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크리스티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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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진 오닐. 오닐의 책은, 일부러 검색을 해보지는 않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내용과 관계없이 얼른 사고 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고 너무 오래 묵혔다가 읽는다. 도서관을 이용하니 사 둔 책은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얼른 읽게 되지 않았다.


  스웨덴 이민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영화 <스타 탄생>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한 저음의 가수와 우연히 이름이 같다. 하지만 오닐의 크리스는 뱃사람. 일년에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 되는 천생 뱃꾼인 줄 알았는데 사실 바다를 증오한다. 아내가 죽을 때도 바다에 있었고, 바다 일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 있는 딸 애나를 보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촌에게 보내 바다와 떨어진 곳에서 땅을 밟고 살고, 농사를 짓는 남자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지금은 뉴욕을 포함한 동부 해안과 오대호를 돌며 석탄 바지선 선장을 하고 있다.

  막이 오르면 뉴욕 부두 근처의 술집 ‘자니 더 프리스트’. 아직 등장하지 않은 크리스한테 술집 주소로 편지가 와 있다. 늘 이곳으로 편지가 오면, 물론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단골 크리스가 뉴욕에 들를 때마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했다. 이번엔 여자 글씨의 편지 한 장. 크리스는 오십 줄의 사내. 애나를 친척집에 보낸 것도 십오 년 전. 설마 홀아비가 여태 혼자 살고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 바지선은 대개 살림을 살 수 있게 개조한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나이 들어 퇴물이 된 논다니 마티와 함께 살고 있다. 전작이 있는 크리스가 술집에 들어와 쾌활하게 위스키를 몇 잔 마신 다음 편지를 받는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게 딸 애나한테 온 편지다. 곧 뉴욕에 도착한다는. 이어서 동거하고 있는 마티도 등장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깐 크리스가 퇴장하는 틈을 타 주인공 애나가 등장한다.

  애나. 친척집에 들어가서 (애나의 말에 의하면) 노예처럼 시키는 일을 죽도록 하다가, 열여섯 살 됐을 때 거구의 힘센 셋째 아들한테 겁탈을 당한 후 도망을 나와 베이비시터로 있었다. 이 보모란 직업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씨가 아는 애나의 마지막 모습. 보모라고 별 다른 것이 없어서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애나는 다시 집을 나와 매춘업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몇 년. 병이 들어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완행 열차를 타고 아버지한테 의지하려고 뉴욕에 도착한 것.

  마티는 한 눈에 알아본다. 애나의 지금 처지를. 상황 파악을 잘 하고 천성적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마티. 세상에 원수질 일은 없는 것이 좋다는 신조의 마티는 조용히 크리스를 불러 이야기한다.

  “잘 들어! 나는 바지선으로 가서 짐을 싸서 날라 버릴 거야. 저 안에 그녀가 있어. 당신 딸 애나 말이야. 방금 와서 당신을 기다려. 잘 돌봐 줘, 알았지? 아팠대. 자, 안녕! (뒷방으로 가서 애나에게) 잘 있어, 아가씨. 나 가야 돼. 또 봐.”

  마티가 세월과 집구석과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이만한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천사는 이렇게 1막에 잠깐 나오고 사라진다.


  2막부터 드라마는 시작한다.

  열흘 후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정박 중인 바지선이다. 마티는 정말로 그날로 짐을 싸서 사라졌고 대신 애나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이 날은 안개가 자욱해 코 앞의 사물도 식별하기 힘든다. 부녀 사이에 말다툼이 생긴다. 아버지는 딸이 농장에서 건실한 남자를 만나 살기를 바라고, 딸은 남자란 남자는 다 겪어본 베테랑이나 된 것처럼 남자라면 넌더리가 나고 특히 아버지한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친척집 셋째 아들에게 당한 능욕의 기억 때문에 농촌은 아예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다.

  이때 바다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어제의 폭풍우에 난파당한 선원들이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노를 저어 온 것. 이 가운데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더러운 작업복만 걸친 아일랜드 남자 버크. 어깨가 떡 벌어지고 180센티미터가 넘는 건장한 사나이로 얼굴은 강하고, 거칠고, 대담하고 반항적으로 잘 생긴 사내. 잠을 못 자 핏발 선 짙은 색 눈이 애나를 바라보는데 팔뚝의 핏줄이 푸른 실처럼 울퉁불퉁하다.

  화물선의 화부였으며 생긴 모습대로 다혈질이라 거침없이 싸움을 걸고,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싸웠다 하면 무슨 수를 쓰든 상대를 때려눕히는 사내. 버크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과 독자는 애나와의 연애가 생길 것임을 짐작한다. 둘은, 특히 남자에 학을 뗀 애나는 버크의 사랑에 코웃음 치며, 아버지 크리스 역시 버크가 육지 남자가 아닌 뱃놈인 것을 심하게 마땅히 생각 못한다.

  3막에 들어서면 갈등이 심해져 버크는 애나에게 청혼을 하려 하고, 아버지 크리스는 주머니 속에 칼을 넣고 담판을 지으려 도사리며, 애나는 자신이 정말로 버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나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

  석탄 바지선에서 벌어지는 치정극 하나가 생각난다.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3부작 가운데 <외투>. <외투>에서는 젊은 아내 죠르제타와 부정을 저지른 청년 루이지를 늙은 남편 미셸이 단매에 때려 죽이지만 <애나 크리스티>에서 딱 벌어지기는 했으나 작은 체구의 크리스 선장이 거구에 단단한 몸을 가진 천하장사 마징가 같은 버크와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안심하시라. 유진 오닐 치고 '그나마' 순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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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뽀빠이와 마징가의 대결인가요.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 주제가 흥얼거리면서 책 사러 가요.

