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이들 서문문고 124
장 콕토 지음 / 서문당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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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장 콕토는 안 읽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그가 쓴 희곡 <지옥의 기계>를 빌려 읽고 난 후, 그간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구나, 깨닫고 구입한 책이 콕토의 소설 대표작 <무서운 아이들>이다. 나도 소싯적에 Enfants Terribles, 하면 괜히 멋있는 거 같으면서, 폼도 좀 나고 그랬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을 겪고 사는 거다. 쪽팔려 하지 말자.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앙팡 테리블 역시 이 작품의 제목에서 시작한 거다. 

  1889년생인 장 콕토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해버렸으나 집안이 워낙 유복하여 좋은 교육받고 잘 성장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정상이라서 콕토는 바칼로레아에 연속 세 번 미역국을 마시는 바람에 자의반타의반 대학 진학을 포기, 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매진한다. 서른 살 때 <육체의 악마>를 쓴 레몽 라디게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4년 후인 1923년 라디게의 죽음으로 허탈상태에 빠진 콕토는 아편에 탐닉한다. 몇 년 간 모르핀 의존상태로 살다가 대오각성,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업에 집중하고자 오진 마음을 먹고 불과 17일만에 작품 하나를 썼으니 오늘 소개하는 <무서운 아이들>이다.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하면 심하게 말썽을 부리거나 조숙한 청소년을 일컫는다. 작품에서는 주인공 폴과 제라르, 그리고 중요한 조연인 다르즐로가 열네 살, 콕토의 의견을 그래도 옮기면 “무서운 개고기들”이었을 때 시작해서 제라르가 장가들고 얼마 안 되어 끝나니까 하이틴 시절을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1920년대엔 결혼을 빨리 했고, 제라르는 하나 있는 삼촌이 오늘 낼 하는 바람에 숨 넘어가기 전에 후딱 결혼을 해치워버렸으니까.


  전에 장 콕토를 안 읽겠다고 했던 것은 그의 짧은 희곡작품 몇 개, 그것도 원본이 아니라 극화하기 위해 대본화 한 것 몇 편을 읽고 난 후, 아니올시다, 허투루 결론 냈던 거였다. <무서운 아이들>의 역자 고 오현우는 책의 서문 격인 ‘해설’에서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詩)이며,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 젊은 넋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시를 여러가지 양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므로 그가 손대지 않은 예술 양식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콕토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소설시, 평론시, 연극시, 영화시, 데상시라고” 했단다. ‘데상시’에서 데상은 dessin, drawing, 소묘를 말하는 것으로 콕토가 전문가는 아니었을지언정 아마추어로는 상당한 수준의 대상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렸다….는데 나 같으면 명함에서 이 항목은 지우고 살겠네.

  희곡에서 대사를 시, 즉 운문이나 운문의 기분이 들게 쓰는 것은 하루, 이틀,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지만 ‘소설시’라면 그거 참, <예브게니 오네긴>, <휘페리온>, <푸른 꽃> 같은 걸 읽어봤지만 하나 같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설을 읽는 동안 <무서운 아이들> 이후에 또다시 콕토하고 멀어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자가 우리말에 맞게 의도적으로 작가의 시적 표현을 산문으로 바꾸었는지 오히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이 1974년 7월 5일. 역자 고 오현우가 51세 때였다. 이후 개정판이 나온 것이 2000년이고, 우리나라 관습상 특히 번역서의 경우 개정판은 책값 올리기 위해 편의상 판을 내는 것이므로 이 책에서도 우리말의 단어 선택이나 표현법이 나 중학교 다닐 때하고 거의 비슷해서, 좋았을 거 같지? 그렇지는 않고 어느새 낯설기까지 했다. 역자가 1923년생으로 2009년에 향년 86세로 세상 하직했다. 비록 이 책의 인터넷 구입가가 4천5백원밖에 안 하지만, 웬만하면 두 배의 책갑(이래봤자 판매가 9천원)을 내고 창비세계문학전집 48번 <앙팡 떼리블>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책과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1도 없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운운했을 정도로 (프랑스어 원문은 전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말 문장은 좋다. 다만 우리나라 작품도 그렇지만 특히 번역작품은 세대가 바뀌면 판도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로 말했을 뿐이다. 예스러운 번역을 견딜 수 있다면 당연히 서문문고 124번인 이 책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푼이라도 싸다.

  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 서문문고에서 간혹 볼 수 있어 문고를 통째로 검색하다가 사르트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눈에 띄어 골랐었다.


