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바스 - 이 땅의 손님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남기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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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에서 태어난 요제프 로트가 1939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질곡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로트의 작품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할 때부터 아예 또 한 편의 유대 문학을 읽을 것이라 여겼을 수밖에.

  그런데 아니었다. 타라바스. 니콜라우스 타라바스는 1914년 8월 현재 미국의 뉴욕에 거주하는 젊은 러시아 사람이었다. 러시아의 서쪽 근처 국가들 가운데 한 곳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기도 하다. 공부도 곧잘 했는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을 다니다가 3학기 때 혁명적 사상을 가진 단체에 가입한다. 그러나 혁명이나 사회주의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젊은 혈기에 목적 없이 열정에 이끌린 행동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 단체가 헤르손 총독 폭탄 암살에 가담을 했고, 이 바람에 타라바스도 얼떨결에 달려 들어가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때 집안의 외아들로 소위 대를 이어야 했던 아버지 타라바스 영감이 아래 위 할 것 없이 손을 써 석방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온 니콜라우스에게 아버지는 이 길로 미국으로 떠난다면 적당한 돈을 줄 것이고, 아니면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선언을 하는 바람에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 니콜라우스 타라바스는 러시아 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국경 쪽에 붙은 많은 속국 가운데 한 나라의 부르주아 자제로 유대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게 오히려 책을 읽는 독자에겐 흥미거리였다.


​  유대인이 쓴 소설을 유심히 읽어보면 많은 작품의 공통점이 있는 바, 유대인 또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대인은 모두 총명하며, 계산에 밝고, 장사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으며, (총명과 다른)현명한 데다가 사해동포주의자 같은 인격적 풍모를 (원래는 없었다가 점점 풍부해지기도 하지만) 지닌 거의 이상적인 인물일 경우가 많다. 반면에 그들 입장에서 이교도들은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고, 방종하고, 폭력적이고, 하여간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로 골고루 갖춘 양아치, 호모 바스타디스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한 종족이다. 그리하여 이민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트가 과연 어떤 타라바스를 만들어낼 지 애초부터 관심이 터지던 차에,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돈을 주머니마다 쑤셔 넣고 배에 올라 뉴욕 항에 도착한 타라바스는 콘크리트의 밀림 속에서도 아무 걱정 없고 힘이 넘쳤으며 새로운 생활을 어떻게 할까, 기대가 충만했다. 뭐 처음에 그랬다는 거다. 신대륙에 도착한지 두 달 만에 마치 잃어버린 삶을 그리워하는 노인처럼 고향생각이 간절해져 무슨 일도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 탄탄해진다. 그리하여 태만한 생활을 하며 자신을 방치하기로 결정을 하고, 돈 좀 있는 룸펜 생활을 하다가 카페에서 서빙을 하는 카탈리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연애를 하기에 이른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출신의 어여쁜 아가씨 카탈리나는 타라바스의 향수병을 달래주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했다. 타라바스는 질투심이 많은 건장한 체구의 튼튼한 청년. 하루는 오해했는지 아니면 청년이 정확하게 눈치를 챘는지, 카탈리나가 정말 조리사하고 치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밤 아홉 시에 출근하는 카탈리나 양의 입을 그 큰 주먹으로 한 방 쾅, 두드렸고, 이를 말리는 카페 사장한테 헤드록을 걸어 큰 유리창을 향해 돌진,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며, 카페 사장이, 어떻게 된 지는 모른 채 그냥 도망치고 말았다. 여기까지 보면, 대학 다니며 가입한 단체도 그렇고, 뉴욕에서 지낸 룸펜 생활과 가벼운 연애와 질투에서 시작한 폭행도 그렇고, 내면에는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하는, 내가 누군지 알겠지? 하는 우쭐함이 팽만해 있었다. 독자가 타라바스의 심리상태를 단박에 알 수 있게끔 요제프 로트가 절묘하게 써놓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3학기까지 다녔다니까 타라바스가 아는 것도 좀 있고, 생각도 나름대로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은데, 작가가 주인공을 묘사하는 “질투심 강하고 거칠면서 동시에 온유하기도 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온유한 모습은 눈에 불을 켜도 찾을 수 없다.

  사고를 치기 바로 전에 타라바스는 심심해서 놀이 공원에 갔었다. 뭔가 하나를 확실하게 믿지 않는 그는 기독교가 창궐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생겨난 숱한 미신을 믿는 경향이 있었던 그는 집시 여인에게 점을 보기로 한다. 이때 번쩍! 소설작법 5장 1절. 점쟁이, 예언자의 헛소리는 언제나 들어 맞는다는 거. 집시 여인이 복채 2 달러를 받고 손금을 보더니,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군요! 손금을 보니 당신은 살인자이자 성인이에요!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죄를 지을 것이며 그에 대해 참회를 할 겁니다. 그걸 전부 이승에서 겪게 될 거예요.”

  이 점괘를 기억하는 타라바스. 그럼 카페 주인이 죽었나? 창문이 깨졌을 경우 중력에 의하여 자유낙하 하는 유리의 절단면이 사람의 조직에 닿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런데 헤드록을 한 상태에서 머리로 유리창을 깼으니 떨어진 유리가 목을 쳤을까? 걱정하지 마시라, 카페 사장은 세월이 좀 더 흘러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해서 국가 유공자 목록에 등록될 팔자니까.

  자, 이 때가 1914년 8월. 정확하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점이다. 이 밤을 빌빌거리며 보낸 타라바스는 다음 날 아침 카페 주인이 죽었는지 신문을 보고 확인하려다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음을 알아내고 조국 러시아와 차르를 위해 참전하기로 결심, 러시아 대사관으로 들어간다. 백 루블을 여비로 받은 그는 러시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라트비아 리가 항구에서 (소위 계급장이 달린 군복이 있는)고향으로 가는 기차간에서 어깨에 안간힘을 써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며 도착한다. 마을에 왔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 완고한 부모는 타라바스가 바라듯이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듯, 가족을 지키는 기사나 영웅이 돌아온 듯” 맞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꼴을 해놓고 집을 떠났는지는 절대 생각 못하는 찌질한 타라바스는 그러나 마차를 타고 동네방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아 마음이 풀어졌다. 농부들 표정에는 큰 두려움이 쌓이는 건 절대 알아채지 못하고.

