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암살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0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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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책, 많이 읽었다. 내 사전에 전권구입이란 건 없다. 그러니 전부 한 권 한 권 골라 사서 읽었다. 그러나 앞으로 두어달 동안 민음사 세계문학은 목록에 올라오지 않는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참 기념할 만한 세계문학전집이고 다양한 작품을 새로 소개하는 것 등 칭찬할 만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와 비교해 책을 너무 함부로 찍어내는 거 같다. 내가 읽는 세계문학 시리즈로 말씀드리자면,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열린책들, 문학동네, 펭귄클래식코리아, 을유문화사, 창비, 시공사, 동서문화사 등인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다른 출판사는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탁월하게 앞서나가는 것이 오탈자 발생률이다(열린책들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시공사 <밤은 부드러워>를 빼면). 다른 출판사는 도무지 민음사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다. 물론 오역 여부에 관해선 내가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서 함구. 타사의 책은 특정 상품 한 두 권이 대단할, 기가 막힐, 껌벅 넘어갈, 무척 열받을 정도의 형편없는 오탈자 내지는 비문의 향연으로 일관하는데 반하여, 민음사는 아주 균일한 수준으로 책마다 오탈자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독자로 하여금 적어도 각오하고 책을 읽게 만드는 어여쁜 센스는 있다.

 이 책? 역자 차은정. 본고사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당시 본고사 영어 시험에서 빠지지 않고 한 문제는 나왔던 것이, "다음 문장을 우리 말로 바꾸시오". 차은정의 번역이 딱 이 문제의 답안같다. 영어를 정확한 한국말로 그대로 옮기는데 완전 성공한 듯한 문장들. 이 대목에서 "완전 성공한 듯"이라고 표현한 건 정말로 성공했는지 아닌지 내가 원본과 대조해 읽어보지도 않았고, 대조해 읽어봤자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수준이란 걸 다행스럽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 (정답지 말고) 본고사 답안지 같은 문장. 거기다가 하나를 더 보태서, 차은정이 국어를 쓸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더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데 술술 나오는 국어 단어의 갯수에 문제가 있으니 적절하지 않은 단어도 막 집어 넣는다. 근데 자신은 문제의 단어가 틀리는 줄 모르니까 자체 퇴고과정은 무사 통과. 거기다가 낮은 급여로 인해 열의도 없는 데다가 불평불만이 꽉 차 있는 교정자의 국어 실력도 거기서 거기에다, 소프트웨어 아래한글의 검색과정에서도 하여간 단어는 틀린 말이 아니니 문맥상 쓰면 안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사통과. 역자-교정자-소프트웨어, 기가막힌 트라이앵글. 삼각형이라고 다 변증법인줄 아시나? 천만의 말씀.

 거기다가 하나만 더 보태면, 자신 없으면 제발 사전 좀 찾아보고 한자를 보태라는 것. 내가 변태라서 이 단어를 고른 건 아니고 지금 딱 생각나는 게 이거라서 첨언하는 것인데 (당신들도 나이 먹어봐라, 한 단어 떠올리는데 삼박 사일 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나마 고른 것도 다행이다) 남자 또는 여자, 그중에서 특히 여자의 다리 사이에 있는 기관을 일컫는 말 '음부'를 굳이 '음부(淫部)' 이렇게 써놓는 거. '음부(淫部)'라는 단어, 난 첨봤다. 인간의 다리 사이가 생전 햇빛을 볼 일이 없어서 그늘 진 부분, 어두운 부분이란 뜻으로 음부陰部라고 쓴다고 배웠고 그게 맞다. '음부(淫部)'라고 쓰는 여자는 진짜 무식한 경우고, 그렇게 쓰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는 여혐자다. '음부(淫部)'는 남녀의 성기, 특히 여성의 성기를 '음란한 기관'으로만 특정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쯤에서 분명하게 얘기하고 넘어가자. 난 지금 역자 차은정의 영어실력에 관해 까탈을 잡아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그가 번역한 기막히게 재미난 텍스트 <눈먼 암살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데 번역의 영향으로 줄거리가 이상하게 뒤틀린다거나, 아까 한 얘기가 이상하게 꼬여 흐르거나 그런 점은 없다. 난 이이가 번역한 <눈먼...>을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고 작정을 해서 찾아봤더니 차은정의 번역이 제일 많다. 아, 고민 중. 왜냐하면, 한국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여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 이런 책들이 거의 그렇듯 앞쪽에서 가독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다가 독자도 모르게 의례 그러려니 읽어나가게 되고 그러면 그냥 툴툴거리면서 끝까지 다 읽는다. 가끔 욕도 한 마디씩 하는 건 당연하지만.