역자 이름이 낯익어서 보니 펭귄 프루스트 역자와 동명이인이군요. (그 역자일 리는 없죠 당연히)

유부만두 2023-11-21 08:44   좋아요 1 | URL
겸사겸사 도밍고의 루이지 이중창 보고왔어요. (20살로 우기는 50이던대요) 외투 언급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1-21 15:40   좋아요 0 | URL
뽀빠이와 마징가가 대결 직전까지 가는군요. 근데 게임이 안 될 겁니다. 마징가는 무쇠 팔, 무쇠 주먹인데 사람의 팔과 주먹이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ㅎㅎㅎㅎ
옙. 프루스트 이형식 선생이 좀 더 선배일 겁니다. 불어 역자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1인입니다. ^^

와우, 유튜브 보셨어요? 진짜 드라마틱 오페라입니다. 푸치니 다운 엽기 막장 불륜 치정 드라마요. ㅋㅋㅋㅋㅋ
 
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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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작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도 신기하게 독자한테 기발한 웃음을 주는 사람. 이 양반이 소설 말고 물리학이나 기계공학이나 프로그래밍을 공부했으면 전 인류를 아무런 고통 없이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폭탄을 만들거나, 극소수 총명하고 건강한 인류를 태운 채 지구와 거의 흡사한 행성을 찾아 우리 은하계 밖을 날고 있거나, 십년 안에 인류의 뇌에 작동해 종의 존속을 포기하게 하는 AI 프로그램을 개발할 지도 모른다. 즉 거의 신과 비슷한 반열일지도. 보니것이 자주 말하듯이 신은 인간의 소망과 사랑과 헌신과 흥망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당신들도 여태껏 살아온 내력을 비추어 보면 눈에 훤히 보이지 않는가. 신이 당신의 삶을 도와준 적 있어? 그리하여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가진 운칠기삼 또는 운팔기둘로 살 때까지 버티고 보는 게 장땡이다. <타이탄의 세이렌>은 오래전에 <타이탄의 미녀>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었는데 이제 새로 번역을 해 문학동네에서 냈다. 근데 왜 ‘세이렌siren’을 ‘마녀’가 아니라 ‘미녀’라고 했었을까? 좀 귀띔을 드리자면 주인공 윌리엄 나일스 럼포드가 진짜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턴트한테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타이탄으로 가게 될 것이라 예언하자 콘스턴트는 영 탐탐치 않게 생각한다. 럼포드는 그런 콘스턴트에게 타이탄에 가면 볼 수 있는 세 미녀의 사진을 보여주어 콘스탄트의 심장을 벌렁벌렁하게 만든다. 바로 이게 세이런의 노래였거늘, 미녀일지언정 마녀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한 거 아닌가 싶다. 정말 거기 가면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 세 명이 있느냐고? 있다. 책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다. 지금도 있으니 믿으시라.


  책 뒤편에 실린 작가 연보를 보면 보니것은 서른일곱 살 때인 1959년에 두 번째 책 <타이탄의 세이렌>을 출간한다. 그리고 10년 후 여덟 번째로 <제5 도살장>을 낸다. 기억하시지? <제5 도살장>에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드레스덴 대공습 때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트랄파마도어에 있는 동물원에서 몇 년간 알몸으로 구경거리로 지내다가 귀환했다는 거(물론 드레스덴 시절 포로수용소 경험을 비유한 거겠지만). 근데 정말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이 있었다. <제5 도살장> 십 년 전부터. 이 책에서도 트랄팔마도어 행성이 나온다. <제5 도살장>과는 달리 그 행성의 주민들은 전부 기계로 되어 있다. 그들이 보기엔 지구와 지구인들이 워낙 사소한 것들이라서 몇 십만 년 전부터 아주 사소한 필요에 의하여 지구의 문명을 발달시켜왔고, 문명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쟁 무기의 개선과 발명보다 확실하게 빠른 게 없어서 지구 역사에 서술된 전쟁만 만 건이 넘는다며? 그렇다며? 그렇게 해서 드디어 지구인이 트랄파마도어 우주인, 아니, 우주기계가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 이를 운반하기 위해 맬러카이 콘스탄트를 타이탄에 보내는 거다. 맬러카이 콘스탄트가 “충실한 배달부”라는 뜻이란다.

