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 - 위스망스 단편 (구) 문지 스펙트럼 25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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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 이렇게 세 중∙단편을 실은 책.
  위스망스는 몇 번 변신을 한 대표적인 작가다. 처음엔 에밀 졸라를 위시한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로 시작한다. 가난했던 졸라가 그의 대표작 <목로주점>을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그때 번 돈으로 파리 근교 메당에 살롱을 열었을 때부터 소위 ‘메당의 야회’에 참가한 것은 물론이고, 졸라가 직접 헌사를 써준 초기 위스망스의 대표작이지만 우리나라엔 아직 번역, 출간하지 않은 <바타르 자매>는 출간 이틀만에 모두 팔려 파리 시내의 종잇값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졸라가 <목로주점>과 <대지>를 발표하고는 몇몇 작가와 비평가한테 거친 욕설을 얻어들었을 때, 위스망스는 이미 <거꾸로>를 발표한 상태였음에도 졸라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거꾸로>는 당시에 거의 혁신적인 방식의 퇴폐미와 댄디즘을 과시한 작품이다. 애완 거북의 등껍질을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다는 발상을 여태 자연주의를 지향해왔던 작가가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화려함과 사치의 극을 달린다. 오죽했으면 졸라가 <거꾸로>를 읽어보더니 “자연주의에 치명타를 날렸다.”라는 코멘트를 달았을까. 이때가 1884년. <거꾸로>를 출간할 당시만 해도 위스망스는 자연주의 작품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 마음은 보이지 않았던 듯하다. 실제로 <거꾸로>는 이 책에 실린 <궁지>와 같은 해인 1884년에, <부그랑 씨의 퇴직>을 88년에 발표했다. <거꾸로>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만 위스망스의 퇴폐미는 자연주의로의 회귀 대신 신성모독과 악마숭배 쪽으로 향해, 1891년에는 사드 후작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길 악마숭배, 신성모독, 유소년 살해, 연금술 등을 소재로 하는 <저 아래>를 쓰기에 이른다. <저 아래>는 <거꾸로>와 조금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퉁 쳐서 그냥 세기말주의 또는 세기말적이라 칭하며, 결과로 이젠 자연주의와는 돌이킬 수 없이 멀리 떨어지게 된다.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자연주의에 반反해서 세기말주의로 전화한 위스망스. <저 아래>로 세기말의 저 아래 막장까지 가 본 그는 <저 아래>를 발표하고 단 1년 만에 너무 끝까지 간 또 한 번의 반동, 즉 합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듯) 스타피스트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더니 그곳에서 가톨릭에 귀의한다. 위스망스도 결국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이 된 것. 그를 퇴폐주의의 극단까지 내몰게 된 원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안나 뮈니에의 정신병이 아닌가도 싶다. 위스망스는 적성에 맞지도 않는 법학을 공부하고 평생 시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살며 틈틈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 (아내와 비슷하지만 아내는 아닌) 안나 뮈니에가 오랜 세월동안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켜왔으니, 이의 치료를 위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 않을까. 정신적, 경제적 결핍이 그를 악마주의로 몰았듯이 결국 가톨릭에 귀의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잇, 짐작이다. 아니면 말고.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작품은 다분히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쓴 것들이다.
  <등짐>은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위스망스 본인이 전쟁을 코앞에 둔1870년 3월에 입대했지만 곧바로 이질에 걸려 물똥만 찍찍 싸다가 병원으로 후송되어 파리로 돌아온 경험이 있다. 이후에 1871년 파리 코뮌 기간까지 병무부 전속으로 마르세유에서 근무했으니 졸라의 <패주>에서 보듯 무수한 프랑스 청년들이 스당에서 대책없이 죽어가는 동안 이이는 전쟁과 별 상관없이 편하게 지냈다고 보는 게 맞을 터.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라, <등짐>의 주인공 외젠 르장텔은 참전을 위해 소집되어 이질에 걸린 상태로 전쟁터로 갔으나 전선에 배치도 받지 못하고 다시 후방의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그렸다. 