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호텔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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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주아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나 잘 자란 작가 비키 바움. 오케스트라의 하피스트로 활약하며 독일로 이주해 음악활동을 계속 했단다. susanbkason.com에 의하면, 아이들을 재운 다음에야 조금씩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책 <그랜드 호텔>을 써서 세계적인 스타덤에 할리우드에 진출을 했으며, 거기서 정말로 미합중국을 사랑하게 되어 가족 전부를 불러와,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서 가족을 구하게 됐다고 한다. <그랜드 호텔>의 원래 제목은 "Menschen im Hotel" 즉 “호텔 사람들” 정도이겠지만 영어권에서도 제목을 <그랜드 호텔>로 했다. 이 정도면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적당하겠다. 여러 권의 책을 냈으나 한국어 번역본은 <그랜드 호텔> 하나만 눈에 보인다. 책 앞날개 보면, 하필이면 늙고 좀 추레하게 나온 사진을 실었다. 이런. 젊어서 찍은 사진 소개한다. 출처는 susanbkason.com 이다.

 

 

 책을 한 마디로 하면, 재미있다. 첫 페이지를 열면, ‘젠프’라는 이름의 노련하고 정중한 도어맨이 전화실電話室에서 나온다. 전화실이 무엇인가 하면, 1920년대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 안에 마치 공중전화 부스 비슷하게 몇 개를 두어, 숙박인을 찾는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받을 숙박인이 객실이 아니라 로비 등에 있을 경우,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작은 공간이다.
 그럼 왜 젠프가 전화실에서 나왔느냐.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인 젠프는 아내의 출산이란 사적인 일에 전문직으로의 명성을 흐리지 않기 위해 능숙하고 친절한 손님 접대에 응한다. 호텔엔 젠프처럼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호텔리어들이 몇 명 있다. 리셉션 총책은 슐레지엔의 로나 백작 가문 태생으로 장교로 참전하고 전역한 전형적인 귀족이지만 다른 귀족들을 접대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서먹함, 서걱거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거대 호텔 체인의 사장 아들 게오르기 역시 훗날 자신이 거대 호텔체인을 경영하기 위하여 경험상 일을 하고 있음에도 호텔의 하급 일을 하는 젠프의 조수를 하면서 충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호텔 전속 수사관 필츠하임은 중요한 사건일 경우 새벽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호텔의 주인공은 이들 (좋은 말로)호텔리어, (그냥 말하자면)종업원들이 아니라 거의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숙박인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에서는 갖가지 비즈니스 계약을 위해 점잖고, 매너 넘치고, 때론 위협적이며 비열하기도 하며 가끔가다간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는 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현충일만 빼고) 무도회가 벌어져 청춘들의 교통사고를 장려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르주아 숙박인의 호주머니를 노린 사기꾼과 고급도둑들이 눈알을 함부로 굴리고 있기도 하다. 가끔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부자들이 최고급이란 타이틀 하나만 염두에 두고 호텔방이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비싼 돈을 주고 묵기도 한다. 이들이  (당시 법률에 의하여)자신의 주소와 직업을 숙박계에 적는 순간 동등한 ‘숙박인’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오터른슐라크 박사. 의사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플랑드르 전투 중 얼굴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얼굴 반쪽은 잘 생긴 모습 그대로인데 반하여 다른 반쪽은 온통 꿰맨 자국과 의안으로 뭉개진 인물. 그는 언제나 로비의 소파에 앉아 코냑 한 잔을 소파 손잡이 위에 올려놓은 채, 또는 코냑 잔을 빙빙 돌리며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한 시간에 두 번 가량 도어맨 젠프에게 다가와 묻는다. “내게 편지 온 거 없나?” 젠프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걸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빼지 않고 뒤를 돌아 확인 차 편지통을 들여다본 다음 대답한다. “오늘은 아직까지 온 것이 없습니다, 박사님.” “나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나?” “없습니다, 박사님.” “전보는?” “오늘은 없습니다, 박사님.” 어렵게 구한 모르핀을 날마다 하나씩 투약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굴까? 혹시 고도?
 약간 작은 키이지만 세련된 외모와 의상, 무엇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잘 생긴 얼굴과 체격에다가 놀라운 춤 솜씨까지 겸비한 가이거른 남작. 사교에 능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아주 쉽게 사람을 사귀는 경향이 있는 이 남자의 턱 주위에 눈에 잘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깊은 상처자국이 나 있다. 이것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작지 않은 부상이었다. 나중에 밝혀지는바 군의관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도 정성껏 꿰매 최소한의 흉터만 남기고 잘 아물었던 것. 비록 나중에 박사 자신은 돌팔이 의사임이 분명한 아무나가 그냥 마구 얼굴에 난 상처들을 꿰매버려 엉망이 됐을지언정. 젊은 나이에 삶의 목표를 전쟁터에 남기고 돌아와 아무 하는 일 없이 최고급 호텔의 가장 비싼 방에서 호의호식하는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남작. 삶의 질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잘 생긴 남작이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는?
