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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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저렇지 않았다면 진즉 읽었을 텐데 제목만 보고 어째 청소년용 로맨스 소설 같다는 선입견으로 여태 미뤄두다가 이제 읽었다. 읽은 소감을 짧게 얘기하자면, 제목처럼 달콤 쌉싸름하지는 않지만 참 맛있게 잘 쓴 전형적 라틴 아메리카 소설. 이제야 이리 예쁜 소설을 읽었다는 게 아쉬웠을 정도. 못 믿으시겠다고? 읽어보셔. 정말 작품이 참 예쁘다니까. 당연히 전 연령층 독서 가능, 하지만 성인독자가 읽으면 더 재미있을 그런 소설. 내가 젤 싫어하는 것이 뭔 얘기 하면서 "더 재미있을 '그런' 소설", 이따위로 애매하게 얘기하는 일. 근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멕시코에 데 라 가르사, 라는 가문이 있었는데 이 빌어먹을 가문의 빌어먹을 전통 가운데 하나가, 참 말도 안 돼, 막내딸에겐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부모가 죽을 때까진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거. 이 가문에 드디어 막내딸 티타 데 라 가르사 양이 태어났는데 티타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이 가문의 막내딸로 결혼도 못하고 따라서 자손 하나 없이 외로운 일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안다는 듯이 배냇기름으로 허연 몸뚱이를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찰싹 때릴 것도 없이 그냥 앵앵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럴 것이 티타가 나오던 날 밤에 아버진 읍내에서 테킬라 두 병을 안주도 없이 장하게 자시고 먼 길을 걸어오다 동네 돌다리 위에서 푸짐하게 싸 놓은 개똥을 밞아 미끈덩, 다리 아래로 떨어져 흐르는 개울물에 익사를 했던가 아니면 그냥 추락사던가 하여간 숟가락 놔버렸으니, 독자는 이 사건으로 미루어 짐작하여 티타의 사주엔 애초부터 막내딸로 태어나게 되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리.

 하여간 그렇게 세상으로 내쳐진 티타. 얘네 엄마, 그것도 친엄마 엘레나 여사, 앞으론 이 여자를 편의상 마마 엘레나로 부를 것인데, 하여간 이 여잔 졸지에 죽어자빠진 남편 덕에 티타를 낳고도 그만 기가 팍 질려서 당연히 티타가 먹어야 하는 인간의 모유가 완전히 말라버려, 이후 티타는 늙은 부엌데기이지만 참으로 애정이 넘치는 요리의 고수, 나차의 손에 자란다. 친엄만지 웬순지 잘 모르겠다 싶은, 마마 엘레나 입장에서 생각해주자면 티타를 볼 때마다 저년이 내 서방 잡아먹은 년이야,하는 억하심정이 솟아나 그런 것이 분명하다 싶을 만큼, 앞으로 나 죽을 때까지 저 애가 나 뒷바라지를 다 해야 하는, 딸이라기보다 종년에 더 가까운 인종이라고 생각하는 듯 마마 엘레나는 티타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외없이 야물딱지게 귀싸대기 한 대 씩을 올려붙였는데, 그놈의 사소한 잘못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너무 '사소'하기 때문에 긁어내기로 작정을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 씩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서 티타는 날이면 날마다 귀싸대기 얻어 터져가며 길고 긴 유년시절, 소녀시절, 청소년 시절, 사춘기 시절을 다 보내야 했다. 참 이정도면 팔자도 이리 드런 팔자 별로 없을 듯.

 세상 이치라는 것이 참. 티타도 어느덧 자라 앞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가 둥그렇게 커지면서 그만, 세상에 빌어먹을, 사랑이란 걸 하게 된다. 평생 엄마 뒷바라지하고 나아가 늙어 움직이지 못하면 똥오줌 다 받아내야 하는 가문의 빛나는 의무를 진 아가씨가 연애를 해? 이거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 못된 거다. 지금이야 막내딸한테 패악질을 서슴지 않는 마마 엘레나라고 해도 나중에 나이먹어 늙어 움직이기 힘들면 그때가서 평생 얻어맞고 산 거 차근차근 다 돌려주며 즐길 수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제일 중요한 건 동네 준수한 청년 페드로와 당장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 잘 배운 페드로 도련님 역시 이 사건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결론을 내 심사숙고 끝에 아버지 대동하고 티타네 집을 방문해 정식으로 청혼이란 절차를 거친다.

