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최측의농간 시집선 3
심재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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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토끼띠 문예콘텐츠 창작학과 교수 심재휘의 시집. 2002년 문학세계사에서 나온 책을 2017년에 복간한 시집이다.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시집선 시리즈를 모두 일곱 권 찍었는데 처음 세 권은 이 시집처럼 이미 절판된 시집을 복간한 것으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판사가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 2020년에 찍은 책이다. 짐작하건대 좀 어려운 처지를 당한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심재휘는 21세기 들어 우리나라 시들이 전위를 향해 용맹돌진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 시쓰기를 고수하는 몇 안 되는 시인 가운데 대표적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한테 익숙한 서정시인이라는 의미겠지. 이런 의미에서 제일 앞 순서로 실린 시 전문을 읽어보자.



  남쪽 마을을 지나며



  서러움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참나무 숲을 지나자 가을 저녁은

  목화밭 너머의 봉분들과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마을은 낡은 그림자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전생 하나를 밟고

  신발이 더러워지기도 했습니다만

  무덤 같은 신발로 오래 걷다 보면

  낯선 곳에서도 겨울은 맞을 만합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탐욕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과처럼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조금 서러웠습니다  (전문. p.13)



  시를 척, 읽으면 탁, 하고 알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읽기에 국한해 말하자면 문제가 있다.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 조금 서러웠습니다” 제목이 남쪽 마을이라고 해서 참나무 숲이 있는 산골 지나 초행길 마을로 여길 수도 있고, 그걸 팍 확장해서 그냥 사람 사는 판이라 생각해도 괜찮을 듯하다. 근데 왜 오늘과 내가 이복형제 같았을까? 그게 왜 서러웠을까? 이복異腹이라니까 오늘을 낳은 엄마하고 내 엄마가 달라서? 그걸 앞에서 수식하는 절節이 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 탐욕스럽게 매달린 모과처럼” 나의 또다른 고민은 이 절 앞에 “단지”는 왜 썼을까, 하는 것인데 그건 그냥 넘어가자. 그러면 [오늘 =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 그리고 [나 = 탐욕스럽게 매달린 모과]라고 볼 수 있을까, 없을까? 만일 이 등식이 참이라면 바야흐로 시가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시절 또는 시간 혹은 63년 토끼띠가 지내온 현대사와 오늘의 간극이 존재해버릴 수도 있다는 거. 에이, 물론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만 열라 하고 있으니 가뜩이나 없는 머리 숱만 더 듬성듬성해지지.

  학교 졸업한지 몇 년인데 아직도 이렇게 시를 읽어야 하느냐고 타박하지 마시라. 이 화두를 깨지 못하면 시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내 경우겠지만 시 한 수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병맛이라고? 그럼 할 수 없고.


  독자들이 이 시집에서 제일 인용을 많이 하는 시가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인 것 같은데 전문을 인용하려면 좀 길다. 모두 7연으로 되어 있는 시. 이 가운데 처음 세 연만 가져와보자.



  후회는 한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부분. p.18)



  시를 읽는 건 독자 마음인데, 그렇다고 다 마음대로 느끼라는 건 아니지 싶다. 1연에서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이 어느 동안일까, 나는 모르겠다. 이 시에서 여관방의 이미지는? 피곤한 나그네의 심신을 쉴 수 있는 여관방이라기보다 뭔가 사연이 있어 머물 수밖에 없는 누추하고 슬픈 장소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니 이 방에 머물며 많은 편지를 썼지만 편지들이 수신인한테 제대로 가는 대신 다시 시인이 머문 여관방으로 회송된 것. 이 시도 읽으면서 독자가 감지할 수 있는 건 이미지, 여관과 편지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일 뿐이다. 서정시의 외피를 입은 반half구상시라고나 할까? 물론 시를 읽으면서 메시지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지만 포착할 수 있어도 그게 어디냐. 다만 시의 무대인 여관이 아주 오래 전에 신경림이든가 정호승이 즐겨 쓰던 시어 “여관잠”하고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던 건 왜 그랬을까?