 평생을 경리보조로 근근이 먹고 살던 작센 주 방직공장의 말단 봉급쟁이 오토 크링엘라인 씨. 도저히 베를린 최고급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두텁고 낡은 외투와 자신의 발보다 적어도 두 수치 큰 진흙 뭍은 신발을 신고, 험하게 낡고 투박한 인조가죽 트렁크 가득 짐을 담은 채 외투 주머니에서 버터 바른 바짝 마른 빵이 로비 바닥에 툭 떨어진 걸 얼른 주워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 소시민. 위암에 걸려 위를 통째로 잘라내고 이제 남은 생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아, 자신이 평생 번(벌어 마누라 모르게 꼬불쳐 둔) 돈과 생각지도 못한 고모에게 상속받은 약간의 돈을 몽땅 털어, 죽기 전에 회사의 프라이징 총회장이 베를린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의 가장 좋은 방에서 한 번 자봐야겠다고 작심한 이.
 정말로 프라이징 총회장은 바로 그날, 이 그랜드 호텔에 짐을 풀고 동종업계 경쟁사이기도 한 켐니츠 사와 합병을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 원래 크링엘라인 씨가 다니는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던 프라이징 총각은 당시 회장이었던 영감의 딸과 눈이 맞아 졸지에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분상승에 성공했으나, 약혼 하루 전까지 크링엘라인 씨의 장인에게 단돈 몇 마르크 씩을 꾸어 쓰고는 했던 것. 천성이 무식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돈 무서운 줄 잘 아는 이 구두쇠가 비즈니스 협상을 하려는데 온갖 것이 전부 다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몰려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기만 하던 차, 정작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은 전보의 내용과 완전히, 180도 다른 내용으로 뻥, 새빨간 거짓말 대포를 터뜨림으로써 협상안에 상대의 늙고 노회한 회장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좋은 일엔 거의 언제나 더 좋은 일이 이어지는 법. 베를린에서 급하게 구한 일회용 속기, 타이피스트 겸용 비서가 완전히 연예인 급이라, 거짓말 대포를 수습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영국의 맨체스터에 그녀를 동행하기에 이른다. 조건은 1,000 마르크와 영국에서 옷 한 벌.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돼? 하필이면 프라이징 총회장, 호텔방에서 사랑하는 애인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회장은 직장에서의 버릇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했다. 그게 누군가하면 26년 동안 방직공장의 경리보조로 청춘을 바쳤으나 아직도 사택의 보일러를 회사에서 제때에 고쳐주지 않아 마누라로부터 숨 쉬는 데 고통스럽다는 편지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크링엘라인 씨.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인생은 몇 주에 불과한 이 사람은 애인 앞에서 프라이징 회장의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몽땅 까발리고, 그것도 모자라 울퉁불퉁 살이 찐 저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 악질 기업가인지를 성토해버리니 협상을 잘 마무리 짓고 예쁜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프라이징 씨가 아주 제대로 체면을 구겨버리고 만다. 그랬겠지?
 이렇게 남자들만 나오는 건 아니라서, 일찍이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사랑을 받아 지구에서 가장 최고급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고리, 진주 반지를 선물 받은 발레리나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그루진스카야. 근데 그건 옛 이야기. 지금은 비록 16세 때와 똑같은 몸무게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벌써 손자까지 둔 늙은이. 춤을 춘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연 전마다 무대공포증에 의한 히스테리 현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지독한 깽판을 부리는 공포스런 주인공. 그러나 아직도 무대가 끝나면 몇 번의 커튼콜을 받는지, 관객이 앙콜을 요구하는지 아닌지, 갈채의 데시벨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 어느 날, 자신은 당연히 모르지만, 자기를 짝사랑하는 크링엘라인 씨가 특별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밤, 1부를 마치고 관객이 거의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는 무대에서 프로다운 혼신의 공연을 마쳤으나 겨우 한 번의 커튼콜을 받고 숙소로 도망쳐, 수면제 두 알을 먹은 상태에서, 진한 차에 다시 수면제 한 통을 다 넣어 잘 섞은 다음 탁자 앞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지막으로 베를린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려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난데없이 다가온 아도니스. 그게 누구? 안 알려줌.
 모든 사람은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회전문을 열든지 아니면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서든지 밖으로 나가는 곳.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생의 요지경. 그리고 희한하게 연결되는 인간들의 끈. 이걸 영화로 만들었다니, 영화도 정말 재미있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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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1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비키 바움 젊은 시절 외모가 한 미모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책 앞날개에 있는 사진으로는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외모랄까... ㅎㅎ 늙음이 뭔지 원... 저도 다 읽고 나서 별 다섯 개 중 왜 한 개를 빼셨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7-18 16:23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근데, 독일 유대인 집안에서 하피스트로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할 정도 부르주아인데요, 이이가 글쎄 베를린의 유명 호텔 두곳에서 객실 정리 담당 메이드 일도 했다는 겁니다. 그때 경험하면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모아모아 책을 썼다네요.
이해 안 가는 것이, 메이드는 당시엔 상당히 천한 직업인데,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도 아니고 하피스트라.... 그죠? 책 쓰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ㅎㅎㅎㅎ 읽으신 다음에 백자평 말고 꼭 서평을 올려주세요!

