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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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미는 1959년에 서울애서 출생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오는데, 경기 부천 출생이라는 정보도 봤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자. 한양대 사학과 졸업 후에 고려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수료했단다. 이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 이하 “빗소리와 작약”이라 씀》이 2023년 1월에 나왔으니 세는 나이로 예순다섯, 만 나이로 예순세 살에 냈다. 근데 젊다. 그래서 좋다.

  아주 오래 MBC와 KBS FM의 방송작가로 일한 경력이 독특하다. “별이 빛나는 밤에”. “김미숙의 음악살롱”, “전기현의 음악풍경”, “노래의 날개 위에”, “김미숙의 가족음악”, “윤유선의 가족음악” 등등을 통해 아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거의 한 번 이상 김경미의 언어를 들어봤을 듯하다. 그게 시인 김경미의 말이라는 걸 몰라서 문제지. 시인들이 방송작가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나? 이이는 시집도 여섯 권이나 냈던데.

  이이의 젊은 시. 젊다고 해도 예순세 살 중년 입장에서 젊다는 것이지 새파랗게 젊다는 건 아니다.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전문. P.11)



  정말 시가 재미있지 않나? 나는 읽으면서 키득거렸건만. 이래봬도 왕년에 내가 말이지, 하면서 폼 또는 가오 좀 잡는 듯한 모습.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독자라 시를 읽는다 해서 백프로 다 믿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아니더라도 귀엽지 않나? 이런 거 보면 세상 사는 거 다 비슷하다.

  이게 《빗소리와 작약》에 실린 첫번째 시. 두번째 시에 시집의 제목에 나오는 ‘바다’, ‘빗소리’ 그리고 ‘작약’이 등장하는데 분위기는 바로 앞 페이지 <청춘>과는 사뭇 다르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작가 나름대로 중요한 시어가 나오는 시이니 조금 길더라도 전문을 옮긴다.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전문 p.12~13)



  1연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은 화자 ‘나’일 것이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했다가 괜한 미용사 눈물을 짜낸 사람. 죽음과 눈물, 그것도 내 눈물이 아니라 타인의 눈물까지 불러오는 우울과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시인. 그리하여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어 바다, 빗소리, 작약, 모두 페시미즘 적 분위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바다와 빗소리는 자주 그런 의미의 시어로 사용하지만 약용식물이기도 한 ‘작약’이 같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시어로 등장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아마추어 시 감상자가 생각하기에) 작약이라는 꽃의 꽃말이나, 성분이나, 생김새보다는 ‘작약’을 발음할 때 공명하는 음색이나 분위기, 비록 양성모음으로 만들어졌지만 즐겁게 들리지 않는 발음상 느낌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소리 내 발음해보시라. 작약.

  그런데 이 시의 분위기를 포괄하는 건 역시 바다. 마지막 연에 바다 같은 작약과 빗소리라고 썼다. 작약과 빗소리를 듣고 시인은 바다를 연상하는 수준을 넘어 보는 단계까지 갔다. 시인은 묻는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당신은 아무 답이 없다. 애초에 답을 바라지도 않은 듯하다. 당신한테 답이 오거나 말거나, 소포, 요즘 시대니까 택배가 오거나 말거나 그저 시인은 작약과 빗소리를 보고 있을 뿐. 정말 <청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네.

  나는 시인의 우울에 많이 지쳐 있어서, 우울한 시들만 빼곡한 시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시집 《빗소리와 작약》을 그래도 즐겁게 읽은 이유가 <청춘>과 <취급이라면> 같은 시들이 자주 엇갈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지. 그래서 시인 김택수는 추천사의 앞머리를 이렇게 썼다.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다. 김경미 시는 슬픈 웃음과 유쾌한 외로움이 문장에서 계속 배어 나와 자꾸 곱씹어 읽게 된다.”  (p.141)


  평론가의 전문가 연하는 해설보다 같은 시인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간결하게 하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쉽다. “유쾌한 외로움”의 시를 하나 골라봤다.



