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개
박솔뫼 지음 / 스위밍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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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후장사실주의 소설가 가운데 두 권의 책을 읽은 유일한 작가가 박솔뫼가 됐다. 전에 자음과모음에서 출간한 장편 <을>을 나름대로 근사하게 읽어서 이번엔 박솔뫼의 단편집을 골랐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짧은 단편 꼴랑 네 편 싣고 한 권을 내면, 거 참, 읽는 독자는 좀 섭하지. 다행스럽게도 편편이 참 기막힌 아이디어로 만들어서 그것 봐라, 내가 눈썰미 좀 있지, 라고 다독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을>은 다른 후장주의 작가들하고 별 변별이 없었으나 《사랑하는 개》는 그렇지 않았다. 박솔뫼를 이제 겨우 두 권 읽었으며 정지돈, 오한기, 이상우의 책을 각 한 권씩 읽었을 뿐이라는 전제로 말하자면 《사랑하는 개》는 이들의 상상력에서도 방향을 좀 달리하지 않았는가 싶었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말이 후장주의 동인이지 서로 자주 만나지도 않고 교류나 의견 교환 같은 것도 생각만큼 잦지 않은 거 같다. 또 아무리 동인이라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야지 동인이라고 무조건 고지를 향하여 돌격 앞으로만 외치면 그게 무슨 재미일까 싶기도 하고.

단연 <고기 먹으러 가는 길>을 흥미롭게 읽었다.

남쪽이 고향이고 그곳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두 명이 북쪽의 숙소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갑작스럽게 폭설이 쏟아졌다. 이번 여행이 이들의 초행길이 아니라서 전에 왔을 때 밥을 먹었던 식당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폭설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흘러, 장소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점심은 대강 아무 곳에서나 먹고 싶다. 그래도 호오가 있어서 파스타를 먹고 싶다. 오다가 본 파스타 집이 있어 그곳으로 향하며, 생선구이 집이 보이기에, 파스타를 먹지 못하면 생선구이를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파스타 집 현관에는 CLOSED 가 아니라 CLOSE 라고 쓴 보드가 걸려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봤자 아르바이트 생은 아르바이트 특유의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장사 안 하는 시간이라고 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안에선 한 노인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생선구이 집에 들어가 결코 친절하지 않은 생선구이 집 사장의 눈치를 받으며 한 끼를 때우고 숙소로 돌아온다. ‘나’와 동행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뿐더러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도형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고, ‘나’는 그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봤지만 후푸후푸 숨만 몇 번 쉬더니 그냥 그대로 자고 만다.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소도구. 커피 포트와 함께 있는 가습기. 가습기 세정액 때문에 호흡곤란과 폐질환을 유발하는 그런 가습기가 아니라, 작가 박솔뫼가 주목하는 건, 가습기 분출구를 통해 분사하고 있는 흰색 수증기. ‘나’는 겁에 녹차 티백을 넣고 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컵 안의 물은 점점 노란색에 가까워지고 간신히 김을 내뿜고 있는 가습기도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다. 내 앞의 김은 가늘게 위로 올라가고 가습기에서 나오는 흰 수증기는 좀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흰색으로 좀 더 오래 남아 그 색으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가습기와 비교하면 가습기라고 하기에….좀…. 이 방의 건조함을 막는 데 큰 도움이 아니라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 정도를 줄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그래서 자꾸 쳐다보게 하는 것인가. 한 번씩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김을 바라보며 창밖을 보면 이웃의 건물이 건물의 창이 아니라 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눈들이 흩어지는 눈들은 마치 너를 내가 잠들어 있는 도형을 내가 잠든 도형의 꿈을 내가 말하듯이 지켜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조금 사이를 두면 가습기에서 나오는 이 흰 수증기가 희한한 생명체로 변용한다.

“가습기의 김은 여전하고 나는 컵에 물을 담아 와 가습기 안에 부어주었다. 다시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가습기를 바라보았을 때 김 사이에서 닭 세 마리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닭은 병아리와 닭 사이 크기의 부리도 벼슬도 모두 만화처럼 귀엽고 부드러운 형태로 변한 닭이라고 해야 할지 좀더 병아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였다. 세 마리는 테이블 위 가습기의 김 사이에서 피어 나와 한 마리씩 테이블 위에 종종종 선다.”

설마 정말로 가습기의 수증기가 닭으로 변했겠나. 주인공 ‘나’의 뇌 속에서 수증기가 이렇게 변용transfiguration한 것이지. 실제로 이후에 수증기의 변용인 닭은 ‘나’에게 무슨 고기를 먹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닭이라서 자기 앞에선 닭고기를 먹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냐고 물으며, 고기 가운데 닭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해도 괜찮다고 참견하기까지 한다.

나는 박솔뫼가 이 단편 <고기 먹으러 가는 길>에서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작가가 작품에서 특정하는, 갑자기 대낮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는 반도의 그나마 북쪽 지역에 실제로 가서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고 여긴다. 그냥 작가가 고기가 먹고 싶었구나, 그리고 어느 날, 가습기를 바라보며 폭폭 쏟아져 올라가는 수증기를 바라보면서 이게 닭처럼 생겼구나, 라고 여겼을 뿐이고, 그걸 서로 섞어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 그게 뭐 어때서? 괜찮지 않나? 좀 깨고. 어차피 세상을 바꾸려면 깨지 않고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법이니 말이지.

또 세 번째 작품인 <여름의 끝으로>에도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물론 세상 사람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여유 있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 선택적으로 동면할 수 있다는 가정. 동면冬眠, 즉 겨울잠이지만 굳이 겨울에 자야 할 필요는 없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아마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향유할 수 있고 배가 덜 부르거나 고픈 사람들은 시달릴 수밖에 없는 소위 번아웃을 느꼈을 때, 자신의 사정에 맞춰 동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떤가?

여기서 ‘나’는 여차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비상용으로 동면 관리사 자격증을 땄고, 딴 김에 치과의사를 하는 허은이 임신을 했다가 중도에 잘못되어 쇼크를 먹어 남편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별거에 들어갔고, 일신상의 이유로 긴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아 허은의 친척이 경영하는 온양온천의 오래된 호텔 방 두 개를 빌려 이 가운데 한 방에서 40일 간의 동면을 취하기 위해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연말을 맞은 소도시 분위기, 오래된 호텔. 그리고 새해부터 시작하는 동면. 대전에서 KTX를 타고 우정 온양온천까지 와서 (그래야 20분 걸린다) ‘나’에게 밥을 사고 다시 전철로 서울로 올라가는 번역하는 선생님. 그러나 다른 등장인물은 별로 영양이 없다. 그저 동면. 사람이 동면을 한다는 아이디어 하나. 그거 가지고도 충분히 매력있지 아니한가?