 서두가 오지게 길었는데 이제 책 얘기하자.

 무조건 강추. 진짜 재미난 책. 2017년 6월에 재미난 책 참 많이 읽는다. 여태까지 써놓은 역자의 문제 때문에 별 다섯개 만점을 줄 수는 없지만 소설책 읽기 좋아하시는 분들한테는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1910년대 후반에 태어나 책의 현재시점인 1990년대 말까지 생존해 있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할매가 주인공이다. 소설은 좀 복잡한 구조를 띤다.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 1945년 8월에 교량 공사중이던 낭떠러지 아래로 자기 것도 아닌 언니 차를 과속, 전속력으로 몰아 추락해 온몸이 불에 타 죽는다. 델마와 루이스? 아니, '로라'라니까. '로라'하면 떠오르는 것이? 옙. <인형의 집>. 굳이 그 로라와 비슷한 점을 꼽으라면 자신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거. 근데 이 로라는 여성의 권리나 자존 대신 인생을 통째로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거. 오직 하나, 캐나다를 비롯해 영어권의 독자와 비평계에 큰 발자국을 남긴 <눈먼 암살자>라는 책을 한 권 사후 출판으로 남기고 죽었다는 거. 로라가 죽은지 5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 또는 팬들은 끊임없이 로라의 무덤까지 찾아와 그녀를 기념하며 헌화한다.

 꼬부랑 노파이자 로라의 친언니 아이리스는 지팡이를 짚어가며 간혹 로라를 비롯한 가족묘를 찾아 돌보기도 하는데 비록 50년 전에 죽었다 하더라도 자매간의 오묘한 질투심으로 헌화한 꽃을 사납게 쓰레기통에 던져넣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쓸쓸하게 로라의 묘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그림이 그려질 듯.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리스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싸구려 볼펜 하나로 시간날 때마다 낡은 노트에 손수 써내려간 회상록. 그걸 읽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건데, 속에 로라의 작품 <눈먼 암살자>의 여러 부분이 섞여가며 중의적 작품이 되며 독자로 하여금 책의 결론이 어떻게 날까,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 수작. 조금 건방지게 말하면 독서훈련이 좀 된 독자들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2권 중반쯤엔 노파의 글쓰기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리라 짐작하는데, 그래도 끝까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추측한 책의 결말이 정말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거, 진짜 책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랩에 빠지지 않고 결말을 추리했는데 그게 정말로 맞으면 그 짜리리한 쾌감. 한 번 느껴보시라. 그건 좋은데 정작 트랩에 갇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진짜다. 읽어보시라).

 "Trapped? Mastur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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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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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돌리노, 사람 이름이다. 예전에 어떤 짓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선 한 성인聖人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 소설의 눈부신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근데, 이름이 하필이면 '바우'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경우 이 인간을 생각할 때 기운찬 돌대가리 천하장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일단 언어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어느 종족 속에서도 한두 달만 같이 지내면 마치 모국어인 양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하고, 예상 외로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 가운데 한 명이며, 무엇보다 여태까지 내가 읽은 모든 책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짓말장이다. 난 선의의 거짓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더러운 거짓말'이라고 알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대단하지? 평생 품고 있던 신념을 바꾸게 만든 책이라니. 원래 그런겨. 책의 힘이란 것이. 하긴 여태 살아온 걸 뒤돌아보면 사소한 거짓말도 하기 싫어 솔직하게 얘기해 얻어 터진 경우가 부지기수이긴 하다.

