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하고 벌써 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출간도 더 되고, 저도 더 읽은 바 있어, 지금쯤이면 마땅하게 추천 글을 보완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출간을 해 현재까지 374번까지 발매를 했고, 500번이 목표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적어도 우리나라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는 독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시리즈 번호를 기본으로 작가별로 나누겠습니다. 아무리 유명해도 제가 직접 읽은 민음사 책에 관해서만 평을 하고, 아닌 건 따로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읽었다고 밝히겠습니다. 불멸의 명작이라고 일컫는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은 오히려 저자의 명성을 흐리는 일이 될 수 있어 추천 글에 넣지 않겠습니다. 앞의 숫자는 세계문학 시리즈 번호입니다.



11, 12, 38, 137, 214.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자칭 영국 최고의 2류 작가.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셰익스피어는 모르겠고, 하여튼 그 다음은 나, 라는 오만 또는 자존심이나 자긍. 몸의 작품은 일단 시작을 해 놓으면 도무지 브레이크가 잡히지 않는 폭주 열차다. 뻔한 이야기 같은데, 그걸 알아도 책장 넘기기를 멈출 수 없는 매력적인 몰입. 이게 서머싯 몸의 작품을 읽는 가장 큰 이유. 한 작품도 빼지 않고 독특한 캐릭터의 등장인물이 당신의 밤을 빼앗으리니 각오하고 첫 장을 여시라. 그리고 기억하시라. 지금 작가의 모든 작품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읽고 나서, 다른 건 모르겠고,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할 작품들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29, 234, 243. 밀란 쿤데라,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불멸>은 쿤데라 덕후께서 청년사에서 1991년에 출간한 책의 번역이 탁월하다는 의견을 주시어 어렵게 구해 읽었는데, 가히 쿤데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농담>은 데뷔작, <참을 수....>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 <불멸>은 내가 선정한 대표작이니 쿤데라는 적어도 이 세 편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이들은 이 작가를 어떻게 평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고, 난 쿤데라를 읽을 때마다 소설 속에 척후병처럼 매복해 있는 유머 코드를 발견하는 것이 대단히 즐겁다. 스웨덴 한림원은 이 사람 데려가지 않고 여태 뭐 하고 있는지 몰라?



32, 33. 귄터 그라스, <양철북>

 

  63, 64번의 <넙치>, 334번 <게걸음으로>는 읽는 일에 칼로리 소모가 너무 많이 들고, 119번 <텔크테에서의 하루>는 <양철북>과 나란히 놓기에 좀 무리. 바꿔 이야기하면 <양철북> 정도는 가비얍게 해치울 수 있는 분께선 망설이지 말고 저 먼 태초부터 요리를 해왔던 여성들, 아니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넙치>에 도전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양철북>,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엄혹하고 처참했던 시절을 은유와 넘치는 해학과 익살로 꾸려내는 청년 귄터 그라스의 대담함이 놀랍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도 오래 전에 읽어, 당시 느낌만 살아있지 세세한 건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거.



34, 35, 97,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마르케스는 민음사에서 출간한 조구호 번역을 권한다. 직역이고, 할 수 있는 한 원작과 비슷하게 긴 문장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려 노력했다는 역자의 주장이, 다른 번역과 비교해보면 믿을 만하다. 나는 오랜 동안 마르케스의 대표작은 조지프 콘래드가 산적 두목으로 찬조출연 하는 <콜레라....>가 <백년...>보다 더 좋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 민음사 책을 읽은 이후로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라틴 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전범을 마련한 <백년...>은 독자에게 돼지꼬리 달린 아이만 기억하게 만들지 않으며, <콜레라...>에선 한 늙은이의 집념어린 미친 사랑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마술적 환상 속에서.



48, 49, 95, 96. 스탕달, <파르마 수도원>, <적과 흑>

 

  스탕달을 추천 작품 목록에 넣으면 작가에 대한 불경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은 독자들이 <적과 흑>은 소위 청소년 필독서로 읽어본 반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가 “울라!”를 외치며 기치를 들고 돌진했던 대 나폴레옹 전투 씬과 “유일한 쌍벽”, 두 개의 완벽한 옥, 어깨를 겨루는 보물, 이라 말할 수 있는 워털루 전투 씬 하나만 읽어도 본전을 뽑았다 싶은 <파르마 수도원>의 일독은 미루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그 무거운 대포를 끌고 알프스를 넘어 1800년 이탈리아의 마렝고에서 극적 역전승을 거두었을 때 참전했던 십대 후반의 청년이 나중에 <파르마 수도원>을 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지. <적과 흑>은 뭐 말할 것도 없고.



51, 52, 271.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하얀 성>

 

  원래 51, 52번은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깔고 앉았던 자린데, 이문열의 민음사 전속계약이 끝나는 바람에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1, 2번을 차지하던 <내 이름은 빨강>이 자리를 대신했다. 난 당연히 모던 클래식으로 읽었으나 같은 역자, 같은 출판사니 이 자리에서 추천해도 무방할 듯하다. <...빨강>과 <하얀 성> 모두 오스만 제국을 무대로 한 작품이지만, 소설의 대상은 완전히 다르다. 민음사 세계문학의 파묵은 이 두 작품으로 대표하는 역사물과, <새로운 인생>,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의 현대물이 있다. 각자 기호에 맞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내가 읽기로 위의 <...빨강>과 <하얀 성>이 조금 더 낫더라는 것. 두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또다른 파묵으로 <눈>을 추천한다.



56, 57, 244, 245. 토마스 만,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파우스트 박사>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20대 시절에 쓴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장편소설. 토마스 만 학회장을 역임한 홍성광의 번역이다. 만, 하면 당연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마의 산>이지만 이 두 편 역시 상찬해야 마땅하다. <부덴브로크...>는 가문의 4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으로 젊은 시절이어서 그런지 고독하고, 우울하고, 심지어 슬픈 분위기가 깔리는데, 이는 일흔 살이 넘어 발표한 <파우스트 박사>에 이르러도 여전히 비슷한 기압골을 형성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러리라고는 단정하지 말 것.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는 결코 그렇지 않고, 비록 미완성 유작이긴 하지만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코미디이기도 하다.

 * <파우스트 박사>는 여러출판사에서 출간했으니 다른 회사 책도 감안하시라.