나는 장편 <을>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후장사실주의자 소설답게 읽는 이에 따라 감상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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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25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똥꼬사실주의.ㅋㅋㅋㅋ
정말 후장사실주의란 문예사조가 있긴 한 건가요?
한 10년전쯤 훅하고 튀어 나온 것 같은데 아무리 소설가들이라지만
말장난 너무한다 싶어 영 마땅치 않습니다.
골드님은 소설을 읽으신다면 외국 작품만 읽으시는 줄 알았는데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읽으시네요.
2, 30년에 욕했던 젊은 작가들 요즘 보면 나쁘지 않았는데
왜 욕을 했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물론 실제로 읽은 작품은 없지만...ㅋ
요즘 젊은 작가들도 앞으로 2, 30년만 버티면 그땐 추앙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품은 당대에는 인정 받지 못해도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ㅋㅋ

Falstaff 2023-02-25 15:3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냥 젊은 작가 몇명, 출판사 편집 직원, 평론가 말고 서평가 이렇게 몇 명이 모여 우리 친구 먹을까? 비슷하게,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빌려서 우린 ˝후장사실주의˝라고 하자, 해서 시작한 거랍니다. 저는 불라뇨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 들였는데요, 그냥 처음 들으신 분들 가운데는 기분이 좋지 않은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ㅎㅎㅎㅎ

전 우리나라 문학 좋아해요. 근데 요즘에 별로 안 읽는 건 우짜 그게 그거인 거 같은 작품들이 손에 계속 잡히더라고요. 이젠 출판사 광고글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서.... 아니더라도 뭐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우리 작품 고를 때는 아주 신중을 기하는 편입니다.
제 진짜 인생 책을 꼽으라면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을 제일 먼저 거론하는 걸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2-2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골드문트님 글에서 후장사실주의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딱히 의미는 없는 말이지만 이렇게 서로가 자신이 생각하는걸 자기 마음대로 열심히 진짜 자기 쪼대로 써보는거 뭐 나쁘지 않은거 같애요. 저는 한국문학의 경우 편식이 심해서 진짜 안읽은 작가가 많은데 이렇게 골드문트님 글을 보면 또 반성을 하게 되네요. (도대체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인가 싶기도 합니다. ㅠ.ㅠ)

Falstaff 2023-02-25 15:32   좋아요 1 | URL
옙. 이이들의 작품을 보면 내용이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와 관계 없이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면이 있더라고요. 이 박솔뫼는 이제 겨우 두 권 읽어봤지만 사물을 보는데 자연스럽게 그것을 변용시켜 이야기를 확장하는 특별한 시각이 돋보이고요. ㅎㅎㅎ 건방지게 아는 척했습니다. (에구 쪽팔려. ㅋㅋㅋㅋㅋ)
 
배트맨 : 킬링 조크 - 디럭스 에디션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브라이언 볼랜드 그림,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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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그래픽 노블. 우리말로 하자면 만화책이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니까 폼은 난다. 하여간 21세기 접어들면 무엇이든 인플레이션이다. 그래픽 노블? 흐흐흐. 예전에도 만화책 표지엔 글, 그림 이렇게 구분을 확실하게 했었다. 이 책은 <젠틀맨 리그>, <왓치 맨>과 배트맨 시리즈의 글을 담당한 유명한 만화 스토리 작가 앨런 무어가 쓰고 볼랜드가 그림을 그렸다. 이럴 경우, 즉 만화의 경우엔 내 경험상, 스토리 작가보다 소위 ‘화백’이라고 칭하는 만화가의 이름이 우선하는 거 같은데 요즘엔 아닌 모양이지? 내가 가장 최근에 본 만화는 <비천무>, <불의 검>, 그리고 명작 <북해의 별> 등 김혜린이니 한 이십 년 만에 처음 본 거 같다. 그러고보니 이젠 김혜린도 환갑이 넘었겠다. 아이고, 세월이 무섭다, 무서워.

책을 보고 제일 먼저 놀랐던 것은, 아무래도 나는 ‘만화’라는 말이 ‘그래픽 노블’보다 더 친하고 좋아서 계속 ‘만화’라고 쓰겠는 바, 만화도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이야기’로 진화한 거였다. 물론 스토리 작가 앨런 무어의 의식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배트맨: 킬링 조크>가 사회적 주류 문화로 업그레이드되는 것도 “전혀” 찬성할 수 없다. 비록 불량하지만, 불량한대로 나름의 구조를 갖추어 이야기로 만드는 솜씨는 인정해야 하겠다. 얼마 전에 호아킨 피닉스가 주인공 역을 한 <조커>를 재미있게 봤다. <배트맨: 킬링 조크>도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배트맨 시리즈의 중요한 악역 조커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조커>처럼 조커는 고담시의 희극배우 지망생이다. 다른 점은 3개월 후에 아내 지니가 첫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고, 고양이 오줌 냄새가 풀풀 나는 단칸방에서 몇 달치 월세가 밀려 있다. 오디션만 보면 될 듯 될 듯하면서 이상하게 긴장하는 바람에 늘 마지막에 미역국을 마신다. 이런 비참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깨끗한 곳으로 이사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으로 사고를 친다. 두 악당의 보조 길잡이로 전에 다니던 화학공장을 털기로 한 것. 드디어 약속한 날짜가 되어 술집에서 이들을 만났지만 조금 후에 형사가 들이닥친다. 체포가 아니라, 몇 시간 전에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아내 지니가 젖병 보온기를 시험 작동하다가 감전되어 순식간에 즉사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제 강도질을 할 이유가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악당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다. 약속은 약속. 이들은 계획대로 화학공장에 숨어 들어가고, 전에 다닐 때는 경비가 없었는데 그동안 바뀌었는지 무장 경비에게 들켜 총격을 받고 악당(들)이 총에 맞아 죽고, 길잡이는 살기 위해 화학 폐수가 잔뜩 들은 공장 옆의 호수에 빠져 오염수로 유전인자가 바뀌었는지 극악의 악당인 조커로 변신하게 된다. 당연히 영화보다 더 공상적이다. 만화라서 극단적인 공상을 허용할 수 있겠다 싶다. 개연성이 있거나 없거나 그걸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로 막혀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세상의 루저가 극단적인 불행과 절망 앞에서 최고의 악당으로 변한다는 플롯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세상엔 다행스럽게도 다른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기 때문에. 다만 만화를 더 만화답게 만들기 위해 스토리 작가는 악당으로 변신한 루저를 최고의 영웅 배트맨의 상대역으로 캐스팅한 것뿐이겠지.