  콩도르셰 고급 중학교 옆의 암스테르담 거리 72의 2호, 시테 몽티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시테cite는 집단주택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하자면 몽티에 단지 정도. 시테의 주인공들은 단연 콩도르셰의 2학년 개고기들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중2 무서워서 김정은이 남침을 못 한다잖은가. 3학년으로 진급하면 암스테르담 교사校舍를 떠나 고마르텡 거리의 3학년 교사로 옮겨가고, 암스테르담 아이들을 우습게 아는 오만을 떨겠지만 눈이 펄펄 내리는 시테 몽티에의 오후 네시 15분, 그레브 광장을 내려다보는 조금 높은 계단에는 곱슬머리에 상처입은 무르팍, 호주머니 속에 아홉 날 달린 나이프가 든 학교 짱 다르즐로가 내려보는 가운데 대대적으로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 콕토가 동성애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같은 중2 개고기 가운데 폴이라는 아이가 있어, 다르즐로를 향해 막연하면서도 강렬하고 고칠 길 없는 괴로움과 성sex도 목적도 따르지 않는 순결한 욕망에 차, 언제나 그를 동경해 마지 않았다. 폴도 다르즐로를 위하여 망토를 휘날리며 영웅같이 눈싸움의 한 복판으로 쳐들어갔으나, 아뿔싸,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 큼지막한 눈덩이를 주둥이에 맞아 앞니가 얼얼해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 부분에 미세혈관이 워낙 촘촘하게 배열해 있어서 상처의 깊이보다 훨씬 많이 피가 흐르기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피를 보더니 중2의 제왕인 다르즐로가 흥분을 했나, 갑자기 폴을 향해 돌진, 단단하게 뭉친 주먹 만한 눈덩이를 던져 가슴팍에 퍽, 명중을 시켜, 불쌍한 폴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제라르라는 개고기도 있어서 폴이 다르즐로를 동경하는 바로 그 이유로 폴을 동경했던 터라, 폴을 보살펴주고, 파수를 보아주고, 보호하고 다르즐로의 눈초리에 몸을 태우지 않도록 막아주고자 스스로 노예가 될 정도였다. 제라르는 까무러친 폴과 이 무도한 무리들을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냅다 학교로 뛰어가 훈육주임 선생과 수위를 대동해 치열한 눈싸움을 단박에 그만두게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5수밖에 없음에도 폴을 택시에 태워 아픈 엄마와 열여섯 살 먹은 누이 엘리자베스가 사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속으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못말리는 표독스런 말씨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엘리자베스한테 택시비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폴네 집으로 말하자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빠가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현금과 현금대체 가능 자산을 몽땅 싸들고 나가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보다 조금, 겨우 조금 더 예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한 3년 정도 간혹 얼굴만 내밀며 살다가 간경화가 생기자 아빠의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빠를 내버렸으며, 세상에 갈 곳 하나 없는 아빠는 집으로 기어 들어와 엄마 곁에서 죽어버렸고, 덕분에 엄마도 피폐해져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남매는 엄마한테 파리한 얼굴을, 아빠로부터는 무절제와 멋과 지독한 변덕을 물려받았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건, 부모와 남매의 주치의가 이 가족들을 넘칠 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 하여간 엄마는 좀 있다가 죽고, 남매는 엄마 죽기 전부터 둘이서 한 방을 쓰며 아주 방종하게 살고 있다. 오현우 번역에서는 그렇다고 근친상간 코드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 텍스트를 거론할 때 많은 이들이 빠뜨리지 않는 포인트가 남매간의 관계이기는 하다. 하여간 그렇다.

  엄마가 죽고 남매와 제라르가 합세해 비슷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얼마간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가 마네킹 걸로 취직을 한다. 여기서 만난 아가트라는 아가씨도 이들과 합류한다. 그리고 한 명 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미국계 유대인 미카엘. 엘리자베스와 미카엘은 결혼을 하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부터 딱 들었던 예상과 조금도 어김없이 미카엘은 결혼 며칠만에 크게 교통사고를 내 현장에서 즉사하고, 혼인신고서 한 장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한 방에 큰 부자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무서운 아이들이라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법. 여태까지는 다 그냥 그런 젊은이들끼리 잘 살았지만 한 방에 엘리자베스가 최고, 다음이 폴, 그리고 조금 부자 삼촌을 둔 제라르, 제일 하층 계급은 아가트. 이렇게 구분이 지어진다. 물론 내놓고는 아니고, 제일 높은 계급인 엘리자베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같은 팀원들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인물이 엘리자베스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조용했던 수면에 퐁당, 파류상이 생긴 것. 이때 또다시 등장한 악령 같은 인물 한 명. 그게 누구인지, 왜 악마 같은 지 등등은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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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12-21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독자를 책으로 확 끌어들이게 하는 문장들! 이미 읽어서 다행이다_ 생각했습니다요.

