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아이들 1
에이브러햄 버기즈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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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버기즈가 에티오피아에서 인도인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 스스로는 에티오피아가 고향이라고 여기지만 현지인들은 외국인으로 대했던 부류. 인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는 첸나이(과거 이름이 ‘마드라스’) 소재 마드라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 스탠퍼드 의과대학 종신교수로 있단다. 작가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출판사의 책 소개 내용을 보면, “광활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자연과 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운명의 광기에 맞서는 한 가족의 대 서사시”라고 했다. 즉 책의 주된 내용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한 인도인 가족의 서사이고, 아프리카의 자연과 에티오피아의 굴곡진 현대사는 그냥 배경으로 존재한다. 피로 얼룩진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와 맞서지 않는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답게 에디오피아에 사는 주인공의 가족을 포함한 외국인 중에서는 악역도 만들지 않았다. 주인공 메리언 스톤이 사는 곳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언덕 위에 선교목적으로 세운 ‘미싱’이란 이름의 병원. 나중에 특별한 오해를 받아 메리언이 에티오피아를 탈출해야 했던 때를 제외하고 주인공의 가족들은 언제나 집권층의 아내, 누이의 출산을 돕거나 충수염을 수술해주는 덕에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는다. 1권 초반에 예멘의 아덴으로 가는 배에서 거의 죽어가는 의사 토머스 스톤을 해먹에 누임으로 해서 폭풍우로 배가 아무리 출렁여도 수평을 유지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 특별한 ‘미싱’ 병원의 구성원들이 험난한 격랑에 휩쓸린 에티오피아의 피에 젖은 현대사 안에서도 지오이드 선과 언제나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해먹에 놓인 상태 정도로 이해했다. 일단 외국인이고,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그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살펴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이며, 에티오피아 안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이익도 추구하려 하지 않는 집단을, 아무리 철면피 흡혈 독재 정권이라 한들 괴롭힐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러니 분명히 하자. 이 책에선 정치적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지만, 책을 선택할 때 정치적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위에서 토머스 스톤이란 의사 이야기를 했다. 토머스로 말하자면 인도에 사는 영국인 가정의 외아들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외과의가 되어 다시 인도로 왔다가, 인도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떠나야 했던 이. 거의 천재 수준의 외골수로 오직 일 하나에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단정하는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 가운데 잘 풀린 몇 명의 지시를 받으며 밥을 벌어먹는다.) 일벌레 스타일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미싱병원에서 일하기로 하고 떠나는 배 안에서 인도 출생으로 맨발의 카르멜회 출신 간호사 수녀 두 명과 동승하면서 사달이 벌어진다. 극심한 뱃멀미와 열병으로 황천길을 앞에 둔 처지에 떨어지는 것. 이때 간호사 메리 조지프 프레이저 수녀가 엉망이 된 토머스를 극진히 간병해 살려내면서 둘의 유대가 깊어진다. 그 후 토머스 스톤은 예정대로 미싱병원으로 출발했으나 메리 수녀에겐 아덴에서 큰 불행이 닥쳐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아프리카 대륙에 오직 한 명 있는 아는 얼굴을 찾아 아디스아바바의 미싱병원을 찾아오기에 이른다. 아, 너무 길게 쓰고 있다. 근데 책이 그렇다. 실패에서 실꾸리가 풀리듯 술술 풀려나오는 이야기가 얼마나 능청맞게 잘 들어맞는지 도무지 큰 줄거리를 뚝뚝 끊어 소개하기가 힘들 지경. 어쨌든 다리 사이에 몇 줄기 피를 흘리며 미싱병원의 원장 수녀 앞에 서게 된 메리 조지프 프레이저 수녀는 기꺼이 받아들여져 일벌레, 수술벌레, 신기의 손놀림을 가진 외과의 리처드 스톤 선생과 환상의 수술 커플을 이룬다. 메리 수녀가 아무리 하느님의 신부bride라지만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남녀가 만날 끔찍한 수술이란 스트레스 속에서 붙어 있는데 교통사고가 나겠어, 안 나겠어. 덜컥 애가 들어선 메리 수녀. 그러나 그녀는 출산 바로 전날까지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다가 갑자기 지옥 같은 산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자연분만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머리와 머리 사이에 마치 탯줄 같은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 불행은 언제나 한 가지 이유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서, 인도 출신의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 헤마는 때마침 휴가를 얻어 인도를 방문하고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상태. 