앨런 무어가 썼건 다른 이가 썼건 간에, 이미 전작에 배트맨의 탄생은 분명히 밝힌 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선 배트맨이 왜 조커와 서로 죽음을 나누어야 할 사이로 여기는지, 이게 불투명하다.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뒤로 가면 배트맨은 기껏 잡은 조커를 죽이지 않고 다시 사회화해 정상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희망사항까지 제시하는 것도 난데없기는 하다. 그러나 <배트맨: 킬링 조크> 이후 또 무슨 작품이 나와 그걸 설명하겠거니 여겨서 시비하지 않기로 한다. 킬링 조크, 농담 없이 킬링 타임 하기에 좋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의 손이 닿게 보관하고 싶지는 않다. 청소년이면 기쁘지는 않겠지만 봐도 뭐라하지는 못하겠고.

에잇, 김혜린의 <비천무>나 다시 한번 봐야겠다. 그새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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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 <비천무>

(2001년 5월, 모회사 사보 게재글)




새삼스레 만화를 고급스런 문화물로 추켜올리려는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부터 대중적 기반을 잡기 시작한 만화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는 것 또한 아니어서 그저 있는대로 말하자면, 새로이 도래한 21세기에 만화는 활자 매체와 시청각 매체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문화 코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큰 착각은 아닐 것이다.
소년기에 한 번 쯤 만화에 몰입하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는가마는, 하필이면 만화를 탐독하는 시기가 성인이 되기 전인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매체와는 도저히 비교하지 못 할만큼 소박하지만 활자매체에 비해서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힘이 그 이유가 아닐까. 이러한 어설픈 단정에 공감할 수 있다면 활자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는 세기에 대중문화의 저변으로 등장한 만화를 새로운 문화로 인식하는데 주저하고 있다면 차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러나 제법 세상을 살아 <포켓몬스터> 류의 황당무계를 참을 수 없는 세대들이 즐거이 볼 수 있는 만화는 사실 드물다. 그리하여 아까운 지면을 빌어 오늘 소개드릴 작품은 약관 22세 때인 1983년에 데뷔작이자 문제작, 히트작이었던 <북해의 별>로 화려하게 등장한 김혜린의 야심작 <비천무 : 飛天舞>이다.


나의 서평이 언제나 그렇듯이 상세한 줄거리 소개는 직접 감상하실 분을 위해 생략하겠으나, 달리는 말 위에서 산 바라보는 식으로 훑어보면, 1343년부터 1368년 사이,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주원장이 명나라를 개국할 때까지의 격변기를 무대로, 멸망한 지방 족벌 유가장 출신의 떠돌이 무사 진하와, 몽고인 지방총독과 한족 사이의 혼혈 여인 설리, 그리고 한족 부흥운동에 투신하는 지방족벌의 계승자 남궁준광의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김혜린이 작품을 절차탁마해가는 '내공'의 숨막힘으로 만일 여지껏 만화를 그저 우스운 저급문화라고 여겼던 분들은 낭패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中原草草失承平 중원은 버려지고 오랜 평화는 깨져
戌火胡塵到南京 오랑캐는 남경까지 이르렀네.
扈 老臣身萬里 늙은 신하들이 군주를 따라
天寒來此聽江聲 한겨울 이곳에서 양자강 물소리 듣네.


 <비천무> 첫 장을 열면 작가는 위와 같은 남송 시대 사람 육유의 <용흥사조소릉선생 우거 : 龍興寺弔少陵先生 居>라는 시를 소개한다. 곧이어 이어질 스토리가 원나라의 4족 신분제(몽고족-색목인-한인-남송인)에 따른 몽고인에 의한 남송인 핍박이어서, 위의 한시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감정을 피압박인의 정서로 촉촉하게 적시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하는데, 이렇듯 시의적절한 한시의 소개는 심약의 <육억시 : 六憶詩>, 이욱의 <낭도사 : 浪淘沙>, 백거이의 <경비 : 輕肥> 등 수다하게 등장함으로써, 그녀의 만화에 충분한 감정이입을 부여하는 동시에, 비극적 흥취를 주고, 또한 시대극이기 때문에 충분히 감안했다고 김혜린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대사의 운율성을 부여하는 것에 타당성을 확보하게 한다.


그러나 김혜린의 나이 40세. 그녀는 자라면서 일본풍의 만화를 누구보다 많이 읽었을 터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작가는 일본 캐릭터, 예컨데 <캔디>의 테리우스,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비천무>는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가상국을 무대로 한 열 여섯 권짜리 장편 극화 <북해의 별>을 끝마치고 곧바로 손 댄 작품이어서인지 몽고족과 한족, 그리고 고려족을 그렸음에도 각각의 캐릭터들은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출연진들은 하나같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고, 이는 만화는 숙명적으로 그림을 매개로 하고있기 때문에 선의 운동감을 부여하기 위하여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장편극화 <불의 검>의 경우 무대가 북만주 우리 조상들임에도 불구하고 극동 아시아 인의 특징인 광대뼈 돌출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김혜린. 그녀가 일본 만화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에도 우리 시대에 김혜린과 같은 만화 작가를 또 한 명 보탰다는 것은 대중문화를 올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제대로 육성하는 토대를 만드는 또 하나의 벽돌이 제공되었음을 의미한다. 극화 <비천무>는 김영준 감독이 당대의 스타 신현준과 김희선을 캐스팅하여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 개봉관에서 절찬리에 상영하였으니, 이 자체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 이어 만화의 대중문화적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천무>에 몰두하게 하는가. 그것은 작가 김혜린이 끈질긴 역사탐구와 고증, 상상력의 결집으로 만화작업을 하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북해의 별>을 창작할 당시 그녀의 관심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휩쓸림이었고 만화작업이라는 기존 역사의 왜곡작업을 위해 수다한 서양사 관련서적을 탐독하는 동시에 복식사, 궁중풍속사에까지 관심을 쏟았듯, <비천무>를 그리기 위하여 김혜린은 원말명초 시대의 중국사와 민속사, 야사집까지 이 잡듯 뒤져 성공적으로 기존의 역사를 왜곡해내어, 그 결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역사만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 만화작가 가운데 누가 있어 김혜린 만큼의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비천무>는 원말명초의 시대극이나 비천신검이 난무하는 무협활극, 그렇다고 흔히들 단정하듯 순정 멜로드라마는 아닐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미덕과 작가의 노력,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 장편만화 <비천무>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월, 그 쓸쓸함과 사무치는 정한일 것이다. 누구의 가슴에나 품고 있는 회한과 아스라하게 부서지는 모종의 기억들을 김혜린, 이 중년의 아주머니 화백은 정확하게 할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비천무>를 읽는 깊숙한 재미는 진정 이러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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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23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조커>는 보면 기분 나빠질 것 같아 여태 보지 않고 있어요. 재미있게 보시는 분들도 많던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비천무>개봉당시에 극장 가서 봤는데요, 정말 재미없게 본 기억이 나네요. 전 원작 만화를 보진 않았고요, 줄거리의 재미없음 이라기보다 두 주연의 연기 못함이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보다가 신현준이 칼에 맞았던가 화살에 맞았던가 김희선이 이름 부르며 우는 장면이 있는데 어찌나 몰입이 안되던지... 오늘 골드문트 님의 이 글을 읽고보니 비천무는 원작으로 봤어야 했던 거네요. 크..

