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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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러스데어 그레이, 이이가 누군가? 20세기의 이름난 작품 <라나크>를 쓴 바로 그이다. 적지 않은 독자가 이이의 이름과 명작 <라나크>가 귀에 선 것은, 작가와 작품이 다분히 장르문학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8년여 전 <라나크>를 읽었는데, 읽은 당시엔 마음에 콕 박혀 있었지만 내용 거의 대부분은 휘발되어 버리고 그때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감상만 남았다. 당시 적지 않은 문제작을 골라 출간하지만 현금의 흐름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싹 폐간을 시키고는 했던 [뿔>에서 책이 나온 것부터 불운했다. 게다가 네 권짜리 길고 긴 분량도 독자에게 쉽지 않은 허들이기도 했을 터이고.

  난데없이 앨러스데어 그레이를 읽은 계기는 최근에 읽은 앨리 스미스의 <아트풀> 속에서 스미스가 같은 스코틀랜드 작가 그레이를 거론하길래, 그렇지, 그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면서 냅다 검색을 해봤더니 <라나크> 말고 딱 한 권이 시장에 나왔으며, 더 기분 좋은 것이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도 있더라는 거였다. 그걸 어떻게 참나 그래. 후딱 집어와 읽을 수밖에. 이런 기분 다들 아시지?


  작품의 내력을 한 번 보자.

  엘스퍼스 킹이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글래스고 지역역사박물관 피플스팰리스에 그녀의 팀원으로 열성적인 직원 마이클 도널리라고 있었다. 1990년 어느 하루, 도널리가 글래스고 거리를 걷다가 쓰레기 처리를 당하기 위해 대기중이던 구식 문서 보관함을 발견했고, 언제나 구식 문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법이라, 이 속에서 커다란 문서 다발을 찾았다. 그렇지만 문서 일체가 변호사 사무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널리는 변호사를 만나 문서의 개봉을 요청하나, 변호사는 변호사의 의무조항을 거론하며, 의뢰인이 요구한 조건, 1974년 이후에 자기 후손들만 열람하라는 내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손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절대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소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고하기를 만일 피플스팰리스 직원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문서 일부를 가져가든지 하다못해 읽어보기만 해도 절도죄로 고소할 것이니 애초 마음을 먹지 말란다. 여기서 포기하면 소설이 안 되는 법. 도널리는 과감하게 가장 중요한 서류 일부를 주머니 속에 꿍친다.

  서류는 20세기 초반 연도의 편지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여의사 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쓴 편지와 그녀의 문서. 문서는 여사의 남편인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쓴 일종의 소설책 한 권이다. 빅토리아 맥켄들리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가 수년간 운영했던 빈민 계급 여성을 위한 산과와 소아과 중심의 의료재단을 지을 수 있게 자신의 전재산을 물려준 고드윈 벡스터 씨 덕에 갑자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 의사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자기한테 있는 줄도 몰랐던 글 나부랑이를 쓰는 잔재주로 소일하더니 아내, 즉 자신을 포함한 주변사람들을 심하게 왜곡할 뿐인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맨켄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잘나가는 스코틀랜드 화가한테 삽화까지 의뢰해 딱 한 권을 만들었다는 거다.

  아치볼드가 빅토리아의 두번째 남편인 건 맞다. 첫 남편 오브리 다 라 폴 블레싱턴 대장이자 준남작이 자기 머리통에 권총을 쏘아 죽은 후에 전남편의 거대한 재산을 갖고 아치볼드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연모하지만 스스로는 위대한 의사 아버지 콜린 벡스터 경에게 유전으로 물려받은 매독이 깊어 청혼은커녕 피부 접촉마저 사양하는 특출한 의사, 고드윈 벡스터의 집에서 살기는 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오해도 좀 받기도 했지만 그게 뭐?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 아냐? 하여간 빅토리아가 벡스터의 집에서 특출한 의사 벡스터가 보기엔 ‘그저 그런 외과의 아치볼드’라면 까다로운 전남편하고 살면서 겪은 온갖 치사한 광경은 안 보겠거니 하고 혼인한 바 있다. 남편상喪과 재혼 사이에 물론 사기꾼 변호사이자 재주 없는 도박꾼인 던컨 웨더본과 불장난 깨나 해본 바 있기는 하지만.

