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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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 시절에 신드롬 수준으로 독자를 열광시켰던 작품. 난 화이트헤드라면 대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떠올라서 일단 기가 팍 죽는다. 화이트헤드, 이 백두 선생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야심차게 <관념의 모험>, 한길사, 한길 그레이트북 시리즈 1번에 빛나는 책을 폈다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밝히건데, 단 열 페이지도 읽어내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책을 번쩍 들고 방바닥에 내팽개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아가, 철학이란 그냥 하면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듣는/읽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면서 말하는/글 쓰는 인간을 폼 나게 만드는가를 집중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다. 그 이후 함부로 철학책에 접근하는 우를 범하게 되지 않았으니 안 읽어도 인생살이에 전혀 문제가 없는 철학책을 사고, 읽고, 독후감 쓰는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삼가게 만든 고마운 책, 고마운 철학자일 수도 있겠다. 철학? 이제 내가 읽는 철학책은 오직 금속공학을 다룬 것에 국한한다.
  하여튼 콜슨 화이트헤드, 이이의 성씨 때문에 저 알프레드 노스 백두 선생하고 일가붙이인 줄 알아서 일찌감치 야코도 좀 죽었고, 한 번에 너무도 많은 독자들이 상찬을 거듭해, 이거 함부로 읽었다가 괜히 나만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코 깨지는 수가 있을 거다, 생각했을까? 아니. 여기서 더 솔직해져야 한다. 그저 제목을 대강 보고 책 읽기를 포기했었다. <니클의 아이들>이 아니라 <너클의 아이들>로 읽었던 거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코비드 19 이후로 늘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나는 다초점 안경을 이용하는데 마스크를 하니까, 처음 마스크 시작할 때가 아마 2020년 2월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안경을 벗고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책 읽을 때는 안경을 벗고 읽었는지라, 취미생활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머지 세상은 무척 혼미해졌다. 안경을 끼지 않고 사니 얼마나 좋은가, 눈에 뵈는 게 없어지니까 말이지. 근데 PC 화면이나 휴대폰 액정을 보면 조금씩 에러가 생긴다. 이래서 ‘니클’을 금속으로 만든 폭력 기구 ‘너클’로 읽었고, 그래 청소년 시기 난폭한 아이들의 생존기구나, 싶어서, 사나운 이야기를 유난히 싫어하는 취향 때문에 멀리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 헌책이 나왔기에 이제 한 번 읽어볼까, 싶어서 선택한 거다.

 

  미국 조지아주의 주도 애틀랜타에서 남쪽으로 370 킬로미터를 내려가면 플로리다의 주도 탤러해시가 나온다. 플로리다, 라고 하면 의례 마이애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탤러해시가 명색이 주도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탤러해시에는 당연히 흑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쪽 사람들은 그곳을 프렌치타운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헤리엇이란 이름의 육십대 노파가 살았다. 이 할머니의 아버지는 길을 가던 백인 여자한테 길을 양보해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실관계 확인이나 사건 조사도 없었으니, 기소도 되지 않은 상태라서 판사는커녕 검사 얼굴도 한 번 못보고, 하여튼 죽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아도 답은 똑같았다. 그냥 죽었어. 백인 경찰들에 의한 폭력에 의하여, 라는 암묵의 인정.
  탤러해시에는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기지, 육군 캠프 고든 존스턴과 데일 마브리 군 공항이 생겨 갑자기 흑백 군인들이 휴일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때 헤리엇의 남편 몬티는 동네 술집에 들렀다가 세 명의 사망자가 생긴 백인 군인들과 동네 흑인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몬티와의 사이에서 보기에 불안할 만큼 어두운 분위기의 여성으로 성장할 에벌린만 낳은 헤리엇은, 딸만 바라보고 키워 결혼시킨다. 사위 퍼시는 점잖고 무게있는 청년이었지만 아들, 헤리엇의 손자 엘우드를 낳은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다음에 과하게 야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퍼시는 집을 떠나 서부로 가서 행운에 도전해보겠다고 선언을 하고, 자기 아들 엘우드를 외할머니 헤리엇의 슬하에 남겨둔 채, 아내 에벌린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게 당시 보통의 남부 흑인 가정이었나보다.
  헤리엇은 유서깊은 리치먼드 호텔에서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근면하게 일을 해왔고, 딸 에벌린 역시 리치먼드에서 일 하다 절도사건에 연루되어 해고를 당했다. 딸이 사라진 후에 손자 엘우드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서 학교가 끝나면 호텔의 주방에서 숙제를 하던지, 읽을 거리를 찾아 읽던지 했는데, 이를 유심히 살피던 사장 파커 씨가 엘우드를 좋게 봐 언제라도 파트타임으로 자기 호텔에서 일을 하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정도로 엘우드는 소위 싹수가 있었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백인 상전한테 말대답 안 하고, 머리 좋고 등등. 그러나 엘우드는 4대에 걸쳐 한 호텔에서 일을 하는 게 어딘지 마땅하지 못한 거 같아서 이탈리아 이민인 마르코니 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말로 엘우드는 공부를 잘 해, 동네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갈 예정이라, 수입의 반은 생활비로, 나머지 반은 대학 등록금을 위해 저축하기로 할머니 헤리엇과 합의를 보았다.
  엘우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조지아 주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타고, 법에 의하여 금지된 좌석에 털퍼덕 앉았고, 이를 마땅하지 않게 여긴 당국에서 여성을 처벌한 일이 발생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흑인이 극장에 들어가려 했다가 입구에서 처음엔 차갑게, 나중엔 폭력적으로 입장을 거절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국 북부에서도 흑인들이 남부 지역으로 와서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테이블을 점거하는 등의 흑인 인권운동이 발생한다. 할머니는 또 때를 맞춰 엘우드에게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이 담긴 레코드를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었으니, 손자는 할머니의 뜻에 맞게 단단하게 인권 의식을 다지게 된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힐 선생을 마침 탤러해시에서도 벌어진 시가행진에서 만나 친한 관계를 맺는다. 엘우드가 학과 공부도 탁월했던지라 힐 선생은 탤러해시 남쪽에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인 맬빈 그리그스 기술대학에서 탁월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대학 강좌를 개설해 참여할 것을 권한다. 엘우드는 영국 문학에 관한 강의를 듣기로 하고, 첫 수업을 받기 위해 11 킬로미터를 걸어가던 중 흑인이 운전하는 눈부신 초록색 61년식 플리머스 퓨리 승용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순찰차의 검문을 받는다. 순찰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플리머스를 훔치는 건 검둥이 뿐이야.”
  차량 절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 엘우드에게 판사는 교도소가 아닌 감화원 격으로 기숙 고등학교에 준하는 니클 아카데미로 갈 것을 선고한다.

 

  처음엔 돌볼 사람이 없는 소년이나 경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모아 인성교육과 직업교육을 시켜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려고 만든 니클 아카데미는, 점차 감화원 비슷한 곳으로 변하면서 책에 의하면 흑백 차별없이 원생들에게 끝까지 가는 수준의 폭력을 구사한다. 1921년 기숙사 화재 당시엔 43구의 소년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 가운데 일곱 명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세 명은 일종의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로 질식해 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고고학과 학생 조디는 니클 캠퍼스 북쪽, 낡은 작업장과 학교 쓰레기장 사이에서 비밀묘지를 발견한다. 유해를 조사해보니 금이 가거나 구멍 뚫린 두개골은 물론이고 대형 산탄이 갈비뼈에 잔뜩 박힌 백골이 한 두 구가 아니었다. 이런 놀라운 발견은 ‘당연히’ 흑백의 차별이 어쨌거나 겉으로는 사라진 2천년대였으며, ‘당연히’ 전국적으로 방송을 탔고, 아직 늙어 죽지 않은 유일한 ‘얼’이란 이름의 당시 교사는 폭력이 저질러진 적이 없었다고 인터뷰를 한다. 그러나 니클 출신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며 5년째 연례 동창회를 열기도 하는데, 뉴욕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엘우드 커티스는, 누군가가 스펜서 학생주임에게 복수하기 위해 직접 가죽 채찍을 만들어 스펜서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몇 시간 동안 창문을 바라보다가, 복수하지 말자고 스스로 설득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읽고, 그냥 끝까지, 계획대로 해치우지 왜 그랬어, 라고 독백을 한다.
  도대체 니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직접 읽어보시라. 너클은 소수를 상대로 하는 반면에, 니클은 6백명에 달하는 감화원 원생 전부를 대상으로 사나운 폭력을 저질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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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08: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국판 형제복지원 같은 걸까요? 그나저나 퐐님 골문트로 회춘하시고 매우 정력적으로 읽고 쓰시는 느낌이예요 ㅋㅋㅋㅋ

