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다와다 요코는 일본 출생이면서도 살기는 독일에서 산다. 독일어로도, 일본어로도 작품을 쓴다. 두 언어 모두 자주 번역해 다른 나라에서도 팔리는 국제어 가운데 하나임에도 그런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걸 뭐라 할 수 없지.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시라.

  근데 나는 특히 다와다의 독일 체류.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일본인이 독일에서 ‘작가로’ 살며 언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게 조금 야릇하다. “야릇하다”라는 형용사를 선택하기 위해 머리를 좀 굴렸다. 처음엔 ‘우습다’로 시작해서 ‘못마땅하다’를 거쳐 좀 더 순화된 표현이 없을까 고르다가 내 나름대로 애써서 쓴 단어가 ‘야릇하다’인 걸 고백한다. 물론 나름대로 고충이 있고, 그것도 작은 고충이 아니겠지만 뭐 그 정도 가지고 유난을 떠는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써야 했던 시인, 작가들. 알제리에서 알제리 언어를 버리고 “적국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작품을 써야 했던 아시아 제바르 같은 인물에 비하겠느냐는 말이다. 프랑스는 그래도 프랑스어로 프랑스의 잔인한 정복행위와 통치와 독립전쟁에서의 학살을 비난했던 아시아 제바르를 프랑스 아카데미 종신회원으로 만들어주기라도 했지, 다와다 요코의 모국인 일본 정부가, 일본어로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비난한 글을 썼다면 비슷한 생각을 꿈에서도 못했을 것이다. 당장 불령선인으로 몰아 감옥에서 죽여버리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것을.

  다와다여, 내 말을 아니꼽게 여기지 말라.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라의 후손이 당연히 따져볼 수 있는 문제이니.


  <목욕탕>은 1989년에 발표한 독일어 작품. 상상 이상으로 널찍한 자간, 행간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간신히 100쪽을 넘긴 분량의 짧은 작품이라 2018년에는 같은 책에 독일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실린 새 판본으로도 출간했다고 역자 최윤영이 을유에서 ‘책읽는수요일’로 넘어가며 새로 고친 해설에 쓰여 있다. 다와다 요코가 세상이 다 알아주는 환경주의자, 반핵주의자인데 이 책 편집을 실물로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다와다의 문학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소개한 기념할 수 있는 책인데, 1989년까지 다와다는 아직 반핵운동가도 환경주의자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 속에서 비슷한 내용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이의 다른 책에서는 한 권도 빼지 않고 반드시 등장하는 주제임에도.

  대신 소위 Hiruko 삼부작에서 이야기하는 일본의 건국신화 속 거머리 공주처럼 일본의 옛 이야기가 등장한다.


  일본의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임신한 여자가 물고기 한 마리를 보고 하도 배가 고파 마을사람들과 나눠먹지 않고 혼자서 그걸 날로 다 먹어버렸다. 아들을 낳고 나중에 보니 아들 말고 엄마의 몸에 비늘이 돋기 시작해 커다란 물고기가 되었다. 이제 산에 살 수 없어져 강으로 가서 혼자 외롭게 살았고, 아들은 마을의 외로운 할아버지가 키웠다. 동네 아이들이 다툴 때마다 아들더러 네 엄마는 비늘 짐승이라고 흉을 보아 할아버지한테 비늘이 뭐예요, 라고 물어 엄마에 대해 알게 된 아들. 어떻게 엄마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논이 없는 마을에 바위를 깨서 흙을 만들면 농사를 제대로 지어 마을이 잘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겠다, 그러면 엄마를 다시 데려와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강에 찾아가 엄마한테 이 얘기를 하니까 엄마는 그때부터 자신의 몸을 바위에 부딪혀 바위를 깨 흙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바위에 몸을 부딪혔는지 정말로 산골 마을에 논이 생겼을 땐 엄마의 몸에서 비늘이 벗겨져 다시 사람이 되는 대신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버리고 말았다.


  Hiruko 3부작의 거머리 공주 이야기는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7번,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소개했으니 그걸 참고하시고, <목욕탕>에서는 주인공 화자 ‘나’의 얼굴에 비늘이 생기는 걸로 시작한다. 비늘은 얼굴에만 돋은 것이 아니라 잠옷의 단추를 열어보니 가슴과 팔에도 고등어 냄새가 나는 비늘이 자라 있다.

  흠. 보이는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 혹시 그거 땟가루 아냐? 하도 때를 밀지 않으니까 각질이 두껍게 쌓였다가 겉 각질이 푸스스 부스러진 상태. 거 솔직하게 말한다고 누가 뭐라 하나? 어차피 픽션이라서 다와다 몸에 땟가루 앉았다고 흉볼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목욕탕>을 처음 읽어 나가며 이 책은 일본의 구전 전설이나 옛이야기를 현대 독일에 맞춰 다시 설계한 것이겠다, 이렇게 예상했었는데, 아니다. 이제부터 다와다 요코 특유의 정신없는 횡보를 시작한다. 다분히 포스트 포스트모던한 작품.