  집엔 부모님과 여동생 루지아, 그리고 사촌 마리아가 있다. 오랜만에 와서 보니 원래 좀 성숙했던 마리아가 완전 꼴을 갖춘 아가씨가 되어 있었던 거다. 혹은 타라바스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차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에 오다가 마리아를 만났고, 함께 숲 속으로 갔으며, 은근히 눞혔다는데, 뭘 했는지는 다 아시지? 집에 돌아온 커플. 어느덧 밤이 깊고, 이제 다음날 새벽 네 시 기차를 타고 전장으로 가야할 터이지만 발걸음 떼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다시 마리아의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고, 또 하고, 다시 살금살금 나오려 했지만, 그게 아무 소리 내지 않고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 하여간 자기 방으로 돌아오니, 잠귀 밝은 늙은 아버지가 우뚝 서 있었더라는 것. 아버지는 타라바스의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 붙이더니 군복의 소위 견장까지 떼내려다가, 말았다. 대신 한 마디 한다. “내가 너의 계급을 강등한다. 죽지 않고 돌아오면 마리아와 결혼하라.”


​  이렇게 다시 집에서 쫓겨난 타라바스. 그는 모른다. 뉴욕의 카페 사장한테 가한 폭력을 무마하기 위하여, 기소를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또 얼마나 큰 돈을 송금하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변호사와 허비해야 할 지. 하여튼 그렇게 93연대 보병연대의 소위로 배치받은 타라바스는 전쟁터에서 물 만난 물고기가 된다. 소속 연대에서 가장 용맹한 장교, 전우들에게는 가슴 뭉클한 전우애를 시전하지만 파괴와 약탈, 강간, 가치 없는 복수, 복종과 명령의 엄수 등을 확실히 시행하는 모습이 고위 장성들의 눈에 띄어 대위로 진급할 뿐더러 확실하게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독자는 잊지 않았다. 뉴욕 놀이 공원의 집시 점쟁이의 예언. “당신은 죄를 지을 것이며 그에 대해 참회를 할 겁니다.” 이제 남은 일은 작가가 예언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전쟁은 어느덧 끝나고 분리독립을 한 조국으로 돌아와 작은 마을에 연대를 새로 만들어 연대장 대령이 된 타라바스.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한 요제프 로트의 유대적 세계관.

  재미있게 읽다가 갑자기 헛김이 빠져버린다. 천하의 이기주의자이며 자기만 아는 철부지, 덜 떨어진 인간인 타라바스, 이이가 난데없이 지은 죄를 참회하기 위하여, 그것도 이승에서 마무리하기 위하여, 어처구니없어라, 순례자, 필그림이 되어 버린다. 타라바스가 쾌락을 탐미했던 탄호이저도 아닌데 이게 뭐하는 뻘짓일까? 유대인 작가라서? 재미있게 읽다가 거 참, 스팀 아웃. 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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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9-05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부와 2부 사이에 요제프 로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ㅋㅋㅋㅋㅋ
톨스토이 만나서 잔소리 잔뜩 듣고 왔는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뜬금 참회.
저는 이 작품 1부는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별점은 4.5 정도였는데 4줄까 하다 5로 그냥 올렸습니다.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9-05 16: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2부 가서 아주 팍.....
전 별 셋 주려다가 그동안 쌓아온 로트와의 우정을 봐서 하나 보탰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3-09-05 16:5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2부 무슨 일이야 로트!!
 
냉동어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채만식 지음, 최유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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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근대 문학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명.” 이렇게 주장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소설가일 것이다. 전북 옥구군 임피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유학할 때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져 (또는 자료에 따라,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을 피하고자)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해 동아일보, 개벽사, 조선일보 기자 등을 하다가 전업작가로 활동한 작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지만 조선 팔도 사투리 모두에 능해 작품 안에서 능청맞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만하다. 아쉽게도 이이는 1940년을 기점으로 작품 속에 친일적 요소를 삽입하기 시작하여 1942년 작 <아름다운 새벽>과 45년의 <여인전기> 두 편의 적극적 친일 작품을 생산해내기에 이른다. 채만식 스스로 1947년에 단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작품 속에서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자신의 친일 행적을 최초로 인정한 작가가 되지만 그렇다고 친일 반민족 작가의 오명까지 벗어나는 건 아니다. <냉동어>는 1940년에 『인문평론』에 발표한 작품으로 “친일행위를 본격화하는 첫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엮은이 최유찬의 해설에 쓰여 있다. 평소에 채만식이 친일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태 읽은 그의 작품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한 적이 없어 그리도 능란하고 골계적으로 사투리를 쓸 줄 아는 작가가 친일이라고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싶었었다. 이 책 <냉동어>를 읽어보니까, 일본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이 아니라, 일본의 대륙 침략의 역사적 당위성, 조선의 내지화 같은 것이 노골적이지 않고 오히려 너무도 스스러워, 자연스러울 지경으로 언급을 하고 있어서, 여태 알고 있는 친일 문학과 구별이 되는 동시에, 친일 청산을 위한 평론가들로부터 더 높은 친일의 내면화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위키피디아).


​  <냉동어>, 얼린 물고기. 강시가 되어 창고에서 점점 더 딱딱하게 얼어가고 있으나 겹겹이 성에가 낀 눈으로는 푸르고 푸른 바다 속을 바라보고 있는 냉동어. 놀랍게도 <냉동어>는 연애소설이다.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언제나 확실한 적자를 보증하는 기업인 잡지사 “춘추사” 사무실. 신년호를 교정하고 있는 중이다. 주필은 서른세 살 먹은 조선 문단의 혁혁한 중견 대가 문대영. 지금이야 서른세 살이라도 구상유취의 젊은이 대접을 받지 저 시절, 1930년대 말에는 혁혁한 중견 대가라는 타이틀도 어울렸던 때다. 사람들이 얼른얼른 죽어 주니까 후배들이 그만큼 쑥쑥 자라날 수도 있었다. 채만식 본인도 마흔여덟 살을 몇 달 앞두고 전쟁 터지기 전에 폐결핵으로 죽었지 않은가. 시인, 소설가가 주인공일 경우에 주인공이 육체 건강하고 일이나 사상적으로 전투적인 사람이 극히 드문 관계로 <냉동어>의 주인공 문대영 역시 본인이 스스로를 이렇게 평한다.

  “삐뚜러진 빈 집에서 호올로 거주하는 물락된 귀족의 신세로 세대의 룸펜, 즉, 거지beggar.”

