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좀 꺼줄래
케빈 윌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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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에 케빈 윌슨이 쓴 <펭씨네 가족>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출판사 은행나무가 그만 절판시켜 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그럴싸한 현대적 엽기, 괴기 가족 이야기, 저 오래 전 유럽 북부를 지배했던 베오 울프 족의 후예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딸랑 한 가족만 남았는데 멀쩡한 사람을 죽여 피를 빨기는커녕 예술지상주의 이 가운데서도 행위예술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난장판, 이게 미국사람 마음에 꼭 들었는지 할리우드에서도 니콜 키드만을 캐스팅해 우리말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는 거다. 나도 하도 기막힌 스토리라서 작가 케빈 윌슨이란 이름을 딱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새 책이 작년 8월에 나왔다는 걸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얼른 새 책 사주세요, 희망도서를 신청했더니 어느 눈 밝은 독자가 있어서 벌써 신청이 되어 있어 해가 바뀐 뒤에야 읽게 된 거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기다렸다는 말씀.


  이 책도 <펭씨네 가족>만큼 어이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펭씨 가족처럼 베오 울프의 후손이라 예전에 사람의 피를 주식主食으로 빨아먹는 유전자가 있어서 송곳니가 기형적으로 발달했다는 등, 이런 거 말고 그동안 세월이 조금 흘렀으니 좀 더 어이없는 방향으로 상향 진화하여, 미합중국 테네시 주 상원의원 로버츠 씨네 후손들 가운데 특정 유전자를 가진 자손들은 화딱지가 나거나, 상처를 입거나, 그래서 아프거나, 누가 괴롭히거나,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체온이 처음엔 슬슬, 그러나 잠깐 사이에 팍팍 올라가는 증상이 있는데 열이 얼마큼 오르느냐 하면 화르르륵 파랑과 노랑 불꽃이 가슴에서 시작해 머리로, 양 팔로, 다리로 확 번져서 입고 있는 옷이 금방 불에 타고 옆에 재수없게 인화물질이 있으면 그냥 화재가 일어나고 말 정도였으며, 한 시절엔 테네시 주에서 가장 유능하고 능력있고 저 유명한 네이처 잡지에 다수의 논문도 발표한 존경받는 꼬부라진 은퇴 의사가 진찰을 하고는 자기 판단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불꽃을 발산하는 것과 같거나 비슷해서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삼배체 형질 또는 지옥의 대마왕 루시퍼와 같은 형질이 분명하지만, 자기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인체발화의 특성상 불꽃이 일어나 화재를 일으킬 정도라면 당사자 역시 불꽃, 그것이 아니라도 연기에 질식해 심각한 부상을 입든지 아니면 죽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떻게 생겨먹은 아이들이고 어떻게 터져 나온 플라즈마인지 몰라도 화재 발생 당사자는 머리카락 한 올 까닥하지 않고 옷과 만 달러짜리 커튼과 삼만 달러짜리 카펫만 태우고 멀쩡한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들이 이름을 베시와 롤란드라고 하는 열 살짜리 쌍둥이 남매인데, 아빠 재스퍼 로버츠 씨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테네시 주 상원의원이면서 지금 국무장관을 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 튼튼한 육체를 자랑하는 국무장관이 숟가락을 놓기만 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어 자신의 주변, 특히 가족사항에 흠 하나 없이 하고 싶어한다. 왜 아니겠어, 명색이 국방과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국무장관 후보자인데 아이들이 몸에서 불을 뿜는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적어도 자랑스럽지 않잖아? 글쎄, 내 생각엔 자랑도 아니지만 굳이 험이 되는 거 같지도 않지만 말이지. 하여간 쌍둥이를 낳은 첫번째 아내 제인한테 엄한 불평 불만 짜증 등 기타 온갖 난리를 죽여 결국 제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과 동시에 친정집으로 가서 홈 스쿨링을 하건만, 테네시 주에서 무지하게 큰 사업을 하던 친정아빠가 한 순간에 거덜이 나 감옥에 갈까 말까 하는 신세가 되어 그래도 정이라고 옛 사위가 뒷배를 봐주어 전과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많고 많던 재산은 다 휘리릭 날아가버리고 초라한 별장 비슷한 거 하나만 남아버렸으며, 제인 본인도 심각한 우울증이 생겨 아이들을 거의 방임 수준으로 키우다가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그동안 모으고 모으고 또 모은 온갖 약을 밥공기로 몇 개를 한 방에 삼켜 드런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이 사이에 상원의원 아빠 재스퍼 로버츠는 겁나게 재산이 많고 말타기와 말 수집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지 결혼 비슷한 것만 했는지 하여간 그런 상태로 있다가 성격차이로 헤어진 후에 선거 캠프에서 눈에 확 띄는 유능한 여성, 더군다나 늘씬하게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밴더빌트 대학 졸업생 매디슨 빌링스와 결혼하여 아들 티머시를 낳아 키우고 있다. 로버츠 씨 입장에서 전 아내가 죽었으니 좋거나 싫거나 하여간 쌍둥이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생겨버렸으니 이 불덩이들을 어찌할꼬. 이때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어디 한 구석 빠지는 구석이 없는 젊은 아내 매리언이 적절한 베이비시터 또는 예전 말로 여성 가정교사 한 명을 남편이자 쌍둥이 아빠한테 소개하니 드디어 이 책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사실은 첫 장면부터 등장하지만 그렇게 후다닥 소개해버리면 재미가 적을 거 같아서 뜸 좀 들였다. 좋게 봐주시라.


