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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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정말 오랜만에 읽는 불가리아 소설가이다. 불가리아는 14세기 말에 튀르키예에 점령당해 무려 5세기 가까이 식민지배를 당한 것이 치명적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불가리아 작가는 원래 직업인 극작가, 소설가, 시인으로의 작품보다는 1977년에 출간한 자서전 <구원받은 혀>로 널리 읽힌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 정도 밖에 없다. 불가리아는 우리나라가 개항을 한 1876년에 탈 식민지 무장봉기의 횃불을 올려 79년에 튀르키예의 예속에서 벗어났으나 20세기가 벌써 자리잡은 1908년에야 독립국가로 공인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문학적 발전을 시작할 수 있었던 불가리아.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그 땅은 다시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또 곧바로 볼셰비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넓게 자리를 잡았다. 당시의 문학은 어느 정도 정치에 복무를 해야 했으니, 1920년대 불가리아의 정권을 잡은 파시스트의 백색 또는 적색 테러를 피하기 위해 몸조심을 하던 문인들은 각기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했을 터. 이렇게 살다가 1944년에 본격적인 불가리아 사회주의 국가가 형성되고 문학판은 뒤늦게 반 나치 저항문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원래 문학의 특기 가운데 하나가 뒷북 치는 거다), 곧바로 냉전과 무시무시한 검열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우리 귀와 눈 가는 곳에 불가리아 작가들이 들어올 바늘 틈이라도 있었으랴. 불행하게 비슷한 발칸 지역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나라들이 다 비슷한 신세이긴 했다.

  그러다 1968년이 오고, 얌볼 지역에서 68년생이되 빠른 68년생이라 원숭이띠가 아닌 양띠 남자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출생한다. 출생 연도부터 남다르다. 전 유럽 지역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사조가 젊은이들의 피를 가열하여 세상 만방에 폭력을 수반한 집회와 시위를 생산한 독특한 시절을 굳이 선택해 세상으로 비집고 나온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당연히 태어날 때는 몰랐겠지만, 소피아대학에서 불가리아어 문학과(국문과)를 졸업하고 불가리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시절, 즉 고스포디노프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시절에 그의 조국인 불가리아를 위시해 동유럽에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혁명, 벨벳 혁명의 폭풍이 불어 닥쳤으며, 그는 혁명의 훈풍을 가슴 깊이 호흡하면서 그간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의 심장을 구속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첫 세대로 불리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는, 행운의 열쇠를 입에 물고 태어났던 거다. 몇백 년 만의 첫 세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처음에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해, 두 권 모두 불가리아 국가 문학상을 받는 기염을 토한다. 이어 첫 소설작품인 <자연소설>은 신인작가로 매우 예외적이라 할 수준이었는지 무려 21개 나라에서 번역 출간하는 놀라운 히트를 쳤다. 단편소설집과 그래픽노블로도 이름을 냈지만 그건 그냥 건너뛰고, 두번째 소설 <슬픔의 물리학>도 불가리아 국가 문학상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특히 독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아 고스포디노프가 유럽 변방인 불가리아에서 드디어 유럽의 중심무대, 영국,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각지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를 마련한다. 실제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인 스트레가-유럽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최종 숏리스트까지 올랐다가 장렬하게 미역국을 마신다. 2020년에 초판 출간한 세번째 장편 <타임 셸터> 역시 출간 당시부터 유럽 경향 각지의 이름이 있는 작가라면 거의 예외 없이 상찬을 쏟아부어 2021년에 드디어 스트레가-유럽 상을 받았고, 불가리아-영어 전문 미국인 역자 안젤라 로델이 번역해 2023년에 부커-인터내셔널 상까지 휩쓸어, 우리나라에 단 한 권 번역해 나온 고스포디노프의 부커-인터내셔널 판, 그러니까 불가리아어-영어-한국어 삼중역 판을 읽기에 이르렀다.

  하여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대단하긴 대단하지? 책만 썼다하면 국제적 히트 상품이니 이거 원.


  지구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을까? 놀라지 마시라. 17세기 중반 아일랜드 어셔 주교는 그게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토요일 오후 6시경이라고 딱 못을 박았단다. 17세기면 1600년대. 유럽은 중세에서 갓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사제들이 쌔고 쌨었다. 팍스 바티카나. 이에 비해 버지니아 울프는 1910년 12월을 기점으로 인간의 기질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얼핏 보기에 다른 어떤 날과도 다르지 않은, 우중충하고, 춥고, 신선한 눈 냄새를 띤 날일 뿐이지만 무언가의 봉인이 해제되었고, 이를 극소수의 사람만이 감지해냈다고 한다. 반면에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1939년 9월 1일 이른 아침에 인간의 시간에 종말이 닥쳤다고 주장한다. 수십만 명의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에 밀집해 있다가 드디어 첫번째 포성이 울린 시간이다.

  물론 1939년 이전, 1914년 6월 28일의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계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절명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을 울리게 만든 사건도 있었으며, 전쟁 중에는 영미 폭격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 말고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서 터진 두 발의 원자폭탄에 의한 집단 학살도 있었지만 유럽 작가의 시각에는 그깟 동양인 대량 학살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전쟁 후에는 소비에트에 의한 철권 독재, 그리고 냉전으로 이어졌다. 철의 장막 안에서는 동구 공산권에서도 자유해방 운동을 탱크와 장갑차의 캐터필러가 압살했으며, 바로 직후인 1968년에는 마르쿠제의 수업을 받은 청년들이 반전과 마리화나와 자유주의와 신 사회주의, 그리고 히피 운동을 세상 만방에 골고루 살포했다. 1980년대 들어서 비틀스와 엘비스가 저물어가는 사이 북구의 아바ABBA 중에 선택을 강요당할 때 속으로는 노랑머리가 좋지만 겉으로는 갈색머리가 더 낫다고 해야 가오가 죽지 않는 시절이 있었고, 바웬사는 자유노조 운동을 시작했으며, 결국 연대기가 끝나기도 전에 각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우상과 동상이 길거리에 자빠져 우상의 얼굴에 뭇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히는 참담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미국 공군에 의한 한 밤중의 폭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고, 파괴와 폭음과 살점이 튀는 참상이 아니라 전쟁은 그저 화면 속에서 초록색으로 잠깐 명멸하는 깜박임에 불과한 현상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불가리아, 여전히 그저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밖에 되지 않음에도, 유럽연합의 일원이며, 무엇보다 순정한 백인의 의식에서 중동 아시아인들의 파괴와 학살까지 염두에 둘 생각은 없었다. 작가의 1990년대는 무엇보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특히 아일랜드의 국부가 갑자기 증가하여 아일랜드의 신화시절부터 통틀어 가장 부유한 국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시절이었을 뿐. 그렇다고 세계의 패권이 여전히 유럽에 남았다고 오해할 정도는 아닌 작가는,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다분히 3세계 인종의 입장에서 말한 것과 달리,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유럽에 국한해 20세기를 10년 단위로 정리했을 뿐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으며, 그 항변이 옳다.