69, 161, 238, 286, 287.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미국의 근/현대 희곡이 참 대단하다. 우울증 환자를 병원으로 보내는 대신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이야기, 샐러리맨의 죽음은 제외하겠다. 혹시 자본주의의 용광로이지만 대공황을 겪고, 몇 번의 남의 나라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전쟁 중, 전후 세계경제를 지배한 대가로 시민들의 희생을 요구했던 터라 반작용으로 더 그늘이 깊어서 그랬을까? 나는 미국의 20세기 중반에 쓰인 세 명,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의 희곡을 읽을 때마다 깊은 동감을 넘어 격통을 느끼고는 한다. 깊고 깊은 상실, 백일하에 드러나는 탐욕과 천민성, 한 발 더 나가서 말 그대로, 인간 본성을 어찌 이들보다 더 날것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78, 79, 163, 164.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여기에 <세피아 빛 초상>을 합치면 이사벨 아옌데 삼부작이 완성되는데, <세피아...>는 품절이다. 아무쪼록 그것도 세계문학 시리즈로 다시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출간시기와 관계없이 작품의 내용으로 보면 삼부작의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영혼의 집>이 되는데,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그리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책 좀 읽겠다 싶으면 이 삼부작은 다 읽어두시는 게 좋을 듯하다는 의견만 단다. 유럽 출신의 라틴 아메리카 가족사를 다룬 책으로 19세기부터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을 거쳐 피노체트가 권력을 쥐기까지를 다루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1970년 사상 최초로 투표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쿠데타 군에 의하여 대통령 궁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살라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친조카라서 당시 산티아고 시민들의 마음을 기막히게 포착했다.



81, 148, 299.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성역>, <압살롬 압살롬>

 

  독자들의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려울 것 같다는 거.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렵다는 말을 쓸 정도는 아니다. 지가 기껏 해봐야 요크나파토파에 있는 제퍼슨 시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지 뭐. 이렇게 짐작하고 읽기 시작하면 80퍼센트는 맞다. 원래 태생부터 미국의 지방주의 작가라고 해도 크게는 틀리지 않지만 읽어보면 매우, 매우 특색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진짜로 죽어 관 속에 누워있는 엄마가 매장지까지 운송되어 가며 하는 말, 살인범으로 몰린 건달 하나를 재판도 없이 엽기적으로 살해하는 이야기, 제퍼슨 시에 정착한 한 가족 등인데, 읽어보면 내용보다 혹시 포크너의 길고 긴 문장 때문에 사람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도 든다. 포크너의 작품을 더 천착하고 싶으면 <소리와 분노>, <팔월의 빛>까지는 달려야 하리라.


*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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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16 17: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읽은 거 같은데...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달과 6펜스>만 읽었음을 발견.. Falstaff님 추천에 힘입어 <인간의 굴레애서>를 읽어볼까나...

Falstaff 2021-02-16 17:17   좋아요 7 | URL
오, 좋은 선택입니다! 민음사 서머싯은 다 재미있습니다!!

다락방 2021-02-16 17: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글에는 언제나 제가 읽지 않은 책들로만 꽉 차있는데, 와, 오늘 페이퍼에는 제법 제가 읽은게 많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가 서머싯 몸의 책을 달과 6펜스, 면도날, 인생의 베일 세 권이나 읽었네요? 하하하하.
올려주신 쿤데라는 다 읽었고. 으하하핫. 마르케스도 다 읽었고.
읽은게 많아서 막 너무 기쁘네요. 어지간해서는 폴스타프님과 겹치지 않는데요. ㅠㅠ
저는 이사벨 아옌데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사벨 아옌데의 책은 에세이만 봤던 것 같아요.

Falstaff 2021-02-16 20:01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도 즐겁고 기쁘네요.
아옌데, 소설도 무지 좋아요. 거의 대부분이 여성이 작품을 진행시키는 것도 락방님의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는 걸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2-16 17: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슈테판 츠바이크가 스탕달의 워털루 전투신이 흥미롭다 해서 어떤 소설인가 했는데 파르마였군요. 역시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갈 길이 너무 멀지만요~~😅

Falstaff 2021-02-16 20:02   좋아요 2 | URL
옙. 물론 19세기 초반 작품이니 지금 윤리로는 개떡입니다만 하여튼 이 막장 스토리가 재미 하나는 죽입니다. 근데 역시 워털루 전투 씬이 백미더군요.

잠자냥 2021-02-16 17:5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뭐예요, 이런 페이퍼 너무 좋잖아요. ㅋㅋㅋㅋㅋ
전 민음사 이 시리즈 중에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암스, 아서 밀러 희곡 저렇게 죽 올려놓으신 거 다 너무 좋았어요. 진정 명작-
저도 다락방 님 처럼 올해는 이사벨 아옌데에 도전하겠습니다. 이상하게 손이 안 갔네요.

근데 전 <성역>하면 그놈의 옥수수대가 너무 인상 깊어서...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2-16 20:04   좋아요 4 | URL
ㅎㅎㅎ <성역>하면 옥수수대, <내가 죽어...>는 물난리, <압살롬..>은 또 거시기, 참 이 냥반 같은 지역을 무대로 해서 참 다양합니다.

미국 근현대 희곡은 정말 아무리 상찬을 해도 모자라지 않잖아요. 대단합니다.

페넬로페 2021-02-16 18: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도전중에 있습니다^^소리와 분노는 굉장히 힘들게 읽었는데 위의 세 권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Falstaff 2021-02-16 20:06   좋아요 4 | URL
소리와 분노,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 짐작이 가는데요, 저도 그걸로 읽었고, 지금 다른 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볼까, 생각중인데, 일어 중역 말고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어서 절망입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게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잠자냥 2021-02-16 22:58   좋아요 2 | URL
<소리와 분노> 공땡땡 번역본 말씀인가요? 그럼 저만 이상한 거 아니죠??? 저 그 번역본 읽다가 중간에 포기.... 올해 다시 읽어볼 생각이긴한데....

Falstaff 2021-02-17 08:46   좋아요 2 | URL
넵! 그 땡땡 맞습니다.
전에 제게 친절하게도 비밀 댓글을 달아, 원서 직접 읽어보라고, 원서를 원어민이 읽어도 이해못할 문장이 하나 둘이 아니라고, 한 수 지도질까지 해주신 친절한 우리말 백치였습니다. ㅋㅋㅋㅋㅋ
(원서 읽을 수준이면 미쳤다고 번역서를 읽냐?)
그이가 영어를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우리말 문장 만드는 데 크게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많이 좋아졌으리라 믿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땡땡 선생이 번역한 건 함부로 선택하지 못하겠더라고요.

막시무스 2021-02-16 19: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백년의 고독은 민음사라는 말씀에 안정효 버전의 실패를 위로해봅니다!ㅎ 항상 좋은 글과 엄선된 작품소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ㅎ

Falstaff 2021-02-16 20:08   좋아요 4 | URL
옙. 백년고독은.... 중국 백주 이름이고요,
백년의 고독은 영어본, 중국어본, 이렇게 한 문장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ㅋㅋㅋㅋ 넘 웃겨요. 제가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그래 결론이 민음사 조선생 것이 제일 낫더라 했습니다.