외젠은 부모, 그중에 어머니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송금받아 틈만 나면 느슨한 병원에서 빠져나와 단짝 프랑시스와 시내를 다니면서 초호화판으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1875년에 쓴 이 작품 속에서도 나중에 <거꾸로>에서 자주 보게될 댄디즘의 작은 자락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부그랑 씨의 퇴직>은 위스망스가 40세 때 작품으로, 배경 역시 당시 시청 말단 공무원이었던 자신의 페르소나일 수 있는 부그랑 씨가 업무능력 저하라는 핑계로 해고를 당한 이후의 삶을 그렸다. 당시 40세면 자타가 공인하는 중년이었다. 그러나 안나 뮈니에를 책임져야 했던 말단 공무원보다는 퇴직 후에 급격하게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하는 늙은 퇴직자, 평생 책상물림 말고는 아무것도 해본 일이 없어서 세상물정도 어둡고 민첩하게 대응하지도 못하는 독신남성이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 몰락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맞다. 나도 변화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오랜 동안, 아마 고 이건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사 경영진을 모아놓고 “마누라하고 새끼 빼고 다 바꿔!”를 주창한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열풍처럼 번져갔던 단어일 것이다. 갑자기 변화를 당한 부그랑 씨. 저 먼 구석기 시대였다면 졸지에 다리나 팔 하나가 잘려 사냥능력을 상실한 수컷 영장류가 된 느낌과 비슷하겠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상류 포식자일수록 죽을 때 험하게 죽는다는 건 아시려나. 뭐 그냥 힌트다.
  마지막 작품이자 책의 표제작인 <궁지>를 위스망스가 경애해 마지않았던 에밀 졸라가 썼다면 6백 쪽에 이르는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한 편일 수도 있을 재료다.
  늙은 공증인 르 퐁사르 씨는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가서 공증인 자격을 얻었는데, 아버지가 죽자 마음을 다잡고 고향인 마른 주의 보샹에 와서 터를 잡았다. 젊은 르 퐁사르 씨의 팍팍 회전하는 두뇌는 돈 많고 못생긴 여자를 아내로 맞는 일을 성공시킨다. 그래 자기도 돈이 많아졌고, 못생긴데다가 병약하기까지 한 딸을 낳았다. 딸이 점점 자라 초경을 하는 걸 확인하고는, 자신의 친구 비슷하게 지내는 스물다섯 살 랑부아와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홀아비가 됐다. 사위 랑부아 역시 못생긴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쥘 랑부아 하나를 만들고 곧바로 홀아비가 된다. 그런데 아내가 자신의 지참금 십만 프랑을 아들에게 상속을 한 것이 문제. 아들은 파리로 가서 공부도 하고, 연애 비슷한 것도 하다가, 발랑 까진 도시 처녀들에게 기겁을 하고 순진한 시골 아가씨 스타일을 바라면서 딱지도 못 떼고 있었다. 그러다가 착한 심성을 지닌 시골 출신 소피를 만나 연애를 하고, 임신을 시키고, 염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만다.
  내가 랑부아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소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하고, 아이 크는 걸 낙으로 삼아 남은 평생을 보내려 할 거 같다. 소피는 새로 결혼을 하거나 얌전하게 아이를 키우면서 살겠지. 이게 정상 아냐? 근데 랑부아와 르 퐁사르 씨의 경우는 전형적으로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의 예를 따르느라고, 법적 해석과 판례를 들어, 쥘이 죽기 전에 공증을 받아 서면 유언을 하지 않았으면 10만 프랑의 재산 가운데 5만은 르 퐁사르에게, 나머지 5만은 랑부아에게 유증된다는 걸 알고는, 공증인 르 퐁사르가 파리로 달려가 불쌍한 소피에게 23일치 하녀 임금인 33프랑 75상팀만 주고 입을 닦으려 한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당연히 부르주아가 이긴다.
  여기에 소피가 시골에서 돈 많은 지주의 아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집에서는 아빠한테 그놈하고 결혼도 못했으면서 줄 거 다 줬다는 굴욕과 함께 심하게 얻어터져 파리로 오게 된 사연까지 합하면, 정말 장편소설 한 권 정도의 스토리가 꾸려지지 않겠는가. 아직 소개하지 않은 소피와 소피의 친구들이 만드는 연합도 있고 말이지. 정말이다. 졸라라면 총서가 21번에서 끝났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 하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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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17 1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극단은 잘 통한다고들 하던데 위스망스가 그걸 몸소 보여주는듯 합니다. 본인은 극단을 오고가느라 아무래도 힘들었겠지만 관찰자입장에선 재밌네요. <저 아래>사놓길 잘했습니다🤭