Falstaff 2022-01-07 08:54   좋아요 5 | URL
서양 것들이 훨씬 잔인한 거 같아요. 물러터진 놈은 더 물러터졌지만 독종들은 아휴, 어려서부터 말도 못합니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어른들 상대로 하는 장난 좀 보셔요. 종자들이 이러니.... 형제복지원보다 좀 더 심하다고 생각하시면 딱 맞을 거 같은데, 암만해도 픽션이라 좀 과장은 있겠지요.
ㅋㅋㅋ 이 독후감이 작년 12월 31일, 폴스타프란 이름으로 쓴 마지막 독후감이었습니다.

다락방 2022-01-07 08: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사놨는데 리뷰 읽으니 내용이 힘들것 같아요 ㅜㅜ

Falstaff 2022-01-07 09:27   좋아요 3 | URL
옙. 그나마 사납지 않은 것들만 쓴 것이 저 정도입니다.
우리처럼 마음 약한 사람은 안 읽으시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습니다. ㅜㅜ

- 2022-01-07 10:48   좋아요 3 | URL
우리 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들….. (에잇 ㅋㅋㅋㅋㅋ 이 악평가들이 ㅋㅋㅋ)

단발머리 2022-01-07 09: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었는데 골드문트님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근데 올해부터 골드문트님이신 거에요? 폴스타프님은요? 그 분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07 09:28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의 시간이 벤자민처럼 거꾸로 돌더니 이제 회춘해서 골드문트, 황금입술, 금순(金脣)이가 되어버렸습니다.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1-07 09: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전작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인상 깊게 읽었더랬어요. 그런데 힘들었거든요, 더 가까운 시대 배경인 소설이니 더 힘들겠네요. 너클이나 니클이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군요. 리뷰 감사합니다.

마스크 안경은 겨울엔 더 괴로운 조합이에요.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참, 백두 선생이라 쓰셔서 생각났는데요,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인슈타인을 꼭 일석 선생이라고 칭하셨던 기억이 나요. ^^

Falstaff 2022-01-07 09:33   좋아요 2 | URL
근데 실제로는 이렇게 힘든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 거 맞지요? 그러니까 콕 집어서 소설로 쓰는 거라고 믿겠습니다. 아휴, 이런 작품은 정말 힘들어요.
거기다가 엘우드, 이 흑인청년은 또 말 그대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설정도, 완전 미국 스타일이어서 말입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ㅋㅋㅋ 그렇네요. 아인슈타인. 일석 선생이라. 재미있습니다. 저도 써먹어야겠습니다.

새파랑 2022-01-07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나름 반전에 놀랐습니다 ㅋ 그런데 책을 읽는동안 내용이 좀 괴로워서 그의 다른 책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ㅜㅜ

Falstaff 2022-01-07 10:04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전 읽는 내내, 도대체 이렇게 백퍼 미덕으로만 이루어진 청년이 있다는 말이지, 이 지구상에? 라는 의문이 너무 컸습니다만.
저도 그런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습지요.

다락방 2022-01-07 10:23   좋아요 3 | URL
반전.. 이 있다구요? 😱

Falstaff 2022-01-07 11:07   좋아요 3 | URL
옙. 반전 있습니다. 아메리칸 스타일로요. ㅋㅋㅋㅋ

망고 2022-01-07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실제 플로리다의 소년 교정시설에서 벌어졌던 실화라고 해서 책 읽고나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ㅠㅠ 시대배경도 같고 이런 사실이 최근에 알려진것도 소설 그대로라고요ㅠㅠ 암튼 이 책 읽으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Falstaff 2022-01-07 11:08   좋아요 3 | URL
아, 실화 배경이군요.
읽으면서 20세기 중반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우. 이런 책은 그저 일 년에 한 작품 정도만 읽어야지 힘들어요.

coolcat329 2022-01-07 1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
작가 어느 인터뷰에서 하버드 출신에 유명 작가인 당신도 차별을 겪었냐 물으니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별을 겪었다고 한 말이 기억나네요.

저는 이 책 읽고 형제 복지원 생각이 나더라구요.

Falstaff 2022-01-07 11:10   좋아요 4 | URL
흠. 작가 인터뷰를 반 만 믿을께요. 작가한테 넌 아시아 사람들 차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진짜 만나도 안 물을 거 같아요. 깨물 거냐고요? 아니 그거 말고요. ㅎㅎㅎㅎ

얄라알라 2022-01-07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접 읽어보시라.!!!!˝

옙!!골드문트님. 어느 책이나 그렇지만 특히 소설과 에세이는 직접 읽어야만!

‘니클‘을 ‘너클‘로 잘못 읽으신 에피소드에 ^^

Falstaff 2022-01-07 18: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모르게 날린 멘트 같습니다.
˝직접 읽어보시라.˝
아이구, 민망스러워라. 이제 그만 쓸 때도 됐는데요. ㅎㅎㅎㅎ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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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개띠 시인.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70년생 작가들이 좀 있는 거 같아서 위키피디아로 1970년을 검색해봤더니, 세상에나, 1970년생 유명인 가운데 5월 7일, 대한민국 희극인 ‘황봉알’이란 자의 이름은 올라와 있어도 1970년생 시인과 작가 가운데서는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 딱 한 명만 올라와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여튼. 난 문태준을 한 일흔 살 넘은 시인인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소설가 이태준을 염두에 두었나, 포항제철의 신화를 만든 박태준을 떠올렸던 건가. 어쨌거나 예상외로 젊은 시인이었다.
  왜 늙었네, 젊었네 말이 많으냐고? 글쎄 이이의 시를 한 번 읽어 보시라. 나보다도 한 세대 앞선 예전 시인이나 쓸 법한 단어나 의태어나 어미활용을 능수능란하게 하니 어찌 이이의 젊음에 놀라지 않았으리오. 예를 들어 첫번째로 실린 <새> 속에서, “새는 날아오네 /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 덩그러니 /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 고두밥을 먹느냐 //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 (전문)을 봐도 “~오네”, “앉네”라는 표현. 또 “고두밥을 먹느냐”는 의문문 형의 어미 같은 것도 요즘 시인들은 별로 쓰지 않는 어미활용이다. 아마 거의, 거의 쓰지 않을 걸?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도 제일 앞쪽에서 “어룽어룽” “조촘조촘” “물렁물렁” “슬금슬금” “들썽들썽” “생글생글” “간질간질” “까닥까닥” “미끌미끌” “얼금얼금” “들썩들썩” “끔벅끔벅” “조마조마” “조금조금” 등의 의태어/의성어 사용을 언급하고 있어, 그걸 유심히 읽었던 아마추어 독자의 어깨를 으쓱으쓱하게 해준다.
  시 낭독으로 이야기하자면 두번째 시로 실린 <한 송이 꽃 곁에 온>의 초두에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 귀가 대신 가 /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라 하며 마지막을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로 끝내고 있어서 적어도 시인이 잠깐 눈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 대신 귀라고 한 바, 아무래도 제일 먼저 인상 깊었던 시는, 이것,

 


  귀 1

 