  독자마다 시를 읽으며 느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시인이나 독자나 다 개별적이기 때문이겠지. 그게 어떻게 교집합을 이루면 시인하고 궁합이 맞는 거고, 아니면 마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읽으며 꼭 인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스는 잠그고 나왔을까 또

  난로는 켜 둔 것이 아닐까 병이

  더 깊어지면 말입니다

  발로 비벼 끈 담뱃불이나 이별 같은 것들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데요 그게 말입니다

  달아오른 난로나 끓어 넘친 가스레인지

  한동안 외로움에 지지직거리던 TV의 마음에도

  요새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제풀에 꺼지더라

  이 말입니다 새카맣게 타버리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꼭 죽지 않을 만큼만 죽고 싶다가도

  금방 멀쩡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다시 불이 붙더란 말입니다

  세상 도처에 깔린 안전장치들

  너무 안심이란 말입니다  (전문. p.69)



  이 양반이 훗날 낼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에서 그러듯이 이 시집에서도 구질구질하게 첫사랑 이야기를 제법 한다. 왜 구질구질하냐고? 첫사랑. 그런 거 오래 기억하지 말라. 우연이라도 만나지 말고, 꿈에서도 마주치지 않는 게 신상에 편하다. 잠꼬대라도 했다가 옆에서 침흘리고 자던 마누라 들으면 곡소리난다. 정말로 다시 만나 사고치면 그거 보통 일 아니다. 농담이라도 입에 올리지도 말고 살아라. 근데 심재휘는 그러지 못하겠던 모양이다.



  첫사랑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춰 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별도 그대로였다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내 스물두 살이

  여태껏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다  (전문. p.100~101)



  스물두 살의 비 내리는 장충동 공원 바로 옆 태극당의 첫사랑 그녀. 이 첫사랑이 정말 첫사랑 그녀를 향한 것인가? 이렇게 묻지 말자. 그냥 스물두 살의 첫사랑이라도 충분히 좋으니까. 괜히 시인의 22세 시절, 재수없게 혁명과 투쟁의 구호와 분신 시위의 시대에 살던 책무 같은 걸로 포장하지 않아도 얼마나 어여쁘냐, 그렇지?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좀 문제가 있다. 심재휘는 첫사랑도 참 여러 번 한다.

  <자작나무 흰 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하여 서울로 버스타고 올라갈 때 “그때 고향에 두고 온 것들 이를테면 / 눈 맞으며 손 흔들어주던 사랑도 이제는 / 쌓이고 녹고 하여 또 내일처럼 낡아갔는데”라고 노래하고, <나무 계단에 관한 오래전 이야기>에서도 “내가 손을 잡았던 사진관집 딸이 다만 어디쯤에서 홀로 늙어가듯”이라 노래했는데, 그것들은 사랑 아니었나?

  하긴, 시인들한테는 다정도 병이니까.

  심재휘를 읽으며 다시 느낀다. 시 읽는 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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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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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작품. 김희선은 두 권의 소설집 2019년 《골든 에이지》와 2021년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사이에 이 책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를 냈다. 김희선의 단행본은 챙겨 읽는 편이다. 2019년부터 2021년, 이 시기에 김희선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금 이르게 찾아온 갱년기? COVID-19 감염? 아쉬울 만큼 이 3년간의 결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긴 일개 독자가 아쉬워해봤자 중요하지 않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어쩌면 역작 <무한의 책>을 낸 이후 그에 필적하는 다음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컸을 수도 있고, 장편을 썼으니 좀 쉬는 의미에서 가벼운 것들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지. 뭐 내가 아나, 그런가 보다 할 따름이지.


  작품은 모종의 죽음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책임자의 사무실에서 시작한다. 책상, 의자, 집기, 캐비닛 등 모든 비품과 사무실의 색깔까지 전부 회색인 곳. 이곳에 비가 내리고 회색 레인코트를 입은 책임자(처럼 보이는 인물)이 회색의자에 앉아 시집 한 권을 꺼낸다. 이 죽음에 관한 사업을 하는 책임자(인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사실 시를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해서 사무실에 한 짝에 5백만원 하는 앤올롭슨사의 하이엔드 스피커를 갖춰 놓았다.

  그가 신봉하는 말: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혁명이 된다.”

  또 이런 표현들.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게 하라.”