  주요 등장인물은 화자 ‘나’와 가우스틴. 문제는 가우스틴이다.

  자신의 이름을 투명 망토처럼 사용하는 가우스틴. 홈리스를 보면 그들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습관이 있는데, 자기도 머지않아 그들과 같은 대열에 합류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다. 자신이 “시간의 부랑자”였으니까. 그는 부자다. 자신이 처한 형이상학적 역경이 물리적 고난으로 번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창창한 액수의 현금을 지니고 있을 정도.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노인정신의학과 의사라는 직책이다. 노인들, 특히 치매나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차 시간을 상실해가는 노인들의 이야기에서 일종의 대피소shelter를 찾는 듯하다. 그의 클리닉은 스위스 취리히 산골에 있다.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지만 세상의 돈 많은 노인들이 말년을 맞아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 속에서 죽음을 맞기 위하여 병실을 채운다.

  가우스틴을 처음 만난 곳은 9월초 바닷가에서 열린 오랜 전통의 문학 학회였다. 모두 글을 쓰고, 독신이며 책을 내지 못한 20~25세의 청년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세상 등진 지 오래였으며, 한달 전 어머니는 세번째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감행해 떠났다. ‘나’는 가끔 지난 세기말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복고취향이 있어, 가우스틴이 1937산 토마시안 더블 엑스트라 담배를 세 갑 가지고 있는데 사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즉시 구입했다. 가우스틴은 1928년에 제작한 독일제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여 주어 한 모금을 깊게 빨았는데, 정말 독한 맛이었다. 이렇게 친해졌다. 그는 발칸 산맥 기슭 작은 마을의 버려진 빈 집에 살고 있다고 했으며, 전화가 없어서 우편으로만 연락이 가능하다 했다. 20대 시절에.

  그러나 독자들이여, 믿지 마시라. 초장에 나온다. 하지만 ‘나’가 분명하게 선언함에도 그게 진실인지는 책을 거진 다 읽을 때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눈 여겨 읽게 되지 않으니, 무엇인가 하면, 작가이자 화자 ‘나’는 처음에 자신의 머리 속에서 가우스틴을 만들어냈고, 이후 육신을 갖춰 내 앞에 나타난 존재로, ‘나’와의 공통점은 과거에 대해 집착하는 성향이란다. 하여간, 세월이 흐르고 흘러, 30년 이상이 흘러 애초에 아우구스티누스와 가리발디의 이름을 합해 가우스틴이라 이름지은 그는 취리히 산골에 노인정신의학 병원을 짓고, 1층에 1940년대 실room (지하를 공습 시 대피소로 사용할 수 있어서), 1960년대 실은 2층, 다락방은 80년대와 90년대를 위한 예비실로 건설을 하여 현재부터 순차적으로 과거를 잊기 시작하는 치매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노인들을 치료하고 있다. 이렇게 본문을 시작한다.

  각자 지난 시절의 십년간. 어느 시절이 가장 좋았을까? ‘나’는 로테에게 묻는다. “로테, 당신이라면 어느 시기를 선택할 거 같아요? 60년대, 70년대, 아니면 80년대?” 로테는 잠시 말이 없다가 최선의 답을 말한다. “저는 모든 시기의 열두 살 아이이고 싶어요.” ‘나’의 대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도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다. 지금 시절이 제일 좋다. 이렇게 계속 늙어가다 그리 늦지 않게 삶을 접는 게 소원이다. 지금, 현재가 가장 행복하니까.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가적 상상력은 이제 단계를 넘는다. 유럽 연합은 각 국민들의 최선의 삶을 위하여 10년 단위의 특정 세월 속에서 국민들이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게 만들려고 모색한다. 그러다가 모든 국민들, 유럽연합국도 아니며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조차 예외없이 국민투표를 거쳐 국민들이 스스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선택하게 만드는데, 이건 절대로 투표에 의하여 결정할 수 없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우민정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 그러나 유럽국가들은 했다. 소설이니까 했겠지만 하여간 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시절로 모든 것이 돌아가면, 유럽은 유토피아가 되는 것일 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어느 경우든지 하여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상상력은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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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07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찰스 부코스키, <할리우드>
화요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쿠아 비바>
목요일. 손택수, 《목련 전차》
금요일. 힐러리 맨틀, <플러드>

coolcat329 2025-02-07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렵다는 글이 몇 개 보이는데 폴스타프님은 워낙 배경지식이 풍부하시니 안 어려우셨겠죠?
루마니아의 현대사를 알고 읽어야 좋겠지요?
이 작가 느낌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5-02-07 07:44   좋아요 2 | URL
배경지식이랄 건 없고요, 직접 겪어본 시절이 있는지라 이해가 좀 쉬웠지않나 싶네요. 다른 작품도 얼른 번역해 나왔으면 좋겠는데 불가리아 언어를 번역해 줄 역자가 있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

바람돌이 2025-02-07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관심가는 책이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더 보고싶어지네요.
사실 전 안돌아가고 싶은데 사람들마다 진짜 다를텐데 이 문제를 어덯게 풀어나갓을지 긷됩니다.

Falstaff 2025-02-07 19:12   좋아요 1 | URL
너무 명백한 스포라서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일러드리지는 못하겠네요. ㅎㅎㅎ
저는 재미나게 읽었는데 독자평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 잠시 멈칫, 하기도 합니다.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2025-02-0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0 0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5-02-09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Falstaff 2025-02-10 06:1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뜻이 같으니 더 반갑습니다!

yamoo 2025-03-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별5개 주셔서 디금 앍고 있은데...첨 10여 페이지는 궁금증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에 50쪽를 넘겨 70페이지에 다다르고 있는데 급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다는..^^;;

Falstaff 2025-03-24 15:47   좋아요 0 | URL
아이구... 죄송스럽게 됐구먼요.
다른 독자들의 평을 좀 참고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독자마다 호오가 많이 갈라질 작품인 걸요.

yamoo 2025-03-24 17:44   좋아요 0 | URL
헛! 그렇군요~~
그래두 뽈님의 평을 믿어 봤은데.....
조금 더 읽어 봐야 겠으요~
반까지는 읽어야겠쥬~~^^;;
 
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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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천쓰홍의 작품은 이것을 읽으려 했다. 근데 누군가 먼저 희망도서 신청을 하는 바람에 지난 해 대신 읽은 책이 <귀신들의 땅>. 이 작품 <귀신…>에서 주인공 톈홍은 베를린에서 독일 남자 T와 동성결혼 상태로 지내다가 불운의 손톱에 채여 T와 격투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오랜 복역을 마친 후 다시 타이페이로 돌아온다. 타이페이에 남은 5녀 2남 형제 자매들의 신난한 삶을 만나는 지긋지긋한 삶의 이야기.