Falstaff 2023-02-23 07:43   좋아요 1 | URL
영화 <조커> 재미납니다.
근데 영화 <비천무>는 망작입니다. 김혜린의 원작을 보시면 좋을 거 같네요. 순정만화예요, 순정만화. 제가 좋아하는 ㅋㅋㅋㅋ

붉은돼지 2023-02-23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순정만화(그때는 여학생들이 보는 만화를 그렇게 불렀음)를 처음 봤는데요..이게 완전 신천지였습죠...당시 이재학, 하승남(맞나??) 류의 무협만화만 보던 고딩에게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는데요..!!! 와아아!!!!!!!! 여학생들은 만화도 이렇게 수준높은 만화를 보는구나!!!!!!..혼자 몰래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특히 즐겨보던 만화는 제 스스로 여류3대가로 칭한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이었습니다. 북해의 별, 불의검, 비천무, 굿바이 미스터블랙, 우리는 길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아르미안의 네딸들 등등등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눈물 콧물을 줄줄흘리며 봤던 기억이 납니다.

Falstaff 2023-02-23 14:0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전 김혜린 말고는 모르겠습니다. 복학하니까 후배들이 공포의 외인구단이니 만화들을 보더라고요. 저는 결혼하고나서야 좀 봤습지요. ㅎㅎㅎ
눈물 콧물, 이게 스토리, 이야기의 힘 아니겠습니까.

잠자냥 2023-02-23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 <비천무>는 명작이지요.
만화 안 좋아해도 비천무는 정말 몰입해서 본 기억이 납니다.
근데 하필 다부장님은 만활 안 보고 그 영화를!!!!!! ㅋㅋㅋ

Falstaff 2023-02-23 16:34   좋아요 1 | URL
오, 잠자냥 님. 오랜만입니다.
김혜린 좋아하시는 분이 많아요. 영화는 정말 개떡, 만활 다 망쳐버렸습니다.
 
약자들의 힘
안나 제거스 지음, 장희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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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제거스는 1900년 11월 19일 마인츠에서 네티 라일링이라는 이름으로 부유한 미술품 상인의 딸로 태어난다. 예로부터 미술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예술품, 보석 세공품, 고악기 등의 감정을 귀신같이 해내는 족속이 있었으니 이들은 일찍이 음악과 고리대금업에 관한 한 타의 근접을 불허한 바, 네티 라일링 역시 이들 유대인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을 보낸 시기를 보시라. 1900년생. 19세기가 점을 찍고 며칠 후 20세기가 열릴 시점에 태어난 네티는 10대 초반, 불타는 사춘기의 정점을 지날 무렵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인생의 황금기라고 일컫는 20대를 지나자마자 독일 전역을 집권한 나치들에 의한 탄압을 받으며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동족 수백만 명이 흰 연기로 변해 굴뚝을 통해 천국으로 날아가는 일이 생겨버린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세상 곳곳으로 방황한 이후 몸과 마음이 편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하필이면 네티 라일링의 시절에 극적인 핍박을 받게 되는데, 네티 라일링, 이제부터 안나 제거스라고 불릴 작가는 원래 그런 성향이 있기도 했고, 1925년에 헝가리 출신의 공산주의자이며 사회학자인 라슬로 러드바니와 결혼하고, 1929년엔 프롤레타리아혁명작가동맹에 가입하면서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만방에 고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집권한 나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이라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주리를 틀고 불태워 죽일 만한데 거기다가 공산주의자라고 뭐 잘났다고 커밍아웃까지 해버린 인간을 곱게 살려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제거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독일 탈출. 나치 역시 악마 같기는 하지만 바보는 아니라서 1933년 게슈타포를 보내 제거스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이전까지 출간한 이이의 작품들, 이 가운데엔 체포된 이듬해인 1934년에 소비에트연방에서 영화로도 만든 <성 바르바라 마을 어부들의 봉기>까지 있었지만 나치는 제거스의 모든 작업을 퇴폐문학으로 규정하여 금서 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광장에서 확 불을 싸질러버리고 만다. 여기서 제거스의 명이 다 했다면 지금처럼 유명세를 누리지 못했을 것. 제거스는 귀신같이 탈출에 성공해 파리로 망명, 반파시즘 잡지에 간여하며 투고와 창작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40년엔 파리가 함락되자 급하게 마르세이유로 옮겨 라틴 아메리카로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숨막히는 기다림을 시작하는데, 이때의 절박한 심정을 그린 소설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통과비자>, 내가 처음 읽은 안나 제거스다.

우여곡절 끝에 1941년 멕시코에 짐을 푼 안나 제거스는 그곳에서 반 파시즘 단체 하인리히 하이네 클럽을 만들어 의장으로 활동하고 이후에도 갖가지 독일의 반 파시즘 활동을 벌이는 한편 소설쓰기도 게을리하지 않아 공산주의자와 집시들을 가두어 놓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그린 역작 <제7의 십자가>를 발표한다. 이 책은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로 발간했다. 매우 재미있다. 내 경우엔 <제7의 십자가>를 읽고 난 다음부터 안나 제거스에게 유심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에 멕시코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고 1950년엔 당연히 동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제거스는 동독의 첫 번째 국가 훈장 수훈자라는 명예를 누리다가 1983년 6월,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힘들고 어려운 초중년 시절을 보냈으나,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산 삶이다.

