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2 - 영웅의 시대 그리스 신화 2
로버트 그레이브스 지음, 안우현 옮김, 김진성 감수.해제 / 알렙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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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 2부작의 두번째 책.

  이제 올림푸스 산에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만 먹고 마시는 신들은 스토리의 뒤편, 아니면 배경에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인간들의 싸움만 뒤에서 조정하는 단계이다. 즉 그리스 시대의 역사를 신의 개입이라는 측면으로 설화화 혹은 전설화한 스토리들.

  이 책의 목차는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방랑>, <아! 헤라클레스>, <황금 양털과 메데이아> 그리고 <트로이아 전쟁>으로 이루었다. 이 네 가지 주제는, 서양 문학을 읽으면서 숱하게, 말로만 숱하게가 아니라 정말로 숱하게 들었고, 들을 때마다 검색해봤고, 다시 들으면 또다시 검색해서 이제는 미주는 당연하고 각주 단 것도 쳐다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니 어땠을까? 읽는 내내, 본문만 647쪽인데, 지겨워 미치거나,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도서관 열람실에서 《그리스 신화 2 ― 영웅의 시대》를 다 읽고 책 덮은 시간이 오전 11시 10분. 다른 때 같았으면 새 책 시작했을 텐데, 그냥 퇴근해버렸다.

  ― (흠. 낮술 중)

  좋다. 술 다 깼…나? 이렇게 말하면 좀 병맛이겠지만, 나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를 읽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화 또는 영웅담을 대충은 꿰고 있었다. 이번에 영웅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웅담의 다양한 버전을 새롭게 아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한들 그게 뭐가 대수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신화, 전설, 설화인데 뭐. 내가 낳고 자란 고향이 크레테, 소아시아, 발칸, 그리고 그리스 일대라면 혹시 모르겠다.


  애초에 그리스 영웅담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등 불굴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기둥에 묶인 채로 바다괴물을 위한 희생으로 바쳐진 여인, 당연히 무지하게 예쁜 여인을 구하는 내용. 나는 헤라클레스의 경우엔 찌질한 에우뤼스테우스의 열 가지, 사실은 열두 가지 명령을 수행하는 일에만 집중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는데, 헤라클레스 역시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괴물 앞에 보석 장신구만 걸친 채 완전한 알몸으로 트로이아 해안가 바위에 묶여 있는 헤시오네를 구출한 일을 이번에 알았다. 이건 일찍이 페르세우스가 나무 기둥에 묶여 바다괴물이 일용한 양식으로 사용할 예정인 안드로메다를 구출한 일의 판박이 아니냐는 말이지.

  그레이브스는 이것을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흔히 전해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영웅이 있어 여신 이슈타르가 뿜어 놓은 바다 괴물 티아마트를 물리치는 모습인데, 마르두크는 여신을 바위에 사슬로 묶어 제압한다고. 괴물 티아마트는 마르두크를 꿀꺽 삼켰으나, 사흘 뒤에 마르두크가 괴물의 이를 뚫고 돌아온단다. 헤라클레스도 괴물이 덥석 물어 꿀꺽 삼켰지만 배 속에 내려가 몽둥이와 창으로 난도질을 해 괴물을 죽인 다음에 다시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을 열고 나와 헤시오네를 구했다.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출할 때는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레이브스는 이러저러한 증거 또는 단서를 나열하면서 주인공들의 기본 주민등록지가 다를 뿐이지 사실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를 같은 영웅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근데 이 책을 읽으면서 기중 허걱, 하고 놀란 일은 파리스가 헬레네하고 눈이 맞아 야밤에 배를 타고 스파르테에서 도망친 일이 “오직 환영”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단언한 일이다.

  으아, 이거 진실이야? 일찍이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파리스 앞에서 파리스야, 파리스야,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황금사과를 주는 일이 아예 없었다고? 그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사과,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 뉴턴의 사과는 진짜이고, 트로이아 전쟁의 시초라고 일컫는 사과는 구라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작품 <헬레네>가 진실이었던 거야?

  (그거 아시나? 파리스가 누가 예쁜지 판정하기 위해서 여신 셋을 홀딱 벗겼다지 뭐야! 그땐 털의 모양과 색깔도 미의 기준이다네?)

  사실 헬레네한테는 남편 메넬라오스가 유일한 남자가 아니었다. 처음에 어쨌든 처녀 딱지를 뗀 건 아테나이의 바람둥이 영웅 테세우스였고, 두번째가 정식으로 결혼한 메넬라오스였으며, 세번째가 파리스이었는데, “테세우스의 헬레네는 아마도 피와 살이 있는 실제 인간이지만, 트로이아의 헬레네는 정말 ‘오직 환영’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라고 주장한다. (p.479)

  그러면 어떻게 된 거지? 독자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일단 파리스가 왕 메넬라오스가 없는 스파르테에 온 건 맞을 듯. 파리스는 출장 와서 일을 다 보고 귀국.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이제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며 흑해 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무역을 틀어쥐고 있는 트로이아와의 전쟁을 위해 치사해도 참 더럽게 치사한 방법을 궁리해내니, 불세출의 미인 헬레네를 이집트로 몰래 보내 놓고 트로이아 프리아모스 국왕의 둘째 아들 파리스가 일국의 왕비를 유괴했다는 누명을 씌워 대규모 침공을 하기에 이른다. 트로이아의 농산물 무역 장악은 이 책에 나오는 정보이다. 그럴 듯하다. 그리스의 많고 많은 도시국가 가운데 딱 한 도시국가의 왕비를 납치했다고 전 그리스가 몽땅 들고 일어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합당한 전리품을 약속해야 전쟁을 하는 것이지 내 마누라도 아니고 옆집 여편네가 바람나서 집 나간 걸 가지고 우리집 남자가 피 터지게 싸우기는 좀 그렇잖아.

