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틴 헤드 1 - 오직 나만이 나의 근원이다
에인 랜드 지음, 민승남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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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인 랜드는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수성가한 유대인 약국 주인의 딸 알리사 지노비예브나 로젠바움으로 태어났다.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부잣집 자제로 태어났으면, 망한 거다. 아니나 다를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안에 요리사, 하녀, 유모, 가정교사 등 프롤레타리아 고용인까지 두루 거느릴 정도였으니, 당연하게도 혁명정부에 의하여 전 재산을 탈탈 털리는 것으로 모자라 크림 쪽으로 쫓겨가 살았다. 열여섯 살 되는 해에 가까스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 대학에 다니며 역사, 철학, 문학을 공부…하려고 했지만 이이가 두각을 나타낸 철학과 문학에 대한 의지는 대학에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초년 팔자는 볼셰비키한테 집안이 거덜이 났고 젊은 시절에도 사회주의 특유의 집산주의集産主義 정책과 레닌에 의한 일인독재를 겪었으니 머리 하나는 똑소리 나게 좋았던 이이가 남은 평생동안 볼셰비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어엿비 여길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나중에 미국에 건너가 극작가, 소설가, 연설가,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면서 그들의 정 반대 쪽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을 터. 이런 이유로 1940년대 이후 이이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파 진영, 특히 자유주의 사상의 파운틴헤드가 되어 버린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했다고 한다. 딸에게 여간해서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부모도 친척이나 친지와 함께하는 모임에서 알리사가 자신의 영특함을 과시할 때에는 이이를 자랑스러워 했단다. 1926년 스물한 살 때 미국에 도착한 알리사 바움은 자신을 초청한 친척이 살던 시카고에 잠깐 들렀다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정착해 영화에 잠깐 출연하는 등 그쪽 방면의 일을 하며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고, ‘에인 랜드’라고 개명을 한다. 이후는 잘 나가는 작가들과 비슷한 한 생애를 보낸다. 내가 주목한 랜드의 한 생애는, ① 총명하지만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한 아이, ②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한 체제에 의하여 순식간에 집안이 거덜나고 그것도 모자라 추방까지 해버리는 집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 ③ 주머니에 50달러만 갖고 도착한 미국에서 생존해야 했던 절박함으로 요약했다. 이런 환경은 내가 읽은 유일한 에인 랜드인 <파운틴헤드>를 통해, ①’ 극단적 개인주의 ②’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전체주의-독재정권에 대한 완전한 반대, ③’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영웅 주인공들의 탄생이라는 작용 혹은 반작용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작용 또는 반작용은 작품을 마치 황색신문의 연재소설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기재일 수 있지만 에인 랜드는 현대인의 삶 자체에 대한, 획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수천년 간 인류를 지배하던, 선하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를 뒤집어 엎는 데 성공하면서 황색신문 연재소설에서 벗어난다.

  만일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몇 가지를 권고할 수밖에 없다. 읽다 보면 가끔 에인 랜드의 정치적 입장이 불편해진다. 당연히 작가의 시선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이는 여성이지만 애초부터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집산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라서, 등장인물 본인이 <파우스트>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틀림없이 메피스토펠레스를 모델로 한 ‘엘즈워스 몽크턴 투히’는 파업 현장을 다니며 단결과 투쟁의 중요성을 연설하는 사회주의자이자 공동선을 위한 자선단체의 후원자로 시작했다가 조금씩 영웅적 창조자를 파멸시키려 하는 악마의 화신으로 진화하게 만들었다. 미국 태생의 미국인보다 훨씬 더 미국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해 이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불똥이 튄다. 이게 미국 소설 읽는 재미이기는 하지만, 영웅적 주인공 하워드 로크와 뚜렷한 주관을 가진 최고미녀 도미니크 프랭컨은 서로가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려 있었던 건 맞는데, 스포일러 때문에 최소한의 힌트만 흘린다면, 이들의 사랑이 결코 바람직한 과정을 거쳐 성숙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주의자 시각으로는 매우 불편할 수 있다. 에인 랜드 그리고/또는 훌륭한 역자 민승남이 단어 선택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상당히 부드러워질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랜드의 고의적 연출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이런 것 몇 가지만 감안해서 읽으면 좋겠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몇 번 얘기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구절은 “나의 조국은 나를 위해 죽어달라.”는 거였다. 이 책 <파운틴헤드>를 쓰고 약 20여 년 후에 미국 우파의 정신적 지주가 될 에인 랜드에게는 가당치 않을 말이겠지만 놀랍게도 <파운틴헤드>에서는 전편에 걸쳐 진정한 개인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개인에게서는 물론이고 세계와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도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심지어 개인주의, 물론 철저하게 진정한 개인주의자 영웅의 경우이지만 이들을 ‘창조자’라고 칭하며 불을 발견한 프로메테우스, 바퀴를 발명한 최초의 인간, 비행기를 설계한 과학자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책의 등장인물 가운데 제일 찌질한 건축가 피터 키팅은, 작품의 중후반에 주인공 하워드 로크를 찾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위해 키팅이라는 이름으로 설계도면을 대신 그려 달라고, 죽기보다 싫은 부탁을 하며 영혼을 팔아서라도 보답을 하겠다고 말한다. 로크는 영혼을 파는 것이야말로 제일 쉽고 편한 선택이라고,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 이게 진정한 개인주의라는 의미다.

