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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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의 삶을 그가 시편들에 묘사한 구절들을 참고해서 짐작해보면, 1971년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하례마을에서 나이 많은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소년기까지 보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자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집으로 놀러오기 시작하더니 소년 박성우의 볼에 입을 맞추는 일도 생긴다. 물론 나중에 선자는 경찰한테 시집을 가 넘볼 수도 없는 인연이 되었지만. 촌에서 할 일이 뭐 따로 있나. 그저 시간나면 염소 끌어다 나무에 매어놓고 흑염소 배를 베고 누워 하늘바라기나 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에를 치다가 누에곰팡이 병이 도는 바람에 그나마 없는 살림마저 거덜이 나 이제 도회지로 터를 옮긴다. 아버지는 마치 두꺼비를 양 손에 든 것처럼 손의 모양이 변할 정도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인도 여자들 내의 만드는 봉제공장의 보조직공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성우는 원광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을 했고, 이 즈음해서 시인의 어머니도 원광대학의 청소부로 다니기 시작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도 청소부를 했던 어머니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이때 그만 두었는지 아닌지, 회사에서 잘렸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박성우가 성인이 된 후, 전형적인 우리의 아버지가 큰 병이 들었고,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데 동의했다. 아마추어인 내가 보기에, 시 속에 담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겠나 싶은 리비도가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이 시집 《거미》가 나온 서른두 살 때까지는 가난하기도 했고, 연애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시인이여, 너무 아쉬워 말라. 원래 가난하면 연애도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없이 살거나, 나처럼 살다가 집안이 왕창 거덜이 났거나, 아니면 둘 다인 경우의 청춘이 과거에 이미 찍었던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걷지 않았나 싶다. 다만 막내아들이라니 기원하건데 잘 풀린 형제자매가 있어 현금과 건강에 보탬이 되었기를. 그랬을 거 같다. 음, 그런데 어머니가 노구를 끌고 미화원으로 다니는 마당에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으면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지, 그래 대학원에를 다녀?
  박성우는 서른 살 때 이 시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거미>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한다. 데뷔작이니 그것부터 읽어보자.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전문)



  양조장에 직장을 얻어 다니던 사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써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그랬든지, 하여튼 목을 매달아 죽었나보다. 쯧쯧. 하필이면 죽은 사람의 눈이 술 만드는 양조장의 사택을 향하고 있었을까. 거기 사는 사람한테 무슨 원한이 있었나? 시를 다 읽자마자 전경이 눈에 확 그려진다. 2000년에 발표한 시. 이때까지는 그래도 우리 시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쓰인 거 같다. 이후에 우리나라 시의 장을 점령해버리는 것들은, 21세기 현대시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인, 파편화가 급속도로 진행이 될 예정이니까. 이 시의 의문점은, 죽은 사람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거미의)끼니로,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자 사내의 맨 나중 생이라고 했는데, 죽은 사내의 아내가 떠난 다음 아이들은 사내의 집을 거미줄에 걸린 ‘끼니의 집’ 또는 ‘날개달린 곤충의 집’이라 하지 않고 ‘거미집’이라 했을까. 피식자가 아무 설명 없이 포식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냥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는 건 생략해버렸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시를 어떻게 쓰건 그건 시인의 고유한 권리이니 불만은 없다. 뭐 대략 천 편이 넘는 응모작 가운데 당선을 먹은 시니까 쓰기는 잘 썼겠지. 읽는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했을 뿐.
  시 속에 숱하게 나오는 중요 이미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어머니. 이 시집에서도 하필이면 같은 대학의 미화원으로 출근하는 어머니에 관한 시가 좋다고 해설에도 나오고, 내가 읽기도 그렇다. 근데 어머니를 그린 시가 워낙 많으니 오늘은 아버지에 관한 시를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대개 권위적, 폭력적, 괴물, 속물, 바람둥이, 역마살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가득한데 박성우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전문)



  나는 제목이 <두꺼비>고 아버지가 등장해, 이거 아버지가 만날 두꺼비, 즉 진로소주를 두 병씩 해치운 얘기 아닌가 싶었는데, 아이고 이런. 세상에. 누에를 치다 말아먹은 아버지가 도회지로 가솔들을 이끌고 나와 그나마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칠순이 가까워질 때까지 막일 판에 다니는 동안 손이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해졌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아버지 잠든 새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눈이 벌게졌었고. 그런 아버지가 이젠 돌아가 다시 뵐 날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거미>도 <두꺼비>도 좀 직설적이지 않아? 나는 <초승달>이란 시가 좋았다.