  근데 왜 하필이면 헬레네를 이집트로 보냈느냐고? 에우리피데스는 제우스의 1등 꼬붕 헤르메스가 바람을 불어 한 방에 훅, 이집트로 날아가서 신전의 신녀로 근무하게 했다지만, 이집트는 나일강의 은혜에 힘입어 당시부터 약 2천년동안 유럽,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중요한 곡식 생산지였으니 그나마 귀한 신분의 여성이 생활하기에 맞춤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다. 에우리피데스는 현명한 이집트 왕이 죽고 대를 이은 젊은 왕이 헬레네한테 끊임없이 껄떡대다가 전쟁이 끝나 헬레네를 데리러 온 남편 메넬라오스한테 코피 터지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필로스라고도 불리는 네오프톨레모스는 전쟁 중에 아킬레스 건에 파리스가 쏜 화살을 맞아 죽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데, 처음부터 참전한 건 아니고 전쟁이 길어지니까, 개전 당시엔 어린이였다가 이제 대가리가 커져 청년이 되어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발로 전장에 온 천생 싸움꾼이었다. 여신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신족 DNA가 진해서 그랬는지 생긴 것도 미남에다, 몸이 빠른 천하장사, 아폴론의 화살에 버금가는 궁술, 마음만 먹으면 2초 안에 완벽하게 발기해 숱한 여성으로부터 수많은 자식을 뽑아낸 오입쟁이이기도 했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그의 정식 아들로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바가 커서 정말로 전장에 도착한 걸 보고 화를 냈다고 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처럼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마징가Z 같았으나, 아뿔싸, 신의 종족이 아니라서 사납고 인정머리 없고, 그래서 잔인했단다.

  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마케>와 <트로이아의 여인들>을 보면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안드로마케와 헥토르 사이의 어린 아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나온다. 그는 아이의 다리를 잡고 휘휘 휘두르다가 마치 투원반을 던지는 것처럼 2층 베란다에서 1층 돌바닥을 향해 전력을 다해 아이를 팽개쳐 터뜨려 죽여버린다. 물론 점잖은 에우리피데스는 그냥 2층에서 1층을 던졌다라고만 썼다. 후세의 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좀 더 솔직하게 휘휘 휘두르다가 1층으로 던졌다고 했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영웅 헥토르의 아들을 학살했을 때 아마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듯하다. 인권 의식도 없고, 식인 풍습도 사라지지 않았던 그리스 시대였지만 어린 아이를 패대기쳐 죽였다는 것이, 혈기방장한 젊은이의 일시적인 일탈로 보기엔 너무 심하다. 이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 손으로 잔인하게 죽인 아이의 엄마 안드로마케를 첩실로 삼아 데리고 살면서 아들 둘을 낳기도 했다. 왜 출산 경험도, 나이도 많은 안드로마케와 살았을까? 젊은 여자 노예도 많았을 텐데.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흘러 겨우 이타카로 돌아온 오뒷세우스. 그도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다. 키르케하고 좋은 시간을 보낸 것도 모자라 칼립소와는 7년 세월 깨를 볶았으니 그냥 그대로 살지 이타카로 돌아올 건 뭐람. 전적으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주장에 의하면, 다분히 <황금가지>를 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에 영향을 받은 거 같은데, 이타카는 가모장적 질서에 의하여 페넬로페가 실질지배하고 있는데 말이지. 칼립소와 7년 동안 함께 산 건 고대 부족시대 날씨를 관장하는 제사장 비슷한 의미로 왕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큰 1년’인 8년에 육박한 시간. 이제 1년이 더 지나면 제사장으로서 수명이 끝나 목이 잘리든지, 발목이 수레에 묶인 채 죽을 때까지 땅에 끌려 다니든지 하여간 죽을 수도 있어서 도망한 거 같은데 (내 생각이다, 인용하지 마시라. 창피당할 수 있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이타카에 도착해보니 청혼자에 둘러싸인 아내 페넬로페가 열라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있었던 거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라는 견해도 많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전쟁기간 동안 트로이아에서 온 첩자가 그리스 전역을 다니며 전쟁 나간 남자들이 하라는 싸움은 하지 않고 트로이아 여자들하고 살림차려 아이 만들면서 잘 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사실 거짓말도 아니었지만) 퍼뜨리는 바람에 열 받은 그리스 여자들도 맞바람 피우는 것이 유행했으며, 대표적으로 클뤼타임네스트라와 바로 이 페넬로페를 들고 있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이 맏딸을 희생시킨 것에 잔뜩 독이 올라 있어서 웬수지간인 시 사촌동생 아이기스토스와 불장난을 했지만, 페넬로페는 오십 명에 달하는 청혼자들을 줄 세워 그 사람들 모두와 즐겼는데, 당연히 누구 씨인 줄도 모르는 아이도 만들었으니 그게 목신 판이란다. 이런 판본도 있다고. 거 참, 깬다.


  그리스 신화라고 해서 재미있을 거 같지? 이 책은 1955년에 출간해 당시에는 꽤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지금 읽어봐도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독특한 상황 해석이라고 판단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고 나처럼 아무 생각없이, 그리스 신화를 알기 쉽게 설명했을 거라고,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쓴 그레이브스이니만큼 어느 신화 서적보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덜커덕 읽었다가는 코피 나기 십상이다.

  이 작품은 영국인이 인류학적 시각으로 쓴 그리스 신화 해설서이다. 그레이브스의 문학적 문장은 찾아보기 힘들고, 두 권 1,448 페이지가 똑 같은 구조, ① 신화의 내용, 다른 버전이 있으면 그것들도 모두 포함, ② 신화의 출전 ③ 그레이브스의 해설로 되어 있어서 제일 마지막 챕터인 <트로이아 전쟁> 쯤 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고양된 인내심이 휘리릭 날아가는 바람에 나처럼 오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돼지고기 구워 쐬주 잔을 치켜 올릴 지 모를 일이니 조심하시라.