토머스는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수술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증상으로 제왕절개를 도저히 할 수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외과의 토머스는 배 속에 든 것이 쌍둥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해 산도에 머리가 걸린 태아를 분해해 몸 밖으로 빼냄으로 해서 산모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먼저 머리뼈를 부숴 두부를 떼어낸 다음 견갑골과 늑골, 그리고 폐와 심장, 간의 순서로. 그래 아이의 정수리를 째는 순간, 힌두의 여신처럼 등장한 산부인과 전문의 헤마. 헤마가 등장하자마자 원시적으로 생긴 태아 해체장비를 집어던져버리고 제왕절개 수술로 접어든다. 그래 아들 쌍둥이 시바와 메리언이 탄생할 수 있는 것. 아이들의 엄마 메리 수녀는 과도한 출혈과 쇼크로 세상을 저버렸지만 서로 연결된 몸으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는 부모에게 다소 과하게 총명한 지능을 물려받아 세상에서 첫 호흡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공포 때문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못해 숨을 거둔 사랑하는 메리를 눈앞에서 본 토머스는 자신이 얼마나 메리 수녀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쌍둥이 아들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즉시 깨닫고 그길로 대충 짐을 챙겨 아디스아바바를 떠나버린다. 산부인과전문의 헤마 선생은 자신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자연분만이었으면 형이 됐을 아이, 정수리에 길게 자상이 생긴 아이에게 힌두 최고의 신인 ‘시바’란 이름을 주고, 제왕절개 수술 덕분에 형이 된 아이에게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메리언이란 이름을 준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술꾼 내과 전문의 고시. 고시는 헤마와 같은 도시 출신이긴 하지만 헤마보다 좀 낮은 계급이라 그저 짝사랑만 하고 있는 상태. 토머스가 갑작스레 떠나고, 헤마는 아이 육아에 정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외과수술을 집도하게 된 내과전문의 고시는 점점 능숙한 외과의로 변모해가며 드디어 헤마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두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고. 그래서 우연히 여자이름을 갖게 된 쌍둥이 남자 형제 시바와 메리언은 더없이 인간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부모에게 양육되는 것.
 이제 겨우 쌍둥이 형제의 탄생까지 이야기했다. 책은 이들 가운데 메리언 스톤이 50세가 넘을 때까지니까 말 그대로 초입만 간단하게 적어놓았다. 작가는 대단히 놀랄만한 입심으로 스토리를 밀고 나간다. 이런 책의 특징은 “재미있다”는 거. 본문만 85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인데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다 읽는다. 대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당신의 눈언저리는 피곤에 절어 푹 꺼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읽는다면 주말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 책을 덮을 때 다른 건 모르겠고,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친한 동무가 있으면 읽어보라고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책은 빌려주거나 사보라고 권하는 게 아니다. 내 책을 줘버린 다음에 후회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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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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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라면 역자의 작품해설 일부를 감안하는 것이 좋다. “공포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는 “알바니아 근대사 가운데 여전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건을 다루었다. 즉 알바니아의 공산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메메트 셰후가 1981년 12월 14일 새벽에 총에 맞은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신경쇠약으로 인한 자살이었지만 그 후 이 죽음을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과 의혹이 나돌았으며, 사건이 있은 뒤 이십육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알바니아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진 지 십육 년이 지난 오늘날(2008년)까지도 그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라고 밝힌다. 간략하게 말해, 유구한 역사 기록 동안 자기 나라 땅에서 벌어진 남들끼리의 전쟁에 시달리던 알바니아라고 하는 가난한 공산주의 나라에서 1981년 연말에 막강한 권력을 쥔 차기 공산당 서기장, 현 서기장의 공식적 후계자가 자택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자살이건 타살이건 간에 무엇이 후계자로 하여금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의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걸, 이스마일 카다레가 소설로 형상화했다는 거다. 