 마마 엘레나. 참, 인간도 아니다. 하시는 말씀이, 우리집 전통에 의하여 티타는 평생 처녀로 부모 봉양의 의무를 져야 하는 일종의 가비家婢라서 결혼이라니 당치 않다. 하지만 티타 대신 맏딸 로사우라하고는 결혼할 수 있다. 로사우라 역시 미모와 좋은 예절을 갖고 있는 마춤한 규수이니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보시라. 페드로? 잠깐, 오래도 아니고 잠깐 생각하더니, 아이고 장모님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올시다. 해버리고 만다. 왜? 그게 평생 티타 옆에서 그녀를 보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될 거 같아? 마음 먹은대로 되면 그게 인생이야?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식이 벌어지고, 티타는 정성을 다해 '차벨라 웨딩 케이크'를 굽는다. 굽긴 굽는다. 그러면서 어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있었으리오. 부엌 바닥을 눈물에 발목이 잠길 정도로 울며 울며 또 울며 그러나 지성껏 성의를 다해 보기에도 먹음직하고 아름다운 케이크를 구워 결혼식 파티장에 내가니 하객마다 어찌 큼지막한 포크를 들고 크게 한 입 먹어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 기막힌 맛이여. 달콤하여 혀 위에 올려놓자마자 사르르 없어지는 부드러운 밀가루의 오비디우스 적인 변신의 맛이여. 그러나 차벨라 웨딩 케이크엔 억장이 무너진 티타의 마음과 넘쳐나는 눈물이 다 들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탄할 수밖에 없는 미각을 주면서 동시에 견딜 수 없는 비탄의 맛은 하객들의 유문 괄약근에 갑자기 경색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동시에 분문이 활짝 열려 파티 석상에서 위에 담은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식도와 구강을 통해, 먹었던 것과 정확하게 반대방향으로 뿜어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저택의 넓은 정원엔 어디 한 구석 하객들이 분수처럼 뿜어낸 토사물을 뒤집어 쓰지 않은 곳이 없었고 수많은 하객들 모두 토사물을 뒤집어 쓴 채 서둘러 최악의 피로연에서 도망하게 만들어버렸다.

 여태까지 쓴 것이 소설의 도입부.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벌어지는데 난 언제나 진짜 얘기는 해주지 않겠다. 요리와 음식을 매개로 한 재미난 라틴 아메리카 소설. 그동네 특유의 환상문학적 요소도 적절하게 가미되어 있고, 특이하게 음식이름으로 된 모든 장章이 재료부터 레시피를 소개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할 얘기는 다 한다. 책은 티타의 손자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쓴 형식으로 되어 있으니 티타가 어떻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모양이지? 글쎄, 정말 그랬을까? 감질나게 약올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 해보라고? 약오르면 직접 읽어보셔. 아 글쎄 재미난 책이라니까.



 * 로사우라와 페드로의 결혼식 전날 밤. 밤새 웨딩케이크 구울 준비를 하다가 시간이 잠깐 나서 마마 엘레나의 엄한 눈길을 피해 마굿간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물바람을 하고 있던 티타. 그녀가 노래한다.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저 웨딩 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남겨진 웨딩 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이거 진짠지 거짓말인지 궁금하시지? 글쎄 직접 읽어보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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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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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참 재미나게 읽은 책 중에서 <폴란드 기병>이 있다. 얼마나 재미나던지 다 읽은 즉시 인터넷 책방 '알라딘'에 쳐들어가 <폴란드 기병>을 띄운 다음 작가의 이름을 클릭했더니 그가 쓴 다른 책이, 없었다. 그런줄 알고 근 일년을 보내다가 민음사에서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가 쓴 <리스본의 겨울>이란 책이 있는 걸 발견했다. 흠. 중간 이름 '무뇨스'와 '무뇨쓰'가 이렇게 중요한 차이구나.