단발머리 2021-02-16 20: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계속 이어서 써 주세요~~ 라고 하기에는 이 페이퍼에 아직 안 읽은 책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무척 반갑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계속 이어주세요!

Falstaff 2021-02-16 20:09   좋아요 4 | URL
옙. 윗글이 열 명의 작가인데요, 현재까지 쓴 게 열여섯 명. 앞으로도 또 많을 거 같아서, 지금 심각하게, 괜히 시작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흑흑흑....

붕붕툐툐 2021-02-16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좋다좋다! 진짜 죽기 전에 민음사 전집 읽기 해버고 싶은데 이런 등불 같은 길라잡이를 내려주시니, 요기서부터 시작~🙆

Falstaff 2021-02-17 08:47   좋아요 2 | URL
아이고, 과찬의 말씀을. ㅋㅋㅋㅋ

독서괭 2021-07-19 1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페이퍼 너무 좋지 않습니까? 게다가 시리즈로 예정되어 있다니 와우!!! 기대합니다!

초딩 2021-07-19 17:35   좋아요 1 | URL
굉장합니다! 북플에 포스트 즐겨 찾기 추가 기능 좀 있음 좋겠어요 ㅜㅜ ㅎㅎ

Falstaff 2021-07-19 20:14   좋아요 2 | URL
민음사 추천글 세 번에 나누어 다 썼습니다. 2월달에요 ^^;;
아직도 읽고 좋아해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꾸벅

독서괭 2021-07-21 13:54   좋아요 2 | URL
앗 어째서 최근 페이퍼인 줄 알았을까요? 시리즈가 완결되어 있네요.ㅎㅎ
 

 

1. 아놔, 시장의 애인 가족을?

  연휴에 아내하고 나들이 갔다가 발견한 현수막.

  전에 먼저 밝힐 것은, 운전하던 내 눈에 색이 더 많이 들어간 아래쪽 현수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것.

  천안시장 애인가족 지원센터.

  야, 청남도 천안시는 시에서 시장의 애인가족도 지원해주는구나! 별유천지비인간이로세!

  하긴 시장의 애인이라고 바이러스가 그냥 지나갈 턱이 없으니 지원해주어야지. 좋은 세상이야.




2. 바지교복? 치마교복을 허하라!

  아, 예쁘기도 하지. 요즘 여학교에서 그림처럼 바지로 된 교복을 동복에 한해 적용한단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발상은 항상 전환해야 하는 법. 그동안 얼마나 추웠겠느냐 말이지.

  나 고등학교 다닐 때도 바지 교복을 입는 여학교가 있었다. 동덕여고의 좀 촌스럽지만 귀여운 바지, 창덕여고도 바지교복이 있었던 것 같고. 창덕여고는 고바우 모자까지 쓰고 다녔다. 또 몇 군데 더 있던 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치지 말자.

  이젠 남학생들에게 치마 교복을 허하라!

  한 여름에 다리 사이에 뭘 매단 채 그걸 좁은 바지 가랑이에 담고 다니는 고충을 여성들은 아는가. 그저 여름만 되면 임시로 좀 떼서 냉장고 신선실에 보관했다가 가을에 다시 달고 다니고 싶은 심정을. 이의 해결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스코틀랜드나 옛 로마에서처럼 치마를 입히는 거다. 그저 남자들은 거기가 사계절 션~해야 한다는 건 다 아시지? 근데 왜 남학생들의 치마 교복이 없느냐는 말.

  이게 다 우리나라의 인구 정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일 수도 있다.




3. 리얼돌, 그리고

  아이고, 민망해라. 리얼돌 사진 좀 올려보려고 이미지 검색했다가, 이거 참, 사무실에서 여직원이 보면 성추행으로 신고할까봐 겁나서 얼른 빠져나왔다. 그거 참.

  근데 리얼돌을 여성계에선 여성을 성폭행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며. 법원에선 문제 없다고 넘어갔지만 세관에서는 수입할 때마다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통관을 시켜주지 않아 그때마다 법원에 호소해야 한다고 뉴스를 통해 들었다.

  이 얘기 하다가 아내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별걸 다 막는다고. 연애 못하는 남자들 어쩌고 저쩌고는 다 생략한다. 그냥 흔히 듣는 이야기니까. 기절초풍을 한 사연.

  아내 말씀이, 리얼돌 사용이 남자들을 여성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면, 국회는 얼른 법 하나를 제정해야 한단다. 남자 청소년들이 자위를 하면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무슨 체위를 상상하는지, 그런 생각이 리얼돌과 유사 성교를 하는 것보다 절대 사회적으로 덜 위험하지 않으니, 남성을 대상으로 "자위 금지법" 또는 "자위 중 상상 금지법"인 속칭 "금딸법"을 제정해야 한단다.

  맞다. 이거 백퍼 아내가 나한테 한 얘기다.




4. 꼰대가 어때서

  나이 먹으면 꼰대가 되는 거다. 내 친구 가운데 한 놈이 있는데, 얘가 우리나라 최초로 파리에서 건축전시회를 했으니 나름대로 유명 건축가인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땅만 사면 자기가 설계를 해주겠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설계료 비싸게 받아처먹는 걸로 유명한 놈이 정말 무료로 설계를 해줄 수 있을까?

  하여튼 대학 교수이기도 한 얘가 요즘 고민이, 자긴 절대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 이런 네미럴. 꼰대가 뭐 어때서. 다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거다.

  그렇지만 가끔 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며칠 전, 퇴근하는 셔틀 버스에서 예쁘고 어린 여직원, 아마 스물네 살? 나이만 가지고도 충분이 예쁠 수 있는 시절. 이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스마트 폰의 카톡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거야 뭐 어때. 문제는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리고, 셔틀 안에서, 울 회사는 KF-94 지급해주고 KF-94 안 쓰면 징계하겠다는 회산데, 밀폐된 셔틀 버스 안에서 그러고 있더란 것.

  못봤으면 모르겠는데 봤으니 이걸 어째. 한 마디 하려다, 고 어여쁜 입술에서 이런 소리 나올까봐 꾹 참고 그냥 집에까지 가고 말았다.

  "꼰대가 재수없게 잔소리야."



5. 미더덕

  이거 처음 먹어봤을 때가 아마 1970년대 초순이었을 거다. 외할머니가 시장 갔다 오시더니, 세상에 이걸 서울에서도 팔고 있더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시는데, 뭐 외계행성에서 온 생물체 같았다. 그걸 넣고 무슨 요리를 했느냐 하면, 된장찌게를 끓이셨다. 야, 얼마나 맛있던지.