  초여름 밤에
  미끄러운
  산개구리 내려와
  연못은
  울퉁불퉁하고
  산개구리는
  청포도알을 낳고
  청포도알을 낳고
  나의 연못은
  청포도잎처럼 커져  (전문)

 


  인데, 앞의 시에서 눈이 멀어져 귀가 대신 갔다는 얘기도 했고, 시의 제목이 또 <귀 1>임을 감안하면, 이 시는 초여름 밤에 산개구리가 연못에 내려와 청포도알 같은 알뭉치를 낳는 걸 보고 쓴 시가 아니라 밤에 방이나 마루에 걸터앉아, 아니면 마당에서 산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귀가 눈 대신 미물의 수정, 산란하는 정경을 상상해서 쓴 시라고 읽어야 마땅하겠다. 연못에 산개구리들이 잔뜩 몰려 들어와서 수면이 개구리들의 대가리와 등짝 때문에 울퉁불퉁하고, 서로 엉겨 산란과 방정을 하는데, 연못 밑에 낳은 알이 꼭 청포도알 같았을 거라는, 바로 여기가 내가 읽은 포인트로, “같았을 거”란 감상이었다. 이런 시를 70년 개띠가 썼으면 분명 시골 출신일 터, 앞날개를 보니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단다. 음. 이런. 암만해도 문태준, 심상치가 않다. 그래 있는 건 시간하고 돈밖에 없어서 문태준을 검색해보니, 아아, 이이의 시집 ≪맨발≫을 읽었고,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비여”라는 제목으로 독후감도 썼다. 아놔, 그때도 1970년이 아니고 1950년생인줄 알았다고 적었었다. 어쩐지 씨, 눈에 익더라니까.

 

  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하나 있다. 바로 ‘시’ 자체가 그렇다. 아니다. 시 자체가 “그런 거 같다.” 예컨대 내가 잘 인용하는 황지우의 <귀소歸巢의 새 2>도,

 

  “숲새는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관 속으로 날러가부럿다 지 울음으로 숲 둘레를 막아놓고 그 숲에 집 지은 숲새는 가청권 몇 옥타브 우에서 끝없이 목이 쉬었다……사이사이에……지가 깃든 수풀 밖으로 또 다른 숲이 있능가없능가 의심하면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1983. 한자는 전부 한글로 변환했음)

 

  가청권 몇 옥타브 위에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는 숲새가 시인이고, 숲새의 울음이 시, 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 해석할 수도 있다. 가청권의 밖에 있다는 거, 그것도 몇 옥타브나 위에 있다는 건, 보통의 청각 가지고는 감각할 수 없다, 훈련받은 지성이 뒷받침한 자들만 쾌락을 얻을 것이란 황지우 특유의 (밉지 않은)오만일 수도 있다는 거. 황지우가 이렇게 노래하고 25년이 지난 2008년에 문태준은 시를 자신의 목숨이라 선언한다.

 


  두꺼비에 빗댐
  ᅳ 詩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  (전문)

 


  문태준은 어느 날 집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걷는 두꺼비를 본 모양이다. 나는 작대기 세 개를 달고도 쫄병생활을 할 때, 작대기 네 개짜리 고참이 작업하다가 기어 나온 두꺼비를 삽 뒤판으로 두드려 잡아 껍데기 벗겨 구워 먹는 걸 눈으로 직접 봤지만 시인은 구워 먹는 대신, 두꺼비의 여유작작하고 달관한 듯한 여유, 그리고 습한 구석을 찾아 들썽들썽 가는 것을 보고, 허벅지를 탁, 친다. 아, 이게 시로구나. 하고. 따뜻하고 밝은 양지가 아니라 겨우 습하고 찬 곳에 바쳐질 문태준의 서정, 감정이 시며 자신의 목숨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 시가 별 거냐, 사는 게 시고, 시가 사는 모습이지.
  시집의 4부에 재미있는 시가 나온다. 시집을 다 읽자마자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소개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시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전문)

 


  세상 살면서 이별 한 번 못해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인간이다. 인간도 아닌 인간이다. 양희은의 노래 가사처럼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은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그럼 여러분도 그 우라질 이별이 얼마나 아픈 건지 잘 아시지?
  문태준은 이별이 오면 바짓단을 씀벅 걷어올리고 엉덩이를 아래위로 들썩거리며 쓱삭쓱삭 바지락 껍데기가 깨져라 치대며 씻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단다. 시를 읽으면서 즉각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별의 순간 차라리 이런 모습과 소리를 들어서, 그래서 오늘 겪는 가장 아픈 곳이 깔깔하고 깔깔한, 깔깔하고 웃을 만큼 깔깔하거나, 상처가 여기저기를 후벼 파 깔깔하고도 깔깔한 것이 서로 개흙처럼 엉겨버렸으면 좋았을까? 세상에 이런 역설을 터뜨릴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어떤 시인은 이별을 말장난을 하느라고, 이 별에서 벌어지는 사건, 뭐 이런 식으로 쓰는 것도 봤는데, 거기다 대면 문태준의 이별, 이 생각 속 놀라운 시청각 효과야말로 이이의 시를 절창으로 과장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않으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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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06 08:5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 꼭 교고서에서 본 원로시인같기도 하네요. 이별이 오면 이란 시 좋은데요. ㅎㅎ 그럼에도 저 시인은 바지락 소리는 들었지 씻어보진 않았나보다 우씨 바지락도 이별한 맘도 아프겠지만 씻는 손도 아프다는 ㅎㅎ 바지락 꼬막 좋아하는 이랑 사는 아줌마는 이런 생각을 ㅠㅠ

Falstaff 2022-01-06 08:5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이별이 오면‘ 정말 재미나지요? 바지락 씻는 소리와 동시상영되는 씻는 장면도 있잖아요. 분명히 음식점 같은 곳에서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바지락을 가득 넣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주머니를 봤을 거예요. 리듬에 맞춰 들썩들썩. ㅋㅋㅋ
저희 집도 바지락, 홍합, 꼬막 이런 거 좋아하는데요, 바지막과 꼬막 사오면 아내가, 홍합은 제가 손질하는 걸로 정했습니다. 고무장갑 끼고 씻으면 별로 손 안 아파요. 그래도 아프면 속에 얇은 면장갑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 덧끼우면 안 아픕니다.
시인이야 갱상도 문둥인데 어디 씻어봤겠습니까. ㅋㅋㅋㅋ

라파엘 2022-01-06 0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은 시인인 것 같네요!! 그나저나 있는 건 시간하고 돈 밖에 없으시다니 ㅎㅎ 누구든지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골드문트님처럼 삶이 인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드려요 ^^

Falstaff 2022-01-06 09:22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말씀 고맙습니다.
늘 안분하며 살아야지 욕심 내봐야 저만 살기 팍팍해지더라고요. ^^

청아 2022-01-06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아니 골드문트님이 별 5개를 주셨다니 일단 그것부터 놀라서 들여다보니 <한 송이 꽃 곁에 온>이 저는 가장 느낌이 좋네요. 눈이 멀어 귀가 대신 가다니!!

Falstaff 2022-01-06 09:24   좋아요 2 | URL
넷이냐, 다섯이냐, 이거 가지고 좀 오래 고민했습니다.
넷 반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싶더군요.
얘기하신대로, 눈이 멀어 귀가 대신 갔다는 거에 저도 벙~쪘습니다.
그러니 아무나 시인이 되는 거겠습니까!!