 각설하고, 책 얘기하자.

 습기가 가득하고 어두운 실내. 더블 베이스가 마치 퍼커션 처럼 둥둥 울리고 그 위를 체념한 듯한 피아노가 불협화음으로 절뚝거리며 거닐기 시작할 때 쯤해선 아직 악기를 손에 들고만 있는, 시거를 입에 문 트럼펫 주자의 목엔 주름을 따라 땀이 투명한 선으로 그어진다. 흐를듯 말듯.

 듀크 엘링턴이나 텔로니어스 멍크 같은 이들만 피아노를 하는 건 아니어서, 즉 뉴 오를레앙, 아 실례, 뉴올리언스에서 시작한 재즈는 시간이 흐르며 북상을 거듭했고, 순식간에 대서양을 건넜다. 유럽에선 자연스럽게 백인 재즈가 만들어지는데 가장 높은 곳엔 트럼펫의 성인聖人 빌리 스완이 있으며, 평생 그를 흠모하게 되는 우리의 주인공이자 피아니스트 비랄보, 또는 자코모 돌핀이 있다. 돌핀. 입에 문 담배 연기가 위로 올라 눈을 자극하고 그래서 가득 눈을 찡그린 것도 모자라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혀 오직 팔과 가는 손가락만으로 무심한 듯 건반을 두르리는 남자. 잠깐 자리를 더블 베이스나 트럼펫에 물려주는 틈을 타 오리지널 버번 위스키를 크게 한 모금 마시며 늘씬한 웨이트리스의 엉덩이와 종아리를 감탄하듯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러나 사실은 강한 조명 때문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무대 앞쪽 취객들의 발목이상이 아닌 알콜중독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뇌쇄적인 육체와 아름다운 얼굴의 루크레시아. 물론 우리의 주인공 비랄보의 눈에 그렇다는 얘긴데, 이름만으로도 이미 한껏 능욕을 당했을 것같은 색다른 매력의 여인. 그녀의 동업자이자 동거인이며 동시에 범죄자, 심지어 살인자이기도 한 말컴. 그의 엄중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비랄보와 루크레시아는 어느새 돌이킬 수 없고, 세월마저 희석시키지 못한 정열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니 이 또한 인생이 아닌가. 여기에 말컴보다 더한 권위를 갖는 범죄자 커플이 등장하여 절도와 사기와 살인, 그로 인해 범죄자들이 얻어낸 결과물은, 범죄자 집단과 이런 류의 소설, 영화 등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듯 한 사람의 손에 들어오고 나머지 악당들은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아내 취득물의 회수와 동시에 복수를 위해 접근한다.

 얘기 돌리지 말자. 재즈의 블루, 우울하고 퇴폐적이고 알콜에 푹 전 삶의 모습과 기막히게 어울어진 범죄 이야기. 루크레시아라는 이름의 팜 파탈. 진정한 재즈의 성인 빌리 스완이 죽음의 침상까지 자신의 가장 순수한 혼을 불사르는 재즈 트리오. 내겐 범죄 이야기 보다는 재즈 연주가들의 삶에 훨씬 관심이 갔고, 오직 그거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이 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의 근간은 범죄 스릴러. 이런 쟝르의 책에 관해 여러 얘기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얻어맞을 만한 일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서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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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맛나게 먹고 심심해서 한 번 골라봤습니다.

역시 책의 순서는 의미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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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순원 단편집 <학 / 잃어버린 사람들>

 

 황순원 선생한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선생의 작품 가운데 백미는 역시 단편이다. 어느 하나 뺄 수 있겠는가만 <학>을 제일 좋아한다. 국어 교사를 하다가 조선어 말살 정책이 시행되자 평양 인근 고향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오직 조선어로만 작품을 썼던 진짜 선비.

 

 

 

 

 

 

 

 

 

 

 

2. 최인훈, <태풍> 

 

 

 우리나라 최초의 가상 역사 소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이 작품이 없었으면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온갖 형식의 소설을 다 실험해본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우화.