  당시 된장찌게는 그저 버터 넣고 쓱쓱 비벼먹는 게 제일 좋은 섭식법이었지만, 이거 하나 들어갔다고 이렇게나 맛이 바뀌니 신기할 밖에. 두터운 껍질 부분도 꼭꼭 씹어 먹어야 진짜라고 배웠다.

  그래 손자가 묻기를, 외할머니, 이게 뭐예요?

  응. 미드득이야.

  미드득이요?

  그래, 미드득.

  하면서 얘기를 해주시는 바, 외갓집이 제법 살아서 한국전쟁이 터지자 종로 경운동에서 트럭을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 마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마산 아줌마들이 이상하게 생긴 걸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더란다. 행상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걸 넣고 된장찌게를 자박자박하게 끓여 먹으면 그리 맛나다고. 그래서 레시피대로 끓였더니 진짜로 맛이 있더라나?

  근데 이게 이름이 뭘까, 이렇게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결론을 내기를, 입에 넣고 저 우둘투둘한 껍데기를 어금니로 콱 씹으면 나는 소리, 미드득, 이라고 하자. 그래서 그때부터 미드득이 되었단다.

  이게 세월이 지나 지금은 미더덕으로 굳어진 거다.

  급똥 사태가 생겨 변기에 앉아 힘쓰면 나는 소리가 푸드득, 에서 푸더덕으로 바뀐 것처럼.




6. 명절 보내기

  명절만 되면 짜증나는 기사가,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하고 남자새끼들은 TV 보면서 술 처먹는다는 얘기. 사실 나도 그랬지 뭐. 근데 좀 이상하긴 했다. 언젠가는 고쳐야 할 것으로 찍어 놓았다.

  근데 쉽지 않다. 제사, 차례. 즉 우리나라의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로 근본적인 것을 고치지 않으면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 가시고, 어머니 가시고, 5년이 흘러, 이제 어머니도 제삿밥 5년을 자셨을 때, 형한테 말했다.

  나 죽으면 화장해 바람에 날리고, 새끼들한테 제사, 차례 지내지 말라고 했어.

  형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거기다 대고, 형도 그럴 거 아냐?

  형이 대답을 안 한다. 제삿밥은 먹고 싶은 모양이다. 옆구리 한 번 질러봐야지 싶어서 또 한 마디.

  나도 제사, 차례 안 지낼 건데, 우리도 부모 제사, 차례 지내지 맙시다.

  형이 음복 잔을 연거푸 몇 번 들이키더니, 해야 돼.

  흐흐, 나도 첫 술에 배부르지 않을 줄 알았다. 다음부터 제사, 명절 때마다 꼭 한 마디씩 해대서 결국, 어머니 제삿밥 열 번 자신 다음부터 제사는 지내되 명절에 차례는 지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을 봤다. 제사는 나하고 아내만 가서 절 두 번 반 하면 끝이다.

  명절? 아내가 며느리한테 전화해서, 얘, 다섯 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데 굳이 올 필요 없다.

  며느리 님이 하시는 말씀이, 걸리면요, 이번에 제가 보너스 받았거든요, 쿨하게 벌금 낼 게요.

  설날 오전 열한 시에 와서 떡만둣국 끓여먹고 세 시에 보냈다.

  바이러스 끝나면 명절 때 굳이 오지말고 여행이라도 가라고 했다. 안 와서 찜찜한 생각 들면, 택배로 좋은 술 한 병만 보내라 했다. 그잖여, 차례도 안 지내는데 구태여 올 필요 읎잖여? 차례를 지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면 여성이 명절 노동을 없애기가 무척 힘들 거다.

  새끼들 오면 우리는 편한 줄 알아? 아이고, 집안 대청소 해야지, 반찬 만들어 놔야지, 하을이 줄 달지 않은 영양과자 사 놓아야지, 우리도 걔네들 왔다 가면 나가 떨어진다고.

  여자들을 명절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려면,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차례를 지내지 말아라. 그럼 거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 어떤 것이라도 인식을 바꾸면 거의 해결이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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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2-15 11: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리얼돌은 참..ㅋㅋㅋㅋ처음엔 저도 그냥 싫기만 했는데 뉴스를 보니 일면 여성에 대한 범죄가 줄어들 수 있다고도하고. 딜×도 있으니 마찬가지 같기도하고.
영화 A.I처럼 주드로닮은 로봇이 나오면 여성들도 구매할것 같아서 반대는 안할래요ㅋㅋ

Falstaff 2021-02-15 11:39   좋아요 6 | URL
ㅋㅋㅋ 저는요, 리얼돌을, 사용할 땐 좋았지만 이제 결혼을 한다든지, 새로 애인이 생긴다든지 해서 버려야 할 일이 생기면 진짜 곤란하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소주병 버리는 것도 동네 사람들한테 창피하던데 리얼돌은 어떻게 버려야 할지 ㅋㅋㅋㅋㅋ 토막 살해 후 재생 플라스틱? 아이고, 난감하겠다 싶더라고요.

청아 2021-02-15 11:41   좋아요 3 | URL
웃다가 눈물났어요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2-15 11: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3,저 먼저 리얼돌에 대해 검색해보고 다시 왔습니다~~그런 역할을 하는 로봇을 리얼돌이라고 하는군요.
2, 여름에 남성들의 고충을 이해했습니다.그럴수도 있겠군요^^
4, 미더덕에 대해서 할 말이 참 많아요~~
제 고향이 마산 아입니꺼^^
참고로 서울에서 파는 건 미더덕의 미자에도 못미칩니다.
전 지금도 엄마가 미더덕과 콩나물 듬뿍 넣어 만들어준 미더덕찜이 그립습니다.
된장에 들어가도 맛있구요^^
6, 저의 지인의 시어머니께서 당신이 벌금 내어주신다고 가족들 다 모이라고 했다네요 ㅎㅎ

Falstaff 2021-02-15 12:23   좋아요 4 | URL
아, 마산 분이세요?
ㅋㅋㅋㅋ 저 어머니가 피란가서 마산고녀 졸업하셨습니다. 외삼촌은 마산고.
그래 외갓집에 가면 마산 이야기 많이 했어요.
리얼돌은 아직 로봇수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그냥 돌, 인형 수준이랍니다. ㅋㅋ

hnine 2021-02-15 1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기만은 꼰대 말고 쿨한 어른 소리 듣고 싶어, 마음에 없는 소리와 마음에 없는 행동 흉내내기 보다는, 차라리 떳떳하게 꼰대소리 들을 각오 하고 필요할때 필요한 소신을 밝히는 것이 진짜 쿨한 어른 아닐까 생각해요.
미더덕 꼭꼭 씹어먹어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하다가 그 안에 든 뜨거운 국물 입속에서 터지는 바람에 입천장 다 헐었던 기억이 있어요 ㅠㅠ
천안시장님이 이 글 보시면 ... ㅋㅋ