바람돌이 2022-01-06 10: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별이 오면 읽으면서 저는 욕함요. 이런 우라질!!!
온몬이 속속들이 아프려면 바지락을 지가 씻어야지 왜 딴 사람보고 씻고 저는 소리만 듣겠다는 거야? 이별의 고통을 속속들이 느끼는데도 무아지경으로 바지락을 박박씼으면 소리뿐 아니라 오감 전체로 고통을 함께할 수 있을거야 이러면서 역시 남자는 시인조차도 감수성이 2% 모자라군 이러면서요. 이 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을 후련하게 씻어라고 했으면........ ㅋㅋ

Falstaff 2022-01-06 10:17   좋아요 4 | URL
ㅋㅋㅋ ‘우라질‘ 드라마에서 예전에 한석규가 세종임금으로 분장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이런 우라질, 이라고 하는 거 들었는데요.
자기가 바지락 박박 씻으면 씻는 소리야 들리겠지만 자기 엉덩이가 아래 위로 들썩들썩하는 건 바라보지 못할 터이니 반밖에 느낄 수 없을 거 같은 걸요.
제가 읽기엔 ˝들려주었으면˝이란 라임을 따라가느라 그런 거지, 시각적 효과도 대단합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2-01-06 1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저도 <이별이 오면> 너무 좋아하는데, 이제나저제나 골드문트 님의 이 시집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습니다! 으하하하하

Falstaff 2022-01-06 11:08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저도 이 책 페이퍼에 다락방 님이 인용하신 <이별이 오면>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데요! 딱 써먹기로 한 시가 턱, 나오니까, 우와, 내 눈도 이만하면 괜찮은가 보다 싶더라고요!!!

프레이야 2022-01-06 1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명하셨군요 ㅎㅎ 골드문트 님.
문태준의 시 좋아합니다.

Falstaff 2022-01-06 11:09   좋아요 3 | URL
넵! 올초부터 바꿨습니다.
가정법뭔 판사님이 기꺼이 좋다 하더라고요. ㅋㅋㅋㅋ

stella.K 2022-01-06 16: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천에 문인 쓰리 스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연수, 김중혁, 문태준. 심지어 같은 연배라고 들었습니다.
와, 위키피디아 너무하네! 우이씨~

물론 골드문트님 보다 젊긴 합니다만 그도 50 넘고보면 더 이상 젊다고도
할 수 없죠. 무엇보다 그가 시골 출신이란 게 그런 시가 가능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근데 이 리뷰 정말 잘 쓰셨네요.
전 시 잘 안 읽게 되는데 한 번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별에 대한 탁월한 작가와 독자의 안목도 그렇고.
˝깔깔하고 깔깔한, 깔깔하고 웃을 만큼 깔깔하거나,
상처가 여기저기를 후벼 파 깔깔하고도 깔깔한 것이
서로 개흙처럼 엉겨버렸으면 좋았을까?˝ 음...유구무언입니다.

알라딘이 이달의 당선작에 시 리뷰에 당선을 준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리뷰 당선됐으면 하네요. 흐흐

Falstaff 2022-01-06 16:27   좋아요 2 | URL
오, 재밌게 읽으신 거 같아서 기분 좋습니다.
지난 달에 김사인 시집 독후감으로 제가 3만원 벌었습지요. ㅋㅋㅋㅋ
문태준이 쓴 시어들에 비해 느므느므 젊은 나이라는 거였습니다. 70년생인데 50년생인 줄 알았을 정도로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06 2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제가 봐도 70년생 같지가 않아요. 교과서에 실렸을 시 같기도 하구요.
저도 <이별이 오면> 정말 좋네요~바지락 박박 씻어 개흙을 다 씻겨내면 이별의 아픔도 씻겨 나가는 기분일거 같아요. 이별을 극복하고 다시 삶을 시작하겠다는 희망도 보이고 ‘엉덩이를 들썩들썩‘ 건강함이 느껴지는 시에요.

Falstaff 2022-01-06 20:3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재미난 시인입니다. 앞으로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 2022-01-06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이 오면 바지락을.... ㅇ ㅏ... 따라갈 수 없는 감송이다... 바지락.. 바지락 칼국수먹고 싶다.. 바지락바지락바지락락..

Falstaff 2022-01-06 20:33   좋아요 1 | URL
아, 그렇지요?
공쟝쟝님 공감하지 않으시면 실망할 뻔했습니다. ㅋㅋㅋㅋ

- 2022-01-06 20:41   좋아요 1 | URL
… 슬펐습니다 (훌찌럭) 바지락도 좋고 저 두꺼비도 좋네요.. 그렇지만… 전 산문형 인간이라 시는 정말인지… ㅋㅋ 그래도 바지락 슬펐다… 훌찌럭…

Falstaff 2022-01-06 20:57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시 따위를 읽는데 무슨 산문형 운문형이 있겠습니까!
톨백작도 내 맘에 안 들면 다 늙어 집 나간 늙은이에 불과한 게 문학 아네요? ㅎㅎ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법 김숙종 희곡집 1
김숙종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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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종.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한다.

 

  “충남 부여 거기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05년 신춘문예 <싱싱 냉장고>로 등단했습니다. 서른 전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길을 꿈인 듯 걷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죽은 순간까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자 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작가를 아는 것이 좀 부족한 듯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고졸 5년차 급여가 대졸 신입, 1년차 급여와 같은 걸 알고, 일을 잘 해서 그랬는지, 사장이 직접 아무데라도 좋으니 대학 졸업장 한 장 가져오라고 해 들어간 곳이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였단다. 근데 또 알아보니까, 김숙종이 고졸 5년차, 대졸 신입에 관한 불평등을 자주 입에 올리는 모양이다. 회사 입장에서 대학에서 배운 기간 동안을 경력 처리해준 거 아닌가? 걔네들은 자기 돈 써가며 공부할 때, 얘네들은 돈 벌며 경력 쌓았으니, 이 정도면 그냥 퉁 칠 수 있는 수준 같은데. 즉, 비교적 평등하거나 고졸에 더 이로운 수준 아닐까 싶다. 아, 나는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런 주제로는 더 말을 잇고 싶지 않으니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작 이이가 다니던 회사 사장은 일을 잘 해 아까워 대학을 가라고 했겠지만, 실제로 공부를 해보니까 자기한테 글 쓰는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어떠셔? 사장한테 좀 미안했을 거 같다. 그지?
  그런데, 희곡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기만 하면, 하여튼 최종심사, 이른바 short list까지 늘 올라가는데, 이게 김숙종에겐 희망고문이었나보다. 아예 예심에서 떨어지면 자기 재주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다시는 도전하지 않고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열심히 약이나 만들겠지만, 이건 될 것도 같고, 당선 작품이 자기 것보다 좀 못한 것도 같고, 이렇게 깨끗하게 네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단다. 그러다가 2005년에 <싱싱냉장고>가 당선, 기어이 극작가 목록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작품 역시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려 있다.

 