  초승달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뒤로 3연, 다섯 행이 있지만 딱 위의 첫 줄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일행시를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초승달>을 저 한 행만 읽으셨으면, 이제 나머지를 더 읽어보시라.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속으로 튀어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한 줄만 읽고, 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다른 분은 모르겠는데, 난 첫 행 하나만으로도 너무 충분하다. 나머지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군식구들 같다. 작품을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결국 그걸 망칠 수밖에 없다.”고 리처드 파워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청한 새우잠.” 나는 이 구절을 “청晴한” 즉 “맑은 새우잠”으로 읽었는데 독자에 따라서 좀 재미없지만 “청請한 새우잠”, 새우잠을 청한 것으로도 받을 수 있겠다. 어쨌든 거 참 명품이로세. 나중에 좀 써먹어야겠다. 물론 그때마다 박성우의 시에서 따왔다는 말은 잊지 않겠다. 시인이여, 고맙다. 이왕 짧은 시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소개하고 독후감 접는다.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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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1-27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둠을 돌돌말아 청한 새우잠‘저도 제일 좋은데요,
이걸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맛이 안나겠죠? 그런걱정이ㅋㅋ
<거미>도 뭔가 스릴러 같지만 몇번씩 읽어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네요.

Falstaff 2021-01-27 11:10   좋아요 1 | URL
그렇다니까요! 청한 저 새우잠. ㅋㅋㅋㅋ
번역시는 절대 안 읽겠다는 신념은, ˝진짜 시인은 스무 살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러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글을 읽고 랭보를, 무려 김현의 번역으로 읽은 걸로 한 번 깨졌는데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읽은 다음에 이젠 진짜로, 진짜로 죽기 전엔 다시는 번역시 읽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1-27 11:18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면 별 생각 없이 번역 시 봤던 저는 지금 반성의 쓰나미가! 하..
올려주신 시 덕분에 역으로 생각하니 확실하네요!!


Falstaff 2021-01-27 11:53   좋아요 1 | URL
반성은요 뭘.
외국시 좋아하시는 분들은 또 얼마나 열심히 읽는데요.
다 취향에 맞고 안 맞고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
전 그래도 꿋꿋하게, 앞으로도 절대 안 읽을 겁니다. ^^;;

hnine 2021-01-27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꺼비를 가까이서 몇번 본 적이 있어서, 고생해서 불거진 아버지의 손등이 두꺼비 닮았다는 표현이 금방 이해가 되네요. 같은 양서류이면서 개구리는 몸이 매끈하지만 두꺼비는 울퉁불퉁, 꼭 전복 껍데기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새우, 거미, 두꺼비, 곤충 ...등등, 이런 무척추동물이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네요.
청한 새우잠의 ‘청‘을 맑을 청으로 읽으니 느낌이 달라지네요. 신선해요!

Falstaff 2021-01-27 11:52   좋아요 2 | URL
요즘엔 두꺼비 같은 손이 거의 없어요. 남자들도. 험한 일을 해도 다 기계로 하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버지는 촌에서 농사 짓고, 망해 도시로 와서 험한 일 하다보니 그렇게 됐겠지요. 힘든 시절 살다 간 분이겠습니다.
그죠, 맑은 새우잠. 어감이 훨 좋잖아요.
 
황금 구슬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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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프리카 사하라의 오아시스 마을 탈벨발라. 이곳에 정착해 살지만 아직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열다섯 살의 베르베르족 소년 이드리스가 있었다. 베르베르족은 사십일 동안 방주에 탄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포도주만 축낸 늙은이 노아(줄리언 반스,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참조)의 둘째 혹은 셋째 아들 함의 자손이지만 일찌감치 정착해 농사를 지은 종족으로 20세기에 들어, 같은 함족이라고는 하나 아랍인, 베두인하고는 따로 구분되는 독립된 민족으로 천만의 인구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유목민의 피가 완전히 말라버리진 않았을 터. 샴바 부족이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어서 정착민 탈벨발라 마을에서 오아시스의 낙타를 맡아 기르며 낙타 젖 전부와 새로 낳은 새끼의 절반을 대가로 받아 살았다.