  천쓰홍 자신이 타이완 시골에서 아홉째 자식으로 태어난 퀴어 소설가, 영화배우, 역자의 명함을 가진 인물로 <귀신들의 땅>의 주인공 톈홍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에서 동성 결혼 상태로 지내고 있다. 만날 베를린만 무대로 하기가 좀 그래서 <67번째 천산갑>에선 장소를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 475페이지까지 읽어야 이름을 알 수 있는 ‘그’ 천다웨이와 ‘그녀’ 라이핀옌이 주인공인데, 이렇게 그와 그녀라고 써 놓으니까 둘이 뜨겁게 연애했을 거 같지? 아니다. 라이핀옌이 완전히 이성애자인 것과 반대로 천다웨이는 완전히 동성애자라서, 둘은 어린시절 아역배우였는데, 함께 매트리스 광고를 찍다가 자연스럽게 잠을 자는 장면을 찍기도 했을지언정 이후 세월이 더 흘러 몸도 익을 만큼 익고,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둘이 만나면 기꺼이 같은 침대에 올라, 여전히, 여전히 푹 잔다. 잠만 잔다.

  원래 그렇단다. 여성 이성애자들은 남자 동성애자 친구를 게이미(Gay蜜)라 부른단다. 게이 뒤에 꿀 밀蜜자를 붙였으니 나쁜 뜻일 리 없다. 실제로 이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남녀 사이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서로의 마음을 잘 소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천다웨이는 성 소수자로 타이완에서 버티지 못하고 파리로 거주를 옮겨 몇십 년째 8제곱미터 즉 2.4평 정도 고시텔 수준의 숙소에서 버티고 있다. 당연히 그동안 연애도 했고, 이들 가운데 아프리칸 프랑스인인 J와 너무도 깊은 사랑을 해 아직도 헤어짐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이다.


  올해 여름에 파리에는 비가 오지도 않았다. J도 없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J는 천다웨이와 관계없는 사고를 당해 구급차를 타고 가는 중에 죽었다. 천다웨이는 천성이 우울모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정서는 고착되어 있었고, 당연히 성격 형성에 부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거구의 미남형인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엽색행각을 펼쳤고, 어머니는 한 번도 빠짐없이 여자가 바뀌기만 하면 단골 사설탐정을 고용해 그들의 현장을 급습하고는 했으며, 거의 언제나 어린 천다웨이가 직접 훌렁 벗은 아버지와 다른 아줌마의 나신을 볼 수 있게 따듯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니 집안꼴이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이런 저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마음을 딱 잡고 천산갑 농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산갑의 비늘은 매우 비싼 한약재로 사용하며,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동남아시아 화교권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밀수출 할 수 있으며, 본토로의 밀수가 제대로 선만 잡았다 하면 맑은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큰소리 뻥뻥 치고 다녔다. 세상에 어리석기는. 그렇게 쉬운 돈벌이라면 여태까지 다른 사람이 그거 내버려 두었겠느냐고. 아니나 다를까, 천산갑들은 아버지 보기를 처승차사처럼 여겼다. 집안 식구 가운데 어린 천다웨이 딱 한 명만 졸졸 따랐다니 애초부터 망쪼였던 거다. (천산갑과 나병 매개동물인 아르마딜로는 다른 종이다. 헛갈리지 마시기를.)

  여주인공 라이핀옌한테는 치마바람 하나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엄마가 있었다. 아빠는 일찍 죽어주어 소원풀이를 하는가 싶었지만 남자들은 라이핀옌의 엄마와 새 살림을 차리기 주저했고, 그저 잠깐 동안의 엔조이만 추구할 뿐이었다. 엄마 역시 남자의 사랑 또는 손길이 없으면 곤란을 겪는 종류의 사람이라서 어려서부터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예쁜이로 소문이 난 외동딸을 일찌감치 아역 스타로 만들어, 아이가 번 돈을 자기의 향유를 위하여 즐겁게 쓰기로 작정을 한 이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천다웨이와 함께 매트리스 광고를 찍게 되고, 어린 아이들이 천진하게 숙면을 취하는 모습이 타이페이 전국에 바람을 불어 매트리스 시장점유율이 하늘을 찌르자, 이들 어린 커플은 CF 2탄, 3탄…을 거쳐 n탄까지 찍어야 했다. 이 사이 아이들도 나이를 먹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천다웨이는 그렇다 쳐도, 라이핀옌은 이미 거덜이 난 몸 상태라고 동급생 또래 사이에 망측하고 억울한 소문이 퍼져버렸다. 엄마? 나 몰라라. 넌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열공, 열공 또 열공에 몸매관리만 열라 하거라. 좋은 대학 나온 예쁜 아이돌이라야 비싸신 몸이 되는 거란다.

  진짜로 라이핀옌은 열공과 PT를 멈추지 않아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프레시맨이 되자마자 의과대학생들과 바이크를 타고 산에 올라 야회를 즐기러 가던 중, 잘생긴 부잣집 아드님이지만 체력적으로는 별볼일없는 장이판이란 개썅 양아치 같은 새끼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가, 으슥한 산길로 잔뜩 들어가더니, 그날 처음으로 폭행을 동반한 강간을 당했고, 그게 라이핀옌의 첫경험이었는데, 한 번에 덜컥, 임신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라이핀옌한테 긴급하게 다가온 문제는 임신중단. 하지만 첫만남에 강간을 하고, 서로의 생식기가 연결된 상태로 여성의 얼굴이 드러나게 사진 촬영을 했으며, 앞으로 자신이 관계를 요구할 때마다 사진을 협박 도구로 사용할 예정인 장이판이란 허섭쓰레기가 임신중단 수술을 위하여 함께 병원에 가는 건 애초에 바랄 수 없어 전전긍긍했을 때, 라이핀옌은 자연스럽게 막일을 하고 있던 천다웨이를 호출한다. 그들은 천다웨이가 몰고 다니던 다 찌그러진 중고차를 타고 저 멀리 가오슝까지 가서 무사히 수술을 받는다. 중절 후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숙박업소에 들은 후에 라이핀옌이 자고 있는 밤중에 살짝 깬 천다웨이는 라이가 벗어놓은 피 묻은 속옷까지 손빨래해서 밤새 말려 놓기도. 이 일이 있고나서 라이핀옌이 몇십 년이 흘러 어떻게, 어떻게 천다웨이가 살고 있는 파리 숙소에 찾아간 40대 후반까지 옷장 속 저 깊은 곳에, 락스에 담가둔 것처럼 깨끗하게 얼룩이 지워지지는 않은 손빨래한 팬티를 보관하고 있었던 걸 천다웨이는 몰랐을 거다.