이 말만 딱 들으면 독자들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에도 사실 비슷한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번쩍 생각나는 것이 1975년 장준하 실족 사망사건. 알바니아와 한국에서 벌어진 두 사망 사건의 공통점은 무소불위의 독재 철권 시절에 벌어진 죽음이란 것.  우리나라에서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등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초법적 독재,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던 때였다. 알바니아는 비록 장준하의 죽음 6년 후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공산당 서기장에 의한 1인 장기집권 시절이었으며, 두 체제는 전 국토를 위협과 불안과 공포의 공기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설마 민주주의 공화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도? 그렇다. 유신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포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터. 초등학교 꼬맹이일지라도 반정부적인 말을 하면 누군가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확인하고 발설한 성인을 찾아내, 영장 없이 체포, 긴급조치 위반이란 죄목으로 거침없이 고문하던 시절. 그렇게 붙들려가서 몇 대 두드려 맞고 나오면 다행이지만 때마침 선거가 있거나 시중에 자그마한 혼란이라도 있을 경우엔 졸지에 서울시 모처에 거점을 둔 북파 고정간첩이 되던 때. 내 부모는 유신이 공포되자마자 조금이라도 반정부적 내용이 담긴 대화를 나눌 경우엔 어김없이 일본어로 나지막이 속삭였었다. 비쩍 마른 생물교사가 수업 중에 잡혀가던 시절. 이 때를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런 시절을 무려 근 20년 동안 살아봤기 때문에 이 책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를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해서다. 즉 이 소설은 짐작처럼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 폐쇄되어 불안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난한 독재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 개인들, 개인들의 집단으로 시민들이 마치 기압처럼, 일상적 공포 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면서부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한 세기 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일인 공포정치의 한계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뒷길로 사라졌다. 아직도 굳건하게 대를 이어 왕조를 지키고 있는 특이한 공산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순혈 프롤레타리아라는 우스꽝스러운 신 골품제도를 창조해 모든 인민들을 공포정치 체제 하에서 평등하게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자주 얘기했듯 마르크스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최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본격적으로 독재에 나서자마자, 국토 위에는 공포의 유령이 배회하고, 사찰하고, 불순분자를 검거하고, 고문하고, 총살해버리기 시작한다. 이런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니 더 이상 하지 말자. 남은 건 영화 제목처럼 인민들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 공포와 불안. 심지어 최고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을 포함해 모든 인민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오해가 쏟아져 신체상, 재산상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여 살 수 밖에 없던 체제. 최고 지도자조차 자기 눈앞에서 아첨하며 충성을 맹세한 수다한 부하 가운데 누가 갑자기 자신에게 총부리를 거두게 될지 불안에 떤다. 이게 독재자의 마지막 발로. 독재자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로는 조금만 더 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해 모든 인민이 태평세월을 맞을 거 같다. 2단계는 일이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3단계는 이제 권력을 놓으면 누군가 자신을 죽일 거 같다. 그래서 살기 위해 권력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단다. 그러니 정점의 단계에 와 있는 독재자는 항상 반역의 기운을 먼저 눈치 채 근본을 없애기 위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뿌리를 뽑아야 했겠지. 심복 가운데 심복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놓고 스카치를 마시던 농군의 아들의 머리에 권총이 발사될 때까지. 그래 1981년 12월을 살던 알바니아 인민들이 살아가던 사회적 분위기를 1970년대를 살아본 대한민국 국민이, 불행하게도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집단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듯했던 시절. 혹시 모른다. 독재 체제라는 것이 정말로 모든 인민들을 공황장애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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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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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올려주시어 내게 좋은 책을 선택할 기회를 주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알제리.