  아오, 내가 나를 생각해도 대단해. 이걸, 두 권을 다 읽었어. 미친 거 아냐? 이러다 미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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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5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falstaff님의 인내심은 쐬주에서 나오는거죠? 별 3개 다는 저 벽돌책을 읽어내시다니 역시 쐬주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입니다. 벽돌책은 별 5개라야지 저같으면 초반 50페이지에서 나가떨어질듯요. ㅎㅎ

Falstaff 2025-07-25 15:3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거 우짭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쪽팔려 그렇다고 할 수도 없으니 ㅋㅋㅋ

페넬로페 2025-07-25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우리피데스 비극 읽으니 헬레네가 이집트로 가서 거기서 자신을 찾아 온 메넬라오스랑 떠나더라고요.
페넬로페도 그런 해석이 나올만 한 것 같아요. 20년동안 오뒷세우스가 돌아오지 않으니 ㅎㅎ
다양한 버전이 있나 봐요^^

Falstaff 2025-07-26 05:50   좋아요 1 | URL
저는 <이집트의 헬레네>는 에우리피데스가 지은 완전한 허구, 원래 신화와 관계없이 쓴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그것도 한 버전이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재미는 없지만 같은 제목의 오페라로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페넬로페 님이 꼭 댓글 다실 거 같았어요! 저도 읽으면서 화들짝 놀랐거든요. 세상에나... 싶어서요. ㅋㅋㅋㅋ
 
별 볼일 없는 여자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경심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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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후반을 살다 간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부르주아 댄디 보이, 오스카 핑갈 오프플레허티 윌스 와일드Oscar Fingal O’Fflahertie Wills Wilde.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필명을 휘날린 것과 비슷한 중량으로 당시 영국에서 범죄였던 동성애와 ‘심한 외설’로 유죄판결을 받아 2년 동안 악명높은 레딩 감옥에서 복역하며 연인 알프레드 보시 더글러스에게 보낸 연애편지로도 유명한 인물. 나는 이이의 대표작, 장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희곡 <살로메>가 들어 있는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이렇게 단 두 권만 읽었을 뿐이라 말 그대로 초록색 바탕에 검정 줄이 죽죽 그어진 수박 껍데기만 핥았을 뿐인데, 그렇더라도 딱 잘라 말하면 ①나하고 안 맞아도 참 안 맞거나, ② 와일드는 얼굴이 잘 생기고 허우대 멀쩡한데다가 옷도 잘 입어 과대 평가된 대표적인 시인, (극)작가일지도 모른다는 거.

  물론 언어에 특별한 영재가 있어서 불어와 독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명문 대학인 더블린 트리티니 칼리지와 옥스퍼드를 나와 눈부신 언변으로 당대 사교계의 스타로 군림한 것처럼, 오늘 읽은 <별 볼일 없는 여자>에서도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일링워스 경의 혓바닥이야말로 정말 현란하게 굴러간다. 사실 나는 (아일랜드 사람 예이츠도 마찬가지지만) 와일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 글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여자> 속에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댄디 스타일의 등장인물인 일링워스 경과 앨런비 여사의 톡톡 튀는 대화가 참신했을 수도 있으나, 어째 나이 좀 든 사람들이 주책없이 발랑 까진 말을 주고받는 대사를 그냥 말장난 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으니 와일드가 나하고 안 맞기는 정말 안 맞는 모양이다. 자꾸 강조하다가 혹시라도 만장하신 와일드 팬들한테 얻어 터지는 거 아냐 이거?


  오스카 와일드의 부모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였으며, 와일드 본인도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경제적으로 궁핍해본 적이 없다. 그런 면모가 제일 잘 드러난 작품이 이 <별 볼일 없는 여자> 아니겠나 싶다. 작품의 무대는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국식 시골 귀족 헌스탠턴 씨의 저택. 시골 귀족 커뮤니티의 파티까지는 아니고 영국 고유의 향사鄕士gentry 계급 사람들이 모여 조촐하게 정찬을 곁들인 사교 모임이다. 등장인물 역시 앞에서 말한 현대적, 현대적이라고 해봤자 19세기말의 현대적이니까 세기말 분위기도 있고, 돈지랄하는 댄디 성향도 있는 반면 20세기 전쟁 이후의 진보적 개념은 1도 없어서 그저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각만 유지하는 일링워스 경과 앨런비 여사. 이들과 거의 반대 성향, 즉 당대 빅토리아 시대에 충실한 완고한 신사 숙녀들인 캐럴라인 부인과 그의 찌질한 남편 존 나리, 흠, ‘존 나리’를 한 번에 붙여서 빨리 발음하니 좀 이상하기도 하군. 하여간 이 부부하고 같은 부류이자 오늘 밤의 호스티스인 헌스탠턴 부인, 스튜트필드 부인, 지역 하원의원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민중을 몇 수 아래로 깔고 바라보기를 즐기는 켈빌 씨, 부주교 도브니 박사도 있다.

  위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나이든 꼰대들. 이러면 연극이 재미없겠지? 역시 젊은 커플이 나와 서로 사랑을 해야 기름칠이 되니까 가난한 은행원 제럴드 아버스노트와 미국에서 영국에 다니러 온 청교도 출신 (죽은) 백만장자의 상속녀 헤스터 위슬리 양도 나온다. 서로 사랑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고백은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만리장성을 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큼 진도는 나간 것 같기도 한 커플인데 드라마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한 계기가 만들어져 순식간에 화르륵 불타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은행의 평사원인 제럴드 총각이 월 100의 수입으로 백만장자 상속녀한테 청혼하기도 껄끄러운데 감히 향사들의 정찬에 초대를 받았어? 그렇다. 높은 귀족에다가 얼마 안 있어 외교관 신분으로 인도로 가기로 결정된 일링워스 경이 제럴드 총각을 개인 비서로 고용할 계획인 것이 사교계에 널리 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 몇 번, 적어도 한 번은 확실하게 사랑에 목 매달아 야반도주한 부도덕한 경험이 있는 레이첼 아버스노트 여사의 아들을 초대한 거다. 이 정도로 일링워스 경의 재력과 정치적 위상이 대단하다는 말씀. 심지어 제럴드의 칩거중인 엄마인 아버스노트 여사마저 개별적으로 쪽지를 보내 일링워스 경의 비서로 발탁되었다고 전해 모임에 오라고 연락할 정도이니 정말 대단한 일링워스 경이지?


  이제 드라마를 드라마처럼 만들어보자.

  제럴드 청년의 어머니 레이첼 아버스노트 여사는 어떤 부도덕한 과거를 갖고 칩거하면서 불우한 사람을 위한 자잘한 봉사를 하고 있을까? 예전에 어떤 사랑을 하느라고 야반도주를 했을까? 상대가 혹시 유부남?