Falstaff 2018-07-18 16:27   좋아요 0 | URL
아, 또 있습니다.
<그랜드 호텔>이란 제목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거든요. 그게 무려 1932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고 해요. 전 영화를 보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루진스카야 역을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타 가르보가 했다는 겁니다.
실제 책을 보면 가르보보다 체격이 훨씬 작아야 할 거 같지만, 분위기가 가르보하고 아주 딱! 떨어집니다. ㅋㅋㅋㅋ
 
박카스 만세 민음의 시 194
박강 지음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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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어떻게 고르느냐. 온라인으로 책을 사기 시작한 다음부터 생긴 고민이다. 오프라인이면 서가에 삐딱하게 기댄 채 심하면 그냥 시집 한 권을 다 읽어 치워버릴 수도 있고, 몇 권의 시집을 그렇게 해치우고 나서 책방 주인의 눈 고리가 찢어질 거 같을 찰나,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 골라 구입하면 그만이었다. 온라인에선? 아, 참 고민이다.
 요즘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이와 똑같은 엄살은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인구대비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라나? 아무리 세계 최고의 시집 소비국가면 뭘 하는가. 시인들의 평균 연 수입이 200만원이라는데. 500만원이었던가? 200만과 500만이 비록 2.5배 차이가 나지만 이거나 저거나 진짜 그게 수입의 전부라면 다만 시간이 문제지, 굶어죽는데 적당한 수입이다. 그러니 시인들이 시간만 나면, 초대만 받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강연회니 교양강좌니, 낭독회니, 독자와의 모임이니를 하는 거다. 불쌍하진 않다. 다들 지가 좋아 하는데 뭐. 평생 배고프게 살 줄 번히 알면서 택한 스스로의 길인 걸. 배고프지 않으려면 부모한테 빌붙어! 아니면 배우자를 월급 많이 주는 직장으로 내보내! 그런 자리 없으면 그냥 최저시급 받는 알바라도 보내버려! 당장 배고픈데 쪽팔린 게 어디 있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국민들이 왜 시를 읽지 않는지 내가 어찌하여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그래도 이미 말이 이만큼 나왔으니 한 번 쯤 궁리를 해보자. 왜 독자들이 시를 멀리할까? 당연히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니, 나는 왜 시를 잘 읽지 않는지를 이야기해보자.
 요즘, 아니, 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에 술과 시간의 낭비에 전력을 다하느라 책을 멀리한 약 스무 해 정도의 공백이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시는 시인들만의 무대가 된 느낌이다. 오직 고매한 표현과 은유와 암호를 나열하는 구름 위 궁전에 거처하는 인간들만이 시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즐기는 듯함. 나같이 하계에서 빌빌거리는 저잣거리 것들은 애초부터 해독이 불가능한 독특한 언어의 사라방드. 어느새 시판이 이렇게 됐더란 말씀. 나는 음악도 매우 좋아하지만 쇤베르크, 힌데미트 등으로 대표하는 현대음악까지 즐기지는 못한다. 대한민국의 시들도 어느새 그런 영역으로 들어간 거 같은 느낌. 거기다 미리 읽어보고 시집을 선택할 수 없는 온라인 쇼핑의 한계점까지. 이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시집 구입을 머뭇거리게 하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하필이면 두 문제점이 동시에 터진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알라딘의 ‘미리보기’ 기능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집 <박카스 만세>도 당연히 미리보기를 통해 책의 앞 쪽에 실려 있는 시 몇 편을 먼저 읽어보고 적어도 난수표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 사게 된 것. 1973년 생 인천 출생 시인 박강이 2013년에 낸 처녀시집이니까, 그의 나이 40세. “처녀시집이라니. 그럼 시집의 처녀막이 찢어졌느냐?”고 묻지 마라. 벌써 30여 년 전에 김모某 시인이 자신의 처녀시집 <반성>에서 써먹은 표현이다. 나이 40이면 짧게 잡아도 15년 동안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아, 그 생각을 못했다. 시집이 균질하게 앞에 포진한 시들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말씀. 첫 번째 시 <펭귄>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밤이면 우리는
 입술을 꾸욱 깨물어야 할지 모른다
 혀끝은 소주로 타고
 양손은 백기를 펄럭일 태세
 자정이면 좀 급하니까
 자정이면 눈 위에 서서
 맨발로 걸어야 할 때가 다가오니까
 (후략)