 

 

 

 

 

 

 

 

 

 

 

 3. 장용학, <원형의 전설>

 

 

 

 <원형의 전설>은 두 출판사에서 나오는데, 두산동아에서 찍은 건 원래 작품 속에 있는 모든 한자어를 다 한글로 바꾼 것. 그것도 좋지만 장용학은 뜻의 명확한 이해를 위해 조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글자를 한문으로 썼다. 지만지 책이 원본에 의거하여 만든 책. 나 같으면 이걸 고르는데 다른 분을 위해선 암만해도 두산동아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 책엔 <원형의 전설> 말고도 정말로 기념비적인 장용학의 단편들, <요한시집> <현대의 야> 같은 것들도 다 실려있어서. 한국전쟁은 작가들에게 실존에 관한 묵직한 숙제를 내주기도 했고 장용학은 처음부터 실존 문제에 집착, 아예 끝장을 봤다가 정말로 끝장이 난 문제적 작가. 난 이이를 굉장히 좋아한다.

 

 

 

 

 

4. 하근찬, <수난이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절묘하게 묘사해놓은 단편. 하근찬 선생에겐 좀 미안하지만 <수난이대>말고는 히트작이 별로 없는 것이 좀 아쉽다.

 

 

 

 

 

 

 

 

 

 

 5.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기행>도 무진기행이지만 이 책에 같이 실려있는 작품들,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눈부신 소품들이 즐비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여신의 멘스. <생명연습>에서 여고생이던가, 하여간 청춘학생이 하는 얘기. 우리나라 문학계에 제대로 뒤통수 한 방 때리며 혜성같이 등장했던 사내의 내밀한 감각. 덩치는 이따맣게 큰 인간이 말야.

 

 

 

 

 

 

 

6. 이청준, <소문의 벽>

 

 

 

이청준의 '전짓불의 공포'에 대한 각인이 찍혀있는 나는 전짓불을 빼고 그를 생각할 수 없다. 유년의 기억 속 한밤에 난데 없이 나를 향해 내쏘는 전짓불. 불을 비추는 저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생사를 가르는 대답을 해야하는 갈림길.


 

 

 

 

 

 

 

 

 7.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난 아이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이 책을 사줬다. 책을 완전히 다 읽어내면 적어도 지적인 시각으로 다 자란 것에 가깝다고. 인간의 기본적인 공포, 죽음에 관한 박상륭의 깊숙하고 유명짜한 고찰. 내 책은 한 권이었었는데 언제 두 권으로 분책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신자유주의란.

 

 

 

 

 

 

 

 8. 이문구, <관촌수필>

 

 

 

 말이 필요없는 명 문장들의 향연. <우리동네> <장한몽> 기타 등등에서 보인 이문구 식 걸쭉하고 유장한 입심과는 또 다르게 명징한 서정으로 유년과 조부에 헌정한 책.

 

 

 

 

 

 

 

 

 

 

 9. 황석영, <장길산>

 

 

 

 젊은 황석영표 대하소설. 홍명희의 <임꺽정>도 좋으나 역시 좀 오래 전 것이라 황석영의 이 책을 꼽을 수밖에 없다. 힘찬 영웅들의 모험담. 또다른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질박한 조선 민중들의 건강한 알통과 애뜻한 사랑 이야기.

 

 

 

 

 

 

10. 최명희, <혼불>

 

 

 

 길고도 재미있고도 무엇보다 아름다운 장편소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얼마나 섬세하게 썼는지 책을 읽으며 작가 최명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던 경이. 이렇게 긴 이야기를 썼음에도 진도가 반 정도 밖에 나가지 않은 듯한 아쉬움. 최명희의 단명을 탄함.

 

 

 

 

 11. 신경림, <농무>

 

 

 

 내가 번 내돈으로 처음 사본 책. 세상의 모든 쇠붙이, 총칼을 녹여 호미며 쟁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깨를 걸고 노래하는 한 바탕.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만 18세 청년은 새롭게 눈을 떳었다.