  1. 샴바 부족에 이브라힘 벤 라브비, 즉 라브비의 아들 이브라힘이 살아 이드리스와 친구 비슷하게 지냈다. 대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정착민들에게 일을 받아 살긴 해도, 어딘지 모르게 정착민을 좀 아래로 보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브라힘은 고목나무 숲에 뛰어든 낙타를 찾으러 갔다가 가시나무에 눈을 찔려 애꾸가 됐지만 하나 남은 눈이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이브라힘이 외딴 우물가에서 암낙타가 새끼를 낳는 걸 보러가자고 이드리스에게 제의한다. 같이 가보니 우물과 오두막 사이에 갓 낳은 낙타 한 마리만 누워 있고 어미 낙타는 보이지 않았다. 출산에 힘을 쏟아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다가 깊은 우물에 빠져버린 거였다. 이브라힘이 줄에 매달려 우물에 내려가 보니 다리가 부러져 있어 낙타를 죽이고 해체를 해 고기로 만들어 가져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하 20미터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낙타 고기를 전부 끌어 올리고 지상에 올라온 이브라힘. 텅 빈 눈구멍에 핏덩이가 엉긴 흥분 상태에서 승리와 도전의 고함을 치며 우물을 좌우로 지지하던 버팀목 위에서 날뛰다가, 그만 삭은 버팀목이 부러져 다시 우물 속으로 추락했고, 버팀목이 사라져버려 우물 벽의 흙이 쏟아져 순식간에 생매장 죽음을 당해버린다.
  2. 이브라힘이 죽기 전, 대낮에 랜드로버를 몰고 가는 프랑스인 남녀가 이드리스를 지나쳐 가다가 다시 유턴을 해 돌아오더니 이드리스를 촬영하는 일이 생긴다. 이드리스가 금발의 여자 사진사에게 사진을 달라고 요구하니, 여자는 지도를 꺼내놓고 지금 그들이 있는 오아시스를 손으로 가리킨다.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며칠이 걸리니까 여기 오아시스에서, 손가락을 옆으로 밀더니 베니 아베스, 한 번 더 밀어서 베샤르, 그리고 계속해 오랑을 찍고, 오랑에서 페리호를 타고 스물다섯 시간 동안 지중해를 건너면 나오는 마르세유를 거쳐 다시 팔백 여 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타고 파리로 가면 그곳에서 사진을 부쳐주겠다고 말한다. 흰 피부와 금발의 미인. 사실 이 여자가 미인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부터 열다섯 살의 소년에게 금발의 여인은 일종의 거역할 수 없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다.
  3. 오아시스에서 아흐메드 벤 바디의 딸 아이샤와, 모하메드 벤 수힐의 아들 알리 벤 모하메드의 결혼식이 며칠 동안의 축제 형식으로 열린다. 해가 지고 슈라이아 요새 쪽에서 압둘라흐 페흐르를 일종의 수head광대로 하는 놀이패 하객들이 몰려온다. 이 중에 은으로 된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가 이드리스의 눈을 사로잡는다. 가히 공연의 혼이자 불꽃, 장신구들의 발레라고 할 장면에 취한 이드리스. 베일을 쓴 얼굴과 발을 제외하고 제트 조바이다의 매끈하고 빛나는 검은 배, 이 부분 한 곳만이 바라보기가 허용된 그녀의 속살. 게다가 가죽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것이야말로 삼라만상을 품은 듯하고 침묵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 고독한 귀금속으로, 자체가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순수한 기호이자 절대적인 형상을 갖춘 것이었다. 날이 밝고 조금 지나 이드리스가 슈라이아 요새 근처 놀이패의 숙영지에 가보니 이들은 벌써 떠나버리고 아직 화기가 가시지 않는 꺼진 장작에서 약한 연기만 피워 올랐다. 이때 이드리스의 눈에 들어온 떨어트리고 간 모래 속의 반짝임. 바로 제트 조바이다의 가죽끈에 매달렸던 황금구슬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황금구슬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4. 놀이패 수광대 압둘라흐 페흐르가 모닥불 옆에 깊은 밤에 해준 옛 이야기, 해적 하이레딘의 모험담, 붉은 수염 임금의 초상. 지중해를 벌벌 떨게 했던 해적 하이레딘이 형과 함께 알제의 술탄을 살해한 적이 있다. 형이 틀렘센에서 전사한 후 하이레딘은 헤지라 912년, 서기력 1534년에 튀니지 항구도시 비제르트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의 술탄인 물라이 하산 대신 궁궐에 진입해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앉는다. 이때 온 궁궐이 비었으나 단 한 명이 남았으니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화백御眞畵伯이자 궁전화원인 아흐메드 벤 살람이었다. 아흐메드의 방엔 도망한 술탄의 초상화가 어이없이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전부 불사르라 명령한다. 나날이 지나자 자신도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진 하이레딘 임금. 그러나 이이에겐 치명적 부끄러움이 있었다.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 사라하의 전승에 따르면 엄마가 몸의 것이 있을 때 임신을 하면 붉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아들일 경우 자라서 성인이 되면 역시 붉은 수염이 돋는다고 한다. 생리혈은 불결한 것으로 아이 역시 날 때부터 저주받은 생명으로 지목을 받는다. 그래 하이레딘은 아흐메드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흑백으로만 그리라고 주문을 한다. 아흐메드는 흑백 스케치를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황야로 나가 케르스틴이라는 이름의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스칸디나비아 출신 여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이 여자가 스케치를 바탕그림으로 해서 북유럽의 단풍나무로 만든 베틀에 앉아 양털로 융단을 짜기 시작해 유럽의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털을 조화롭게 하고, 짐승의 털과 깃털로 동화시킨 이미지를 사용해 붉은 수염의 초상 융단을 제작한다. 정복 여행에서 돌아온 하이레딘이 이것을 보고 크게 만족하여 그동안 계속 착용했던 큰 터번과 턱 가리개를 벗어던지고, 이제부터 짐은 붉은 수염 술탄이다. 이를 만 천하에 알리도록 하라! 