  이런 문장이 첫 세 페이지 안에 몰려 있다. 독자가 읽기에, 세상에, 클리셰 만땅이네.


  큰 호수, 아마도 소양호나 충주호 같은 곳을 연상하면 비슷한 가상의 월상호. 월상시도 좋고 월상읍도 좋은데, 이곳에서 월상호 전망대까지 가는 길에 다섯 곳의 마을이 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두 곳은 출생 없이 사망이나 전출만 발생해 마을이 소멸됐고 이제 세 곳이 남았는데 이 가운데 여덟 호, 열 명의 주민만 남은 팔곡마을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사건이 벌어진다. 이걸 제일 먼저 눈치 챈 사람은 연락선을 타고 우편물 배달을 하는 우체부 김씨.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평소엔 우편물을 선착장에 자신이 설치한 우편함에 넣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지만 이날은 직접 팔곡마을에서 내려 마을 이장 피 노인 집으로 향한다. 우편함에 주민들이 찾아간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문이 잠겨 있지 않아 곧바로 마당에 들어갔지만 인기척이 없다. 그래서, 워낙 노인들만 사는 곳이라 집안에 험한 일이 있을지도 몰라 염치불고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봤다. 그랬더니 피 노인이 잠들어 있는 듯 이부자리가 두둑하게 솟아 있어, 이크 정말 큰일인지 모르겠군, 하면서 이불을 들춰보니까 옥수숫대를 마치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모양을 만들어 놓은 거였다. 이불 속에 왜 옥수숫대가 들어 있다고 했을까? 안 해도 좋을 것 같은 묘사를 앞으로도 자주 읽을 수 있다. 이제 시작일 뿐.

  기겁을 해서 집 밖으로 나온 우체부는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에도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거 수상한데 싶은 우체부 김씨. 그는 월상읍에 돌아와 파출소 소장 박경위에게 신고하고, 일단 민원을 접수했으니, 평소에 등산을 좋아하는 박경위는 자기 생각에 무슨 일이야 생겼겠느냐만 그냥 지나쳐버리면 또 인터넷에 의견 달고 지지고 볶을 지도 몰라 시간이 남으면 뒷산에라도 올라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직접 팔곡마을로 향한다. 퉁퉁한 몸집에 손목에는 의자 모양과 영어로 “New Generation”이라는 문신을 한 연락선 선장한테 특별히 부탁을 해서.

  팔곡마을로 가는 길에 선장은 우체부 김씨와 박경위에게 가는 동안 재미는 없지만 비디오라도 보라고 하나 틀어주는데 제목이 “죽음을 이기는 법”에다가 월다잉 협회에서 그냥 틀어달라 부탁한 거란다. 비디오에는 쉬운 얘기로 자살을 선택한 중환자나 노인들이 자유 의사로 죽을 수 있는 암스테르담이 나오고, 이어서 우리나라 종로3가 탑골공원쯤 되는 노인 밀집 지역을 대비시킨다. 이걸 보면서 독자들도 쉽게 알 정도로 박경위는 일종의 최면에 걸려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우체부 김씨가 막아서고, 드디어 이들은 팔곡마을에 발을 딛는데, 때를 맞춰 먹구름이 밀려와 시간이 아직 이르건만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범죄와 국가 수준의 음모론으로 확장한다. 구성은 다분히 김희선 답지만 문제는 문장이다. 어째 읽는데 문장이 입 속에서 버벅거린다. 여태 일곱 권의 김희선을 읽었고 이번이 여덟 번째. 이 책의 문장이 제일 아쉽다. 2019년에 잡지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서 책으로 엮은 건데도. “무엇보다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란다는 작가의 바램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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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양장)
아서 밀러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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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면 일단 읽을 욕심이 생기는 (극)작가 리스트 가운데 20세기 중엽 미국 사람 세 명이 있다. 유진 오닐, 아서 밀러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 이 가운데 윌리엄스는 미국 남부의 크지 않은 도시를 무대로 남부 전통의 몰락이나 가족 간의 갈등을 습하고 더운 남부 날씨를 닮은 우울한 비극을 그린 반면, 밀러는 뉴욕을 중심으로 무너져가는 가족 또는 커뮤니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섬뜩하게 그려냈다.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은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밀러의 희곡집은 이제 겨우 네 권을 읽었을 뿐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거의 모든 이들이 밀러의 대표작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꼽는 반면, 나는 <모두가 나의 아이들>을 더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이제 1번 밀러 작품을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감안해야 할 점.