  목욕을 끝내고 화장도 마친 ‘나’의 집에 독일인 애인 크산더Xander가 라이카 카메라 세 대를 들고 찾아온다. 여행사 광고 포스터에 삽입할 ‘나’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렇다고 크산더가 사진가는 아니란다. 독일어 강사. ‘나’에게 독일어를 가르쳐준. 그러다 눈이 맞아 애인 사이가 되었다.

  ‘나’ 역시 여행사 광고 포스터의 모델로 크산더가 원하는 대로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포즈를 취하지만 (이건 또 뭐야!) 그렇다고 ‘나’가 모델인 건 아니다. 통역사. 독일어-일본어 통역. 이 날도 호텔 컨퍼런스 룸으로 일본, 독일 상사간 회의가 있어 통역을 하러 가야 하고, 정말로 간다. 오전 회의가 끝나고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비늘이 돋은 걸 발견했는데 점심식사로 커다란 생선이 통째로 한 마리 나온다. 대표 셰프가 큰 칼을 들고 여자의 허벅지처럼 생긴 생선살을 발라 참석자 열한 명의 분량으로 사이 좋게 나누어 준다. 비록 ‘나’는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생선을 먹다가 콱 막혀 화장실에 가서 까무러쳤지만.


  그럼 오후 회의는 어떻게 해? 이거 사람 인심이 이렇게 야박해서야. 통역사가 화장실에서 까무러쳤는데 지금 회의가 문제야? 그렇다. 회의가 문제다. 아무도 와보지 않는다. 대신 화장실 청소 담당하는 마흔살 전후의 청소부가 ‘나’를 구원해준다. 호텔의 잡역부 쉼터에서 쉬게 하다가 급기야 자기 집으로까지 데려다 준다. 여자는 몸의 반이 심한 화상을 입었다. ‘나’는 생선 먹을 때부터 입이 콱 막혔다. 혀가 없어져버린 모양이다. ‘나’가 좋아하는 혀가자미 요리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먹지도 않았는데 왜 혀가 없어졌을까?

  정신없지? 나중에 알고 보면 이 화장실 전속 청소부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 화재가 나서 불타 죽은 여자 아닌가 싶다. 어떠셔? 더 들어보실래? 관두자. 책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정신 사나운 이야기가 좌르륵 나열되어 있다. 별로 흥미롭지 않은 언어 이야기, 언어를 발음할 수 없는 혀가 사라진 이야기 등등. 하여간 이 사람, 은근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6-04-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약간 손이 안 가는 작가 중 하나입죠... ㅎㅎㅎㅎ

Falstaff 2026-04-10 15:4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럼 별 수 있간디요, 그냥 패스 해버려야지요. 쇤네도 이젠 끝 비슷한 기분입니다.
 
유랑극단 사계절 1318 문고 77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

  오랜만에 렌츠의 소설을 읽었다. 그간 10년 세월이 훌떡 지나갔네. 민음사세계문학 40, 41번 <독일어 시간>. 오래 전에 읽었고, 그리 인상깊지도 않아 새까맣게 잊은 줄 알았더니 도서관 서가에서 렌츠, 이름을 보는 순간 팍 떠오르더군.

  렌츠가 1926년에 나서 2014년까지 88년을 살다 갔는데 <유랑극단>은 2009년, 그의 나이 여든세 살 때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독일어 시간>과 <유랑극단> 사이에 42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다. 말 그대로 노익장이다. 독후감을 쓰려고 <독일어 시간>을 찾았더니, 아이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세계문학 시리즈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베란다에 따로 모아두었는데 <독일어…>도 거기 자빠져 있다. 손에 먼지 묻히기 싫다. 그냥 넘어가자. 독후감 써 놓은 것도 없는 거 보니까 또 틀림없이 쐬주 한 잔 걸치고 지워버렸나 보다. 성질 하고는 참.


  <유랑극단>은 제목하고 달리 함부르크 부근에 있는 걸로 보이는 가상의 “이젠뷔텔 교도소” 수감자들 이야기다. 부조리 소설로 봐야 마땅하다.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는 전직 교수 늙은이. 이름은 클레멘스. 수감자들은 ‘나’를 ‘교수양반’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렇게 쓰겠다. ‘나’를 타이핑할 때 작은 따옴표 붙이기가 귀찮다.

  이 늙은이 교수로 말할 거 같으면 이제 2년을 복역해서 자기 형량의 절반가량을 채웠다. 이이가 왜 들어왔는지 재미있으니 주목.

  교수 시절에 전공이 독일 문학, 이 가운데서도 “스트룸 운트 드랑 Strum und Drang” 우리 말로 “질풍노도”였다. 교수가 쓴 스트룸 운트 드랑 관련 저서는 독문학계에 널리 알려지고 권위 또한 떠르르한 책으로 웬만한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흔히들 그러하듯이 이 교수 양반도 자기 수업에 자기 책을 교재로 해 강의를 한 건 당연한데, 이게 문제가 아니라 졸업시험에서 사달이 났다.