《약자들의 힘》 역시 안나 제거스다운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모두 아홉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일곱 이야기는 반 파시즘, 즉 반 나치는 물론이고 반 프랑코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나머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이야기는 멀고 먼 시절의 독일 북부지역, 모진 기후와 척박한 땅에 살던 조상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머니>. 역자 장희창은 작중 주인공인 어머니 아가테 슈바이게르트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유사하다고 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그렇다고 동의하기는 좀 어렵다. 우리가 아는 제일 유명한 의식화된 어머니는 아무래도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겠다. 고리끼의 어머니와 이 책의 아가테와 유사한 점은 직접 공산주의 운동과 반 파시즘 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고리끼의 경우엔 어떠한 경로를 거쳐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의식화가 되어 있는 상태인 반면, 아가테는 아들이 반 파시즘을 위해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다는 것 하나로 그것이 옳은 일로 판단해 스스로 스페인 국제여단 독일분국으로 찾아가 간호사로 일을 한다는 거다. 아가테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딱 하나다. 아들이 확신을 갖고 투신했으며, 아들과 신념을 공유하는 아들의 친구와 함께 행동하는 것.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20세기 초에 라인강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알게스하임 시 변두리에 잡화점을 하는 과부 헬레네 덴회퍼가 딸 아가테와 함께 살았다. 아가테는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에 와서 숙제를 마치자마자 정원에 물 주고 잡초도 제거하지만, 과부 엄마를 도와 손님 시중 역시 그렇게 잘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시 외곽에 통조림 공장이 생기고 이에 따라 인구도 늘자 매상도 덩달아 늘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과부 살림에 은이 서말이 넘었다. 그러나 때를 맞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엔 군인들이 몰려들고 새로 들어온 조차장을 꽉 메워 잠시 호황을 맞았지만 곧바로 불황이 닥쳤다. 그래도 원래 내핍생활에 이골이 난 터라 속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부인이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행상을 나갔다가 그만 덜컥 폐렴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만다. 가냘픈 아가테 혼자 남았으나 사회 전반이 워낙 황황해 사람들은 아가테와 덴회퍼 부인을 헛갈려 하며 그냥 저냥 시간이 흘러갔고, 원래 조차장에서 일하던 슈바이게르트 씨가 전쟁이 끝나고 절름발이 홀아비가 되어 나타나자 그의 아내가 되어, 공부 잘하는 아들 에른스트를 낳았다.

에른스트는 겉으로 보면 불량스럽기 짝이 없는 라인홀트 샨츠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어려서 잃은 에른스트는 샨츠의 아버지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영향을 받았는데 엄마 아가테 눈에는 그게 참 싫었다. 그렇다고 아들의 의견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내버려두었을 뿐. 엄마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주어 라인홀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가고, 에른스트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프랑크푸르트의 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사이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키 작은 아마추어 화가가 나치 당을 만들어 집권을 하고, 가끔 들르는 친절한 아들 에른스트는 집에 와서 즐겁게 지내다가 히틀러 이야기만 나오면 여태 보지 못한 정도의 흥분을 하며 비난을 퍼붓고는 한다. 그러다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벽보와 삐라 사건이 터지고, 에른스트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잠수를 타게 되고,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소식이 끊어진다. 2년 후, 전에 프랑스에서 온 편지의 우표 스탬프 주소를 보고 아들을 찾아 무작정 파리를 거쳐 툴루즈의 그라페 도르 호텔로 길을 떠나게 되는 아가테 슈바이게르트. 그러나 그동안 에른스트는 이미 스페인으로 떠난 상태. 어머니는 가진 돈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그라페 도르의 사장에게 맡기고 이번에도 홀몸으로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아들이 부상을 당해 차를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야전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고생스럽게 다시 그곳으로 가 드디어 상봉을 한다. 이때까지는 몰랐지. 그게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

불행하게도 팔랑헤당이 공화국을 점령했을 때, 제일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간호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향해 피레네 산맥을 넘은 아가테. 프랑스의 수용소에서 두 번째 만난 아들의 막역한 친구 라인홀트는 아주머니에게 자신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로 갈 것을 종용하자, 아들의 친구들, 뜻을 같이 했던 이들과의 동행을 기꺼이 승낙한다. “그래, 그래. 너희들과 함께 가야지.” 하면서.

훌륭한 책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소비에트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어머니와 비교해 훨씬 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안나 제거스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적당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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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2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약자들의 힘을 너무 인상깊게 읽었기에, 누구에게든 두루 추천하고 있습니다만...

첫번째 단편의 주인공이 아마도 아가테였던 거 같고 리뷰 쓰신 내용을 보니 기억이 납니다...첫 단편이 저는 이 단편집 중에서 제일 별로 였지만(상대적으로) 나머지 단편들이 모두 좋았습니다! 특히 어떤 학자와 대화하는 단편이 매우 인상깊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데, 워낙 읽은지 모래되어서 주인공과 플롯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전 단편들이 고루 좋다는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제7의 십자가 읽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약자들의 힘이 더 재밌다는 인상입니다..^^

Falstaff 2023-02-21 14:31   좋아요 0 | URL
저는 십자가가 좀 더 재미있는 걸로.... ㅎㅎ
세상 사람들의 감상이 다 같으면 무슨 재미겠습니까. 그죠? ^^
 
의인법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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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곳은 상수동의 어느 카페였다. 3월이었나 4월이었나 어쨌든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이 출간될 무렵의 봄날이었고, 우리가 모여 있는 테라스는 너무 따뜻했다. 후장사실주의라는 모임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볼라뇨 전집 편집자, 소설가 셋, 펜싱 선수처럼 생긴 소설가 지망생이 모인 자리였다. 애 딸린 서평가도 있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오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p.248)


​이 장소에 모인 “소설가 셋”은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지만 나이 순으로, 정지돈, 박솔뫼, 오한기이었을 확률이 높고, 소설가 지망생은 작품집 《프리즘》을 낸 이상우이었을 것이며, 훗날 이들 연대에 동참하는 애 딸린 서평가는 《의인법》의 해설을 쓴 금정연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20대 초반의 젊디젊은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내장사실주의”는 초현실주의 등의 전위문학을 추구했다. 이들은 차차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나름대로 글을 쓰는 시늉도 하고, 조국의 변두리에 남은 한 시절 전위문학의 대표선수들을 찾아보는 등의 작업을 하는데, 위 인용문에도 나왔다시피 <2666>이나 <야만스런 …> 기타 숱한 볼라뇨의 작품에서 그대로 노출하는 볼라뇨 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의인법》에서 주장하듯이 이미 오한기는 볼라뇨에 대한 열광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태였(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우의 《프리즘》처럼 책 전반에 폭력과 섹스의 소스가 현란하게 살포되어 있다.