  천다웨이는 아직 배우다.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로 낭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은막을 떠나 있었으며, 그간 계속 파리의 좁은 숙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뭘 해서 먹고 사는 지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여간 궁핍하다. 8월의 파리. 틀림없이 언젠가는 비가 내릴 듯한 바람과 구름 그리고 공기의 움직임. 이걸 프랑스 사람들은 페트리쇼르Petrichor라고 한단다. 바람이 몰고 오는 비 냄새. 그리고 진짜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좁디 좁은 침대 위에는 J대신 그녀, 라이핀옌이 누워서 자고 있다. 침대, 테이블, 의자, 커튼 뒤의 화장실로 이루어진 작은 방. 천다웨이가 젊은 시절에 찍은 대표작. 이젠 화면에도 비가 줄줄 흘러내리는 필름 영화. 그것을 4K 영상으로 복원해 낭트 영화제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프로그램으로 상영할 계획을 천다웨이는 몰랐던 거다. 이를 위하여 타이페이의 전 매니저가 자기 인력풀을 총동원해 그를 찾아내고,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방에 불쑥 나타났다. 천다웨이는 다시 낭트에 가서 레드 카펫을 밟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화려한 파티에 참석할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필름에 분명하게 박혀 있는 짐승들, 어린 시절의 천산갑들이 갑자기 너무도 그리워져 영화제 참석을 승낙했고, 매니저는 곧바로 명품 수트와 에나멜 구두를 보내왔다.

  그리고 며칠 후, 라이핀옌이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하고 입 무거운 남자친구, ‘게이미’이자 은인이기도 한 천다웨이를 만나기 위하여. 그동안 라이핀옌은 몇 명의 남자를 만났고, 첫번째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이후에도 계속 아무 조치 없이 함부로 자기의 몸을 취해 한 번 더 임신중단을 경험하게 만들었던 장이판이었고, 두번째가 큰 부자집의 아들로 뉴욕에서 변호사 개업을 꿈꾼다고 허풍을 떨지만 결국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 한 다음 눈물을 흘리며 떠난 법대생이었으며, 울라불라, 제일 마지막이 야심만만한 청년 정치가이었다가 지금은 1년 365일 선거에 목을 매는 성공한 정치인인 장하이타오이다. 장하이타오는 정치가답게 뭐 하나 까다로운 건 없지만, 시어머니짜리가 세상에서 오직 자기 아들만 아는 완벽한 개 호로 시어머니라서, 딸 셋을 낳고 이후 몇 번의 태중 성별 검사를 거쳐 줄줄이 임신중단 수술을 한 다음에 결국 아들 하나를 낳게 했다. 이 책에서도 성소수자가 아닌 성다수자 남성은 예외없이 개썅노무새끼들이며, 개썅노무새끼들의 어미들도 개썅년의 종자이다. 진짜 읽어볼 분은 감안하시라. 한 인간이 어떨 때는 좋았다가, 어떨 때는 확 변해버리는 그냥 보통의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천다웨이와 라이핀옌. 참 잘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히 천다웨이는 배우는 배우인데 말주변이 없다. 그러다보니 말 할 수도 없다. 전화한 사람은 자기 말만 하다가 나중엔 열폭하기도 한다. 대신 정말 잘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깟 파리의 페트리쇼르가 문제가 아니다. 시간 나면 운다. 산보하다 울고, 밥 먹다 울고, 창 밖 바라보다 울고, 자는 여자 얼굴 바라보며 울고, 울어도 철철 울고, 라이핀옌도 샤워와 수도꼭지 콸콸 틀어놓고 목을 메어 울고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우리편은 내내 운다. 둘이 흘리는 눈물을 다 모으면, 강은 아니더라도 집 앞 냇물처럼 졸졸 흐를 정도는 되리라.

  즉, 질척거린다는 뜻이다. 질척거려도 너무 질척거린다. 두 손으로 책을 쥐고 비틀면 책 속에서 짠 소금물이 뚝뚝 떨어질 거 같아서, 나는 당신한테 추천하지 못하겠다.

  라이핀옌. 이이는 틈만 나면 천다웨이의 팔뚝, 팔꿈치의 굳은살 박인 곳을 쓰다듬는다. 왜 천쓰홍은 이 부분을 강조했을까? 팔꿈치 굳은살. 그곳의 촉감이 남성만 가지고 있는 고환 주머니, 즉 가장 예민한 피부조직 가운데 하나인 부랄 껍데기 만질 때의 감촉과 매우 비슷해서 그렇단다. 오래 만지지 말라. 특히 온도에 민감해 오래 쥐고 있으면 열이 올라 중력 방향으로 축 늘어질 위험이 있으니. 힘껏 쥐지도 말라. 쥠을 당하는 인간은 아파 죽는다. 혹시 몰라. 꼭 만져보고 싶은 인간도 있는 지. 뭐 있겠지, 사람 사는 일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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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06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소금 ㅋㅋㅋㅋㅋㅋ 징짜 징글징글 운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전 이 작가 책운 더 안 읽으려고요.

Falstaff 2025-02-06 07: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쇤네도 이게 마지막 천쓰홍입니닷!
 
겨울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2
앨리 스미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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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브스 가족을 소개한다. 가장 클리브스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잉글랜드 콘월 지방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쟁을 겪은 다음에 클리브스 선생은 독일의 G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총을 들고 전투를 경험한 사람의 80퍼센트 이상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PTSD가 이런 방식으로 발현된 거였다.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선량한 잉글랜드 시골 사람다운 무뚝뚝한 친절함을 가진 따뜻한 이웃으로 기억될 예정이다.