  우주, 진정한 무한대의 공간에는, 한 마디로, 없는 게 없다. 이해하기 힘든 개념으로, “우주에는 옳은 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다양한 진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인 ‘크로노-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이란 것이 있단다. 태양을 원점으로 오리온 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 베텔게우스까지 뻗는 뒤틀린 소용돌이 안개 속에서 맥동을 치다가 지금은 파동 현상으로 존재하는데 하필이면 지구와 화성 사이에 밀집했단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중 차원과 유사해서 생명체일 경우 여러 시간 차원에 걸쳐 널리 흩어져버리고 만다. 이것 때문에 인류는 모든 창조의 책임자가 누구며, 모든 창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실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외계로 우주로, 바깥으로 밀고 나가고자 하는 일이 초장에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주인공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 미국의 단 하나뿐인 진정한 계급이다. 대통령의 1/10, 탐험가의 1/4, 동부해안 주지사의 1/3, 전업 조류학자의 절반, 훌륭한 요트 항해사의 3/4, 웅장한 오페라의 적자를 보전해주는 사람의 전원을 배출한 이 계급 출신은 극소수의 정치인을 빼놓고는 절대 돌팔이가 없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계급에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똑똑한 아이들을 공급하기 위하여 가끔 친족 결혼도 불사하는데 럼포드 부부도 8촌 남매 사이다. 럼포드는 5천8백만 달러를 주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개인 우주선을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루는 그의 커다란 개 카작과 함께 정말로 우주선에 올라 화성 근처의 크로노-산클래스틱 인펀디뷸럼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크로노’는 시간이라는 뜻. 그곳에서 여러 시간의 차원으로 분산되어버린 럼포드와 카작은 59일에 한 번씩 우리 은하, 태양계, 지구, 미합중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드에 있는 럼포드 대저택에서 물질화를 통해 육신과 육성을 갖추어 등장한다. 시간과 장소 등을 망라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물질화 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진짜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얼마 전 비어트리스 럼포드 부인의 초청을 받아 요구대로 선글라스에 콧수염으로 변장한 채 럼포드 저택으로 숨어들었다. 이 날이 럼포드의 물질화가 있는 날이라 한 남자와 그의 개가 허공에서 물질화하여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보기 위해 높은 담장이 시야를 막고 있을지언정 물질화가 이루어진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군중이 물밀듯이 모여 있었다.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럼포드 부인과 비슷한 30대 초반으로 버지니아 주립대를 다니다가 1학년 때 퇴학을 당했으나, 미국 최고의 부자이자 악명 높은 방탕아로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살고 있다. 헬기를 타고 와서 다시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도착한 그는 균형 잡힌 체형에 날씬한 헤비급 몸매와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잘 생긴 남자다. 알코올과 마약, 여자와의 관계 후에 오는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배달할 품위있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좌우명이 “배달부는 기다린다.”

  당연히 비어트리스 럼포드 여사도 미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큰 키와 곧은 몸. 세세한 이목구비는 의미가 없었다. 머리통 대신 대포알이 있었어도 웅장한 구도에 잘 맞았을 거 같다. 그래도 얼굴이 있긴 있다. 심지어 흥미롭다. 뻐드렁니가 난 인디언 전사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 그녀가 감탄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라고 재빨리 덧붙여야 했다. 그래, 저것도 사람의 생김새로 대단히 괜찮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변주, 놀라운 매력을 지닌.


  하여간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럼포드는 콘스턴트에게 말한다. 콘스턴트는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은 미국 최고의 부자 콘스탄트.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쾌적한 기후가 있습니다. 시큰둥.

  태양과 베텔게우스 사이에 있는 존재 중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 타이탄의 여자들도. 오, 그래?

  럼포드는 한 방 더 질러버린다.

  당신이 타이탄에 갈 때 럼포드 부인이 동행할 것입니다. 크로노라는 이름의 아들과 함께요.

  그럼 당신의 아들 아닙니까? 

  나는 천사처럼 재생산을 하지 못합니다. 첫번째 물질화 이후엔 아내마저 나를 만나기를 거절하지요. 크로노는 시간이란 뜻이며 콘스턴트와 럼포드 부인 비어트리스 사이의 미래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화성식으로 지었고요.

  이렇게 이야기해도 지구 행성을 뜨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는 맬러카이 콘스턴트와 비어트리스 럼포드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가긴 가겠지. 그러면 비어트리스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콘스턴트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내가 가르쳐드릴 수 없고,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힌트는 벌써 저 위에서 줬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누군가가, 아니지, 한 기계가 충실한 배달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근데 정말 콘스턴트가 그걸 배달할 수 있을까?

  하여간 커트 보니것의 대단한 스케일의 농담은 입이 쩍 벌어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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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등 - 허준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4
허준 지음, 권성우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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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작가를 읽기로 하고 서가를 둘러보니 허준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시리즈 44번이라면 근현대 문학사에 작가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진 인물이었을 텐데, 동의보감을 지은 16~17세기 허준 말고는 아는 바가 도통 없어서, 얼른 빌려 읽은 책. 당연하게 책의 앞날개에 쓰인 허준의 약사에 먼저 눈이 갔다.


  “허준은 19010년 2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앙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다. 1934년 호세이 대학 문과를 수료한 뒤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초>, <가을>, <실솔蟋蟀(귀뚜라미)>, <시詩>, <단장>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했고, 1936년 비평가 백철의 추천으로 『조광』에 <탁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했다. (중략) 1945년 12월 27일 홍명희, 임화, 박태원, 김기림 등과 함께 ‘경성조소문화협회京城朝蘇文化協會’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하는 ‘전국문학가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첫 소설집 『잔등』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월남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렀고, 1958년 니콜라이 두보프의 <고독>을 번역했다는 것 외에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군. 공산주의자로 전쟁 전에 월북, 침략군과 함께 서울 진주. 1958년 이후 행적 미상. 이러면 내가 이이의 이름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도무지 배울 수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남긴 중단편이라고 해봤자 열 편 남짓. 그것도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가만. 이 정도인데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우리 문학이라면 둘째 자리를 줘도 깽판을 칠 악마처럼 거만한 문학과지성사가 자기네 전집에 이름을 올렸다? 얼른 4층 열람실에 올라가 읽기 시작, 그날로 다 읽어버렸다. 살 빠지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에 뾰루지 안 난다. 금방 배겨서, 아파서 그렇지. 다섯 편의 중단편소설, 본문만 240쪽가량, 해설, 연표, 자료 합치면 290쪽.