책의 제일 앞에 실린 작품은 오한기의 데뷔작인 <파라솔이 접힌 오후>다. 1983년이고, 작가 오한기가 태어나기 2년 전이었으며, 미국 “텍사스 주 외곽에 위치한 브라니스 모텔에서 컨트리 가수 W가 시체로 발견된” 날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제 우리 문학도 어느 정도는 세계화되어 있어서, 무대가 텍사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 한 끗 차이로 후장사실주의의 좌장 자리에 있는 정지돈이 쓴 흥미로운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의 무대도 1950년대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서 나는 자동적으로 1983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로 죽은 컨트리 가수 W, 미국에서조차 지명도가 거의 없어서, 시골 도시의 바에서나 공연을 할 뿐이고, 생전에 취입한 음반도 딱 한 장에 불과한 무명가수를 거론하는 바에야, 무대가 적어도 미국 땅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상가 저 구석에 자리잡은 고서점의 주인이 W의 광팬이라서 그가 손에 쥐고 늘 읽는 책의 제목이 바로 <파라솔이 접힌 오후>이며, W에 관한 평전이다. 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W와 별 상관없이 오한기가 원하는 대로 W에 대한 상상에 의존하기 시작하며, 이 와중에 오한기는 별의 별 거짓말을 벌여 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무 기초적이어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범했다고 봐야 마땅한 “시점의 혼란”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린다. 고서점 사장이 하도 W에 경도되어 있어 W의 버릇을 모방하다가 급기야 자신의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 두 가지 있다는데, 처음 예로 든 “눈두덩을 긁으며 머릿속으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는” 행위는 고객이었다가 아르바이트 일을 하게 된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자연스럽지만, 두 번째로 예를 든 “성관계 중의 습관”이라고 단정하는 건, ‘나’가 사장의 정사 장면을 봤다는 묘사가 없이는 반칙이다. 요즘엔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무척 많아서 이런 것에 좀 관대한지 모르지만 20세기였다면 심사위원이 여기까지 읽고 원고를 내려놓았을 확률이 95%이다.

책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맨 앞에 실린 <파라솔이 접힌 오후>는 섬과 비슷하다. 외딴 섬. 몇 줄 읽지 않아 나는 자동적으로 딱 한 권 읽은 정지돈이 생각났는데 적어도 이 단편의 앞부분에서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출신이라고 구라를 치는 W를 좇는 작업이 제법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W와 KKK단의 보스 헤링턴(이란 작자),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는 “바카렌토 증후군”, 포르노 소설 <혀끝으로의 여행>, <베테랑 형사 뒤퐁> 등등, 무수한 농담을 시현한다. 심지어 같은 주의(ism) 동인이며 작품의 해설을 쓴 금정연도 눈치를 보니까 지구상에 “바카렌토 증후군”이란 것이 진짜로 있다고 믿는 기색이다. (믿지 않았거나, 바카렌토 증후군이란 게 진짜로 있으면 미안하게 됐다.)


​이 <파라솔이 접힌 오후>라는 섬에서 나와 다른 집합으로 넘어가면 모든 작품이 서로 연결이 된다. 두 번째 단편 <더 웬즈데이>부터 마지막 <새해>까지 모든 작품은 폭력과 살인과 섹스와 강간과 가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게, 좀 까진 독자인 내 눈에는 작가나 등장인물들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위악”을 떨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진짜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작품의 조인트 기어로 역할하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은 시인으로 나오기도 하고 소설가로 나오기도 하는, 하여간 작가의 행위를 하는 “한상경”이란 인물이다. <파라솔…>을 제외하고 한 작품도 빼지 않고 다 등장시키면서도 오한기의 농담, 지독한 농담은 계속된다. 심지어 엄마뻘인 여성 시인과 같은 이름의 여자와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하고, 체인징 파트너도 하고 그렇다. 2012년이니까 최승자의 나이 환갑 맞지? 이때 오한기 나이 스물일곱이니까, 아들이라도 늦둥이 아들뻘인데, 뭐 좋다, 좋아. 픽션인 걸 뭐. 글 써서 먹고 사는 동네에선 이런 게 다 뭉개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겠다.

최승자보다는 덜 심한 농담이지만 오한기는 또, 알고 있는 독자들만 알고, 나머지는 몽땅 속아버려라, 라고 휙, 하나를 던져버린다. <유리>라는 작품에서는 시체를 묻는 행위가 나온다. “시체를 묻어봤는가?” 작가 ‘나’가 소설을 쓰다가 이 장면을 묘사해야 해서 작가는 “시체를 묻어봤는가?”라고 심각하게 자문한다.


​“백민석도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총잡이가 아닌 사람이 총잡이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지 않았나. 존 파울즈도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이태준이 만들어낸 『장한몽』의 도시 빈민들처럼 공동묘지를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라고 쓰는데, 백민석과 존 파울즈는 그렇다 해도, 취직이 안 돼 전전긍긍하는 친구에게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 해체작업 일거리를 주는 <장한몽>은 이태준이 아니라 이문구가 명동성당 근처 다방에서 하루에 원고지 백 장씩 메꾸며 쓴 소설이다. 비록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에 밀려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문구 표 골계미가 탁월한 장편인데 그걸 슬쩍 이태준으로 바꿔버렸다. 속으로는 “아는 놈만 알아라.” 이렇게 생각했는지 누가 알아? 금정연도 몰랐는데. 오한기가 책을 통해 자주 거론하던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 조이스 캐롤 오츠다. 차라리 이이가 쓴 무덤 파는 사람을 칭하는 제목 <사토장이의 딸>을 거론하지 그랬을까?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오한기 식의 농담으로 꽉 차 있는 작품집. 아쉽게도 그의 농담은 내 코드와 맞지 않는다. 다른 권총도 아니고 콜트 45구경으로 사람의 대가리를 날려버리며,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변태 가학적 섹스, 하여간 겉으로 보면 창작행위를 위한 것이지만 과도한 역경의 호소, 토마토 즉 술을 마셔도 토하고 마시고 다시 토할 정도의 행위 같은 건 영 아니라서 읽다가 말려고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굳이 악착같이 끝까지 읽은 건, 이제 오한기도 읽어봤으니 일단 후장사실주의자, 이 장난꾸러기들의 작품들을 한 번씩은 다 경험하게 된다는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장난꾸러기들이라는 사실. 나처럼 입 험한 독자의 축복을 받아준다면, 그대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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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2-18 07: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팬텀 이미지였나 거기서 오한기 등장하는 부분도 웃겼는데요 ㅎㅎ저는 의인법은 안 보고 나중에 나온 가정법이랑 토끼머리에게랑 인간만세를 봤는데 의인법보다는 순한 맛이었어요 ㅋㅋㅋ한국 문학의 마릴린맨슨 같은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맨슨을 안 좋아하게 되서 지금 읽으면 오한기 욕하지 않을지...ㅋㅋ골드문트님 뭔가 안 읽은 책 못 읽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같으십니다ㅎㅎㅎ