  선생은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은 아내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맏이 아이리스는 머리통이 점점 커져가며 삶의 방식이 자유분방해졌다. 학업은 일찌감치 작파한 것처럼 보이고, 10대 후반부터 핵무장 반대자로 나서서 원폭, 수폭에 반대하는 행진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표어가 큼지막하게 적힌 더플코트를 구입해 아버지의 복장을 뒤집어 놓더니, 직장 동료들을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아빠한테 “살해하지 말지어다!” 예수님 말씀을 풀었다가 급기야 손찌검을 당하고 다음 날 아침에 보따리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 아버지를 본 것은 매장을 앞두고 관에 누워있는 모습이었고. 동네에서도 평판이 빤했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워낙 성격이 좋고 활발하여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진짜 오랜만에 고향집에 왔을 때, 거의 모든 이웃사람들이 아이리스 곁에 모여서 즐겁게 이들 가족과 고인을 추모했을 정도이다. 이후 아버지의 집을 동생 소피아가 구입하기 전까지 방이 열 몇 개가 있는 저택에 뜻을 같이하는 반전 반핵운동 동료, 쉬운 얘기로 히피들을 끌어들여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똑 소리 나는 동생 소피아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해, 사회성도 좋아, 생기기도 예쁜 엄친딸 성향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여자가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면 그걸 눈꼴 시어 하는 인간들이 많았음에도 성인이 되었을 때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는 작지 않은 규모의 회사를 차려 제법 돈도 벌었다. 그래서 아버지 사후 언니와 공동으로 소유하던 큰 집도 자신이 구입해, 그 넓은 집에 혼자 살며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젊은 시절 콘월에서 휴가를 보내러 온 나이든 유부남이자 미술 애호가와 두 번째 만나 크롬웰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섹스를 하고 아들 아서를 임신한다. 당연히 이에 대하여 소피아는 한 번도 후회해본 적도 없고, 임신마저 당연한 일, 아니면 적어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잘 생긴 희극배우 고드프리 게이블을 만나 결혼한다. 고드프리는 예명이고 본명이 레이먼드 폰즈. 그러면 소피아의 이름은 소피아 게이블이나 소피아 폰즈가 되어야 하건만, 소피아는 아버지의 성 클리브스를 그대로 유지한다. 작가 앨리 스미스가 동성애자이듯, 소피아의 법적 남편 고드프리도 동성애자였는지, 적어도 그가 법적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선 성스러운 동정남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단 한 번도 성적 결합을 해본 적 없고, 서로 등짝을 밀어준 적도 없다. 오직 하나, 혼자 아이를 키울 소피아가 안 되어 보여서 고마운 고드프리가 사해동포의 이념으로 결혼을 해주었던 거다. 곧 둘은 헤어지지만 소피아는 남은 생애 내내 고드프리 또는 레이먼드에게 고마움을 품고 산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소피아의 아들인 자연생태학자 아서. 애칭 아트. 자신의 블로그 ‘아트 인 네이처’로도 돈을 벌지만 역시 가장 큰 수입원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 SA4A의 저작권 콘솔리데이터를 하면서 받는 돈이다. 아트는 세계 각지의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SA4A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컨텐츠가 법적 용도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회사에 신고하는 일이 주업무다. 자연생태학자라고 해도 요즘에 자리 하나 얻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것만 팔 수는 없는 일이니 일단 돈 되는 일이면 해야 하는 법이다. 젊은 아트는 당연히 3년 전부터 연인 샬럿과 반려자 자격으로 지내고 있다가 요즘 대판 싸우고 샬럿이 일단 집에서 나가버렸다. 물론 그것이 이별을 뜻하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좀 갑갑하게 됐다. 왜냐하면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 소피아의 집에 샬럿과 함께 가서 즐거운 연휴를 보내기로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샬럿은 아서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샬럿이 현관을 박차고 나간 날에는 북아프리카의 레몬 혁명 당시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이 다툼의 주제였는데, 과밀한 승객을 태운 쪽배가 전복하여 사망하는 일 등을 아서가 그들이 선택한 결과라고 말하자, 샬럿이 이렇게 반박했었다.

  “저번이랑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거야?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느라고 바다를 건너다 익사한 사람들, 집이 불타고 폭파당하는 와중에 도망친 것도 그 사람들 선택이고 침몰할 배에 탄 것도 그 사람들 선택이니까 우리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했던 때처럼?”

  샬럿의 의견이 아서의 이모 아이리스와 같다. 아이리스는 심지어 북아프리카 난민 수용소가 밀집해 있는 그리스에서 그들을 위해 민간단체에서 열일 중이다.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샬럿까지 없어진 마당에 엄마한테 애인 또는 반려자와 함께 집에 가겠다고 큰소리 뻥뻥 쳐 놓았으니 아서 또한 급하게 됐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바늘 구멍 만한 틈이 있는 법, 아서는 도서관 옆 버스 정류장에서 뭔가를 읽고 있는 아가씨를 발견한다. 나이도 조금 어리고, 얼굴에 고리, 걸이 그리고 막대 모양의 다양한 피어싱을 한 이국적인 여자애. 나중에 알고 보니까 크로아티아 출신 유학생이고, 런던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학비 지원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바람에 중도에 작파 해 버렸고, 잠 잘 곳을 얻기도 쉽지 않아 일하는 곳에서 숙박도 해치워야 하는 조금 딱한 신세의 일종의 유랑민이다. 그래도 캐나다 등지의 도서관에 있는 셰익스피어 책도 제법 알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솔직하고, 담백한 화법이 사람에게 진솔한 면목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도 있다. 이 아가씨한테 아서는 3일간 ‘샬럿’이란 이름으로 자기 반려 역할을 해주면 1천 파운드를 주겠노라고 제의를 했고, 이를 받아들여 둘은 함께 기차를 타고 콘월, 어머니 집으로 간다.

  엄마 소피아는 좀 괴팍하게 늙었다. 아서가 도착하기 닷새 전에 “눈 안에 청록색 점, 시야 측면에 청록색 점이 보이면서 점점 커질 때”를 검색해보더니, 이 점 모양의 부유물이며 눈 앞을 하루살이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조막만한 스푸트니크 위성에 불과한 점에 말을 건넸고, 그러자 점은 핀볼 머신 옆구리에 붙은 쇠막대에 한 방 얻어맞고 튀어나온 쇠공처럼 눈에서 튀어나와 지금은 진짜 어린 아이의 머리통 만해졌다. 몸통을 잃어버린 머리. 잘린 부문에 살덩이가 흐물흐물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한 머리통과 소피아가 이야기하고, 마치 쿠션이라도 되는 듯 몸을 기대고, 함께 외출도 하는 장면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이거야말로 전에 읽었던 매력적인 앨리 스미스, <호텔 월드>에서 음식 운반용 승강기에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가 떨어져 죽은 알바 아가씨의 귀신 같은 것이 생각나서 흥미진진 했었다. 물론 조금 엽기적이기도 했지만. 근데 이 책에서 문제의 머리통은 조금 지나면 흐지부지 없어져 출판사 책소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아쉽다.

  하여간 이렇게 어렵게 콘월 엄마 집에 아서와 샬럿이 도착해 고프다 못해 배가 쓰린 수준까지 되어 냉장고를 벌컥 열어 보았지만 버터도 없고, 딱 두 알 남은 달걀은 사온 지 두 달이 넘어 이걸 삼킨 사람은 응급실행을 진지하게 각오해야 할 수준이며, 생수 한 통도 없는 건 물론이고, 하여간 목구멍 넘길 것도 없었다. 따듯한 부엌 의자에 앉은 엄마 소피아는 아이들에게 헛간에서 자는 편이 좋을 거라 말하고 자기는 방에 들어가 잔다. 이 할머니가 아서의 진짜 엄마 맞다.

  이제 어이가 없어져버린 아들 아서. 어떻게 할까? 넋이 거의 나가 샬럿이란 거짓 이름의 럭스를 쳐다보고 있자, 결정적일 때 단호하고, 현명하며, 사람의 기분을 제대로 맞출 줄 아는 가난한 아가씨는 단칼에 해법을 제시한다.

  “이모를 불러.”

  아서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이모에게 문자를 보내고, 즉각 아이리스 이모한테 답장이 왔으며 “즉각 갈게!”, 옆에서 보고 있던 럭스는 한 마디 더 보태라고 한다.

  “여기 먹을 것이 없어요. 음식물 좀 넉넉하게 사 오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 번 더 옆구리를 지른다.

  “크리스마스 축하용 와인도요.”