 두 권 850여 쪽의 장편소설. 근데 읽다보면, 나처럼 저녁때 술만 마시지 않으면 이틀이면 독파할 수 있다. 난 나흘 걸렸다. 그놈의 술 때문에. 아직 본격적인 여름도 안 됐는데 어이하여 벌써부터 개고기 전골이 그리도 맛나단 말인가.

 바우돌리노로 말할 거 같으면 장화 닮은 이탈리아 반도 저 위쪽으로 알프스 가까이 있는 노바라(이 도시 이름은 아직도 '노바라'다) 부근에서 나고 자랐다. 깡촌 시골구석에서도 바우는 천부적인 재능인 언어에 눈을 떠 라틴어, 독일어 등을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면서 읽고 쓸 줄 알았다. 이거 대단한 거. 무대가 12세기 말 13세기 초. 당시에도 물론 종이가 있었으나 워낙 비싸 양피지를 사용했으며 거기다가 고려에서 세계최초로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를 이용해 찍어내기 전이어서 누군가가 깃펜에 잉크를 묻혀 필사를 했던 걸 읽어볼 수 있었다는 건데 노바라, 아직까지도 시골구석인 그 동네 사는 평민의 아들이 글을 익혔다는 거, 기적 비슷한 일이었다.

 근데 참, 인간이란. 글을 익혀 읽고 쓰기 시작하자 인간본성 가운데 하나인 '구라 만들기'를 시작한다. 이 작업은 모든 인간들이 할 수 있으나 수다한 사람은 관심이 없거나 시도하지 않는 반면, 오직 유전자 사슬에 거짓말을 만들어내는데 흥미가 있어서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라도 거짓말을 진짜처럼 꾸며내는 종족들이 간혹 나타나 죽기살기로 마치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참경에 이른다. 이런 인간들의 가장 앞쪽에서 광배를 두르고 우뚝 선 자, 바우돌리노.

 인류 역사를 보면 힘 있는 자의 집에 객식구로 얹혀살며 뻔한 거짓말을 함부로 노래로 지어 부르다 혀가 잘리고 눈이 뽑힌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가 다 거짓말인줄 아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애먼 PC 자판만 열라 두르리고 있는 청춘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말이지. 이거 누가 시켜서 하는 짓이 아니다. 다 그 염병할 유전자사슬 DNA라고 불리는 두 줄의 나선 구조에 의해 결정될 뿐. 유명한 두 줄의 나선구조가 명령하는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는 걸 우리는 뭐라 불러? 예, 맞습니다. 본능이라고 한답니다. 유전자를 배열하는 레시피에 의한 것.

 그리하여 바우돌리노 역시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짓말을 지어내는데, 문제는 바우의 거짓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아니, 모든 경우가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하...... 아 참, 뭐라 써야 해, "작용한다"라고 쓸까? 아니면 "작용하지 않는다"라고 쓸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바우 스스로가 자신이 만든 구라를 진실로 인식한다는 점. 평생 충성을 다하고 의부로 모신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를 만나게 된 것 역시 노바라 근방의 한 숲에서 황제를 몰라보고 구라를 친 덕분이다. 이렇게 거짓말의 위대함을 차츰 알아가는 바우돌리노. 그의 좌충우돌 모험담. 파란만장하고 파노라마스러운 환상적 모험. 그 속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지는 바우의 찬란한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또 거짓말. 동시에 진실이며 어느 것보다도 더 진실이며,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진실이자 진리. 진리를 찾아 떠나는 모험.

 여기까지.

 책 내용에 관해선 한 마디도 안 했지? 그럼 성공했네.