Falstaff 2023-02-18 11:23   좋아요 3 | URL
ㅎㅎㅎ 지금까지 이 사람들의 책은 다 한 권 씩만 읽었는데, 색다르고 좋더라고요. 요즘 우리 작가들 작품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조금 멀리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실제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거 같다라고요. ^^

유부만두 2023-02-18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그 모임 명칭 나오는 인용부분을 여러 곳에서 읽고 책에 대한 궁금증보다 싫은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장난꾸러기, 농담의 선을 (있다면) 넘나들며 노는 것 같군요. 그런데 어쩐지 좀 구식 아닌가 싶고요. (읽지도 않은 주제에 투덜댔습니다)
윗 댓에 나온대로 골드문트님은 안 읽고 못 읽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같아요.

Falstaff 2023-02-18 11:25   좋아요 3 | URL
저도 명칭이 싫습니다. 좀 튀어 보이려고 그런 거 같지 않나요? ㅎㅎㅎ 젊은 시절에 지은 이름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젠 후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다 그렇게 사는 거죠 뭐. 저질러 놓고 나중에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또 저지르고 또다시 후회하고..... 인생이 뭐 별 겁니까. ㅋㅋㅋㅋ

moonnight 2023-02-18 08: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ㅎㅎ 너무 귀여운 묘사입니다. 반유행열반인님께 동의하게 되네요^^

Falstaff 2023-02-18 11:25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어려서부터 귀엽다는 얘기를 무척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건수하 2023-02-18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후장사실주의 명칭에서 좀 거부감을 느꼈고… 아주 흥미롭진 않더라고요.

골드문트님은 책 대신 읽어주는 요정~ 샤라랑 😊

Falstaff 2023-02-18 11:27   좋아요 3 | URL
맞아요, 모임 이름을 좀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지돈하고 박솔뫼는 괜찮더라고요.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만. ^^

수이 2023-02-1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장사실주의, 귀엽지 않아요? 전 이름 처음 듣고 참 개떡같이 지었구만, 근데 또 듣는 순간 머릿속에 뿅 박히더라구요.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뭐든지 다 쉬이 까먹는 정보과잉화의 시대에서. 듣는 순간 이름이 뿅 박히니까 이런 걸 다 예상하고 지은건가 그들은! 싶었어요. 오한기는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지만 정지돈이랑 금정연이 하도 말해서 아 읽은 거 같아 라고 착각하곤 했는데 골드문트님 말씀 들어보니 안 읽을 거 같아요. 박솔뫼도 한 번도 안 읽었다!! 박솔뫼는 읽어봐야지.

Falstaff 2023-02-18 13: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차라리 항문사실주의, 했으면 조금은 더 예쁘게 봐줬을 거 같아요. 아니면 똥꼬사실주의라도. ㅋㅋㅋㅋ
박솔뫼는 이번달에 한 권 더 읽었습니다. 며칠 후에 독후감 올릴 거예요. ^^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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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서울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하고 서울예대 문창과도 졸업했다. 흠. 병역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병역필이었으면 하여튼 험한 시절 살았겠다.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이면 대기업이나 연봉 빵빵한 금융회사에 이력서만 내면 합격, 하던 시절이 방금 끝나고 이젠 외환위기에 돌입해 아무리 명문대학을 졸업했더라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소위 IMF 시절을 만났었구나.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 <퀴르발 남작의 성>이 당선되어 34세에 등단하고, 2010년 “문학과사회”를 발간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첫번째 단편집을 찍으니 오늘 소개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인상깊게 읽었다. 책을 읽으며 종종 영국 고딕 소설의 큰이모 앤절라 카터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글 좋은 현대작가 답게 카터보다 더 매력적인 현대성까지 장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독후감에서 자주 “…라고 생각한다.”, “…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책 읽기에 전문성이 턱도 없는, 잘 봐주면 딜레탕트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잘 안 봐주면 당연히 어림없는 아마추어이고. 잘 봐달라는 부탁 아니다. 아마추어로 사는 게 뭐 어떤가.)

표제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으면서, 정말 퀴르발 남작에 관한 유럽의 민담이 있었는지가 궁금했고, 있었다면 퀴르발 남작이 젊음과 영생을 위해 17세기에 어린이를 사서 아이들의 고기와 내장을 요리해 먹는다는 내용의 소설을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페로”가 1932년에 미국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을까? <밤마다 페로에는>이라는 극작을 쓴 ‘미셸 도이치’라면 좀 수긍이 갈 텐데 어딘지 ‘밤마다 페로에’와 ‘미셸 도이치’의 혼용 같고 좀 의심스러웠다(이건 아닐 거다). 미셸 페로가 쓴 소설을 1953년에 명감독이라는 에드워드 피셔가 톱스타 제시카 헤이워드를 캐스팅해 찍었다고? 에드워드 피셔 감독? 거기다가 제시카 헤이워드라니 흠, 수잔 헤이워드가 아니라 1950년대에 제시카 헤이워드라는 여배우, 명감독 에드워드 피셔라는 작자(들)이 있었다고? 세월이 흘러 2004년에 일본 감독 나카자와 사토시가 에드워드 피셔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일본식으로 각색해 <도센 남작의 성>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킹을 한다? 나카자와 사토시라는 인물도 아마 분명히 없을 거야. 라는 의심이 팍팍 들었다. 지금 “의심”이라는 명사를 사용했다고 나쁜 의미의 의심이라 단정하지 마시라. 나는 최제훈에 의한 거대한 거짓말에 다분히 찬사, 갈채를 보내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라고 겁을 주고는 했었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겠지만 하여튼 전에는 그랬다. 최제훈도 어려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자랐을 터. 작가는 더 흉측한 인물 하나를 만들어 퀴르발 남작이라 짓고, 어린 아이, 반드시 어린 아이여야 하는데, 자신이 아이들의 육신을 굽거나, 삶거나, 찌거나, 튀겨 먹음으로 해서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남은 생과 젊음을 얻을 수 있다는 동종주술적 의식ceremony을 했고, 이 결과 무려 3백살에 가까운 세월동안 젊음과 영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유럽식 동화를 하나 만든다. 그래 미운 다섯 살 아이가 빽빽거리고 울면, 퀴르발 남작이 지금 온대, 울어라 울어, 더 울면 너 와서 잡아가라고 부를 거야. 라고 겁을 주고는 했다고 시치미 뚝 떼고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구라를 치거나, 혹은 ‘이 정도야 뭐 진짜 있을 수도 있으니’ 소개를 한다.