 

 

 

 

 

 

 

 

 

 

 

12. 서정춘, <죽편>

 

 

 

 겉멋이 아닌 진짜 시의 맛을 알게 해준 시집. 데뷔 29년이던가 만에 펴낸 처녀시집. 편편이 알뜰하게 써내려간 시들이라니. 하나의 노래라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내 책은 동학사에서 나온 것인데 그 회산 그새 망했나보다.

 

 

 

 

 

 

 


* 근데 이거 쓰기 정말 힘들다. 점심시간 지난지 벌써 40분 됐다. 괜히 시작해 눈치 보인다. 타의에 의해 그만 쓰겠다. 잘못하면 잘리겠다. 정말 이 포스트는 쓰다 만 거다. 이래놓고 보니까 시간 없어 이름을 올리지 못한 작가/시인들한테 미안하다. 오정희, 이문열, 김수영, 김주영, 조세희 등등(여기서조차 이름을 빼먹은 작가들한텐 진짜진짜 면목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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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6-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 서정춘, <죽편>은 처음 들어봅니다. ^^ <원형의 전설>하고 챙겨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06-09 11:34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읽고 뭐 할 얘기가 없더라고요. 극도로 절약한 단어들로 만든 짧은 문장과 짧은 시. 그러면서 할 얘긴 다 하는 거요.
일갈하더군요. ˝설사하듯˝ 시쓰는 시인에 관해서. 죽여주는 시가 많이 들어있는 아주 얇은 시집입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竹篇·1 ― 여행> 전문

대나무 마디마디가 기차가 되어 고향마을에 가는데, 결코 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백년이 걸린다니 살아생전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봄 밤에 술 한 잔 마시고 고향 생각하는 시인이 눈 앞에서 삼삼하지 않으셔요? ㅎㅎㅎ

그의 다른 시집 <봄, 파르티잔>도 역시 절창입니다.

Falstaff 2017-06-09 11:37   좋아요 0 | URL
<원형의 전설>.... 제가 잠자냥 님의 세대를 몰라 드리는 말씀인데요, 학교 다닐 때 한문 배우지 않았으면 두산동아 판으로 읽으셔요. 알라딘엔 품절이고 다른 인터넷 서점엔 재고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한문 배우셨으면 당연히 지만지 책이고요.

잠자냥 2017-06-0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한글전용세대라 지만지판 잠깐 보니 안되겠습니다. ㅋㅋㅋ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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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네루다. 공산당 소속의 칠레 민족시인.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외교관.

 1970년 공산당 대통령 후보 지명. 좌파 연합으로 통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 지원, 당선. 프랑스 대사 임명. 대사직 수행 중 노벨 문학상 수상. 지병으로 자택이 있고,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이슬라 네그라로 이주.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쿠데타 군에 의하여 아옌데 대통령, 관저에서 총격전 중 사망. 지병 악화 및 쿠데타 후 기타 사유로 산티아고 소재 병원으로 이송, 9월 23일 사망.

 네루다의 생전 모습. 저 위 책 표지가 생전에 찍은 것. 책 내용으로 미루어 1952년과 70년 사이 짱박혀 활발하게 시를 쓰던 이슬라 네그라 자택인 것이 분명함.

 마리오 히메네스. 어부의 아들. 뺸질뺀질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음. 대를 이은 어부로 살기가 죽기보다 싫음. 돈을 벌어야겠고 뭐 편하게 할 거 읎으까? 눈알을 뒹굴뒹굴 굴리다 공산당원 우체국장, 우체국장이라기 보다 동네에 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네루다 씨 말고는 거의 없는 관계로 진짜 할 일 없는 동네 아저씨에게 접근, 우체부로 취직. 단 한 명, 네루다 씨를 위한 우체부가 됨. 전임자들이 계속 바뀐 건 고객이 오직 한 명이라는 거 때문. 느므느므 심심해서. 때마침 동네 유일의 카페 여사장의 고명따님 베아트리스가 눈에 띔. 소설 목적상 당연히 한 방에 눈이 돌아감. 카페 여사장은 마리오에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함. 궁리궁리하다가 네루다 씨에게 고민을 풀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함.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뭔가?"