  교수 양반이 필립 로스의 여러 책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주커먼 교수하고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자기 수업을 듣는 여학생 몇 명과 잤다. 그리고는 작품 중에서는 두 명만 나오지만 하여간 이 학생들 한테 최고점을 주었다. 팔이 안쪽으로 굽으니까. 근데 공부 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점에 불만이 있는 다른 학생들이 생각하니까 이게 샘이 나거든. 진짜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1920년대생 작가가 보기에 샘이 난 거 같아서, 그걸 학교 당국에 고발해버렸다. 독일에서는 이게 형사범죄인지 그리하여, 교수 양반이 보기에 자신한테는 전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사랑이 웬수지) 징역형을 받아 들어온 거다.

  이건 이해가 가는데 도무지 왜 그랬을까 싶은 이 비슷한 사건도 있지? 조너선 프렌즌의 <인생 수정>에 등장하는 칩 램버트 교수. 멜리사라는 여학생이 교수를 꼬여 모텔에 가서 한 번 하고 난 다음에 리포트를 좀 봐달라고, 써달라는 게 아니라 써 놓은 것을 한 번 봐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더니, A학점을 받고도 그걸 학교에 신고해서 교수를 해고당하게 만든 이야기. 거 참. 조심 좀 하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혐의로 걸리면 평생 크게 쪽팔린데 말이야.


  어쨌든 교수 양반이 머물고 있는 감방이 2인실인 모양이다. 여기에 새로 하네스라는 수감자가 들어온다. 교도소 신참은 아니고, 이미 두 번의 탈옥 미수 경력이 있는 화려한 묵은지. 교도소 안에서 하네스의 정보망을 벗어나는 수감자, 간수, 간부들은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네스는 천진함이 묻어나는 신선한 얼굴을 한 전직 사기꾼. 뭐든 입에 가져다 붙이면 그 말을 듣고 솔깃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그건 짐승뿐일 정도. 비가 오기만 하면 훔친 경찰복을 받쳐 입고 경찰 지시봉까지 챙겨 함부르크 외곽의 도로에서 과속이나 난폭운전 등의 교통단속을 전담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 오는 날 단속에 나서는 경찰이 없어 사고의 위험이 배가 되는 것 같으니 하네스 말대로 지극한 희생정신에 입각해 한 일이다. 그저 작은 문제는 갓길에 위반 차량을 세워놓고 과태료를 물린 다음 직접 집행까지 했다는 사소한 일이었다. 운전자가 원하면 당연히 수첩을 북 찢어 영수증까지 써 주었는데도 세게 걸렸다. 하필이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복 경찰의 차를 세운 게 재수가 없었지 뭐.


  이젠뷔텔 교도소에 유랑극단이 찾아왔다. 파란 칠을 한 버스를 타고 식당에다 조잡한 무대를 설치했다. 그저 박스와 궤짝을 가슴 높이로 올려 굽을 길을 묘사했다. 무대 위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고. 식당에 모인 수감자 관객들 사이에, 어라, 무슨 신호가 왔다갔다 하는 걸 감지하는 교수 양반. 이 교도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수상한 작업은 거의 대부분 총명한 사기꾼 하네스에 의하여 기획, 집행되는데, 이번에도 뭔가 음습한 공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검지와 약지를 써서 신호가 오고간다. 서로 경고하고, 약속을 상기시키고, 인내와 각오를 요구하는 듯한.

  눈치 없는 교도소의 카를 타우버 소장이 먼저 무대에 올라 한 마디 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은 당신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연극을 통해 당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와 대면해 보십시오.”

  소장의 연설을 들은 교수 양반은 씁쓸하다. 자기 책 <스트룸 운트 드랑>에 나오는 말이다. 염병할 놈. 연설하기 전에 나 한테 먼저 말해주었으면 오죽이나 좋아? 그럼에도 자기 책에서 따온 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이젠 교수이기 전에 한낱 수감자 신세라서.

  유랑극단의 프루겔 단장이 뒤를 이어 한 마디.

  “연극은 타인의 삶을 즐거운 방식으로 알게 만드는 것이며 세계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요. 오늘 공연은 <미로>라는 작품입니다. 여섯번째 동방여행에서 행방불명된 함부르크 출신의 작가 헨리 발터만의 작품입니다.”

  무대위에 쌓인 박스와 궤짝 사이의 길. 그것이 미로이다. “생긴 건 볼품없지만 저 안에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무대에는 나이든 여배우 두 명이 등장하고 이어 경찰 한 명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한다. 첫번째 실종자가 발생해 경찰이 찾아온 거다. 실종자는 정원사이며 네 아이의 아버지라나?