  때는 1995년 늦봄. 화자 ‘나’의 이름은 릴리언 브레이커. 아빠가 아니라 엄마 이름이 브레이커, 깨뜨리는 자, 망치는 자, 일 수도 있다. 아빠는 릴리언이 태어나서 코빼기 한 번 못 봤다. 엄마와 한 집에서 살았는데 릴이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엄마는 릴의 방에 노르딕 트랙 런닝머신을 들여놓고 릴을 다락방으로 쫓아버렸다. 아니꼬우면 나가면 되니까. 성인이잖아. 릴이 기억하는 시기부터 릴은 가난했고,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28세의 릴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슈퍼마켓의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두 곳의 사장 두 명한테 미움도 받고 돈도 받고 편의는 하나도 못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릴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 있는 떡잎이었고, 겁나게 전도유망한 소녀였다. 일찍이 세 살 때 알파벳은 물론이고 글자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별로 공부도 안 하면서 전과목 A를 채집하는 걸 취미생활로 했고, 여전사들의 훈련장인 줄 알고 철자법 대회에 설렁설렁 나가 최우수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운티 과학경시대회에 기존 과학논문을 조금 유치한 수준으로 다운 그레이드 시켜 베낀 것을 제출해 최우수상을 먹은 전력이 있다. 이밖에 무수하게 많은 호화로운 이력은 지면이 아까워 생략하거니와 골짜기 마을에 신동이 하나 나왔다고 동네 아줌마들 입술에 침이 마를 새가 없다는 거였다.

  테네시 산골짜기에 아이언 마운틴 사립여학교라고 기숙학교가 하나 있었다. 이곳이 전 미합중국에서 제일 돈 많은 집안의 딸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여 교육받는 곳으로 학비도 엄청나게 비싼 곳이었지만 전원을 부르주아의 딸로만 채우기 좀 거시기해서 공부 잘하는 극소수의 소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다른 아이도 아니고 우리의 릴리언 브레이커가 땄다는 거 아닌가. 이에 감격한 중학교 교사들이 비싼 교과서를 직접 구입해 릴에게 선물해 드디어 릴은 전국 최고의 기숙여학교에 가기로 결정을 했으나, 이 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는 똥을 쥐고 세상에 나왔는데 더 나은 걸 원하는구나. 똥을 금으로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렵단다. 어쩌겠니. 행운을 빈다.”

  해서 옷 가운데 가장 예쁘고 점잖은 걸 골라 입고 엄마의 똥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보니 제일 언짢은 수준의 학부모 차가 BMW였다나 어쨌다나. 도무지 릴의 입장에선 말 한 번 붙여보지 않았던,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던 같은 또래의 소녀들 무리에 끼어, 결코 주눅은 들지 않은 채, 기숙사에 들어가 만난 룸메이트가 훗날 재스퍼 로버츠 상원의원의 아내가 되는 매디슨 빌링스였던 거다. 이때부터 매디슨은 키도 크고, 예쁘고, 운동 특히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밤에 몰래 기숙사를 탈출해 근처에 있는 예술대학 남학생들과 술집에 가서 마리화나와 코카인 맛도 보고, 적당히 즐기기도 하는 별세계 소녀였지만, 자기하고 비슷한 부잣집 아이들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당돌한 아이였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면 부잣집 예쁜 아이들하고 밥을 먹으며 그 아이들하고만 외출을 했는데 뭐 그런가보다, 했던 릴. 이 또래 가운데 제일 덜 예쁜 아이가 무슨 심통이 났는지 교무실에 가서 매리언의 책상에 코카인이 있다고 고발을 해서, 선생이 들이닥쳐 서랍을 열어보니까 정말 코카인이 있는지라, 즉빵으로 매리언의 아버지가 새벽같이 학교로 쳐들어왔다. 왔지만 어떻게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코카인인데. 그리하여 이날 빌링스 씨는 그동안의 우정을 봐서 릴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해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음식점에 가니까 글쎄 엄마가 와 있는 거였다. 이렇게 두 식구 네 명이 밥을 먹다가 빌링스 씨는 위스키를, 엄마는 마티니를 홀짝거리다가 취기가 살짝 돌 즈음해서, 빌링스 씨가 은근히 엄마한테 제의를 한다. 사랑한다고? 천만의 말씀. 백만장자가 가난하고 나이든 과부를? 어림도 없는 얘기.

  매리언은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해서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걷기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 이름난 기숙학교를 그만두지 못할 상황이다, 반면에 릴은 가난한 집 딸이라 오히려 학교에서 선처를 해줄 가능성이 높고 그만두더라도 사실 잃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 매리언의 책상 서랍에 있었던 코카인이 사실은 릴의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엄마한테 만 달러를 주겠다고.

  엄마는 즉각 수락하고 빌링스는 그 자리에서 이미 엄마 이름이 쓰여 있는 만 달러짜리 수표를 봉투에 넣지도 않은 채 그냥 건네준다. 이튿날 매리언 대신 이미 더플백을 싸 놓은 릴이 퇴학처분서를 받고 엄마의 똥차를 탄 채 골짜기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며 다시 공립학교에 다닌다. 자신의 인생에 반전의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는 걸 이해하고 더 이상 삶의 총기를 발휘하지 않은 채.

  여름이 되자 매리언이 편지를 보냈고, 전화는 한 번도 없었지만 편지는 3~4 개월에 한 장씩 릴의 집 앞에 떨어져 이제 매리언과 릴리언은 펜팔이 된다. 모든 일에 용의주도한 매리언은 혹시 이런 방식으로 릴을 자신의 충실한 동지, 어떤 일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해줄 충성스러운 병사 한 명을 키운 거 아닐까? 해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십여 년이 흐른 후, 매리언 빌링스였던 매리언 로버츠는 두 군데 슈퍼마켓의 파트타임 계산원 릴리언 브레이커에게 편지를 해 자기 전처 자식의, 옛날 말로 가정교사 자리를 제의하고, 릴은 수락해 이 불꽃 튀는 쌍둥이 남매와 여름 한 철을 보내게 된다. 바로 그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애간장을 녹였던 한 마디.