 얼마나 좋아. 밤이면 입술을 꾸욱 깨물고 혀끝을 소주로 태우며 양손은 애인을 향해 백기를 펄럭인다니. 자정이면 눈 위에 맨발로 서서 새하얀 눈 위로 유유히 오줌을 갈기는 그림이 딱 그려진 거였다. 이 시가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시집을 선택하기 위하여 책방의 ‘미리보기’를 말 그대로 슬쩍 본 소감이 이랬다는 거다. 시를 정확하게 오해했다. 그래서 샀다.
 시인이 1973년생 남자. 이거 중요한 사실이다. 이이가 육군을 만기 제대한 대졸자라면 1973 더하기 25 해보자. 그럼 1998년. 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드런 팔자를 타고난 남자들의 연도다. 세계통화기구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나라의 전 부분에서, 검정 곰이 인간 여자로 변한 이후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이 벌어진 시대. 시인은 지랄났다고 딱 그해, 혹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바로 다음 해에 대학을 졸업했을 거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시인 박강은 당시 일부 젊은이가 그랬듯이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서 국문학 박사의 학위까지 계속 가방끈을 늘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였다.
 결과, 적어도 시집의 1부에선 독자가 알아듣기 쉬운 노래, 본격적으로 88만원 세대들의 우울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비록 제목은 남극의 <펭귄>, <폭설>, ‘쥐라기 공원’을 통해 포악성이 과대 포장된 육식공룡 <벨로시랩터 철학>, <히스테리아나 시베리아나> 등 광활하거나 거창하지만. 좀 궁상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시 한 수 읽어보자.




 너와 나의 국토대장정



 모든 길은 확정적으로 주어졌다
 깃발은 19세기식 수염을 휘날리면서
 쁩쁘쁘 트럼펫을 부는 구름의 입술들
 귓전에서 따갑게 손뼉 치는 가로수 가지들
 사흘째부터 우리는 서로 말을 잃었다
 사흘째부터 취침 시간에는 어머니 사랑해
 소감문에 적어야 할 명단만 늘어났다
 잘했어 이제부터 너희는 빛나는 청춘이야
 이마에 도장을 꽝꽝 찍으며
 아침부터 태양은 머리 위에서 홍알거렸고

 

 이력서 한 줄처럼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고 묵묵히 걸어간 동안


 

 아, 국토대장정! 시집 제목에 나온 “박카스” 만드는 동아제약에서 주최했던 행사로, 대학생들을 추첨 선발해 (200명이던가? 300명? 에잇, 몰라!) 한 여름에 걸어서 한반도의 남쪽 반을 행군하던 거. 포장도로를 걷는 일이 쉬울 거 같지? 천만의 말씀. 발바닥 물집 말고도, 도로 자체가 비가 내리면 중앙 부분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길가가 약간 낮게(중앙선 쪽이 약간 높게) 설계되어 있다. 즉, 한 달 동안 ‘삐딱한 자세’라는 건강상 문제를 안고 걸어야 한다는 말씀. 정형외과 적的으로 가비얍지 않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약간 위험한 일. 이걸 애국적인 행사로,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신을 이길 극한 경험, 뭐 이 비슷한 일종의 “스펙”으로 변질시키고자 국토대장정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이력서 한 줄을 위해 서로 말을 잃고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걸어야 했던 것이다.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지? 이걸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당시엔 정확하진 않지만 마치 “인간극장” 이딴 종류의 다큐멘터리 비슷하게 방송도 해주고 그랬다. 슬픈 조국의 현대사지 뭐.
 어찌 취직을 해도 별 수 없던 시기. 하필 (박카스 만드는 회사는 아니더라도) 제약회사에 취직해 대리직급까지 승차한 박 대리는, <박 대리는 어디에>라는 시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삼거리 약국 유리문에 파리가 붙어 떨고 있다
 고무줄로 묶은 전표 다발처럼
 신신파스 냄새를 돌돌 말아 뱉는 에어컨 앞
 말일이면 한 번 찾아오는
 백 대리가 다가와 배시시 인사한다
 황 약사의 구겨진 눈꼬리가 바둑판에 꽂힌다
 깨진 알을 만지작대며 불계승 위치를 계산 중이다
 출시된 신약이라며 박 씨는
 발기부전제 카탈로그를 슬쩍 들이민다
 복날 먹은 보신탕을 선전하듯
 생수통을 번쩍 들어 갈아준다, 땀을 닦는다
 (중략)
 약사가 만기어음을 끊는 동안
 그는 위층 속편한내과의 처방전을 훔쳐본다, 한 달 새
 진통제는 타이레놀 혈압제는 노바스크로 바뀌었다
 뒤에서 결제를 기다리는
 다국적 제약사 직원의 가방은 선물로 두툼하다
 박 씨가 받은 골판지 박스엔
 반품 처리된 약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후략)