  이런 내용의 편지와 소설을 손에 넣은 지역역사박물관의 학예사 마이클 도널리는 고민 끝에 문서를 가지고 당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필력이 높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고, 잠깐 박물관에서 일을 하기도 한 작가 앨리스데어 그레이에게 원고 검토를 부탁한다. 흥미를 느낀 그레이는, 편지와 원고를 훑어보더니, 원고가 인쇄되어 마땅한 걸작이라는 도널리의 견해에 적극 동의하면서, 자신이 편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맥켄들리스의 원본을 가능한 한 그대로 현대어, 현대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완수한다. 결과, 책은 ①앨리스데어 그레이가 쓴 서문, ②아치볼드 맥켄들리스의 소설, ③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손주 또는 증손주에게 보내는 편지, ④다시 편집자 그레이가 붙인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클 도널리와 작가 그레이가 ‘걸작’이라고 동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치볼드가 쓴 소설에서 평범하게 키가 큰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불쑥 솟은 정도의 신장과 보통 사람 세 명을 합한 정도의 덩치와, 거의 정육면체 형태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메스와 봉합침을 섬세하게 다루는 천재적 외과의 고드윈 벡스터의 생명 이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아치볼드의 소설에 의하면, 서로 호감을 나누어 친해진 후 처음 고드윈의 집에 가서 기함을 하게 놀랐던 것은, 두 마리의 토끼 몹시와 플롭시를 보았을 때였다. 몹시는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검정색, 플롭시는 거꾸로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순백색. 흑백의 털이 경계를 지은곳을 유심이 보니까, 섬세한 줄이 그어 있다. 몹시는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덜 발달한 거 같고, 플롭시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좀 빈약하다. 척 보면 알지. 두 마리를 반으로 잘라 교체해 붙인 거다. 이쯤 되면 뭘 생각할 수 있지? 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는 아치볼드 맥켄들리스보다 90년 전에 태어난 메리 셀리의 역작 <프랑켄슈타인>. 한 세기 가깝게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창조물은 그때보다 월등하게 진화했어야지.

  1881년 2월에 글래스고를 흐르는 클라이드 강에서 임신 9개월에 가까운 임산부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경찰 공의인 고드윈 벡스터가 검시해 익사한 25세가량, 신장 177cm가량, 암갈색 곱슬머리 등으로 판결하고 시신 공시를 하지만 연고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뜸들이지 않고 그냥 말해버리면, 시신을 시체공시소에서 일주일간 연고자를 기다리다가 파묻어야 하는데 고드윈이 슬쩍 시신을 빼돌려 파크 서비스 18번지, 자신의 저택 지하실로 옮긴다. 일단 배를 갈라 9개월에 육박하는 이미 죽은 아이를 꺼내고, 모녀의 두피를 절개한 후 작고 예리한 칼로 두개골을 절단한 다음, 태아의 뇌를 적출해 이미 비워놓은 어미의 머리 속으로 옮겨 각종 신경을 섬세하게 연결하고, 찌리릭,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러했듯이 시신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든, 생명의 묘약을 먹였든, 마법의 플루가루를 뿌렸든 간에 한 생명을 다시 만들어 냈고, 정신연령 0세, 육체연령 25세의 벨라라고 이름짓는다. 벨라 벡스터의 탄생. 이러면 한 서른 살 먹은 고드윈 벡스터가 ‘오빠’는 아니지? 차라리 ‘아빠’가 맞는 거지?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거구와 놀라운 완력과 낯가림을 심하게 타고 내성적인 고드윈 벡스터는 벨라 벡스터를 열라 사랑만 할 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외로움이 깊어지면 손빨래만 겁나 해댄다. 세상에 둘도 없이 불쌍한 캐릭터.

  벨라 벡스터로 말하자면 뇌연령이 0세. 하지만 육신과 교통하지 못하면 뇌가 아니라서 다른 소아의 뇌보다 훨씬 빠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자제를 모르는 단계. 반면에 스물다섯 살이고 이미 자살하기 전에 전남편의 손길을 받은 육체, 뇌가 모르는 남자의 몸을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남자가 마음에 좀 들면 가리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고 싶어하는 단계. 어쩌겠어? 아빠 고드윈은 자기가 직접 가르치기는 뭐하니까 동료 의사로 하여금 완벽한 피임방법을 숙지하고 이행할 수 있게 조처해준다. 벨라 앞에 나타나 가장 먼저 청혼을 한 남자가 바로 아치볼드 맥켄들리스. 시골의 작은 지주가 심심풀이로 하녀와 장난쳐 만들어낸 사생아. 은행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엄마가 죽을 당시 아치볼드에게 침대 밑에 평생 모은 돈이 있으니 뭐가 될래? 하고 물었던 엄마. 의사나 되어보련다고 대답하니 피식 웃고 죽은 엄마. 아빠는 적어도 아치한테 모른 척하지는 않아 미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죽을 때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유산을 남겨 줬거든.