  그래. 크리스마스. 잉글랜드에서 크리스마스, 라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를 뺄 수 없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영혼. 이 작품 속에서도 몸통 없는 머리와 지내는 소피아는 자기가 기억하는 예전 시절부터 결국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귀결하는 장면을 소환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일은 자주 현재와 타협을 이룬다. 스크루지도 결국 그렇게 했다. 이제 이 가족, 맏이 아이리스와 둘째 소피아, 그리고 아들 아서. 이들도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다시 그리스의 섬과 런던으로 갈 때, 샬럿 럭스에게 1천 파운드를 주고 돌려보낼 즈음엔 온 세상 감화 감동 가득하듯,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읽어보시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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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위픽
천희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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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절대로 돈 주고 사서 읽지 않는 시리즈가 위즈덤하우스에서 내고 있는 위픽 시리즈다. 근데 도서관에서 보이면 아무 부담 갖지 않고 빌려 읽는다. 이 책도 단편 하나 달랑 실어놓고 정가 1만3천원, 10퍼센트 할인가 11,700원 받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별 영양가 없이 길기만 한 ‘작가의 말’까지 포함해서 1백쪽 분량. 손바닥 만한 크기에 글자도 널럴하게 박여 있어 시작하면 순식간에 다 읽어 치운다. 인터넷 쇼핑의 매력 가운데 하나, 아무것도 모르고 한 권 주문했다가 열폭하는 거. 이런 독후감 전체 공개로 쓰면 누군가 왕림하셔서, “독자님은 문학을 돈으로만 생각하시네요.” 이렇게 댓글을 남기고는 한다. 예전에는 “저는 문학보다 돈이 훨씬 더 좋은데 당신은 아닌가요?” 이렇게 답글을 썼는데, 이제 또 비슷한 댓글이 달리면 “당신도 백수 되어 봐!” 라고 쓸 예정이다.

  천희란은 1984년에 출생해 저 한 시절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문학의 산실이었던 서라벌 예술대학의 맥을 잇는 중앙대학 문예창작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2015년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인지, 신인 추천인지로 데뷔한 소설가다. 첫번째 소설집 《영의 기원》과 경장편 (나는 이놈의 ‘경장편’이 뭘 말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경장편) <자동 피아노>를 가장 애정하는 거 같다. 소설집은 모르겠고, <자동 피아노>의 독자 서평을 읽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자동 피아노>의 책소개를 보면 “자기 자신에 갇힌 인물의 끝없이 분열하는 목소리가 죽음을 음악처럼 연주하는 작품으로 죽음에 대한 욕망과 충동, 이에 맞서는 삶에 대한 열망을 집요하게 그려낸다.”라고 했다. (알라딘 책 소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품 속에 다양한 죽음/자살의 방식이 묘사되어 있고, 죽음/자살에 대한 욕망과 시도 같은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그러면 오늘 읽은 <작가의 말>의 독후감은 대단히 조심해야 할 듯하다. 천희란은 <자동 피아노>에 달린 백자평을 <작가의 말> 속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한다. “독자서평”에 달린 글 속에서도 인용했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확인하느라 무려 58개의 독자가 쓴 서평을 읽어볼 마음은 없다.

  “누군가는 그 책이 ‘작가의 말’과 함께 읽어야 완성된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그 책을 이해했다고 했다.” (p.68)

  읽어보지 않아서 짐작으로 말하자면 이런 의미로 <작가의 말>은 <자동 피아노>의 같은 악장 속 변주 주제거나 카덴차일 텐데 문제는 이걸 연주하는 작가의 상태가 우울과 자살, 죽음의 충동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기 작품의 독자 서평까지 꼼꼼하게 확인한다고 스스로 고백했으니 독자 입장에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확 까발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책을 읽어가면서, 오랜만에 도서관이 아닌 집에서 읽는 관계로 페이지마다 태그까지 붙여가며 집중을 하다가, 독자서평 운운하자마자 다시 태그 다 뗐다. 함부로 주둥이 털지 말아야지. 미리 자기 습성을 이야기해준 작가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근데 이건 이야기해도 되겠지. <작가의 말> 뒤에 따라붙은 ‘작가의 말’을 왜 그리 길게 쓸까? <자동 피아노>에서도 그랬다는데 글 쓰는 사람이 적어도 책 한 권에서 말할 건 본문에 다 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여기서도 피아노 이야기.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그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D.960 소나타. 작가 자신, 개인한테는 김선욱의 D.960이 기념할 만할 수 있지만 그 후에 따라붙은 몇 줄의 결말을 쓰자고 그리 많은 분량을 쓰는건 오버 같다. 그렇다고 음악과 연주에 관한 천희란 만의 특색있는 묘사도 없다. 당연하지. 음악이란 것이 원래부터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connotation 예술형식”이니까. 악보와 디테일을 짚어주지 않은 채 지금 들은 음악이 왜 아름다운가를 설명하다 보면 결국 시인 김정환이 쓴 <내 영혼의 음악> 꼴 나는 법이다.

  천희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작가가 좋아하는 피아노 소나타 장르 기준으로, 즉 세상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의 연주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 쳐서, 작가가 제일 좋아한다는 D.960의 연주시간 만큼 살다 갔으면 좋겠다. 아프지 말고, 아니 조금만 아프고 덜 불행하게, 축약 연주 말고 원래 악보 연주 기준으로.

  나는 내가 읽은 천희란의 작품에 대한 내 솔직한 심정을 (작품 속에서이기는 하지만)우울과 죽음과 자살에 천착하는 천희란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 별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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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2-03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시리즈 책값 무지 아깝던데요... 사고서 후회했어요. 아무튼 얇은 책은 다 따져보게 돼요.
독자(이자 소비자) 입장에서는 책값 보면서 페이지 따지고 양장인지 아닌지 따지고 특히 읽고 나서 작품이 책값을 하는지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저도 백수 된 지 수 삼년이라... 책값이 정말 무서워요. 많은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리고 희망도서 신청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사고 후회되는 책이 한둘이 아니예요.
작가 무서워서 평도 못쓰겠네요!

Falstaff 2025-02-03 12:05   좋아요 1 | URL
아휴, 제 집 상수도가 새는 바람에 아랫집 누수가 생겼답니다. 하필이면 책장 바로 아래 파이프에 실금이 나서 책장 하나를 드러내야 했는데요, 아이고.... 이 시리즈뿐 아니라 두 번 읽지 않을 책을, 나이 들면 한 번 더 읽겠다고 구입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확실하게 알았답니다.
책.... 마음 속에서 책이지, 삶에서는 그냥 고물 덩어리더라고요. 흑흑흑.... 사서 읽지 마세요. 흑흑흑... 이런 발언하다가 알라딘에서 강퇴 당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흑흑...