Falstaff 2022-01-17 12:04   좋아요 1 | URL
으... <저 아래>. 저도 읽고 별 다섯 개든가 평가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추천하지 않을 책인데요. ㅋㅋㅋㅋㅋ
위스망스, 라기보다 세기말 퇴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저처럼, 재미는 없지만 흥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2-01-18 07:06   좋아요 2 | URL
위스망스 시작은 줄리언반스의 빨간코트 입은 남자였지만....골드문트님과 미미님 덕에 저 아래까지 소장한 1인 추가 ㅋㅋㅋ중고서점에서 샀는데 어찌된 일인지 래핑도 안 풀린 봉인서가 와서 잘 모셔뒀어요. 키워드 세기말 퇴폐미 이런 거에 홀렸네요...

청아 2022-01-18 07:08   좋아요 2 | URL
저도 세기말,퇴폐미에 홀렸어요ㅋㅋㅋㅋ
별 다섯인데 비추라하시니 더 궁금해요! 래핑도 그대로라니 열반인님 완전 득템하셨군요👍

Falstaff 2022-01-18 08:21   좋아요 2 | URL
오... 열반 님도, 미미 님도 <저 아래>를 구입하셨다니.
ㅋㅋㅋ 갑자기 리뷰 어떻게 쓰실지 팍팍 궁금해지네요!
래핑 안 뜯은 중고책, 이런 거 걸리면 정말 기분 좋은데 말입니다. 축하합니다!!! ^^
 
레 망다랭 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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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한 정치소설. 튼실한 엉덩이 근육 소지자는 도전 가능. 종전 후 혼란기에 (강남에 널린 사이비 말고 진짜) 좌파 지식인들의 갈등과 사랑을 그린 역작. 드 보부아르의 인간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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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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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요즘, 아니, 벌써 이 작품에 관한 수다가 뜸한 것이 느므 아쉽다. 오직 천재만이 쓸 수 있는 작품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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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14 20: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그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2-01-14 20:15   좋아요 5 | URL
넵넵넵넵! 응원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읽고 난 다음에 성취감이 대단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2-01-14 2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께요^^

Falstaff 2022-01-14 21:15   좋아요 4 | URL
좋습니다! 멋있는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2-01-14 23: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흑! 저 나는 고백한다 읽어야 하는데요...아직 펼치지도 못했는데 자꾸 이러시면 ㅠㅠ
저는 롤리타도 안 읽었는데요.ㅜㅡㅠ

Falstaff 2022-01-15 15:14   좋아요 3 | URL
ㅎㅎㅎ 가지고 계신 <나는 고백한다>부터 읽으셔야지 무슨 고민을 하셔요! ^^

반유행열반인 2022-01-16 0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나보코프 진짜 천재... 꼴랑 세 권 봤지만 볼 때마다 한 대 후려치는 새로움이요 ㅋㅋㅋ

Falstaff 2022-01-16 14:11   좋아요 3 | URL
옙. 열반인 님 페이퍼도 잘 읽었답니다. ㅋㅋㅋ
하여튼 정말 천재 아니라고 우길 수 없게 썼다니까요!
 