 의심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셔. 재미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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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0
빅토르 펠레빈 지음, 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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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술주정뱅이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모스크바 모처에 주둔하던 군대의 탱크 꼭대기에 올라가 극보수에 의하여 저질러진 쿠데타를 저지하자고 호소하던 한국방송공사의 화면을. 이 책은 그 언저리 몇년 모스크바를 무대로 했다. 또 한 장면. 알량한 음식물을 구매하기 위해 하루 온종일 1 킬로미터가 넘는 줄을 서야했던 당시 모스크바 시민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지은 높은 건물의 처마에선 몇 미터에 달하는 고드름이 떨어져 보도를 걸어가는 시민의 어깨를 관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던, 한 때는 위대했고 얼마쯤 더 지나면 다시 위대해질 예정이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못한 모스크바의 우울한 초상.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처마 밑의 고드름이 다 녹아버리듯 모스크바 곳곳에 우뚝 서있는 자동판매기에 동전만 집어넣으면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펩시콜라가 기계 밑에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혀있는 배출구로 떨어지는 자본주의가 동토로 비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중심지에도 푸른 싹을 돋아내기 시작했다. 펩시콜라.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하게 주웠다는 핑계, 사실은 으슥한 골목길을 홀로 걷던 아가씨의 핸드백을 날치기해 돈이 생기거나, 양철 깡통 속에 담겨있던 부모님의 손때묻은 동전을 얘기하지도 않고 그냥 들고 나왔거나, 아니면 이蝨같이 쓸모없이 늙어버린 노파의 이마빡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고 침대밑 낡디 낡은 가죽 가방에서 훔쳤거나, 어쨌든지 돈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렇지도 않게 펩시콜라를 마실 수 있었던 세대. 대마초, 헤로인 또는 코카인을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인간들이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며 더러운 욕설, 피즈테츠, 라 하던 세대. 이들을 작가 팔라빈은 'P세대'라고 불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변혁기엔 언제나 그랬듯이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권력에 기댔거나, 권력에 기대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하여간 졸지에 큰 부자가 된 인간들이 속출하듯, 마야콥스키와 파스테르나크의 시 역시 재빨리 자본주의의 찬란한 시, 광고 카피로 변신하던 시기. 시대를 살아보니 세기말의 러시아를 주물딱거리던 모든 일 또는 음모 역시 광고 카피 안에 이미 다 들어있었다는 놀라운 발견.

 그.러.나.

 이리 훌륭한 텍스트, 이색적이고 말 그대로 시대가 뒤집어지는 변혁기 모습을 왜 나는 그리도 힘들게 읽었을까. 정작 내가 집요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은 작가 팔라빈이 이 책을 바치는 헌사.

 "중산층의 영전에 바친다."

 러시아의 중산층은 자본주의의 범위없는boundaryless 침공, 가치의 혼돈, 나름대로 이어지던 질서의 붕괴 등으로 인해 이미 다 죽었다는 얘기. 그들의 묘비 앞에 <P세대>를 올려 놓은 것.

 헌사가 써 있는 페이지에서 한 장을 넘기면 캐나다의 저음 가수 레너드 코언이 노래한 'Democracy'의 가사가 다섯 줄 나온다.

 "당신도 알잖아요, 난 감상적이예요.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이런 광경은 견딜 수 없군요.

 난 좌도 우도 아니예요.

 오늘 밤은 그냥 집에서,

 저 희망 없는 작은 화면 속에서 길을 잃겠어요."

 직접 한 번 들어보실려? 난 코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노래는 음악적으로도 '완전 불감응'의 대표적 노트인데 가사 하나 때문에 인용한 거 같다. 하여간 즐감하시라.

 

 

https://youtu.be/vHI9BTpGk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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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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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요소와 사회적 여러 문제, 개인의 자존감에 관한 굵직한 주제를 품고 있지만 읽기엔 좀 불편한 책. 신뢰할 만한 부커 상을 수상한 작품. 내가 읽기에 불편하다는 것일 뿐 사소하고 얇은 이 독후감만 읽고 일독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람.