  “자기 애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망치지 않은 부모를 하나라도 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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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쿠르초 말라파르테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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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1898년에 독일에서 이민 온 섬유기술자의 셋째 아들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프라토에서 “쿠르트 에리히 주케르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지역 명문 치고니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후배가 되지만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무작정 가출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에 도착, 이탈리아 출신 의용군에 합류하여 아르곤 전선에서 독일군하고 대치한다. 이때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귀가했고 1915년에 이탈리아가 정식으로 전쟁에 뛰어들자 다시 이탈리아 정규군에 지원해 알프스 산악부대 보병연대 중위로 입대한다. 낭만적으로 전쟁을 생각한 고등학생이 이제 본격적인 전쟁의 혹독한 맛을 경험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각각 무공훈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18년 7월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을 당해 평생 폐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처절하게 패배한 전투였던 카포레토 전투를 주제로 한 <카포레토 만세!>를 써 이탈리아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미 1922년부터 파시스트 당원이었으나, 아무리 나쁘게 봐도 다분히 낭만적인 파시스트였던 거 같다. 1925년에 쿠르트 주케르트는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라 개명하면서 계속 글을 쓰지만 어느새 일 두체,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논조로 바뀌어 버렸다. 이탈리아 최대의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그를 고용하여 파리 특파원으로 파견하지만 그곳에서 말라파르테는 히틀러를 희화화 한 <쿠데타의 기술>을 출간한다. 이 책의 이탈리아 판은 무솔리니에 의하여 판금조치 되고, 33년에 귀국한 후 곧바로 체포되어 반파시즘 활동을 한 죄목으로 5년 추방형을 선고받아 정치범 수용소에 유배된다. 책에도 등장하는 무솔리니의 미남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이 이를 딱하게 여겨 유명한 토스카나 해양도시인 포르테 데이 마르미고 이송을 시키는데, <망가진 세계>에서는 이 곳을 말라파르테의 고향으로 설정했다. 히틀러 풍자 서적 <쿠데타의 기술>이 이 와중에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유배 도중에도 인세가 꼬박꼬박 쌓여 그곳에서 근사한 별장을 구입하는 엽기행각도 벌인다.

  1940년이 오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대위로 징집된 말라파르테는 병역 대신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종군기자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를 다니며 몰래 <망가진 세계>의 원고를 쓴다. 히틀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누비고 다닌 말라파르테는 폴란드에서 <망가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완성하고 힘러의 게슈타포가 엄정하고 살벌하게 검문하는 데도 불구하고 원고를 각지에 분산시켜 폴란드를 빠져나와 핀란드로 들어간다. 1943년에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 도착하고 이틀만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얼마만에 석방되어 카프리 섬으로 들어간다. 섬에 입도하기 전에 열차를 타고 폐허가 된 나폴리의 장면이 이 책의 마지막 장chapter인 “파리fly”에 묘사되어 있다. 카프리 섬에서 원고를 끝낸 것이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3년 9월이었다.

  즉, 이 책은 아직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패배를 전망할 수 있을지언정 확언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시절에 쓴 작품이다. 모두 6부로 되어 있고 각 부는 동물 이름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말, 쥐, 개, 새, 순록, 파리. 이 작품은 르포르타주와 소설이 절반 정도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하나의 큰 이야기 줄기가 있고 여기서 몇 개의 에피소드라는 가지가 장식하고 있는 정식 소설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사실(적 이야기)을 종군기자가 쓴 기사, 르로르타주reportage로 보기도 어렵다. 이것들이 합해 있다면 문학으로서 이 작품은 당연히 소설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떤가. 그냥 읽으면 된다. 그동안 전쟁을 묘사하는 많은 책을 읽었으나 이 <망가진 세계>만큼 적나라하게 전쟁의 참상과 비참, 참담, 암담, 허탈을 있는 그대로 쓴 작품은 처음이다. 작가 자신도 이 책을 “대단히 유쾌하면서도 섬뜩한 책”이며 “전쟁동안 눈으로 본 유럽의 대재앙 중 가장 특이한 광경”이라서 독자에게 “섬뜩한 유쾌함”을 선사한다고 서문에 썼으나, 이 책에서 어떤 장면이든지 유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변태 아니면 맛이 좀 간 상테라고 봐도 될 것이다.


  첫 장면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의 동생인 오이겐 왕자의 거처 발러 발대마쇼덴이다. 9월이며 벌써 오크힐의 고목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가을. 빌라의 맞은편 티볼리 놀이공원의 말들이 구슬프면서도 무언가를 열망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허공에 공명시키는 곳. 이 해의 여름에 말라파르테는 핀란드의 라플란드 페차모 전선에서, 결코 지지 않는 무자비한 태양빛 아래에 피곤과 극도의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지내다 헬싱키의 병원에서 오래 입원한 후 퇴원, 스톡홀름에 도착해 오이겐 왕자를 방문한 터였다.

  이들은 의사 악셀 문테 이야기를 한다. 그가 말하기를 독일인은 병든 민족이라고. 늘 공포에 차 있어서 공포 때문에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독일인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모두 결코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 대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민족.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 약자, 병자, 여성, 어린이, 노인, 유색인, 집시,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 세상의 모든 소외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들이 바로 독일인, 나치 독일인이라 했다고. 말라파르테의 이런 관점은 책이 끝나는 시점까지 일관되게 펼쳐진다. 하다못해 연어를 잡기 위해 강에 수류탄을 던져 모든 하천 생물체를 말살시키는 독일인을 결국은 연어가 이길 것이고,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건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된 나폴리, 이미 귀족과 부르주아는 안전하게 피난을 떠나 여성과 노인과 어린이와 병자와 장애인만 남은 나폴리의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오랜 기근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와 빈대와 벼룩투성이의 민중이 되리라는 생명주의가 결론이다.