  윽. 놀래라. 허준의 문장은 길다. 긴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노상 그렇듯이 현란하게 달린다. 그러다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가끔 독자로 하여금 읽다가 잠깐 멈춰서 지금 읽는 절passage에서 주어와 술어를 찾느라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30~40년대 단어와 이북 사투리가 섞여 있으면 독자는 가끔 환장換腸, 창자가 뒤섞여지기도 하니 각오를 해야 할 것. 요즘 젊은 분들은 엄두도 못 낼 한자어까지 불쑥 등장하면 말이지. 가끔. 정말로 가끔. 이런 것만 미리 감안을 하든지 각오를 하고 읽으면, 장담하니, 긴 호흡의 문장을 읽을 때의 구구절절함, 애간장이 녹는 공감과 격통 같은 것에 가슴을 절일 수도 있고, 한 풍경이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리게 삼삼할 수도 있고, 작가는 6이라고 이야기 했음에도 독자는 아득바득 8이나 9 정도로 들을 각오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긴 문장이라도 세상의 허튼 긴 문장하고 이런 면에서 차별이 진다. 아주 맛나는 문장과 소묘와 방점과 속을 채운 감정들.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 나는 데뷔작인 <탁류>를 인상깊게 읽었다. 물론 대표작은 표제로 쓴 <잔등殘燈>이겠지만 <탁류>가 더 내 마음에 와 닿았다는 데 어쩌랴.

  주인공 현철은 천성이 우울하고 젊음의 비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퇴폐적 낭만 취향의 인물로,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인생에 해태懈怠한 사람으로 치부하던 시절에 “만나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인 덩실덩실 벌레와 같이 뒹구는 음분한 늙은 창부 무릎 위에 몸과 마음과 돈과 아쉬운 것 없이 다 맡기고, 나를 건져달라고 하던 그것이, 그것이 또 동시에 (내) 결혼을 의미하였던 것”, 즉 한 시절엔 향란이란 이름으로 “총독부 누구누구, 경찰서 누구누구, 변호사 의사 무슨 시장패들 할 것 없이 다 참 쳐주”던 기생이었다가 나이 들어 싸구려 창부로 떨어진 여자를 골라 그날로 사랑을 맺고 결혼을 해버린 터수다 향란의 본명은 그냥 ‘순’이라고만 나온다. 전형적으로 잘못된 결합인데, 신분의 차이를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리자면, 현철은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겐치아, 순이는 세상의 밑바닥 출신이다. 둘이 결혼이라는 것을 “해버린” 후에, 순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있는 집 아드님이 처음엔 그리 혼인이라는 것을 했지만 수치스러운 자신하고는 재산도, 배움도, 가정교육도, 환경도, 생각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터에, 언젠가는 자기한테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게다가 혼인 생활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는 법,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기도 할 것인데 함부로 몸을 팔던 자신의 이력이 남편의 입을 통해 한 번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시한폭탄성 조바심을 강박처럼 갖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익힌 밑바닥 생활은 세상의 모든 남자가 전부 자신이 상대로 하던 치들처럼 색을 밝혀 틈만 나면 치마를 들치려 하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파렴치한으로 보게 만들었고, 이 범위 안에 당연히 남편 현철도 포함되리라 단정한다. 그리하여 부부가 세들어 사는 당시 의식수준으로 보면 가장 하층민인 갖바치 집의 고명딸 채숙이, 이제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라도 순이는 채숙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심각한 질투를 부린다. 물론 남편이 어린 채숙이하고 손을 잡고 강변에 산보를 가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그래도 기어이 이사를 가게 할 정도로 강짜를 부리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새로 이사를 간 셋집에는 이번엔 채숙이 다니는 소학교의 여선생이 하숙을 하고 있어서 순이는 새롭게 복장이 터지기 시작하고, 늘 그렇듯이 우연히 순이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드라마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뭐 그런 이야기.

  이렇게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 반칙이다. 내용은 그러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움직임. 미세하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격동을 치고 마는 감정의 변화와 갈등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소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오랜만에, 비록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낡고 헤졌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어차피 사는 건 고통 속의 몸부림이란 걸 다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결국 폭발해버리고 마는 저 30년대식 아침 드라마. 그게 이렇게도 흥미로울 수 있다니.


  두 번째 작품 <습작실에서>는 도쿄를 무대로 하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조선 유학생 이야기, 세 번째 <잔등>은 허준의 대표작으로 해방이 되고 간도에서 조선으로 귀향하는 한 공산주의자의 여로를 그린 작품, 네 번째 <속습작실에서>도 꽤 재미있었으며, 마지막 <평대저울>은 해방 후 가난한 인텔리겐치아의 생활을 쓴 작품이지만 그리 울림은 없다.