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만만하게 봤던 나라였지만 뚜껑을 따보니 쌕쌕이 엔진을 장착한 놀라운 속도를 이용해 우리나라를 2:4로 유린했던 기억이 앞설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시에 우리나라가 알제리에게 1:4로 진다는데 만 원 걸었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시 뫼르소, 이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가 엄마가 죽은 날 땡볕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멀쩡한 아랍 청년 하나를 권총으로 쏴 골로 보낸 걸 기억할 듯. 나? 나는 알렉시 제니가 쓴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나치에 의해 국토가 점령당했을 때는 프랑스 국민들이 그들의 장기인 복종과 순응으로 어려운 시기를 겨우겨우 넘기더니, 연합군에 의해 해방이 되고, 전쟁이 끝나고, 다시 군비를 확장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자,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무자비하게 식민지 저항세력을 탄압했다는 지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떠올랐다”고? 맞다. 작가 아시아 제바르가 알제리 출신 작가라는 출판사 책 광고를 읽자마자, 뫼르소도 아니고, 카뮈가 쓴 <최초의 탄생>도 아니었고, 월드컵에서의 2:4 패배도 아니었으니, 바로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제니가 보여준 무자비한 학살, 그 피해자로서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제3세계를 바라보면, 우리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다.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이왕 알제리가 무대니까 알제리를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1954년부터 무력 독립투쟁에 접어든다. 독립전쟁은 이후 8년간 지속되었는데,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프랑스에 어디 맞상대가 되기나 했을까. <프랑스식 전쟁술>을 인용할 것도 없이, 1960년대 초반에 수도 알제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에 식민모국인 프랑스는 실탄 사격과 무차별 체포와 고문, 감금 등을 저지른다. 1960년대 초반에 독립하고(실제로 나이지리아가 1960년, 알제리가 62년, 케냐가 63년 등), 신생독립국답게 한 5년 정권투쟁을 하다가 내전 3년 정도를 겪으면 이미 1960년대 후반. 극동 아시아의 신생독립국에선 벌써 포항제철이 거의 완공단계에 접어드는 등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거기다가 알제리가 더욱 암울한 것은, 무려 182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는 점. 너무 오래 굴종과 예속의 상태에 처해 있다 보니, 그나마 알제리 사람들은 회교적 윤리로 버티긴 했으나, 경제, 정치, 문화 등 거의 모든 것, 심지어 언어조차도 프랑스의 부속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을 터이다.
 이 책은 크게 두 시기를 선택해 시대를 왔다 갔다 하는 방식으로 전개를 한다. 처음엔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주인공 베르칸이 청소년 시기를 보내는 시점이 알제리에서 민족해방전선이 해방투쟁을 본격화하던 시기와 딱 겹친다. 머리통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베르칸은 당시 초록, 빨강, 흰색으로 된 알제리 삼색기를 작대기에 매달고, 알제리를 알제리 사람에게! 구호를 외치다가, 다행히 총을 맞지는 않는데, 붙잡혀 돼지우리 같은 감방에서 몇 달을 보내며 정기적인 고문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베르칸은 사실 별것도 모르면서, 어찌 보면 군중심리에 휩쓸렸다고도 할 수 있는 지경에서 붙들려 경을 쳤으나, 막냇동생이 보기엔 자기 둘째 형이야말로 대단한 독립 영웅으로 비칠 수밖에. 이 때의 장면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등장한다.
 이후 베르칸은 파리로 건너가 출판사에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글을 쓰면서 차분히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마리즈라는 프랑스 여성과 동거도 하면서. 이렇게 근 20년을 살다가 1991년 가을에 여전히 마리즈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이지만, 조만간 분명히 서로 다른 애인을 찾게 될 것임을 알면서 귀국길에 오른다. 못다 한 소명, 글을 쓰기 위해. 이때부터 2년 동안이 두 번째 시점. 베르칸은 참으로 험난한 시절을 택해 귀국한 꼴. 1991년 12월에 투표가 있었고, 투표에 불만을 갖고 있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 독립의 영웅 부디에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곧바로 내전에 돌입해 부디에프마저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제 알제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내전과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마치 문화혁명 당시의 중국을 보는 듯이 프랑스 말을 쓰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베르칸은 비록 출판이 된 적은 없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문자로 글을 써왔고, 고국 알제리로 건너와서도 못다 한 집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문자로 글을 쓰는 작가. 필연적으로 그에겐 고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 가르쳐드린다.