  극의 주인공 에디 카본은 아니더라도, 에디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이탈리아에서도 일찍이 알 카포네와 프랭키 예일을 배출한 시칠리아 출신이다. 에디 역시 이탈리아 문화권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 주로 이탈리아 이민으로 구성된 뉴욕 항구 하역 노동일에 종사하면서 이들과 같은 의식을 공유한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아내와 아이들을 외부로부터 지켜야 하며, 무엇보다 명예를 우선한다. 이들에게는 미국 법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습법이 존재하니, 바로 남자는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추한 행위는 고자질. 겨우 열네 살에 불과한 꼬마 남자 아이가 이탈리아에서 온 불법이민자를 이민국에 고발한 일이 있었을 때, 이곳, 뉴욕항을 면한 동네의 남자들은 아이를 일단 때려눕힌 다음 발목을 잡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계단 한 단을 내려올 때마다 열네 살 꼬마의 뒤통수가 시멘트 계단에 텅, 텅 부딪힌 건 당연하다. 이후 꼬마는 동네에서 사라져 다시는 주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게 극의 초입에 에디를 포함한 동네 남자들이 맥주 한잔하면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한 소절.

  남자는 또한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기상 상황이나 불경기 때문에 뉴욕 항에 접안하는 화물선이 없다면 절반에 불과한 일당을 받더라도 다른 항구에 가서 노동을 하고, 알량한 돈으로 만든 음식을 자기는 굶더라도 가족들 입에 들여보내야 한다. 여자는 대신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남자는 먹이를 구해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을 어떤 위협/위험에서도 보호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다가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의 조건을 지키려면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야수 비슷한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작품을 읽었다면 어떤 방식인지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것. 만일 누군가 이런 정당한 비합법적인 불문율을 깨뜨리려 하거나 깨뜨려버렸다면, 이에 대한 복수 역시 비합법적으로 정당할 수밖에. 물론 이후에 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문제이고. 만일 복수를 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비겁한 일이다. 이렇게 벤데타의 단검을 이 사람들은 품고 살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 가족 비어트리스와 에디 카본. 1956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아마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뉴욕이 무대일 것 같다. 카본 부부한테는 아쉽게도 아이가 없다. 대신 비어트리스의 죽은 언니가 낳은 어여쁜 딸 캐서린을 자기 아이처럼 살뜰하게 키워 이제 열일곱 살의 청춘으로 만들어 놓았다. 키우는 내내, 적어도 극 안에서는 자기 아이보다 더 정성을 들여 애지중지한 것처럼 보인다.

  막이 올라가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에디나 비어트리스, 또는 캐서린이 아니라 역시 이탈리아 이민 출신인 50대 변호사 엘피에리 씨. 엘피에리는 이 할렘가 구성원들의 출신, 성향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어서 에디 카본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말한다. 어디서 본 것 같지? 그렇다. 그리스 고전극의 코러스가 하는 일을 그대로 맡아 극의 진행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있다. 특정 상황에서 등장인물이 왜 이런 식으로 행위할 수밖에 없는지, 이후에 사건이 어떻게 진행했는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관객은 이를 통해 극의 스토리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건 아서 밀러만 사용한 기법이 아니라 그리스 고전극 이후에도 그리 드물지 않게 채용한 수법이라 특별할 건 없다.