종이시계 - 개정판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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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장영희는 1952년 전시 서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포크너 작 <압살롬, 압살롬> 번역의 전범을 이룬 영문학자 장왕록의 딸로 태어난다. 지금은 서태평양 인근 국가에서는 박멸했음을 선포한 질병이지만 이때는 백신이 생기기 전이라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목발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의 사진을 검색해보라. 증명사진을 빼고 단 한 장의 엄숙한 얼굴이 없다. 늘 밝은 기운을 보이는 듯한 웃는 얼굴. 서울사대부고와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모교에서 석사를 하고,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모교인 서강대 영문과 교수직에 오른다. 이후, 번역을 하며 수필가로도 이름을 내지만 병마에 그나마 부실한 발목을 잡히고 만다. 2001년에 유방암, 2004년 척추암. 이것들을 이겨내고 강단에 서나, 결국 2008년에 간암으로 전이되어 2009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장영희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 <종이시계>를 처음 번역, 출간한 것이 1991년이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다시 새 판을 낸 것으로 보인다. 새 판이라지만 첫 번역을 완전히 잊고 다시 번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책에선 두 살과 한 살 터울의 부부가, 대화를 나눌 때 남편은 말을 놓고, 아내는 꼬박꼬박 경어를 쓴다. 이혼한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2022년에도 아내가 남편한테 말을 놓으면, 즉 반말을 하면, 대통령 후보의 아내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시비하는 것이 현실이니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넘어가자. 작품의 원래 제목도 <The Breathing Lesson>, “호흡연습”이다. 앤 타일러의 작품은 그동안 많이 번역 출간한 모양인데, 많은 작품들이 원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올드 패션이다. <Back When We Were Grownups>는 <인생>으로 <A Patchwork Planet>는 <바너비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2002년과 2001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작가 앤 타일러는 1941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퀘이커 교도인 로이드 페리와 필리스 마혼 타일러 부부의 네 아이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다. 숲 속 퀘이커 공동체에서 유년시기를 통째로 보내고 열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도시 나들이를 했으니 장래에 유명작가가 될 꼬마 아이에게 세상은 얼마나 관찰할 만한 것으로 충일했을까. 그러나 노스 캐롤라이나 랠리Raleigh의 공립학교에 입학한 앤은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후에도 소외감은 여전했는데, 이게 자신을 작가로 이끈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하여튼 16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립자유예술대학인 스워스모어 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에 입학한다. 이때 부모는, 내가 부모라도 당연했겠지만, 세 명이나 되는 동생을 보더라도 명문대 가운데 하나인 듀크에 가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당연한 거 가지고 설득이라니. 맏딸이 고집이 셌나? 하여간 듀크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슬라브 문학 학위를 받고 도서관에서 서지학자로 일하며 소설을 써 오늘에 이른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홈시크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 <우연한 여행객>, <종이시계>로 세 번 퓰리처 상 픽션 부분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1989년에 오늘 소개하는 이이의 대표작 <종이시계>로 상을 받는다. 이외에도 부커 상 후보(한 번은 최종심, 한 번은 예심)로 두 번 올랐으며 미국에서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질려서 이제 그만 읽겠다, 도저히 더는 못 읽겠다,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 매기 모건 여사가 내 아내하고 너무 똑 같은 거다. 물론 동서의 차이가 있으니 생긴 거야 비슷도 안 하겠으나, 하는 행동, 말하는 버릇, 물론 매기처럼 나한테 절대 존대말은 바치지 않지만, 존대는커녕 주옥 같은 욕이나 안 퍼질르면 다행이지만, 끝없는 수다와 기상천외한 어림짐작까지, 너무너무, 느므느므 똑같아서, 확 질려버렸던 거다. 그래 이 책을 아내에게 읽어보라 권해서 자아성찰의 기회로 만들어줄까도 싶었으나 오히려 모건 여사를 통해 더 고단수의 말빨을 장착하는 기회가 될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앤 타일러는 결혼생활에 대하여 정말 도가 튼 거 같다. 내가 살아보니 남자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게 여자하고 사는 거고, 여자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게 남자하고 사는 일인 거 같다. 앤 역시 메기와 아이러 모건 부부를 통해 이 비극적 필연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대강 1940년 아래 위쪽 태생으로 결혼은 필연이라 여긴 세대였을 테니.
  9월. 매기의 42년 친구, 그것도 절친인 세레나의 남편이 죽어 장례식장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무리 절친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여러 번 절교와 화해를 거듭하고, 어린 시절 자신만의 비밀을 은밀히 다른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하는 법. 물론 고의도 아니었고 악의도 없었지만 이런 오해가 없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 동안 편지는커녕 전화 한 통 없었는데, 울며불며 과부가 된 슬픔이 어떠니 저떠니 눈물바람을 하는 게 당연히 장례식에는 가줘야 하는 걸로 결론이 난 거다. 하물며 암으로 죽은 맥스의 젊은 시절의 매혹적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음에야. 세레나는 죽음의 병상에 누운 남편 맥스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단다. 살아생전 건강을 위해 조깅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서, “멋진 빨간색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갑자기 죽은 거하고, 주사바늘과 튜브를 잔뜩 꽂은 채 병상에 자빠져 죽는 거하고 뭐가 더 좋니?”라고.
  장례식이 오전 10시 반이라 집에서 늦어도 여덟 시에는 출발을 해야 하는데, 매기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모닝 콜을 잘못 눌러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말없는 남편 아이러는 일찌감치 일어나 잠깐 일을 보고 동네 어디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매기는 서둘러 닷지Dodge 승용차 수리를 맡겨 놓은 정비소에 들러 차를 찾아 출발한다. 정문을 나가 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매기는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브레이크를 밟는 힘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그리하여 마치 급발진하는 차처럼 순간이동에 버금가는 속력으로 도로로 쳐들어갔으며, 때마침 왼쪽에서 질주하던 거대한 펩시콜라 트럭이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음에도, 방금 정비소를 나온 닷지 승용차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던 왼쪽 앞 펜더를 살짝 우그려뜨리는 수준의 하느님이나 내릴 수 있는 행운을 아침부터 거머쥐었다…는 것을 메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편 아이러가 알면 뭐라고 할까, 변명거리만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했던 거였다. 눈 앞에 광경이 그려지시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누구하고? 안 알려줌. 내 복장이 다 터진다.
  매기와 아이러는 슬하에 순서대로 아들 제시, 딸 데이지, 이렇게 두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결혼 28년만에 일곱 살 손녀를 둔 건 제시가 열일곱 살 때 임신 2개월 상태인 열여섯 살 피오나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뭘 해. 손녀딸 리로이가 돌도 되기 전에 이혼해버린 걸. 그럼에도 매기는 아들 부부가 재결합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아서 리로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변장한 모습으로 며느리가 사는 집 근처에 숨어 며느리와 손녀딸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오기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WNTK 라디오 방송 청취자 대담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다음 주에 재혼을 할 예정이다, 첫번째 결혼은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두번째 결혼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이 말이 옛 며느리 피오나의 목소리라고 믿어, 그만 깜짝 놀라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은 거였다.
  억지로 구겨진 펜더를, 바퀴가 굴러갈 정도로만 펴고 남편을 만나 아이러에게 운전대를 맡긴 후 매기의 머릿속엔 모종의 음모가 움트기 시작한다. 세레나 남편이자 옛 시절 자신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맥심의 장례식에서 얼른 나와 돌아오는 길에 피오나 집에 들러 웬만하면 다음 주에 결혼하지 말고 어떻게저떻게 지금은 오토바이 판매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하드 록 그룹의 리드 싱어 제시와 재결합을 하는 게 어떠냐고 운이라도 떼어봐야 하겠다는.
  이렇게 9월의 화창한 날, 열네 시간에 걸친 로드무비의 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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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14 09:0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제가 앤 타일러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어도 좋아하는 작가군단에 넣어두었으므로 책 여러권 읽었거든요. 저는 사실 그중에 이 작품 <종이시계>가 제일 별로이긴 했어요.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요. 완전 슈퍼 오지라퍼.. 어림짐작으로 기어코 일을 벌이는 사람. ㅠㅠ 읽으면서 몇 번이나 그만읽을까 했었어요. 휴..