Falstaff 2023-12-21 15:31   좋아요 0 | URL
아, 읽으셨군요. 책의 내용이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앙팡 테리블과는 다른 것에 좀 놀랐습니다. ㅎㅎ

stella.K 2023-12-2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 콕토 옛날 프랑스 배운 줄 알고 있는데 말입죠.
희곡시, 영화시는 뭔지 모르겠습니다요. 그냥 배우들이 일상어가 아닌 시처럼 대사를 읊조리는 걸까요? 소설시도 그렇고.
암튼 함 읽어보고 싶네요. 친절한 설명과 안내도 감사함다.^^

Falstaff 2023-12-21 15: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영화에 깊이 관여를 했습니다. 워낙 여러 방면의 예술행위에 걸쳐 있다보니까... 출연도 했는지 그건 모르겠네요.
희곡시, 영화시, 소설시... 저도 스텔라 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 그저 싼맛에 읽어보시면 괜찮을 듯합니다. ^^
 
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아돌프 멘첼 그림, 진일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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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클라이스트는 창비세계문학시리즈 14번, <미하엘 콜하스>를 처음 읽은 18세기 태생의 19세기 작가로 알고 있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의 말장수인 미하엘 콜하스가 작센 지역의 지주 귀족계급인 융커로부터 착취와 폭력을 당해 소송을 하지만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아 봉기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민중봉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홍명희나 황석영 등 좋은 작가들이 있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노벨라 급의 <미하엘 콜하스>를 읽은 나는, 한 마디로 “내 취향하고 맞지 않다.” 평가절하해버리고 만 적이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미하엘 콜하스, 하면 민중봉기의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1777년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서 태어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차범근이 활약한 축구단을 보유한 유럽 항공운항의 허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하고 다른 도시다. 성姓 앞에 폰von이 붙어 있으니 귀족 끄트머리는 되는데, 공, 후, 백, 자, 남작 같은 건 모르겠고 하여간 아들이 태어나면 거의 의무적으로 군인으로 복무했었나보다. 유럽 귀족 자제의 군입대는 그냥 하는 게 아니라 15세 또는 더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의 자질을 키우면서 시작한다. 폰 클라이스트도 1792년 15세에 포트담 근위대에 들어가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불온한 사상의 동북진을 막기 위해 전선에 선다. 이후 1799년까지 7년 복무하고 예비역 대위 신분으로 제대한 후 꼴값을 떨기 시작한다.

  1800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고, 빌헬미네 폰 쳉게라는 아가씨와 약혼을 하는데, 편지를 통해, 정작 자신은 결국 프랑스혁명 정신인 인간의 회복을 위해 제대를 했건만, 남성과 여성, 국가의 시민과 아내의 역할 같은 고리타분한 주제로 약혼녀를 교육시키려 든다. 거참 신기한 귀족일세. 쳉게 아가씨도 나름대로 집에서 잘 교육받았건만 이런 수모를 고스란히 받고 있을까, 설마. 그리하여 약혼 2년 만에 아가씨는 약혼을 파투 놓았고,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직이나 교수 자리를 마다한 폰 클라이스트 선생께서는 곧장 실업자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꼴 좋다.

  이후 그는 드라마 작가, 단편소설 작가,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실패와 좌절은 결국 그토록 애타게 찾던 우라질 “인생의 목표”를 손에서 놓게 만들어 1811년 폰 클라이스트 나리께서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 여사와 손잡고 퐁당 빠져 한 많은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에 숟가락을 놓고 만다. 근데 알고 보니까, 이 동반자살이 불륜을 감당하지 못한 염문이(라도 됐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삶의 희망을 놓은 거의 생면부지의 유부녀를 죽인 것 비슷한 정황이어서, 죽은 다음에도 한동안 욕을 바가지로 먹은 거 같다. 역자 해설을 보면 그렇다. 어떻게 보면 참 세기말적인 짧은 삶을 살다 간 귀한 집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 같기도 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삶과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를 알면, 이 희곡 <깨어진 항아리>가 거의 슬랩스틱 수준의 코미디라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 작품을 1811년에 발표했으니 벌써 2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깨어진 항아리>를 시작하자마자 21세기의 발랑 까진 독자는 누가 항아리 또는 주전자나 손잡이가 달린 단지der Klug를 깼는지 단박에 알면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지만, 사실 2백년 전의 독자/관객도 그건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하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큰 줄거리는 이미 말을 한 거다. 항아리가 깨졌고, 극은 항아리를 깬 작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스토리라는 것을. 18010년대에 항아리가 서민 재산에서 어떤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항아리의 주인 마르테 룰 부인은 깬 작자가 자기 딸의 약혼자 루프레히트일지라도 기어이 누군지 밝혀 배상을 받고자 마을 판사에게 소송을 했다. 근데 한 밤중에 루프레히트가 과부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 이브와 데이트를 하긴 했으나, 지극히 건전한 데이트였고, 당시 미풍양속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갈 이른 밤에 헤어졌음에도, 하여간 루프레히트인지 레브레이트인지 둘 가운데 한 명이 범인임이 틀림없으니 판사 아담 선생께서 쇤네의 억울함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고, 막이 올라가면 마을 판사 아담이 다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 앉아 있는데 머리통과 얼굴이 참 볼만하다. 아담의 말을 전부 믿는다면,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 아침 성가를 웅얼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나올 때,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발을 어긋나게 했단다. 엇갈린 다리 때문에 급기야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진 듯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엊저녁에 젖은 걸 말리려고 화덕 받침목에 널어놓은 바지를 붙잡았지만 당연히 휙 미끄러져 화덕 모서리에 새긴 숫염소 장식에 걸려 찢어지고, 자신도 이마를 화덕 위로 향한 채 거꾸로 처박혀 숫염소가 코를 내밀고 있는 모서리에 부딪혔단다. 그리하여 얼굴의 옆댕이가 마치 덩치 큰 놈이 격분해서 휘두른 주먹에 맞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됐다고.