  김숙종의 작품을 여섯 편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 데뷔작인 <싱싱 냉장고>부터 절찬리에 공연했던 <콜라 소녀>,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물론이다. 제일 앞에 실린 <템프 파일>은 당연하고 두번째 실린 <배웅>과 <애플 혹은 사과> 모두 다 그렇다. 과거 또는 현재의 ‘나’가 또다른 과거 또는 현재의 ‘나’를 만나는 <애플 혹은 사과>를 제외하면, 물론 연출에 따라서 이것도 그럴 수 있겠지만, 모두 “실제로 무대 공연이 가능한 희곡”이란 것도 현대 극작품으로는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애플 혹은 사과>를 무대에 올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하는 건 숱한 발화성 물질을 모아 놓았을 쓰레기장에서 물건을 태우고 밟아서 끄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막과 무대장치 등 역시 발화성 물질 투성이인 실 공연 무대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이의 작품을 소개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어떤 이유로 그로테스크하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힐 것이 있으니,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글쎄 유령이었다는 거야!”를 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첫 작품 <템프 파일>을 읽은 후면 <배웅>이나 <콜라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대강 짐작이 가겠지만 전혀 모르는 채로 읽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으로 말하자면,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을 만큼 대표작이고, 말 그대로 연일 만석과 셀 수 없는 앵콜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작이라 따로 소개를 해야 마땅하다. 2008년 2인극 페스티벌 희곡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김숙종이 부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소위 농촌봉사를 온 대학생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주로 남학생들은 노동을 하고, 여학생들은 동네 아이들 학습지도와 (지긋지긋한 여성들의 세월이여!) 식사당번을 주로 했을 터이다. 아이들이 보기엔 구름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겋게 생기기도 잘 생긴 도시에서 온 언니 오빠들이 사실 알고 보면 어림없을 만큼 덜 성숙한 청년들이었음을 알 턱이 없어서, 이들이 함부로 표현한 ‘순수한’ 애정과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김숙종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이 도시 출신 언니 오빠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도 여전히 답장을 받지 못하는 일종의 배신, 비록 그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애정과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건 나이가 든 지금도 믿고 있지만, 현장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 여지를 두고 떠난 건 잘못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맞다. 잘못된 거다. (나도 경험 있다. 반성한다. 그래도 난 답장은 해줬다.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믿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예 가지 않은 것만 못했다.)
  여기에 한 가지 보태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네 번 신춘문예 최종심사까지 올라가 미역국 먹은 일. 김숙종은 회사 사장이 ‘아무’ 대학이라도 좋으니 졸업장을 따오라고 했을 때, 왜 문예창작과를 선택했을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십 수년 전, 부여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 동네 살 때, 도시에서 농촌봉사활동을 온 흰 피부의 도시 언니 오빠들 가운데 특히 정이 많이 들었던 누군가가 혹시 이이에게 글짓기를 지도했고, 넌 글짓기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작가가 되면 성공하겠다고 다분히 립 서비스를 펼쳐, 어린 마음에 꿈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추리해본다. 하여튼 작가는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하기도 전부터 극작을 시작했으며 무려 네 번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가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 그러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이여, 섣불리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지 말라. 아니,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이런 심리상태에서 희곡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이 시작한다. 단 두 명만 출연하는 2인극이다. 먼저 김종태. 어려서 ‘사이나’ 즉 시안화칼륨, 또는 청산가리를 이용해 꿩을 잡아먹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서른여덟 살, 독신의 만화가. 만날 방안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리기 때문에 운동부족으로 통통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이 스케치북을 사 주며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만화가나 화가가 되면 성공하겠다는 믿음을 주어 그게 평생의 소명인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나 세상일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여전히 거의 완전한 무명의 만화가로 겨우 밥만 먹고 산다.
  양상호. 백과사전 외판원.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지금은 한 가족이라 가족끼리 동침을 삼가는 율법에 따라 가까이하지 않는 아내를 꼬드기기 위하여 한 시절 교회에 다녔고,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친절한 언어로 수행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꾀죄죄한 몰골을 한 동네 꼬마가 그림을 곧잘 그리는 것을 알고, 꼬마에게 스케치북까지 선물하며 스케치북에 꽉 차게 만화를 그리면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믿음을 준 것을 당연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만화만 잘 그리는 코찔찔이 소년이 서른여덟 살의 장년이 된 어느 여름날, 남의 집 현관문이 저절로 열리게 만드는 재주가 남다른 양상호가 화장실이 급하니 선처를 부탁한다는 애절한 호소를 해 김종태의 집에 들어오고, 능수능란한 영업력을 자랑하는 고수답게 5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을 195만원에 사고 팔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 김종태. 시간이 흐르면서 양상호가 저 먼 기억 속에 만화가의 꿈을 심어준 채 다시 찾아오겠다는 허튼 약속을 날리고 사라져버린 교회 형인 것을 알아낸다. 만화가의 꿈은 그저 꿈이었음을, 허튼 희망을 주는 건 못할 짓이었다고 벌써 자각하고 있던 김종태는 이제 양상호를 벌주기로 결심을 하는데, 어떤 벌인지 내가 일러드리지 않을 건 벌써 짐작을 하고 계시리라.

 

  재미있다. 내가 희곡을 읽은 내력이 보잘것없어 삼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 탁월한 우리의 현대 희곡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쉽고 익숙하다. 희곡집 구입을 머뭇거리시는 분을 위한 추천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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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04 09: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작가가 있었군요. 작가 이력이 참 재미납니다. 정말 농활 간 대학생 청년이 꿈에 부채질을 했을까요? ㅋㅋㅋ 저도 농활 가서 그런 적 있는 거 아닌가 돌아봤는데 전 애들하고 놀기는 했어도 꿈 부풀리는 이야기는 안 했던 거 같습니다. ㅋㅋ 아 근데 답장은 안 했네요; 잘못했네 잘못했어...

암튼 이 작가 책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01-04 09:54   좋아요 5 | URL
ㅎㅎㅎ 잠자냥 님도 농활 경험이 있군요.
전 걍 땅만 파다 온 거 같은 기억입니다. 특히 아이들하고 접촉을 피했는데, 그래도 편지가 와서 답장 한 번 해준 적 있습니다.

이 책은 별 다섯 주긴 했지만 명작이라거나 그런 수준은 아니고요, 뭤보다, 제목처럼 쉽고 재미있습니다. 현대 프랑스 희곡 읽다가 이 책 읽으니까 을매나 개운한지 말입죠.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04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어요. 무엇보다 쉽다니~~♡

처음에 골드문트님 요리책 보신 줄 알고 놀랐어요. ㅋ

Falstaff 2022-01-04 11:5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요리책.
딱 그 작품이 대표작인데요, 막판 정말 역발상적 결말이 재미납니다! ^^

stella.K 2022-01-04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쿨캣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골드문트님은 소설 전문인데 웬 요리책...?
이젠 거기까지 지경을 넓히시려나 보다 했습니다.ㅋㅋ
근데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
작가 이름이 약간 독특하네요.
하지만 꿈조차 없으면 삭막해서 어찌 살겠습니까? OTL~

Falstaff 2022-01-04 16:48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렇습니까, 요리책?
제가 간단한 먹거리는 좀 만들지요. 저한테 배워서 큰 아이도 음식 만들어 지 딸한테 먹이는 거 찍어 보내고 그렇습니다. ㅋㅋㅋ
주말에 한 끼는 거의 빼지 않고 제가 만들어 마눌한테 상납합니다. 이젠 귀여움도 좀 받아야 할 때거든요. 읃어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ㅋㅋㅋㅋ

꿈은 꿈일 때 좋지, 그걸 특히 해도 해도 안 되는 걸 (사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말이지요) 기어이 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에휴... 전 생각만 해도 불쌍하고 그런 걸요.

stella.K 2022-01-04 19:01   좋아요 3 | URL
ㅎㅎㅎ 노후보장 확실히 하시는군요.
잘하셨습니다.
울엄니는 일찌기 청상이 되셨는데
교회에 비슷한 연배의 권사님들 얘기들으면
이 나이에 영감 시집살이한다고 푸념이 이만저만 아니더군요.
아마 울아부지도 살아계셨으면 엄마깨나 들볶았을 것 같은데
그런 거 보면 엄마 늦복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앗, 제가 골드문트님 앞에서 별소리를 다합니다.
용서해주시와요. >.<;;ㅋ

mini74 2022-01-04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희 엄마 일기장에 아버지는 망할 놈 ㅠㅠ 저희 아버지는 직장다니는 선비? 타입이셨거든요. 딱 직장만 , 모자라는 생활비도 다섯아이 학비며 공부며 집안 공사조차도 엄마몫. 그럼에도 엄마는 아버지 마니 그리워하십니다 ㅎㅎ 울 남편이 그렇게 물도 못 맞추면서 커피 타준다는데는 이런 이유도 있겠군요. 별 다섯개 , 설렙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인생입지요.
이 책 어렵지도 않고 별 다섯을 향유할 명작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만, 무엇보다, 쉽고, 재밌습니다.

그레이스 2022-01-04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닉네임 바꾸셔서 그냥 지나갈뻔 ㅎㅎ
남의 집 대문을 열게하는 외판원 ^^
전 여기서 알라딘 장바구니를 열게하는 골드문트님을 봤습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4   좋아요 3 | URL
아하, 낚시꾼을 보신 거네요? ㅋㅋㅋ 고맙습니다!!!!
 