아니, 근데 골드문트 님의 아내분과 성격이 똑같다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0:17   좋아요 5 | URL
앗, 그렇습니까!
저도 앤 타일러를 좀 더 읽어봐야겠군요. 아이고, 근데 폭포같은 수다에 팍 질려서 말입죠, 마치 보통 크기, 약간 높지만 쇳소리 음색을 가진 중/노년의 여자가 귀 바로 옆에서 따따따다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는 거 같더라니까요!
책을 읽으면서도 귀에 정말로 들리는 듯한. 이거 참. 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하고 진짜 똑같아요.

잠자냥 2022-01-14 11:51   좋아요 3 | URL
우아, 저 앤 타일러 작품 1도 안 읽어봤어요. ㅋㅋㅋㅋ 재미없을 거 같아서 절대 손 안 가는 작가. 저는 왜케 책에 편견이 많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1:57   좋아요 3 | URL
책에 편견 있는 게 말입죠, 사람한테 편견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ㅋㅋㅋ
평소 다른 사람한테 편견 많이 ˝받는˝ 인간 올림.

다락방 2022-01-14 11:59   좋아요 4 | URL
잠자냥 님 앞으로 혹여라도 앤 타일러를 읽으실 생각이라면 종이시계로 시작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엔 잠자냥 님도 이 책속의 캐릭터에 짜증 제대로 나실 것 같아서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14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재밌을거 같아요. 작가와 책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런 내용인줄은 몰랐어요. 근데 매기와 아내분이 똑같다니 저도 소설에서 그런 경험 꼭 해보고 싶은데 아직 못 만났습니다 ㅎㅎ
결혼에 대한 생각 저도 살아보니 동감이에요. 서로의 만남을 위로하고 불쌍해하며 사는 수밖에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3 | URL
재미 있습니다. 너무 큰 걸 바라시면 실망하겠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한 상 잘 차려먹은 느낌이었어요! ㅎㅎ

새파랑 2022-01-14 1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완독하셨군요? ㅋ 책의 내용도 그렇지만 매기 모건 여사가 더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5 | URL
요즘 대기하고 있는 책이 잔뜩 있는 거 같아서 함부로 추천을 못하겠고, 나중에 다 읽으시면 한 번 생각해보셔요!