  희극의 초반에 다리에 붕대를 감고 얼굴이 엉망이 된 마을 판사가 등장하면 이건 뭔가가 있는 거다. 게다가 반대편 머리통에도 혹이 불쑥 튀어나왔으며, 당시 서민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가격의 가발 역시 난데없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가발에 대해 물어보니까, 밤새 고양이가 가발 안에다가 새끼를 낳았다나. 뭐 그럴 수 있지. 새벽같이 판사를 찾아온 법원 서기이자 조연인 리히트도 그런 줄 안다. 리히트가 주인공 아담에게 말하기를, 각 고을의 재판을 검열하기 위하여 법률 고문관 발터 선생이 전국을 순회하고 있어서 위트레흐트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전한다. 갑자기 난리가 난 거다.

  다리도 아프고, 얼굴도 엉망이 된 데다가 고양이까지 가발에다 새끼를 낳아버려 당연히 하루 이틀, 아니면 적어도 한 주일 동안 마을에서 재판을 열지 않을 것이지만, 하필이면 뇌물 같은 거 모르고, 향응도 모르는 청렴한 발터 고문관이 온다 하니, 어찌 재판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법정이 열리고, 위에서 말한 마르테 룰 부인이 깨진 항아리를 들고 법정에 출두하여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항아리를 깬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솔로몬 아담, 말이 그렇다는 건데 솔로몬 같은 지혜를 지닌 판사 아담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렸다.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이브.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이자 항아리를 깬 유력 피의자인 루프레흐트의 약혼녀. 진짜 범인을 실제로 본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증인이다. 이브는 사실 연인과 범인 사이에서 참 난감한 처지에 몰려 있다. 이 난감한 처지가 무엇인지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나, 난감한 짓이 어디까지 진행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쓴 작품이다. 괜히 야한 생각 마시라. 다만 하나, 미하엘 콜하스처럼 진실을 밝혀달라고 깡다구 있게 법정에 요청할 용기를 갖지 못한 아가씨라면 범인은 나름대로 사회적인 권세를 등에 업은 인물이리라는 것은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걸(독자도 알고 있다는 걸)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독자, 관객, 그리고 고문관 발터와 서기 리히트를 필두로 한 출연진의 초점은 어떻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느냐, 범인은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희극엔 최고의 악인이 등장한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고, 잘 알려진 모든 희극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귀여운 악당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책값이 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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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 눌러보고 왔는데, 더 오른 거 같네요?! -_- 전자책을 노려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 지만지 책은 알라딘은 할인 1도 안 해주잖아요? 예스24는 5%(전에는 그러더니 이 책 확인해보니 0%네요) 암튼 교보는 10%해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만지 책 사실 땐 교보로....

Falstaff 2023-12-20 16: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맞아요. 잠자냥님이 전에 콕 얘기하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지만지 드라마는 이젠 절대 내돈내산 안 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도서관에 신청하면 한 달 늦지만 팍팍 사주는 걸요.
연금 나올 때까지 무조건 개겨야 합니다. ㅋㅋㅋㅋㅋ
 
사일러스 마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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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북쪽, 북쪽이라고 스코틀랜드와 접경지역까지 가는 건 아니고 얼핏 맨체스터 정도 북쪽의 공업도시에 주로 직조공들이 많이 모여 살던 랜턴야드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곳의 한 젊은 직조공 사일러스 마너는 다른 직조공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와 착실하게 기술을 익히면서 활발하게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주로 (교회churches가 아닌) 예배당(chapel)을 중심으로 작은 은둔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으며 절친 윌리엄 데인과 친밀한 우정을 바탕으로 풍성한 삶을 이루어 사람들은 이들을 (골리앗의 목을 벤)다윗과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 같은 친구사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윌리엄은 신앙심이 깊지 않은 교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기 시각에 도취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스승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일러스는 이것조차 윌리엄이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윌리엄은 개종을 할 무렵에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성서는 성서인데 아무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성경에 저절로 검정 글씨가 솟아올랐으니 “하느님께서 불러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그러니까 진복자는 아니라는 얘기 맞지? 안 보고 믿는 자가 진복자인데 윌리엄 데인은 글자로 솟아오른 것을 보고 개종을 했으니까. 아니면 말고.