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열다섯 살의 이드리스가 한 순간에 경험한 일들. 이것들이 기어이 이드리스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한다. 여기에 파리에서 사막으로 보내온 사진 하나. 그건 자신을 찍은 모습이 아니라 사진을 찍던 당시 자신 옆에 있던, 방울 모양의 술을 달고 머리를 치켜든 채 이를 벌씬 드러내고 히힝 웃고 있던 당나귀의 사진이었던 거다. 동네에 크게 소문이 난 사진. 어쩌면 동네 사람들 모두 파리에서 이드리스의 사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창피함이라니. 이리하여 이드리스는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빼고는 아무 가진 것도 없이 예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 사진을 찍었던 금발여인의 손끝을 따라 오아시스를 떠나 베니 아베스, 베샤르를 거쳐 오랑에 이르고, 오랑에서 배를 타 지중해를 건너 마르세유에 도착해 다시 파리로 가 자신이 구축해왔던 이미지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을 보고 예리한 통찰을 한 기록인 <뒷모습>을 낸 적이 있다는 것을 알면 더 좋을 듯하다. <뒷모습>과 같은 철학적 통찰이 대신, 사진 찍기라는 행위의 의의부터, 시간 포착의 이미지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이드리스가 대륙을 떠나 파리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이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라서. 그러나 투르니에의 진짜 의도는 이미지, 나중에 금발의 여왕으로 대표하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기호, 즉 문자, 문자들의 조합인 문장과, 문장의 조합인 문학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글쓰기 또는 글자쓰기까지 나아가게 된다. 당연히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이 2007년에 초판이 나온 후 어떻게 아직 중쇄도 찍지 않았는지 놀랍다.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이야기 속에 확실한 금을 긋는 사색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한 번 집중해볼 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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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길 -상 - 세계현대작가선 4
V.S. 네이폴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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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노벨상 수상자. 출판사 문학세계사는 ‘세계현대작가선’이란 시리즈를 만들었다. 1번이 죄르지 콘라드의 <방문객>. 이 책은 지금 시공사에서 팔고 있는 김석희 번역이 아니다. 김석희가 영어 또는 일어 책을 중역한 것이라면 정방규는 직역(11년간 한국외대 헝가리어 과 강의)일 확률이 높다. 2~3번이 이번에 어렵게 구한 두 권짜리 살만 루시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 세 번째 책이면서 시리즈 가운데 지금까지 팔리고 있는 유일한 책이 바로 이 책 V.S. 나이폴의 <세계 속의 길>이다. 이 책 역시 여차 했으면 절판의 딱지가 붙어 헌책방 선반 위에서 엄청 높은 가격이 붙어 있을 터이지만, 200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2001년 10월에 초판 중쇄를 찍었고, 그래서 내가 읽을 수 있었다.
  1932년 서인도제도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난 V.S. 나이폴은 인도에서 이민 온 브라만 계급의 후손이다. 어떻게 서인도제도에 동인도, 그러니까 진짜 인도 사람이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는 라틴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의 역사를 좀 아는 게 좋지만 그냥 읽어도 별 상관없다. 이 책 속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멕시코 만에 진입하고, 3차 항해에 트리니다드에 첫 발을 디뎠으며 금광을 찾기 위해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어 스페인으로 데려가 여왕의 신망을 잃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현지인들을 거의 몰살을 시켜 부족한 노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 노예를 수입했고, 19세기에 노예해방의 파도를 만나 아메리카로 떠나거나 중산층에 편입된 흑인의 노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인도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다 나온다.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인도인 노동력을 다시 중국인으로 대체한 것까지.
  <미겔 스트리트>나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그리고 대표작 <도착의 수수께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고르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이폴 자신이 트리니다드 출신이며, 매우 공부를 잘 해 중,고등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고, 대학도 전액 장학생 자격으로 무려 옥스퍼드에 뽑혔다는 것. 그래 겨우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에 트리니다드를 떠났는데,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 동네사람들 모두 비행장까지 몰려나와 환송해주었다는 거. 