  허준. 작품이 워낙 적어서 이제 더 읽을 건 별로 없겠지만 여태 이이의 작품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도 별나게 생각이 들만큼 좋은 작가 아닌가 싶다. 우리 문화계에 분단이란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했는지 아쉬운 바가 작지 않다. 남쪽에 살고 전쟁통에 죽지 않았다면 더 좋은 작품활동을 계속 했을까? 아무래도 그랬을 확률이 훨씬 높겠지. 그래도 자기 신념을 따랐으니 언제 죽어 귀신이 됐는지도 모르는 인생마저 후회는 없었으리라. 그리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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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1-17 0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커트 보니것, <타이탄의 세이렌>
화요일, 유진 오닐, <애나 크리스티>
목요일, 아르카디,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금요일,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꼬마요정 2023-11-17 10:3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님은 다 계획이 있군요!!!
분단 때문에 우리가 못 읽거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많겠죠ㅠㅠ 전 가끔 북한 쪽 지명이 나오면 저기가 어디 붙어있더라... 한참 생각하곤 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Falstaff 2023-11-17 15:35   좋아요 0 | URL
전쟁 이전에 알던 작가는 거의 다 풀린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활약하는 작가는 뭐 그렇게 알고 싶지 않고요. 북의 체제에서는 문학이란 자체가 정치의 도구일 뿐인데요 뭘.
분단이 되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훨씬 다양한 장소와 배경과 기타등등을 향유할 수 있었겠지요. 그건 정말 아쉽습니다.

syo 2023-11-1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평가원 9월 모의고사에 한번 출제된 적 있는 작품이더라구요. 허준이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걸 문제풀다 알게되었습죠....

Falstaff 2023-11-17 15:3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그건 그거고 싸이오 님, 오랜만입니다! 아직 심통이 나신 걸 보니 여전하신 모양입니다!

stella.K 2023-11-19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헙, 문학과지성사가... 악마 같은 출판사인가요?
저는 출판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서 말입죠.

탁류는 책만식만 썼던 게 아니군요. ㅎ

Falstaff 2023-11-20 04:35   좋아요 1 | URL
그럴 리가요.
문학과지성사는.... 당연히 악마 같지 않은데, 다만 악마같이 거만하다는 것입지요.
제 친구 가운데 가톨릭 신부가 하나 있어요. 그 동무한테 제가 자주 쓰는 말로 ˝너는 천사처럼 순결하고, 악마처럼 거만해.˝ 물론 어느 책에서 본 글입니다. 그게 입에 붙어서 자꾸 쓰게 되네요. ㅋㅋㅋㅋ

stella.K 2023-11-2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어느 책에 나온 말일까요? 그 신부님 인기 많으시겠는데요? 함 뵙고 싶네요. ㅋㅋ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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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인생의 황금시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된장인지 청국장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20대에 유서 깊은 뮌헨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서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연극판에 들어간다. 1922년엔 희곡을 발표해 클라이스트상도 수상하는 등 앞길이 유망했다. 지금 뮌헨은 오케스트라, 오페라, 연극, 하다못해 축구 같은 전방위적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다른 건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변두리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야심이 꼭대기까지 찬 브레히트는 1924년 베를린으로 옮겨와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1920년대의 독일. 1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물어주어야 했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등 정치, 경제 역시 폭망 상태에 이르러 당연히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사회 시스템은 전무했다. 먹을 것이 해결된 다음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이니까.

  브레히트를 스타덤에 올려 놓은 것은 우리에겐 숱한 재즈 싱어가 노래한 노트 “Mac the Knife”가 든 <서푼짜리 오페라>일 듯. 이 작품은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흥미로운 곡으로 일세를 풍미한 쿠르트 바일이 1928년에 정말 오페라로 작곡해 기존 오페라 가수의 발성법과 판이하게 다른, 제3제국의 근엄한 지도자들이 듣기엔 심각하게 저속해서 싸구려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독일, 베를린이 전 세계에서, 그리고 독일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싸구려 신세로 떨어진 것과 묘하게 닮아 있었던 거다. 이렇게 독일의 딱한 정치 경제 실정을 체득하게 된 브레히트가 필요에 의해서 사회현상을 공부하다가 마르크스 주의에 근접하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그렇다고 공산당에 입당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근데 독일엔 벌써 1920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즉 나치가 존재했고, 나치가 전력을 다 해 박멸해야 할 것은 장애인 등의 육체적 약자, 유대인, 그리고 공산주의자였으니, 이들의 눈 속 장작개비 같은 존재 가운데 한 명이 브레히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33년. 2월 28일 나치 일당은 독일의 제국의사당에 불을 싸질러 버렸고, 퇴폐 예술가로 낙인이 찍혀 이미 나치의 살생부,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브레히트는 즉각,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독일을 탈출한다. (책의 해설에 의하면 그렇고, 위키피디아에는 1월에 벌써 망명길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내가 귀신이 아닌 바에 어느 게 맞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유럽 각지를 배회하던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정착하는 듯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스웨덴, 핀란드,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미국행 화물선으로 로스앤젤레스 해변을 밟는다. 이때가 1941년. 좋았을 거 같지?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호환, 마마보다 훨씬 무서운 것으로 취급해 브레히트는 줄곧 사찰의 대상이었으며, 일체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해 먹고 살기 위하여 원고를 쓰고 팔아야 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대표 희곡 작품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등. 앞에서 말한 <서푼짜리 오페라>와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합해 네 작품을 한 권에 묶어 동서문화사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한 권 장만해 책장에 꽂아 놓아도 큼지막한 장정이 근사할 터. 그러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