  작가는 문대영더러 “모든 사물에 흥미나 관심이 없으며, 젊고 가정을 가졌으나 퓨리탄이 아니어서 ‘모든 남자’의 규범에서 벗을 것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비록 집이 있고, 집에 가면 만삭의 아내와 곧 있을 출산을 위해 딸을 돌보아주려고 평양에서 내려온 장모가 당분간 함께 살지언정, 그리고 하루 뒤 첫 딸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첫 아이가 세상 구경을 한 바로 그 날, 새로 생긴 애인과 잠자리만 빼고 밤드리 노니다가 새벽 네 시 가까이에야 귀가해서 아이 구경을 했다 이거다. 즉, 1930년대 말 조선의 중산층 인텔리겐치아 답게 욕을 푸짐하게 먹을지언정 시대가 허용하는 방탕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갑자기 이야기 가운데로 불쑥 들어가지 말고 차근차근 시작해보자.


​  <냉동어>의 시간적 공간은 1930년대 말의 연말이다. 신년호 교정을 하느라 바쁜 시간에 별로 상종 없는 영화계 관계자 김종호라는 일면식 없는 인간이 스미꼬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 도쿄에서 경성으로 이사했다고, 평소에 영화와 무대 예술에 대해 이해와 관심과 동정이 깊다고 굳이 소개를 해준다. 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스물세 살을 먹은 스미꼬는 다음날 오후에 다시 사무실을 방문해 소파에 앉아 <성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코 앞에 앉은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지는 않아서, 대영은 값진 모피 외투와 윤潤gloss 좋게 새까만 모피자락으로 덮은 무릎 위에 놓인 흰 손가락에 상당히 굵은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스미꼬 아가씨가, 어제는 못 보았던, 침울한 얼굴, 지적으로 세련된 총명함이 보이는 듯한 표정 등등 여성의 기상이 매우 노블하며 화장, 의복 등 전체 풍모가 기품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미인이라 할 만하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모든 남자의 규범에 벗어날 것이 없는 대영은 거의 모든 수컷들이 그러하듯이 암컷을 앞에 놓고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네 시 반밖에 안 됐음에도 책상을 정리하고 스미꼬와 함께 경성 시내를 구경하기로 작정을 한다.

  그럴 수 있겠지? 미인을 앞에 놓고, 비록 맞춤법 표준안이 나오긴 했으나 불평이 많은 동료들이,

  “뚫, 뚫…에잇 이놈의!… 온, 이게 글ㅅ자람!... 쌍 디귿에 이을을 하구, 또 그 옆댕이에다가 ㅎ을 붙이구, 이게 무슨 천하의 괴벽들이람!... 우리두, 요? 우리두 우리 춘추사식春秋社式 한글을 좀 만들어 가지구 이 흉악한 뚫ㅅ자 따위, 끊ㅅ자 따위 이런 괴물일라컨 뽀이코틀 합시다!”

  라는 주장이 귀에 들어오겠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문대영은 스미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전화통이 울리더니 장모가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대영의 맏이, 첫 딸이 태어났다고, 그러니 얼른 들어와 아이 구경을 하라고 안달을 하는 거다. 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원래 순종적이고 현명하고 기타 한국적 미덕을 모두 갖춘 아낙이라 조금도 걱정하지 않은 채, 스미꼬와 함께 종로통을 걷고, 그녀가 경성 시장major이라면 종로의 보신각을 단박에 헐어버리겠다고 구시렁거리는 것을 들으며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스미꼬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 벗해주기”로 결심을 해서 스미꼬 혼자 사는 아파트에 함께 가, 또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키스 한 번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노닥노닥 새벽 세시 반까지 머문다.


​  이런 것이 한 번이 힘들지 두번째는 아무 것도 아닌 거거든. 그리하여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다음날, 문대영은 다시 스미꼬 집에 가서, 이번엔 할 거 다 한다. 비록 쁘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라고 해도 ‘퓨리탄이 아니어서’ 죄의식이 전혀 없다. 문대영은 스스로를 생활을 잃어버린 인간, 그리하여 유령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조금은 가운데 중, 중급 정도의 세상 허무함을 갖고 사는, 물론 이게 진짜 허무함인지, 자신이 작가임을 나타내려고 보여주기식 허무함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거 비슷한 거에 항상 적셔져 있는 인간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사람이 어디 배겨 나겠느냐는 거다.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해서 데이트를 하고, 여자 집에 가서 또 새벽 세시 넘어서까지 밤중에 체조를 하다가 새벽도 다 지나 처자식 사는 집으로 와서 눈도 못 붙이고 깔깔한 입에 밥이나 제대로 넘길 수 있나, 이럭저럭하다가 곧바로 출근을 하지만 당연히 지각이고. 사람 사는 꼴이 아니어서 결국엔 병이 나버린다. 꼴값을 한다.

  이러던 어느 날, 스미꼬는 문대영에게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과 함께 도쿄로 떠나 버리자고 제의하고, 중요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착각하며 사는 대영은 그 자리에서 동의를 해버린다. 그래서 다음 날 자정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배를 타기로 약속한다. 이렇게 해서 길지 않은 연애소설은 대단원을 향해 막바지 기적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질주를 하는데, 궁금하시지?

  자주 말했다. 연애소설은 결국 이별소설이라고. 어떤 이별일까? 스미꼬가 안나 카레니나처럼 부산행 열차가 다가오자 바퀴 사이로 몸을 날렸을까? 아내는 아니고 드센 평안도 장모가 문대영의 부랄을 잡고 너 죽고 나 죽자, 이랬을까? 관부연락선에 오른 문대영과 스미꼬가 윤심덕이처럼 현해탄 돌고래 노니는 바다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을까? 나도 시원하게 말해버리고 싶지만,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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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01 0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도 어김없는 삽질 :
화요일, 요제프 로트 <타라바스 - 이 땅의 손님>
목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금요일, JMG 르 클레지오 <원무, 그밖의 다양한 사건 사고>

유부만두 2023-09-01 0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말이 궁금해서 전자책 결재했습니다. 얼른 읽으러 가야겠어요. 그나저나 아내가 첫아이 낳느라 고생하는데 술집에서 거리에서 방황하며 애쓰는 남편이라니, 오에 겐자부로랑 헤밍웨이 읽으면서 욕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애송이 남편/아빠라면 꺼져버리라고!