  키팅과 로크는 책의 첫 장면에서부터 연결되어 있다. 키팅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로크가 기숙을 했던 것. 둘은 미국 동부지역에 있는 명문이자 가상의 스탠턴 공과대학 건축과에 다녔다. 1922년에 키팅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최우등 졸업하고 같은 날 로크는 3학년만 마친 채 퇴학을 당하고 만다. 스탠턴 공대 건축학과는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중세 고딕, 식민지시대, 크리스토퍼 렌* 등의 전통, 더 이상 건축학적 발전은 없을 것이란 전통과 고집에 입각한 교육을 하고 있었고, 키팅은 교수들의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빨아들인 반면 로크는 지난 시절의 유산을 복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건축하는 건물의 위치와 건물에 들어와 생활할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아름다운 “현대적” 건축물을 추구한 차이였다. 이제 최우등 졸업을 해서 전학기 장학생 자격으로 프랑스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가느냐, 아니면 뉴욕 최고 그러니까 세계최고의 설계사무소인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에 스카우트 되어 가느냐 하는 행복한 선택의 기로에 선 키팅 입장으로 보면 자신도 모르고 남들도 알지 못하는 두 가지 행운이 있었으니, 하나는 로크와 한 학년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크가 자신보다 먼저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키팅을 딱 한 마디로 소개하면, 결정장애 속물.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나 과부 엄마가 건축가의 길을 권유하자 별 의미 없이 건축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건축과에 진학을 해서도 애초부터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에 관한 개념이 없었으니 교수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등의 “빛나는 전통”을 잇는 데 전력을 다 했지만, 자신이 설계를 마치고 난 후에 ‘내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 지 늘 궁금해 했고, 작품에서 뭔가 미진하기는 하지만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은 밥을 먹고 살던 로크에게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다 작품 수정을 요구했다가, 그게 그럴 듯해서 그게 마치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그대로 수정본을 제출해왔던 것. 스스로 조금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로크는 그저 자기 작품에 아주 약간의 수정만 해주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로크는 작품의 마지막에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고백한다. 애초에 자질이 되지 않았고 건축에 대한 자신만의 관념이 없는 대신 타인들이 자신에게 내릴 평가에만 관심이 있던 키팅을 위해 작품 수정을 해주고, 간혹 대신 그려 주기도 해서 높은 평가를 향유하게 만들었던 것을. 키팅은 세계최고의 건축가 사무소에 들어가서도 자존심을 허물면서 자신의 설계를 로크에게 가져가 보여주고, 부족한 점에 관해 말해달라고 하고, 지금 말한 것처럼 수정해달라고 해서, 그걸 그대로 사장에게 제출해 아주 이른 시일 내에 스타 건축가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걸쳐 피터 키팅은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출세 지상주의의 찌질남을 대표한다.

  그래서 미국식 영웅인 하워드 로크의 적수로 피터 키팅은 완전히 함량 미달이다. 땅 속의 루시퍼나 메피스토펠레스를 대신하는 엘즈워스 몽크턴 투히 입장에서 보면 키팅은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리개 감이었던 파우스트 박사에 불과하다. 로크의 진정한 적은 투히다. 그러나 정말로 책을 읽어보실 분을 위해 흥미진진하게 벌어지는 투히의 지적 투망投網으로 자기 진영을 만드는 일,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진력을 다 하는 인물들을 괴멸하게 만드는지에 관해서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나는 에인 랜드의 정치사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이의 작품을 재미없게 읽을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이 살면서 가장 쉬운 방법인 영혼을 팔아 평생의 살림을 꾸려온 찌질한 인생의 일원으로, 가장 험난한 삶의 방법인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새삼 떠올리게 만든 거 하나만 가지고도 열흘을 바쳐 1,550 페이지의 장편소설을 읽은 보람이 있지 아니한가.

  결국 삶에 실패한 피터 키팅은 아무도 모르게 그린 그림, 한 시절 자신의 꿈이었던, 그림 몇 점을 가지고 로크를 찾아가 보여준다.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로크는 말한다. “피터, 너무 늦었네.”




* 크리스토퍼 렌. 1632~1723. 영국 르네상스 건축의 대가. 1666년에 있었던 런던 대화재를 복구하면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피터 애크로이드는 장편소설 <혹스무어>를 통해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런던의 50여 개의 교회에 얽힌 '교란역사' 또는 '역사교란'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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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7-29 06: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인 랜드의 마천루 가 분명 어느 책에서 언급되어 제가 오천년전에 찜해두고 있었거든요. 그때도 분량의 압박으로 미루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파운틴 헤드 리뷰로 또 만나네요. 역시나 분량때문에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골드문트 님 리뷰의 제목에 제가 심히 동의하는지라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영혼을 지키는 거, 그게 어렵죠. 그런 이야기라면 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2-07-29 09:12   좋아요 2 | URL
저도 사놓고 분량 때문에 후덜덜.... 읽는 결심을 하는데 반 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철학자라고 하지, 너무 어려워 여러 출판사가 정중하게 출간을 거절했다고 하지, 하여튼 많이 망설였는데요, 읽어보니까 지금 수준에선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량의 책을 읽기엔 너무 덥지 않나 싶고요, 선선한 바람 불면 한 번 시도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레이스 2022-07-29 0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그렇게 비판했는지 알 것 같네요^^
저는 이 작가의 책 마천루와 5권짜리 아틀라스 갖고 있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 읽고 나니 읽고 싶네요.
언제 읽나.. ㅋ
파운틴 헤드는 영문으로 슬쩍 슬쩍 보고 있는데 골드문트님처럼 깊이 있게 읽으려면 아무래도 한글로 읽어야겠죠^^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Falstaff 2022-07-29 09:13   좋아요 2 | URL
저도 지금 <아틀라스>를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입니다. 읽는다면 도서관에 갈까, 책을 살까... 이것도 궁리 중이고요.
아이고, 이걸 영문으로 읽으면... 생각만 해도 혀가 쭉 빠지네요.

coolcat329 2022-07-29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멋있는 말이네요.
작가가 러시아 출신이었군요. 미국으로 잘 건너갔네요. 레닌그라드에 있었다면 그냥 제거됐을 확률이 높을 사람이에요.
저는 읽을 엄두가 안 나지만 책의 내용과 작가라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Falstaff 2022-07-30 18:41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책은 참 괜찮았는데요, 이이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아틀라스>는 어째 읽기가 께름칙하네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 봐야겠습니다.
잘난 것들은 참 냉정해요. 미국으로 건너가서 20여 년이 흐른 다음에 딱 한 번 여동생을 만난 것 외에 다시는 가족들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고 하네요. 책의 주인공하고 비슷합니다.
 
-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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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광주 출생. 후장사실주의 멤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고, 난생 처음 써본 소설 <을>이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재원. 이후 장편소설과 단편집을 활발하게 출간해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집하며 바야흐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솔뫼라는 이름은 자주 들어봤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이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한 내 입장에선 좀 겸연쩍을 수밖에. 뭐 하여튼 그렇다. 안 읽어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말이지.


  “이민주가 방을 떠났다.