 1994년 4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함으로써 아라파트헤이트를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흘려보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지만 여전히 국부國富의 대부분은 네덜란드나 영국계 백인이 틀어쥐고 있던 상황. 이름하여 아프리카너. 정서상 유럽과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던/있는 이들은 정치적 측면 말고는 각계 각층의 최고 지도부를 몽땅 점령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인물, 데이비드 루리. 쉰 두 살. 매주 화요일 오후 아주 괜찮은 여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섹스를 사는 것으로 적절하게 삶이란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공급하던 잘 생긴 외모의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어느 날 퇴근하다가 평소에 잘 다니지 않았던 길로 접어든 그는(문제는 언제나 하던대로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외면한 이 지성인이) 앞에서 마치 열두 살 먹은 계집아이의 것같은 엉덩이를 옴찔옴찔 움직이며 가고 있던 같은 과 학생 멜라니를 만나 점심 한 그릇 사주고, 어때 집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실까? 뻔한 수작 끝에, 안돼요, 안돼요를 립 서비스로 생각하면서 약간, 정말 약간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고, 독자, 그중에서도 남자 독자의 입장에선 바람직하진 않지만 적어도 강제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방법, 즉 적극적으로 합의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다 모든 일에 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란 측면으로 관찰할 때는 그나마 불법적이지 않았다는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방법으로, 한 번 했다. 그때 딱 한 번으로 그쳐야 했으나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 본래부터 아니라서 몇번에 걸쳐 관계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다. 아시는 분은 아실겨.

 다 커서 이미 성인이 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본인 책임 아래 있지만 이제 그놈의 우라질 법적 성인의 테두리에 갓 전입한 여성이 쉰 두 살의 교수와 관계 했다는 건 사실 아름답지는 않을 텐데, 내 생각에 더 큰 문제는 교수가 댓가로 출석과 성적에 관해 부당하게 높은 평가를 했다는 거. 거기다가 멜라니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골치 아프게 남친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학생도 아닌 것이 자기 수업에 들어와 깽판 비슷하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 그 후 멜라니 본인의 의지라고는 전혀 읽히지 않지만(아무리 법적 성인이라도 아직도 열 두 살짜리 계집아이의 엉덩이를 갖고 있는 풋내나는 아가씨란 점을 감안하면 분명히 아니겠지만) 어쨌든 주위의 충동에 의해 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인지 하여간에 멜라니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를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또는 성폭행으로 학교 윤리위원회에 제소해버렸다.

 데이비드 루리. 끝났다.

 무대가 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이 사라지자 그간 백인의 억압에 의하여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사회질서가 한 방에 무너져버려, 그동안의 질서 속에서 살던 백인의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무법천지로 돌변했다고 여기는 반면, 흑인의 입장에선 비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범죄가 만연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속박하던 규정에서 벗어나 역사상 최초의 자유를 즐기고 있었던 거다. 아울러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서의 사고방식, 행동규범이랄까 행동양식이랄까를 포함한 생존을 위한 거의 모든 사고방식 역시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던 시점. 데이비드는 심신의 안돈을 위하여 시골에 정착해 사는 딸 루시의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긴다.

 남아프리카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땅에 맨발을 딛고 살고 싶어하는 루시. 그녀가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아프리카의 새로운 파도 또는 충격이 무엇이고, 그걸 극복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곳곳에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지뢰가 묻힌 땅. 반드시 지뢰지역을 맨발로 건너야하는 숙명. 그게 데이비드와 루시 부녀가 걸어야할 길이라고? 당신과 내가 걸어야할 길이기도 하다. 정신차려! 까딱하다간 끝장이야. 물론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별 소용이 없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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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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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파묵의 책은 나로 하여금('하여금'이 조사인지 부사인지 끝내 떠오르지 않아 결국 사전 찾아봤다. 부사란다. 그럼 떼어 써야지) 망설임 없이 고르게 만든다. 그렇다고 책방에서 '오르한 파묵'을 검색해 아득바득 찾아 읽는 수준은 아니고 이리저리 서핑하다가 눈에 띄면 아무 생각없이 장바구니에 넣는다는 말씀. 지난 1월 책 살 때 세 편의 파묵을 구입했던 것. 그 가운데 마지막 책이 오늘 독후감 쓰는 <새로운 인생>. 역시 이난아의 번역. 이 정도의 오탈자면 그냥 불평하지 않고 읽어준다. 근데 <고요한 집>에선 왜 그랬어!