  유럽의 모처에 숨어 살던 브레히트는 1937년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베를린에서 보고 체험했던 것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는 망명길에 올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나중에 탈출한 사람에게서 들었거나, 유럽 각지에서 송출하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들었거나, 신문, 잡지, 보고문을 읽었거나, 망명 전에 경험하고 들은 것을 토대로 상상한 것을 작품으로 쓰는데, 프롤로그 격인 “독일 열병식”에서 말한 것과 같이 1933년 1월 30일 다수당 당수로 총리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한 후 모든 전쟁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한 햇수로 5년째, 1937년 현재, 완전한 전체주의 국가, 일인 독재국가, 경찰국가 치하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각양각층 사람들이 나치 치하에서 겪는 공포와 허위, 배반, 불신, 적응, 밀고, 피해의식 같은 것이 다양하게 스물일곱 장면의 쇼츠로 구성된다.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불평불만자를 고발하려고 동네를 순찰하다가 소리나는 곳에 대고 무작정 총질을 하는 친위대 간부들, 이웃이 친위대에 체포된 것을 보면서도 이웃이 입은 두툼한 재킷에 더 신경이 쓰이는 소시민 부부, 대화를 즐기면서도 사소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웃의 어깨에 흰색 분필로 은밀히 십자를 표시하는 돌격대 대원, 진실과 일신상의 안전 사이에서 판결을 고민하는 지방법원 판사, 수용소에서 다친 공산주의자 수형인을 직업병이라고 판정하는 의사,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채용하지 않는 과학자, 아들 앞에서 약간의 사회비판을 하고 혹시 아들이 돌격대에 신고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부모 등등의 쇼츠. 1970~80년대 파시즘 국가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인, 또는 생활이었던 것이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과거를 지녔다는 것이 많이 쪽팔렸다. 이 파시스트 개자식들의 공통점. 자신들이 하는 악마 같은 행위가 정의롭고 최선인 줄 안다는 거. 징그럽다, 징그러워. 다중 선동에 의한 다중에 의한 독재.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다.


  원래 브레히트는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을 <공포: 나치 치하 독일 민족의 정신적 고양>이라는 제목의 다섯 편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도 모두 27편의 쇼츠 가운데 몇 개, 3편 <분필 십자 표시>와 5편 <적법한 판결>, 8편 <유태 여인>, 9편 <밀정>이 상대적으로(쇼츠라고 하기엔) 분량이 많고, 내용을 조금만 더 보태 독립해서 공연해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나머지 편들은 ‘몽타주 기법’이라고 하는데, 몽타주라는 말도 그럴 듯하나, 조각 그림으로 한 그림을 완성하는 직소퍼즐 식이라 해도 어울린다.

  아직 세상은 좌우 가릴 것 없이 파시즘의 재래를 기다리는 미치광이 신도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인 것도 모르는 정치배들. 그리하여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독재의 폐해를 알리는 작품을 읽어두는 일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미덕일 수 있으니, 이를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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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11-1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의 재래인걸 모르는 정치배의 예시가 궁금합니다
한편으론 제 입장에선 이미 파시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나의 예시로는 생존을 볼모로 이주민 차별이 제도적으로 당연하고 그걸 또 공공연하게 언론에서 주장하고 제도화하는 일상이라
돈 가진 사람의 안전만 보장되는게 당연하고. 보상이 불가능한 재생산 돌봄 노동을 하며 경력인정도 안되고 가난한 사람도 많고요.
한편으로는 안전지대도 없이 폭격하는걸 공공연하게 공적발화로 지지하기도 하네요…최근의 팔레스타인 학살도 그렇고요 그걸 바라보는 서방언론이나 한국의 주류 언론이나 잔인하고.. 병원, 학교, 어린아이는 죽이지 말자는 최소한의 무엇도 없는 학살이었잖아요.
자본주의 시스템과 사회가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방관하는 죽음들은 파시즘과는 무관한가요?
코로나 시국에 확인했듯, 개개인이 어딜가도 동선이 파악되는 것부터 그렇고요
재판에서 밝혀졌지만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의 부모도 국정원 감시하에 있었고..

Falstaff 2023-11-16 18:52   좋아요 1 | URL
예. 하신 말씀 공감합니다. 필요 이상의 과학 발전도 네오 파시즘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전 구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권력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들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세게 믿는 집단을 저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백년 전 쯤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가 됐을 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우끼 2023-11-16 20:19   좋아요 1 | URL
헉.. 저도 중앙집권화된 권력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논의하는 것을 아직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없이 회의주의에 빠지고서야 당장 숨쉬는 것도 힘들어서요
그리고 변화가 실현가능하도록 계속 움직이는 일원으로 살고 싶습니다
 