  ‘민주’하고 불러주던 목소리가 있던 방이었다.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 이제 누가 그를 ‘민주’ 하고 불러줄까. 그 목소리는 이제 그에게 닿지 못한 채로 방에 남는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방’이라고 하는 건 국적 불명 가상국가의 대학도시에서 절반 정도는 장기 투숙객이 머무는 호텔의 507호실, 2인용 방이다. 이민주는 이 방을 떠남으로 이제 민주일 수 없으니 한 인격체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도 다른 인격체가 아닌 한 폐쇄공간으로의 방일까? 아니다. 이렇게 작품을 시작한 작가의 의도는 그랬을 수 있어도, 독자는 한 ‘방’을 공유했던, 공유가 아니라면 적어도 일정 기간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소비하는 것을 허용한 다른 한 명의 인격체를 떠남으로써 이민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방’을 나가 광장의 무명씨로 변용transfiguration된다고 봤다. 즉 한 관계가 끝난 상태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고 읽었다.

  이민주는 오래 전 다른 ‘방’을 떠났던 경험이 있다. 어머니가 죽고, 운명하기 전에 고인이 깔끔하게 소지품을 정리해둔 유품 박스들 가운데 작은 박스 하나는 민주가 갖던지 그러고 싶지 않으면 주소에 적힌 이모를 찾아가 전해주라는 유언을 발견했다. 민주는 주소지를 찾아갔고 주소는 맞는데 어머니의 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윤과 바원이란 이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유품을 건네고 며칠을 함께 지내다 다시 돌아온 어머니와의 집. 이 집을 떠나며 이제 이민주는 어머니의 민주가 아니라 세상이란 크고 큰 벌판 속의 무명이 되어버렸던 경험.

  그러면 이민주가 떠난 방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노을. “노을이 이민주를 ‘민주’하고 불렀듯이 이민주도 노을을 ‘을’이라고 불렀다. 노을에게 이민주가 여전히 민주이듯, 이민주에게 노을은 을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지 못할 뿐이다. 이민주는 방을 떠났고 노을은 그것을 허락했다.” 많은 독자는 책의 표제 <을>을 ‘갑과 을’, 할 때의 을로 생각했을 수 있을 것. 그러나 노을, 이 쓸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통째로 이름으로 만들어 갖고 있는 사람을 줄여서 ‘을’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민주는 방을 떠났고 노을은 그것을 허락했다.”라니? 을이 허락을 하지 않는 한 민주가 방을 떠날 수 없었다, 떠나기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든지 을을 살해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라는 뜻인가? 독자여, 쉽사리 뜻을 확장하지 마시라. 그냥 떠났다는 거다. 을이 민주를 ‘기꺼이’ 떠나게 했다는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면서 병약한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민주.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중환자인 엄마를 대신해 자퇴원서에 서명해준 외삼촌 덕에 명을 다할 때까지 엄마의 병수발을 할 수 있었고, 유품을 들고 윤과 바원을 찾아가, 한동안 그들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가, 그곳을 떠난 후엔 아무나 해도 상관없거나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던 민주. 술집 주방에서 일하다 만난 친절한 부르주아 민하의 도움으로 외국어학원에서 서무 일을 하다 외톨이 일본어 강사 을을 만나 주로 밥을 같이 먹으면서 관계를 이어갔다. 몇 년 후 을은 타국의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었으며, 호텔 2인용 객실에서 룸메이트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장기 투숙을 하다가 민주더러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아무나 해도 상관없거나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는 민주가 무슨 돈이 있어 비행 여비를 마련하겠는가. 민주보다 열 살이 더 많은 을이 비행기표와 돈을 보냈고, 아무리 활개를 쳐봐도 사방팔방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민주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을에게 달려가서, 을의 ‘방’에 든다.

  그러니 처음부터 민주가 떠난 방은 을이 민주에게 ‘민주’라 불러 주던 방이었지, 방이 민주한테 ‘민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 이 이야기는 그리하여 민주가 ‘방’, 즉 민주를 ‘민주’라고 불러주던 을을, “을의 허락을 받고”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다. 민주가 올 때 비행기표와 돈을 보냈듯이, 을은 민주가 갈 때 역시 비행기표와 돈을 주어야 했을 것이니, “을의 허락”은 사실상 일정의 현금을 뜻할 수도 있다.


  을과 민주. 여기에 한 명만 더 보태보자. 호텔의 하우스키퍼 씨안. 씨안도 이방인이다. 세계여행 중에 이 나라에 와서, 이 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이 도시에 애착이 생겼는지 더 있고 싶어서 무료로 3인용 방의 한 침대를 사용하고 약간의 돈을 받는 대가로 방을 함께 쓰는 프래니, 주이와 함께 객실 하우스키핑 일을 하고 있다. 이방인의 숙명은 언젠가 떠난다는 것.

  씨안은 프래니-주이-씨안, 이렇게 룸메이트 세 명 관계의 일원이기도 하고,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을-민주-씨안 3인의 일원이기도 하다. 한 시절 민주가 윤-바원-민주 라는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고, 을 역시 룸메이트였던 린다, 린다의 남자친구 제이와 이루는 세 명 중에 한 명이었듯이. 하우스키퍼 프래니와 주니도 302호에 장기 투숙했던 30대 여자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만들었으며, 민주에게 친절했던 윤과 바원까지 윤의 어머니와 세 명의 관계로 이루어졌었다.

  씨안은 오전에 하우스키핑을 모두 마치고 오후엔 주로 극장에 들어 영화를 봤다. 책에서는 제목을 밝히지 않는 단 하나의 영화만 거론된다. 모든 동물이 사라진 미래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자. 이들은 인류종말의 맞아 본능적으로 시간만 나면 서로의 몸을 섞는다. 둘의 관계는 밝히지 않겠다. 아직 상점의 인스턴트 식품들은 먹을 수 있는 상태라서 이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생식 활동에만 전념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젊은 남자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세 명은 이때부터 더 나은 생활을 모색하고, 농사 짓는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암흑 속에서 누군지 모르지만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몸에 길고 잘 드는 칼을 쑤셔 박는다.

  이 영화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독자는 박솔뫼가 혹시 3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비극에도 방점을 두지 않았겠는가, 궁리하기 시작하고, 이들의 불안한 동거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말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침묵의 행간으로 상대의 뜻을 짚어낼 줄 아는 일. 그걸 공평하고 사려 깊다고 해석한다. 을은 끊임없이 민주에게 말없이 요구한다.