Falstaff 2021-02-15 13:16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다 나름대로 역할이 있으니 스스로 꼰대라고 나설 필요는 없지만 자리에 어울리는 언행을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hnine님도 경험이 있으시군요. 입천장 데보지 않은 사람은 미더덕 이야기 하지 말라! ㅋㅋㅋ 그것도 나중엔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coolcat329 2021-02-15 14: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남자가 치마를 입는게 더 맞는거 같네요. ㅎㅎ
미더덕 맛있어요♡근데 저도 터뜨려 먹다가 입 안 다 데인적이 있어요 ㅋㅋ
근데 며느님이 안 와도 되는데, 걸리면 벌금 낸다며 부모님 인사드리러 오고 또 시부모님은 앞으로 명절 때 굳이 오지 말고 여행가라고 하시니 서로 배려, 이해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Falstaff 2021-02-15 14:27   좋아요 3 | URL
글쎄 울집은 저도 좀 이상하게 생각해요.
아들 내외, 특히 며느리는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와야 한다고 하고, 시어미는 될 수 있으면 안 왔으면 하고... 시어미는 사실 청소하고, 맛난 거 해서 싸줘야 하고 그런 게 귀찮아서 같아요.
저는 팔자 좋게 굿이나 보면서 하을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백화수복만 따땃하니 데워 마신답니다. ㅋㅋㅋㅋ 요즘 집안들이 다 이럴 거예요.

stella.K 2021-02-15 14: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생각 잘 하셨네요.
저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신데 조금 더 급진적이시죠.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데 제사 지낸다고 그 혼이 와서 먹고 갈 거냐
먹을 걸 싸 가지고 갈 거냐, 산 사람 고생시킨다고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부지도 1주기 추도예배만 딱 드리고
여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울엄니는 그 부분에서만 그렇지 옛날분이긴 하죠.ㅠㅋ

Falstaff 2021-02-15 14:30   좋아요 4 | URL
그죠? 근데 전 형도 있고, 큰집도 있고, 고모들도 있어서 가끔 전화해
˝이번 제사 언제니? 오빠 생각이 나서. 나도 함 가볼까?˝
이 정도거든요. 우와.... 여기까지 온 것도 무려 어머니 가시고 10년이 걸려서 억지로 진짜 꼰대 형을 설득한 겁니다. 지금은 자기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지만요. ㅋㅋ

수이 2021-02-15 14: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박수 백만번 쳤습니다 폴스타프님 완전 멋지다 👍🏻

Falstaff 2021-02-15 15:06   좋아요 3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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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크 뷔야르는 1968년 프랑스 리옹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데, 웃긴 건 아니고 우리 동양인 인식으로 보면 약간 이상한 집안이다. 에리크가 10대에 접어든 어느 시점에 의사 아버지는 만사를 때려치우고 알프스의 벽촌으로 이사를 해버렸단다.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아 그럼 에리크는 엄마하고 같이 지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이틴 시절의 이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돌아와 통과하기 쉽지 않은 바칼로레아에 덜컥 합격해버리고 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어 1999년에 첫 번째 책을 출간하고 시나리오, 소설 등을 쓰는 등 현재까지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데, 이 책 <그날의 비밀>로 2017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니 잘 나가는 작가인 건 맞는 거 같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소설에 관해서는 주로 역사를 바탕으로 전환기가 되는 시점을 다시 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을 다룬 <7월 14일>, 벨기에가 현 콩고 민주공화국 지역에서 자행한 악랄한 제국주의적 만행을 그린 <콩고>, 미국 백인이 인디언들을 학살한 내용의 <대지의 슬픔> 같은 것들이 있단다. 물론 뷔야르의 이런 저작들을 더 읽어볼 마음은 없지만 <그날의 비밀>을 위시한 그의 모색이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도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설이지만 개전과 확전, 종전에 이르는 격렬한 전투 장면 같은 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40쪽의 짧은 분량을 통해 공쿠르 상을 받을 정도라면 전쟁의 단면을 직접 포착하여 날렵하게 처리하는 능숙한 외과의사의 메스 사용법을 익혀야 했을 터. 뷔야르는 첫 장면에서 독일의 경제인 스물네 명이 국회의장 헤르만 괴링의 초청으로 의장 궁전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때는 1933년 2월 20일.

  뷔야르는 스물네 명의 경제인 가운데 빌헬름 폰 오펠을 예로 들어 그가 영위하는 활동을 설명한다. 브라흐바흐 지역에서 소농으로 시작해 결혼을 통해 땅을 늘리고 자산을 축적한 가문으로 몇 대 선조 아담이 사용하고 있던 재봉틀을 대폭 개선해서 발전된 기계를 고안했고, 마침 지참금을 제법 가져온 조피 셸러와의 결혼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자전거 공장까지 지어 소위 사업다각화를 이루어 아담의 계승자인 빌헬름의 대에 와서는 종업원이 1천5백 명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회사라는 이름의 ‘법인’은 사람보다 생명이 길어 ‘법인 오펠’은 레바논, 독일,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일컫는 부탄보다도 더 오래된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런 경제인 스물네 명을 모아놓은 제3제국의 항공부 장관, 르프트바페 총사령관, 산림 및 수렵 담당 장관이자 게슈타포를 창설한 내무부 장관을 겸직하는, 그러나 무장폭동을 선동한 이력이 있고 과시적 제복 취향이며 모르핀 중독이란 세평을 듣는, 스웨덴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고 폭력성이 강한 헤르만 괴링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3월에 있을 선거에서 나치당이 180석 이상을 차지한다면 앞으로 10년, 혹은 영원히 투표 행위가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경제활동을 위해 견고하고 안정된 체제가 요구된다는 파시스트의 세계 공통의 연설을 한 후 등장하는 히틀러.

  그는 자신이 허약한 정치체제를 끝내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멀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을 박멸하겠다고 자신 있지만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기업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상냥하고 심지어 친절하게 연설을 한 후,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돌아간다. 이어지는 순서는 선거를 위한 모금 시간. 이것이 경영자들이 나치와 타협한 역사상 유일한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인 스물네 명이 소유한 회사는 앞으로 경영인의 이름 대신 특정한 레이블, 즉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라고 불리면서 오늘에 이른다. 법인은 쉽게 죽는 것이 아니라서.

  뷔야르는 이런 장면에 이어 특정한 스토리를 엮어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에서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점령일 것인데, 그것을 위하여 영국의 핼리팩스 경과 괴링이 쇼르프하이데에서 함께 한 사냥,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 쿠르프 폰 슈슈니크가 히틀러에게 당한 모욕 등과, 슈슈니크가 히틀러의 지시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국민투표 운운하니 침공해버린 바로 그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알베르 르브룅이 1938년 3월 11일에 서명한 ‘보졸레 와인의 원산지 증명 호칭에 관한 법령’ 같은 것을 아프게 꼬집어버린다.