  아니다. 당시 아버스노트 여사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스물두 살의 조지 하퍼드 청년을 사랑했고, 조지는 레이첼한테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검은 머리 파뿌리 운운하기도 전에 먼저, 했다. 이날부터 레이첼의 배가 부르기 시작해, 초조해진 레이첼은 조지를 만날 때마다 빨리 결혼하자고, 적어도 아이가 밀고 나오기 전에는 식을 올리자 요구했지만 조지는 겁이 났던지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아이를 출산한 레이첼. 절망한 그녀는 아이를 들쳐 업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찌그러진 귀족의 친척인 조지 부모가 레이첼과 아이를 지원해주고 보살펴줄 것이고 조지가 정신을 차리면 결혼도 시키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아마 조지의 확실하지 않은 사랑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나 싶다.

  여기까지는 팍, 이해가 가시지?

  이젠 일일 드라마 또는 아침 드라마가 될 차례이다.

  조지 하퍼드는 생겨 먹기를 천생 댄디 보이. 당연히 공부는 잘한 거 같고,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말주변이 기막히다. 주로 현상을 비꼬는 데 일가견이 있으며 (예쁜) 여자를 봤다 하면 일단 주둥이를 내밀어 다른 입술로부터 립스틱을 옮겨 바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 번도 결혼해보지 않은 독신. 잉글랜드 각지에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여우사냥을 즐길 수 있는 들판과 숲을 소유하고 있으며, 런던에도 몇 채의 저택이 있고 곳곳에 별장까지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 작품의 무대인 시골 사교계에서는 당연히 하느님과 초등학교 동창 수준이다. 바다 건너 대륙에도 여기 저기 부동산과 저택을 가지고 있을 듯. 물론 이런 대규모 부동산을 자기가 열라 돈을 벌어 살 수 있을 확률은 10의 600제곱 분의 1이다. 그럼 어떻게? 유럽의 부르주아 귀족 계급이 항상 그렇듯이 상속받은 것이지 뭐.

  조지의 부모가 귀족 계급의 찌그러진 친척이라며? 근데 상속을 받았다고? 그렇다. 완전히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이다. 백작이든가 공작인 친척이 자식 없이 죽었다. 혹시 모르지, 오스틴과 브론테 작품에서 자주 나왔듯이 딸만 있어서 잉글랜드의 한사상속 제도에 걸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자 형제한테 넘겼어야 했는지도. 그래서 그게 조지의 형한테 가야 했는데, 마침 형도 죽어버려 모든 재산이 조지 하퍼드한테 왔고, 재산만 온 게 아니라 작위까지 한 방에 들이닥쳐 졸지에 조지 하퍼드 일링워스 경으로 이름까지 바뀌어 버렸다. 아, 될 놈은 된다. 만고의 진리네.


  그러면 감 잡히시지? 왕년의 조지 하퍼드. 지금의 일링워스 경. 그리고 한 시절 일링워스 경의 아이를 출산하고 좌절해서 혼외자 갓난 아들과 함께 야반도주한 레이첼 아가씨. 그때 조지라는 젊은 놈은 혼외자 갓난 아들한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서, 레이첼은 자기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고 끝끝내 경멸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이름을 가져다 아들한테 주었으니 그게 뭐? 맞다, 제럴드.

  사실 그리 뛰어난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제럴드를 보자마자 뭔가 끌리는 게 있어서 비서로 채용하려 했을까? 그건 아니고 아마 아버지 유전자 덕인지 똘똘한 면이 눈에 보였던 거 같다.

  크. 출생의 비밀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제 제럴드 팔자가 한 번에 휘까닥 바뀔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썩어도 준치, 그래도 오스카 와일드인데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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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동화 -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알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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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동화》까지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은 당분간 쉬자고 마음먹었는데 정말 그렇게 될 듯. 《사이버리아드》에 이어 완전 로봇나라 이야기이다. 게다가 《사이버리아드》에서는 제일 앞에 실린 개발자 트루를 이야기 가운데 세 편이 《로봇 동화》의 제일 뒤에 또다시 실렸다. 이제 보니 《사이버리아드》에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노래”라는 소제목으로 따로 묶인 세 편이다. 에잇 뭐, 그럴 수 있지. “사이버네틱스의 노래” 앞에 실린 단편 <무르다스 왕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햄릿> 페러디. 그렇다는 얘기지 그래서 후지다는 말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기에 따라서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


  로봇의 나라라는 설정은 상관없다. 불만은 이 로봇 나라가 하나같이 왕정을 하고 있다는 점. 왜 로봇 나라에는 대통령이나 수상, 총리가 없고 전부 왕들이 군림할까? 비록 전제정치를 하지 못하고 앞에서 말한대로 삼촌 대신 큰아빠가 내 아빠를 시해하고 왕이 되려 했던 햄릿 비슷한 이야기도 있고, 수시로 왕의 자리를 탐내는 역심을 품은 로봇도 숱하게 등장하지만 하필이면 왕정, 당시 공산주의를 선택한 폴란드의 과학 픽션 작가가 봉건시대에나 걸맞은 왕정을 기계와 인공지능과 자체 진화가 가능한 로봇시대에 가져다 맞추었을까?

  둘째. 몸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로봇이지만 지극한 인공지능으로 하는 짓과 생각은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로봇끼리 서로를 부르는 것도 ‘사람’이며 굳이 인간을 묘사하려면 ‘유기물’이나 이 비슷한 단어를 구사한다. 로봇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이나 다른 포유류, 기타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같은 것들도 로봇이라는 무기물 생명체를 말살할 수 있는 종자로 본다. 심지어 균류, 흰 곰팡이나 이끼 같은 것들까지. 흰 곰팡이가 돋은 공간 안으로 침투한 로봇. 이들은 얼른 흰 곰팡이 또는 이끼가 낀 거대 우주선을 폭파하고 귀대하지만 균류는 로봇의 틈새, 빈 공간에 포자를 뿌렸고 그곳에서 성장해 급속도로 번식, 금속을 부식해 이들을 멸종시켜 버린다. 인간종은 로봇과 달리 거짓 약속을 밥 먹는 것보다 쉽게 해 로봇 국가의 왕 이하 모든 신민들을 대상으로 사기 치고 잠적하기도 한다. 로봇에게 가장 큰 천적이 바로 유기물. 아예 극약 수준이다.