  “나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럴 때까지도 내 이야기를 들어줘.”

  을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상대인 민주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언제나.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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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26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샐린저의 프래니 주이 인가요?
왠지 그 분위기가 떠오르네요

Falstaff 2022-07-26 10:36   좋아요 3 | URL
옙! ㅋㅋㅋ 그레이스 님은 모르는 게 없으셔요!
저도 한 번 읽어보려 합니다. (그럼 두 번 읽으려 했냐고요? ㅋㅋㅋㅋ)

mini74 2022-07-26 13: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을 보면, 을이 알고보니 갑질하는 이야기같기도 하네요 골드문트님, 방이란 공간, 이야기 속 영화 등 궁금하네요. 그 와중에 프레니와 주이 찾아본 ㅎㅎ

Falstaff 2022-07-26 14:3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요즘 젊은 작가들이 늘 그렇듯, 우울 또는 대체로 흐림 정도인데, 아무도 갑질은 하지 않습니다.
강추까지는 아니고요, 시간나서 도서관 가셨는데 눈에 띄면 읽어보실 만할 겁니다. ^^
 
파운틴 헤드 1 - 오직 나만이 나의 근원이다
에인 랜드 지음, 민승남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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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 랜드, 이름조차 몰랐던 것이 창피하다. 철학자 출신이라 해서 겁먹고 읽기를 머뭇거렸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단박에 빠져버렸다. 작가 서문 속 종교 이야기와 관계없이 한 예술가/건축가의 새로운 창작 과정에 집중해도 좋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마땅한 책. 전형적 미국 소설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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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25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작가 책입니다. 책 검색해보니 너무 지적이라서 출간을 거부당했다는데요! ㅋㅋ
겁먹을만한 책소개인데 골드문트님 너무 좋으셨군요. 이건 골드문트님이라 소화하신듯 합니다.😅

Falstaff 2022-07-25 16:39   좋아요 4 | URL
헥헥..... 지금 막 운동하고 왔습니다. 물론 샤워는 했습니다. ㅋㅋㅋㅋ
에인 랜드가 충분히 더 철학적으로 쓸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마음 먹고 쉽게 쓴 거 같더군요. 작가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종교나 삶의 본질 같이 매우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서 독서 모임이라면 적극적으로 토론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물론 여차하면 쌈박질도 할 거 같고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7-25 13: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문으로 있어요. 알라딘에서 어떤 분이 이 분 사상을 비판한 리뷰인지 댓글인지를 읽고 영문으로 읽는 수고까지 할 필요 있을까 싶어 접었었는데, 일단 번역본으로 읽어야겠네요.^^

Falstaff 2022-07-25 16:33   좋아요 4 | URL
아이고, 이 책이 1,550 페이지 정도 됩니다. 이걸 영어로 읽는다고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흑흑흑.....
이이를 비판한다면 종교적 영역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사실 종교 만큼 쌈하고 싶은 분야가 또 있나요.
이 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전쟁 가운데 가장 잔혹한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은 같은 종교의 다른 분파끼리 싸우는 거하고, 같은 민족 간에 벌이는 내전이라고요. ^^;;;

잠자냥 2022-07-25 14: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이 에인 랜드를 제가 읽은 어느 소설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흠, 어디 내가 읽어보겠어! 했는데, 에인 랜드를 비판한 그 책이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하네요;;;; 아아아.. 뭐더라... 아아아, 생각났어요. <올드 스쿨>!

그레이스 2022-07-25 14:09   좋아요 2 | URL
그럼 제가 읽은게 잠자냥님 리뷰였을까요 ?^^;;;

잠자냥 2022-07-25 14:11   좋아요 3 | URL
ㅎㅎ 저는 아닐 겁니다. 저는 에인 랜드의 사상을 비판하기엔 이 사람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고요, 다만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에서 이 작가에 관한 묘사가 흥미로워서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기억해 둔 작가랍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2-07-25 14:12   좋아요 1 | URL
ㅎㅎ

Falstaff 2022-07-25 16:35   좋아요 5 | URL
저도 혹시 <올드 스쿨>을 읽고 이 책을 고른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 책에선 헤밍웨이 빠들이 난리잖아요? 그럼 에인 랜드는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 전 헤밍웨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에인 랜드가 좋았는지도 모르겠고요. ㅎㅎㅎ

Redman 2022-07-25 1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여자가 쓴 <자본주의의 이상> 읽고 이 여자 소설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생각 들었는데, 제 생각 외로 재밌나 보군요

Falstaff 2022-07-26 06:55   좋아요 2 | URL
옙. 다른 작품은 모르겠는데요,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생각해볼 거리도 많고요. 추천할 정도로 마음에 든 책입니다.

냐옹이 2023-06-2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인데 출판사에서 표기를 잘못했어요

Falstaff 2023-06-23 17:30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ㅎㅎㅎ 어떻게 발음하는 지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독자는 그저 재미만 있으면 장땡입지요. ^^
 
송강가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정철 지음, 김갑기 옮김 / 지만지한국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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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 집에 국문학 전집 비슷한 책이 한 질 있었다. 정여사가 여고 국어 교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에서 시작해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은 향가와 고려가요, 시조, 가사문학, 판소리 대본 등 갖은 우리 문학 전반이 실려 있었는데, 까까머리 소년이 하루는 우연히 그 전집을 꺼내 읽어보고 나름대로 대단한 흥미를 느꼈었나보다.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어쩌면 있던 사실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기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열서너 살 시절에 닥치는 대로 읽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 판소리 대본 등은 한 시절 소년으로 하여금 장래에 국문학 또는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가리가 더 커짐에 따라 물리, 화학과 수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 감에 따라 결국 방향을 바꿔버렸지만 우리 고문에 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엔 이과생들도 고문을 배웠고, 교과서에 나온 훈민정음과 <조침문>, <상춘곡>, <관동별곡>의 부분들을 달달 외우지 않으면 종아리를 맞던 시절이었다. 본고사 고문 문제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마치 수학의 로그 문제를 틀리는 것처럼 합격은 물 건너 간 거라고 하면서. 그땐 문법도 왜 그렇게 재미났었는지 몰라. 지금은 고문이나 문법, 다 잊었지만.