  지나치다



  어느 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 초 전

  친구와 절연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이 있으므로

  입과 귀에서 그 친구를 없애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 친구가 내게

  나 또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서로 지나쳤으리라

  멀리 온 정거장처럼 도를 넘어섰으리라


  네가 억울하고 후련하듯

  나도 후련하고 억울하리라


  너는 나 없이도 친구가 많고

  나는 친구 없이도 하늘이 맑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 지나치지 않도록 버스에서

  창밖을 본다

  창 속에 말 없이 앉아 있는 나를 본다


  멋진 밤이다   (전문. p.30~31)



  시를 쭉 읽어 나가면 다 읽는 순간 한 방에 팍 이해가 되는 착한 시. 내가 친구한테 절교를 선언한 건 아니겠지. 절연하고 1초 만에 알았으니까. 뭐 이런 친구도 있지 않나? 나도 무지하게 많다. 근데 이런 식은 아니고 살다 보니까 저절로 조금씩 멀어지다가 점점 그냥 그런 3인칭이 된 친구들. 이렇게 절연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시에서 시인하고 친구는 아닌 모양이다. 서로한테 지나쳤다니까. 얼마나, 어떻게 지나쳤는지도 둘 다 알고 있는 거 같다. 에휴, 이 시를 환갑. 진갑 넘어 썼을 텐데 뭐 그렇게 뾰족하게 살아? 친구하고 절연을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멋진 밤이라니까 뭐. 정말로 멋있고 근사한 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시가 외롭지만 궁상맞지는 않다. 김경미. 재미있는 걸.

  시인이 아무리 오래 시를 써도 역시 시를 쓰는 일은 곤혹스러운 모양이다. 내가 여전히 대학 4학년 기말고사 치르는 꿈을 꾸는 것처럼, 김경미는 시인, 작가 지망생 시절이었을 때를 생각하고 치를 떠는 모양이다. 뭐 숙명이겠지. 그런 시가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렸다. 한 학점이라도 F가 나오면 졸업을 하지 못하는 4학년 기말고사 꿈을 여전히 꾸는 나는 이 시의 작가 지망생의 곤혹스러움을 십분 이해한다고 오해하면서.



  한 겨울밤 11시 59분 작가 지망생의 귀가



  걸을 때마다 귓바퀴가 발밑으로 떨어진다

  코는 깨진 지 오래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된다던 손가락도

  부서진 지 오래


  머리 위론

  몽땅 다 끄고 막고 가린 겨울밤의 검정색들과

  흰 종이같이 눈부신 가로등뿐


  저 흑백의 둘이서 저렇게

  형언할 수 없는

  세상 모든 표현 다 써 대니


  내가 적당한 문장을 쓸 수 없는 것   (전문.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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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5-29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송작가로 일하며 쓴 방송 “감성” 멘트를 다듬은 엣세이집도 냈더라고요. 그건 이 시집 보단 읽는 재미가 덜 했어요.

Falstaff 2025-05-29 16:49   좋아요 0 | URL
아오 김경미의 팬이시네요! ㅎㅎㅎ 저도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늙은 아이 이야기
제니 에르펜베크 지음, 안문영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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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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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니 에르펜베크가 발표한 첫 소설작품. 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 했으나, 노벨라Novella, 중편소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소설인데, 에르펜베크는 참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카이로스>를 소환해야 하나보다. 패전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히틀러 소년단 출신인 기성세대 한스 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 시스템. 그것이 청년기에 들어가는 카타리나 세대를 억압하고 관리하는 시대를 비평한다면, <늙은 아이 이야기>의 늙은 아이는 성인처럼 큰 체격을 했으나 2차성징의 발현도 거의 보이지 않고, (자본주의 또는 통일 독일) 사회에서 적응하지도 못해 늘 서열의 마지막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동독 출신 주민의 처지를 은유했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일찍이 독일 소설에서는 소년 시절에 더 이상 나이 먹기를 포기한 남자가 몇 명 등장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오스카, 하인리히 뵐이 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의 주인공 한스. 이 두 소년들은 파시스트들의 사회, 파시즘의 광기어린 악행 속에서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결정해 그들이 저지른 죄를 비판하려고 한다.

  예니 에르펜베크가 만든 ‘늙은 아이’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늙은 아이’가 조로증 같은 현상으로 몸은 성인의 것을 하고 있으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일 수도 있고, 애초 나이가 많지만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성인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일종의 조로증세가 있는 열네 살 소녀로 생각했다가, 점점 읽어가면서 정신과 성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성인, 갑자기 한 순간에 개방되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동독 사람을 비유한다고 읽게 되었다.