  사일러스는 젊은 하녀와 약혼을 했다. 그리고 돈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리며 일요일마다 데이트를 즐겼는데, 가끔 윌리엄을 불러 동행한 적이 있다. 이 당시 사일러스가 기도 중에 갑자기 경직발작이 일어났고, 보나마나 뇌전증이지만, 당시 유럽의 많은 우둔한 기독교인들처럼 이 예배당의 신자들 역시 이를 “선택된 형제에게 내리는 특별한 소명”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한 명, 윌리엄 데인 만이 사일러스에게 이 현상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닌 사탄의 방문”이라고 대못을 박으며 “마음 속으로 저주받을 만한 일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숙고해보라 권고한다. 그렇다고 사일러스는 아무 원한을 품지 않았으나 친구의 의심이 괴로웠는데, 신기하지, 이 시기부터 약혼녀 사라의 태도가 이상하게 왔다 갔다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예배당의 늙은 집사가 오늘 내일 해서 젊은 신도인 사일러스와 윌리엄도 야간에 몇 시간씩 간병을 해주었다. 환자를 돌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고, 잠이 깼을 때는 집사가 이미 요단강을 건너 갔으며, 집사의 돈주머니가 없어져서 찾아봤더니 윌리엄 데인에 의하여 사일러스 방 옷장 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사일러스 마너. 예배당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 노트르담>처럼 제비를 뽑아 유무죄를 가리기로 결정을 했지만, 마너는 결국 유죄 제비를 뽑아 훔친 돈을 변상하고 교인자격을 박탈당한다. 선고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앞뒤를 알아차린 마너.

  “윌리엄 데인. 바로 자네가 돈을 훔쳤지.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음모를 꾸민 거야. 그런 일을 꾸몄는데도 아마 자넨 잘 살아가겠지. 이 세상을 공정하게 지배하는 의로운 하느님 따윈 없고, 무고한 사람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하는 거짓 하느님만 있으니까.”

  윌리엄은 이렇게 반박한다.

  “이 말이 사탄의 음성인지 아닌지는 형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자넬 위해 그저 기도만 하겠네, 사일러스.”

  사라는 목사와 새 집사를 통해 곧바로 파혼을 통보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윌리엄 데인과 결혼했으며, 사일러스 마너는 도시를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살기 좋은 영국 Merry England라고 불리는 비옥한 평원의 중앙. 숲이 울창한 아늑한 분지. 세상 소식이 들리지 않는 곳에 래블로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마을 근처의 멋진 덤불 사이의 오두막을 빌어 여전히 직조 일을 하는 사일러스 마너. 창백한 얼굴에 툭 튀어나온 커다란 갈색 눈은 어려서부터 가는 실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내려다보는 일을 오래 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근시였는데, 이것이 농촌 사람들이 보기엔 악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마너가 이사 오고 15년이 지났지만 그는 옷감을 짠 것을 고객에게 가져다 주고 재료를 받아오는 일 말고는 일체의 왕래가 없이 한결 같은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지 않아도 선하지만 시골 특유의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래블로 사람들은 마너에게 뭔가 신비하고 특이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초와 약초의 조제법으로 구두쟁이의 아내 샐리 오츠의 심한 심장병과 수종에 큰 도움을 준 이후에 더해졌다. 그것을 보고 들은 래블로 주민들은 의사 킴블 선생에게 직접 가려면 돈이 많이 드니, 자잘한 환자들이 돈을 조금 들고 마너를 방문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화를 내며 이들을 쫓아내 버려 외톨이 직조공을 향한 동정심마저 반감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래도 마너가 갑자기 “눈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 있고 몸을 흔들어도 사지는 뻣뻣하고 손은 무쇠로 만든 듯 가방을 움켜쥐고 있어서, 죽었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와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새가 자기 둥지를 들락거리듯 그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벗어났다가 들락거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신앙적 신비로움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웃 교구 타알리에 있던 유일한 늙은 직조공이 숨을 거둔 이후 직조 기술 덕분에 그나마 환대받는 주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너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기 정말 싫고 이웃이 되어야 할 낯선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애를 느낄 만한 일도 없다고 단정하여 스스로 고립된 일상을 살 뿐이었다. 그러다가 첫 고객인 오스굿 부인은 직조의 대가로 21실링짜리 금화 다섯 개를 받은 것이 마너의 나머지 삶이 변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마너의 삶은 일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간혹 주민들이 아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집을 방문하면 여간해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만일 들였다 하더라도 왜 이 손님이 얼른 가버리지 않는지 악마를 연상시키는 튀어나온 눈알을 뒤룩뒤룩 굴릴 뿐이니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이웃이라도 쉽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마너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금화와 은화는 쓸 일조차 없었다. 15년 동안이나 래블로에서 살면서 남자라면 그래도 가끔 들러 친목을 다지며 맥주라도 한 잔 기울이는 주점 레인보에도 한 번 가본 적 없는 마너는 그저 철제 통에다 금화와 은화를 보관할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며 돈이 많아지자 여느 일반 농가가 다 그렇듯이 마루 바닥을 한 장 뜯어내고 땅을 파내 빈 자리에 통을 묻고 생기는 대로 금은화를 보관했다. 더 세월이 가서 이젠 철제 통도 작아 다 담지 못하자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장만해 그것이 그득해질 때까지 모으고 또 모았다. 그럴수록 마너의 몸은 더 쪼그라들고 시력은 형편없이 악화되었으며 이제 주민들은 마흔도 되지 않은 마너에게 ‘마너 영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만큼 그는 더욱 쇠약해져갔다.