Falstaff 2023-09-01 06:04   좋아요 1 | URL
당시가 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입니다.
그럼에도 이건 시대 문제가 아니라 문대영이 ˝퓰리탄˝이 아니라서 여태 그냥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텔리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날 아가씨와 밤드리 노닐 수 있었던 것이 맏이로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은 것도 크게 작용을 했으니 말입죠.

유부만두 2023-09-01 06:24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런데 문대영은 직업에선 중견이었는지 몰라도 인생에서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지고 싶지 않아서 도망다니며 자기 연민과 변명에만 능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줄거리는 어떤 전형 같기도 하고요.
결말만 읽고 왔는데 (아, 이럴줄 알았어요) 30년대 후반 아니라 다른 시대에 갖다놔도 비슷한 먹물 태도를 보일 것 같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스미코 편지 내용은 딱 채만식 스타일이네요.

Falstaff 2023-09-01 06:44   좋아요 2 | URL
21세기에 갖다 놓으면 문대영은 절대 그런 짓 안 할 겁니다.
인텔리들의 특징이 눈치 잘 본다는 거 아닙니까. 이혼 당해서 아이 달린 홀아범 될 텐데요. ㅋㅋㅋ

건수하 2023-09-01 06: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세히 얘기하다가 갑자기 참지 마세요….. 🥲

퓨리탄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걸 보니 가톨릭은 역시 할 거 다 했나봅니다…

Falstaff 2023-09-01 06:46   좋아요 3 | URL
ㅋㅋㅋ 그래야 재밌잖아요. 스포일러는 아무리 좋아도 없는 게 더 좋지 않나요? ^^
가톨릭, 개신교 등등 모든 종교에 대한 코멘트는 생략합니다. ㅎㅎㅎ 전 유물론자예요. 사서 욕 먹거나 귀싸대기 맞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9-01 0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조 꼴값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9-01 17: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예전엔 많이 쓰던 표현인데 요즘에는 잘 안 쓰긴 합니다. ㅋㅋㅋㅋㅋ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ff 시리즈 5
베릴 베인브리지 지음, 채세진 옮김 / 꿈꾼문고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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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이하 “포도주병”>은 영국의 데임 작위 작가 베릴 베인브리지의 유일한 우리나라 번역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이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봤더니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라고 한다. 2007년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샬롯 히긴스는 베인브리지를 “국보”라 칭했고, 2008년에 더 타임스는 이이를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올려놓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낯설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베인브리지가 수적으로 너무 적다. <포도주병>이 유일한데 그나마 이 책도 표지 그림 때문인지 작품이 묘사하고자 하는 독특한 그로테스크를 도무지 짐작하지 못한 채, 오히려 제목과 더불어 그저 가벼운 읽을 거리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그런 줄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 스스로가 스물두 살부터 5년간 결혼생활을 한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출산한 두 아이와, 60년대 초에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던 앨런 샤프와 연애 중에 생긴 아이, 이렇게 세 자녀를 혼자 키워가며 별의 별 일, 단역배우부터 이 책의 무대인 포도주 병입 공장의 공원까지 온갖 일을 하다가 결국 작가로 성공했다. 유일한 법적 결혼이었던 오스틴 데이비스와는 끔찍한 결혼생활이었던 듯, 당시엔 가장 흔했던 자살 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찾아와 며느리 베인브리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경험은 결국 작가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법이라서, 이때 경험, 포도주 병입 공장 근무와 시어머니에 의한 권총 발사가 모두 이 책 <포도주병>에 삽입되어 있다. 인생 그렇지 뭐. 다 좋을 수 없듯이 철저하게 다 나쁠 수도 없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얘기할 것은, 원작의 제목이 “The Bottle Factory Outing”인데, 여기서 “Bottle”을 그냥 “병”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말씀. 대신 “병입甁入”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라 회사의 우리나라 공장에서 하는 일은, 콜라 병을 구입하고, 콜라 원액을 수입하여, bottling, 병에다가 콜라를 넣어 판매하는 일이다. 이때 액체를 병에 넣는 작업을 “병입”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회사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구입해 와 런던에서 병에 넣어 판매하는 파가노티 주식회사이다. 따라서 공장은 사온 병에 적절한 레이블을 붙이는 것과 벌크 통에서 750ml, 1liter 등 적절한 병에 적, 백포도주와 샴페인을 넣는 두 공정으로 되어 있다.


​  아주 상반된 성격을 가진 여성 두 명이 단칸 아파트에 산다. 브렌다와 프리다. 전직 나이트클럽 계산원이고 한때는 연극배우 지망생이기도 했던 178cm, 102kg의 스물여섯 살 건장한 체격의 미인인 프리다 혼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밤마다 재향군인회에서 술에 취해 돌아오다 집 대문 계단에 오줌누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새벽에 닭이 품은 달걀을 꺼내 볼펜으로 껍데기에 작은 얼굴을 그리는 취미를 즐기던 미친 시어머니도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뛰쳐나온 작고 내성적인 브렌다를 시내 정육점에서 처음 만나 불쌍히 여겨 데려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거였다. 왈가닥이지만 심성이 착하고 매사 적극적인 프리다는 포도주 병입 회사 사장의 조카이자 수습 매니저인 비토리오에게 반해 있던 상황. 어떻게 일을 좋은 방향으로 진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비록 벌써 10월이라 겨울이 시작되어 날씨가 좋지는 않겠지만 과감하게 사장 파가노티 씨에게 직원들의 사기진작과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야유회를 가겠노라고 건의했다. 세상 모든 회사의 사장은 영업일에 하루를 빼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리라는 것은 프리다도 벌써 알고 있어서, 야유회는 일요일에 갈 것이니 대신 지원을 조금 해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사장은 흔쾌히 백포도주 두 오크 통, 적포도주 두 통, 물론 작은 사이즈의 오크 통을 내주었으며, 이에 질세라 매니저 로시 역시 소형 버스를 빌리는 것을 허락했다. (로시가 버스 빌리는 걸 무슨 권리로 허락했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휴일에 로시가 자기 돈 내서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웬 허락?)