  독일 역사에는 이 소녀 같은 인물이 정말 존재했다고 역자후기에 쓰여 있다. 1828년에 뉘른베르크 시내 한복판에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당시 16세 소년 카스파 하우저. 그동안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아무런 사회적 성장을 하지 못한 카스파는 기초적인 말과 숫자를 배우며 사회 적응 훈련을 받다가 길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카스파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채 다시 한번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늙은 아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소녀’의 첫 구절을 읽으면 역자해설에서 소개하는 카스파 하우저하고 별로 틀린 것이 없다. 시내 한복판에, 한밤중에, 이 소녀가 빈 휴지통을 손에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경찰이 소녀를 발견해 말을 시켜봐도, 이름이 뭐니? 어디서 살아? 부모가 누구야? 몇 살이니? 물어봐도, 열네 살, 이라는 대답만 할 뿐이다. 완전히 고아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큰 몸집에 어울리는 뚱뚱한 소녀. 예니 에르펜베크는 본문 겨우 두번째 페이지에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판정한다. 경찰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쓰레기통을 빼앗고 통통한 손을 잡은 채 아동 복지원으로 데려간다.

  복지원에 들어간 후에 소녀는 그나마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작가가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하는 바람에 독자는 지적발달장애를 염두에 두었는데, 지적발달장애가 있는 소녀라고 보기에는 그나마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시작해서 조금 이상하다, 발달장애인의 마음 속 생각, 뇌의 화학작용을 에르펜베크, 작가의 시선으로 좇아가 해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더 읽으면, 그러니까 소녀는 애초에 돌봄과 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깡통급 복지원 학생들보다는 조금 나은 지식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다만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큰 덩치와 피하지방과 내장지방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무척 많이 타는 데다가 만성 비염증세가 있어 늙은이처럼 맑은 콧물이 코에 방울방울 달려 있을 때가 많은데, 이를 닦기 위한 작고 얇은 손수건을 남한테 보이기 창피해한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희로애락을 다 느끼는 보통 사람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하여 독감, 감기에 쉽게 걸리고, 회복하는데 오랜 요양을 해야 한다. 소녀는 따뜻한 복지원 양호실의 깨끗한 침대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빨리 걷기도 힘들고, 뛰는 건 거의 하지 못하지만, 쉬는 시간이 있으면 철봉대에 올라 그 위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소녀.

  2차 성징이라고는 언제부터 했는 지 모르겠지만 생리를 하는 것 말고 없다. 가슴은 전혀 발달하지 않아 남성형 가슴에 남자 것보다 큰 젖꼭지만 달려 있다. 엉덩이도 발달하지 않아 그저 가운데가 불룩한 항아리형 원통처럼 생겼다. 소녀의 생존방식은 서열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러면 아무도 소녀를 경계하지도 않고, 문제가 터져도 원인제공자로 지목 받지 않으며 해결자 혹은 해결방법을 생각해낼 멤버로 여기지 않는 자유로운 자리가 바로 가장 낮은 서열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한 사람을 건너뛰지는 않는다. 8학년 동급생 다섯 명이 3학년 남자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소녀가 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소녀가 자기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걸 앍고 전전긍긍한다. 소녀가 교무실에 가서 고발을 하기만 하면 다섯 명 전원은 규율상 퇴소를 당하게 되고 퇴소 후에 이들 역시 단 한 곳도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소녀는 결코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루,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인 뵈른이 어떤 식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의 적지 않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뒤에서는 선생이 쫓아오고. 뵈른이 도망가는 길에 그저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소녀. 뵈른이 소녀와 꽈당 부딪히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소녀에게 쥐여주고 꽁무니를 뺀다.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돈을 집어넣고 완전하게 표정 없이 그냥 다시 서 있다. 결코 누구에게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뵈른은 잡혔지만 돈을 훔친 적이 없다고 했고, 선생은 돈을 도둑 맞았으며, 소녀의 주머니에 있던 건 뵈른에게 돌아갔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보육원에서 소녀의 사회생활은 전기를 맞는다. 이제 보육원의 주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