  셋째. 무한대의 우주와 극소 지역인 원자 간의 대위법. 이를테면 지난 달에 쓴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독후감에서 이야기했듯 10의 600제곱. 이 정도 되면 단위는 아무 소용없는데, 10의 600제곱 미터를 반지름으로 하는 공, 구 형태를 우주의 총 부피라고 하자. 반면에 그러면 10의 600제곱 분의 1미터를 지름으로 하는 구도 있을 것 아닌가 말이지. 이 정도면 원자, 소립자. 기타 어떻게 부를지 아직 인류가 발명하거나 합의하지도 못한 단위로 작은 ‘수학적 점’보다도 미세한 공간이다. 큰 구를 무한대 우주라고 하면 반대로 작은 구를 극미세 원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면 다음 문제. 만일 이 두 구 가운데 중요한 정도가 있다면 무엇이 더 중요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허무하다. 우주도 허무하고 극미세 원자도 허무하고, 그 속의 인간도 허무하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늘의 별이라는 존재.

  그건 그냥 새까만 우주에 떠 있는 불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짝반짝 작은 별 주변만 조금 뜨끈하고 나머지 캄캄한 공간, 드문드문 식어서 가루가 된 미세 모래와 먼지로 껍데기가 덥힌 행성, 위성, 그냥 떠 있는 금속과 암석과 간혹 얼음 덩어리들은 절대온도 0도 섭씨 영하 273도 근처의 차고 얼어붙은 것이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이 놓인 빈 공간. 그게 우주이다. 위에서 말한 절대 허무 그 자체. 아무것도 없음. 그리하여 내가 읽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모든 작품 속에는 이 허무와 아무것도 없음의 주제가 알게 모르게 넘실거린다.


  제목이 《로봇 동화》, 동화라니까 그냥 재미있고, 교훈적이고, 아이들 잠자리에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동화는 동화인데 인간이 아니라 로봇을 대상으로 쓴 동화이다. 근데 로봇은 어떻게 태어날까? 인간이 만든 로봇 말고 로봇이 만든 로봇 말이지. 로봇도 진화를 하는 시대니까 그들 역시 섹스를 통한 번식을 할까? 아닐 걸? 로봇은 천성적으로, 신체 구조적으로 습식접촉, B급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말한 것처럼 액체교환법으로 아이를 만들지 않고, 책에서 예를 든 대로 왕명에 의하여 왕자를 생산하고자 하면 관련 프로그래머 장관들이 모여 마치 교황, 나는 어째 ‘교황’이란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아서 그냥 ‘교왕’이라고만 하자, 교왕이 죽으면 다음 번 교왕을 뽑기 위해 콘클라베를 여는 것처럼 그들끼리 실험실 또는 왕자 제작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왕이 주문한 외모와 성격을 프로그래밍해서 만든다. 이 로봇 왕자가 인간 왕자와 다른 점은 낳는 즉시 모든 학습이 완료된 상태라서 즉각 왕의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

  이런 로봇 어린이가 읽는 동화가 이 책에 든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이다. 그러니 말은 동화라고 해도 죽고 죽이고, 반역하고, 사기치고, 무한과 제로 상태와 허무가 등장할 수 있다.

  내가 서양의 동화를 많이 읽지 않아서 이 작품들이 어떤 것을 패러디했는지 <햄릿> 하나만 생각할 수 있어 아쉬웠다. 서양 사람은 다 많이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재미있는 작가이고 혹시 몰라, 몇 번이나 다시 말하지만, 스타니스와프 렘이야말로 정말 외계인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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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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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뱅자맹 콩스탕 드 레베크.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위스로 도망한 위그노 교도 드 레베크de Rebecque 가문의 자제. 당연히 귀족이며 엄마 배에서 나올 때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나왔다. 1767년생이니까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던 1789년에 생일이 아직 안 지나 스물한살. 열여섯 살 때 독일의 개신교대학에 다닐 때 유부녀와 불륜을 저질러 에든버러로 유학한 전력이 있으며 이때 버릇은 나이 들어 연장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쉼 없었다. 다시는 콩스탕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으니 이이의 바람기에 대해서 더 알려고 하지 마시라. 평생 딱 한 편의 소설을 썼다. 그게 바로 <아돌프의 사랑>이며 주로 에세이를 많이 쓴 정치가. 1794년 로베스피에르 사후 (비겁하게) 공포정치가 종식된 다음부터 정치판에 뛰어들어 나폴레옹하고 의견이 갈릴 시기도 있었지만 나중에 보나파르트가 워털루 전투에서 쌍코피 흘릴 때까지 지속한 백일천하 당시 하필이면 나폴레옹과 죽이 맞았던 인물. 이때도 콩스탕의 변신은 눈부셨다. 나폴레옹이 엘베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를 탄핵하는 글을 발표하더니 파리로 잠입해 정권을 다시 잡는 순식간에 안면을 바꿔 전심전력을 다해 나폴레옹을 보위하기로 약속했단다. 근데 (내 생각에) 웃기는 건 1815년에 부오나파르테가 패전하자마자 콩스탕이 런던으로 도피를 한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전히 부르봉 왕가의 루이18세(마리 앙트와네트의 시동생)이 왕좌를 깔고 앉은 왕정복고 시기인 1817년에 파리로 돌아와서 하원의원을 해먹었다는 거. 하긴 뭐 위정자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 이후 자유주의자를 자처해 루이18세의 뒤를 이은 샤를10세하고는 또 척을 졌지만, 대신 노동자, 학생 등한테 인기를 얻어 죽은 다음에 국장까지 해 잡쉈다지 뭐야? 대중은 그리 현명하지 못하거든. 어쨌거나 자기 한 평생은 기깔나게 살았다.