영국에서는 처음에 런던에, 그러다가 옥스퍼드 근처 형편없는 하숙집에, 나중엔 좀 나은 런던의 집을 거쳐 마지막으로 스톤헨지가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집에 정착해서 글을 쓰는데 전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니면 적어도 알아챌 수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 열일곱 살이 된 생일 때부터 일 년간 등기사무소의 2급 서기로 근무하며 겪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작품의 시작은 영국으로 떠난 6년 후 증기선을 타고 2주 간이나 걸려 느릿하게 돌아온 트리니다드의 포트 오브 스페인 거리의 털북숭이 장의사 겸 꽃꽂이 강사 겸, 케이크 장식가인 레오나드 사이드라는 이름의 인도계 무슬림을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이후에야 등기사무소에서 잠깐 함께 근무했던 성실한 블레어 씨, 양복점을 해서 꽤나 돈을 모은 재단사 나자날리 박쉬 씨, 성공한 극소수의 흑인인 변호사 에반더 씨 등을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 상당부분을 읽을 때까지는 자신의 먼 추억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든 에피소드 위주의 잔잔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쯤 작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바로 트리니다드라는 섬나라 국가의 시작과 역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었던 인물이지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물론 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하여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본토의 무슬림과 전형적인 인도 무슬림과도 다른 아랍풍의 무슬림을 등장시켜 포트 오브 스페인의 무슬림 사원에서 수백 명의 남자들이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세인트 빈센트 거리에 진출해 경찰본부를 습격하고, 병기고 근처를 폭파해 많은 경찰들을 죽거나 부상시킨 폭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작가의 사색은 저 멀리 1498년의 콜럼버스를 소환하기에 이르고, 이어서 1595년에 금광을 찾아 트리니다드에 들어가 엉뚱하게 모래만 가득 퍼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가져간 월터 로리 경이 1618년에 목숨을 걸고 시작한 마지막 절망적인 항해와 탐험, 1806년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프란시스코 미란다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그물망을 짜나간다.
  약 550쪽의 분량에 이르는 장편소설. 20세기에 출간한 책이라 한 페이지에 스물여덟 줄, 한 줄에 원고지 기준으로 35자가 들어간다. 그러니 지금 기준으로는 글자 빽빽하다는 의미의 한자어를 써야 할 터. 내가 책을 읽는 기준 속도가 한 시간에 30쪽. 이 책은 집중해서 읽어야 25쪽 정도. 게다가 V.S. 나이폴 특유의 탄탄한 구조물을 짓기 위해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되는 사건과 인물에 관한 충실한 보완 등으로 약간은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폴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고향으로 인지하고, 평생 영국과 세계를 떠돌면서도 묻힌 자신의 태胎를 향한 시선을 결코 거두지 않았던 한 시절의 대가가, 바로 그곳, 트리니다드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은 작품이니.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등기사무소의 성실한 직원 블레어 씨는 작품의 후반에 다시 등장한다. 작가는 세계적인 이름을 내기 시작한 소설가이면서 기자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 언론인 자격으로 동아프리카의 독재국가에 취재차 방문을 해, 트리니다드 섬의 영국인 거주지와 매우 흡사한 고급 주택단지에서 하인과 운전수를 거느리며 인도계 영국인의 자격으로 머물고 있다가, 유엔에 근무하면서 국제적 경력을 쌓은 나름대로 노련한 트리니다드의 정치가로 변신한 블레어를 다시 만난다. 이제 신생독립국인 동아프리카 국가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강의를 하러 온 것. 블레어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인상 깊어 간략하게 소개한다.
  블레어가 뉴욕에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이야기. 몸집이 커다란 흑인인 블레어는 탈의실에 들어가 네 가지 색깔의 가운을 입어야 했단다. 색깔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되는 거여서 입고 나갔더니, 이후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한 무리로, 은근히 네 무리의 집단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 늙은 블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떠나려고 하는 이 세상은,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는 그래도 많이 좋아졌지요.”
  식민지, 인종차별 등을 다 겪은 1920년 초반 생인 블레어가 보기에 이제는 그래도 좋아진 세상에서, 식민시대를 벗어난 신생독립국에 강사로 초빙되어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의 문제 가운데 작은 부분, 마치 성서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황금과 상아의 밀반출에 관해 조사를 하다가 황무지의 바나나 나무 아래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나이폴은 블레어를 통해 이제 트리니다드의 경험이 신생국의 발길을 도울 수도 있다고, 거기까지 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좋은 책. 그러나 조심하시라, 출발은 매끄럽지만 여차하면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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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22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비스와스 1권부터 구해야 하는데...
나이폴 경의 책은 사재기만 하고 결국
안 읽고 버티네요.