  <관동별곡>을 배운 고등학생 시절, 가사歌辭 속 풍경의 놀랍도록, 영웅적인 속도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한 번 보자. 고문 지원이 안 되어 그저 비슷하게 현대어로 적어보겠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도라다리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고 믈너나니 옥졀이 압패셨다.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셤강은 어듸메오 티악은 여긔로다.”


  계속 이어지지만 여기까지만 보자. 강호, 송강 정철이 사직하고 내려와 있던 전라도 담양 대나무 숲에 자연을 벗하는 병이 깊어 있었더니, 덜컥 관동 팔백리를 관장하는 강원도 관찰사를 하란다. 그래 성은이 망극할 수밖에. 연추문으로 대궐에 들어가 나중에 선조라 불릴 임금을 배알하고 경회남문을 바라 물러나는 송강의 손에는 왕명을 전하는 교지 한 장과 함께 옥으로 만든 관직의 패인 옥절이 들려 있다.

  다섯 마디에 작자는 전라도 담양 땅에서 한양까지 올라와 경복궁에 들어 왕을 배알해 사령장을 받았고, 다음 두 절 만으로 부임지인 원주 땅을 밟는다. 간단하게, 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로 돌아가니 횡성(섬강)은 어디인고, 여긴 원주, 치악산이로세. 딱 두 행, 한 문장으로.

  물론 이건 시라서 굉장한 축약이 가능했겠지만, 만일 같은 내용을 헨리 제임스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소설에서 묘사했다면 최하 3백 쪽, 원고지 천 매 가까이 필요했으리라.

  위의 인용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철 권위자인 역자 김갑기는 이를 풀어 이렇게 썼다.


  “자연을 사랑하는 버릇이 고치지 못할 병처럼 깊어져 물러나 쉬고 있더니, 강원도 관찰사의 명을 내리시니, 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갚을 길이 없구나. 연추문(延秋門) 달려들어가 임금을 뵙고 물러나니, 옥으로 만든 강원도 관찰사 신표가 앞에 서 있구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의 여강을 돌아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에 도착했다. 이곳 섬강은 어디쯤인가? 치악산은 바로 여기로구나.”


  해석문을 읽으면 내용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되 원문이 가지고 있는 운율을 전혀 살리지 못해 가사문학을 읽는 맛과 멋을 재현해내는 데는 실패한다. 3.4.3.4/2.4.3.4/2.4.3.4 //3.4.4.4/ 3.4.3.4 // 3.4.3.4/3.4.3.4의 율조. 이쯤 되면 이거, 과학 아닌가?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정철이 대단한 문인, 특히 시인이기는 했지만 역시 그의 정체성은 전형적으로 권력을 위해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치꾼이었다. <관동별곡>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임금에 대한 노골적인 아첨으로 시작해, 강원도 관찰사로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하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겠다고 다짐한다.


  “궁왕 대궐 터희 오쟉이 지지괴니

  쳔고흥망을 아난다 모라난다.

  회양 네 일홈이 마초아 가탈시고

  급댱유 풍채를 고텨 아니 볼 거이고.”


  철원, 예전 태봉국의 궁예 대궐을 지나며 보니 까마귀 까치가 지저귀는데 저것들이 천고의 흥망을 알까 모를까, 금강산 부근 회양 땅이 우연히 중국 회양과 이름이 같아, 나도 (중국 역사상 목민관으로 이름이 높은) 급장유처럼 선정을 베풀어 보겠노라, 하고 다짐하지만 정철의 깊고도 깊어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상은 숭왕崇王 사상. 때는 16세기말, 조선사에서 제일 유능하게 신하들끼리 싸움을 붙여 은근히 왕권을 세우는 방면에서 도가 튼 선조의 의도대로 반대파인 동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단연 최전선에서 눈썹을 휘날리고 백성이야 굶어 죽든, 노예상태로 빠져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던 정철은 <사미인곡>이나 <속미인곡>, <성산별곡> 그리고 <관동별곡>에서도 빠짐없이 태평성세만 노래한다.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각 고을을 한 곳도 빠짐없이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게 꼭 미덕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원주에 터를 잡고 각종 중대사를 다루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요새처럼 하루 만에 뚝딱 다녀올 수도 없는 원격지를 몇 달에 걸쳐 지붕 없는 가마를 타고 건들건들 흔들리며,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근여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 가나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백양 속에 가기 곳 가면

  누론 해 흰 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해 잰납이 파람 불 제야 뉘우찬 달 엇디리”  (정철, <장진주사> 전문)


  우리나라 최고의 술꾼 가운데 한 명 답게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자작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읊으며 유람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말이지. 이이에겐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고, 곳간 또한 풍족해서 요순시대에 필적해야만 했을 것이다.


  정철을 읽는 심사가 참 복잡하다. 마치 저 훗날 불란서의 조각가 “로댕”처럼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가 되라고 친구가 뜻과 관계없이 음가音價만 보고 지어준 호, “미당” 서정주를 보는 것 같다. 시 하나는 정말 절창 중의 절창이지만 딱 시 만 좋은 시인. 숱한 정치인들을 모진 고문 끝에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리고, 참형에 처하고, 곤장을 맞아 죽게 만든 정승 출신의 시인. 그래도 나는 이이의 시를 상찬할 수밖에 없다. 비록 유배를 간 강화에서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마셨으니 큰 시인의 관을 쓴 이의 자존심으로서는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가나 /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크게 유감은 아니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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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22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강이 부모 시묘살이를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해서 근처 송강 이름을 딴 지명이 많습니다.
가끔 산책하다 송강 시비공원도 지나는데 정철의 시조가 큰 돌에 여러개 새겨져 있어요.
저희 아파트 바로 뒤는 송강이야기공원이랑 이어지구요.
근데 골드문트님 십대초반에 시조 읽고 국문학을 전공할 결심을 하셨다니 역시 다르십니다. 👍

Falstaff 2022-07-22 16:20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고양 사시는군요!
그 동네 둘레길이 무척 부러운데요.