  코러스 역의 엘피에리 씨는 종종 극 속에 변호사라는 특정인의 신분으로 직접 등장해 주인공 에디가 스토리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연하겠지만 엘피에리 씨는 코러스가 진화한 등장인물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패전국 이탈리아에서는 일자리가 없다. 산업기반이 없는 시칠리아는 더 심각하다. 비어트리스의 사촌 마르코는 이 와중에 세 아이 가운데 하나가 결핵에 걸려 고통받고 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 치료도, 약도 먹이지 못하는 지경이다. 도움의 손길도 찾을 수 없다. <표범>을 쓴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공작 같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 역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장들 한테는 아이들 목구멍이 범의 아가리 같이 무서운 형국이라서. 그리하여 마르코는 금발의 잘생긴 동생 로돌포와 함께 뉴욕에 사는 사촌누이 비어트리스를 찾아 불법 이민, 불법 취업하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이것이 또다른 시련의 시작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마르코는 가난하지만 거구의 힘센 장사. 로돌포는 아담한 체구에 잘생기고 하이 테너로 노래도 수준급에, 여자 의상을 재단하는 솜씨마저 뛰어나다. 그러나 로돌포도 뉴욕에 가면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해야 한다. 주급 30~40 달러면 그게 얼마냐. 뉴욕에선 푼돈일지 모르지만 시칠리아에 보내면 한 식구 잘 먹고, 병든 아이 약도 사 먹여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충분한 돈인 것을. 이렇게 마르코와 로돌포는 뉴욕에 도착해 비어트리스와 에디의 작은 집에 몇 달 기한으로 머물기로 한다. 빈 손으로 와 뉴욕의 불법이민 브로커에게 빚을 갚으려면 비싼 월세를 주고 방을 얻기 곤란해서 폐를 끼치는 일인 줄 알지만 이 또한 시칠리아 식 사고방식으로는 친척으로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에디 역시 기꺼이 자기 집에 공간을 마련해주기로 동의한다. 부부 침실의 침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침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 집주인인 자신이 결코 (자기 침대는 손님에게 주고) 맨바닥에 자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땅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속으로는 그렇겠다.


  에디의 또다른 고민.

  정말 애지중지, 아예 눈꺼풀 안에 넣고 키우던 캐서린이 벌써 열일곱 살. 몇 달 지나면 열여덟 살의 성인이 되는 데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는 더 시키지 못했지만 밖으로 내돌리기 싫어 속기학원 또는 직업학교에 보내는데, 여기서도 특출난 재주를 보여 타자와 속기의 최우등 실력을 보였다. 그래 속기학원 원장이 때마침 직원을 뽑아야 하는 배관회사에 주급 50달러 자리를 마련해준다. 실력이 이미 졸업생을 능가하는지라 아직 졸업이 1년 남았지만 1년 후에 학교에서 졸업시험만 보면 학력을 인정해주겠다는 특별 배려 수준이다.

  그러나 에디는 마땅하지 않다. 에디 눈에는 아직도 아이 같다. 저 여린 것이. 게다가 배관회사가 있는 곳이 브루클린의 험한 부두노동자가 득시글거리는 항구 근처, 그것도 모자라 해군기지 바로 앞에 있으니 가히 늑대굴 바로 코앞이다.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캐서린은 그것도 모르고 벌써 짧은 치마를 입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다닌다.


  드디어 시칠리아에서 마르코와 로돌포가 도착했는데, 마르코는 그렇다고 치고, 하나도 유감이 없지만, 젊고 잘생긴 로돌포는 노래도 잘해, 금발이기도 하고 게다가 캐서린의 옷도 기막히게 수선해준다. 이것만 가지고도 열불이 나건만 둘이 데이트를 하는 눈치. 2막으로 가면 아이쿠, 집에 들어오니까 비어트리스가 시장에 간 사이 옷차림이 어수선한 캐서린의 방에서 로돌포가 나오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아직 캐서린을 품에서 풀어줄 마음이 없는 에디 카본. 그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방향으로 이들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개나 있나. 오히려 이들과 이 골목 사람들이 에디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가게 되는데, 그리스 고전 비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차마 내가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이제부터 내게 제일 중요한 아서 밀러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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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2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마 여기서 말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다리...>이 그만큼 좋으셨군요! 암
튼 엄청난 비극이긴 합니다....