  그래도 마너에게 새로운 습관이 생겨 그것을 보람과 만족으로 알았다. 낮에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 때 밥을 먹고 어두워지면, 그는 마루바닥을 들춰 흙을 걷어낸 다음 가죽 자루 두 개를 꺼내 금은화를 쏟는다. 그리고 만면에 가는 웃음을 지으며 얼마나 많은 금화와 은화가 있는지, 세기 시작한다. 한 줄로 쌓아 놓은 것이 몇 줄이나 되는지. 돈이 많아지면서 마너의 얼굴엔 그로테스크한 만족의 기미가 엿보였다. 마치 굴 속에 금은보화와 마법의 반지를 보관하고 있던 외로운 큰 뱀이나 땅굴을 파고 금광에서 채취한 황금덩이 속에서 만족한 웃음을 짓는 독한 얼굴의 난쟁이들처럼.

  15년간 마너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 생각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도 없었고, 밥 한 번 같이 먹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새롭게 일감을 받았건만 일에 필요한 꼰 실을 사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여태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는데, 문을 그냥 열어 둔 채로 밤마을을 가버렸다. 마너가 일을 보고 돌아온다. 집에서 불과 백 야드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 최고의 유지이자 최대 지주인 캐스 가문의 둘째 아들이자 천하의 방탕아 던스턴 캐스가, 모은 돈이 무척 많을 거란 소문이 난 마너의 빈집에 들어와 마루 바닥을 조사하더니 금세, 여기가 아니면 어디겠어 뻔한 노릇이지, 한 짝을 들어낸 다음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찾아냈고, 이내 그것을 들춰 매고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278파운드 18펜스. 마지막으로 세어봤을 때였다. 웬만한 농지의 1년 소작료가 백 파운드였던 시절. 이렇게 마너는 새까맣게 모르지만 마너와 캐스 가문은 연결이 되고 있었던 거다.

  이후 이야기는 당시 소설 장르의 끊이지 않는 탐구생활, 출생의 비밀로 접어들고, 얼키고설킨 젊은 날의 방황과, 거짓과, 사랑과, 신앙과, 당연히 “선한” 하느님의 역사까지 19세기 소설의 정점이자 영국 소설사의 가장 위대한 별이라고 칭송받는 조지 엘리엇의 필담은 독자로 하여금 쉼없이 손가락에 침을 묻히게 한다. 다만 아쉬운 건 19세기 작가인 반면 나는 21세기 독자라는 점, 이거 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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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타야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티야나 톨스타야 지음, 이수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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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에도 “백만장자”가 있었다.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할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그랬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을 떠난 귀족의 후예 톨스토이 선생은 놀랍게도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 대단한 특권 계층 대접을 받아 세간에서 “백만장자 작가”라고 했던 거다. 물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과 넓은 의미에서 같은 가문이긴 하지만 이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도 없고 지명도도 없는 과학소설SF 작가한테 레닌과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대접을 했을까? 하여튼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딸이 타티야나 톨스타야다. 1951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해 유복하게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톨스타야는 1987년 단편소설 <황금 댓돌 위에 앉아>로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우리가 아는 많은 러시아 여성 작가들, 빅토리아 토카레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이들처럼 망치와 낫의 붉은 기가 내려가는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모스크바 크렘린에 게양된 1989년 이후였다.

  소비에트 시절에선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독특한 세계를 문자로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하면 뭘 하겠느냐만, 당시 좌파 세계, 진보 세력을 진두지휘했던 소비에트는 엉뚱하게 인민들의 사상마저 통제하려는 가장 골통 우파적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는 바람에 여성들이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슈들, 예컨대 섹스, “임신, 출산, 육아, 임신중단, 이혼, 경력, 매춘, 강간, 동성애”(역자해설 인용) 같은 것들을 거의 언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 인권이 출발하는 시점에는 당연히 그간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을 다루어 문제제기를 해야 할 터인데 그걸 발언하지 못하게 하니 러시아 문학판은 마초들의 권력형 유희장 비슷하게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도 거의 다 소설가, 극작가라는 문학 종사자라기보다 언론인, 평론가 같은 비문학 글에 집중하고 있다가, 드디어 러시아라는 동토에 봄바람이 불자마자 원고지를 펼치고 여태 자신들이 참아 왔던 문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한 번 읽어 보시라, 유럽이나 동아시아 여성작가와는 또 다른 매우 참신, 독특한 소재와 필체와 스토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니. 남자 작가들은? 그들은 소비에트 시절에 자기 원고를 해외에 빼돌려 그곳에서 출간을 하고 유배를 당하든지 (이민이라는 방식을 통해) 조국과 모국어에서 추방당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그게 작가의 숙명이란다.