하이드 2025-02-03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픽 처음 보고 기막혔어요. 도서관에서 계속 빌려 읽다 보니, 사두고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생기긴 하더라고요. 저는 한국 소설 잘 안 읽었는데, 한국 소설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 많은 작가들 알게 되는 마중물 되어주기도 했고요. 위픽의 소설들은 다 일정 기간 위픽 사이트에서 연재 형태로 무료 공개 하고 있지만, 온라인으로 읽는 건 또 잘 안 읽혀서 책으로 나오면 읽어야겠다. 하고, 예쁘고, 가벼운 책으로 가볍게 읽습니다.

제가 사야지 찜해둔 책들은 구병모 <파쇄>, 현찬양 <인현왕후의 회빙환을 위하여>, 현호정 <삼색도>, 그 외 좋았던 책들은 김원영 <우리의 클라이밍>, 최현숙 <창신동 여자들> 입니다.

요새 위픽 말고 트리플 시리즈나 그 외 이렇게 단편이나 중편으로 나오는 경우 많더라고요.
주문할 때 잘 봐야해요. 100쪽이라도 같은 100쪽이 아니에요 ㅎㅎ

Falstaff 2025-02-03 12:15   좋아요 2 | URL
이 시리즈엔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의도야 좋았겠지만 ˝독자의 마음은 염두에 두지 않은˝ 참신한 기획....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특정 작가에게 단편 한 편을 의뢰하고 그걸 책으로 만들어서 심사가 더 뒤틀렸는 지도 모릅니다. 코를 풀듯, 설사를 하듯 찍 갈겨 쓴 작품도 작가의 이름값 덕택에 한 권으로 만들어져 나왔을 지도 모른다는..... 나왔을 거라는.... 얼토당토 않은 짐작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당연히 제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깨갱!) ㅎㅎㅎ 그걸 돈 주고 사서 읽는다? 저는 안 할렵니다.
 
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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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에만 세 권의 페루츠를 읽는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1920년대 유대계 폴란드 소설가들이 만든 황금시대. 내가 말하는 이들은 스타니슬라프 비트키에비치, 비톨트 곰브로비치, 그리고 브루노 슐츠를 가리키는데, 난데없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페루츠를 왜 이 무리와 같이 엮으려고 했을까? 페루츠도 아방가르드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덜 아방가르드한데 말이지. 폴란드 작가들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수준인 것을. 잠깐 오해를 한 게 틀림없다. 레오 페루츠를 비트키에비치, 슐츠, 곰브로비치를 읽기 위한 디딤돌로 삼을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할 뻔했다. 암만해도 내가 독후감을 너무 자주 쓰는 모양이다.

  페루츠는 한 마디로 말해서, 환상 소설가이다. 요즘 유행하는 뉘앙스로 환상적인 작품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설의 내용이 사실보다는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 같은 걸 다룬다는 뜻이다. 이미 죽은 아버지가 창문을 두드리는 <스웨덴 기병>, 읽는 사람마다 자살에 이르게 하는 책 이야기 <심판의 날의 거장>, 실제가 아니라 서로의 꿈속에서 만나 짙은 사랑을 해 보헤미아에 페스트를 창궐하게 한 커플 <밤에 돌다리 밑에서> 모두 그랬다. 그러니 페루츠를 훗날 라틴아메리카에서 유행하게 될 환상문학의 범주와 비슷하게 엮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면서도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고딕 문학과는 좀 차별을 두는. <9시에서 9시 사이>도 마찬가지로 환상 문학이다. 앞에서 <밤에 돌다리 밑에서>가 왜 환상문학이라 하는가를 언급한 건 스포일러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9시에서 9시 사이>가 왜 환상문학인지 알려드리는 것도 확실한 스포일러이다. 따라서 그건 피해갈 수밖에.


  주인공은 스타니슬라우 뎀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짧고 불그스레한 콧수염을 한 철학박사 수료생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 논문을 써서 통과만 하면 학위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이 아닐까 짐작한다. 덩치와 생김새하고 어울리지 않게 마치 먼 길을 갔다 온 듯 지저분한 장화를 신고, 바지에도 얼룩덜룩하게 진흙이 묻어 있다. 이런 모습으로 첫 장에 등장한다. 빈 시내 비저 골목의 식료품 가게에.

  뎀바는 가게 주인 요한나 퓌흘 여사한테 버터빵과 (재고가 떨어진)크라카우어 소시지를 주문했다가 소시지만 대신 엑스트라부어스트로 다시 주문을 한다. 근데 이 다음부터 좀 이상하다. 음식값 64헬러를 내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으면서 퓌흘 여사와 종업원에게 자꾸 엉뚱한 요구를 늘어놓으면서 신경질을 낼 뿐이다. 그러다가 우유를 찾는다. 퓌흘 여사는 자기가 마시려고 조금 남겨놓은 화주를 퍼뜩 떠올리고 그거라도 좋을까요, 묻는다. 예, 당연하지요. 치통엔 화주 만한 것이 없지요, 그래서 여사는 화주를 가지러 갔고, 딱 한 잔을 따르면서 생각해보니 이제 카운터에 저 남자손님 한 명만 남았는데, 서랍엔 14크로네와, 산호 목걸이와 터키옥 반지 두 개, 카테를의 저금통장, 그리고 마리아첼산 성화 두 점이 들어있는 것을 기억했고, 갑자기 수상한 생각이 들어 객장으로 뛰쳐나갔더니, 아뿔싸, 뎀바는 벌써 보이지 않는 거다. 여사가 현금보관통을 열어보니까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 이상하게도 돈과 보석, 저금통장, 기타 등등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도둑놈이 비록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할 찰라, 카운터 위에 놓인 20헬러짜리 동전 세 개와 크로이처 두 개, 합해서 64헬러가 놓여 있었던 거다.


  다음 장면은 버터빵과 엑스트라부어스트를 들고 그걸 아침식사로 먹으려 리히텐슈타인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은 스타니슬라우 뎀바. 하필이면 개 키루스와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선 궁정고문관 클레멘티 선생과 동행인 트룩사 폰 리터 교수가, 원래부터 아침마다 원고나 교정지를 검토하는 장소인 후미진 벤치에 도착하니, 바로 뎀바가 앉은 벤치. 뎀바는 그들을 보자 빵과 순대를 벤치에 올려 놓은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클레멘티 고문관이 데려온, 암만해도 잡종견 같은데 하여튼 키루스가 빵과 순대를 다 먹어치우는 걸, 분명히 얼굴만 보면 분노에 차서 이글거리건만 그저 째려보고만 있는 거다. 궁정고문관과 교수는 오늘 아침 토론의 주제가 마리화나, 대마초였는데, 뎀바가 처음엔 개를 달려려고 하다가 나중엔 결국 키루스의 옆구리를 발로 뻥 차버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더니,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이자 철학 및 역사분과 외교 아카데미 강사인 폰 리터 교수는, 뎀바가 오늘의 화재였던 대마초를 흡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득달같이 쫓아갔으나 이미 뎀바는 사라진 후였다. 이때가 한 아홉시 반 정도 됐으려나?