 박 대리가 삼거리 약국에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정기 방문을 한다. 한 달간 판 약 대금을, 그게 얼마나 된다고 치사한 황 약사가 약속어음으로 결제를 해주는 동안, 박 대리는 약국에 있는 빈 생수통을 새 통으로 갈아주고 발기부전제 카탈로그도 슬쩍 건네준다. 그러면서 보니까 박 대리네 회사의 진통제와 혈압제는 이미 다른 회사의 약으로 바뀌어버렸다. 바뀐 약을 생산하는 회사로 짐작되는 다국적 제약사 직원이 마침 박 대리 뒤에 섰는데 가방이 약사에게 줄 선물로 두툼한데, 자신의 앞엔 반품 처리된 약들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 살기 쉽지 않던 시절. 제약사의 리베이트나 선물은 아마 그 후에도 일정기간 계속되었을 걸?
 한 마디로 살기 쉽지 않아, 결혼도 아이도, 직업도 포기한 최초의 삼포시대를 개막한 세대의 시들. 이쯤이면 이 시집, 감잡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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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벌 이야기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
천쯔두.주샤오핑 지음, 양졘 각색,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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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희곡은 주샤오핑이 쓴 <뽕나무벌 이야기>, <상원>, <복림과 그의 아내> 세 편의 소설을 바탕으로 천쯔두, 양졘이 가세해 희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현대사를 산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1950년대 초반 출생인 이들 역시 문화혁명을 거쳐야했으며, 지식인들의 필수과목이었던 하향下鄕, 즉 시골에서의 현장체험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할 수 있었으리라. 문화혁명과 벽촌에서 살아야 했던 경험은 이들에게 반어적으로 문학의 자양분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주샤오핑 또한 하향 기간에 자신이 체험한 황토고원 마을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다고, 역자의 해설에 쓰여 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곳이 장안, 지금 이름으로 서안을 성도省都로 하는 섬서성 북부의 황토고원. TV 다큐멘터리를 유심히 보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 사람들 가운데 일부 주민들은 황토 언덕에 굴을 파 굴 속에서 기거하기도 한다. EBS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든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중국의 7대 주석 시진핑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하방을 간 곳. 그곳과 거기 사람들이 무대와 등장인물. 거대한 황토고원은 수천 년 동안 침식하면서 황하를 통해 서해에 건강한 미네랄을 제공해 풍성한 어족을 보유하게 만들었으며, 진짜 선조, 원조 중국인들이 만든 황하문명의 발상지란다. 그리하여 이들은 노래하기를,


 중화가 황토의 대지 위에 강생하여
 용의 후손이 이 땅 위에 퍼졌네.
 우(禹) 임금의 발자취가 여기에 가득하고
 무왕의 전차가 이 땅 위를 내달렸네.