Falstaff 2026-02-12 15:28   좋아요 1 | URL
이 극의 결말은 특히 얘기해주면 김 샐 거 같은 걸요! 위고가 썼다고 해도 믿고 싶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ㅎㅎㅎ

yamoo 2026-02-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나머지 작가의 작품들은 한 권씩 읽어 봤으요~~
읽고 드는 생각이...희곡은 정말 나와 안 맞는다는 거였습니다. 재미도 없고, 인상적이지도 않고..
주제도 좀 구태의연하고...뭐, 그렇습니다..희곡 중에서 그래도 가장 재밌었던건 이강백의 <파수꾼> 정도.. 걍 제가 희곡을 정말 안 좋아하는 듯합니다..ㅎㅎ
근데 별 5개!! 궁금증이 일긴 하지만 희곡이라서 패쑤~~

Falstaff 2026-02-12 15:29   좋아요 0 | URL
다행입니다. <파수꾼> 읽어봤습니다.
안 좋아하시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어떻게 다 좋아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ㅎㅎ
 
요오꼬.아내와의 칩거 창비세계문학 22
후루이 요시끼찌 지음, 정병호 옮김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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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걸로 보아 후루이 요시키치는 도쿄 토박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1937년에 태어나 도쿄 대학과 대학원에서 독문학 석사를 취득하고 릿교 대학 조교수를 지냈다. 대학원에서는 카프카를 연구하는 한편 로베르트 무질과 헤르만 블로흐의 작품 번역에 관여했다. 자신이 번역을 했다는 게 아니라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일어판 위키피디아에는 후루이 요시키치가 1960년대 말에 무질의 <사랑의 완성,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을, 블로흐의 <현혹>을 번역했다고 나온다. 어느 게 맞는 지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떤가. 오늘 소개하는 <요오꼬>가 다분히 무질과 블로흐의 작풍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정병호 고려대 일문과 교수의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후루이는 1970년에 <둥글게 둘러선 여자들>이라는 작품을 써서 세간의 주목을 받아 곧바로 그해 3월에 릿교 대학 조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단다.

  같은 해 64회 아쿠타가와 상에 이이의 두 작품이 결선에 올랐으니 <요오꼬>와 <아내와의 칩거>였다. 결선에 두 작품을 올린 것도 대단한데, 더 놀라운 건 당선작이 <요오꼬>, 그리고 불과 1표 차이로 <아내와의 칩거>가 준우승했다는 거. 작가는 1971년에 이 두 작품을 묶어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2013년에 창비가 이 책을 정병호 교수에 의뢰해 우리나라 초역, 자사의 세계문학전집 22번으로 출판했고 이후 7년이 더 흐른 2020년 82세의 후루이 요시키치가, 숟가락 놨다. 이로부터 5년이 더 지나 드디어 쇤네가 읽었습지비.

  일본의 문학평론가들은 1960년대 학생운동과 기타 등등 전투적 주장들이 시새푸새해진 반동으로 1970년대 초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의 시대를 ‘내향의 시대’라고 하는 모양인데, 다 그렇듯이 상당기간 다분히 정치적 구호에 복무하던 문학이 이제 인간 개인의 내면과 실존 같은 것을 ‘다시’ 들여다본 시기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듯하다. 말 잘했네. “다 그렇듯이.” 특히 예술이란 게 다 그렇지 뭐. 이쪽으로 기울었던 반동으로 저쪽으로 돌아서고, 또다시 이쪽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 그게 사조 아냐? 당시 이 사조 ‘내향의 시대’의 선두에 후루이 요시키치가 있었고, 그의 대표작이 <요오꼬>와 <아내와의 칩거> 정도라고 이해하면 딱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에 당선, 차선한 작품이라 그런지, 다 읽을 때까지 이런 정보는 몰랐는데, 읽으면서 거 참 대단하군, 쥐뿔도 모르면서 감탄했다는 것은 숨길 필요가 없겠지. 무지하게 헛갈리는 묘사. 섬뜩한 감정, 심리의 포착 같은 것들. 이 가운데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요오꼬>만 소개한다.