  그러면 좋을 것 같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후 소녀는 서열의 가장 아래 자리에만 머물 수 없다. 알고 보니 글씨도 예쁘게 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보다는 아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시험지를 대신 메꾸어 주기도 한다. 이 단계가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이 단순하게 외모가 늙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카이로스>처럼 일종의 정치소설일 수도 있고, 좀 개성있는 독자라면 정치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크게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 번 휙 읽고 던져버릴 작품도 아니다. 개방시대를 맞은 폐쇄사회에 있던 사람들의 곤란함을 콕 집어 쓴 작품으로 읽히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기는 하지만 독특한 문법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노벨라, 중편소설이다. 예니 에르펜베크는 처음으로 쓴 소설부터 현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비유하는 소재를 사용했다. 그래서 불편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인 건 틀림없는 듯. 눈에 힘주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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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1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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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체호프하고 별로 친하지 않았다.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10년 전에 읽었는데 여기에 필이 꽂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의 대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희곡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세 자매>말고 한 편도 더 추가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렇다. 이번에 읽은 《사랑에 대하여》 역시 도서관 개가실을 어슬렁거리다가 신간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단순하게 그냥 집어 든 거였다. 아무 생각 없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색∙계>하고 이 책 두 권이 있길래 <색∙계> 장아이링? 장애령 여사보다는 체호프를 딱 한 번만 더 읽어보자,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들면 끝이다 싶어 골랐다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만일 이 작품집 제일 뒤에 실린 단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걸 알았으면 이 책을 골랐을까? 나도 모르겠다.

  체호프는 남서부 러시아 로스토프 주, 아조프해 타간로프 만에 접한 도시 타간로프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식료품점 사업이 폭삭 망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안톤만 타간로흐에 남아 기어이 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해고 1882년, 약관 스물두 살에 의사 개업하면서 이후 5년 동안 주간지에 3백 편의 소품을 발표한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체호프가 이 소품들이었던 거다. 네다섯 페이지, 더 짧은 건 세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 소품들. 소위 ‘손바닥 소설’이라 하는데 지극히 짧은 소품들을 읽고 한 작가를 찬양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 책 《사랑에 대하여》는 의과대학에 다니던 당년 스무 살 시절 1880년에 쓴 소품부터 1899년의 ‘단편소설’까지 실려 있는데, 앞부분 소품들을 읽으면서 어김없이, 이젠 안톤 체호프하고는 영 아디오스, 마음을 먹었다가, 1892년 이후의 단편소설을 보면서 점점 눈알이 커졌다. 아, 이래서 체호프, 체호프 하는군.

  체호프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1880년대 후반에 체호프 인생 두번째 객혈을 하는 등 심신이 미약해졌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 더 나은 작가가 되기 위해 저 극동의 사할린으로 출발, 2년간 살다가 1892년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후에야 (아마도) 체호프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은 아닌지.

  실제로 이 책은 열아홉 편의 소품과 단편이 작품을 쓴 순서대로 실려 있는데, 1887년과 1892년 사이 4년 동안이 진공으로 있다. 1892년 이후 <유형지에서>부터 작품은 제대로 단편소설의 외형을 갖추었으며 역자 이항재의 말대로 “삶과 현실에 대한 심오한 관찰과 사색이 반영된 단편”을 발표한다. 물론 역자의 해설은 목적상 조금 주례사 성향이 있겠지만 이전 소품들과 견주다면 확실하게 그렇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이 책이 두 번째 체호프 단편집인데, 두 책 다 1880~90년대 작품을 아우르고 있다. 차라리 전기작품집과 후기작품집으로 구분해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그러면 나는 당연히 후기작품집만 사 읽겠지만.


  이제 체호프 단편의 재미를 알기 시작해 만시지탄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의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이 빵빵한 내 눈에는 체호프의 단편이 좋기는 좋지만 19세기 말 작품으로 스타일의 한계가 있거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도 억지로 스타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뭐 내 마음이니까.