  작품은 뭐 그냥 사랑 타령이다. 아니, 사랑도 아니다. 1806년에 초고를 쓰고 1816년에 완성해 출간한 책. 작품의 주인공 아돌프가 이자벨 드 샤리에르 노부인이 죽은 1805년에 열일곱 살이었으니 스물여섯 살이면 1814년. 그러니까 1810년 경부터 14년까지가 시간적 배경이다. 장소는 주로 독일의 소도시 D와, 아돌프의 아버지가 선제후 궁정의 장관으로 근무하는 선제후국에서 잠깐, 보헤미아의 지방도시에서도 잠깐,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 저택. 딱 봐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당시 세계에서 제일 막강하던 프랑스 군을 이끌고 마당쇠가 싸리비로 빗질하듯 독일과 러시아를 짓쳐나갔다가 애먼 병사들만 수만 명 얼려 죽인 전쟁 앞뒤 몇 년이다. 근데 그딴 거 아무 신경 쓸 필요 없다. 등장인물 가운데 전쟁과 국민의 고통에 관심있는 인간은 한 놈도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없는 것들, 천한 것들만 죽어 나가는 법이다. 있는 분들, 높은 양반들은 전쟁과 관계없이 사랑타령만 해도 시간은 능률능률 흘러간다.

  아돌프. 좋은 이름인데 1930년대부터 이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아돌프 말고 이 책의 주인공 아돌프는 22세에 괴팅겐 대학을 졸업하고, 선제후 궁정의 장관인 아버지의 권유로 유럽 여행을 즐기면서 식견을 넓히기도 했다. 아버지가 외동아들인 아돌프를 얼마나 아꼈는지 언제나 어떤 요구도 들어주고, 문제가 생기면 부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그렇다고 부자 사이가 그리 원만했던 건 아니다. 아돌프가 보기에 아버지는 처음엔 공감의 웃음을 보이다가 얼마 안 가 결국 대화마저 끊어버리는 냉철하고 신랄한 관찰자였다. 이런 부자 사이는 대부분 아버지의 잘못이기는 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예 눈꺼풀 안에 넣고 다니며 키울 생각이었는지 세상에 모자란 거, 아쉬운 거, 하고 싶은 데 못하는 거 하나 없이 사는 게 습관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요량에 한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삐지는 외골수 내성적 성격으로 고착된 것처럼 읽힌다. 에잇 씨앙. 나한테도 그런 아버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공평한 게 어디 있니?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대학을 졸업한 아돌프는 집안 친척인 P백작이 초청을 해 괴팅겐을 떠나 잠시 작은 도시 D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P백작은 D시에서 폴란드 태생의 첩 엘레노르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살았다. 아마 본처도 살아 있을 거 같다. 죽어도 이혼해주지 않으면서.

  엘레노르가 어떤 여자인가 하면, 폴란드의 상당한 귀족 가문에서 무남독녀 따님으로 태어나 지적 소양은 평범한 수준이더라도 교양과 몸가짐, 고상한 기품과 자존심 같은 덕성을 넘치게 갖추었는데, 폴란드에서 내란이 생겨 부친은 추방당하고, 어머니와 엘레노르만 프랑스로 피난을 했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19세기 초 파리에서 여자 혼자 살 수 없어서 P백작의 첩으로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조금 후에 알게 되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첩실로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P백작이 파산을 하고 법적으로도 구속 위협에 처했을 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엘레노르는 헌신적으로 P백작의 곤경과 가난을 함께 하면서 용기와 이성으로 적극적으로 도와 백작의 재산을 일부나마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재산 소송 건으로 D시에서 2년간 체류 예정이다. 만일 승소하면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을 확신하며, 조금 지나면 정말로 승소해 백작은 자기 재산을 온전하게 다시 찾는다.


  아돌프는 작은 도시에서 딱한 수준의 촌스런 사교계 사람들과 어울리려니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눈에 띄는 젊은이가 한 명 있어서 말을 트고 지냈는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사교계에서 그나마 괜찮은 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오랜 노력 끝에 부인의 코르셋 끈을 푸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성공담은 물론이고 그간의 속사정과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조차 얼마나 호기심을 부추기던지. 아돌프는 여태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지난 세월이 갑자기 후회스러웠다. 그때까지 이성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소위 모태솔로라는 말인지, 단지 연애 경험만 없다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아돌프 앞에도 새로운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허영이 깃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거 같았다니까.

  그럼 이제 다 나왔다. 괜찮은 부인과의 불륜. 그리고 P백작의 첩실인 엘레노르에 대한 원고지 분량. 거기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만이 진지한 남녀 관계이라서, 결혼 문제가 뒤따르지 않는 한 여자란 손에 넣었다가 때가 되면 떨쳐버려도 아무 불편이 없는 존재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19세기 초 귀족 집안의 연애관이란 게 이랬던 모양이다. 불륜이건 그냥 하룻밤 연애건 간에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대충 즐기다가 관계를 정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

  근데 사실 이건 유부녀 마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혼인상태이니까 상대가 미혼의 젊은 남자가 됐건, 유부남 부르주아 귀족이 됐건, 아니면 다른 건 몰라도 정력 하나는 끝내주건 간에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기다가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안면몰수하고 그냥 걷어 차면 되는 거니까. 참 재주들 좋았어, 그지? 애라도 덜컥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 모양들이었는지 말이야. 유전자 검사도 하다못해 혈액형 판별법도 없던 시절에. 하긴 그래서 더 편했을 지도 몰라.

  이렇게 아돌프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보다 열 살 연상의 엘레노르 여사한테 대시하기 시작한다. 아이 둘 있는 엘레노르가 척 보니까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애송이 새끼가 감히 자기 비단 스타킹을 벗기려드는 꼴이 가당치도 않아서 이리 빼고 저리 뺀다. 그럴수록 아돌프는 점점 몸이 달아가고, 급기야 이게 진짜 사랑인 것으로 오해해서 이젠 엘레노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프고, 잠을 안 자도 졸립지 않은 반 마취상태로 접어든다. 젊은 남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죽자사자 덤벼드니 엘레노르 역시 아돌프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 착각해서 이젠 자기 역시 아돌프를 사랑하는, 사랑해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싶을 정도로 푹 빠져 버린다.

  어떻게 될 거 같은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뻔한 결말이지. 당연히 비극.