  미로. 모든 사람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간혹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는 곳. 그게 지금 무대 위에 있을까, 없을까? 경찰이 직접 미로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파헤쳐 보겠다고 선언하고 정말 박스와 궤짝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자마자 관객석에서 교수 양반 한 명을 뺀 모든 수감자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치며 외치는 것이, “잘 가, 안녕!”

  두 여배우가 대사 한다.

  봤지? 미로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언니, 우리 손에 아주 진귀한 물건(미로)이 들어왔어. 필요할 때나 원할 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 우리한테, 아니 남들한테도 근심을 끼치는 것을 없애 버리는 거야.

  듣고 있던 하네스가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모양이다.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더니 때 맞추어 휴식시간 15분. 하네스가 교수 양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며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버린다. 우리의 교수 양반도 못 이기는 척하고 슬쩍 따라 나간다. 하네스가 교수 양반더러 교도소 마당에 서 있는 버스에 타라고 한다. 맞다 파란색 페인트 칠한 유랑극단 버스. 그래서 어떻게 해? 당연히 탔지. 안 타면 소설이 안 되는 걸?

  이제부터 하네스가 대장이다. 그가 말한다. 전원 대가리를 의자 아래로 처박아.

  운전대는 거인 같은 덩치에 쾌활해 보이는 전직 축구 심판, 뭄페르트가 앉아 아무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교도소 밖으로 버스를 몰아간다. 안단테, 안단테 소스테누토. 그러나 정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오르막길은 당연하고 내리막길이 나와도 끝까지 악셀러레이터를 밟아 조지는 뭄페르트. 이들이 어디에 도착했느냐 하면 그뤼나우 시. 패랭이 꽃이 유명하고 마침 지금 패랭이꽃 축제가 한창인 곳에. 교도소 수감자 옷을 입은 채? 그럼. 옷 갈아입을 새가 어디 있었나? 시장을 비롯한 모든 시민은 이들의 복장이 유랑극단이 연극을 공연하기 위한 것으로 지레 짐작을 한다.


  근데 우리의 교수 양반은 형기의 절반을 채웠는데 꼭 나가야 했을까?

  좀 견뎌 낼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견뎌 내야 하는 법.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고, 가끔은 타인도 견뎌내야 할 터인데. 뒤 돌아보라. 결국 사는 일이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면서, 그렇게 견뎌내는 거 아니었나? 물론 쉽지 않지. 쉬우면 그게 사는 일이간디?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6-04-0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렌츠의 <독일어 시간> 저는 되게 좋았습니다. 헌데 렌츠의 단편집은 정말 끝내주더군요. 렌츠의 단편집이 번역이 안 돼 있어 그렇지 단편집만 읽고 싶네요..<루드밀라>보고 렌츠의 단편집을 찾았는데 없더라구요..^^;;

Falstaff 2026-04-09 16:46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독일어 시간> 읽은 게 10년이 훌쩍 넘어서 전혀 기억에 없는데 야무님 핑계로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흠....
 
드라운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쓴 유색 미국인? 이게 딱, 떠올랐다. <오스카…>가 21세기 100대 서적 안에 들었다고 읽었다가 많이는 아니고 조금 실망한 책. 작품의 무게와 별개로 소설을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젖은 요즘 미국 작가들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그게 실망이었지, 도미니카 현대사와 뉴욕으로 이민해온 이주민들의 각박한 삶은 분명히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딱 골라 읽었다.

  희망도서 신청한 책이 내 이름으로 세 권, 아내 이름으로 세 권, 아이 이름으로 세 권, 합이 아홉 권. 이게 도서관 예산 집행 관계로 한 방에 들어올 예정이란 걸 알고서 촉각을 바짝 세우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빠지직…. 늙은 바퀴벌레의 안테나에서 방출되는 노란 방사능 보이시지? 희망도서 한 방에 들어오면 그걸 보름 동안 다 읽고 반납해야 하는데, 아이쿠, 이번엔 기한 안에 설 연휴가 끼어 있다. 하여간 그런 부담 속에 고른 디아스의 소설집이 기특하게 가벼운 분량이기도 하네? 큼직한 글씨체로 280쪽. 서슴없이 골랐다.


  화자이자 주인공의 이름이 낯익다. 유니오르. <오스카…>에서 얘기했듯, 유니오르Junior가 누구냐 하면, 작가 주노 디아스의 이름 주노Junot를 살짝, 아주 조금 바꾼 것. 주노 디아스는 1968년생으로 1974년에 미국으로 이민해 뉴저지에서 살았으니 그때가 여섯 살이었다. 그러니 굳이 《드라운》의 유니오르를 작가 자신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작가가 브루클린 도미니카 이민들의 커뮤니티에서 듣고 본 동족 가운데 또래의 모습을 유니오르를 통해 보여주었다는 건 뭐 말을 안 해도 삼천리다.