  하여간 아치볼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벨라, 고딕소설의 주인공답게 177cm 장신인 벨라는, 6주 후에 결혼하기로 해놓고 변호사 던컨 웨더본과 야반도주해 유럽 각지를 떠돌기도 하고, 웨더본의 재산이 거덜나 홀로 파리에 남아 유곽에서 몸을 팔기도 하고, 귀국해 결혼을 하려 하니, 성당에 쳐들어온 전남편 블레싱턴 장군이 자신과 벨라 벡스터라 불리는 여인, 빅토리아 블레싱턴 부인과의 혼인을 끝맺지 않은 상태이니 이 결혼을 무효라고 깽판을 치고….


  이런 소설을 (벨라)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눈뜨고 읽어주겠느냐고? 임신 9개월 상태에서 글래스고까지 와 물에 빠져 죽은 여자, 그걸 건져다가 시체공시소에 며칠 묵힌 다음 다시 살려낸 괴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게 한 번 책으로 찍히면 평생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 그것보다 더 열을 받는 건, 뭐라고, 내가 귀국할 뱃삯을 벌기 위해 프랑스에서 몇 개월간 매춘부 일을 했지만 홀라당 다 뜯겨 발간 빈 손이 되자 결국 파리에 사는, 아빠 고드윈의 친구한테 비루하게 돈을 빌어 돌아왔다고? 비겁한 아치볼드는 혹시 모르지, 원본을 수정해달라고 했던 것인지. 하여간 말도 안 되는 딱 한 권의 책을 확 불을 싸질러버릴까 싶다가, 그게 그것도 인간이라고 아치볼드가 세상에 나왔던 유일한 흔적이라서, 그냥 버리기는 뭐하니까, 1911년 이전에 쓴 소설 비슷한 잡문을 74년 이후에 자기 직계 손주나 증손주가 있다면 읽어보고 너네들 마음대로 하라고 유언을 한 거였다.

  작품을 쓴 아치볼드는 1911년에 죽고, 이들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와 셋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즉시 입대해 솜 전투에서 죽었고, 맏이는 글래스고에서 자동차 사고로 엄마보다 먼저 갔다. 그래 1946년 뇌나이 66세, 몸나이 92세에 숨을 거둔 빅토리아 멕켄들리스 박사가 자기의 편지와 서류를 받기 바라는 손주, 증손주는 자기 세 아들이 뿌린 법 외 자식이나, 법 외 자식의 자식들이었다는 아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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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0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4는 아깝다. 차마 5를 얹지 못해 4에서 멈춘다.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거트루드 스타인, 《세 명의 삶 / Q.E.D.》
화요일. 바버라 킹솔버, <포이즌우드 바이블>
목요일.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메마른 삶>
금요일. 장은진, 《가벼운 점심》
 
미래의 하양 걷는사람 시인선 101
안현미 지음 / 걷는사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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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보니 안현미의 시집을 세 권째 읽는다.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 이어 《미래의 하양》까지.

  드디어 안현미, 아현동에서 탈출했다. 뭐 탈출은 벌써 했겠지. 형제 같은 바퀴벌레 떼가 비키니 옷장 바닥을 점령한 채 그들과 한 방에 살았던 궁상스러운 시절에서. 순대국밥 먹으러 가면 주인 아줌마가 혼자 왔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고마웠던 외로운 시절에서. 세월이 가면 먹고 사는 건 좀 필 수 있어도 외로운 건 결코 좋아지지 않는 것인데 시인은 그것도 좀 나아졌을까? 《미래의 하양》 속에서 시인은 그동안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시 작업에 몰두하기도 작정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생각했던 것처럼 돌아가면 그건 세상 사는 일이 아니지. 시는 잘 써지지 않고, 실업급여를 받아도 밥상 위의 반찬은 여전하고, 한강 상류 북한강, 북한강 상류 동강, 동강 지류 주천강, 주천강 옆댕이에서 살며 탁구 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가계도


  아버지는 술을 물처럼 마시고

  어머니는 물을 술처럼 마셨다   (전문. P.51)



  이런 가계도의 핵심인 부모 모두 세상 하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엄헬레나 여사한테 헌정하는데, 혹시 몰라, 시인의 엄마 이름이 엄헬레나인지도. 왜냐고? 이런 시를 보아 그렇다는 거지 뭐.