  물론 앞으로는 체호프의 책이 눈에 보이면 일단 읽어볼 예정이다. 손절에서 급반전, 이제 눈에 띄면 읽겠다는 수준까지 왔는데 여기서 더 올라가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말이지. 아울러 그의 희곡들도 찾아봐야겠다. 괜히 안 읽고 버텼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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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5-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전 체호프 우리나라 번역본은 다 갖고 있어요.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체호프 단편집들은 제목과 표지만 달랐지 대동소이 해요. 10작품이 있으면 읽었던 게 반 이상..뭐 그렇다구요. 희곡보단 전 단편이 훨 좋더라구요.^^

Falstaff 2025-05-27 16:21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
워낙 작은 작품을 많이 쓴 양반이라... 사실 저도 말은 본문처럼 했는데 희곡 말고는 또 읽을지 장담하기 쉽지 않네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ㅎㅎㅎ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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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20세기 스페인의 황금기, 소위 27세대의 일원으로 워낙 유명한 극작가, 시인이라 말을 보태면 오히려 누가 될 정도이다. 문외한인 극동 변방의 이교도이자 이방인들이 보기에 이이의 유명세는 오히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를 지지하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당에 체포당해 재판도 없이 고향 그라나다에서 총살당한 비운의 시인, 극작가인 것이 한 역할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도 프랑코 비슷한 오랜 군사정권의 영향이 컸을 지 모른다. 뭐 아마추어 의견이니 신경쓰지 마시라. 하여간 로르카는 우리나라 독자에게 그리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언어와 정서 탓이 크겠다. 그리고 시인, 극작가,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냈으니 외국 소설도 잘 안 읽는데 하물며 번역시는 누가 그리 읽겠으며, 희곡은 또 얼마나 읽히겠는지, 생각해보면 로르카가 유명세에 비해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것이 납득이 간다. 나도 이전에 읽은 로르카는 이이가 스무 살 때 쓴 기행 에세이 <인상과 풍경>밖에 없다. 그것도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에세이라서, 그라나다, 안달루시아의 환한 빛과 건물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드라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인상과 풍경>과 확연하게 다르다. 분위기 자체가 그렇지 않다. 두 작품 사이에 18년이라는 터울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역시 에세이와 극작품의 간극 때문 아닐까 싶다.


  베르나르다 알바. 60살. 작품을 쓴 시기가 1936년이니 당시 기준으로 보면 노파다. 어머니 마리아 호세파는 스무살에 베르나르다를 낳아 지금 80.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문학작품 속에서 이렇게 뇌 쪽으로 약간 비정상인 사람들이 특색있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이이도 좀 그런 편이다.

  베르나르다는 딸만 다섯. 순서대로 앙구스티아스, 마그달레나, 아멜리아, 마르티리오, 아델라. 첫째 앙구스티아스는 서른아홉 살이며 유일한 전남편의 딸이다. 전남편이 상당한 부자로 죽어서 그의 유산으로 앙구스티아스만 거액의 상속분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네 명도 평생 쓸 만큼의 유산을 상속받겠지만 돈이란 것이, 특히 있는 것들이 있을수록 더 지독한 건 아시지?

  그리고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 하녀 라 폰시아. 베르나르다와 같은 나이로 올해 환갑이다. 거의 평생 베르나르다와 함께 지내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서 만사 훤하지만, 냉정한 베르나르다는 폰시아의 충고나 기타 귀띔에 그리 신경쓰지 않고 면박만 준다. 어이, 폰시아. 너는 그냥 시키는 일만 하고 대가로 돈을 받으면 되는 거야, 알겠어? 이런 식.


  막이 올라가면 장례식 날이다. 베르나르다가 두번째로 정식 과부가 된 날. 그리하여 첫째 앙구스티아스만 빼고 전부 검정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앙구스티아스 얘도 염치가 있으면 아무리 자기 아빠가 아니더라도 상복을 입는 것이 예의일 터. 이 문제는 앙구스티아스의 성격을 설명하는 장치 말고는 기능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 좀 그렇고, 이후 딸들 가운데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을 얼핏, 그리고 앞서 조금 보여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