ㅋㅋㅋㅋ 애초에 창작 말고 우리 고전이나 한문학을 하고 싶었습죠. 그러다 집안이 망가져 물리, 화학, 수학하다 말면 취직이라도 하는데, 국문 한문 공부하다 말면 먹고 살지도 못한다고..... ㅋㅋㅋㅋ 세상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게 빵이잖아요.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과 쪽을 택했습죠. 뭐 인생이 다 그래요. ^^

mini74 2022-07-2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상춘곡 외우면서 맞은 세대입니다 ㅎㅎㅎ 아이들이 무지 싫어하는 분 중 꼭 정철이 들어가죠. 전 관동별곡에 임포 등 신선 이야기 좋아했어요 신선과 술이야기 뭔가 골드문트님과 어울립니다. 이게 시험문제로 나와서 그렇지 그냥 즐겁게 읽으면 참 좋은데 말이지요 ㅠㅠ

Falstaff 2022-07-22 16:22   좋아요 1 | URL
오, 상춘곡도, 조침문도 진짜 좋아요. 그때 지금처럼 좀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으면 정말 잘 외웠을 텐데 말입죠.
ㅎㅎㅎ 신선, 도교와 술. 정철의 <장진주사>도 좋고요, 이백의 <장진주>도 아주 절창입니다! 관동별곡에 이백이 그리 많이 등장하는지 이번에 읽고 깜놀 했답니다. ㅎㅎㅎ

바람돌이 2022-07-22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저 송강의 시 볼때마다 왕타령하는거때매 미치는줄 알았음다. 도저히 좋아할수 없는인데 역시ㅠ골드문트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라 시를 아셨군요

Falstaff 2022-07-22 16:25   좋아요 1 | URL
특히 <사미인곡>에서 ˝님˝을 왕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진짜 연애하는 내 님이라 생각하면 기가 막힌 연애시인데, 우리나라 학교 교육, 그거 문제예요. ㅎㅎㅎㅎ
고딩 때 이런 이야기 했다가 국어 선생께 장난이 분명한 귀싸대기 한 대 얻어 터졌습니다. 그분도 제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토닥이신 거니까 제 표현 ˝귀싸대기˝를 단어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

잠자냥 2022-07-22 09: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려가요, 한시, 가사 문학 참 좋아했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국문과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ㅋㅋㅋㅋ

제가 그 시절 정말 좋아했던 시는, 지금도 좋아하지만 정지상의 <송인>입니다. 아직도 외워요. ㅎㅎ

우헐장제초색다
송군남포동비가
대동강수하시진
별루년년첨록파

캬..... 특히 마지막 종장 다시 읽어도 좋네요...

雨歇長堤草色多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네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푸른 물결에 이별의 눈물이 더해가는데

mini74 2022-07-22 09:40   좋아요 3 | URL
헉 자냥님 저도 송인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김부식 싫어한 ㅠㅠ

잠자냥 2022-07-22 09:48   좋아요 3 | URL
정지상이라는 이름도 뭔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Falstaff 2022-07-22 16:28   좋아요 3 | URL
오, 그럼요, 우리나라 먹물들이 쓴 한시 가운데 멋있는 것이 을매나 많은데요.
정지상은 당대의 문장가 아닙니까요.
저는 정지상, 하면 귀신이 되어 화장실에서 김부식한테 빨강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하다가 철천지 원수 김부식의 부랄을 터뜨려 죽인 이야기가 젤 재미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7-23 2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관동별곡 배웠던 생각납니다.
저는 외우라고 해도 안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어서(바틀비^^)...
요즘에는 시경도 그렇고 옛시가 좋은듯요
감출듯하며 내보이는 감정이 있어요^^

Falstaff 2022-07-25 06:14   좋아요 2 | URL
오호, 그러셨군요. 한 시절의 레이디 바틀비. ㅋㅋㅋㅋ
아이고, 요새 길고 재미난 소설을 읽다보니 알라딘 로그-인 할 시간도 없어서 이제야 답글을 답니다. ㅎㅎㅎ
 
이방인의 아이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다시 홀링허스트. 1988년 <수영장 도서관>을 출간해 이듬해 서머싯 몸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홀링허스트는 네 번째 장편소설 <아름다움의 선>이 2004년 부커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7년 후, 2011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장편소설 <이방인의 아이>가 다시 부커상 예심long list에 올려 놓았다.

  88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모두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의 시대적 배경은 1913, 1926, 1967, 1979~80, 2008년이다. 그러니까 굳이 ‘대하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홀링허스트의 작품이 늘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남성 동성애를 다루었다. 내가 읽은 지난 네 편의 홀링허스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하면, ①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 옥스퍼드 출신, ② 귀족 부르주아, ③ 대리석 조각 같은 외모의 미남자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옥스퍼드와 필적하는 또다른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 출신이며 준남작의 장자로 3천 에이커(367만 평)의 토지와 작위 세습권을 가지고 있고,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대신 한 시절엔 이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은 시詩적 천재를 가진 매력남이 등장한다. 세실 밸런스.

  런던 근교 북부 미들섹스 지역에 너른 잔디밭과 사람이 직접 만든 바위 정원, 연못, 그리고 장미와 베고니아, 월계수 나무가 있는 정원이 딸린 널따란 저택이 있어 이를 ‘투 에이커스’라고 했다. 이 집은 성실한 프랭크 솔 씨 대에 이르러 저택의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으나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1913년에는 과부 프리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기만 한 장남 휴버트, 케임브리지에 다니는 똑똑한 외톨이 조지, 그리고 어여쁜 열여섯 살 막내딸 다프네가 몇 명의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1913년의 늦여름, 이 집에 학창시절 내내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던 둘째 조지가 자기보다 두세 살 많은 학교 선배 세실 밸런스와 함께 오면서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아무나 가입하지도 못하고,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비밀에 붙이는 전통을 지닌 케임브리지 클럽에 세실의 도움으로 가입을 하게 된 조지는 당연히 세실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교감을 넘은 사랑의 감정이 자라난 것.

  세실의 입장에선 자기가 물려받을 3천 에이커의 토지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될 2 에이커의 땅에 지은 저택에 무슨 볼 것이 있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 왔겠느냐는 말이지. 조지와의 사랑,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감정을 이제 바야흐로 직접적인 몸의 언어로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조지는 믿었다.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는 그게 맞았다.