그리고 내 의견으로는 나머지는 전부 픽션, 거짓말이다. 물론 충분히 있음직한 거짓말. 그리하여 저 17세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민담에서 시작해 드문드문 지워진 진실을 픽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최제훈의 표제작은 당연히 한 시절의 기념해야 하는 멋있는 작품으로 위位를 누려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이토록 뻔뻔하게 할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독자들은 또 두번째 실린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도 열광하는 것 같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쓴 스코틀랜드 의사 코넌 도일은 과학수사와 정교한 추리 대신 엉뚱하게도 크고 비대한 몸을 이끌고 심령술에 관해 연설하다가 하트 브레이크로 숟가락을 놓고 마는데(줄리언 반스, <용감한 친구들> 참조하시압), 최제훈은 그가 런던 근교의 사우스 시의 민박집에서 흉기로 스스로의 경동맥을 잘라 자살했다고 딱 선언해버린다. 이것 역시 무죄다. 아무데서나 죽으면 어떤가. 정작 독자가 기함을 하는 건, 도일 경의 죽음을 수사하는 탐정이 바로 셜록 홈즈라는 사실. 홈즈는 성격상 소설은 하나도 읽지 않아서 죽은 스코틀랜드 의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자살은 틀림없이 자살로 확신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죽었을지 고민 고민하다가 역시 추리가 아닌 떠오르는 영감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이를 알리지는 않는다. 홈즈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전한 사람이 친구이자 의사인 왓슨이라고 알고 있다. 이 작품도 재미는 있다. 도일 경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작가-등장인물의 관계의 역행.

이런 사고의 역행은 자연스럽게 최제훈으로 하여금 다른 작품 속으로 직접 개입하는 순서로 발전한다. 아니면 계속 발전해온 것이 <셜록 홈즈…>이거나 <퀴르발….>일 것이다. 최제훈의 다음 마수에 걸린 작품은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 셸리를 읽어본 독자는 누구나 <프랑켄슈타인>이 그리 녹녹하지도 않고, 녹녹하기는커녕 진짜 철학이 스며든 명작 반열의 책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최제훈은 셸리의 원작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 “괴물”이 영화, 연극, 뮤지컬, 만화 등을 통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어우어, 우워워 하는 동물성 비명만 지를 줄 아는 진짜 괴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최제훈은 직접 지하에서 잠자고 있는 (보기와는 다르게)까칠한 성격의 원작자 메리 셸리를 소환해 인터뷰도 하고, 작품 가운데 슬며시 사라진 에르네스트, 그러니까 괴물의 창조자 빅터의 동생인 에르네스트 프랑켄슈타인을 불러내 주구장창 사빌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셸리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든 월턴 선장과 괴물의 실제 여부를 따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건 사실 그리 새롭지는 않다. 예컨데 한 시절 <투란도트>가 유행했을 때, 칼라프 왕자가 왜 목숨을 걸고 중화의 공주 투란도트에게 수수께끼 시합을 신청하고, 어떻게 해서 풀기 거의 불가능한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겠느냐, 하는 논의가 온라인에서 있었던 걸 기억하면 그렇다. 그게 감상자/독자의 권리이기도 하니까.

또 이 작품집에서 다른 중요한 방면은 다중인격 또는 선택적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이제 21세기 서울 시민들이 등장한다. 서울시민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도시인들이 등장해서, 주로 험한 꼴을 저지르고, 당하고 그런다. 하지만 이거라도 모른 척, 시미치를 떼야지 독후감이랍시고 재미있는 것을 미리 다 말해버리면 정작 진짜 읽어보실 독자는 재미가 들허잖어? 그렇겠잖어? 그러니 오늘은 내가 참는다. 얼른 독후감 마치고 조기 구이에 쐬주도 한잔해야 허겄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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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2-16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의 위시리스트 먼저 섭렵해주시는 골드문트님 ㅋㅋㅋ이 책은 저랑 제일 가까운 곳에 꽂혀 있습니다. 4년째 꽂혀만 있네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2-16 08:26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은 작년 1월 24일에 사서 올해 1월 31일에 읽었군요. ㅎㅎㅎ 도서관 다니기 시작하니까 사 놓은 책 읽기가 쉽지 않네요. ^^

coolcat329 2023-02-16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제훈 작가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발한 상상력을 지닌 멋진 작가였군요. 작가의 책들을 대충 살펴보니 미스터리한 내용들이 다 재미나 보여요. 저도 최제훈 작가의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3-02-16 10:34   좋아요 0 | URL
옙. 이 책 재미난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3-02-1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이 책을 만났을
때, 기대주라고 생각한 작가였
지만 후속으로 나오는 책들이
모두 데뷔 소설집만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래>로 인생작
을 찍은 천명관 작가 생각이
났습니다.

Falstaff 2023-02-16 10:34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 작품은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것으로. ㅎㅎ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3-02-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독특한 발상 좋아합니다. ^^

Falstaff 2023-02-16 22: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럼 읽어보셔야지요. ^^

그레이스 2023-02-1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딕소설이 생각나는 제목들이네요.
특히 퀴르발 남작.. ^^

Falstaff 2023-02-18 15:41   좋아요 1 | URL
예. 오죽하면 제가 앤절라 카터 언니까지 소환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