  무슨 갈등이냐 하면, 이웃하는 귀족 가운데 키 크고, 잘 생기고, 덩치 좋고, 하여튼 사방팔방으로 어디 한 구석 꿀릴 것 같은 외모의 청년 페페 엘 로마노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스물다섯 살 페페는 스물네 살의 마르티리오가 자기하고 맺어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찔러보고 싶은 못 먹는 감이다. 막내 스무 살짜리 아델라는? 정확하게 얘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네에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밴 처녀를 살해하려는 일이 벌어지니까 아델라가 자기 배를 쓰다듬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미 페페 엘 로마노와 할 거 다 한 사이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스페인 사회에 국한해서 그런지, 아니면 유럽 지역, 더 확장해서 전 지구적으로 비슷한 지는 잘 모르겠다. 정식 결혼을 하기 위하여 알바 집안의 다섯 딸 가운데 한 명한테 청혼을 하려는데, 누가 당첨될 것 같으냐 하면, 유력 후보인 넷쩨 딸 마르티리오와 막내딸 아델라를 뺀 나머지 여성들, 하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전부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를 꼽는다. 페페보다 무려 열네 살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여간 이렇게 내정 비슷하게 된 상태라서 이제 페페 엘 로마노는 밤 시간에 앙구스티아스의 창문에 등장해 “밤드리노니다가” 간다. 그런데 시간이 문제다. 분명히 앙구스티아스의 창문에서는 밤 1시 반에 이별을 고했는데, 새벽 네 시에 페페가 그제야 알바 저택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속속 등장한다. 누구?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당연히 아델라로 보인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인다는 거.

  서양 사람들이 나이 차이 때문에 장유유서 따지는 거 못 보셨지? 자매들 간에도 그렇다. 더구나 씨가 다른 자매들이라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여야 하는 것이, 무대와 작품의 제목이 “베르나르 알바의 집”이라는 딱 갇힌 공간. 이곳은 한 명의 독재자 베르나르다 알바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이이의 앞에서는 어떠한 말대답도, 반항 비슷한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알바 저택을 내전이 한창 진행중인 스페인 정세와 비유해도 괜찮을 거 같기는 하지만, 이제 세월이 몇 십 년 흐른 바에 구태여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도 없다. 이런 건 다 감상자의 선택일 바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택 안에서 치매 증상이 있지만 특유의 옳은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는 80 노인 마리아 호세파의 전망도, 베르나르다를 혐오하지만 충실하고 오래된 하녀 폰시아의 조언도 다 필요 없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에서 자매들 간의 사랑에 관한 시기, 증오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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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26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투비컨티뉴드가 궁금한데 그럴려면 읽어야겠죠? ㅎㅎ

Falstaff 2025-05-26 16:57   좋아요 1 | URL
아휴.... 도서관 가셔요.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막 뮤지컬로도 공연하고 뭐 그랬지만 희곡으로 읽는 재미가 덜 할 줄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yamoo 2025-05-2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띠...별5 또 출현인데...그게 로르카네...이거 이거 되게 고민됩니다. 하필 로르카라니...그래도 사야겠죠..별5개라는데..^^;;

Falstaff 2025-05-26 16:58   좋아요 1 | URL
흠. 저는 책임 안 집니다. 하여간 만사 불여튼튼입니다. ㅋㅋㅋ
 
페르시아의 신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9
도리트 라비니안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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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트 라비니안은 이스라엘 중부 샤론 지역에서 1972년에 이란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중동 지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하는 집안 출신 유대인 작가는 처음 읽는 것 같다. 아모스 오즈도 그러지 않나 싶어 검색해보니 라트비아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선입견인지 외모로도 약간 차이가 있는 듯. <페르시아의 신부>가 첫번째 발표한 소설이란다. 데뷔작이 아니란 얘기냐고? 그렇다. 데뷔는 1991년 시집 《예, 예, 예》로 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위키피디아를 읽어보면 2014년에 소설 <접경생활Borderlife>이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반 자전적 소설이라는데, 흠, 좀 놀랐다. 하긴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나?

  제목이 <페르시아의 신부>라서 나는 어린 소녀를 신부로 삼는 극한 조혼에 따른 사회문제나 무슬림 종교에서 신음하는 여권에 관한 페미니즘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극한 조혼 풍습인 건 맞는데 자꾸 그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봐도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다. 그냥 20세기 초∙중엽 이란의 유대인 게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어린 신부와 어린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를 주목하면서 그렸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당연히 이란, 페르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니까 남성의 가부장적 부당한 행위도 여러 번 등장하지만 라비니안은 그것을 강조하는 데 힘을 주지 않았다. 독자도 처음엔 좀 신경 써 읽기 시작했다가 진도가 나가면서 재미있게 후루룩, 배고플 때 덜 뜨거운 잔치국수 들이마시듯 즐기며 읽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씀.