라스트 울프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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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울프≫를 읽으면서, 이번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접경을 이루는 두에로 강변에 아홉 마리 남은 늑대에 관한 서사보다도, 문장이 끝나지 않고 쉼 없는 쉼표를 나열시킬 때 독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해 생각이 많았다. 작품의 앞 부분 조금을 인용해보자.

 

  “그저 웃음이 났다, 거리낌 없이 튀어나온 웃음이었지만, 그러다 한편으로는 허무함과 다른 한편으로 멸시감 사이에 어떤 차이라도 있는가, 또한 그 모든 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왜냐면 이게 늘 제 곁에 따라붙어, 돌이킬 수 없이 세상만사 모든 것에 늘 상관이 있고, 세상만사,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에서 번져나가니까, 게다가, 실로……”

 

  이게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중편 <라스트 울프>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보이는 것처럼 “그저 웃음이 났다,”의 구두점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역자 구소영은 헝가리 어가 쉼표만 찍어 놓으면 얼마든지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정작 딱 한 문장으로 된 작품을 정말로 보고, 읽게 되니, 혹시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의도적으로 문장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구분짓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말, 문장의 경우 주어, 목적어, 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주어는 가끔 생략되기도 한다. 바로 쓴 문장처럼 “~다.”로 대부분의 문장이 끝난다. 그래 인용한 부분에 첫 절 “그저 웃음이 났다,”가 쉼표로 끝나는 바람에,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절을 끊지 말고, 쉼표의 취지에 맞게 아주 잠깐만 숨을 고른 다음 곧바로 이어서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강박인지는 모르겠다. 강박이 아니라는 전제로 말하자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자신의 중편 <라스트 울프>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라고 주문한 것일 수 있다. 이 작품보다 더 짧은 <헤르먼>의 경우에는 마침표가 찍힌 문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애초에 상상을 초월하게 긴 문장을 선호하는 작가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전직이 교수인지, 하여튼 한 시절 교수라고 불리기도 했던 남자가 베를린의 꾀죄죄한 주점 슈파쉬바인의 바에 앉아 제일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두세 시간, 혹은 서너 시간에 걸쳐 핥아 먹듯 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이이에게 어떤 것을 주문하겠느냐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슈턴부르크 한 조끼를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테이블에 텅, 내려놓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를 상대로, 한 때 자기를 초대한 마드리드의 단체 덕택에 스페인의 엑스트레마두라에 간 이야기를 한다. 두에로 강변에 모두 아홉 마리로 구성된 늑대 집단이 있었는데 이 늑대들이 좀 얌전하게 있었더라면 북아메리카에선 늑대 복원 사업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르건만, 비록 늙고 약한 것들에 해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가축을 잡아먹는 바람에, 그리고 늑대라는 유럽인들의 음습한 악마주의의 영향으로 괜히 과장된 두려움 때문이겠으나, 한 마리, 한 마리 씩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래 독일의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앞에 놓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헝가리인 바텐더처럼, 독자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으라는 작가의 취지로, 끊임없이 쉼표를 나열해 단 하나의 문장으로 작품을 쓴 것이라고 이해했다.
  못 믿겠으면 읽어보시라. 마치 내가 헝가리인 바텐더인 듯, 처음엔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 중요해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기도 하고, 거기다가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문장이 낯설기도 하고, 하필이면 읽은 날이 휴일 낮술에 절어 피곤이 가중된 월요일 오전이라면, 호시탐탐, 어떻게 책을 그만 읽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까, 궁리를 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늑대 이야기가 나오면, 여태 했던 딴짓을 멈추고 솔깃해 교수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처럼, 어느새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자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독자가 <라스트 울프>를 단숨에 읽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함께 실린 <헤르먼>은 같은 사건을 “사냥터 관리인”과 “기교의 죽음”이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냥터 관리인은 곧바로 헤르먼이란 사람을 지칭한다. 두 작품을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읽으면 모르겠지만 <라스트 울프>를 읽고 바로 <헤르먼>까지 읽으면, 사실 늑대와 헤르먼이 달리 발음하는 하나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벌판과 삼림지대가 같이 있고, 이에 걸맞는 음산하고 비정하고 잔인한 동화가 널리 구전되는 동, 북유럽의 경우에, 늑대와 헤르먼은 이들 주민에게 막연한 공포를 제공하는 개체들이다.
  물론 늑대와 달리 사냥터지기이자 능숙한 덫 사냥꾼인 헤르먼은 나중에, 살짝 맛이 갔다고 봐야 할 수준이 되어, 주민들이 제시한대로 과하게 번식한 포식동물을 사냥하다가, 결국엔 진짜 광포하고 무모하고 최상위의 포식자인 사람을 대상으로 덫 사냥을 시도하고 성공하는 캐릭터로 변모해, 두에로 강변의 늑대보다 훨씬 위험한 야수가 되긴 한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헤르먼이야말로 유럽의 마지막 늑대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 책에 표제작하고 함께 실릴 수 있었지 않을까 싶었다.
  <헤르먼>의 첫번째 판인 “사냥터 관리인”은 맞던 틀리던 하여튼 읽어내긴 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건 두번째 판 “기교의 죽음”의 부제를 “미시마 유키오와 상반하여”라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작 본인은 별다른 이상이 없음에도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입대하지 못해 전쟁에도 나가지 못했던 인물이 자위대 앞에서 미국과 굴욕적인 군사협정을 맺고자 하는 현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극우 보수적 연설을 한 후에 할복 자살을 해치운 미시마 유키오를 이야기한 건 아닐 터. 짐작하건데 그의 정치적 행보와 전혀 다른 극단의 심미적 문장과 미학을 염두에 두고 부제를 지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 내가 미시마 유키오를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감이 안 오기도 할 터이다.

 

  짧은 작품들이다. 가볍게 접근했다가 코 깨지기 쉽겠다. 그렇다고 못 읽을 만큼 어렵지도 않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읽기로 마음먹으면 충분히 즐길 만하다. 여러 독자의 감상평을 듣고 싶은 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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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03 09: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닉네임을 바꾸셨군요. 골드문트도 좋네요. 이번에는 헤세의 그 골드문트 맞는거죠. 혹시 제가 모르는 또다른 골드문트가 있는건 아니겠죠. ㅎㅎ

쉼표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니..... 유럽 사람들 소설에서 가끔 이런 식으로 쓰는 방법에서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하던데 당혹스럽더라구요. 주제 사라마구같은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문단이 하나도 나뉘지 않고 따옴표 하나도 없는 소설을 쓰잖아요. 읽다가 좀 질리던데요. 도대체 어디서 끊어서 쉬어야 할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그러고 보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들이 좀 숨막히는데 이런 서술방법도 소설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겠구나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이 작가 역시 골드문트님 말씀대로 마침표 찍지말고 한번에 몰아쳐서 읽으라고 하는 의미일수도 있겠구나싶네요. ㅎㅎ

Falstaff 2022-01-03 09:37   좋아요 4 | URL
넵. 헤세의 골드문트, 맞습니다. 십대 시절의 로망이었습지요. 당시에 친구들에게 골드문트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그게 누군지 아는 놈이 하나도 없어서 말입죠.
옛 이야기를 한 번 했더니, 알라딘에선 모르시는 분이 없더라고요.
게다가 골드문트가 폴스타프처럼 늙는 것도 재미나지 않습니까. 그래 서슴없이 폴스타프의 젊은 시절 로망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ㅋㅋㅋㅋ

저도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쓴 <소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5백쪽의 장편소설인데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더군요. 읽은지 오래라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글자 빽빽했던 것만... ^^;;;
<라스트 울프>는 읽으면서 위에 쓴 기분이 팍팍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완전 아마추어의 의견입니다. 그저 이런 의견도 있구나, 정도로만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22-01-03 09: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여러 사람의 독자평을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더라고요, 이웃 중 한분이 이 작품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셨는데(골드문트 님도 아시는 분) 그 글을 읽고 다시 읽으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고 그렇습니다. 미시마 유키오 부분은 저도 골 님이 이해하신 것처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Falstaff 2022-01-03 09:47   좋아요 2 | URL
옙. 이런 책은 여러 독자가 읽고 자신의 감상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감상이 뒤따를 거 같아요.
근데 저는 <헤르먼>을 읽으면서 왜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주인공 두셰이코 선생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2-01-03 12:58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두셰이코 여사 떠올랐어요. 둘이 만나면 아주 그냥 장난아니겠다 싶더라능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2-01-03 09: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 반갑습니다!
올해에도 소개해주시는 좋은 책들 기대할게요.