  《톨스타야 단편집》은 “톨스타야의 대표 단편집 《오케르빌 강》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네 편을 실었다.” 역자 해설 115쪽에 의하면 지만지가 이런 야만스런 짓을 했다, 이거다. 이왕 번역을 하고 책을 출간하려면 한 권을 통째로 해야지 거기에서 달랑 네 편만, 그것도 표제작품도 빼 버리고 책을 내다니, 오랜만에 백수가 큰 맘 먹고 저지른 내돈내산인데 어찌 속이 편할 수 있겠느냐! 짜증 제대로네. 별 두 개 주려다가, 작품이 괜찮아서 참고 참았다.

  이 책에서는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여성들이 제기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된 러시아와 러시아 시민, 사회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매력이 있다. 제일 앞에 실린 <밤>은 정신지체가 있는 뇌성마비(인 것처럼 보이는 장애)를 가져 엄마의 보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소년의 불행을, <백지>는 외과수술을 통해 “자존심”과 더불어 세상 사는 데 가장 쓸모없는 “양심” 조직을 절개하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안면 싹 바꾸는 현대인의 모습을, <새와의 만남>은 소년 페차가 본 어른 세계의 비열함과 슬픔을, <매머드 사냥>은 남자 한 명 잘 만나 팔자 고쳐보려는 젊은 여성의 허상을 그리고 있다. 네 편 다 재미있다. 그러나 해설을 빼고 겨우 112쪽. 이제 본격적으로 읽을 만하면 뚝, 책은 끝난다. 원, 참. 그래도 한 2백쪽 가까이 가줘야 아마존 밀림이 살아 남는 거 아니냐고.

  단편들이라 내용 소개를 더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저래 독후감 빨리 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영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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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2-1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번역서 중엔 발췌번역이 꽤 있더라고요.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서 지만지는 책 정보를 잘 살피고 있어요.

Falstaff 2023-12-18 08:35   좋아요 1 | URL
옙.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발췌본은 표지에 발췌라고 써 놓았더라고요. 저도 그건 절대 안 읽습니다.

은하수 2023-12-18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전 단편집이 영... 맘에 안찰때가 많아요^^

Falstaff 2023-12-18 08:39   좋아요 0 | URL
아효, 중요 작품을 쏙 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거 말고도 패트릭 화이트가 쓴 빼어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중요한 작품을 빼고 번역본을 냈답니다. 그때 화이트가 갑자기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범우사에서 속도전을 하느라고 외국서적 해적판으로 번역해 냈기 때문이었는데, 지만지는 그것도 아니고 거 참 아쉽습니다.

stella.K 2023-12-18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톨스타야 단편집>을 완역하라! 완역하라!

이러면 지만지가 좀 볼까요? 욕 먹을 짓이네요.ㅉ 언쩐지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했더니 과연 그렇군요.

Falstaff 2023-12-18 16: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지만지, 간혹 숨어있는 명작을 출간해서 그렇지, 하는 짓은 욕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ㅎㅎㅎㅎ
 
레몬 테이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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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작품집. 열 번째 읽는 줄리언 반스의 책이며 작가의 단편소설은 처음 감상하는 기회다. 사실 오늘의 독후감은 딱 한 줄이면 다 끝난다. 이렇게.


  “단편까지 재미나게 잘 쓰면 반칙 아냐?”


  내가 단편소설엔 좀 까다롭다. 근데 이 책에 실린 것들, 물론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고, 대부분 어떻게 내 마음에 그리 딱 맞아 떨어지는지 참. 첫 작품부터 그랬다. <이발의 어제와 오늘>.

  이사간 동네에서 처음 이발소를 간 날. 혼자 가서 어떻게 깎아달라고 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믿지 못하는 엄마가 기어이 남자들만의 세상인 이발소까지 따라와서, “머리 끝은 약간 치고 뒤하고 옆은 짧게요.” 주문을 하고, 이발이 끝나 이발사가 “아주머니, 한 번 살펴보시죠.”라면서 작업이 끝났음을 통지하니 재까닥 “아주 멋지네요.”라고 응수했으나, 정작 이발소 문을 나서자마자 아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 깎인 불쌍한 양 같네.”라고 투덜거리는 장면. 이렇게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이후부터 이발소를 혼자 다니며 벌써 긴 바지를 입는데도 “유년단원이지?”라고 묻는 덜 떨어진 이발사에게 “아닌데요.” “벌써 소년단원인가?” “아닙니다.” “십자군인가? 십자군은 아주 좋은 조직이야. 한 번 고려해봐.” 이 따위 말을 듣기도 하는 사이에 배꼽 아래 털이 나기 시작했고, 이발 중에는 할례를 하지 않으려면 사라센과 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니 끝까지 오줌을 참아가면서 어느 새 어른이 됐다. 