 우 임금은 요순시대 가운데 한 명인 순 임금의 명을 받잡고 황하의 치수 사업에 큰 공을 세워, 순 임금의 대를 잇는 왕의 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하夏라 칭한 사람이다. 무왕은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紂왕을 죽이고 최초의 봉건왕국 주周나라를 세운 인물. 즉 진정한 중국의 정통성이 바로 자기들의 땅에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희곡 작가들은 이 드라마에 독특한 장치를 만들었으니 바로, 코러스의 사용. 연극에서 코러스라 함은 다수의 등장인물이 무대에 집단으로 등장해서 분위기에 맞게 대사나 필요하다면 ‘코러스’란 뜻 그대로 합창도 하며, 심지어 집단 속에서 특정한 몇 명이 실제로 역할을 맡아 작은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을 담당하기도 한다. 현대적 연출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소포클레스에서 내가 본 코러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해 세 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걸 알고 무릎을 꿇고 앉아 브로치 핀으로 자신의 눈알을 찔러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조차 검은 옷을 입은 코러스들은 무대 위에서 그대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스 고전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 코러스를, 누천년이 지나 20세기 후반에, 황하문명의 발상지를 무대로 하는 중국인의 작품에 차용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작품의 프롤로그도 무척 재미있다.
 하늘에 비구름이 잔뜩 몰려왔나보다. 마을 촌장이 시끄럽게 징을 치며 등장해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징, 북, 심지어 세숫대야 등의 가재도구를 두드리며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친다.
 “검은 용아, 검은 용아, 그냥 지나가려무나.
 남쪽에나 가서 내리거라.“
 용은 비를 부르는 영물. 비를 내리려면 여기서 내리지 말고 남쪽 아웃마을에 가서 내리라는 뜻. 남쪽의 이웃마을 사람들 역시 징, 북, 가재도구를 두드리며 뽕나무벌 사람들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욕하면서 소리소리를 지른다.
 “검은 용아, 검은 용아, 그냥 거기 멈추려마.
 북쪽 거기에 멈춰 서서 내리거라.“
 큰 소리를 내면서 비를 물리치는 재미있는 인류학적 장면. 시끄럽게 난리를 치면 구름, 즉 검은 용이 적어도 이 땅 위에선 오줌을 누지 않을 거란 희망사항.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중국판 님비. 다 좋은데, 우리 집 뒷마당에선 안 된다는 거. 실제로 뽕나무벌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웃, 주민들만 보호하고, 권력 없는 외부인, 힘 못 쓰는 삯일꾼, 다른 곳에서 팔려 시집 온 젊은 여자 같은 이들을 핍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외부인 가운데서도 지구 혁명위원회의 윗대가리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높은 권력자의 (하향 내려온)아들은 예외다. 역시 권력이 제일 중요한 것. 이들은 자신과 뽕나무벌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상위 권력자들에게 아첨과 뇌물공여와 굽실거리기를 멈추지 않지만, 자신들보다 열등한 외부인한테는 결코 자비롭지 못하다. 그러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되고 공평한 노동과 분배가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봉건적 관습이 퍼렇게 살아있는 중국의 벽촌. 당연히 해피 엔드는 아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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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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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두 명의 영국남자가 있다. 찰스 디킨스하고 서머싯 몸. 이들의 공통점은? 얘기 하나는 진짜 재미있게 만든다는 거. 오늘은 몸에 관한 이야기니까 후자에 국한해서 얘기하자. 아, 여기서 몸은 body가 아니라 William Somerset Maugham을 일컫는다. 이하 몸도 마찬가지.
 영문학자 동무님한테 들었는데, 몸이 자칭 “최고의 2류 작가”란다. 전적으로 동의. 최고의 2류면, 웬만한 1류는 그냥 찜 쪄 먹는다는 거 아냐? 여기서 몸이 말하는 1류는 뭘까? <신곡>이나 <파우스트> 또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들을 지칭하는 거 아닐까? 스스로 그들과 비교하기 좀 뭐하니까 조금 낮춰서 “최고의” 2류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름대로 가오를 세웠으리라. 시선을 영국문학으로만 돌려보면, 몸은 자신을 최고의 2류라고 함으로써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셰익스피어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이 다음으론 내가 최고다!” 사실 몸의 작품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것들을 보면, <인생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면도날>,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인생의 베일> 정도. 뭐 검색해보면 다른 작품들도 몇 개 더 있긴 하지만. 몸의 팬 또는 지지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씀이긴 하나, 이 작품들을 위에서 거론한 <신곡>, <파우스트> 등과 어깨를 견준다고 얘기하긴 조금, 아주 조금, 그렇지 않나? 아, 오해 마시라. 난 <신곡>과 <파우스트>를 위대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읽지 않을 책으로 일찌감치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몸의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새털 같은 여생 중에 하필 심심한 날이 있으면 기꺼이 책장에서 다시 꺼내 읽어볼 만하니까.
 이 책도 재미 측면에선 시작부터 보통이 아니다.