Falstaff 2022-01-03 09:48   좋아요 2 | URL
옙, 자목련 님. 고맙습니다.
자목련 님도 좋은 시, 우리 소설 소개해주세요!

수이 2022-01-03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어디 가신 거지? 원래 골드문트님이셨나? 하고 잠깐 당황했습니다. 🙄

잠자냥 2022-01-03 09:47   좋아요 4 | URL
2022년에 회춘했다능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03 09:4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잠자냥 님 말씀대로 회춘한 거 맞.... 회춘인가, 주책인가, 이것이 문제군요!

수이 2022-01-03 10:06   좋아요 2 | URL
저는 그럼 열여섯짤로 회춘! ㅋㅋㅋㅋㅋ골트문트님 새해 건강한 모습으로 자주 뵙도록 해요. 잠자냥님 글 올리셨나 가봐야지~

Falstaff 2022-01-03 12:00   좋아요 1 | URL
열여섯, 고 1 시절, 딱 <지와 사랑>을 읽은 시기고, 자장면 집 골방에서 생전 처음 제 돈 주고 쐬주 한 병 시켜 먹었을 때입니다. 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1-03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 담긴 작가의 의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라˝!!

Falstaff 2022-01-03 12:00   좋아요 1 | URL
옛. 이 작품은 그렇게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1-03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저도 반갑습니다!
사진도 골드문트로 바꾸셔야 완성같은데요~~^^

이 책 일단 찜해두겠습니다.

Falstaff 2022-01-03 12:01   좋아요 4 | URL
흠.. 사진은 곤란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인터넷 뒤져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더니 주로 영화에서 방랑하는 젊은이 몰골, 눈이 퀭하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대부분이더라고요. ㅋㅋㅋ

잠자냥 2022-01-03 12:59   좋아요 3 | URL
아니면 닉네임을 골드뭉툭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2-01-03 18:35   좋아요 0 | URL
저도 🖐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scott 2022-01-03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프로필 사진도 골드문트를 원합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3 12:02   좋아요 3 | URL
으떻게 늙은 골드문트다,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ㅋㅋㅋㅋ

mini74 2022-01-03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된 소설이라니 신기하네요 ~~ 근데 ㅠㅠ 제가 생각한 골드문트는 이렇지 않아요. 곱게 늙길 바랐는데. 배가 나오다니 ㅎㅎㅎ 골드문트님덕에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알게됩니다 ~

Falstaff 2022-01-03 19:57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 지금 제 모습이 폴스타프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골드문트 시절을 보신 분이 몇 분 계신데, ㅋㅋㅋㅋ
아마 그럴 듯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

2022-01-05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5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년에는 책 읽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2백 권 미만을 읽고자 했습니다만, 223권, 6만9천 페이지를 읽었군요. 내년엔 기필코 2백 권 미만을 달성하겠다고 각오해봅니다. 이 가운데 올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 열 권과,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권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책 읽는 것에 관해서 잘해봤자 딜레탕트 수준인 제 기호에 좋았다, 최고다, 하는 것이니 이 목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새삼스레 다른 책과 견주는 것이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갈라테아 2.2>는 작 초반의 높은 진입장벽이 문제였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은 후에 큰 충격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빠르게 열기가 식었습니다. <레베카>, <호모 파버>, <에쿠우스>, <어린 당나귀 곁에서> 그리고 <케이크와 맥주>는 여러 번 목록에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고 또다시 제외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2021년 Top 10,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2021년의 Top 10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방주의 주인 노아가 낳은 아들 함의 자손들. 이 가운데 오아시스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부족이 있다. 결혼식이 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위해 광대패들이 도착한다. 음악이 이어지고 은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 공연의 불꽃이며 혼. 베일을 쓴 얼굴과 발, 그리고 매끈한 검은 피부의 배에 가죽 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 관능적 묘사. 날이 새고 이미 떠나버린 광대들의 숙영지 모래밭에 떨어진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주워든 소년 이드리스는 몇 달 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서 자신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와 동행한 프랑스 여인을 찾아 파리로의 여행을 감행하는데, 나중에야 황금 구슬, 그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투르니에의 사진 행위와 철학을 가미한 기호가 어떻게 문장이 되고 소설로 엮이는지를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을 듯.

 


2. 빅토리아 토카레바, 《티끌 같은 나》

  동토의 왕국,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소비에트 연방 속에서도 언제나 봄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씨앗에서 발아해 태양을 향해 솟구칠 준비를 한 채 도사리고 있던 싹들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쳐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맞아 힘껏 도약을 한다. 이 속에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빅토리아 토카레바도 있었다. 배급경제가 빈사를 헤매면서 자신들이 소비에트를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던 프롤레타리아들은 다시 가난과 상점 앞의 긴 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소설 역시 물질적 곤란함과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그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카레바. 이 시크하고 쿨한 작가는 가난 속에서 치사한 애인이 도망가도, 킁, 콧방귀 한 번으로 가비얍게 물리쳐버린다. 궁상맞을 상황을 현명하고 시크하게 빠져나가는 힘이 독자에게 진하게 어필, 이이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3.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
 

   루시디의 무시무시한 입담이 독자를 압도하는 명편. 지금은 절판이지만, 모 출판사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이의 번역으로 인쇄를 할 예정이라는 귀띔을 받았다. 독자 제위께서는 아무쪼록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셨다가 책방에 깔리자마자 구입을 망설이지 마시라. 책이 두 권 6백 쪽 가량 되지만 한 번 잡았다, 하면 여간해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굳이 재미의 수준을 말씀드리자면, 장담하건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하고 계급장 떼고 맞장을 붙어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무어는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뿌린 씨를 받아 ‘다 가마’의 성을 갖고 있는 모계,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날 당시의 술탄 보압딜의 후예가 부계이니 대단한 가문인데, 임신 넉 달 만에 출생을 하고, 인생을 2배속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거한이다. 여기에 루시디 특유의 현대사를 마구 섞어 드런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Top 10 한 자리를 꿰지 않을 수 있을까.

 


4. 앨리 스미스, <데어 벗 포 더>
 

   문제작이라고 하면, 문장적 문제작일 수도 있고, 소재의 문제작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이디어의 문제작이다. 소설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 한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초청받은 사람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말만 듣고 난생 처음 간 집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슬그머니, 외투와 휴대전화와 기타 등등은 그냥 소파 위에 둔 채로 이층에 있는 (욕실이 딸린)손님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철커덕, 잠근다. 갑자기 사라진 손님이 손님방에 아직도 있다는 걸 알아챈 부부는 얼마나 겁나고 치가 떨렸을까. 이 문제의 남자 마일스 가스 씨를 방에서 꺼내기 위해 부부는 별의 별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이게 또 특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방송사는 생방송을 찍는 등 난리가 벌어지는데,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셨나? 발칙하고 끔찍하고 참신한 아이디어. 이 책 이후로 난 앨리 스미스의 팬이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5.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는 기수들>
 

  노벨문학상을 탄 유일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의 대표작.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네 명의 소외받는 주인공이 백호주의의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존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신이 조금 모자라고 못생겼으나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 대 장원과 저택의 상속 독신녀 헤어 양. 신체 건강하고 선한 마음을 지녔으나 주정뱅이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난한 성녀 고드볼드 부인. 짐승 취급을 받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으로 입양된 백인 가정에서 도망한 청년 앨프 더보, 그리고 독일 태생 유대인으로 전직 대학교수였지만 가스실 앞에서 생명을 구해 이민을 온 후엔 공장 직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식하고 현명한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 이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공존을 위해 애쓰는 광경이 안타깝다. 약자에 대한 비방, 비웃음, 멸시, 폭력 등을 구경하는 일이 산뜻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연합이 또한 흐뭇하다. 강자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 침묵하는 다수들, 너희들 모두 유죄다.