  첫 장면. 도쿄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지만 여름 방학 이후로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히키코모리 S가 웬일인지 196X년 10월 중순에 등산을 가 오후 한 시경 K봉우리 정상에 섰다. 그런데 때를 맞춰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온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로 하고 O계곡으로 하산, N계곡과 합류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 지역이 험해 조난 사고도 잦은 곳이다. 사흘간의 단독산행을 마치는 마지막 하산길. 아직 여물지 않은 젊은 남자인 S 앞에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여자 한 명이 보인다. 이 여자가 요오꼬. 독자는 이 장면에서 요오꼬가 외롭게 사는 산골처녀로 여기기 십상이다. 196X년에 젊디젊은 여성 혼자 산행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고 더구나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물끄러미 조그만 돌탑을 바라보느라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이 워낙 자연스럽게 읽혀 여지없이 산골 아가씨로 여길 수밖에. 하여간 S가 보기에 요오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듯 비치고 그러면서도 사람의 얼굴만 가지는 으스스한 기운 때문에” “선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표정까지 깨끗이 씻겨 없어진 듯 얼굴이 허옇게 떠 있는 것이 “울다 지쳐 마당 구석에서 웅크리고 돌멩이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이의” 것과 비슷한 느낌.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저것이 사람인가, 구미호인가 싶었을 텐데, 일본 사람이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몰랐을 것 같다. 그러니 으스스했고, 걷다가 우뚝 서서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이때 외모 묘사가 나온다. 소녀 같은 몸집, 배낭을 등에 맨 채 살구색 아노락 점퍼를 입은 돌보아야 할 환자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 S는 요오꼬가 자기보다 서너살 더 많을 것처럼 보인다. S는 요오꼬를 부축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요오꼬는 아마도 계곡이 합쳐지는 합수골에서 탈진해 무려 세 시간 넘게 그런 상태로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S가 앞에 서고 요오꼬가 그를 따르며 내려오는데 요오꼬가 말하기를 자기가 꼼짝 못하고 앉았던 그곳의 정황이:

  “예를 들면 얕은 잠 속에서 누군가가 현관문을 반복하여 두들기고 있는 것을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 뭐라 표현할까, 그것을 한덩어리의 생각으로 파악하기가 아무래도 되지 않아 속이 타고 답답해서 잠자리에서 몸을 비비 꼬는 듯한, 그러다 멍해져버리는 듯한, 그런 식…이라고” (p.15)


  드디어 산 기슭의 작은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신사로 가는 입구에 작은 현수교가 놓여 있다. 그런데 요오꼬는 이 작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고. 자꾸 아래쪽에서 뭔가가 발목을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S는 화가 났다. 여태 요오꼬 때문에 하산 시간이 늦어져 이제 도쿄로 가는 기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건만 작은 현수교를 건널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으니.

  “이런 다리를 혼자 건널 수 없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산에 올 수 없어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그건 고사하고 자신감을 잃어 길거리도 만족스럽게 걸을 수 없어질 거예요.”

  이 대목에서 독자는 얼른 이들의 대화 세 도막을 메모한다. 작은 일이 아닐 듯 싶다. 복선 아닐까?

  가까스로 둘은 기차를 타는데 성공했고, 기차에 타자마자 요오꼬는 잠에 빠져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이때까지 여자의 이름이 요오꼬인지, 남자가 S인지 서로 모른 채.


  석달 후. 다음 해 1월. 장소는 도쿄의 전차역 플랫폼.

  전차를 타고 가던 요오꼬의 눈에 건너편 플랫폼에 서서 반대방향 전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S가 보인다. 득달같이 전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창문이 뚫린 2층 통행교를 건너 S를 향해 뛰어가는 요오꼬. 마침 도착한 전차에 탑승하려는 S 앞에 도착해 그의 오른팔 팔꿈치를 가볍게 쥐었다. 하얀 코트를 입은 소녀가 S에게 말한다. 언제였죠? 제가 대단히 신세를 졌습니다.