  이 책은 놀랍게도, 하여간 나는 놀랐는데, 주노 디아스가 이렇게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가인 줄 몰랐기 때문이 첫번째요, 《드라운》이 이이의 데뷔작이라는 것이 두번째, <오스카…>처럼 지극한 말장난이 심하지 않다는 것이 세번째였다.

  책은 어린 시절, 소년 시대까지 도미니카 시골에서의 삶.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는 유니오르의 유년기때 돈 벌러 맨손, 맨발로 미국에 가고, 미국 가서 돈을 벌기는커녕 다른 도미니카 출신 여자하고 살림을 차렸고, 엄마는 이걸 알고 속을 썩여가며 아빠 미국 가는 차비 보태 준 외할아버지와 형, 이렇게 4인 가족의 헐벗은 생활을 그린다.

  드디어 엄마와 형 그리고 유니오르가 미국에 도착해 보낸 청소년기. 보잘것없는 마약 판매로 돈을 긁어모은 청소년 유니오르의 사랑과 허망한 탕진도 나오고, 청년이 되어 부잣집 전용 가구점의 운송 및 설치 기사로 일하는 모습도 나온다. 이 책을 보면 이런 청소년, 청년기를 거친 유니오르가 비록 시간이 나면 같은 호 몇 권의 교양잡지 <플레이보이>를 훔쳐 읽기도 하지만 나중에 소설가가 되리라는 건 꿈꾸기 힘들 거 같은데, 하여간 <오스카…>의 유니오르와 달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이렇게 소년, 청소년, 청년기의 유니오르와 가족 이야기가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나열되어 있는 소설집. 그래서 굳이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읽어도 괜찮고, 그냥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으로 읽어도 전혀 문제없는데, 진짜 문제는, 이 책이 데뷔작으로는 의외적일 정도의 찬사를 받았다 해도, 다른 이들은 모르겠고, 내가 읽기에는, 읽어주기에는, 아이고, 이걸 어쩌나, 도통 재미가 없더라는 것.

  하긴 읽으면서도 아홉 권의 희망도서가 언제 들어오나, 탐색하느라 너무 열심히 더듬이만 더듬더듬 더듬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재미없다고 이렇게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래, 지금 절판이다.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6-04-08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토해야겠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있어?
˝안테나에서 노란 방사능˝은 최승자의 제목 잊은 시에서 나오는 귀절이다. 그이의 싯귀에서 가져온 건데... 그이가 맞을 거다. 하여간 내 머릿속에서 나온 귀절은 아니라는 뜻이다.

망고 2026-04-08 11:54   좋아요 1 | URL
바퀴벌레의 안테나에서 방출되는 노란 방사능. 이 표현 너무 재밌고 기발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는데 시에서 따온 거였군요ㅋㅋㅋ내내 기억할만한 재밌는 표현입니다😆 나도 나중에 써먹어야지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4-08 14:49   좋아요 1 | URL
아휴, 저는 안테나의 노란 방사능 같은 건 도저히 떠올릴 깜냥이 되질 못합니다. ㅎㅎ
평소에 신땡숙 흉이나 안 보고 다녔으면 모른 척할 텐데 그냥 넘어가기가 영 캥겨서 걍 고백해버리고 말았습니다. ㅋㅋㅋㅋ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시인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나는 ‘장석남’을 1955년에 충청도 논산에서 난 ‘장석주’로 잘못 알고 시집을 골랐다. 그랬더니 1965년 인천 덕적도에서 나서, 서울예대와 인하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하고 지금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를 하고 있는 장석남이었던 거다. 거 참 이름은 한끗 차이건만. 근데 좀 웃기네. 지금 뒤져보니 내가 이이인 줄 알았던 장석주는 약관 스무살 때 등단했구먼. 그러면 시인 노릇을 51년 했네?

  장석남은 스물두 살에 신춘문예를 통과한 시 재주꾼으로, 서울예대 다닐 때부터 알아주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뭐 아나? 이번 시집이 처음 읽는 장석남일 정도인데. 해설을 쓴 평론가 신형철과 동문수학한 거 같다. 그가 해설 초입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다. 신형절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시의 내게는 장석남의 문장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발명품의 하나로 보였다.”

  장석남은 떡잎 시절부터 돋보이는 자질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 여러 분야에 있지? 탁월한 한 명. 2등이 아무리 기를 쓰고 쫓아가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는 인간. 그래서 좀 재수없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그림도, 음악도, 농사, 분재, 화훼, 정원, 요리, 기계조립, 설계, 조명, 수리, 하다못해 내가 해보니 설거지도 그렇더라. 문제는 한 학교, 한 과에서 한 명이 있는데, 그 인간들을 다 모아 놓으면 그 속에서 또 특별한 한 명이 등장한다는 것이지. 뭐 사는 게 다 그래.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시집에서 시 자체에 대한 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석남도 마찬가지다. 그것부터 읽어보자. 이 시인이 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불멸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전문. p.11)



  그러니까 장석남은 시인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시를 쓰겠다는 선언이다. 요즘엔 죽으면 거의 예외 없이 화장을 하지만 자신은 죽은 다음에 찬 땅에 몸을 뉘는 한이 있어도 꼭 묘비를 세우겠는데, 이때 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겠다는 거지. 자못 비장하다. 비장은 갈수록 도를 더한다. 사나운 눈보라조차 비문 읽느라 지쳐 비스듬해지게 만들겠다니. 사나운 눈보라? 세세년년 끊임없이 몰려올 매운 평론가, 독자의 시선으로 읽어도 괜찮을까? 뭐 괜찮으면 말고.