 "저 아래 주막 있잖아요? 거기 베아트리스란 쥔집 딸이 있거든요."

 "아, 그 아가씨한테 뻑 갔군 그래?"

 "어떻게 아셨대요?"

 "목소리와 얼굴 색과 눈동자의 떨림에 다 써 있어. 근데 왜?"

 "어떻게 고백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말씀인데 시 하나 써주세요."

 "시?"

 "예, 시."

 "아이 씨!"

 "씨 말고 시요, 시. 시인이 시 하나 얼른 못 써주셔요?"

 "자네 시가 뭔줄 아나?"

 "알면 쇤네가 지금 이 지랄을 할까요? 그게 뭔데요?"

 "메타포야."

 "메타포요? 100 그램에 얼마나 줘야 사는 거예요?"

 "안 팔아. 왜냐하면 세상 도처에 있거든. 그것만 발견하면 다 시인이 되는 거지"

 "그럼 어디 있는데요?"

 "네 마음 속에. 예를 들어 이런 노래 들어봤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염병을 한다고 울어제꼈나 보다.'"

 (마음 속으로)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대화가 시인, 우체부 사이에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그들 사이엔 잔잔하고 따뜻하다가 드디어 슬그머니 물결치는 우정이 싹튼다.

 이 책에서 당시 칠레의 시대적 배경과 비극적 현대사와 정의의 종말 같은 것들을 얘기한 서평이나 책소개 같은 건 무지 많다. 난 그거 빼고 얘기한다.

 몇년 후 노벨상을 받을 칠레의 국민시인이자 사랑의 시인이자 민중시인, 저항시인이면서 당대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 계관을 쓸 거구의 60대 노인과, 구원의 여신 베아트리스와 사이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순박한 청년이 서로의 우정을 잊지 않으며 함께 세월을 보내는, 아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맺음. 정말로 따뜻하고 독자를 미소 짓게 만드는 인간 간의 사랑. 이 하나만 찾아 읽어도 진정으로 충만한 독서를 했다고, 만족할 수 있다. 무지렁이 어부의 아들을 시인으로 만든 대시인의 자연을 닮은 가르침.

 건조한 세상을 살아가는,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인류에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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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6-0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때문에 왠지 읽어보지도 않고 읽은 느낌이라 ㅋㅋ 아직 안 읽어봤는데 이 글 보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Falstaff 2017-06-07 14:42   좋아요 0 | URL
명작 혹은 걸작의 반열이 아니라 그냥 ‘좋은 책‘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참 잔잔하게 웃음짓게 하는 글이더군요.
 
내 생명 앗아가주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
앙헬레스 마스트레타 지음, 강성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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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만큼 서로 비슷하고 복잡한 건 별로 없으리. 숱하게 싸우고, 암살하고, 인민들을 학살하고, 쿠데타 벌어지고 등등. 하긴 라틴 아메리카에 국한할 것 없이 20세기 들어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진 공통적 정치 현상이다. 유럽의 영향을 받아 조금 일찍 깬 라틴 아메리카에 이어 한국, 필리핀 등 신생국들, 그리고 중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대가리 터지게 쌈박질하고 죽이다가 드디어 권력을 잡은 인간들이 댓가로 조금 편하게 사는 건 크게 인심 써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고래 싸움에 동시다발적으로 굶어 죽고, 학살당하고, 태 묻은 고향을 등지고 할 수밖에 없던 인민들은 어쩌냐고. 책을 읽으며 나라는 다르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와 권력 투쟁을 다룬 많은 작품들,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 요사의 <염소의 축제>, 아옌데의 <영혼의 집> 같은 것이 떠올랐고, 심지어 멕시코 북부 농민 학살을 연상시키는 대목에선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 까지 같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참 태생이 중요하다. 인간 사이에 차별은 절대 있어서 아니된다고, 태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콩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소년병사로 태어나는 거 보다 노르웨이 중산층에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이 책의 무대인 멕시코라도 열다섯 살에 장군의 아내가 되는 것이 아이 아홉을 낳았지만 낼 모레 정부군 또는 혁명군의 총알이 왼쪽 허파를 관통할 예정인 여인보다 훨씬 더 좋은 거 같은데? 평등? 여보, 세상에 평등이 어딨어.

