받은 돈으로 파리, 뮌헨 등을 오가며 말은 작가활동이지만 본격적인 딴따라 생활로 접어든다.
  1894년에 이미 물려받은 재산을 다 까먹은 베데킨트는 95년에 첫 직장을 갖게 되니 소위 “낭독 예술가”라는 것. 이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자기 이름으로 갖는 것이 쪽팔린 줄은 알아서 ‘코르넬리우스 미네하’라는 가명을 썼단다. 하여튼 이 당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1887년에는 거지꼴을 하고 드레스덴의 여동생 집에서 기숙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와중에도 유부녀 프리다 스트린드베르히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도 낳고, 할 짓은 다 했다. 아 글쎄, 예술가라잖아, 예술가.
  이렇게 살면서 많은 희곡을 쓰고, 스스로도 무대에 올라 연기도 하며 한 평생 잘, 부유하게가 아니라 재미있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다가, 1차 세계대전이 있던 1914년에, 전쟁에 참전하는 대신 맹장수술을 받는다. 요즘 맹장수술은 메스를 쓰지도 않고 배에 조그만 구멍 몇 개만 뚫어 복강경으로 잘라버리거나, 그마저도 비키니 입을 때 티가 나서 싫으면 돈 더 많이 들여 식도로 내시경을 집어넣어 위장을 뚫고 대장 충수까지 진입해 입으로 끄집어내는 방법이 있으니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칼로 배를 짜개는 개복수술 말고는 없었다. 근데 이이는 맹장수술이 잘못되어 염증이 도무지 낫지 않아 복막 전체로 번졌는지,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1918년에 숟가락을 놓고 만다. 이 양반은 죽는 것도 우화적이었다. 물론 지금 시각에 그렇다는 말씀이지만.
  이이의 작품에는 주로 제 5의 계층들, 예술가, 사기꾼, 보헤미안, 서커스 주변, 범죄자, 매춘부 등의 집단을 그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들을 통해 인습적인 시민사회를 공격하는 아웃사이더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대표작인 <지령>과 <판도라의 상자>는 당연하거니와 넓게 보아 이 작품 <카이트 후작>도 이런 범위에 든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카이트 후작>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이, 지문에서는 백작, 카이트 스스로는 후작, 시종 사샤는 남작이라고 호칭한다는 점. 이 책은 성신여대출판부에서 찍은 것으로 대학 출판부답게 작가소개와 해설이 대단히 세밀하고 좋아서 검색을 따로 할 필요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카이트의 작위에 혼란이 있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제목은 분명히 <Der Marquis von Keith>, 카이트의 후작임에도.
  카이트의 출생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작품을 위한 초고는 <향락인간>이라고 한다. <향락인간>을 계속 손질하면서 제목도 함께 바뀌어 <추락한 악마>를 거쳐 <뮌헨의 장면들, 인생묘사>가 되었다가 이어서 <카이트 후작 (뮌헨의 장면들)>, 그리고 드디어 <카이트 후작>이 되었단다. <카이트 후작>에서도 ‘향락인간’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돈을 숭배하지만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 돈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 가진 것이 없어 아침을 먹지도 못했고, 언제 집달리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도 캐비아를 곁들인 샴페인을 추구하고,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의 정찬을 바라는 주인공 카이트. 일찍이 쿠바 혁명 당시 대통령에 출마했지만 마지막 1달러를 구하지 못해 당선되지 못했다는 불운의 아이콘. 내 돈이 없으면 다른 부르주아의 돈으로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갖 신분의 부르주아들로부터 거액을 기부받아 선녀궁을 건축하려는 야심에 찬 인물. 그러나 자금의 입출에 관한 아무런 영수증이나 회계 장부가 없는 윤O향 같은 인간. 어떠셔, 끝이 훤하시지?