  프리다가 생각하는,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는 야유회는, 비토리오를 야외로 데려가면 유혹할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것이며 특히 웅장한 대저택을 방문하고 (튜더 왕조)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원을 손에 손잡고 산책할 때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는 그림이었다. 반면에 룸메이트인 서른두 살의 브렌다가 생각하는, 역시 속으로 생각하는 야유회는, 10월이라 당연히 비가 올 것이라서 쓸쓸히 잔디 위를 걸을 음울한 행렬이며, 남자들은 포도주 무게 때문에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뎌 주둥이가 댓발 나올 것이며, 프리다는 날씨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진 채 진흙탕 바닥에서 차가운 치킨을 비틀어대는 광경일 뿐이었다. 그래, 그래. 야유회, 단합대회, 수련회, 전진대회 등등, 이런 거 하면 누구나 다 좋아할 줄 알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땅콩이다. 원래 그런 거다. 거의 모든 사람 가운데 반은 프리다와, 반은 브렌다와 비슷한 성향이며, 극히 일부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단체협약 요구사항에 야유회 성격의 체육대회, 단합대회, 수련회 이런 걸 돈 좀 들여 폼나게 해보자는 것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측이나 사측이나 협약에 나갈 정도의 고위급은 대개 적극적인 성격이거든. 프리다 비슷하거든. 그래서 다 자기들 마음이겠거니 싶어서 주저없이 요구하고 까짓것 그 정도는 받아주지, 해서 대개 통과된다. 웃기지? 아니라고? 하여간 나는 웃겼다. 수십년 동안 속으로 브렌다처럼 “세금 낼 테니까 차라리 비용을 현금으로 주지” 궁시렁거리면서.

  회사의 사장 파가노티 씨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빨간 적수공권에서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포도주 병입 회사를 차려 성공을 했는데, 아무래도 영국인들은 도무지 믿지를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볼로냐 시골 지역에서 밀, 옥수수, 포도를 재배하던 사람들을 데려와 친밀하지만 고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런던으로 이주해 와서 어쨌거나 집을 짓고 예전에 비하면 온갖 복지를 향유하고 있어서 만족하게 살고 있었다. 물론 자식들한테는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나 회계사가 되기를 권유했지만, 싹수가 보이지 않을 경우엔 대를 이어 파가노티 씨 공장에서 열심히 병에 포도주 채우는 일을 시키겠노라 결심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이런 회사에 주인공인 영국인 브렌다와 프리다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특히 프리다가 보기엔 직원들 급여가 너무 적어서, 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이의 해결을 위해 조합결성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애썼지만 말짱 허사였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출신 직원 전체, 두 주인공과 아일랜드에서 온 운전수 패트릭을 빼고 나머지 전부가 회사를 위하는 충성심에 대해서는 짐작이 하시리라 믿는다.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74년. 당시에는 영국, 런던에서도 성희롱에 머뭇거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 회사에서도 매니저 로시가 같은 이탈리아 여성 말고 영국 여성인 브렌다를 끊임없이 더듬었다. 로시는 나이 많은 아내와 아이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가 브렌다가 입사한지 3일 만에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작품은 프리다/브렌다가 사는 아파트를 마주보고 있는 노인 전용 아파트에서 한 할머니의 초상이 일어난 날 시작하는데, 이날 로시가 얼마나 브렌다를 더듬는지 이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냥 순식간에 “엄마가 죽었어요.”라고 해버렸다. 그리하여 죽은 엄마는, 이미 열두 살 때 숨을 거둔 프리다의 엄마가 다시 환생했다가 오늘 아침에 죽은 것으로 되고, 장례를 위하여 이미 출근해 괄괄한 성격에 맞게 괄괄하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프리다는 얼른 조퇴하고 집에 돌아가 슬픔에 잠겨야 했으며, 함께 사는 브렌다 역시 룸메이트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조퇴를 해야 했다. 이후에 “엄마의 죽음”은 작품 곳곳에 웃음가루를 살포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재미있는 유머를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맞다.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이 “국보”라고 불리울 베인브리지의 대표작이 되기 위해서라면 유머러스하면서도 뭔가 있어야 할 터이다. 이런 유머를 일단락하면 드디어 파가노티 병입회사의 야유회를 시작한다. 야유회가 중반 정도 진행한 다음엔 이제 유머는 유머러스한 그로테스크로 진입하고, 이를 위해서 한 명의 엽기적인 죽음이 필요한데 그게 누구일까?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영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 100” 뭐 이런 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베인브리지의 <포도주병>에는 특정 집단, 즉 런던 노동자 계급의 공통적인 심리상태, 그것이 벌이는 엽기적이고 희극적인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 책 좀 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그러나 가능한) 일이, 그것도 그럴 듯한 일을, 누가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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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31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작품이 국내에 더 소개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Falstaff 2023-08-31 12:14   좋아요 2 | URL
넵! 저도 이이의 글빨에 깜짝 놀랐습니다.
얼른 얼른 소개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의 새 번역도 포함해서요. ㅜㅜ

얄라알라 2023-08-3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보˝라고 칭송받는데,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박한 대우를 받고 있다...
골드문트님 지적하신 대로, 표지만 보면 가볍고 나폴나폴 거려요. 그로테스크한 줄 모르겠어요.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작가가 쓴 줄 모르겠네요.

the Bottle Factory Outing

흥미롭습니다. 책 내용을 꿰고 계신 분만이 ‘병‘이 아니라, ‘병입‘이라고 명확하게 번역하실 것 같아요

Falstaff 2023-08-31 20:41   좋아요 1 | URL
우리말도 잘 쓰는 역자이긴 합니다만, 세부적인 단어 선정에 조금 불만이 생기더군요. 본문에서 중간 매니저 로시가 차량 임대를 ‘허락‘ 했다는 것도 단어 선택에 약간 덜 신중했던 거 아닌가 싶었고요. 뭐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이 책 재미있어요. 잠자냥 님 얘기처럼 다른 작품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23-08-3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생각이 났는데, ‘윌리엄 골딩‘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면서도
한국엔 [파리대왕]만 많이 알려졌는지 다른 책 찾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 때도 의아하다 생각했어요

Falstaff 2023-08-31 20:43   좋아요 1 | URL
골딩의 <파리대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는 <상속자> 하나만 더 읽었습니다. 역시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핀처 마틴>과 <피라미드>도 나와 있으니 그래도 좀 있는 편 아니겠습니까.
 
이혼 대산세계문학총서 171
라오서 지음, 김의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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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족 영재 출신 작가. 자기 실력 하나로 어려운 시절에 나름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숱한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문화혁명 와중에 당한 린치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험한 한 세상을 등진 라오서가 어쩌면 자신의 특기인 블랙 유머를 유감없이 펼친 작품이 <이혼>이다.