  때는 1913년. 1차 세계대전을 불과 1년도 남지 않은 시점. 이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등장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은, 마치 <수영장 도서관>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찰스 낸드위치 경처럼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걸 절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바로 형사입건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래 작품에 등장하는 19세기 태생의 20세기 초반 게이들은 빠짐없이 여성과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다. 세실은 게이이지만 솔 가문의 외동딸인 다프네에게도 어느 정도 호감을 표시한다. 그래 굳이 구분을 한다면 게이와 바이섹슈얼의 중간 정도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독자에게 그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바로 다음해,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바로 왕립 버크셔 연대 6대대 대위로 참전한 세실 테우크로스 밸런스는 1916년 7월에 프랑스 마리쿠르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이때 나이 스물다섯 살. 주인공인줄 알았던 인물이 불과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

  1부에서 ‘투 에이커스’ 저택에 3일 동안 방문한 세실은 숲 속 깊은 곳에서 조지와 성접촉을 한 번 했고, 이때 부근을 지나던 다프네를 발견한다. 다프네는 예전 소녀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서명첩, 즉 사인북에 여러 유명인사의 사인을 받아 보관하고 있었으며, 열여섯 살 감수성 많은 소녀답게 괜찮게 생긴 부잣집 ‘시인’ 도련님이면서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운 면모에도 호감을 느껴 세실에게도 서명을 부탁해 사인북을 건넨 상태였다. 다프네가 오빠와 세실의 동성애를 알았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독자로서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어쨌거나 세실은 여태, 물론 사인북을 건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공책에, 이후 백 년 가까이 영국인의 애송시이며 자신의 대표 작품이 될 <투 에이커스>라는 시를 써서 서명을 하고 다프네에게 돌려준다. 독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시가 과연 다프네에게 헌정하는 것인지, 연인인 조지를 향한 것인지 미궁에서 헤맬 것이다.


  세실은 1부와 동시에 작품 속에서 사라진다. 독자는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여태 주인공인줄 알았던 등장인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남은 7백쪽은 어떤 스토리로 이어질까 싶어서. 걱정하지 마시라.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특기,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는 솜씨를 나머지 7백쪽에 걸쳐 멀미가 날 만큼 즐기거나, 독자에 따라서는 고통을 받을 수도 있을 터이니.

  한 번 초대받아 한 가정을 방문하면 방문객은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 백인 소설에선 그냥 상식이다. 세실 역시 막내딸 다프네를 자기네 집, 가훈인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라고 도들새김한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콜리 저택에 오빠 조지와 함께 초대한다. 그래서 다프네는 밸런스 남작 가문의 드넓은 콜리 저택을 두 번 방문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실이 다프네와 다른 한 여성에게 보낸 서면 청혼장에 승낙하기도 전에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후, 옥스퍼드 재학중에 참전했다가 폭탄 파편에 왼쪽 발가락 세 개를 절단한 채 퇴역한 세실의 동생 더들리와 결혼해버린다. 당시엔 이런 일이 그냥 보편적이었단다. 전사한 형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것이. 물론 승낙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승낙한다고 썼지만 보내기 전에 공증을 받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다프네 아가씨는 콜리 저택에 처음 방문하자마자 저택의 위용과 화려함과 사치에 매료되어 이 집에서 살고 싶다 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나중에 얘기한다.

  다프네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실하기 그지없는 장남 휴버트도 전쟁통에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둘째 조지는 전쟁이 끝나고 영국사 공부를 계속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머리가 벗겨지고 자신의 성적 취향과는 달리 당시 율법에 따라 남자만 좋아할 수 없어서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역사를 공부한 매들리와 결혼해 아이 없이 평생을 대머리로 늙어가며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 한 권을 부부 공동으로 출간한다. 아주 나중엔 세실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연애를 조금은, 아주 조금 감지할 수 있게 둘 사이의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내기도 하지만 그건 1967년 동성애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이후였음은 물론이다.

  세실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자 다프네의 남편 더들리는 애초 작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던 남자로 성장 과정 중에 형 세실의 시적 천재에 늘 비교가 되면서 은근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전쟁 중 야간정찰을 하다 자기 곁에서 죽어간 빌리 프리도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이 증상이 신경쇠약에까지 이르러 성격이 많이 비틀어졌는데, 읽는 사람은 형 세실로 미루어 보아 이것이 밸런스 가문에서 형질처럼 내려오는 동성애적 성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친절한 홀링허스트는 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론은 오직 독자 몫으로 둔 채. 나는 양성애자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1916년에 형이 죽자 평소 집에서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어머니 밸런스 부인은 준남작, 귀족이란 신분과 막강한 부르주아의 금권으로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평민 출신 병사들이 위험을 무릅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실의 시신을 영국으로 운구, 콜리 저택의 교회에 안장하는 것도 모자라 유명한 이태리 조각가를 초빙해 등신대 대리석 조각을 만들어 교회에 안치하는 데 이른다. 가뜩이나 약간의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더들리는 전쟁에서 가져온 신경쇠약과 합해져, 정상에서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있으나 좀 어색한 일탈을 저지르는데 특히 아내 다프네, 맏딸 코리나, 그리고 아들 윌프리드를 대하는 방식에서 그러했다.

  세월이 지나 세실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장군’ 밸런스 부인은 온갖 손님을 콜리 저택에 초대해 성대한 추모식을 열고, 전기작가 서배스천 스토크스에게 세실 밸런스 전기를 위촉해 초대받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주선한다. 여기에 소환된 인물 가운데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청년 화가인 레벨 랄프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가 끝난 밤, 세실의 동생 더들리의 주도로 모든 참가자는 떡이 되도록 술에 절었고, 이 와중에 리넨 실로 숨어든 레벨 랄프와 다프네는 아침이 밝도록 서로의 몸을 탐했으며, 얼마 후 야반도주해 살림을 차리는 데 성공한다.