 두 영국인, 한 명은 ‘키티’라는 이름의 스물여섯 먹은 새댁. 또 한 명은 마흔 살의 건장하고 멋지게 생긴 찰스 타운센드. 현재 직함이 영국령 홍콩의 부총독. 못하는 운동이 없고, 진정한 춤꾼에다가 능수능란한 화술을 겸비한 최고의 남자, 라고 흔히들 여자가 오해하는 멋쟁이 신사. 두 남녀의 공통점은 영국의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의 속물들이란 거. 한낮의 키티의 침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몸body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가, 엑스터시의 변곡점에서 그만 키티가 누군가에 의하여 닫힌 방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소리 비슷한 걸 듣는 것으로 흥미진진한 소설은 시작한다. 누구지? 몸body의 대화는 이쯤에서 저절로 식어버리고 키티의 남편이자 세균학자인 월터가 아닐까 의심이 들지만, 이 시간에 그는 언제나 연구실에 박혀 현미경에 두 눈을 대고 있을 터.
 키티가 처음부터 남편 월터를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다. 어릴 적에 그래도 조금은 대단한 가문의 돈 많은 집안의 총각한테 시집가기 위해 일찌감치 사교계에 데뷔를 했으나, 욕심 많은 엄마 가스틴 부인의 눈부신 치맛바람 덕에 두 눈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처음엔 최고의 상대를 만나기 위해 조건을 따지느라 결혼을 늦췄지만, 어느새 너무 나이를 먹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상태가 됐을 때, 못생긴 외모 때문에 가스틴 부인의 눈 밖에 났던 동생 도리스가 먼저 준남작의 아들과 약혼을 한다. 그리하여 동생보다 늦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을 때, 딱 맞춤하게 나타난 이가 바로 지금 남편 월터 페인이었던 거다. 역시 인생에서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종종 있다.
 월터 페인은 아내 키티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자기가 아내를 숭배할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에 살면서 점점 좋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아내에게 친절하고 예절바르게 대한다. 무슨 뜻이냐고? 키티 입장에선 진짜 재미없는 남자라는 말. 이들은 결혼하고 곧바로 남편의 직장이 있는 홍콩으로 떠나 키티는 그곳 사교계에서 새로이 등장한 별이 되고, 키 크고 잘생기고, 운동 잘하고, 덩치 좋고, 권력까지 있는 찰스 타운센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약간의 망설임, 정말 약간의 망설임 끝에 기꺼이 불륜의 꿀통에 빠져버린다. 문제는 상대인 찰스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 그래서 차라리 대낮의 밀회를 남편에게 들킨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 자연스럽게 남편한테 이혼당하면, 찰스 역시, 이름도 후진 여자 도로시(그래,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도로시야, 도로시가!)와 이혼을 감행해 남은 인생, 둘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느 날, 월터가 키티에게, 키티와 찰스를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선언한다. 1920년대 홍콩엔 간통죄가 있었나보다. 월터 여보, 남자가 돼서 그러지 말고 깨끗하게 이혼해주면 안 될까? 여태 산 정을 봐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영국의 천한 부르주아의 의견은 그랬다. 월터가 픽 웃으면서, 조건을 하나 제시한다.
 “타운센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확답을 내게 주고, 법원으로부터 두 사람의 이혼 확정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일주일 안에 그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내게 서면 동의를 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산골 오지로 나와 함께 가주셔야겠어.
 키티가 당장 부총독 사무실로 쫓아가 아이고 영감, 나 이제 큰일이오. 제발 어서 빨리 각서 한 장 써주셔야겠소. 하며 사정을 설명한다. 근데 세상의 바람피는 남자들, 진짜 상대를 사랑해서 여차직하면 가정 때려 치고 연인 또는 정부와 새살림 차릴 인간들은 거의 없다. 부총독께서도 이하동문이라, 자기가 비록 키티를 환장하게 사랑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없고 그놈의 자식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단다. 아, 월터한테는 “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하나도 몰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각서를 받아올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제 쪽팔려 어떻게 하나, 이따위를 생각할 여력도 없다. 자신의 진짜 사랑을 배신당한 순간이라서. 코가 쭉 빠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퉁퉁 부어버린 눈두덩을 하고 집에 오니, 이미 남편이 콜레라 지대로 향하는 마누라 짐도 싸놓은 상태. 멍청이인줄 알았더니 남편 월터는 총명하고, (자기 눈으로 볼 때만 빼고 남이 보면) 괜찮게 생겼고, 성실하고, 부드럽고, 어느 면으로 보나 존경할만한 인격체였던 거다.
 이리하여 키티는 결혼생활도 망가져, 애인한테 버림받아, 그것도 모자라 언제 죽을지도 모를 콜레라 창궐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된다.
 스토리는 여기까지.
 몸의 작품들을 읽어보신 분은, 그의 작품을 절대로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실 듯하다. 스스로 최고 신분이자 최고의 인격자인줄 알고 사는 천박한 의식을 가진 집단들. 그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고난을 다 겪어내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천박한 짐승 같았는지를 인식하게 되고, 그런 인식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게 쉬워? 아무리 도를 닦아도 비슷한 실수를 다시 겪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살이. 여기에 서머싯 몸의 진수가 있다. 그의 가차 없는 시각과 인간, 인간의 날것에 대한 지적. 이런 것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감상하면서 스스로가 말한 “최고의 2류”라는 표현이 왜 나왔는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는지, 적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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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독서모임 책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모옴 선생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보다도
훨배 좋더라는.