  1933년 작품. 서른네 살의 라오서는 이제 결혼 3년차였다. 영국에서 다년간 살다 온 그가 보기에 당대,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중국은 여전히 봉건적 잔재로 뒤덮여 있었는데, 작품의 무대인 베이펑,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침략과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국민당, 공산당의 투쟁과 별로 관계없이 그나마 이럭저럭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별 탈 없이, 그러나 나중에 보면 폭풍전야의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베이펑에서 그나마 좀 깬 사람들은 일부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나 그걸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행처럼,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공산주의 참칭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작품 속에서도 진정으로 혁명을 믿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반면에 당시 베이펑을 지배하던 세력, 그게 누구인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인지 그저 막강한 군벌 호족인지 알 수 없지만, 지배권력은 공산주의를 불가촉의 악으로 규정하여 무분별하게 체포, 처형했던 모양이다. 이런 시대상은 그의 대표적인 희곡인 <찻집>의 2막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찻집> 역시 읽어볼 만하고 권할 만한 작품이니 참고하실 사.


​  제일 먼저 라오서가 볼펜에 힘을 주었던 인물은 중요한 조연인 ‘장다거’. 이게 이이의 본명은 아니다. 성이 장張 씨인 50대 남자로 관청 재정소의 2급 사무원이다. 중국에서 ‘다거’는 우리 발음으로 대충 다꺼, 따꺼 등으로 들리며, ‘대가大哥’ 큰형이나 형님을 뜻하는, 남자를 향한 존칭이다(우리나라 TV에서 나이 든 딴따라 조용남을 향해 누군가가 ‘조다거’라고 말해 설화를 빚은 적도 있다).

  하지만 재정소 사무원은 얼핏 보면 그냥 부업 같다. 그깟 봉급으로 어떻게 무절제한 낭비를 미덕으로 믿고 있는 맏아들과 딸을 대학과 기숙 고둥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주 수입원은 직접 살고 있는 집 말고 가지고 있는 두 채의 집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업무상 물품 구입처에서 받는 리베이트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이가 무턱대고 활수한 것은 아니다. 원래 부자들의 씀씀이가 그렇다. 필요한 것엔 과감하게 쓰되 허튼 것에는 한 푼을 무서워하는 법이다. 장다거의 본업은 공무원이라기보다 차라리 중매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루고 싶은 신성한 사명은 중매, 그리고 이혼의 퇴치다. 그가 중매를 할 경우에 긴 대저울의 끝에 신랑과 신부가 될 인물 둘을 앉힌 다음 저울 추가 평행과 매우 유사한 균형을 잡을 때에 한해 신주단지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이혼의 원인이 중매쟁이의 저울이 부정확한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왼쪽 눈에 심각한 안검하수 기가 있어 눈꺼풀이 눈을 덮을 정도라도 이 덮은 눈이 사물과 사건을 보는 혜안이라서 세상과 사람들과 심지어 시장판 물가까지 훤히 내다보는 터, 베이펑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하나 빠짐없이 장다거에게 중매를 부탁하는 판이었다. 이런 판세라면 당연히 장다거의 가장 중요한 생활은 사람들을 두루두루 잘 사귀어 두는 것일 터이고, 그러기 위하여 얼마나 큰 마당발을 가져야 하겠는가.


​  딱 이때,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작품의 주인공이자 자신과 함께 관청 재정소에서 함께 2급 사무원으로 일하는 라오리. ‘라오리’ 역시 본명이 아니다. 나이 든 리씨, 그러니까 우리나라식 표현으로 하자면 “리형” 정도나 그것보다 약간의 존칭으로 보면 좋다.

  이 양반은 장다거와 거의 반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다. 크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라오리는 “일처리가 꼼꼼해서 온갖 고생을 도맡아야 하는 바람에, 외부출장이나 돈을 나누어 갖는 일, 승진 등은 모두 다른 사람 차지가 되는” 것에 조금도 유감을 가지지 않는 이른바 바른생활 사나이다. 많이 문학적인 인물로 오직 시정詩情, “시적인 정취” 만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주장한다. 시정이 정말 문학의 시적인 정취냐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정’을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라오리 스스로 “봉건제도는 낭만의 역사적 흔적이고 계급투쟁이 ‘시정’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적도 있다. 꿈만 꿀 것인가, 절실하게 살 것인가? 꿈을 꾸는 것은 시정이고, 절실하게 사는 것은 생활. 이 진퇴양난의 벼랑에서 우리의 주인공 라오리의 고뇌는 깊어 간다.

  좀 부유한 집안에서 낳고 자란 라오리. 그러나 부잣집이라도 시골 부잣집이니 베이펑 수준으로 그냥 그런 부자였겠지만 하여간 베이펑, 당시 이름으로 베이징으로 유학을 와 대학을 졸업을 하고 그길로 관청에 취직을 해 수도에 눌러앉은 라오리. 그는 대학 다닐 당시 부모가 일찌감치 점 찍어 둔 아가씨와 하기 싫은 결혼을 해야 했다. 파혼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까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너무하다 생각해 두 살 많고 봉건잔재의 대표로 상징하는 전족을 한 아가씨와 할 수 없이 결혼을 했고,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결혼만 하면 생기는 것이 아이들이라, 위로 아들, 아래로 딸, 이렇게 자식 둘을 두었으며, 처자식은 시골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딱 그림이 그려지시지?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조선의 모던 보이들. 고향집에 두고 온 사철 발 벗은 아내를 향한 짜증과 후회와 기타등등.

  라오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차츰 결혼제도의 근본적인 부조리로 바뀌고, 이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라오리 말대로 언젠가는 이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눈부신 조연, 장다거가 자기 집에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양고기 샤브샤브를 요리해주며 시골의 처자식을 베이펑으로 데려오라고 설득한다. 라오리 입장에선 조금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이미 양고기 샤브샤브를 배불리 먹은 다음이라 차마 그가 하는 말을 안 된다고 거부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베이펑 최고 마당발을 자랑하는 장다거는 자기가 적당한 셋집도 물색해줄 것이며, 살림살이 역시 지원을 해주겠노라 했고,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했다. 대단한 장다거다. 그리하여 전족을 한 촌 여인 리부인이 아들 잉과 딸 링을 데리고 베이펑의 좐타 후퉁(골목)에 있는 디귿 자 삼합방의 다섯 간짜리 북채에 살게 되며, 이로써 라오리는 자기 혼자도 버거운 엉망진창의 베이펑, 봉건과 혁명과 부패의 와중에 아내 그리고/또는 결혼제도와도 한 판 맞짱을 떠야 하는 숙명을 맞이한다.