 여기까지 써놓고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이런 건조한 감상문이라니. 내가 읽어도 한심하다. 이 책은 이렇게 스토리의 나열만 가지고 설명을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자유스럽게 과거와 현재, 비극의 역사와 에로티시즘의 경계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현실 위에 처진 딱 한 줄 위에서, 안전그물도 쳐놓지 않은 채 이렇게 멋진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책 뒤에 역자가 작품을 해설해 놓은 글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프랑스어의 실종>을 해체해 설명을 해놓고 있으나, 그런 건 모르겠고, 참 재미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을 오랜만에 한 편 만났으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책을 덮자마자 곧바로 이이가 쓴 다른 작품을 책방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여기까지 짧지 않은 감상문을 읽어주신 분들이여, 불민한 나를 믿고 이 책을 선택하시라. 물론 직접 읽고 난 다음의 소감에 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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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club 2019-06-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이, 콜

Falstaff 2019-06-01 16:04   좋아요 0 | URL
후회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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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생 일본 아줌마.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으나 1982년에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책 가게에 취직해 함부르크에 거주. 도쿄에서 함부르크까지 이사를 해야 했던 1982년, 다와다 요코가 선택한 이동 방법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이때의 경험이 다와다의 작품세계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고 책 뒤에 따라 붙은 연표에 쓰여 있다. 일종의 버킷 리스트에 나도 겨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리스본까지 가는 항목이 있었으나 삭제했다. 두 주일 가까이 걸리는 동안 시원하게 샤워 한 번 못하고, 샤워는커녕 머리감는 일도 며칠에 한 번씩이나 가능하다는데 근질거리는 머리통이며 등짝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동양인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하다는 러시아 사람들의 겨드랑이 냄새를 인내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여간 함부르크에 정착한 다와다는 이주 5년 후부터 독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9년 뒤에는 일본어로도 글을 써 독일, 일본의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어버린다. 우리나라에 다와다의 책이 세 권 번역이 되었다는데, 앞선 두 권은 독일어 버전이라 하고, 이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일어 버전이며, 책의 해설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최윤영이 썼다. 뭐 거의 언제나처럼 해설은 별로 들춰보지는 않았지만. 이쯤 되면 다와다 요코더러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작가는 분명히 일본 태생이며, 유년기와 청소년기, 성년기의 앞부분을 일본에서 보냈다. 22년 동안 일본의 전래동화나 조부모로부터 들은 옛이야기 같은 것들 속에 든 특성은 작가의 의식 저변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라쇼몽>, <고야산 스님> 같은 이야기 말이다. 검은 색조의 옛 일본 목조 주택의 음산한 분위기와 그 어떤 나라보다 다양한 귀신들이 배회하는 분위기.