  아침을 먹지 못한 뎀바는 멀리 가지 않았다. 같은 공원의 다른 장소. 이제 주인들은 출근을 하고, 여사님들은 외출을 위한 준비에 바쁜 시간. 공원에는 쁘띠 부르주아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가정교사 아가씨들과 베이비시터 할머니들로 가득하다. 빨간 브로치 두 개가 달린 새 보일 블라우스를 입고 작은 남자애, 여자애 각 한 명씩 데리고 나온 아름다운 아가씨 알리스 라이트너로 말할 것 같으면, 척 보면 새침하고 얌전할 것 같은데 사실은 내숭 덩어리로 도발적인 주제로 은근하고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걸 어느 정도 즐기는 성향이다. 알리스는 특히 숱한 남자들로부터 엽서나 편지를 통해 보낸 사랑의 고백을 읽는 걸 최상의 취미로 생각한다. 이 알리스를 뎀바가 우연히 만났다. 아가씨 쪽에서는 인연이 되려는지, 원래 잘 차려 입은 남자를 선호하건만 오늘은 지저분한 장화와 바지의 뎀바를 보고 낭만적인 보헤미안을 떠올리는 거다. 게다가 순전히 폼으로 들고나온 책을 슬쩍 보더니, 입센 책이군요, 그렇죠? 한 번에 알아맞추는 것까지 반할 요소는 많았다. 알리스 아가씨는 뎀바가 마음에 들어 본격적으로 꼬드길 심사로 우산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건 남녀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꼬리치는 일로, 여성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하여간 남자가 주워 주는 것이 삼천만의 일반상식이건만, 뎀바는 꼼짝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알리사 본인이 주워들었다. 그래도 뎀바가 싫은 기척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알리사가 자기 주소를 알려주며 편지나 엽서를 보내라 주문하면서 주소를 불러주었는데, 뎀바는 도통 그걸 받아 적지 않는다. 기억할 수 있다면서. 더 재촉을 하니 이젠 글을 읽지 못한다나?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 놓더니, 나중엔 사실 자기가 유레카 공장에 기계 협착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잃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뎀바를 불쌍히 여긴 알리스는 벤치 위에 1크로네 10헬레의 동전을 놓고 자리를 뜨고, 이걸 발견한 뎀바는 그걸 집어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린다.


  여기까지 읽으면 주인공 스타니슬라우 뎀바가 너무 찌질해 보인다. 세상에 이리 궁상맞을 수가. 외견상 괜찮은 신체조건에 어디 빠지지 않는 외모, 다만 가난한 학생 신분이라 그게 한 가지 허들인 인생을 사는 뎀바가 처음부터 이런 찌질이는 아니었겠지? 맞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똑똑해서 모르는 게 없는 모든 분야의 척척박사라 불렸다. 망가지는 사람은 틀림없이 어느 계기가 있는 법인데, 뎀바의 경우에는 피끓는 20대 청년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연애문제였다.

  패션 조끼용 천 도매상을 하는 오스카 글레빈터사社에서 일하는 조냐 하르트만 양. 스타니와 조냐는 둘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였던 걸로 뎀바는 오해했다. 항상 더 나은 환경이나 권력 또는 힘을 가진 수컷을 좇는 암컷의 본능으로 조냐는 그러나 자기 앞에서 활짝 구애의 날개를 펼치며 바르르 떠는 숫공작 게오르크 바이너를 선택했다. 게오르크는 대학생이고, 아빠가 겁나게 부자라서 이번에 학점을 잘 받아 게오르크에게 3백크로네를 선뜻 하사를 했다. 여기에 조냐가 가지고 있는 90크로네를 합쳐 약 4백크로네로 베네치아를 비롯한 유럽 각지를 3주에 걸쳐, 2주는 휴가를 내고 둘째 주 금요일에 병이 나서 한 주일 더 머물러야 한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는 걸 전제로 3주 여행을 계획, 벌써 열차표 일습을 예매해둔 터이다.

  세상에 이런 비밀을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 소식이 뎀바의 귀에도 “어제” 들어갔고, 눈알이 훽 뒤집어진 뎀바는 곧바로 오스카 글레빈터사에 쫓아가 조냐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고 빈다. 그러나 조냐는 뎀바가 그럴수록 더 정나미가 떨어졌고, 둘의 감정을 더욱 틀어져만 갔는데, 나중에 뎀바가 말하기를, 내가 내일 오전 9시까지 4백크로네를 가져오면 게오르크말고 나하고 여행을 떠나겠어? 묻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한 번 떠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안 넘어가는 나무는 백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법. 웃기고 있네. 콧방귀를 핑, 뀌는 순간, 조냐는 뎀바의 손에서 반짝이는 크롬 도금 쇠뭉치를 발견한다. 틀림없이 리볼버 권총이다. 순간 조냐는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진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원래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뿐이었다고, 일단 진정을 시키는데 성공했고, 곧바로 뎀바는 문제의 4백크로네를 마련하기 위해 도매상을 뛰쳐나간다.

  여기가 차원이 바뀌는 지점이고 순간이다.

  뎀바는 전에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십년 간 아무도 대출한 흔적이 없는 고서 세 권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해, 결국 세 권을 훔쳐 내온 적이 있다. 가져다 놓아야지 말뿐이고 생각뿐, 시간이 흘렀으며, 살다 보니 돈에 궁색해질 때가 있어서 고서 두 권은 책의 가치를 그나마 알아보는 유대인에게 팔아먹었다. 이제 남은 한 권을 가지고 다시 그 유대인을 찾아가 감정을 하고, 흥정 끝에 240크로네로 결정을 했다. 돈을 지불하려 방에 들어간 유대인은 열쇠를 가진 조카가 뭘 사러 밖에 나가 있어서, 점원에게 그를 데려오라 시켰고, 점원이 데려온 사람은 조카가 아니라 두 명의 형사였는데, 이들은 유대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뎀버의 손에 은팔찌, 수갑을 채워버렸다. 순간 덩치 좋은 뎀버는 몸부림을 쳐 이들을 떨쳐내고 집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가 문을 걸었지만 그게 오래갈 일이 없을 터, 결국엔 두 팔에 수갑을 채운 채 그곳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는 데 성공한 거다. 그러니까 여태 뎀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러면 수갑을 채운 손목이 드러날 터이고, 즉시 사람들은 뎀버를 경찰에 고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돈이 생기면 바로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하고, 손을 노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돈을 잃어야 하는 상태가 계속된다. 독자는 읽는 내내 뎀버의 상황이 너무도 갑갑해 숨이 턱턱 막히지만, 나중에 결말 부분에 가면 허, 참. 왕년에 TV에서 수십년 간 <가족 오락관>을 진행하던 허참 씨의 이름을 한 번 되뇌면서, 세상에 이렇게 된 거였어? 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이제 페루츠의 책은 한 권 남았는데, 그건 그냥 내버려두어야겠다. 뭐든지 약간 부족한 게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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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31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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