 <검은 책>과 <내 이름은 빨강> 사이에 썼다는데, <검은 책>은 다음 분기에나 읽을 예정이라서 모르겠고, 하여튼 흥미로운 작품이다. 바로 뒷작품 <내 이름...>하고도 완전히 다른 감각.

 대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읽는 책은 그전과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열아홉 살 시절에 소위 "금서"란 딱지, 그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는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또 뭐가 있더라, 아 그새 다 잊었네, 까치, 돌베개, 한길사 등에서 찍은 책들. 거기다 며칠 전 얘기했던 <농무> <한국의 아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시집(전부 다 '창작과비평'에서 나온 거다. 당시 창비란, 백낙청이란 참!). 주관식 세대이긴 했지만 정규교육에선 전혀 생각도 못했던 글편들을 읽고는, 이전 12년의 교과과정이 관념을 얼마나 한정시켰는지 단박에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과거엔 틀림없이 모범생이었던 몇몇 동무들은 자신의 앞날을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실천적 운동으로 투신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중엔 피라미드 회사의 더블 다이아몬드가 돼 만날 골프만 치러 다니기도 하고, 실업자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아직 국회의원 후보 공천 한 번도 못받은 인간도 되고, 대학에서 선생도 하고, 대기업 임원도 되고, 회사 다니다 하나도 명예스럽지 못한 명예퇴직도 하고, 닭도 튀기면서 나하고 별로 다른 인생을 살지 않지만 하여간 그런 동무들은 한 시절, 자신의 인생에 말 그대로 완전한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대부분 첫 출발은 책 한 권으로 시작했던 거다. 비록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자신의 인생까진 바꾸지 않았던 평범한 모든 나에게도 책들이 던져 주었던 충격은 가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쉽게 말하여 여태까지 감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눈이 떠지는 느낌.

 <새로운 인생>에 바로 그런 한 권의 책. 여태까지 잘 먹고 살던 인생을 한 방에 걷어차고 새로운 인생을 만들게 하는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이들. 그 젊은이들이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지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기억하시지?)메타포, 아주 큰 메타포를 이용해 그려나가고 있다. 우연히 아름다운 여학생(문학의 유구한 헛점. 여주인공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체로 예쁘고 똑똑해야 한다는 조건을 파묵 역시 따르고 있는 거디다) '자난'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 오스만.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여대생들이 그랬듯 책 몇 권을 가슴에 끼고 다니던 자난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빼 마시기 위해 책을 테이블에 놓게 되는데 순간 오스만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날 오후 학교 옆의 중고책 노점상에서 같은 책을 사 읽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을 읽은 다음 눈알에 뺑그르르 돌아버린 오스만. 그는 길고 긴 버스 여행을 떠난다. 무대가 몇년대더라? 지금 당장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여간 제대로 질서 혹은 현대화가 되지 않았던 터키 전역을 밤새고, 밤새며 또 밤새워 달린다. 이때쯤 소설은 터키판 로드 무비도 전환. 근데 아무리 옛날이라도 참 교통사고 많이 난다. 교통사고. 오스만, 참으로 신기하지, 자신은 언제나 별로 다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조하기도 하다가, 구조하면서 이미 죽은 어떤 사내의 품 속에서 두툼한 지갑을 빼내 돈을 쓰며 또다시 로드 무비를 이어가며(물론 안 그랬다간 소설이 단박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사고가 날 때마다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데,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여자 주인공 자난의 이야기? 안 하겠음.

 세상, 별 거 없다.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탈출기는 주인공이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오는 회귀의 순간 끝난다. 아니면 회귀 후의 회고와 에필로그로 끝나던지. 영화 <빠삐용> 보셨잖아.

 파묵의 모국이며 이 책의 무대가 되는 터키. 이슬람 국가라서 색다른 종교적 외피는 서비스로 책 전체에 깔려있는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도 혹시 이슬람 적 문제제기 아녔어? 읽어보시고 판단하는데 언제나처럼 당신이 내릴 판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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