나오미 캠블이 키티로 나오는 영화가 있다고
도 들었는데 아직 못보고 있네요.

Falstaff 2018-07-12 16:09   좋아요 1 | URL
1934년 버전엔 무려 그레타 가르보가 키티를 했답니다. 근데 상상이 안 가요. 가르보가 키티라니....
나오미 와츠의 키티는 좀 어울릴 거 같습니다만, 영화를 보지 못해서요. ㅠㅠ

coolcat329 2020-07-1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쩜 책보다 폴스타프님 글이 더 재밌을까요! 저도 이 책 이번에 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달과 6펜스 지금 다시 읽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좋고 주변에 막 추천하고 싶네요.

아, 저는 유투*로 영화 조금 봤는데 나오미 와츠 너무 잘 어울리더라구요..

Falstaff 2020-07-13 2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에이, 언감생심이지요, 제가 어찌 몸 선생보다 ㅋㅋㅋㅋ 우짰든 고맙습니다.
하여간 재미에 관한 한 독보적인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
 
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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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명색,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풍성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의 321번째 발간한 책이다. 스무 살에 죽은 한 프랑스 청년이 열일곱 살 먹었을 때 탈고한 작품 <육체의 악마>가 이중 한 자리를 채웠으니 대단하다 할밖에. 심지어 졸라, 뒤 가르, 그레이브스도 자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시리즈 목록에 말씀이야. 작가 라디게가 1903년생. 이 또래가 어떤 의미인가하면, 1차 세계대전엔 나이가 어려 참전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는 스스로 지원하지만 않으면 싸우기에 늙어서 참전하지 못하는 면피 세대라는 거. 1차 대전이 1914년 8월에 발발해 1918년 빼빼로 날, 11월 11일에 끝난다. 당대 숱하게 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거덜낸 전쟁은 이 세대들에게 “그것은 말하자면 사 년 동안의 긴 여름방학이었던 것이다.”(7쪽)
 소설은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사건은 전쟁 중인 1917년에서 18년 종전 때까지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주인공 화자 ‘나’의 나이 16세이던 시기의 만 1년. 자기보다 서너 살 많은 마르트란 아가씨를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한다. 남자 나이 16세, 고 1 정도가 되면 오래전 이순원의 <19세> 독후감에 썼다시피 투시력이 생기는 특별한 나이. 여자가 아무리 두터운 외투를 입었다 해도 척 보면 속살을 훤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얘기, 기억하시려나? ‘나’의 눈이 마르트를 발견한 순간 숙명적인 사랑을 발견하며 당연히 사랑의 허리하학적 최종 목표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뿔싸. 19세 아가씨 마르트는 이미 ‘자크’라는 참전 군인과 약혼을 한 상태이며, 조금 후 자크가 1주일 휴가를 받아 온 틈을 타 정식으로 결혼해버린다.
 이렇게 순진하게 끝낼 거 같으면 소설이 되지 않을뿐더러, 전쟁이 “사 년 동안의 긴 여름방학”이 되지도 않는다. 총사망자 2천만 명, 부상자 2천2백만 명의 참사가 생긴 긴 여름방학 동안 ‘나’는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으로 마르트에게 접근하건만, 마르트 생각엔 자신이 ‘나’에 비하면 할머니 같아 보인다. 16세와 19세의 차이는 그만큼 큰 거다. 게다가 당시 유럽(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까지 지역불문하고)에선 대강 나이 차가 근 스무 살 가까이 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16세 남자아이가 사람 같기나 했겠어? 마르트의 남편 자크도 서른을 훌쩍 넘겼으니 마르트의 생각도 그리 많이 어긋나는 건 아닐 터. 하지만 ‘나’는 죽음의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낸 마르트를 유혹하는 데 기어이 성공하여, 주인 없는, 아니, 주인은 죽음의 사육제를 향해 떠나 비어버린 신혼의 침상을 탈취한다.
 비록 16세지만 ‘나’는 한 번도 전쟁과 희생자와, 잠재적 희생자인 마르트의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벌이고 있는 (16세에 불륜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애정행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불륜행각이 벌어지는 장소가 마른 강가 부근의 작은 도시. 마른이 어딘가. 파리 외곽의 마른 전투, 1차 세계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으며 그만큼 사상자를 많이 발생시킨 악명 높은 전쟁터가 바로 마른 아닌가. 라디게 또는 ‘나’ 속에는 그러나 전쟁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다. 그냥 남의 눈에 띄면 좋을 거 없는 연애상태. 그러면서도 쉼 없이 마르트의 몸을 갈급하게 구하는 충동과, 남녀 사이에 당연하게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과 질투. 이런 것들을 그냥 죽죽 써내려간다.
 작품을 발간한 것이 1923년 3월. 작가는 그해 연말에 파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 <육체의 악마>는 대박을 터뜨린 모양이다. 책 뒤편의 작품해설을 보면, “갑자기 얻은 높은 명성을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문학적 공백 덕분이라고 보는 평자도 적지 않았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릇된 견해였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단다. 그러나 내가 읽어보니 이 책이야말로 전쟁 후 문학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서구적으로 대두된 “잃어버린 세대”적 측면을 빼면 남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나야 완전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하지만 문화 진공 시대에 맞춤하게 불어온 냉담과 혼돈, 그리고 조금의 자유, 그것도 책임이 결여된 자유 말고는 별로 발견할 것이 없지 않은가 싶다. 물론 해설에는 문장의 간결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걸 번역문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결론은, 양심이 있는 관계로, 일독을 권하지 못하겠음. 단, 이 의견이 문학적으로 무식한 한 아마추어의 한계이기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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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1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읽고 나서 할 말도 별로 없더라고요. 장 콕토 <앙팡 테리블>도 비슷한 느낌이었고요.

Falstaff 2018-07-11 10:36   좋아요 1 | URL
앗! 멋진 답글입니다. 잠자냥님 말씀 믿고 <앙팡 테리블>은 그냥 패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저 이런 답글 무척 좋아합니다. 추천 말고 비추 도서 소개요!! ㅋㅋㅋ

따오리 2023-05-0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교과서를 기대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