  열일곱 살 먹은 꽃 Flora플로라. 전보다 몸이 훨씬 불었다. 첫번째 임신이다. 근데 신랑이 토꼈다. 그래서 울고 운다. 울어도 그냥 우는 게 아니라 훨씬 분 몸에 걸맞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곡소리로 엉엉 온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듯이 드높고 드높다. 얼마나 우는지 여인네들은 이제 쿠치크 마다르, 즉 어린 엄마의 임신이 이것이 끝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참 별스러운 임산부. 엄마 미리암 하놈이 말하기를, 결혼하고 며칠 후 저주받은 월식일 밤에 그렇게도 말렸건만 하필이면 그날 악마가 밤하늘에 넘실거리는 시간에 아이를 만들어서 이 사달이 생겼단다. 근데 엄마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알려면 신랑의 직업과 영업 방식에 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왜 신랑은 습관적으로 질외사정을 고수했을까?

  나한테 음란마귀가 씌웠나 어쨌나, 신랑 이름을 읽고 거 참 웃기네 했다. 이름이 ‘샤힌 보지도지’이다. 벌써 십여 년 전에 2차 호프집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를 우연히, 진짜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투쟁부장, 복지부장 기타 등등. 나하고 동석했던 이들은 당시 노무팀장, 생산실장. 우리는 노무팀장 면을 살려주려 합석에 응했다. 그래 서너 조끼씩 순배가 돌아가고 얼근히 취한 나는 어떤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본 위원장이 좋은 표정으로. 팀장님 왜 웃으셔요? 대답하기를 소학교 때 송창식과 변웅전이 하는 이야기 들은 생각이 나서 그렇지요. 뭔데요? 송창식과 변웅전이 서로 이름에 붙은 받침 떼고 읽으면서 티격태격, 거 가관이더군요. 그래서요? 우리 복지부장님도 받침을 떼고 읽으니 흐흐 재미 있습니다 그려. 이런 적 있었다.

  이야기하기 전에 틀림없이 노조 사람들 모두한테, 말하기 싫다, 당신들 열 받을 지 모른다, 했고, 그들이 천만의 말씀, 전혀 그럴 일 없으니 마음 편히 이야기 해보시라, 해서, ‘받침 뺀 복지부장’을 꺼냈으며, 전원 우하하하하 거창하게 웃어 제쳤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심각한 사무국장 새끼가, 자기도 나더러 마음 편하게 얘기해라 해놓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조 간부한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했다. 그랬더니 단 1초도 안 걸려 같은 노동형제가 하는 말에 휘까닥 돌아버린 위원장이 아이고, 술병 깨고, 술잔 집어 던지고, 그런 생 난리가 없었는데, 그 사람들,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버렸다. 뭐 그런 일도 있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어쩄든 나한테는 좀 민망한 이름의 샤힌 보지도지(‘염소도둑’이라는 뜻)는 사기꾼 성향이 농후한 전형적인 유대인 포목상인인데, 온갖 변설을 떨어 무슬림 집안에 안주인한테 천 두루마리를 보여준다. 옷감 여러 필을 방에 촥, 펼쳐놓고, 노가리를 실컷 푼 다음, 말이 좀 먹히면 이제는 옷감을 직접 들고 사모님 몸에 척 가져다 대고, 세상에 이런 몸에 이런 옷감이 없으리, 울룰랄라 칭찬을 하면서 몸을 비비적 거리다가 슬그머니 뻣뻣하게 경직된 살을 슬슬 문지르는 단계까지 이른다. 그러면 결국 할 거 다 하게 되는데, 언제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아버님의 교훈, “샅에 달린 누에를 이방인 여인의 고치 속에 넣으면 안 되느니라.” 이교도 나비들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 순간이 오면 얼른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비단 손수건에 사정을 하는 게 하도 버릇이 되었다. 그래 결혼식을 한 날부터 시작해 계속 비단 손수건을 꺼내다가 하필이면 악마가 허공을 채우는 불길한 월식날 밤, 그날부터 별을 따기로 결심을 했던 거였다.