  능멸과 치욕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유럽의 한 가운데 떠 있는 행복한 섬 스웨덴. 이 섬에서 말라파르테는 전쟁 후 거의 처음으로 평온한 삶의 감각을, 인간적 위엄의 감각을 되찾은 느낌을 받지만 한편으로 스웨덴 풍경을 말horse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전쟁에 대하여 중립을 선포했으며, 독일 민족에 관한 냉소적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오이겐 왕자의 눈과 눈썹에 서린 차가운 잔인함은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난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이 언뜻 비쳐 보였던 거였다. 말라파르테는 오이겐 왕자에게 스몰렌스크 포로수용소에서 본 소련군 포로들 이야기를 해준다.


  “포로들이 동료 수감자의 시체를 뜯어먹는 동안 독일군들은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공포와 수치를 느꼈다. 오이겐 왕자에게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이겐 왕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회색 외투에 몸을 파묻은 채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들었는데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기분이 상해 날 질책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말라파르테가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소련군 포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났던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을 이때 본 거였다. 디트리히는 그의 얘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얘기한 것만 달랐을 뿐.

  “Hat es ihnen wenigstens geschmeckt? – 그들이 맛있게 먹던가요?”

  독일군 사병들도 어떻게 말릴 방법이 없었다. 그들도 먹을 것이 없었으니. 전쟁은 그런 것이다.


  1941년 4월, 나치 꼭두각시인 크로아티아 자유국가가 탄생하고 초대 총통 안테 파벨리치가 취임한 후 종군기자 말라파르테는 그를 만난다. 크고 넓적하면서도 강인하고 거친 느낌을 주어 마치 옛날 친구라도 만나는 느낌을 주는 친근한 얼굴. 거대하고 우스꽝스럽고 괴기하기까지 하게 큰 귀를 지녀 어딘지 모르게 좀 바보스러움을 가진 듯한 총통은 말라파르테의 감옥살이에 관해 물으며 흡족한 웃음을 흘리는 것까지도. 몇 달 후 다시 총통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크로아티아와 소련의 게릴라, 파르티잔이 밤이면 자그레브 근방까지 숨어들어 오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안테 파벨리치의 책상 위에 버들고리 바구니가 놓여 있었으며 그 속에는 런던 피커딜리 거리의 식료품 백화점에 진열될 만한 홍합과 굴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배석한 카제르타노 공사가 말라파르테에게 묻는다.

  “굴 찜 좋아하시죠?”

  “달마티아산 굴인가요?” 그가 총통에게 직접 묻는다.

  총통 안테 파벨리치는 바구니 뚜껑을 벗겨 홍합을 보여준다. 젤리처럼 미끈미끈한 덩어리들. 총통은 선량하면서도 어딘지 바보 같기도 한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의 충성스러운 우스타샤 대원들이 선물로 보내온 거랍니다. 사람들의 눈알 이십 킬로그램입니다.”

  생포하거나 죽인 게릴라, 파르티잔들의 눈알. 생굴처럼 보이는.

  이런 것이 전쟁이다. 그러나 결국은 약한 것, 소외된 것, 작은 것들이 이기고 마는 거대한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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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05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이렇게 개처맞고도 반항하는 작가 놈들 글만 보면 저는 사족을 못 씁니다…부럽습니다 먼저 읽으셔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2-05 17: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런 골통들이 가끔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른 읽으셔요!!

coolcat329 2024-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시스트 군인이 쓴 전쟁의 참상이라니...이 책 또 엄청 끌립니다.
작가가 보통 사람같지 않네요. 또 새로운 책, 작가 알게 돼서 넘 기쁩니다.

Falstaff 2024-02-05 17:52   좋아요 1 | URL
조국에 살기 위해서 마음엔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파시스트 군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참 험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살지 않은 게 어딥니까.
이게 유명한 작품인 모양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선 별로 인기가 없지만....

coolcat329 2024-02-05 18: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말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찾아보니 영어를 번역한 거 같던데 어떠셨나요?
숨겨진 걸작같아요. 땡투 받으시면 저인줄 아시길요~😅😅

Falstaff 2024-02-05 19:23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어를 번역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그냥 읽든지 해야 하는 거지요 뭐. 번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애입니다.
문장은 전혀 어색한 거 없었습니다. 수식 같은 문학성보다 내용이 중요한 작품이라 중역, 직역은 생각보다 영향을 덜 주는 거 같더라고요.
ㅎㅎㅎ 땡투 들어오면 쿨캣님 생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얽힘 설킴 부클래식 Boo Classics 69
테오도어 폰타네 지음, 박광자 옮김 / 부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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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년에 가난한 약사의 아들로 독일 노이루펜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군 입대를 하기도 했고 약 5년간 약사생활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전업작가로 나섰다. 서른여섯 살 때엔 정부 부속 통신사에서 특파원으로 3년간 영국에 살면서 스코틀랜드 등을 여행하고 훗날 스코틀랜드 여행기도 출간했다. 독일의 마르크 브란덴부르크를 여행한 다음에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여행기>도 출간했으니 문학도 했겠으나 주로 여행기, 전쟁기 같은 르포르타쥬에 힘을 기울였다. 첫 소설은 쉰아홉 살 때인 1878년에 <폭풍 이전>을 발표한 것으로 친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얽힘 설킴>은 69세 때, 대표작 <에피 브리스트>는 76세 때 출간했고 78세에 눈을 감았다. 쉰아홉, 우리 나이로 예순에 데뷔해 세계문학전집에 나오는 사람도 있으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여, 나이 탓하지 말고 도전해 보시든지.