 나는 책의 제목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보고 추리소설 아닌가 싶었다. 근데 아니다. 일본 말로 하면 용의자는 Yôgisha로 발음하고, 야간열차는 Yogisha로 한단다. 그러니 제목은 책의 무대가 되는 야간열차를 이용한 언어유희일 뿐이다. 책엔 용의자 비슷한 인간들이 몇 명 등장하기는 하지만 국경선을 넘을 때 청바지나 커피 원두 같은 소소한 품목의 밀수를 제외하고 진짜 범죄라고 할 것들은 주인공 ‘당신’의 상상 속에서만 비칠 뿐이다. 주인공이 ‘당신’이라고? 그렇다. 2인칭 소설이다. 당신은 함부르크에 주로 거주하면서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대 무용을 공연하는 예술인이며, 간혹 인도나 중국 등을 방문해서도 밤 열차를 타곤 한다. 그러니 영화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Murder on the Oriental Express>같은 미스터리 영화 비슷한 걸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 있다. 무용가 ‘당신’은 몇 십 년에 걸쳐 차례로 파리, 그라츠, 자그레브, 베오그라드, 베이징,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빈, 바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뭄바이 이렇게 열두 도시를 향해 야간열차에 오르는 동안 백댄서에서 유망한 현대무용가로 성장한다. 따라서 각 도시와 각각의 열차여행은 서로 관련성이 거의 없어 마치 모자이크 조각, 모자이크 조각은 조각인데 이쪽저쪽에 흩어져 있는 각 파편으로 읽힐 뿐이다. 나는 오히려 밤 열차 특유의 외로움, 낯선 사람과의 반갑지 않은 조우, 나그네가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 어두운 긴 복도, 음산한 바람, 일본인 특유의 수다한 유령, 이런 것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일본소설 비애호가로 별 공감 없이 읽었을 뿐이다. 물론 당연히 편견에 찬 한 아마추어 독자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이니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내 잡스러운 글 때문에 일어 원본을 출간한지 불과 14년 만에 대한민국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세계문학전집”의 한 자리, 그것도 장 자크 루소의 바로 뒷자리를 차지한 ‘고전 급’ 요새 흔한 말로 ‘월드 클래스’ 급 소설책을 멀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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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마따스 지음, 조구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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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서 말쑥하고 가난하고 점잖고 조용하고 성실하지만 많이 음울한 바틀비 선생께서 어느 날 갑자기 해탈을 하셨는지 그를 직접 채용한 변호사가 내리는 지시사항마다 꼬박꼬박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일체의 작업을 거부하는 장면부터, 바틀비를 바틀비로 만드는 대사, “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나오면 성질 급한 독자들은 컥컥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 심지어 마음씨 착한 변호사가 적지 않은 위로금을 쥐어주면서 “당신은 해고니까, 내일부터 안 나오셔도 괜찮습니다.”라고 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이니 말 다했다. 해고당한 사무실에서 밤까지 보내는 바틀비 때문은 아니지만 변호사 사무실은 이사를 해버리고, 그래도 텅 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바틀비 속에도 작가 멜빌의 한 부분은 들어 있었을 것. <모비딕>은 서점 해양수산 분야에 꽂혀 있고, 청교도적 분위기가 여전히 시퍼렇던 아메리카에서 근친상간 요소가 살짝 가미된 <피에르 혹은 모호함>은 평론가들에게 사정없이 두드려 맞아 자신이 더 이상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 단정한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세관의 말직에 취직해. 하기 싫은 사무직으로 남은 평생을 지내게 되었으니 멜빌 자신 역시 세관장을 위시한 윗것들에게 하루에도 열댓 번씩 “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해버리고 싶었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틀비와 멜빌에 대해 서두를 길게 쓰는 건, ‘글을 쓰지 못하거나 않으려고 하는, 부정적인 충동 또는 무無에 대한 이끌림’을 바틀비 증후군이라 한다고 책의 표지에 작은 글씨로 써놓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바틀비들’ 원문엔 Bartleby y compania, 즉 ‘바틀비와 일당들’이라 하고, 일당들, 즉 절필을 했거나 책을 내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찍이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보면, 남북 아메리카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해서 나치를 옹호한 작가들의 명단을 몽땅 까발린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때, 요새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로 대대적 적폐청산을 위한 정리 작업인줄 알았다가, 진도를 더해감에 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대부분 혹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니라 볼라뇨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란 결론 낸 적이 있었다. 이 책 <바틀비와 바틀비들>과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의 공통점이라면 스토리가 없다는 것. 볼라뇨의 책은 마치 인명사전을 펼친 듯한 느낌 속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바틀비....>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운이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처량한 곱사등이 상태를 받아들여 견뎌내고 있으며, 가까운 가족은 모두 죽었고, 섬뜩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행복한 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외톨이 늙은 남자가 1999년 7월 8일부터 약 한 달간에 걸쳐 작업한 결과물인데, 문학적 성과와는 관계없이 어느 순간 글쓰기를 더 이상, 결코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인물들과 그들이 당시 빠지게 된 부정적 충동 같은 것에 관해 조사한 내용이다. 1번 로베르트 발저 (책에서는 ‘로버트 발저’로 표시)부터 86번 레프 톨스토이 백작각하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으나,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특별한 스토리가 없다. 86개의 항은 전부 주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독자는 별로 없을 걸?