  지금에야 정설이 됐지만, 애초에 히틀러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을 발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이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 일부분의 흡수를 방기해, 내국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국외로 돌릴 틈새를 마련해준 일과, 독일로 하여금 소비에트의 서진西進의 경계로 삼아 군비 축적을 알고도 모른 척했던 일, 그리하여 히틀러의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것을 꼽고는 한다. 그러니까 초장부터 독일과 나치의 허풍에 지레 겁을 먹은, 또는 먹은 것처럼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미온적인 대처, 오스트리아에서의 지배권 인정과 뮌헨 협정이란 이름의 체코 일부 수용을 인정한 순간, 거대한 전쟁이, 히틀러가 원했건 그렇게까지 크게 발전하기는 원하지 않았건 간에 터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주인공도 없고, 별 스토리도 없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예상외로 섬세한 문장이 곳곳에 박혀있으며 2차 세계대전 개전의 배경과, 그것이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의 광경과 재미있게 연결되기도 한다. 공쿠르 상을 받을 만한 특색 있는 구성도 좋기는 하나,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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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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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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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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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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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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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2011년 작품. 이런 것을 우리는 ‘명작’이라 부른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계적으로는 성가를 누릴 작품을 발굴해낼 때 더 빛이 나는 법. 더구나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카탈루냐 문학작품을 직역해낸 결과물 <나는 고백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370, 371번은 두고두고 크게 상찬할 일이 될 것이다. 카브레의 작품이 이것 말고 우리나라에선 번역이 되지 않아 이름이 낯설다.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이 속속 번역, 출간되어 독자들이 계속 읽는 즐거움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백한다>는 15개 언어에 통달한 인문학자이자 바르셀로나 대학의 교수인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가 육십이 넘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아르데볼 박사는 완만한 사형집행인인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 들어 결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기록을 시작하는 바람에, 무려 14세기 말의 지로나에서 싹이 터 17~18세기의 파리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시절의 네덜란드, 아우슈비츠, 로마를 위시해 21세기의 유럽 전 지역을 망라하며, 무수한 인물이 등장하는 복잡한 소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14세기 말, 지로나의 엄격한 종교재판관 니콜라우 에이메리크 신부는 한 기독교인의 악의적인 중상을 믿고 아무 증거도 없이 지로나의 유대인 의사인 조제프 샤롬을 고문해 이단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샤롬을 불에 태워 죽일 오직 하나의 증거는 ‘사도신경’을 한 번 외울 동안 고문대를 돌리고, 그래도 에이메리크 신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두 번 더 외울 동안의 고문을 통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불에 태워 죽여도 좋으니 더 이상의 고통만은 멈춰달라고 절규하는 피의자의 입에서 나온 자백이 유일하다. 지구가 편평했던 시절, 이미 화형 판결이 난 죄수의 혀를 미리 잘라, 불에 타 죽어가며 저주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신부의 명령을, 오직 하나, 사람의 고통을 더 볼 수 없는 재판관의 비서, 미켈 데 수스케다 수사가 거부함으로써, 유대인 의사 조제프 샤롬은 기독교 유럽을 향한 저주를 뿌리면서 한 줌의 재로 변한다.

  미켈 데 수스케다 수사의 앞에 무릎을 꿇고 등장하는 살트의 사팔뜨기 여인은 자신이 종교재판관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발하지만, 수사는 감히 이를 믿을 수 없다. 여인은 수사에게 전나무와 단풍나무의 씨와 솔방울이 든 주머니를 주며 말하기를, 제가 썩은 기둥에 목을 매면 믿으시겠습니까. 자살은 죄악이라고 수사는 이를 극구 만류하나 여인은 기어코 건초다락 안의 썩은 기둥에 종교재판관의 묵주로 목을 매고 만다. 여인과 수사를 용서할 수 없게 된 종교재판관은 미켈 수사에게 여인의 자살을 방기한 책임을 물어 이미 순례자의 복장으로 방랑의 길을 나선 그를 찾아 처형하라고 판결한다. 미켈은 몇 군데 수도원을 거쳐 최후로 저 외딴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에 정착하고, 마지막 수도원장이 죽은 후, 단 한 명의 수도사만 남으면 수도원을 폐쇄해야 한다는 수도원의 규약에 따라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을 닫는 날, 종교재판관이 보낸 청부 살해업자 라몬 데 노야의 칼에 맞는다. 이때 그의 주머니 속에 있었던 씨앗들이 함께 묻혀 몇백 년이 흐른 후, 단단한 재질의 단풍나무와 전나무가 그의 몸을 흡수하며 대지를 굳게 딛고 서게 된다.

  몇백 년이 흐른 후의 파르다크에서 훌륭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감별하는 특별한 눈을 가진 자키암 무레다는 모레나의 뚱보 불사니 브로치아가가 고의로 숲에 불을 질러 이제 나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홧김에 그를 찌르고 북쪽으로 도주해 몇 년 만에 폐허가 된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에 도착한다. 한눈에 단풍나무를 알아본 자키암은 나무를 베어 그것을 가지고 역사 이래 최고의 악기 제조 장인인 스트라디바리에게 가서 판다. 스트라디바리가 죽고 두 아들 오모보노와 프란체스코가 소유했다가 카를로 베르곤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고 베르곤치의 막내아들인 악기 공방의 장인 조시모가 자신의 도제 청년인 로렌초에게 나무를 써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만드니 후에 ‘비알’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스토리오니, 정식 이름 ‘라우렌티우스 스토리오니 크레모넨시스 메 페킷 1764.’ 조시모 장인은 제자 로렌초에게 나뭇값을 받지 않는다. 대신 자기 딸과의 사랑을 끝맺을 것을 요구할 뿐. 그리하여 사랑의 포기를 대가로 한 이 바이올린은 중개상 라 리테 씨의 손에 의해 크레모나(라틴어로 ‘크레모넨시스’)를 떠나 파리로 가서 작곡가 장마리 르클레르의 수중에 넘어갔다가 그의 처남 기욤프랑수아 비알이 르클레르의 두개골을 찔러 죽여 작곡가의 피가 바이올린 케이스에 튄 상태로 또다시 몇백 년이 흐르며 소유주가 바뀌게 된다.