  <에피 브리스트> 같은 경우엔 작 초반에 복선을 너무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의 결말이 어느 방향으로 날 지 거의 확실하게 짐작한 상태로 읽어가게 되는데, 더 허무한 건, 예상한 대로 작품이 풀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숙명여고 다니던 복선이라고 있었다. 걔가 <얽힘 설킴>에도 너무 자주 나온다. 청파동 살았었다. 언제 독일 마르크 브란덴부르크까지 이사갔댜? 거 참. 근데 <에피 브리스트>에선 결정적 복선이 나와 다른 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반면, <얽힘 설킴>의 복선이들은 그대로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사실 오래 전 소설들을 읽으며 독자가 즐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구석에 숨어 있는 복선을 발견하는 일이다.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가 결말까지 간 후에 아, 그래서 앞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구나, 하고 떠올리는 건 중하급의 수준이라고 지레짐작해 조금 까진 독자들은 악착같이 미리 복선을 알아차리고 싶어 눈알을 굴리면서 찾는 법이다. 그래봐야 나중에 잘난 척 한 번 더 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 하지만 숨은 그림 찾기를 뭐 잘난 척하려고 찾는 인간만 봤니? 그것도 재미라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다. 실제로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얽힘 설킴>에선 정말로 딱 보면 복선인데(얘 복선아, 여기 숨었구나!) 나중에 보니 결말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많다. 나는 오히려 이런 발견 오류도 재미있었다. 초반에 복선이 심오해서 이거 (막 사람이 죽어 자빠지는) 너무 큰 비극으로 끝나는 거 아냐, 했다가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여서,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뭐 이럴 때도 있어야지.

  19세기 독일소설이면? 맞다 재미는 별로 없다. JTBC인가, TV에서 했던 토크쇼에서도 독일 패널이 발언하면 재미없다고 야유하던 출연자들 말마따나 이 프러시아, 독일 사람들은 하도 어려서부터 비슷한 교육을 받는 거 같다. 능률과 검약, 그리고 지긋지긋한 질서와 규율. 물론 이 가운데에서도 별종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작품의 주인공 보토 폰 리네커 남작이 그렇다. 아빠도 남작 출신, 엄마도 남작 집안의 따님. 체덴 성castle과 주위에 인접한 넓은 영지를 한 때 소유한 거부였지만 남작 아버님께서 유럽판 타짜한테 걸려 재산 거의 대부분을 통째로 날려 먹고 이제 전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험지만 조금 가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 더구나 채권자들이 점잖지만 양보하지 않을 태세로 채무 원금까지 갚을 것을 요구하고 이때마다 엄마는 득달같이 오빠, 즉 보토의 외삼촌에게 달려가, 오라버니 한 번 만 살려주시우, 사정사정을 하는 상태. 보토는 연 수입 9천의 근위 기병대에 근무하면서 연간 1만2천을 소비하는 생활을 포기하지 못해 날이 갈수록 쪼들릴 수밖에.

  애초에, 그러니까 보토네 가정이 체덴 성을 중심으로 무지하게 잘 나가던 시절에 보토의 부모는 엄마의 언니 젤렌틴 가문의 갓 낳은 딸 케테와 약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케테는 20대 중반의 꽃보다 더 아름답지만 머리통은 텅 빈 아가씨가 되어 온갖 곳에서 청혼이 쇄도하는 가운데, 보토에게 하루빨리 결혼이든 파혼이든 결론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케테 아가씨와 결혼만 하면 젤렌틴 가문에서 현금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와 폰 리네커 남작 집안의 부채는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토는 케테와의 결혼은 생각해본 적도 없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상태라서 여전히 그저 가능성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고 있었다.

  1870년대의 어느 날 베를린 근교의 토론토 스트렐라우 강가에서 친구와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하고 있다가 어여쁜 두 아가씨가 탔고 동생인 듯싶은 어린 남자 아이가 노를 젓는 배가 증기선하고 부딪혀 산산조각 나기 바로 전에 극적으로 그들을 구해주었다. 여기에 여주인공 막달레네 님프취 양이 타고 있어 젊은 남작이 한 눈에 반해버렸으니 비단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 아니라 막힘없고 거짓도 없고 밝은 기상과 맑은 정신과 똑바른 대화법을 익힌 소양 때문이기도 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들을 집까지 에스코트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레네 양은 머뭇거리지 않고 너무 멀어서 괜찮다고 대답했으며, 남작은 오히려 더 잘됐다고 맞장구를 쳐 레네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그날로 레네 양의 집을 방문해 나이 든 엄마, 사실은 입양한 의붓엄마인 님프취 부인과도 주인집 되르 부인과도 친목을 텄으니 진짜 읽어보시라, 남작이 상당한 수다꾼이었던 거다.

  이후 보토 폰 리네커 남작은 수시로 이 집을 들낙거리고, 레네 양과의 사랑 역시 그만큼 깊어져 딱 19세기 잘 교육받은 남녀한테 어울리는 속도로 친밀해지기 시작해 서로 만지고 키스하고, 드디어 1박2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19세기 작품이라 한 장면도 나오지 않지만 독자는 당연히 했네, 했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랑하는 커플이 깊은 밤을 함께 지내게 되면 더욱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라서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이다. 바로 이 행복의 정점에서 분위기 깨는 일이 벌어지니 남작의 군대 동료 세 명이 길거리 아가씨 세 명을 데리고 이들이 여행을 떠난 관광지에 들이닥쳐 완벽하게 분위기를 깨버린다.