  이젠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보며 “젠장, 이 꼴이 뭐야.”라고 직접 불만을 하게 됐지만 날 선 면도칼을 쥐고 있는 이발사 앞에서 결코 불평하지는 않았다.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타겠느냐 하는 질문엔 “그저 올 백으로 넘겨주세요.” 해 놓고는 마치 소년시절의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듯이 머리를 홱 움직인 다음 이발 가운에서 손을 빼 손가락 빗으로 휙휙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심술도 이젠 그레고리 마음대로다. 어느새 그레고리는 이발사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하기를 결혼 생활 27년차로 아이들이 둘인데 하나는 다 커서 독립했고, 딸은 아직 집에 있단다. 음. 내 엉덩이를 탐하지는 않겠군. 그러나 이발사는 오히려 그레고리더러 “손님은 결혼할 타입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그레고리를 동성애자로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레고리도 그동안 제법 인생을 알아, 나이든 이발사한테 한 수 가르치기를 “결혼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지요.” 오냐, 많이 컸다, 많이 컸어.

  세월은 흘러흘러, 그레고리는 머리 깎으러 가기 전에 메니큐어 세트를 갖고 욕실에 들어가 손톱 가위로 수북한 긴 눈썹을 손질하고, 귓구멍에서 솟아오른 불필요한 털에도 가위질을 하고,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코를 밀어 올린 다음 콧구멍을 조사하지만 특별히 긴 콧털은 없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화장용 수건 끄트머리를 적셔 귀 뒷부분을 문질러 닦고, 연골질의 귓바퀴 홈을 썰매 타듯 누비고, 밀랍 같은 귓구멍을 마지막으로 쑤신 후에야 외출복을 입는다. 이젠 이발사한테 가지 않는다. 대신 뭐라?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후 세 시에 스타일리스트 켈리와 예약을 해 놓고 찾아간 곳이 바넷 헤어. 의자에 앉으면 일단 뒤로 자빠뜨려 놓고 머리를 감긴다. (난 여태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차가운 손의 살찐 여자가 “너무 뜨거우세요?” “휴가 중이세요?” “컨디셔너 해드릴까요?” 이렇게 묻는 것도 몇 년 경험해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가가 고전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반스라서 헤어숍의 스피커엔 류트와 비올의 연주가 흘러나오고(다울랜드 아니겄어?) 드디어 등장한 예약 스타일리스트 켈리는 틀림없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아랫배와 허벅지 높은 곳, 그러니까 치골 부근, 또는 엉덩이를 그레고리의 어깨와 상박부에 약 오르기 적당한 시간차로 슬쩍 마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켈리는 스물일곱 살. 그레고리의 맏딸은 스물다섯.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겁쟁이 그레고리가 했던 유일한 모험인 결혼도 벌써 28년을 무난하게 끌어왔다. 그는 벌써 40년 동안이나 머리 손질이 끝난 다음에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안다. “아주 멋집니다.” “훨씬 깔끔하네요.” 또는 “끝내주네요.” 또는 “고맙습니다.” 오늘도 그레고리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가 누구? 줄리언 반스. 단편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기가 막힌 소스를 조금, 아주 조금 뿌리는데, 그게 뭔가 하면, 야한 스냅. 이게 조금만 길어지면 외설스러워질 수도 있고, 기분좋게 끈적일 수도 있고, 독자의 맥동만 쓸데없이 높일 수도 있건만, 이 셰프, 반스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그러니까 난데없이 찰싹, 가비야운 손바닥으로 독자의 마빡을 토닥이고 지나간다. 정말 순간에 한 방 당한 듯한 느낌. 이 작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작품마다 곳곳에 도사린 귀여운 장난 또는 딴죽. 거참.


  열 하나의 단편소설이 전부 노인들의 사랑, 섹스, 피폐, 추억(이라는 황량함), 실패한 도전, 그리고 죽음 또는 죽음의 기다림 같은 것이다. 이미 주인공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더 이상 실천할 능력도 되지 않고, 시대가 바라지도 않으며,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 나름대로 행동해 봤자 후배들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레몬 테이블》에는 <레몬 테이블>이란 제목의 단편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 알았는데, 레몬은 서양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럼 레몬 테이블은 죽음의 식탁, 죽음의 진열, 더 좋게 이야기하면 죽음에 가까운 노인들의 모음집이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집 《레몬 테이블》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책을 덮는다.


  “나는 문간에 서서, 레몬을 큰 소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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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5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화요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수요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목요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금요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잠자냥 2023-12-15 09:59   좋아요 0 | URL
금요일 전에 <꿈 연극> 읽어둬야겠는데요!

yamoo 2023-12-1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몬 테이블도 재밌었습니다. 이때 나온 반스의 책 중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그저 그랬습니다. 이거 빼놓고 모두 좋았다능!ㅎㅎ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반스 되게 좋아하셔요, 그죠? ㅎㅎㅎ 반갑습니다.

stella.K 2023-12-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절판이네요. 도대체 이 책이 언제 나와서 절판이된건지. ㅠ 한권 인쇄소에 부탁할 수도 없고. ㅉ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어요. 파는 곳이 있을 걸요?

잠자냥 2023-12-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읽었는데 지금 읽으면 더 진하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ㅎㅎ
단편도 참 잘 쓰죠 이 양반...ㅎㅎ

Falstaff 2023-12-15 16:25   좋아요 0 | URL
옙. 좀 묵은 시절에 읽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