  둥글던 지구가 다시 편평하게 될 무렵의 네덜란드. 알페르츠 씨 가족이 평화롭게 점심을 먹으려 식탁에 모인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군에 의하여 여태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가족 모두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오른다. 이때 세 딸의 외할머니 네트예 데 부크의 품에 바로 이 바이올린 비알이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던 딸 베르타 알페르츠를 위해 평생 모은 돈과 자그마한 집을 팔아 산 악기. 할머니는 바이올린을 끝까지 품에서 놓지 않고 있다가, 악기 케이스를 열어 보라는 군의관 아리베르트 보이트 소령의 명령을 거부하는 바람에 숱한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령의 권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만다. 이렇게 악기는 음악애호가이자 의사인 소령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소련군이 몰려와 로마로 피신한 소령은 이를 팔아 도피자금으로 쓰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온 골동품상 펠릭스 아르데볼에게 5만 달러를 요구하지만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아르데볼은 1천5백 달러에 넘기고 만다.

  펠릭스 아르데볼 이 기테레스. 천재적 지능을 가진 악당이자 주인공 아드리아의 아버지. 그는 어려서부터 영재였다. 비크 출신으로 안드레우와 로잘리아의 아들. 조제프 토라스 신부이자 교수의 추천장에 의하면 신학도로서 매우 학구적이고 신실한데다가 나이에 비해 우아하고 교양이 넘치며 빼어난 라틴어를 구사한다. 그가 얼마나 총명한지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도 매우 뛰어난 학업을 성취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이었지만 신학교 학생들은 세상의 갈등과 우여곡절을 잊고 학업에만 매진할 수 있었는데, 펠릭스는 파피루스에 적힌 고문서, 이집트의 민중문자, 곱트어, 그리스어, 아람어 등의 문헌을 섭렵하면서 팔루바 신부로부터 사물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를 감상하는 법을 배운다. 후에 평생의 업을 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그러다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사학년 때 숙명적으로 만난 여인, 카롤리나. 성당에서 평소와 다르게 오후 세 시에 난타하는 종소리가 전 로마 시내에 퍼지던 때, 그의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 과일 가게 외동딸. 전쟁이 끝났다는 외침이 골목을 떠돌 무렵, 펠릭스는 당시의 시각으로 봐서,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동시에 평생 그레고리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심각한 열등의식을 지니게 된다.

  카롤리나가 이제야 소개하는 우리의 주인공 아드리아 아르데볼의 어머니는 아니다. 그녀와 딸 하나를 둔 채 펠릭스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오랜 보물을 알아보는 식견을 더 기르고 때마침 도래한 야만의 시기를 맞아 프랑코와 히틀러 치하에서 막다른 곳까지 몰린 부자들로부터 무수한 보물을 헐값에 수집하기 시작한다. 천부적인 감식안과 협상술은 저 위에서 말한 것 같이 비알의 대가로 요구한 5만 달러를 단돈 천오백 달러로 후려치는 냉혈의 면모를 과시하지만, 어느 날 비밀번호 6,1,5,4,2,8을 누르고 급하게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간 후 아라비사다 고속도로에서 머리통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등장인물 아무도 모른다. 오직 독자만 아는 사실. 평소에 비알을 보관하고 있던 금고의 비밀번호 6,1,5,4,2,8. 연달아 쓰면 615428. 나치 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 군의관 아르베르트 보이트 소령이 명품 바이올린 한 대를 손에 넣은 것을 알고 그에게 취득품을 넘기라고 하자, 보이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자 지휘관인 회스가 유대인 여자 수용자, 615428번과 시시때때로 관계하고 있는 것을 자기가 안다고 협박한다. 순혈의 아리안 인이 제거해야 할 악의 덩어리인 유대 여자와 접촉한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회스 중령은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던 것.

  소년 아드리아 아르데볼은 비밀번호에 이런 내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비알을 친한 친구이자 바이올린 연주에 영재가 있는 베르나트 플렌사에게 며칠 빌려주고 대신 악기 케이스 안에 자신의 연습용 바이올린을 넣어두었던 것. 아드리아는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짐작하고 깊은 회한에 싸인다. 만일 아버지가 진품 비알을 들고 모종의 협상에 임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은 여기까지. 처음에 밝힌 대로 화자는 ‘나’. 그러나 화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상당한 분량이 알지 못하는 공백이라 그곳을 허구로 채워놓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알츠하이머 환자. 그리하여 14세기 말을 이야기하고 있는 화자는 문장의 줄도 바꾸지 않고 단번에 현재 시점의 현재 이야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수도 없이. 놀라운 것은 이렇게 시간적 배열과 사건의 배치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어도 독자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짧은 소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세 권, 1천2백 쪽이 넘는 장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모호한 치매의 시선으로 서술을 하는데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여기까지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까지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지고한 사랑에 관하여. 몇십 년을 오직 한 여자만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결국 만나고, 다시 그녀만을 위해 사랑하고, 살고, 눈물 흘리고 또다시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남자를. 그 쓸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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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09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또 보관함 푱...

Falstaff 2021-02-09 22:24   좋아요 2 | URL
아, 이 책은 읽으셔야 합니다.
심지어 물려주셔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명작이거든요.

비연 2021-02-09 22:24   좋아요 2 | URL
그럼 바로 장바구니로...

Falstaff 2021-02-09 22:27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입니다. 전 읽으라 권해드렸다고 나중에 틀림없이 칭찬받을 겁니다. ^^

coolcat329 2021-02-09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화자가 알츠하이머이고, 이야기가 14세기에서 현재를 왔다갔다 하다뇨...근데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니... 저도 도전해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02-09 22:35   좋아요 1 | URL
글과 (모르긴 몰라도) 역자의 우리말 실력이 좋아 저절로 몰입하게 되고, 안 통할 거 같은 이야기들이 술술 잘 풀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실 거예요. ㅋㅋㅋㅋ
(이래도 안 읽으시면..... ㅋㅋ)

coolcat329 2021-02-09 22:38   좋아요 1 | URL
네...저도 장바구니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1-02-09 22:42   좋아요 2 | URL
등장인물이 워낙 많고 가명까지 쓰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어서, 메모장을 옆에 두시고 메모를 해가면서 읽으시면 더 좋을 겁니다.

수이 2021-02-10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꺼번에 지르면 감당 못할까봐 일단 1권 질렀어요 폴스타프님 (소곤소곤)

Falstaff 2021-02-10 14:2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매사 튼튼이 젤입니닷! ^^

mini74 2021-02-10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거 3권짜리 아닌가요 ㅠㅠ폴스타프님 선택이니 저도 장바구니로 *^^*

Falstaff 2021-02-10 16: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여러 분이 지르시니까 이젠 슬슬 겁이 나는 걸요? ㅋㅋㅋㅋ
세 권짜리 맞는데요, 다 읽는데 한 나흘 걸립니다. 집콕이라면 연휴에 딱 맞는 장편입지요. 근데 역시 명절이라면 고기 안주에 쐬주를....안 할 수 없잖아요? 그죠? ㅋㅋ

유부만두 2021-02-12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여기도 프루스트 냄새가 나요.