  카이트는 대단히 머리가 좋지만 가난한 수학 가정교사와 집시 사이에서 태어난 이른바 천민이다. 수학 좀 하면 대수인가, 엄마가 불가촉천민인 집신데. 이 아이가 아빠를 닮았는지 머리 굴리는 건 가히 천재적이라 전 세계, 그래봤자 유럽과 아메리카에 불과했지만 하여튼 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활약하며 국제적인 사기꾼으로 명성을 높이다가 결정적으로 쿠바에서 뽀록이 나 고국인 독일 뮌헨으로 도망쳐 와서 후작을 사칭하고 다녔던 것. 이런 인간이니 후작이란 작위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 백작이건 남작이건 간에. 본인도 어떻게 불리는지 신경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남의 돈으로 선녀궁을 지으려는 이 작자는 사실 알고보면 예술가도 아니고, 건축가도 아니고 그냥 사기꾼일 뿐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으니, 이이가 작품생활을 했던 때가 세기말, 벨에포크 시대. 바야흐로 문학판엔 자연주의가 꽃피우고 있을 당시. 게다가 베데킨트가 중요하게 다루던 계층이 제5 계층인 사기꾼, 예술가, 보헤미안, 서커스, 범죄자 등이었으니 연출만 다양하게 하면 재미있는 드라마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 극작가는 독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카이트 주변에 꼬이는 인물에게 과감한 이분법적 성격을 부여한다.
  트라우테나우 백작은 카이트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신분은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평민의 이름인 숄츠라 불리기를 바라며, 몇 번 실패한 인생을 쾌락으로 만회하기 위해 카이트에 접근한다. 애인 몰리는 카이트를 사랑하지만 결코 카이트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하는 비운의 여인이며, 바그너 전용 헬덴 소프라노를 목표로 하고 있는 안나는 정작 노래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빼어난 몸매로 인정받아 단 한 번의 연주회로 하루에도 몇 명으로부터 청혼을 받기에 이른다. 카지미어 영사의 철없는 열다섯 살 먹은 (바지역) 아들 헤르만은 아빠 몰래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누구에게나 조금의 돈을 얻어 쓰기에 바쁘다.
  이런 인간들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누구한테? 카이트 후작한테, 선녀궁을 지으려는데, 카이트는 광고효과를 높이기 위해 연주회와 불꽃놀이 등의 대규모 행사를 열기에 이른다. 이 연주회와 놀이가 크게 성공해 도취한 사람들이 난장판으로 어울리는 장면은 여지없이 동시대의 거장 에밀 졸라의 총서 가운데 (만일 있다면)희곡으로 쓴 한 편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다. 특히 <쟁탈전>과 <돈>에서 돈 놓고 돈 먹는 장면이나, 공매도와 공매수가 난리법석을 이루는 장면과 비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 무한한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소설과, 무대 위라는 한정된 공간만 허용하는 희곡의 근본적 차이를 감안하면 비교해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재미있는 극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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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0-19 1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 도서관에 <눈뜨는 봄>:청소년 비극 딱 한권 있네요😭 폴스타프님 리뷰읽고 궁금해져 <지령,판도라의 상자>가 궁금해서 알라딘에 찾아보니 대부분‘중‘급이고 한 권 있는 ‘상‘급은 25000원. 작가가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작품을 많이 남긴듯한데 국내 번역된 책이 몇 권 안되어 아쉬워요!

Falstaff 2021-10-19 12:22   좋아요 4 | URL
아, 독일 국가대표 팜므파탈 룰루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아오, 정말 대단한 여잡니다. 물론 비극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세상에나...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립자면, 2만원을 넘게 들여 읽으실 필요는 없을 듯하네요. 당분간 다시 출간하지도 않겠지만, 공연 있으면 그때 구경 한 번 가시는 게 훨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거든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10-20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맹장수술로 참 안타깝게 가셨네요. ㅠ
근데 룰루 처음 듣는데 찾아보니 엄청 복잡한 여자네요. 남자관계도 그녀 심리도...폴스타프님의 찰진 설명에 또 한 명의 극작가와 독일 최고 악녀를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