​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 관청 재정소를 구성하고 있는 공무원들. 심지어 글자도 많이 알지 못하는 전직 군인도 있고, 표준어 사용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직원도 있으며, 대단한 사기꾼, 이것을 넘어 천하의 악당, 인신매매 같은 것도 서슴지 않는 진정한 악당 샤오자오, 작은 조趙씨도 있다. 당연히 작은 조씨, 샤오자오가 문제다. 이이는 소장의 아내와 ‘매관매직’을 매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 거래를 통해 약 2백명과 연결이 되어 있는, 직급은 겨우 2급 사무원이지만 관청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는 악당이다. 처음엔 악당이라기보다 좀 지나친 장난꾼으로 등장하다가 조금씩 역할이 넓어지면서 나중에 가서는 수십만 위안 정도를 보유한 검은 재산의 소유자요, 흉악범죄를 눈꺼풀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저질러버리는 범죄자로 등장한다. 20세기 초반의 중국문학이니까 권선징악일 터이고 그러니 불행한 종말을 맞지 않겠느냐고? 왜 이러셔, 명색이 근현대 중국문학의 큰 별로 추앙받는 라오서인 것을.

  샤오자오가 본격적으로 뜨는 계기는 어처구니없게 장다거의 아들 톈전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포승줄에 묶인 채 쥐도 새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 이후다. 어찌 어처구니가 없느냐 하면, 장다거가 생각하기로, 공산共産, 물자의 공동생산, 공동소유를 이루면 이후에는 당연히 공처共妻, 마누라를 공유하자는 주장을 할 것인 바, 공처를 하면 중매쟁이가 필요 없게 되니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장다거가 평소에 늘 주장하는 바가 바로, “공산당은 당연히 총살감”이었기 때문이다. 샤오자오는 장다거의 이런 불행에 편승해 선한 부르주아 장다거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물론 그게 쉽게 되지는 않지. 장다거의 옆엔 정의파이지만 냉소파이기도 한 라오리가 있으니.


​  내용 소개는 이 정도면 적당한 거 같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위의 스토리에 거짓말이 하나 있다. 그러니 믿으면 안 된다. 그러니 유머와 풍자를 잔뜩 섞어 재미있게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그린 라오서의 대표작이 어떤지 아시려면 정말로 책을 읽어보셔야 할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머라서 가끔 키득거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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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8-29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따거!
재미난 글
생기넘치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8-29 12: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수하 2023-08-29 08: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산 이후에는 공처.... 처를 재산으로 생각해서 그런 걸까요 -.-
그러고보면 그런 (실험적인) 공동체가 많은 것 같긴 하네요.


세상의 모든 이혼의 원인이 중매쟁이의 저울이 부정확한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ㅎㅎ
재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따지자면 세상의 모든 이혼의 원인은 결혼 아닌지.. (의미없는 결론)

Falstaff 2023-08-29 13:00   좋아요 1 | URL
오래 전 작품입니다. 토마스 하디 작품 속에서는 처자식을 파는 일도 버젓하게 벌어지는 걸요.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요.

재미있습니다. 별 넷이냐, 다섯이냐 잠깐, 조금 고민하다가 넷으로 했습니다. ㅎㅎ

은하수 2023-08-29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 글도 벌써 재밌어요 ㅋㅋ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듭니다. 유머와 풍자까지 겸비한 작품이라니 더요^^

Falstaff 2023-08-29 13: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근데 라오서 말년이 참. 하여튼 중국의 많은 것들이 그놈의 문화혁명 때문에 거덜이 났다니까요. 은하수 님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

coolcat329 2023-08-29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랙 유머가 빛나는 재미있는 작품이라니 저도 라오서 기억하겠습니다.

Falstaff 2023-08-29 13:02   좋아요 1 | URL
옙. 기회를 만나면 놓치지 마셔요!
 
평온한 삶 클래식 라이브러리 2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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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에 쓰고 44년에 출판한 작품이다. 서른여덟 살의 뒤라스. 나치가 점령한 파리에서 갓 낳은 첫아이를 잃고, 작은 오빠 폴도 사이공에서 병들어 죽고, 새 연인이 생겼던 해. 이후 16년이 더 흐르면 뒤라스는 그의 작가 인생에 분수령이 될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쓴다. 뒤라스의 많은 작품을 독자들은 <모데라토 칸타빌레>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싶어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김치수, 김화영, 최현무 등을 우리나라 불문학계의 신세대, 프로방스 대학 출신들이라 프로방스 학파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이 가운데 한 명인 최현무, 필명 최윤의 번역으로 나온 <부영사>가 내가 처음 읽은 뒤라스인데, 난생 처음 읽은 누보 로망 작품으로, 당시가 아마 20대 초중반, 기껏해야 스물서너 살 정도였던 미성숙 청년이 겁 없이 읽었다가, 정말 뇌가 뒤집히는 줄 알았었다. 이후에 이용숙 선생의 번역본도 나왔지만 이하동문이었다. 단칼에 말하자면, <모데라토 칸타빌레>부터 시작해 이후 작품들은 재미없지만 하여튼 뭔가를 읽은 느낌이 난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문장으로 단편소설 쓰면 폼 나겠는데.” 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나 극도로 건조한 문장의 나열은 작품에 몰두는 할지언정 마음에 들지 못하게 해서, 뒤라스의 책을 읽은 뒤엔 께름칙한 감상을 적게 만들고는 했다. 누보 로망 작품답게 서사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엔 아예 없어서 그랬을지 모르고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뒤라스의 후기 작을 읽은 것이 하도 오래 전이라 지금은 “하여튼 뭔가” 또는 “다른 이유” 같이 슬그머니/비겁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다가 2년 전에 덜컥 읽은 것이 <태평양을 가로막는 제방>. 1950년에 출판한 작품으로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으나 장렬하게 미역국을 마시고 만다. 이후 34년이 지난 1984년 이 작품의 자매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애인>으로 공쿠르 상을 받는데, <애인>(또는 “연인”)은 뒤라스의 후기 작품으로는 의외랄 정도로 쉽게 읽힌다.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여태까지 읽은 뒤라스 가운데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을 꼽으라면 바로 <태평양을 가로막는 제방>을 들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뒤라스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별 다섯, 만점을 준 책이 <태평양…>이다. 하지만, 나더러 뒤라스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여전히 골치 아프지 않고는 읽기 힘든 <부영사>를 꼽게 만드는 작가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긴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이이의 전기와 후기 작품이 (내가 경험하기로)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평온한 삶>은 전기작품이다. 주제는 권태? 사랑? 하여간 그렇다. 아예 작품 속에서 노골적인 단어 “권태”를 약 아흔여덟 번 정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주요 주제 가운데 권태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사랑도 마찬가지. <태평양…>에서 오빠 조제프에 대한 쉬잔의 감정 정도를 <평온한 삶>의 화자 ‘나’ 프랑신 베르나트가 동생 니콜라를 향하고 있다. 책을 열면 아직 해가 뜰 기미가 없는 신새벽. 철로 옆 작은 공터에서 니콜라가 외삼촌 제롬과 심하게 주먹다짐을 한 다음이다. 늙은 제롬은 베르나트 씨의 뷔그 농장에 얹혀 살면서 꾸준하게 운동을 해 젊은 외모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농장의 모든 남자들과 달리 일을 하지 않는 뺀질이다. 마치 베짱이 같다 할까?