이 책 아니면 만나보지 못할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대한 썰이 너무 궁금하네요.
결국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요.

Falstaff 2021-01-22 11:15   좋아요 2 | URL
나이폴이 잔재미는 없습니다. 어떨 때는 심지어 지루하기도 하고요.
사재기 하셨다니 몇 권 가지고 계신 것 같으니 그것부터 읽어보시고 결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독자하고 맞지 않으면, 제가 썼듯이, 나가 떨어질 수도 있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1-01-24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 뒤의 삶 창비세계문학 83
소니 라부 탄시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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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악의 식민지였던 벨기에 령 콩고의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1947년에 ‘마르셀 응초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작가 소니 라부 탄시의 1979년, 32세 때 쓴 작품.
  역자 심재중은 작품해설에서 아프리카 문학의 ‘열대적 리얼리즘’이란 단어를 소개한다. ‘열대적’이란 말이 작 중에도 많이 등장해 작품해설을 읽을 때쯤이면 익숙하게 받아들일 정도가 되지만 옮긴이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소설에서 ‘열대적’ ‘열대성’이라는 어휘는 야만성, 동물성, 육체성, 폭력성, 상스러움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용어이다.”  (10쪽)


  콩고의 현대사에 두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마셈바-데바는 군부 쿠데타로 실각을 했으나 청렴한 원칙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마셈바-데바의 후임으로 표범가죽 옷을 즐겨 입었던 마리앵 응구아비가 독재 체제로 변질하려는 때 대통령 관저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마셈바-데바가 암살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는데 시체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소니 라부 탄시의 <죽음 뒤의 삶>에서 ‘마르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마르샬이 마셈바-데바를 변주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구원의 영도자’라고 불리는 독재자에 저항하는 인물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구원의 영도자’와 이후 대를 잇는 숱한 영도자들의 공통점이 육식만 한다는 것과 권력의 연장을 위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무수한 사람을 살상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으로, 이들의 뒤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의 무한정으로 밀어주는 서양 열강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하긴 콩고가 독립한 1960년부터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라틴 아메리카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을 배치시키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소비에트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며칠이나 됐을까. 그 부작용으로 제 3세계에는 독재자들이 창궐할 수 있었으며,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많고 많은 제3 세계에서도 아프리카의 신생국에선 유독 끔찍한 독재와 쿠데타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열대적 독재자가 우간다 통령 이디 아민이었을 듯. 그는 정적의 고기를 먹기까지 했으니. 당시 우리나라 소설가 송기숙은 집에 기르던 개 이름을 아민이라고 짓고 여차하면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곤 했다는 소설을 썼는데, 송 선생의 진짜 속마음은 아민이 아니라 박정희였을 수도 있다. 읽어보시면 아는데, 단편의 제목을 잊어 아쉽게 됐다.
  책을 옮긴이가 내놓고 열대적, 열대성 등등을 거론했다는 거 하나만 봐도, 이 책 속에 좀 끔찍스러운 장면이 등장하리라, 라고 생각할 수 있고, 사실이 그렇다. 얼마나 열대적이냐 하면,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정도로. 나도 이 얇은 책을 읽다가 집어 던질까, 하고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좋다, 인용해보자.


  “영도자는 부관이 ‘그자를 데려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자기 앞으로 떠밀어놓은 아홉 명의 인간 넝마들에게 다가가면서 아주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고, 수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자 정부 전용 백화점인 사계절에서 파는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자르는데 쓰는 식사용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칼날이 자신의 목 언저리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동안 아버지-넝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도자가 나이프를 빼내더니 먹고 있던 사계절의 고기 쪽으로 돌아서서 바로 그 피 묻은 칼로 고기를 잘라 먹었다.” (12쪽)


  “아버지-넝마는 대꾸하지 않았고, 영도자가 지퍼 달린 셔츠를 열 듯 신경얼기에서부터 샅굴 부위까지 아버지-넝마의 배를 갈랐고, 늘어뜨려진 내장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가 흘렀고, 아버지-넝마의 생명 전체가 두 눈 속으로 숨어들어서 넘쳐나는 생명의 전류처럼 그의 얼굴을 둘러쌌고, 두 눈꺼풀은 소리 없는 작열에 내맡긴 것 같았고, 아버지-넝마는 방금 정사를 끝낸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고, 영도자가 식사용 나이프를 차례차례 그의 두 눈에 찔러 넣었고, 두 눈에서 나온 거무스레한 젤리가 볼 위로 흘러내렸고, 두 줄기 눈물이 목 언저리의 상처 속으로 흘러들었고, 아버지-넝마는 여전히 성행위를 막 끝낸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13쪽)


  “그는 홀딱 벗은 알몸으로 영도자 앞에 끌려왔고 영도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무슈’를 절단하여 이 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하자면, 그를 피고인 복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발가락 여러 개가 고문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입술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렇게나 너덜너덜해진 살점들이 붙어 있었고, 두 귀가 있던 자리에는 피가 두 개의 커다란 괄호 모양으로 엉겨 있었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서 두 눈은 사라졌지만 시커먼 구멍 두 개 속에 검은 빛 두줄기가 남아 있었다. 사람의 형체조차 지워져버린 잔해물 속에 어떻게 생명이 그토록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뭇사람들의 생명은 모질다. 그들의 생명은 고집스럽다.”  (37쪽)


  이런 묘사를 견딜 수 있으면 책을 읽으시라. 난 억지로 읽었다. 정말 억지로. 사실은 돈이 아까워서. 게다가 비록 콩고 민주공화국 만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있었던 독재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는 바라서 대를 이어 계속되는 폭력과 성 착취와 부정부패가 새삼스럽지도 않았으니 인상 깊게 읽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염소의 축제>를 권하겠다.
  이런 저작을 “첨예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형상화 했다”고 하니 참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좀 적당히 하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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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1-21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고맙습니다. 이 책은 넘기겠습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21-01-21 09:34   좋아요 0 | URL
옙. 열대성만 과하지 않았어도....말입니다. ㅋㅋㅋ

syo 2021-01-2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을 떠어억 벌리고 봤어요. 저도 스킵- 이라고 쓰고보니 이 글 안 읽었어도 몰라서 안 봤을 것 같습니다ㅋㅋㅋㅋㅋ부끄럽다