빅 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1
잭 케루악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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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얼마나 개운하게 읽었는지. 이 작품을 읽은 분은 내가 지금 “개운하게”라는 부사를 쓴 것을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인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선 은혜와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돈 없고 일 할 의욕도 없고 직업도 없는 껄렁한 청춘들이 미국 전역을, 넓기는 또 얼마나 넓어, 그 큰 땅을 히치하이크와 차량 절도와 술과 마리화나와 가능하면 코카인도 좋고, 가리지 않은 상대와의 하룻밤 또는 며칠 밤과 함께 종횡무진 펼쳐가는 이야기. 작가 잭 케루악은 프랑스계 캐나다 이민자 가정에서 1922년에 태어나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감독하고 마음이 맞지 않아 조금 방황하다가 해군에 입대했지만 몇 달 되지 않아 불명예 제대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만 중퇴해버리고 또다시 해군에 복귀하는 등 파란만장한 청춘시절을 보낸다. 부모 속이 얼마나 터졌을까? 이때 시인 앨런 긴즈버그,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 닐 캐시디 등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는 한편, 두 번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다. 물론 이 시기에 친구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싸돌아다니며 잡다한 말썽에 엮인 일을 원고지에 써 내려간 것이 나중에 잭 케루악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길 위에서>이기는 하다.

  세상의 태양은 위대하게 타오르지만 그만큼 짙은 그늘 속에서 아무런 전망도 없는 청춘들이 대책 없이 찰나의 만족을 위하여 서슴없이 몸을 던지는 <길 위에서>, 독자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코드가 있을 터인데 코드가 맞기만 하면 틀림없이 대박일 책이었고, 다행히 나 하고는 더할 나위 없는 궁합이라 한 방에 반해버려 <다르마 행려>를 선택하는 데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다르마. 선불교를 창시한 달마. 행려, 하니까 좀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행려병자, 하면 쉬운 이야기로 ‘거지’ 혹은 ‘빌어먹는 인간’이다. 근데 앞에 달마를 붙이면 ‘선 수행을 하며 밥을 얻어 탁발하는 수도승’을 말한다. 동부 매사추세츠에서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잭 캐루악의 분신 레이 스미스는 캘리포니아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지며 불교 경전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런 것들만 나열하면 소위 ‘비트 문학’의 선구자 잭 케루악이 아니라서 역시 다양한 청춘들의 난장판이 들어 있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오늘 <빅 서>의 마지막 장을 덮어, 이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모든 잭 케루악은 다 읽게 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던 아버지가 케루악이 스물세 살 때 위암으로 죽은 이후 어머니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39세 때 캘리포니아 빅 서, 남부 플로리다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다시 동부로 와서 어머니와 함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정착해 살기도 한다. 여기서 ‘빅 서’가 나온다. 서른아홉 살 때 잠깐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태평양에 인접한 샌타루시아 산맥 서쪽 해안. 이 동네에서 잭 케루악은 마지막 비트, 비트닉의 왕이지만 이미 늙은 비트족 생활을 잠깐 시현하고 8년 후, 결국 알코올성 간경변으로 인한 내출혈, 알기 쉽게 검은 피를 토하며 마흔일곱의 짧은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잭 케루악 본인이 거의 틀림없을 잭 들루오즈는 알코올 의존증 중간 이상의 단계에 접어들어 당장 손을 써야지 안 그러면 끝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3년간 술에 찌든 절망의 길을 걸어와 이제는 육체적, 정신적, 형이상학적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 로렌조 몬샌토가 빅 서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삼 주 동안 빌려주겠다고 제안을 해, 숲 속 오두막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잠자고, 장작 패고, 물 긷고, 글도 쓰며 지내겠다고 작정했다. 그리하여 잭은 롱아일랜드의 어머니 집에서 3박4일 간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실제는 언제나 예상이나 의지와 같지는 않은 법. 몬샌토가 일하는 시티 라이츠 서점에 들러 별장의 열쇠를 받아 곧바로 시외버스에 타야 했으나 때마침 토요일 밤의 대목이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는 널린 것이 왕년의 동무들이기도 해서, 잭은 “비트닉의 왕” 자격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해 숱한 가난한 공신들을 초청, 이틀동안 크게 술잔치를 벌인다. 오후 늦게 잠에서 깨 정신을 차려 이틀간 쓸 식량을 사 륙색을 짊어지고 버스를 타 몬테레이에 도착, 다시 택시를 타고 별장 초입의 레이턴 케니언 다리에 내린 시간이 새벽 두 시.

  잭은 마음을 다잡는다. 방탕은 그만. 이제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어쩌면 즐기기도 해야 할 때야. 먼저 숲 속에서 다음은 세상 틈에서. 술도 마약도 그만, 비트닉이며 술꾼들이며 마약쟁이들과의 흥청망청 파티도 그만. 전부 다 그만. 그는 바람소리, 나무 소리, 파도 소리 같은 온갖 자연의 소리를 노트에 옮겨 적어 길고 긴 시 <바다>로 남긴다. 그러나 고요하고 정제된 협곡에서의 생활도 나흘째부터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이 골짜기는 지금부터 10세기 동안을 거슬러 올라가도, 나무와 바위는 변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똑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잭은 3주만에 미쳐버렸다. 협곡처럼 편안한 곳에서, 편한 상태에서 어떻게 미쳐버릴 수 있었을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있었다. 평생 나 자신을 기만해왔을 뿐 나는 병든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독한 깨달음이 엄습한 것이 첫 번째 신호이며, 어울리지 않게 짐승들 먹으라고 음식을 내놓은 것이 두 번째였으며, 어머니 다음으로 의지해왔던 고양이 타이크가 죽었다는 편지를 엄마한테 받은 일이 마지막 세 번째 신호였다.