  베르나트 씨는 19년 전까지 만 해도 벨기에의 작은 R시에서 10여 년 동안 시장을 지낸 시골 명사였다. 아내 아나와 나름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쉰 살이 거의 다가왔을 때, 아나가 마흔이 넘은 나이로 주인공 프랑신을 낳음으로 해서 부부의 행복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즈음, 부부 앞에 외삼촌 제롬이 등장했다. 제롬은 아빠 루이 베르나트 씨를 주식 투자에 끌어들였고, 이것 때문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된 베르나트는 시의 자선기금에 손을 대고 만다. 베르나트 씨가 주식투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롬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요구도 요구 나름이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서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대가 세지 못한 매부는 견디다 못해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버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회계가 엄격해야 하는 자선기금을. 비위 사실은 곧바로 들통이 나버렸으며, 순식간에 작은 R시의 거의 모든 시민들도 알게 되어 베르나트 씨는 시민들의 싸늘하고 경멸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 프랑스로 이주를 해야 했다. 심지어 아내 아나와 프랑신은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시민들의 해코지를 피하기 위해 밤기차를 타야 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린 베르나트 씨는 프랑스의 시골에서 크지 않은 농장을 사서 직접 농사를 짓고 소 몇 마리를 길렀다. 프랑신과 5년 터울로 아들 니콜라를 두었지만, 자식 둘 다 학교를 보낼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명색이 전직 시장이라 할지라도. 결코 평온하지 않은 <평온한 삶>의 주인공 프랑신은 스물다섯 살. 니콜라가 그러면 스물. 니콜라는 키가 크고 생기기도 곧잘 생겨 근방에서 인기를 독차지했을 정도라고 했는데, 이게 유별나게 동생을 좋아하는 프랑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프랑신이 한 번도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미루어 누나 혼자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조금은 분방하게 지낸 니콜라는 못생기고 멍청한 하녀 클레망스를 임신시켰고, 당시 프랑스 시골 분위기로는 그렇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음에도, 굳이 제롬 외삼촌이 클레망스가 언니한테 돌아가 지내는 도시 페리괴에까지 직접 가서 데려와 결혼을 하게 만들었다. 그후 아들 노엘을 낳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사는 일이.

 그렇다. 그럴 수 있다. 몇 달 전, 먼 도시에서 니콜라를 아는 청년 티엔이 뷔그 농장으로 찾아왔다. 얼마간 시골에서 하숙을 하며 쉬고 싶다고. 다음은 프랑신의 눈에 보이는 티엔의 모습.

  “어쩌자고 저렇게 아름다워서 지금처럼 화가 난 상태에서도 내가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가. 어쩌자고 저렇게 매력적이이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가. 어쩌자고 저리도 침묵으로 가득 차서 그 앞에서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가.”

  프랑신은 3층 다락방에서 하숙을 하는 티엔이 2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상상을 하며 밤을 하얗게 밝힌다. 그러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극도로 속삭이는 공기의 파장들. 아무리 조심해도 웅얼거리거나, 가구가 움직이거나,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프랑신은 들을 수 있었고, 티엔이 혹시라도 올지 모른다는 조바심은 작은 소리들 때문에 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으며, 몇 달 째 계속되는 행위의 소리들이 외삼촌 제롬과 올케 클레망스가 내는 것임을 벌써 알고 있던 ‘나’는, 집안 사람들도 이젠 좀 없어져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제롬을 어떻게 정말로 없애 버릴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해낸다. 니콜라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

  스무 살 니콜라는 권리가 생긴다. 외삼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한 연적을 벌하고, 그 벌로 살해할 수 있는 권리.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다. 한밤, 그는 제롬에게 따라오라고 해서 철길 근처의 공터로 간다. 그들의 뒤를 프랑신이 쫓아가고, 둘은 격투를 벌인다. 아무리 운동을 했다 해도 젊디젊은 니콜라의 상대가 될까. “제롬은 허리가 거의 꺾이다시피 몸을 굽힌 채로 다시 뷔그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작품의 첫 문장이다. 극한의 고통에 신음하면서 제롬은 그래도 자신에게 오직 하나뿐인 피난처인 뷔그 농장으로 힘들게 걸어가면서 결코 평온하지 않은 <평온한 삶>은 시작한다.

 

  위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뒤라스의 섬세한 감각이 절묘한 작품이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묘사를 할 수 있을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번역한 사람이 윤진이다. 가끔 ‘윤진’이란 역자의 이름을 검색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사람. 작가의 원래 문장이 그렇겠지만 그걸 외국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는 솜씨 또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것들. 그것을 읽는 독자의 즐거움도 크다.

  읽다가 뒤라스의 생년을 확인한 적도 몇 번 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몇 살 때 쓴 것인데 세상과 인생을 이리도 잘 아는 거야?

  내가 읽은 뒤라스의 작품들은 서로 조금씩 연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프랑신-니콜라는 이야기했고, 2부를 읽으면서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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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25 05: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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