Falstaff 2021-01-21 10:11   좋아요 2 | URL
아이고, 사이오 님이 부끄럽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찌 숨을 쉬라고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21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대적 리얼리즘...오 무섭네요. 이거 번역하신 분도 대단한거 같아요. 독재는 다 끔찍하지만 유독 아프리카는 그 잔인함이 상상을 초월하는거 같아요. 아휴...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먼저 읽으시고 여러 사람 구하셨으니 보람을 느끼셔도 좋으실듯 합니다.

Falstaff 2021-01-21 13:5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리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제발 창비 담당자가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호오의 문제이니 말씀이죠.
사실 이런 독후감 쓰는 게,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목적이 아니면 쉽지 않긴 합니다. ㅋㅋㅋㅋㅋ

imspeaking 2021-03-1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다가 속이 뒤틀려서..문학이고 나발이고 적당해야지 원..이러던 참이었어요.

Falstaff 2021-03-18 09:15   좋아요 0 | URL
그죠. 너무 심했습니다.
 
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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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 토니 모리슨의 겨우 두 번째 작품. 오하이오 주에 가상의 마을 메달리언 타운이 골짜기에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백인 농장주가 중요한 사업 또는 작업을 흑인 노예에게 맡기면서 일을 성공리에 잘 끝마치면 자유와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흑인 노예는 백인 나리가 만족할 만큼 훌륭하게 작업을 해냈는데, 백인 입장에서 자유를 주는 것은 뭐 별 일이 아니지만, 애초에 약속했던 골짜기 좋은 땅 대신에 마을 위쪽 언덕에서 강까지 쭉 펼쳐진 지역을 주었다. 이 언덕바지의 이름이 보텀. 영어로 Bottom. 왜? 언덕은 하늘, 즉 천국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라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바닥, 보텀이기 때문이다. 흑인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보텀 언덕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고, 이후 점점 흑인 집단촌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은 어느 새 1960년대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 언덕에서 살다가 사업에 성공해 주머니가 두둑해진 흑인들은 지역을 떠나거나 백인들이 사는 골짜기 근방으로 내려가 겨울만 되면 불어 닥치는 모진 추위를 피해 될 수 있는 대로 안락하게 지내고 싶어 했고, 백인들은 눈 아래 훤히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기 위하여 흑인들이 떠난 보텀 지역으로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다 이젠 보텀을 싹 밀어버리고 그곳에 메달리언 시티 골프장을 만들려 하고 있는 상태. 여기서 소설은 시작한다. 보텀과 보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 사십 년도 넘는 과거, 1919년으로 시계를 되돌리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빼빼로 데이, 11월 11일에 끝난다. 많은 미군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몇 달간 충분한 휴식을 취하다가 대개 다음 해 중반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귀가하고는 했는데, 이건 흑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는 인종갈등이 미국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라 흑인 병사들이 주로 매춘부들이긴 했지만 프랑스 백인 여성들과 연애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흑인들이 가장 경계하고 조심했던 건 프랑스 남자들이나 경찰이 아니라 백인 미군 병사였다. 감히 검둥이 주제에 국가를 떠나 백인 여자와 관계를 해? 잔인한 린치를 당한 것이 한 두 명이 아니라고 전해진다. 흑인 병사는 심지어 총기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전장에서 죽어간 시체들을 선별하고 묻어주는 일. 2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흑인에게 여간해서는 총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서류 상으로는 지급을 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고 EBS 다큐멘터리에서 봤다. 미국 내 흑인들은 주로 태평양 전쟁의 병참병으로 근무하면서 전쟁물자의 하역 업무에 집중배치 했다. 어떻게 흑인들을 믿고 총기를 주겠는가. 백인을 향해 겨눌 수도 있는데.