  다프네의 맏딸 코리나는, 2차 세계대전 중 포로로 잡혔다가 죽음 바로 앞에서 목숨을 구한 후유증으로 광장 공포증에 평생 시달리다 결국 자기 머리에 총알을 박아 죽을 운명인 점잖고 온화한 은행 지점장 레슬리 키핑과 결혼해 존과 줄리언을 낳는다. 아들 윌프리드는 엄마 다프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다가 슬그머니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어엿하게 남작 작위 계승자다. 다프네는 두번째 남편 랄프가 죽고 다시 제이콥스 씨와 결혼하지만 아이는 없고 의붓자매가 있는데 딸이 제니, 옥스퍼드를 거쳐 불문학자가 된다. 의붓아들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등장해 세실 밸런스를 연구하는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을 연결해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세실이 쓴 역사적인 시 <투 에이커스>의 내력을 밝히는 것이 주제다. 이를 위해 1부에서 독자가 알아채기 힘든 단서 몇을 제시하고 이후 세실 사망 10주기 추도식, 다프네의 70번째 생일 파티, 전기작가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 그리고 열린 결말로 끝나는 종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처음엔 홀링허스트 특유의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잘 읽힌다. 잘 읽히고, 또 잘 읽힌다. 그러나 꽃노래도 삼세번이지, 한참 지나면 혓바닥이 쑥 빠진다. 세상에나. 한 행위를 위하여 작가는 해당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장황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준비한다. 한 번 더 얘기하면,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여태 읽은 앨런 홀링허스트도 읽으면서 장황한 느낌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기억엔, 별로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엔 880쪽을 6백쪽이나 550쪽 정도로 줄여도 충분히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하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독자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해도 적당히 해야지, 그걸 읽고 지겹다, 재미있다 판단하는 건 독자의 권리다. 저 앞에서 이 작품을 “대하소설”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이의 책을 읽으면 며칠 동안,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나 게이가 있는 건지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내 엉덩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주위를 둘레둘레 관찰하게 된다. 정말이다. 의심스러우면 한 번 읽어보시라. 남자 등장인물 셋 가운데 두 명은 게이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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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7-19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을 거라서 줄거리는 실눈 뜨고 휙휙 넘기며 읽었는데, 대충 감이 오는군요. 이 작가 잘 쓰긴 하는데 너무 길죠... 대부분의 작품에서 한 100~200쪽은 덜어내면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이 책은 더 그렇군요.

그나저나 마지막 문단 정말 공감갑니다. 이 사람 책 읽고 나면 내 주위 남자들 도대체 얼마나 게이인가.... 궁금해지고, 저는 지나가는 남자들 엉덩이(만) 한참 보게 되더라고요. 흠, 저게 게이들 눈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나?????????? 이런 심정으로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7-19 15:47   좋아요 3 | URL
아이고, 4부 들어가니까 혓바닥이 쑥 나오더라고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렇게 정성을 들여 따박따박 자판을 두드렸으니 정성은 가상하되, 읽다가 졸도하는 줄 알았습니다. 날씨나 좀 선선했어야 말입니다. ㅋㅋㅋㅋ 다 팔자예요, 팔자.

그죠, 전 어디 다니면서 여자 말고 남자들 유심히 살펴보게 되더랍니다. 팔자 걸음 안 걸으려고 신경 팍팍 썼다니까요. 가뜩이나 요새 치질이 도져서 께름칙한데 말입죠. ㅠㅠ

잠자냥 2022-07-19 15:58   좋아요 3 | URL
치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치질조차 다르게 생각됩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 2022-07-20 15:04   좋아요 2 | URL
저에겐 정말 알고 싶지 않지만 유행처럼 운명처럼(아마도 요즘 문학에선 유행인 거 같고 ㅋㅋ 푸코에 에리봉 땜이롱ㅋ) 알게 되는 것이 있사오니 그것이 바로 게이 섹슈얼리티…ㅋㅋㅋ 작년 여름 이맘 때 쯤 수영장 도서관 읽다가 더워서 포기했던 생각이 나네요…ㅋㅋㅋ 전 좀… 알고 싶지가 않은 데… 왜 자꾸 등장하냐고 ㅋㅋㅋㅋ 디디에 에리봉이 잠깐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 데, 이미 홀링허스트가 다 써놔서 그냥 자기는 푸코 전기 썼대요 ㅋㅋㅋ (에리봉아 잘했어..ㅎㅎㅎ)
그나저나 걸드문트님 치질 쾌차하시길…(응?)

Falstaff 2022-07-20 21:19   좋아요 0 | URL
제 증상은 전형적인 알코올에 의한 것으로, 아직은 병원에도 가본 적 없는데, 아이고, 불편하긴 불편해요.
(이런 얘기 해도 좋을 지 몰라.....)
샤워할 때 만져보면 두 군데가 도톰하게 부어올라서 말입죠, 근질근질 화끈화끈. 이러니 엉덩이에 눈길주는 아저씨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요.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공쟝쟝님!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2-07-19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앨런 홀링허스트 작품 중 딱 1개만 읽자 하면 혹시 뭘 추천하실까요? 읽을까 말까 고민되는 작가인데 1권 정도 읽어보고 싶어서요. ㅎㅎ

Falstaff 2022-07-19 20:0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 홀링허스트의 진짜 애호가는 위에 댓글을 다시 잠자냥 님이신데요, 저도 그분의 얘길 듣고 읽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짹짹거리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암만해도 부커상을 받은 <아름다움의 선>을, 단 한 권만 읽으시겠다면 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두 번째로 <수영장 도서관>을 꼽겠습니다. 좀 과격한 게이 섹스 장면이 나오긴 해도 벽돌같이 단단한 구조를 지닌 좋은 장편이라고 생각해서 말입죠.
근데 믿지는 마세요. 전 진짜 아마추어, 좋게 봐줘봤자 딜레탕트랍니다. -_-;;

잠자냥 2022-07-19 21:1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애호가는 아닙니다만, 단 한 권 읽으신다면 <아름다움의 선> 추천합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지막 부분때문에 장황, 꽃노래 삼세번 다 잊었어요.;;
남과북 생각이 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에피소드와 이유를 갖고 있나보네요 ^^;;

Falstaff 2022-07-19 20:0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남과 북>은 홍성원 말고 게스켈 말씀하지는 것이지요?
에피소드라기 보다, 한 행위의 정당성을 주기 위하여 왜 그런 행위가 나오게 됐는지 그걸, 아이고, 너무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바람에... 이이는 확실히 빅토리아 시대 전문가예요 ^^;;;

그레이스 2022-07-19 20:15   좋아요 1 | URL
지금 찾아보니 우리나라 영화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