그레이스 2022-01-14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기억도 안나는 책이예요^^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Falstaff 2022-01-14 15:44   좋아요 2 | URL
재미는 있는데요, 도무지 매기의 수다와 참견과 끼어드는 건 아휴,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ㅎㅎㅎ

hnine 2022-01-14 14: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책 원래 제목이 <호흡연습>이었어요.
사실 저는 이 책 안 읽었는데도 마치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예전에 그 정도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였기때문이겠지요.
늘 저자나 번역자에 대한 친절한 소개로 시작하는 골드문트님의 리뷰, 이제 적응이 되었답니다.

Falstaff 2022-01-14 15:45   좋아요 2 | URL
아,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군요.
전 퓰리처상 받았다고 해서 한 번 읽어볼까 했습지요.
ㅎㅎㅎ 매번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mini74 2022-01-14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본 것 같은데 ㅠㅠ 했더니 정말 오랜 전 20대때 헉 겁나 옛날이군요. 그때 읽은거 같아요. 표지가 바뀌었군요. 아내와 닮은 주인공 힘들죠. 책은 약간 도피의 성격도 있는데 거기서 현실을 만나면. ㅎㅎ

Falstaff 2022-01-14 19:07   좋아요 1 | URL
아, 오래 전에 보셨구먼요. ㅎㅎㅎ 다시 읽으실 필욘 없.... 아닙니다, 옛 생각 나시면 후딱 읽어보셔요. ㅎㅎㅎㅎ
맞아요, 기껏 책으로 도망했는데 또 보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인생이란....
 
홀로 맞는 죽음
한스 팔라다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1893년 독일제국의 북동부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치안판사의 아들, ‘루돌프 빌헬름 디첸’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한스 팔라다. 아버지는 치안판사에서 시작해 나중에 최고법정 판사까지 지냈다. 전형적인 중류 집안 출신으로 음악에 열정적이었으며, 문학애도 흥미가 있던 어머니. 팔라다는 이들 사이의 아들이었는데,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주목하시라, 내 생각이 아니라 60여 년 동안 아동 도서관 사서를 역임한 프랑스의 빠뜨 여사가 강조에 강조를 한 바를 그대로 일러드리니, 한스 팔라다의 법관 아버지는 한스, 당시 이름으로 루돌프가 어렸을 때부터 셰익스피어와 실러 등의 작품을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을 해주었단다. 어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보는 일이 아니고, “어른들의 목소리로 듣는” 일이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진지하게 책을 읽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즈느비에브 빠뜨, <사서 빠뜨> 재미마주, 2017) 한스 팔라다의 법관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킨 것이니, 어린 아이를 키우거나 주위에 어린 조카들 있는 분들은 유념하시기 바란다.

  16세 때인 1909년에 말이 끄는 짐차에 치었을 때, 설상가상으로 말이 한스의 얼굴을 걷어차는 사고를 당한다. 1년 후 17세 때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는데, 이 두 번의 장기 입원 당시 오랜 시간에 걸쳐 강한 마약성분의 진통제를 다량 투여한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고 한스 팔라다는 자기 인생의 작지 않은 동안을 정신병원과 감옥, 요양소에서 흘려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이이는 나치 치하에서도 독일을 벗어나지 않고 독일에 남아 집필을 계속했다는데, 그 와중에 폭격 맞아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다행. 그래서일까, <홀로 맞는 죽음>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은 비록 정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게슈타포에 체포된 이후 변호사로부터 정신이상의 핑계를 대라는 권유도 받고, 베를린 폭격의 와중에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의사는 스스로 자신의 팔뚝에 약한 모르핀을 주사하는 걸 낙으로 삼기도 하고.

  이 작품 <Jeder stirbt fuer sich allein: 누구나 혼자 죽는다>는 빽빽한 편집으로 770쪽을 넘어간다. 실제로 나치에 저항했던 함펠 부부의 기록을 모델로 해서 한스 팔라다가 불과 4주에 걸쳐 1947년에 완성을 했지만,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2월에 베를린에서 죽고 만다. <소시민, 이제 어쩌나>와 더불어 한스 팔라다의 대표작으로 일컫는다고 한다.


  책은 4부로 되어 있다. 크방엘 부부, 게슈타포, 역풍, 종말.