  책에서는 셰드릭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1917년에 징집되어 프랑스로 파병된다. 처음으로 독일군과 맞붙은 전투에서 돌격을 하는 찰라, 옆에서 함께 뛰던 병사의 머리 반쪽이 날아가고, 곧이어 나머지 반쪽도 핑그르르 돌면서 사라졌는데 머리 없는 몸통은 여전히 적진을 향해 뜀박질하는 것을 보고, 맛이 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데뷔한 무기가 기관총. 그래 1차 대전을 무대로 한 소설작품 속에 빗발치는 기관총을 무릅쓰고 몸통만 돌진하는 이 장면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그래서 셰드릭은 단 한 번의 전투에 영어로 paranoid, 우리말로 하면 피해망상증에 빠져버린다. 오래 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1919년 강제 퇴역을 해 메달리언 타운에 들어오는 인물. 흑인인지 백인인지 모리슨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이는 1920년 1월 3일부터 1965년까지 부려 45년 동안 전국 자살의 날, National Suicide Day를 공포하고 소 방울과 교수형 집행인의 밧줄을 들고 메달리언 타운에서 보텀까지 행진을 한다. 이이는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을 끔찍스러워 한다. 그래 일 년에 하루를 죽음에 바친다면 나머지 날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엽기적인 자살의 날을 제정하게 된 것. 눈치 채셨나? 셰드릭은 45년 후인 1965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이 작품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책의 주인공은 역시 술라 피스. 그리고 술라의 둘도 없는 친구 넬라. 애칭으로 넬. 넬은 그만두고 술라의 집안 내력을 잠깐 보자. 할머니 에바 피스가 젊어서 사랑했던 남자가 보이보이. 보이보이는 에바를 통해 첫 딸이자 술라의 엄마인 해나, 엄마와 같이 에바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펄이라 불린 둘째 딸, 그리고 아들 랄프를 만들어놓고 다른 여자를 찾아 그냥 떠나버린다. 에바는 이웃에게 내일 오겠다고 아이들을 맡겨놓고 일 년 반 동안 훌쩍 나갔다가 다리 한 쪽이 없어진 대신 돈을 많이 벌어와 아이를 맡아준 이웃에게 10달러를 주고, 집도 짓기 시작한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무람없이 드나들 수 있는 복잡하게 커다란 집으로 확장될 때까지. 술라의 엄마 해나는 라커스와 결혼해 술라는 낳았는데, 술라가 세 살 때 남편이 죽어버린다. 과부가 된 해나는 이후 본격적으로 남성편력을 시작한다. 주로 친구와 이웃의 남편을 골라서 만백성 공평하게. 이런 가정교육을 통해 술라는 섹스라는 것이 즐겁고 빈번한 일이지만 별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게 된다.
  술라의 이모 펄은 먼 곳으로 결혼해 가고, 외삼촌, 풀럼이라고 불리는 랄프는 1917년에 참전해 19년에 미국으로 귀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20년에 귀향을 한다.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능력한 인간으로 변해버린 채. 그래 약에 취해 늘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풀럼을 견디지 못하는 엄마 에바, 어느 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아들의 침대에 가서 머리통을 꽉 안았다가 풀며 양쪽 뺨에 키스를 해주고, 침대 위에 등유를 듬뿍 뿌려준 다음, 방을 나가 신문지에 불을 붙여 확 불살라 죽여 버리고 만다. 아무도 못 봤다. 봤어도 말만 나가지 않으면 굳이 흑인이 죽은 이유를 백인 경찰이 조사하는 노고를 베풀지도 않는다. 동네 유부남에게 골고루 사랑의 은혜를 베풀던 술라의 엄마 해나 역시 어느 날 마당의 화덕에서 옷에 불이 붙어 타 죽어버리는데, 이층에서 그 모습을 발견한 할머니 에바는 이번엔 딸을 구하기 위해 창문을 깨고 그대로 자유낙하 하지만 딸을 구하지는 못한다. 대신 한 구석에서 자기 엄마가 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던 술라를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둔다.
  술라도 한 건의 살인에 연루된다. 동네 꼬마 치킨 리틀을 나무에 올려주고 같이 내려오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가, 꼬마가 귀여워 두 팔을 잡고 뱅뱅 돌리던 술라. 하필이면 치킨 리틀을 뱅뱅 회전시켜주던 장소가 강가였는데, 손에 땀이 차고, 꼬마의 팔목에도 땀이 차, 술라의 손에서 치킨 리틀의 손목이 쑥 빠지면서 그만 깊은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더니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절친한 친구 넬 말고는. 또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넬은 무엇을 했을까. 걔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이런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만 따라가서는 모리슨의 진짜 맛을 즐길 수 없다. 물론 번역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좋은 역자를 통해야 하겠지만 (나는 역자 송은주에게 실망한 적이 없다. 내년엔 그이가 번역한 길고 긴 책을 읽을 예정이다.) 독자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고, 무엇보다 삶 자체에 대해 한 번은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깊은 사색이 들어 있다. 그렇다고 늘 심각한 것도 아니다. 때로는 날 것처럼 튀는 경쾌한 글도 있다. 이런 것, 즉 문장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산문의 아름다움을 토니 모리슨만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이도 별로 없는 듯하다.
  하나 더. 물론 흑인들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고 그들의 가장 난처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백인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이 책에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빼고, 그 자리에 그냥 보편적인 인간, 책의 ‘백인’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장애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는 나 아니면 당신을 놓더라도, 모리슨이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이 별로 손상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굳이 흑인문학이라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 보편성을 지향하는 토니 모리슨이 이젠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애달파 한다.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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