  이제 할 거 다 하고, 날짜도 벌컥벌컥 지나니까 젊은 만큼 변덕스럽기도 한 아돌프는 어느새 슬그머니 엘레노르한테 물리기 시작하는 반면, 엘레노르는 날이 갈수록 아돌프에게 목매달기 시작한다. 이렇게 둘은 사랑에서 엘레노르의 집착과 아돌프의 질림으로 변질되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부터 우유부단하기에 세상 둘째가 아쉽던 아돌프가 말끔하게 정리할 주변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엘레노르는 아돌프를 위하여 남자 버리고, 두 아이까지 몽땅 버리고, 백작이 되찾은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자발적인 제안도 물리치며 아돌프, 오직 아돌프를 향해 강한 편집 증상을 보이고 있는 비극적 판국에, 독자는 읽기가 가면 갈수록 지긋지긋해진다.

  사랑? 그거 잘못하면 갈수록 비극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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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1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못인줄 알면서도 하는게 사랑이지요?^^

Falstaff 2025-07-21 07: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글쎄 그게 뭐가 좋다고 그리 목을 맸는지 말입죠, 크....

젤소민아 2025-07-22 0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의 마지막 문장에서 감탄했어요~~멋진 문장입니다!

Falstaff 2025-07-22 05:18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고맙습니다.
 
우주비행사 피륵스 렘 걸작선 3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전대호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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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번에는 피륵스Pirxie라는 괴상한 이름의 우주 비행사를 데려왔다. 20대 초반 우주비행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서 40대 초반의 관록 넘치는 중견 비행사가 될 때까지의 열 가지 에피소드를 담은 책 《우주비행사 피륵스》.

  연이어 렘의 소설집을 읽는다. 《사이버리아드》,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 이어 《우주비행사 피륵스》. 다음에 읽을 렘 역시 소설집 《로봇 동화》이다. 그리고 렘은 좀 쉬어야겠다. 《사이버리아드》를 읽으면서 작가의 우주적 유머에 너무 매력을 느껴 와다닥 해치운 기분. 《우주비행사 피륵스》에서도 피륵스가 생도 시절에 학교와 현장에서 치기어린 재치 만땅의 행적이 나와서 이 책 역시 독특한 유머와 장난기가 가득한 재미있는 책이겠구나, 짐작했다가, 천만의 말씀, 아니었다.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여자는 모르겠고, 남자의 20대 초반 시절, 똘끼 넘치는 시기에 그랬다는 거고, 이제 본격적으로 우주비행사 면허증을 따서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 우주운송업체의 항법사, 비행사, 그리고 선장의 직을 맡아, 직에 걸맞게 (결과적으로) 훌륭한 임무를 수행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와 《사이버리아드》를 읽으면서 나는 스타니스와프 렘이 인간보다는 기계와 인공지능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어떤 의미에서 단정해버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철저한 디지털 주의자이라고 여겼던 작가가 이번에는 또 인간의 직감, 직관, 본능, 그리고 경험과 역지사지의 법칙 즉 ‘입장 바꿔 생각하기’의 지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도대체 렘 선생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듯.

  제일 앞에 실린 작품이 <시험비행>. 졸업반인 4학년 생도 피륵스가 이제 학기를 마감하면서 시험비행용 우주선을 직접 운전해야 한다. 피륵스는 자신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괜찮은 생도 무리에 들지 못한다. 키만 훌쩍 컸지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뭐 그저 그런 수준. 그래서 일인용 우주비행선에 탑승하기 전에 다른 생도들이 거의 다 그렇게 하듯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커닝페이퍼를 만들어 소매 속에 숨겼다.

  임무는 우주왕복선 두 대를 인도하여 삼각 편대로 달에 접근, 루나 패스파인더처럼 일시적 적도 궤도로 달에 진입해 인도된 두 우주왕복선의 궤도가 제대로 진입했는지 확인한 후 독자 결정 항로와 가속도로 궤도로 이탈해 귀환하는 것이다. 본문은 더 복잡하다. 요약한 것이 이 정도.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주왕복선 선두에 서서 왕복선 두 대를 달 궤도까지 인도해주고 혼자 돌아오는 것.

  근데 무슨 커닝페이퍼가 필요하냐고? 우주선 앞에 계기판이 얼마나 많고, 화면이 또 얼마나 많은 지 모르시지? 나도 모른다. 중력가속도 g가 9.8미터*초제곱인데 시험비행에서 유지해야 할 가속도가 2.2g, 앞으로 비행사를 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가장 가혹한 조건에서는 거의 6에서 7g까지 경험해야 할 터이니 영화 같은 데서 낭만적으로 우주 공간을 보는 유리창 같은 걸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아마도 스크린이 대신하지 않을까 싶다. 스크린을 포함한 모든 계기판과 관련 지식을 생도가 전부 알 수는 없을 테니 커닝페이퍼를 가지고 탑승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생도 사랑이 참 자상하다.

  이제 정말로 우주비행선에 탑승해 복잡한 통로를 거쳐 조종실로 이동해 드디어 조종석에 앉았다. 지름 3미터의 유리 고치라고 표현하는 곳. 조종석과 조종간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하는데 당연히 생략한다. 하여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2.2g로 발진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가슴과 두개골이 고무의 탄력과 유사한 압력에 짓눌리면서 시야가 어두워진다. 가속도 때문에 그렇다. 전투기가 5g를 넘으면 조종사들이 간혹 기절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지? 그러나 시야가 어두워지는 건 순간, 잠시 동안. 무자비한 압력이 전신을 계속 누르기는 하지만 시각은 점차 회복되고 모든 비디오 스크린들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피륵스는 탁, 기겁을 한다. 커닝페이퍼가 어디 있지? 소매 속에 숨겨놓은 것이 가속도 때문인지 툭 떨어져 조종석 밑에 끼어 버렸다. 그런데 이 순간 정상궤도에 들어서기 위해 이번엔 -3g로 역가속을 해야 했다. 성공. 이제 우주선은 원래 지점 부터 고도 2400킬로미터 상공에 떠 있다.