  제3제국의 노동계급인 오토와 엘리제 함펠 부부는 1935년에 결혼을 해서, 1940년 엘리제의 남동생이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전사하는 바람에 반 나치 저항운동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방법으로는 우편엽서에 반 나치 구호와 내용을 손으로 써서 우체통이나 공공장소의 계단 같은 곳에 놓아두어 베를린 시민들을 향해 나치에 협력하지 말 것을 선동한다. 이들은 1940년 9월부터 1942년 가을까지 모두 287통의 우편엽서를 써서 살포했으나, 나치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거의 모든 엽서들은 즉각 신고와 함께 게슈타포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이들은 결국 2년만인 1942년에 체포되었고, 오토 함펠은 히틀러와 제3제국에 저항할 수 있어서 그동안 행복했다고 발언한다. 나치의 국민재판에서 부부는 국가전복 예비음모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3년 4월 8일 한날한시에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스 팔라다는 남편 이름은 그대로 오토, 라 하고, 아내의 이름만 ‘안나’로 해서 크방엘Quangel 부부를 만들었다. 나이도 오토 크방엘이 오토 함펠보다 열 살 정도 많게 했는데, 이는 아내의 동생, 오토의 처남 대신 크방엘 부부의 아들 오토헨의 전사를 이들 부부가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각색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처남의 죽음보다는 아들의 죽음이 행동변화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여기에 픽션이니만큼 다양한 에피소드를 첨가한다. 먼저 이들이 거주하는 5층 아파트의 구성원들을 보자.

  2층엔 전직 최고재판관 프롬 씨. 한스 팔라다의 아버지가 최고재판관 출신임을 기억하리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지하실에서 고통스럽게 죽기는 하지만 무뚝뚝하게 친절하고 정의를 신봉하는 키 작은 노인. 최선을 다해 주위에 있는 약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돕는데 위험을 무릅쓴다.

  3층은 전직 선술집 주인이었다가 본인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술 때문에 파산 직전에 몰렸던 페어지케 씨 댁. 아들 셋 있는 건, 위에서 둘은 SS, 나치친위대, 막내 발두르는 HJ 히틀러 소년단을 거쳐 최고의 나치 지도자 양성기관인 나폴라에 재학중이며, 딱 하나 있는 딸 역시 여성 수용소에서 곱게 살아 노동능력이 없는 나이 든 여성 죄수에게 복잡다양한 고통을 주는 걸 취미로 여기는 골수 나치 집안이다.

  4층에 크방엘 부부가 살고, 5층엔 여성 내의 전문점을 수십년 해온 로젠탈 부부가 살았다가, 2주 전에 로젠탈 씨가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소식이 없고, 내의 가게에서 비싼 제품들을 모두 집에 가져온 로젠탈 부인 혼자, 불운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이를 가엽게 여긴 크방엘 부부는, 자신들 역시 보통의 독일인이라 유대인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지만 로젠탈 부부가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로젠탈 부인을 보석, 귀금속, 현금 등과 함께 밤 동안 자기네 집에서 머무르게 한다.

  여기에 기생충 같은 두 명의 독일인이자 염탐꾼이자 게슈타포의 밀정이자 노동거부자인 에밀 바르크하우젠과 에노 클루게도 등장시킨다. (아오, 난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Die Kluge: 재치부인>을 무척 좋아해서 ‘클루게’라는 인물의 등장에 관심이 무척, 무척, 또 무척 컸다가, 팍 실망했다.)

  5층 로젠탈 부인의 집에 바르크하우젠과 클루게가 들어와 도둑질을 하려다 정작 하라는 도둑질은 하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술을 퍼마시고 세상 모르게 취했다가 2층의 전직 최고판사와 오토 크방엘의 방해로 곤욕만 치루는데, 이 일을 기점으로 선한 판사 프롬 씨는 로젠탈 부인을 자신의 집과 방에서 거의 감금수준으로 보호하고자 한다. 부인은 프롬 씨를 친절하지만 냉정한 사람, 정의 때문에 의무감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로젠탈 부인은 소외를 견디지 못해 나흘만에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킨 다음 몽롱한 상태가 되어 프롬 씨의 집을 나와 5층 자기집으로 올라갔다가 악당 발두르 페어지케와 게슈타포에 잡히지만, 창문으로 몸을 던져 죽고 만다.