  페르시아 옴리쟌에 들어와 유대인 도살업자 집안의 사위가 된 샤힌 보지도지는 결혼식 포함해 6개월 동안 지내다가 머나먼 도시 이스파한으로 장사를 떠나 2개월, 아무리 길어도 3개월 안데 돌아올 터이니 몸 건사 잘 하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날들이 가고 점점 초조해진 라토리안 집안. 옴리쟌을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샤힌 보지도지를 물어보니 한 장사꾼이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한다는 표정과 어투로 시투룽하게 하는 말이, 그가 지나간 길에 어린 신부 셋과 과부 한 명이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 있다는 거였다.


  플로라의 아빠는 이름난 도살업, 정육점 가문의 쌍둥이 아들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동생 내외가 깨를 볶으면서 잘 살다가 하루는 식중독에 걸려 한날 한시에 딸 하나만 남겨둔 채 숟가락 놨다. 딸의 이름이 나지아. 사촌 언니 플로라보다 네 살이 어려서 열세 살.

  플로라의 엄마 미리암 하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옴리쟌의 모든 유대인 게토 여성뿐만 아니라 게토 밖 무슬림 진영의 1부 4처 집단까지 아울러 가장 게으른, 게으르다기보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물론 가정교육 문제인데, 원래 무진장 깔끔했던 집구석이 하루아침에 가장 어질러진 집안꼴로 변해버린 건 전적으로 못된 아빠 책임이었는데, 미리암은 아무튼 소녀시절부터 이런 미풍양속을 몸 깊이 간직한 채 시집을 와서 두 딸 역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식탐 많은 여성으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날이 갈수록 지저분한 집구석 꼬라지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미리암은, 시동생 부부의 장례식에 갔다가 당시 겨우 일곱 살 난 시조카 니지아가 얼마나 야물딱지게 청소, 요리 같은 집안일을 잘 하는지 홀딱 반해버렸다. 이미 동서가 죽기 전에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아, 정말로 자네가 죽는다면 니지아를 내 며느리로 삼기로 맹세를 함세, 이래버렸기도 했고, 아다시피 유대교나 무슬림에서 한 번 맹세를 하면 이건 절대 인간의 힘으로 취소할 수 없는 거라서 께름칙하던 차에, 마침 남편도 이번 기회에 니지아를 집에 데려와 키우자 하는 걸 못 이기는 척했다. 딱 한가지 조건을 달고. 자기를 ‘아메 보조르그’ 즉 존경하는 숙모님이라고 부르라는.

  근데 이 미리암이 워낙 미인이라서 순서대로 딸-아들-딸이 전부 생긴 건 하나 거의 완벽했다는 말씀. 비록 숙부네 집에 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하녀 수준의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지만 니지아는 잘 생긴 사촌오빠 무사와 결혼해 플로라처럼 어린 엄마, 쿠치크 마다르가 될 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게 아직도 없는 거다.

  플로라는 열세 살에 초경을 했다.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몰라 종아리와 발꿈치에 꾸덕꾸덕한 피딱지가 앉은 걸 보고 그것의 근원지를 찾아 올라가다 보니 그게 초경인 줄 알고 나지아한테 말했고, 나지아는 앞날의 남편 무사에게, 무사는 누나 호마에게, 호마는 아빠한테 말했으며, 아빠는 엄마한테 한 마디 함과 동시에 집집마다 키우는 전서구, 우편용 비둘기를 몇 십 마리 날려 지역의 각 게토에 널리 소식을 알린 바 있다. 그러자 다음 주부터 페르시아 각지에서 청년과 청년의 어머니들이 속속 모여들어 결혼 신청을 하기 시작했던 걸 나지아는 봤던 것.

  나지아도 빨리 초경이 터져야 무사 오빠하고 결혼을 할 터. 가만 보니 오빠는 더 기다리기 힘든 거 같다. 왜 힘든 줄은 모르겠지만 괜히 그렇게 보인다. 나지아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손가락으로 슬쩍 아래를 훑어, 아직 깜깜한 새벽이니 냄새를 맡아보고, 그때마다 실망한다. 이제 열네 살이 됐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이걸 어쩜 좋아.

  하지만 가히 소설 한 편의 주인공으로 발탁할 정도의 캐릭터라면 무슨 수를 쓸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독한 방법으로 아직 멘스가 터지지 않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나지아, 이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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