  물론 이들이 아니어도 현명한 레네는 짐작도 하고 각오도 했었다. 가난한 평민의 입양한 딸이 남작과 결혼할 마음, 의도,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냥 잘 생기고 심성도 좋은 훌륭한 남자이자 남작 각하를 사랑해본 것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고 충분히 행복했던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각오했다는 것이지 정말로 그렇다는 말은 아닐 터.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사랑을 택해 집안이 망가지든지 말든지 레네 아가씨와 혼인을 해서 평민 님프취 양을 남작부인으로 만들어? 아니면 전통있고 명망 높은 남작 가문의 영애 케테 젤렌틴과 결혼해 가문의 위기탈출은 물론이고 자신의 영원무궁한 복지 유지를 꾀해?

  나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던 평민 레네 아가씨와 애초에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 레네를 진정으로 사랑한 보토? 진정으로 사랑했으면 처음부터 정을 붙이지 말았어야지 짜샤!


  이것으로 작품은 대단원을 맞지 않는다. 결혼을 한 다음에도 3년 이상이 더 흘러간다. 그러니 19세기 독일 소설 작품이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 보실 사. 비스마르크와 함께 전쟁 나갔다가 한 줌 재가 되어 돌아온다고? 에이, 농담도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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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4-02-02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구렛나루 느끼남이 거슬려요;;;

Falstaff 2024-02-02 13: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당시엔 그것도 멋이었을 거구먼요.
 
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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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도리스 레싱 깨나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한 구석이 찜찜한 것을 숨기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하필이면 처음 읽은 레싱이 <다섯째 아이>였다. 아이고, 세상에나. 내 독서생활에서 <다섯째 아이>만큼 읽으며 제발 해피엔드로 끝나라, 제발 해피엔드로 끝나라, 이렇게 굿을 했던 적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나의 라이브러리도 그만큼 두터워졌지만 레싱은 여전히 한 발자국 건너 ‘음산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풀잎은 노래한다> 《런던 스케치》, <황금 노트북> 등등.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시각으로 관찰하는 매운 눈매와 필체는 알겠는데 하여간 불편한 작가. 계속 그랬다, 나한테는. 중편 모음집 《그랜드마더스》를 읽기 전까지.

  《그랜드마더스》. 2003년 작품. 레싱의 나이 여든네 살 때였다.

  오매, 도리스 할매 작품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하나 같이 이렇게 예쁘고, 수다스럽고, 기발하고, 진보적이며 감탄스럽기까지 한 책을 썼을까? 그런데 번역본 내고 7년밖에 안 됐는데 왜 출판사 예담은 벌써 이 책을 절판시켰을까? 정답은, 예담이 2017년 12월 말로, 망한 거 같다. 출판 회사를 위해서, 도리스 레싱을 위해서, 독자를 위해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 역시 개가실에서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눈에 띄어 읽었다. 이것으로 도리스 레싱의 번역 단행본은 다 읽은 셈이다.

  내가 《그랜드마더스》를 입에 침이 튀도록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젊은 시절에, 지금보다 절반 밖에 나이 들지 않은 시절에 읽었더라도 지금처럼 공감하면서, 그것도 절절하게 재미있다고 할 수 있었을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여든이 넘은 작가가 딱 그만큼의 세월을 묵혀 쓴 작품을 읽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찍은 장맛을 구별할 줄 아는 독자의 시간도 필요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네 편의 중편소설을 실은 책. 노년에 이른 두 할머니가 아직 중년에까지 미치지 못한 두 남성과 벌인 일종의 스와핑이자, 일종의 근친관계를 담은 표제작품 <그랜드마더스>, 계급의 벽과 삶/생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이주 흑인의 안간힘을 그린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家>, 권력과 지도자 선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것의 이유> 그리고 가슴 속 먹줄로 남은 사랑과 실제로의 삶을 조망한 <러브 차일드>. 어느 한 작품 만만하거나 가볍거나 행복하지 않다. 앞에서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재미있다고 했어도 도리스 레싱은 도리스 레싱이다. 이이는 네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진짜 삶, 우리가 지금 들들 볶고 있고, 살아내는 열기에 푹푹 찌고 있으며, 때론 지글지글 태워 버리기도 하는 불행의 가마솥이 어떠한 포기와 상실과 좌절을 지불하고 마련한 것인지 반 발짝 딱 떨어져 그려내고 있다.

  이 가운데 표제작 <그랜드마더스>.


  벡스터 만bay. 바다를 바라보고 양쪽으로 작은 곶을 혀처럼 내민 것도 모자라 정면 방향에는 군데군데 암초가 솟아 거의 언제나 바다가 얌전한 상태로 있는 낙원. 이곳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벡스터즈라는 옥호의 레스토랑이 있고 오늘도 언제나처럼 예순 즈음의 두 여자와 중년 이전 나이의 두 남자, 그리고 여자아이 둘이 산보를 겸해서 찾아온다. 여섯 명 다 금발인 걸 보면 가족이겠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게 맞다. 할머니-아버지-딸. 로잔느(로즈)-톰-앨리스 그리고 릴(릴리안)-이안-셜리.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테레사는 얼마 전에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진학을 한 해 미루었다. 대학은 잉글랜드에서 다니려고 마음먹었는데, 꼭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인지, 그냥 고향인 이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은 건 아닌지 막하 고민중이다. 가여운 테레사는 애초에 톰을 (짝)사랑하다가 이안으로 바꾸었고, 지금 다시 톰을 (짝)사랑하고 있어서. 사실 톰과 이안은 벡스터 지역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들이다. 그러나 이 가족 뒤쪽 테이블에 앉아 이편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농부 청년 데렉. 이이는 테레사를 연모하고 있어 틈만 나면 레스토랑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며 바라보기만 한다. 테레사도 호감을 느끼지만 정말 원하는 건 이 가족들의 구성원이 되는 일. 그러나 결국 테레사는 농부와 결혼해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이 가족의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인 메리가 급한 걸음으로 한 손에 편지 뭉치를 들고 언덕을 올라온다. 편지를 남편 톰 앞에 내려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메리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 후 메리는 두 아이의 손을 끌고 데리고 가면서 말한다. 목소리가 약간 크거나 떨렸을 수도 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당신들은 두 번 다시 아이들을 보지 못할 거예요.”