  요즘 사람들 한자어 안 배워서 헛갈릴 지 몰라 한 수 훈수를 두자면 다섯번째 행에 나오는 행장行狀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이라고 나온다. 흔히 행장行裝, “여행할 때 쓰는 물건과 차림”으로 잘못 읽을까봐 알려드린다. 죽어 없어지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라서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시에서 ‘행장’은 1행의 “비문”과 같은 의미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유적지 가서 비석 뒷면을 보면 작은 글자로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듯이, 자기도 자기 행장을 비문에 적어 두겠다는데 이이의 직업이 시인이니 당연히 시를 그렇게 쓰겠다는 거겠지. 그렇게 가장 단단한 돌에 새겨 내가 나를 기린단다. 거 참. 이 시집이 2017년에 냈으니 쉰두 살 때인데, 그렇게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을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지 별 수 있간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노래하는 삶의 기록이니, 너희는 이 시집을 읽음으로 나를 기념하라. 아멘.


  아, 근데, 지금 이이의 시 작품이 별 볼일 없다는 말을 하는 거 아니다. 그냥 포부가 커서 좀 웃겼다는 것일 뿐. 돌을 쪼아서 쓴 시는 죽어도 안 지워지는 거 알지? 아무쪼록 잘 쓰다 가기 바란다.

  평론가이자 동문수학한 것처럼 보이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아니, 내가) 생각하는 산뜻한 시가 있다. 읽어보자.



  소나기 오는 날



  날이 뜨겁던 이유를 서로 풀어놓으니

  스물 안팎 친구에게 그런 이유란 없다 하고

  노인은 비가 오려 그랬다 하네


  나비는 꽃을 부지런히 순회하던가?

  꽃은 나비를 야단쳐서 보내던가?


  비는 여러가지 얘기를 한꺼번에 쏟다가

  아무 귀담아들을 얘기는 없다고

  웃고는 가네


  뉘우침 후처럼

  맑고 서늘한 길가 바위

  놓여 있네   (전문. p.22)



  이 시의 결은 또 <불멸>하고 전혀 다르다. 뜨거운 스물의 청춘은 비가 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뜨거운 스물의 청춘을 보내 본 노인이 말한다. 결국 한 번 씩, 웃고 갈 소낙비가. 그러고 나서야 맑고 서늘한 시절이 놓여 있겠네. 그제서야 이제 정으로 쪼아 시 또는 비문을 쓸 길가의 바위가 놓여 있구나. 근데 살아보면 그게 그리 가까이 있지는 않을 걸?

  이 시가 시집의 22쪽 왼쪽에 실려 있고, 오른편 23쪽엔 이런 시가 올라와 있다.



  꽃집에서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빛이 되어서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숨어서 오가는 숨결들을 비추고 오가는 숨결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노래가 되어서 빛나는 입술로 들어가 가슴에 잠겨서 피어나는 꿈들을 적시다가 오가는 꿈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이여

  꽃집이여

  혀와 입술을 파는 집이여

  마른 혀와 마른 입술을 파는 집이여

  나의 육체를 사다오

  나의 육체를 팔아다오   (전문. p.23)



  1연과 2연은 참 괜찮은 대구. 대구? 대가리 큰 생선?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였다가 지금은 직할시가 된 도시? 그거 말고 댓구. ‘댓구’라고 쓰니까 잘못된 글자라고 글씨 밑에 붉은 줄이 우글쭈글하게 그어진다. 그래서 ‘대구對句’라고 쓰니 괜찮네.

  이런 대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할 것도 없이 저 당나라의 이백이 대빵이다. 근데 이 시의 대구도 괜찮은 정도를 살짝 넘어 삼삼하다. 3연은 여기에 붙인 시인의 수작. 수작? 수작질? 뭐 나쁜 뜻으로 굳이 읽겠다면 그것도 맞지만 나는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수작手作이라 한 거다. 수작? 시인이 시 쓰는 수작 말고 뭘 해야 좋겠어? 그러니 이 시의 ‘꽃집’은, 시인이 꽃집에 한 번 가서 숱한 꽃을 보고 지었을 수 있지만서도 꽃에 이어 빛과 노래, 즉 시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람 사는 판 가운데 그래도 좀 사람처럼 보이는 터를 연상하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핵심은 결국 노래. 빛과 어둠 속에서도 오가는 건 그저 숨결, 노래할 수 있는 숨결이다. 시들어, 시들어 은근한 비장?