  4층의 크방엘 부부는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유일하게 해피엔드를 쟁취하는 우편 집배원이자 현명한 재치부인, 에바 클루게로부터 타자로 작성한 군사우편을 받은 순간,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뀌어버린다. 라디오 조립을 좋아하여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된 오토헨. 그래 여러 라디오 회사에서 영입제의를 받기도 한 어린 친구는 입대하기 싫어 엉엉 운 적이 있음에도, 군사우편은 “총통과 민족을 위하여 장렬히 전사”했다고 주장하고, 이게 뻔한 허위라는 게 너무도 원통한 엄마 안나 크방엘은 히틀러와 나치에게 극도의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 순간을 맞춰 아래층 페이지케의 집에서는 파리 함락을 기념하기 위한 건배소리가 시끄러운데, 아내는 화를 참지 못해, 정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누구에겐가 화풀이를 해야 해서, 남편에게 “당신과 당신의 총통”이 아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퍼붓는다.

  가구예술가이자, 목재가공회사의 작업반장이자 구두쇠로 널리 알려진 오토 크방엘 씨는 “당신과 당신의 총통”이란 말을 도무지 수용할 수 없어 궁리에 궁리를 하다가 좁은 책상에 앉아 쓴다.

  “어머니, 총통이 제 아들을 죽였어요.”

  그리하여 오토는 아내에게 엽서를 통한 나치 저항행위를 설명하고, 겨우 엽서 나부랭이란 걸 듣고 히틀러 암살 정도를 생각했던 안나가 실망한 모습을 보이자 이렇게 대답한다.

  “미흡하건 지나치건 간에, 안나, 그들에게 걸리는 날엔 우린 목숨을 잃게 돼……. 만약 내가 목을 내놓아야 한다면 남들의 어떤 멍청한 짓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에 목을 걸고 싶어. 내가 어떤 짓을 하겠다면, 오직 당신과 하지. 이게 옳다고 하지 않겠어.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어. 난 그런 사람이야. 변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고 오직 홀로 할 수 있는 저항은 이것 뿐이었다고 오토는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나치 치하에서도 저항은 있었다. 아무리 미미했다 할지라도.


  7백 쪽을 훌쩍 넘어가는 장편이지만 잘 읽힌다. 나는 얼마나 바보인지. 같은 작가인데 제목이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에 쓴 다른 작품이겠구나, 싶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누구나 홀로 죽는다>도 샀다. 그건 편집에 좀 여유를 두었다. 둘 다 괜찮지만 읽기는 이 책만 읽기로 했다.

  이와 비슷한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잉에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한스 숄과 누이동생 조피 숄이 뮌헨 대학의 학생과 교수를 규합해 반 나치 전단을 뿌리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사형을 당한 사건. 읽을 때는 훅훅 속도감 있게 지나가지만 읽고 나서는 개운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 그저 체제에 쓸려가는 소시민이라서 그럴까?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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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1-13 0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또 마구 끌리네요~찜합니다!
작가가 말에 얼굴을 걷어 차이다니 죽지않은게 다행이지만 치료하느라 고통도 겪었네요.ㅠ
다른 출판사에도 이 책이 있군요.

Falstaff 2022-01-13 10:36   좋아요 3 | URL
말한테 걷어 차이는 건, 상상도 못할 고통이었을 겁니다. 아이고, 얼굴 뼈 몇 개는 부러졌을 텐데, 아, 두개골은 함몰이라고 하죠, 을매나 아팠으면 모르핀 성분의 진통제를 장기, 과다 복용했을지. 에휴.

유부만두 2022-01-13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백장미 책 사놨는데… 사놓기만 했는데요…

Falstaff 2022-01-13 10:37   좋아요 3 | URL
백장미 책도 사실 재미는 별로 없어요. 나치 시절에도 저항을 해 희생당한 실패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잠자냥 2022-01-13 1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찾아보니, 같은 해에 비슷한 제목으로 두 출판사에서 나왔군요? 그런데 그걸 다 사신 분이 여기 또 있고... ㅋㅋㅋㅋ
이 작품에도 술 좋아하는 인간이 나오는군요? ㅋㅋㅋㅋ 한스 팔라다 이 인간 엄청난 술꾼인가봐요.... 꼭 누구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3 10:39   좋아요 4 | URL
같은 해에 설마 같은 책을 찍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아, 근데 작년에 문둥이네하고 민음사에서 동시에 <패싱>을 낸 걸 기억했어야 했건만. 흑흑흑....
오늘은 새벽에 열이 오르고 근육통이 있어서, 요즘같은 세월 그저 컨디션 의심스러우면 집에서 쉬는 거다, 싶어 진통 해열제 먹었더니 까무러쳤다가 지금 일어났습니다.
근데 진통 해열제 먹는 인간이 술도 마시면 인생 조기에 졸업한다고 조심하라네요. ㅋㅋㅋ

2022-01-1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4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