  메리가 뒤로 돌아서고 멀어지자 이안이 로즈에게 이야기한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당신 잘못이야.”

  당찬 성격의 로즈는 분노로 단단해진 웃음을 날리며 이렇게 받아친다.

  “내 잘못이라고? 그렇겠지. 나 말고 누구겠어?”

  이안의 아내 한나도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차마 죄인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언덕을 올라오지 않았다. 메리와 함께 벌인 사업의 사무실에서 의구심과 초라함과 수치심이 차올라 부글거리고만 있을 뿐. 이게 대체 무슨 사달일까? 중편 <그랜드마더스>는 바로 그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반세기 전, 릴리안과 로잔느는 학교 다니면서 만났다. 잠깐의 탐색을 끝내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 누구도 자신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게 되면서 곧장 절친이 된다. 이들은 오직 둘만 같이 행동하며, 공부하고, 말썽도 부리고, 운동도 해서 ‘친 자매 같다’, ‘쌍둥이 같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자주 듣는다. 우연히 금발머리와 푸른 눈까지 같아서. 릴은 모든 운동신경이 뛰어나 수영 챔피언으로 유럽과 해외까지 유명해졌고, 로즈는 학교 연극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외향적이고 활달하며 생기넘치고 떠들썩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나란히 운동과 연극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일찍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라서 로즈는 학구파에 시인 기질의 헤럴드 스트루더스와, 릴은 스포츠용품과 의류매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동네 재벌 테오 웨스턴과 짝이 되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합동 결혼식을 하고, 벡스터즈가 있는 바깥쪽 곶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길 하나를 두고 마주보는 이웃으로 정착했다.

  결혼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릴과 로즈 사이에 있다. 나머지 남편과 아들들은 보조원이거나 들러리이거나 깍두기였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문제가 되지 않고, 릴의 남편 테오는 체인점 관리와 구매처 방문으로 숱하게 출장을 다니며 외간 여자들과 염문을 만드느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시인 기질이 충만한 해리(해럴드)는 계속해서 내상을 입고 있었다. 아내는 몰랐지만. 그러다 해리가 메리에게 말한다. 멀리 있는 대학에서 자기한테 교수자리를 권한다고. 메리는 자연스럽게 주말부부를 언급하고, 해리는 함께 이사할 것을 바랐다. 부부는 해리가 그곳에서 치명적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때까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자고 합의했고, 몇 년 후 정말로 해리에게 젊은 아가씨가 생겨 이혼을 했으며, 늘 출장과 바람피우기와 전속력 운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테오도 자동차 사고로 죽는 바람에 주체 못하는 현금을 릴에게 남겨 놓은 채 두 명 다 과부가 된다.

  아들들 역시 엄마들처럼 절친으로 자랐다. 톰은 어려서부터 의젓했고 이안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까다로운 아이로 컸다. 두 아이들은 자주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는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려 상처를 입은 이안은 톰의 집에서 밤 늦은 시간에 울고 있었고, 메리가 이 시간에 잠에서 깨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안을 발견했으며, 늘 그랬듯이 그의 머리통을 감싸며 위로해주었다. 해리의 방에 뉘고 그를 도닥이며 잠들었다.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러나 아침이 오자 이안의 눈 속에는 갈망과 고통과 허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후, 이안은 다시 톰의 집에서 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을 잘 때쯤 톰의 집에 와서 해리의 방으로 들어갔으며 한밤중에 어둠을 더듬어 이안이로즈리의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로즈의 옆에 눕더니 폭풍우 속의 구명띠인 양 로즈에게 매달렸다. 이렇게 사랑은 시작했다. 비슷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톰과 릴의 사랑도 시작했다. 자연스럽지 않다고?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깊었고, 오래 갔고, 슬펐으나 나이 든 여성들의 지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그러나 고통스럽게 칼 같이 끝을 맺었다. 다만 세상엔 완벽한 건 없는 법. 결코 열지 않았던 서랍 속에 이안과 로즈 사이의 또는 톰과 릴 사이에 소통했던 편지 꾸러미가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혹은 알았지만 처분할 수 없는 미련이 남았든지.

  이들의 사랑을 엽기라고, 비행이라고, 추문이라고, 비윤리적이라고 흉을 보고 싶으면 흉을 보라. 세상의 모든 사랑은 사랑일 뿐. 나는 이들의 사랑을, 적절한 시기에 큰 용기로 적절하게 맺어버린 사랑이 거슬리지 않았으니.

  도리스 레싱. 문장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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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편지 창비시선_다시봄
강은교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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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오랜만에 강은교를 읽는다. 헌책 샀다. 이이의 《허무집》과 《풀잎》 이후 시집으로는 처음 읽는다. 그동안 잡지에 나오면 읽고 아니면 말고 그랬다. 우리나라 리얼리즘 시인으로 이름을 높이지만 정말 그런 시만 쓰고 싶었을까,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나는 그것이 의심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1945년에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 출생 이후 줄곧 서울 살다가 80년대 중반이 지나서 박사 받고 동아대학 국문과 교수하느라 부산에 살았으니 이 정도면 서울 사람이라고 해야지 뭐. 애초에 허무와 존재를 고민하던 시인이었으나 세월이 점점 험해지니 참여의 길로 한 발을 디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애초에 깔린 모던한 사색을 어찌 몽땅 털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하여간. 내가 아는, 이라기 보다, 내 기억 속 강은교와 가장 가까운 시는 이거였다.