  잭 들루오즈는 그리하여 빅 서에서 나와 이제는 어떤 승용차도 히치하이크에 응하지 않는 도로변을 따라 걸어, 걸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다가 그게 터져 피를 흘려가며 마치 부상당한 병사의 몰골로 변해갔을 때, 작은 트럭의 남자에 의하여 구조되어 몬테레이 버스역까지 갈 수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다시 비트닉 왕의 많고 많은 신하들이 경배하는 술병 속으로 투신해버린다. 잭의 친구들, 잭 케루악이 젊은 시절에 어울렸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 가난하고 그럭저럭 아무 일이나 해서 먹고 살고,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살인이 아닌 한에서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버렸다가 발각이 나 교도소 구경도 좀 하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애인을 연상하면 된다. <길 위에서>와 <달마 부랑자들: 다르마 행려>를 비롯해 열 편의 장편소설을 써서 주머니가 가볍지 않은 잭 들루오즈가 거의 모든 술값을 대는 두주불사의 파티. 이 속에서 잭은 급격하게 무.너.진.다.


  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은 읽기 힘들다. 나 스스로 약한 수준의 알코올 의존증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주 이야기했듯이 알코올 의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술을 끊었으면, 그만 마셨으면 하는 일이다. 근데 그게 안 되는 비극. 잭 들루오즈도 술로 인한 인간의 황폐를 더 지속할 수 없어 빅 서로 들어갔으나, 3주만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시 술통으로 자진 입수해버린다. 알코올 의존자에게 술을 줄이는 건 없다고 한다. 끊으면 끊는 것이고, 마시면 마시는 것일 뿐. 일주일에 8일, 1년에 소주 4백 병 이상을 마시던 나도 올해 8월 어느날, 줄이면 줄이는 것이지 끊지 못한다는 건 뭔가, 싶어서 술을 줄이고 있다. 이제 1주일에 두 번 정도 마시고, 안 마시는 날엔 탁상 캘린더에 붉은 글씨로 NAD No Alcohol Day라고 써 놓는다. 한가위 연휴 때 열흘 동안은 예외로 하고 아직까지 마음먹은 대로 지키고 있다. 아주 죽을 맛이다. 덕분에 체중은 5킬로그램 더 빠졌지만 술에 대한 갈증은 체중계 눈금과 관계없이 지독하고 강렬하고, 맵다. 이런 독한 갈증을 알기에 말콤 로우리의 <화산 아래서>, 한스 팔라다의 <술꾼>, 요제프 로트의 <거룩한 술꾼의 전설> 같이 작가 본인이 독한 중급 이상의 의존증, 중독에 시달리는 작품은 읽기가 괴롭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는 일, 마신 후의 블랙 아웃. 잠든 상태의 괴로움과 잠이 깬 다음 손가락 마디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는 숙취. 이러다가 죽는가 보다, 또는, 죽은 상태가 이렇겠구나, 하는 암담함. 어디선가 입은 찰과상이나 부딪힌 흔적. 그러면서도, 뻔하게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중급 이상의 의존자들. 그것을 숨기지 않고 백일하에 쓰는 일도 그렇거니와, 그걸 읽는 또다른 술꾼의 가슴도 멘다. 메고 또 멘다. 너무도 공감할 수 있는 고역이라서. 그리하여 잭 케루악, 한 시절 미국의 소설판을 들었다 놓은 이 비트의 왕은 이 작품을 끝으로 결국 압도적으로 술에 얻어터져 간이 산산이 망가진 채 뿜어져 나오는 검정색 피를 한 말 이상 쏟으며, 간경변 환자가 그렇듯이 간 혼수가 오기 바로 전까지 말짱한 정신으로, 복수가 팽팽하게 차올라 북통처럼 치솟은 배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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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저 술 거의 끊었는 데😀😀 그 뒤로는 알코올 사랑하는 작가들 책 못읽겠더라고요ㅋㅋㅋ 비슷하게 그 갈망을 알아서…ㅋㅋ 걸님의 금주를 기원합니다. 근데 약간 취해있는 것도 맨정신의 세상이 보지 못하게 하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요즘 과학 말로다가 도파민 중독 같은 것을 앓았던 걸까요? 비트… 그들은? 모든 쾌락에는 반감기가 있다죠 ㅠㅠ 늘 중독자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을 강렬하게 살고 싶은 마음보다는 당장 앞의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더 동일시를 하게되요.

다르마 행려가 달마였다는 새로운 지식도 획득하고 갑니다. 요즘 저는 <개인적 체험>을 읽고 있어요!! ㅋㅋㅋ 버드도 술 마심 ㅋㅋㅋ

Falstaff 2023-11-14 15:13   좋아요 0 | URL
거 참 잘 하셨습니다. 술은 빨리 끊거나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백번 천번 좋습니다. 저도 꼭 절주 성공해보겠습니다. 에휴.....
근데 <개인적인 체험>이 좀 과하게 (말이 이상합니다. 조금, 과하게를 연달아 써버리네요) 우울하지 않나요? 그거 권할 때부터 캥겨서... 위스키와 수면제 두 알 에휴... 인간아,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