  시인이 시에 관해 노래하는 걸 뭐라 할 수 없다. 시가 쉽게 써지는 게 아니라서. 독자인 나도 그런데, 하물며 시를 쓰는 시인한테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하고 나무 상자 속에 누워야 하는 것이, 도대체 시가 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에 재미있는 게 있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 p.44)


  그래, 시인이라고 다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저 앞에 소개한 시 <불멸>에서는 대차게 자기 묘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돌을 쪼아 시를 쓰겠다고 하더니, 여기 와서는 자기가 시를 쓰기는 했지만 그게 허위, 거짓이었다는, 늘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거짓 시를 쓰기도 했다는 고백이잖아. 뭐 그럴 수 있지. 차라리 이렇게 고백을 해버리는 게 시인이나 독자의 정신건강에 더 좋을 지도 모르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좌우간, 아이고, 이 ‘좌우간’ 써 놓고 보니까 또 정여사, 그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생각나네. 정여사 살아생전 좌우간, 좌우지간, 코미디언은 TV 나와서 웃기려고 간혹 ‘좌우당간’ 이라고 했던 말이 나오면 키득키득 웃고는 하셨지. 좌우의 사이 좌우간左右間,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뭐가 있느냐는 말씀이셨다. 뭐가 있다고 꼭 말씀을 드릴까? 그거, 놀이동산.

  덕분에 시집 잘 읽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의 시선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014년부터 2017년 봄까지 쓴 작품을 모은 소설집. 작년 초여름에도 이이의 소설집을 읽었다. 문학과지성 소설명작선 시리즈로 나온 《완전한 영혼》. 그때는 민주화투쟁 당시 공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유구한 전통, 고문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작품들이 눈을 끌었다. 이번엔 그 이후, 1986년에 소위 “가투”를 벌이다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 자살한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진호 사건, 2009년 용산참사에 이어 드디어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 모두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책을 쓸 당시에도 동아일보 기자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로 봐서 그럴 것 같지는 않아도, 우리나라 현대사의 장면 곳곳에 일반인들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자세한 정보에 근접할 수 있었을 터이다.


  김세진, 이진호의 분신과 용산참사를 동시에 이야기한 것이 표제 작품인 <새의 시선>이다. 새의 시선? 그렇다. 화자가 만일 새라면, 새가 되어 새의 눈으로 본 것을 이야기한다는 뜻. 굳이 검색해 찾아내 소개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비롯해서 고흐가 동료화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은 언덕 위에서 새가 바라보는 눈으로 풍경화를 그린다고 했단다. 정찬은 이 새의 이미지를 <새의 시선>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 숱하게 새 이야기를 한다. 하나 더 있는데 고래의 눈. 순하고 빛이 닫지 않는 심해 깊이 잠수하는 고래의 눈. 70년을 사는 향유고래가 새끼 한 마리 한테 10년 동안이나 젖을 먹인다는 이야기.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향유고래가 어떻게 젖을 먹이는 줄 아나? 젖꼭지에 입을 대고 육지 동물처럼 쪽쪽 빨아먹을까? 아니다. 고래의 젖은 모든 포유류의 젖 가운데 제일 진한 농도를 가지고 있어서 새끼가 유공乳空 아래 부분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어미가 젖을 바다로 쏘아 보낸다. 그럼 짙은 농도의 고래 젖이 바다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물론 쏘아 보낸 젖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분량이 새끼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특별한 모성 본능을 지닌 고래의 눈도 정찬의 관심 안에 있어서, 새와 더불어 고래의 이미지를 소설집에서 자주 발견한다. 내 경우엔, 또 새, 고래야? 볼멘 소리를 하고 싶었을 정도로. 아, 향유고래 젖 먹이는 것도 이 소설집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냥 농도가 짙다는 정도로.


  새. 새가 연상시키는 것은? 노래, 자유, 희망, 평화, 홍수의 진정(노아가 보낸 비둘기), 그리고 사후세계의 매개금禽. 사후세계까지? 그렇다. 저 몽골과 티베트 지역에서의 장례 관습인 조장을 생각해보라. 조장은 티베트에서 ‘천장’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이번에 처음 들었다. 소설도 읽으면 많이 배운다니까) 죽은 사람을 새가 먹을 수 있는 크기로 토막내는 사람을 ‘천장사 天葬士’라고 한다면, 천장사는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상당한 수준의 도를 닦은 큰 법사가 맡는단다. 이이의 칼질에 따라 망자가 새의 몸이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으니.