Falstaff 2021-02-12 19:56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밌습니다. 프루스트처럼 한 얘기 또 하고, 아까 한 얘기 다시 한 번 더 하고, 막 그러지는 않습니다. ㅎㅎㅎㅎ 아니, 한 얘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한 번 더 하고 막 그러긴 하는데요, 프루스트 생각이 나진 않더라고요. ^^

북극곰 2021-07-02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찬하신 글을 읽고 (앞머리만!) 사서 이제 마지막 3권의 몇 페이지만 남겨 놓고 있어요.... 스포일러 일 것 같아 아껴두었다가 이제 와서 찬찬히 다 읽었습니다. 문단도 안 바꾸고 시공간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그게 또 금세 익숙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기술에 정말 감탄. 첨엔 잘못 읽었나 하고 몇 번이나 앞으로 왔다갔다 했지요. 아, 마지막의 반전 아닌 반전도.... 너무 슬프네요.
내용과 달리 유머러스한 묘사도 많아서 큭, 웃음이 터지는 구석도 있었고요. 이 작가 완전 근사합니다.

Falstaff 2021-07-02 09:33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아 정말 괜찮은 작가 한 명 찾았습니다. 다른 작품도 얼른 번역해 나오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된 서재 친구님이신데, 제 독후감 읽고 좋은 책 찾으셨다니 더욱 기쁘군요. ^^

행복한책읽기 2021-08-21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대단하십니다. 이 복잡한 소설을 이리 질서정연하게 정리해 주시다니요. 저, 조제프 샤롬이 누구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아 검색하다 폴스파프님 서재 딱 걸림. 와~~~~~ 이 작품 읽으면서도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와~~~~~ 폴스타프님 리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와~~~~~~ 이렇게 세 번을 외쳐줘야죠. 암요. 명작이고 걸작이고 전무후무할 듯합니다. 저는 간만에 진짜 맛있게, 사라질까 아까워 천천히 씹어 먹고 있어요.^^

Falstaff 2021-08-21 19:49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하.... 고맙습니다.
하여튼 이 책은 정말, 아휴, 말이 필요없이 명작, 앞으로 세기를 넘어서 읽힐 거라는 데 의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책읽기 님의 칭찬은 참 넘치게 기분이 좋습니다!!!!!
 
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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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전문)



  시집에 첫 번째로 나오는 시다. 문태준이라는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알았다. 문예지에서 이이의 시도 곧잘 읽어오곤 했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이 시를 읽고 시집의 앞날개를 펼쳐 얼굴을 확인했다. 농촌진흥청의 전 먼 시골 분소에서 소장 정도 하면서 농림부장관상 가량을 수상할 얼굴 또는 관상. 대강 짐작하시겠지? 그 아래 보니 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고,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잘못 읽었다. 맨 마지막 시 <뻘 같은 그리움>을 읽을 때까지 난 문태준의 생년이 50년 범띠인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시를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데, 1, 2년이 아니고 20년을 잘못 읽었다. 1970년생이다. 이런.
  1970년생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고? 서울에서 낳고 자라고, 학교를 마친 다음에야 먹고 살려고 공장을 찾아 지방도시를 전전한 내가, 만일 어찌하고 저찌해서 시인 면허증을 땄다고 해도 난 죽어도 이런 시를 쓰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시골 풍경조차 모르겠는가 말이지. 포천군 이동면 이리 노니는 골, 낭유리에서 군역을 치루던 1982년에 시인은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됐을 텐데, 그의 시 속 풍경은 나의 낭유리 보다 더 먼 시간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북 김천이면 다른 지역보다 그래도 조금 더 발전한 촌 동네 아니었나? 이런, 이런.
  그래 시를 다 읽고 뒤표지에 쓰인 이성복의 발문을 읽어보니 내 마음에 딱 들어맞는다. 이 시집을 읽은 감상으로 어찌 이를 능가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전문을 옮긴다.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그의 시의 목소리는 비 온 다음날 뻘밭을 기는 지렁이의 행보를 닮은가 싶더니, 어느새 뿌연 수면을 내리찍는 물총새 부리처럼 날카롭다. 쥐를 삼킴 뱀의 몸통처럼 꾸불텅거리는 그의 시의 행갈이는 기필코, 포획한 대상을 흐물거리는 단백질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다. 그의 시 행간마다 육식 곤충이 내뿜는 끈적한 타액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다,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장수하늘소 한 마리가 달빛 없는 밤, 세상의 갈라터진 껍질 사이로 배어나오는 수액을 느리게 음미하는 것이다.”

  참나. 이성복의 발문, 비록 영업글 비슷한 찬사일지라도, 이것도 시다, 시.
  시집에 실린 문태준의 모든 시는 지명을 밝히지 않은 시골과 기껏해야 시골 주변에 있는 소도시에 국한되어 있다. 시골의 숱한 나무, 꽃, 곡식, 작은 생명들, 소리 같은 것으로 메웠고, 등장인물 역시 서당골로 산미나리 뜯으러 간 어머니, 식구들이 몸을 열고 쏟은 것들을 지게에 지고 호박밭으로 가는 아버지,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는 여섯 살 난 딸, 오랜만에 친정에 와 돌아가고 싶지 않아 훌쩍이는 누이 등등, 어찌 이런 시집의 초판이 2004년, 21세기에 나왔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게 지난 4년 동안 쓴 시라고 하니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21세기, 이번 세기에 쓴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시.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전문)


  그래, 있다. 아직도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이란 인간이. 그리고 어이없게도, 이런 시를 쓴 시인은 겨우 서른에서 서른 네 살이었다는 거.
  이런 시를 읽으면서 시어 하나, 하나에다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어쩌니 저쩌니 따지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평론을 써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냥 시를 읽으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거 아닌가 싶다. 이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 문태준은, 나이와 관계없이, 그냥 몸에서 사리가 뚝뚝 떨어지는 도인 같다. 도사 말고 이미 달관해서 세상 다 산 사람. 무구하다고, 몸에 낀 때가 없다고. 이이는 시를 쓰기 전에 면벽참선, 목욕재개한 후 다시 두 시간 요가수행 후에 세상의 모든 미움과 번뇌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펜을 드는 것 같다. 한 편도 눈에 힘주고 사물을 바라본 것이 없다. 가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조금 있으면 봄이다. 제일 먼저 산수유가 피고 이어서 목련, 자목련이 그리고 벚꽃이 핀다. 이것들의 특징이 먼저 꽃이 피고, 지고 나서야 이파리가 돋는다는 거. 꽃이 피면 반드시 진다. 꽃이 지면, 당연히 있다. 꽃 진 자리가.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전문)



  시인은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닌가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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