 

 


6. 야 지야시, <밤불의 딸들>

  이 책은 에바리스토의 역작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이 다른 인물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장면 때문에 선택했다. 그러니 올해 Top 10에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 들지 못한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고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가나의 옛 아샨티 왕국 맘풍 출신 미국 이민자 야 지야시의 데뷔작. 첫 작품으로 지야시는 미국 문학계의 유망한 샛별로 등장한다. ‘마메’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큰 어머니에게 고귀한 두 딸이 있었으니, 하나는 아프리카 노예수출 사업의 황금해안가에 터를 잡고, 다른 하나는 노예로 떨어져 영국을 거쳐 미국땅으로 흘러간다. 이후 수백 년 6대를 지나 서로 같은 혈통에서 시작한 형제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황금해안에 들르게 된다. 각기 6대에 이르는 흑인들의 지난 개인사가 흥미진진하다. 고귀한 가문의 큰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노예 출신이기도 한 마메. 천국에서 추방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제 해방을 맞았지만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7.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짧은 노벨라 분량의 소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작품. 헌옷 장수 지노가 철도원 2급 신호수의 딸 니농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지만, 니농은 한 시절 우연한 충동으로 불장난 한 것 때문에 그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당시 HIV 감염자는 마치 저 중세시대의 페스트 환자나 방울을 달고 다녀야 했던 나환자처럼 극단의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너무도 사랑하여 HIV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로 결정, 이탈리아 지노의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을 위하여 아버지 2급 신호수는 프랑스쪽 알프스 모단에서 이탈리아 포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달려가고, 어머니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고리노로 향한다.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지노가 직접 잡은 20kg짜리 농어와 친척들이 친절하게 요리한 음식을 차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따뜻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8.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이 작품을 Top 10에 올린 건 전적으로 내 취향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분들은 <이아생트>를 읽기 시작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몽상이다. 굳이 음악과 비교하자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미지 말고는 전혀 없는 듯한 드뷔시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백만 평에 이르는 저 광막한 평야. 그 위에 단 하나의 호롱불이 빛을 발하고 있는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리는 작은 집. 그러나 암벽 위에 올려져 있어서 밤이 내리면 마치 망망대해 속의 반짝이는 등대처럼 유일한 불빛, 또는 모종의 신호를 올리고 있는 단 하나의 지표. 넓고 넓은 암흑의 평야에 유일하고도 인류의 마지막인 듯싶은 영혼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을 들게 하는 곳. 이 마지막 집, 라 주네스트를 아직도 견디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의 고통과 사색, 침잠, 상상, 그리고 몽상. 이 몽상에 동감할 수 있는 독자는 만족할 것이고, 아닌 독자는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9.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를 “단편의 달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단편집. 미국의 북동부 삼림지역에서 살다가 웬만큼 나이가 들어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하고, 자연 풍광에 반해 단편집 <와이오밍> 시리즈를 쓴 프루. 이이의 대표 단편을 모은 책. 황량한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서부는 서부인데 서부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이란 전제로, 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 대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사람의 이야기. 나의, 당신의, 아니면 전철 저편에 앉아 가볍게 코를 고는 승객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애절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날씨를 닮아 모질기도 하고, 때론 눈물샘을 콕 누르는 듯 쓸쓸하기도 한 이야기,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애니 플루는 가장 얇은 비단실로 촘촘하게 누벼놓았다.

 

 


10.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식민지 원주민의 모든 기대와 노동력을 바쳐 남중국해의 조수를 막는 제방을 건설하려는 어머니. 단 하룻밤 사이에 이민 온 식민지 거주자 가정과, 근처 원주민들의 희망을 싹 쓸어간 태평양은 이제 어머니와 남매에게 절망, 그리고 허무와 탈주의 바람만을 남겨놓는다. 그러다 딸/누이의 결혼을 대가로 어머니는 다시 제방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오빠 조제프는 지긋지긋한 해변의 소금밭을 떠날 기회를 엿본다. 이들의 절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뒤라스의 눈매와 너무도 공감을 주어 서늘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읽어낸다. 모차르트는 하스킬 노파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건반을 누를 때 절창이듯이, 절망에 대한 공감 역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 절절하다.

 

 

 

2021년 최고의 한 권.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이 책은 다 읽고 덮는 순간 올해의 책이 되리라 직감했다. 다른 작품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서사로 밑받침을 하고, 마치 돌탑을 쌓아올리듯 탄탄한 구조로 저 수백 년에 이르는 악의 연대기를 한 눈에 조망할 전망대를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걸고 얻고자 한 유일한 사랑을 위한 로망스까지 어디 한 구석 도려내 비난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지구가 편평했을 시절, 보편적 야만 속에서 가장 극악한 악에 의하여 희생당한 수사의 주머니에 든 단풍나무 씨앗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양심적인 수사의 시신을 양분으로 성장한 단풍나무로 만든 바이올린 비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또다시 살인이란 악에 의하여 소유주가 바뀌더니, 20세기, 유대인 노파의 정수리에 총알이 박히면서 또다시 악의 손에 들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패한 수사이자 잔혹한 골동품 수집상의 금고 속으로 들게 되니, 새로운 주인은 만년에 게으른 살인자라 불리는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서 이 글을 쓰는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의 수재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었다. 14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을 거쳐 단번에 21세기까지를 망라하는 거대한 악의 연대기. 2021년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분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알라딘 고객 평점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만점을 주지 않을지도 매우 궁금한 명작.

 

 

 


지난 몇 년 간의 올해의 책

 

2020년, 헤르만 브로흐, <현혹>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7년, 아달베르크 슈티프터, <늦여름>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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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1-03 14:42   좋아요 2 | URL
그동안 나이든 골드문트였다니까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2-01-03 14:45   좋아요 2 | URL
어디 댓글에 남기셨던 기억이 있는듯도 하고...^^
암튼 개명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아님 이름을 찾으신건가요?
ㅋㅋ

Falstaff 2022-01-03 16:34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골드문트는 청소년 시절의 로망이고요
폴스타프는 골드문트의 나이 든 버전이라니까요! ^^

행복한책읽기 2022-01-04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223권 6만 9천 페이지. 이런걸 세나요?? ㅋ 헉. 글고 닉넴은 언제 바꾸셨대요?? 프로필사진과 책과 글제목 냄새가 분명 폴스타프님인데, 골드문트??? 새해 어리둥절절절. 이유를 밝혀라 밝혀라!!! ㅋㅋㅋ <나는 고백한다>!!! 요거 하나 겹침요. 대체 일하고 술마시면서 책은 운제 읽으세요?? 님도 새파랑님처럼 안 주무심??
암튼, 새해 소망 꼭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12월31일에 확인 들어가겠음요. 어기면 벌칙 야쥐~~^^

Falstaff 2022-01-04 09:5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평생 엑셀로 먹고 산 인간입니다. 이 정도 데이터는 기본입지요. ^^;;

프레이야 2022-01-08 14: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리나강의 다리. 보여서 반갑습니다 ㅎㅎ 2016년의 책으로 꼽으셨네요. 그 전 해에 읽었어요. 골드문트 님 뽑아주신 책 목록을 이제 보다니요.

Falstaff 2022-01-08 15:18   좋아요 3 | URL
그죠, 그죠! <드리나 강의 다리>! 진짜 재미나게 읽었는데 좋아하시는 분, 심지어 읽어다는 분도 별로 만나지 못했어요. 아쉽게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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