  벽 속의 편지

      그날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이

  이 세상의 모든 흐린 눈들과 헤어지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이 세상의 모든 곪는 살들과 헤어지는 날


  별의 가슴이 어둠의 허리를 껴안는 날

  기쁨의 손바닥이 슬픔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날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


  그대, 아직

  길 위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는 이여.   (전문)



 이 시를 70년대, 80년대에 읽었다면 “그날”에 관해서는 누구나 다 말도 한 마디 할 필요 없이 읽는 순간 팍, 이해를 하고, 아니면 시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해했다고 치고 “개벽”이라 말했을 거 같다. 그러나 시집이 나온 시기가 1992년. 시인의 나이 마흔일곱 시절.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왕년의 민주투사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을 하고(했나? 며칠 더 있어야 하나?), 여전히 자본 카르텔에 대한 저항은 저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목이 터질 망정, 하여간 그날을 이젠 꼭 다 같은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달인이 강은교, 라고 생각했다. 모던한 인텔리이지만 리얼리즘을 노래해야 했던 불운한 시기에 빌어먹을 전성기를 달린 시인. 예를 들어 <울음의 線 – 그 첫번째>의 첫 연을 읽어보면:


  나의 이름을

  골리앗 크레인

  ‘외로운 늑대’라고 불러다오

  별을 세고 있으면 문득 별이 사라진다

  새벽 2시

  어둠이 동지들 곁

  씨멘트 위에서 끓고 있다   (부분)


  강은교의 팬들에게 돌팔매를 맞아 죽을 말이겠지만 현직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노래치고는 공허하다. 난데없이 등장한 외로운 늑대는 또 뭐여?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 농성하는 사람, ‘동지’들이 외로운 늑대라고? 내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지 싶어 ‘외로운 늑대 lone wolf’ 검색해봤다. 하여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지는 알겠으니까 그건 그냥 넘어간다 쳐도, 동지들은 새벽 두 시에 찬 씨멘트 위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것이 선생한테 그렇게도 사무치는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어차피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는 그들에게 한 다리 건너다. 오늘 도리스 레싱 작품에서 더 적절한 문구를 읽었지만 인용하지 않는 것은 나 역시 강선생의 오랜 독자라서임을 통촉하시옵소서.

  다음엔 이것 한 번 읽어보시라.



  새우



  꼬부라진 등을 메고

  비릿한 수염이 허공을 뻗어 있는

  희푸른

  그 새우를 아는가.


  허허벌판 접시 위에서

  모진 이들에게

  살껍데기를 다 벗기우고

  가끔씩 푸들푸들

  세상맛을 보는 듯 경련하는

  그 새우를 아는가.


  퍼덕이는 말과 말 사이로

  미사일들의

  숨죽인 굉음과 굉음 사이로

  가끔씩 푸드드득


  푸드드드득.   (전문)



  1992년 출간 시집이니 이 당시 산 채로 껍질을 벗겨도 아직 신경은 살아 있어 가끔 접시 위에서 푸드득 살을 떨던 새우는 요즘에 양식해서 자주 상에 오르는 대하가 아니다. 보리새우라고 부르고, 당시엔 ‘오도리’라 했던 남해 특산 어종이었다. 단맛이 일품이고 주문하면 종업원이 직접 껍질을 까주기도 했다. 술꾼들이 상 위에 껍질 벗긴 보리새우를 올려놓고 수다를 떠는 광경이다. 그러나 창비 진영의 작가, 시인,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면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를 떠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술꾼들의 수다를 미사일 터지는 장면으로 변환할 수 있고. 이럴 때 시인은 시치미 뚝 떼고 뒷짐을 지고 있으면 된다. 해석은 당신들이 하라고. 그냥 껍질 벗긴 새우의 장면을 연상하면 더 좋은 시가 될 터인데, 끙. 내 의견대로 읽는다면 괜찮은 모더니즘 시일 수 있을 텐데.

  비슷한 수산물이 하나 더 있다. 강은교는 수산물엔 폭탄이 터지는 습관이 있다.



  아구



  오늘 아구 한 마리 사왔네

  멋진 아구찜, 아구탕의 꿈을 위하여


  쭉 찢어진 아가리가 몸뚱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네

  그 녀석의 뼈는 또 왜 그리 억세던지

  칼로 내려치는 나를 향해 연신 비아냥거리고 있었네

  그 녀석의 미끌거리는 잿빛 살껍질도

  날아가는 로켓탄 같은 아가리도


  ‘어둠이 질기면 얼마나 질기랴’

  그 녀석의 짓무른 눈

  젖어, 고함치고 있었네.   (전문)



  이 시도 마찬가지다. 기껏 통통하게 살 오른 아구 한 마리 사와서 칼로 치다가 작은 따옴표 쳐서 강조하기를 ‘어둠이 짙으면 얼마나 질기랴’ 한 마디를 해야 속이 풀린다. 아구탕 걸지게 한 국자 떠 마신 것처럼. 바로 앞 연의 마지막 행 “날아가는 로켓탄 같은 아가리” 역시 ‘어둠이 질기면 얼마나 질기랴’를 쓰기 위해 굳이 로켓탄까지 찬조출연한 거 같다. 아구찜, 아구탕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큼지막한 식칼로 아구의 몸을 우당당탕 치고 있다가 시인의 눈에 큼지막한 아구의 아가리가 로켓탄처럼 보였고, 하고 많은 중에서 하필이면 로켓탄처럼 보였고, 싱싱하지 않았나? 짓무른 눈도 지 까짓 것이 얼마나 질기겠어? 고함을 친단다. 그럼으로 해서 시인은 동류의 동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내 말이 뭐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명인이라니까. 매콤한 아구찜, 얼큰한 아구탕으로 시작했다가 어둠 규탄대회로 끝나는 거 말이지. 하긴 뭐. 시는 시고, 삶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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