  바로 이때 귀에 들리는 붕붕 소리. 크게 들리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붕붕 소리. 오, 주여. 합선인가? 화재? 공산권 우주비행학교라 예수도 믿지 않으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드디어 소리의 주인공이 눈 앞에 다가왔다. 우주생명체? 이때의 피륵스를 우주인이라고 하면 이 생명체 역시 우주생명체라고 할 수 있겠지. 거대한 파리 한 마리. 지구에서 피륵스 모르게 피륵스와 함께 우주선에 탑승해 우주생명체가 되어, 이제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이라 믿지 않을 수 없는 추한 녹갈색의 큼지막하고 성가시고 멍청한 동시에 약삭빠르고 교활한 파리.

  앗. 그런데 파리 한 마리가 아니네? 순간적으로 번식했나? 이렇게 잠시 생각했다. 확실히 큼지막한 파리 두 마리다. 그런데 비행목적상 무려 4g로 가속했다가 다시 2g로 감속하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이 두 마리의 파리가 교미까지 해버린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때 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모르겠고, 20세기 자동차운전면허 시험장의 차들은 거의 폐차 직전의 고물이었다. 생도를 위한 시험용 우주선 역시 고물 중에서도 상 고물. 거의 폐선 직전 수준이었을 것임은 20세기를 겪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터. 피륵스가 교미 중인 파리를 바라본 순간, 하필 이 파리들이 피복이 벗겨진 회로,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에 앞발을 턱 올려놓고, 흠흠, 즐기고 있는 거였다. 이 왕파리들이 만일, 진짜로 만일 몸을 조금 흔들어 합선을 일으키면 회로 차단기가 전류를 끊을 터이고, 파리는 감전사할 것이며, 그러면 다시 전력이 복구될…희망의 몰아지경에 빠지는 피륵스. 희망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일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갔다.

  섬광이 번뜩하고, 등이 꺼지고, 일시적 정전이 1초도 지속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퓨즈가 나가면서 완전한 암전. 다시 전력이 들어왔고 또다시 암전. 눈을 부라리니 두 전선 사이에서 타 죽은 파리들. 이제 최소 전력만 가지고 운전해야 하는데, 이 모든 자동조종장치가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원자로는? 틀림없이 자동 조절장치를 가지고 있을 터. 근데 확실해? 피륵스는 확신할 수 없다. 모든 자동장치를 무시하고 조종실 안에 추한 녹갈색의 큼지막한 파리가 두 마리씩이나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지금 피륵스 앞에서 섹스를 즐기다가 까맣게 타 죽어버렸지 않은가. 진퇴양난, 일촉즉발, 누란의 꼭대기에 선 피륵스. 이걸 어떻게 할꼬? 에잇, 모르겠다. 비상사태 발생이니 이제 남은 건 수동조종만 남았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 피륵스. 그는 과감하게 조종석의 벨트를 풀고 일어나 수동 조종간을 움켜쥔다. 동시에 환경은 무려 5g 이상으로 치솟는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혀 입술이 터져 유혈낭자한 부상을 입은 피륵스. 그는 끝까지 수동조종간을 잡아 죽기살기로 수동 운전을 이어나가 안정된 상태로 만들어낸다. 성공!

  이제 보고를 해야 하는데, 달 기지에? 아니면 지구의 교장한테?

  이때 눈에 들어오는 또 한 마리의 파리. 그리고 난데없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린다. 등 뒤엔 문이 없는데 갑자기 그게 열리면서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교장. 이게 전부 시뮬레이션이었던 것. 파리도, 파리가 교미를 피복이 벗겨진 전선 위에서 교미를 하는 것도. 합선과 정전과 비상상황까지 모두 다. 교장이 칭찬한다. 피륵스, 잘 했어! 비상상황에서 자동, 즉 컴퓨터 또는 AI를 믿지 않고 수동으로, 인간의 직감과 직관, 그리고 본능적으로 대처해 생존에 성공한 것이 교장의 눈에는 기특했던 거였다. 실제로 매사에 뛰어난 동료 생도라서 피륵스가 아니꼬워했던 모범생 보에르스트는 물을 먹었던 거다.


  어쩐지. 이제야 저 앞에서 교수 불펜이 피륵스한테 한 마디 했던 것이 생각난다.

  “컴퓨터는 인간의 작품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컴퓨터도 고장 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 《우주비행사 피륵스》에서는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인공지능이 인간과 인간의 구조물을 방해물로 착각하는 일이 몇 번 발생하기도 한다. 완벽을 기하는 프로그래머가 말 그대로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컴퓨터에게 필요 이상의 자료, 모든 자료를 기억하게 만드는 바람에 오히려 인간과 우주선을 파괴하는 경우. 채광을 위해 개발한 노동 로봇이 암괴가 무너져 충격을 받아 인공지능이 오작동해 인간을 살상하는 경우도. 이때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이미 생도시절을 벗어나 관록 붙은 베테랑이 된 영웅 피륵스는 자신의 경험과 입장 바꿔 생각하기로, 물론 조금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만,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8년. 아직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번째 인간의 발자국을 찍기도 전이다. 그럼에도 스타니스와프 렘은 달 기지와 화성 기지까지, 무척 생생하고 과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낭만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실과 과학적 추리와 상상력에 입각한 달과 화성 기지. 읽는 내내 우리나라 작가 복거일의 <파란 달 아래>가 생각났다.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른 달 기지, 화성 기지를 만들었을까? 1968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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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18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주비행사 피륵스는 좀 별로였어요. 뭔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좀 뒤죽박죽인 느낌이었는데 책을 읽어내기가 상당히성가셨다는 느낌이에요.
sf를 통해 현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스타니스와프도 진짜 매력적인데 백미는 이욘티히의 우주일지였어요. 최고!!! 이욘티히 읽으시고 꼭 글도 남겨주시고 그러고 쉬세요. 네?????

Falstaff 2025-07-18 15:50   좋아요 0 | URL
옙 다음 렘은 무조건 이욘티히입니다!
저는 천방지축 피륵스가 나이 들면서 연륜이 쌓여 생도시절과 달리 멋진 선장으로 변하는 게 나쁘지 않았는데요. ㅎㅎ 감상이 다 똑같으면 재미 없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