 책을 읽고 생전 안 하는 버릇이 책의 뒤편에 있는 역자 서평 읽는 거. 어떻게 시간이 좀 남아서 이 책에 달린 역자 서평은 읽었다. 다분히 통속소설 같은데 좋은 평을 받아 여기저기서 상을 받고 베스트 셀러의 계관까지 썼다는 취지. 그건 역자의 평이고, 이게 어디 통속 또는 대중소설이야. 그리고 통속 또는 대중 소설이 뭐 어때서. 순소설과 대중소설을 가르는 경계를 당신이 알아? 순소설이건 대중소설이건 읽어서 나 좋으면 그만이다. 칼라스가 좋을 때도 있고 이미자가 좋을 때가 있는 거 같이.

 그렇다. 열다섯 살 먹은 애가 자기보다 나이가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중년의 사내를 끔찍하게는 아니고 그냥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서 따라가 딱지를 뗏다. 여자에 관해 워낙 내공이 깊은 사내라 딱지를 떼도 아프진 않았는데 정말 뭔지는 모르지만 좋을 거 같기도 하다가 말았다.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거 같았다가 만 느낌'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궁금해 견디지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점쟁이 집시 여인. 열다섯 살 카탈리나가 집시 여인에게 궁금증을 털어 놓고 어떻게 하면 '느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한다. 점쟁이 집시 여인이 카탈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후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옷을 훌렁 벗어버린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이 비슷하게 말한다.

 "여자는 다리 사이에 초인종이 달려 있어요, 아가씨. 사랑을 나눌 때는 머리도 없고, 팔 다리도 없고, 내 온 몸 다 없다고 치고 오직 그 초인종 하나에 집중해야 한답니다. 어떻게 하면 초인종을 잘 누를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세요. 그럼 느낌이 올거랍니다."

 이 말을 듣고 긴가민가 하는 카탈리나. 집시 점쟁이가 어쨌든 도움의 말을 해주었으니 댓가로 돈을 내밀었다. 집시 여인이 다시 이야기한다.

 "필요 없어요. 받을 수 없답니다. 난 거짓말을 해준 댓가로 돈을 받는 여자랍니다.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얘기하고는 절대 받을 수 없어요."

 이쯤되면 이거 철학책 아냐?

 그리하여 열다섯 살, 우리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의 카탈리나는 삼십대 후반의 장군 안드레스 아센시오한테 시집가고 그 후 과부가 되기까지의 인생을 쓴 소설.

 그럼 남편 안드레스 아센시오가 어떤 작자일까?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다. 어떠한 것일지라도, 선한 목적이 아니라 악마나 상상할 수 있는 목적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살인, 협박, 사기, 도둑질 등 방법의 회피를 절대 하지 않는 인물. 젊은 아내와 눈이 맞은 것처럼 보이는 청년을 가비얍게 죽여버릴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공장을 얻으려면 걸리적거리는 공장주에게 너 죽을래? 아니, 아니,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죽겠느냐고, 라면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협박할 수 있는 작자. 이런 인간하고 같이 살면서 두 아이를 생산했으나 전처들 소생으로 다섯 명이 더 들어오고, 걔네들 말고도 멕시코 방방곡곡 각처에 현지처와 사생아들이 부지기수로 있어서 소생을 다 합하면 수십명의 '법적인 어머니 예정자'. 카탈리나는 남편 안드레스와는 달리 정상적인 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건 당연한데, 멕시코 현대사의 급변하는 순간순간이 여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재미있는 책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인의 시각으로 본 격변기에 대한 묘사 측면에선 아옌데의 연작들에 (전혀)미치지 못하고, 독재자 혹은 독재의 언저리의 권력자에 의하여 저질러진 야만에 관해선 요사의 작품들에 (절대로)미치지 못한다.

 근데, 제목 <내 생명 앗아가주오>가 뭐게?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질문.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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