 빌라-마따스, 이 양반이 이 책으로 2000년 스페인에서 ‘올해의 소설상’을 받았다고 한다. 읽어보면 정말 다양한 독서와 작가들의 연혁을 꼼꼼하게 공부해, 하필이면 붓을 꺾은 인물들에 관해 집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전 지구적으로, 아니다, 시각을 좁혀 우리나라 책방에도 숱하게 새로운 출판물이 나오고 있다. 수천의 작가 지망생들은 별것도 아닌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쓰는 필사작업에 목을 매며 자신도 조만간에 ‘등단’이란 관문을 통과해 필명을 나부낄 희망을 부여잡고 있을 것이다.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쓰여 있는 걸 보게 된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잘 쓰는 데 있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쓰지 않는 데 있다.”
 2019년 현재 대형 서점에 깔려 있는 시, 소설, 희곡, 평론 등의 문학작품 가운데 몇 종류가 30년 후인 2049년에도 읽힐 것 같은가. 거꾸로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9년 이전에 나온 책 가운데 여전히 읽히는 책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문학을 하는 일은 확률이 거의 없는 패에 배팅을 하는 도박 아닐까? 글쎄, 선택은 당신들 몫이니까 뭐. 확실한 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작가들이 훨씬, 훨씬 더 많다는 거. 자의건 타의건 간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붓을 꺾은 작가들을 추적하는 일은 살아남아 이름을 떨친 극소수의 작가들에 천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작가들에게 문장을 거두어가게 했는지.
 작품의 진정한 위대성은 일단 제쳐두고, 붓을 꺾은 작가들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참 다양한 그림들.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외할아버지가 죽어 더 이상 남은 소재가 없어 붓을 꺾는다는 말을 남긴 <뻬드로 빠라모>의 작가 후안 룰포. 자신이 점점 가구처럼 되어 가는데 가구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클레망 카두. 지독한 은둔생활을 하며 과작만을 생산했던 <시르트의 바닷가>를 쓴 쥘리앙 그라크, <호밀밭의 파수꾼>의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제49호 품목의 경매>와 <바인랜드>를 쓴 토머스 핀천. 또 플로베르의 문하생으로 스스로 불사신을 자처하다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린 기 드 모파상, 아주 나중이지만 문학이 도덕적인 타락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고 가출해 죽어버렸으나 스스로가 젊은 시절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바람둥이 출신 톨스토이 백작 등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데, 마구 읽어나가다 잠깐 정신이 들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건 바로 소설. 픽션이란 뜻. 우리가 늘 읽어왔던 진짜 작가들도 등장하지만 빌라-마따스가 창조한 등장인물이자 작가도 무수하게 나오리란 걸 깜빡 잊고 있었구나!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91페이지에 쓰여 있는 의문문들은 이 책의 지은이 빌라-마따스를 비롯한 (거의)모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고민해야 하는 숙제가 아닐까?
 “하지만 실재적으로 내 예술은 무엇인가? 내 예술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가? 나는 예술을 함으로써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글을 써내면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일까? 그건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유일한 야망이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알아내기 위해 은밀하게, 오랫동안 탐색해야 할 문제다.”


 팁. 어느 정도 독서력讀書歷을 쌓은 독자들에게 권하겠다. 숱한 책 제목이 나온다. 그럴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더 재미있을 터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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