  고래의 길고 긴 여행은 티베트 사람들의 카일라스 순례에 비교할 수 있다. 산 하나에 오르지 않고 산 둘레를 따라 오체투지를 하며 고행하는 사람들. 52킬로미터. 보통 사람들이 그냥 걷는다면 꼬박 3일이 걸리고, 만일 오체투지를 하며 걸으면 한 달 남짓이 필요하다는 길. 그걸 한 바퀴 돌면 자기 죄의 하나가 지워진다고.

  이러니 새나 고래나 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이번에 정찬은 소설집 속 일곱 작품에서 모두, 한 작품도 빼지 않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책을 펼 때부터 덮을 때까지 독자는 한 순간도 어긋남 없이 우울해진다. 이 책을 돈 주고 안 사서 다행이지, 정찬의 글이 좋다고 덥석 사서 읽었더라면 책값이 겁나게 아까웠을 법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역시 정찬의 글이 좋네, 마네 가비야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시다시피 내가 우울한 거 싫어해서 그렇다. 그래도 글이 좋아 별점은 셋 반.


  첫 작품 <양의 냄새>의 화자는 종합병원의 심리학 박사. 병원의 협조 요청에 따라 카지노가 딸린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 무료(또는 무료 비슷하게) 장기 숙박하면서 카지노에 모인 도박꾼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다. 도박장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저번에도 말했듯이, 만일 인생을 도박의 반 만이라도 집중해서 산다면 실패하는 인간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살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자의 그리고 타의에 의하여 훈련받으며 성장하는데, 속여야 하는 상대방이 있는 포커 게임 같은 것 말고, 카지노나 주사위 같은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고, 표정 역시 마찬가지.

  화자가 카지노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사람을 발견한다. 흥분도, 기대도, 절망도 아니고 슬픈 표정을 한 20대 후반의 잘 생긴 사나이. 에니스. 그는 자신의 칩 열세 개를 몽땅 홀수에 배팅해 스물여섯 개가 되었다. 스물여섯 개에서 하나를 빼고 스물다섯 개를 또 홀수에 걸어 쉰 개가 되고, 또 홀수에 걸어 아흔여덟 개가 되더니, 손에 잡고 만지작거리던 칩 두 개를 뺀 아흔여섯 개의 칩을 몽땅 숫자 8에 걸더니 화르륵, 한 순간에 날려버린다.

  그의 표정이 인상깊어 함께 바로 향해 맥주를 병째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말한다.

  “칩이 작은 물고기처럼 따뜻하더군요. 전 이 물고기를 룰렛 테이블에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고 싶은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적시는 강물입니다. 어느 해 여름 그와 함께 지냈던,”

  나는 즉각 애니 프로가 쓴 기막힌 책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정찬은 어쩌자고 이미 알려진 작품 속 등장인물을 출연시켰을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까? 궁금해졌다. 리얼리스트가 포스트모던 작품을 쓰겠다고 나선 셈이라서. 궁금했겠지? 말 하면 뭐해.

  아니다. 정찬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기사 윌리엄>에서 윌리엄으로 나왔고, <브로크백 마운틴> 그리고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을 연기한 영화배우 히스 레저를 자기 작품 속으로 불러왔던 거였다. 영화를 할 때마다 작중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전히 몰두한 배우.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주인공의 이미지에서 도무지 벗어나기 힘들어하던 배우.

  조커 이야기가 나온 순간, <양의 냄새>는 결국 히스 레저의 죽음으로 끝장을 보겠구나,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화자 ‘나’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룰렛에서 히스 레저를 만난 날짜가 2008년 1월 20일 저녁이었으니 그의 실제 죽음을 겨우 이틀 남긴 날이었다.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연달아 죽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은 별로 읽고 싶지도 않고, 다른 이한테 읽어보라 권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기자 출신 글 좋은 작가가 썼으며, 취향이란 것이 진짜 다양한 거니까 마음이 동하시면 굳이 멀리할 이유가 없다.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 자기가 쓰는 소설 속 등장인물에 몰두하는 작가. 그리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화가 또는 사진가. 이런 사람들도 등장한다. 물론 비극적이다. 화가 가운데 클로드라는 이름도 있다. 누구냐 하면, 당신도 아는 제르베즈 아줌마의 첫째 아들. 자기가 그린 대작 앞에서 대롱대롱 혀를 빼물고 자살해버린 인간 말이지.

  그거 말고도 병에 걸려 죽고, 자동차 사고로 죽고, 42층 건물에서 스스로 자유낙하해서 죽고, 배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다가 한꺼번에 침몰해 죽고, 동네 철거에 항의하다 불에 타 죽고, 마약은 아니지만 약물 과다 복용으로 히스 레저도 죽고, 죽고, 죽고, 또 죽는다.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의 슬픔은 어쩌라고. 나는 죽는 것보다 이 남은 사람의 비극을 더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책 더 안 읽고 싶은데,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것 참.

  엊그제, 또래 가운데 제일 어린 조카딸이 차사고로 죽었다. 이름을 내가 지어주었는데. 마음 아프다. 결혼 2년 반. 아이는 없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