  일본 사람한테 신세를 졌다는 건 우리 사정하고 좀 다르다. 얘네들은 남에게 신세 또는 폐를 끼치는 걸 지극한 실례라고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갚으려 한다. 천 년에 이르는 무신정권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여간 S는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넓게 퍼져버릴 듯한 불안정한 느낌이 드는 여자를 만난 일이, 마치 빗속에서 고양이를 안았다가 그냥 두고 온 듯한 기분과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산행 이후에 계곡에서 있던 일이 자주 생각나고, 이 일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S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둘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앉는다. S는 앞에 앉은 여자가 그때 거기서 자살할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잠깐 짐작해본다. 당시 창백하고 칙칙한 정기를 발산해 희미한 불쾌감을 주던 여자. S는 자살자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노인도, 미성년자에도 속하지 않는 창백함에 휩싸인 인물일 것이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요오꼬가 말한다. 당시에 고소공포증이 있었다가 현수교를 건넌 이후에 없어졌다고. K 봉우리 정상까지 오른 여자가 고소공포증이라니. 요오꼬는 높은 장소가 아니라 계곡 합수골까지 내려와서야 고소공포증을 느꼈단다. 이제 내가 메모한 것 가운데 남은 건 과연 요오꼬가 길거리를 만족스럽게 걸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잠깐 만나 대화를 하고 헤어지는 순간, 요오꼬가 묻는다.

  다음 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날까요?

  이렇게 둘은 다시 만나고, 또다시 만나 연인이 된다. 히키코모리 전력이 있는 S와 틀림없이 신경정신과 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요오꼬. 이들의 사랑과 질병은 어떻게 발전하고 전개될지,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라. 나는 흥미롭고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호 불호가 갈릴 작품일 듯해서 당신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머뭇거려진다. <아내와의 칩거>도 소품인 동시에 명품이다. 후루이 요시키치의 다른 작품은 왜 번역해 나오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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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예전에 재미나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아내와의 칩거>는 요즘 폴스타프 님 생활 아니십니까? 그래서 더 공감을...?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2-11 15:3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이구 미워라. 다 들여다 보고 계시는구먼요! ㅋㅋㅋ
 
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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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오츠의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에 출간했으니 이이가 여든다섯 살이었다. 열두 편의 단편소설 안에 초단편도 몇 편 있다. 평생 장편소설만 60편, 중편 정도의 노벨라가 11편, 무수한 단편소설을 쓴 소설공장 공장장 오츠. 《제로섬》을 읽으면 오츠가 은근히, 평생 퓰리처 상을 받고 싶어했던 것 같다. 즉, 퓰리처 상 후보로만 죽자사자 올라가고 거기서 미역국도 마셔보고, 바나나 껍질도 밟아보고, 김치국물 벌컥벌컥 자셔보기도 했지만 딱 한 가지, 상을 진짜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평생 하루에 몇 시간씩 소설을 쓰고, 그게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솔찮게 돈도 벌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한 시절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면 만족을 좀 해도 좋을 것을. 하기는 사람 욕심에 끝이 어디 있나. 많은 작품을 썼으니 시도하지 않은 장르가 없겠지만 나는 이 가운데 <사토장이의 딸>을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거 같다. “~거 같다”라고 쓴 건, <사토장이…> 읽은 지 오래됐고, 함부로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오츠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시지>도 인상에 남아 있다.

  내가 읽은 오츠의 작품 속 남자들은 가끔 여성혐오자도 있지만 또 가끔은 진실하고 순진하고 용감한 경우도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만큼 들어 인생의 황혼에 선 오츠는 그동안의 유행을 좇아 거의 마지막 책인 것처럼 보이는 《제로섬》에서 남자들, 출연하는 모든 남자들이 백인인데 그들 모두 노골적인 괴물이거나, 똥덩어리거나, 실수투성이거나, 패배자이거나, 비열한이다. 작년에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다는 거다. 이렇게 세월이 변했다고. 안 그러면 책이 덜 팔리는 모양이라고.

  오츠는 기본적으로 고딕 그로테스크 작가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솔직한 소감은, 너무 나이가 들어 쓴 글이라는 것. 특히 고딕을 쓰려면 뇌가 팽팽 돌아야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다. 사실 벌써 은퇴를 하고 명예롭게 뒷방에 앉아야 했던 건 아닐까. 오츠를 위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람 사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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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오츠가 쓴 고딕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고요;;

Falstaff 2026-02-10 15:23   좋아요 0 | URL
그쥬, 그쥬? ㅎㅎㅎ

yamoo 2026-02-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뽈님의 근래들어 최고로 짧은 독후감이네욤~~ㅎㅎ

Falstaff 2026-02-10 15:23   좋아요 0 | URL
읏, 그렇군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