  엄헬레나



  1 9 4 2 9 1 6 – 2 0 2 4 2 1 1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

  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

  의 딸 엄…헬레나…과부는 아니었

  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

  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

  치면…엄…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

  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

  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

  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

  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

  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

  엄…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

  니이껴… 어디 계시니이껴……   (전문. P.64)



  안현미가 강원도 태백 생이거든. 장성광업소가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에 있거든. 뭐 아닐 수도 있다. 생활력 강한 옆집 아줌마이거나 시인(또는 시인의 부모)와 막역한 사이라서 평소 이모라고 불렀던 사이일 수도 있지만 뭐 어쨌거나 엄마와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다. 이 시집에서 부모 말고 딱 한 명 더 출연하는 친척으로 고모도 있다. 서울 고척동에서 살아 ‘고척동 고모’라고 부르는데 정말 고모라서 안씨 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냥 ‘고모’라고 부르는 시인의 의지가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척동 고모


  그녀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고통은 공기와도 같았다 고통과 함께 밥 먹고 고통과 함께 잠들고 고통과 함께 출근했다 한 명의 남편과 네 명의 자식들마저 그녀를 떠났을 때도 고통만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파먹으며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했다 한번 물어봐요 일생 억척스럽게 살아남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는 말했다 일생 함께 울어 준 것도 웃어 준 것도 고통인데 이제는 피붙이 같다고 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성)은 두고 가도 고통만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 P.58)


  지금 호적 파는 데 맛들였냐고? 아니, 아니. 이 시집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안현미 만의 독특한 어법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침 시인의 친척, 그러니까 저 위에서 인용한 “가계도”의 일원인 고척동 고모가 눈에 띄어 가져왔다. 시에 관해서 쥐뿔도 아는 게 없는 번인이…, 본인이… 굳이 이 시 <고척동 고모>를 말할 것 같으면, 시 한 자락에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어 “고통”이 열두 번 출현한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도 반복해 등장한다. 이 시집에서 이렇게 같은 시어, 시 구절을 반복하는 것들이 세어보지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지하게 많다. 반복 ‘구절’이 이 시 <고척동 고모>에서는 리듬감 있게, 쉬운 말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횟수만큼 나와 읽는 맛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시 ‘단어’ 그러니까 시어 “고통”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열심히 쓰셨나 그래?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고통이 면역이 된다는 잘못된 지식 또는 진짜 육체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시인 작가들의 착각이다. 그래서 미국에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면도칼로 자기 팔뚝을 수시로 그어 고통을 감각하는 일종의 ‘고통 중독’ 현상을 겪어 웬만한 고통 정도는 느끼지도 않을 정도이지만, 그의 연인이었던 윌럼 라그나르손은 주드와 비슷한 자해를 했을 뿐인데도 무지하게,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말도 지껄이게 된다. 고통은 결코 면역되지 않는다. 생명유지를 위해 오히려 고통을 당할수록 더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면역이 가능했다면 인류학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방법의 고문을 창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민감함은 더욱 배가된다. 진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딴 글을 무책임하게 썼다는 걸 독자가 몰라 경탄을 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고척동 고모의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다양하게, 다양한 부위에서 겪었겠지만(겪고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태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았으니까 그렇게 고통과 나머지 삶도 함께 살다가 가겠다는 거야? 치사하게 “라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라떼, 이런 시는 철저하게 분쇄당했을 거다. 평생 노동자, 해고 노동자로 살았으면서 조금의 운동성도 발견할 수 없는 고모. 빼박 패배적인 관점의, 패배적인 관점일 뿐인 시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전에 읽은 안현미의 시집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서 이런 고척동 고모의 기색이 옅보였다고 하면 너무 오버인가? 아현동 사글세 방의 가족같던 바퀴벌레 시절의 지독한 궁상 말이지. 그때도 “나는 지금 이렇게 아파요, 배고파요, 외로워요.”라고 영탄만 했을 뿐, 이의 개선을 위한 운동성은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때는 이십대 시절. 이 시집 《… 하양》이 2024년 출간이니까 시인의 나이 52세. 그이 사이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꽃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딥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듯 밤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음 아닌 것도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 그건 뭐였을까요? 봄에는 직장을 잃고 가을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없는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건넙니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여 가끔 눈부셨던 그건 뭐였을까요?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진   (전문. P.19)


  여태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은 시인은 여전히 밤을 견디고 있다. 안현미의 밤은 위안과 쾌락과 치유와 쉼과 평온의 밤이 아니다. 공포와 유령과 범죄와 고독과 빈곤의 밤이다. 그걸 시인은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견딘단다. 아무리 궁상스럽던 세월이었더라도 살면서 찬란하고 눈부셨던 잠깐이 없었을 수 없겠지. 독자는 여기서 눈에 힘을 주어야 하리라. 어차피 안현미가 부호와 암호와 은유로 결판을 보는 시인은 아니니 아무리 시라도 앞뒤 문맥은 짚어 마땅하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래서 가끔 눈부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단다. 그러니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끔 눈부셨던 것.” 아오. 이건 스핑크스의 리들보다 더 풀기 어렵네 그려. 시는 별로 읽지 않는 독자인 내가 도무지 풀지 못했던 “가끔 눈부셨던 것”이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졌다네? 여기서 나는 의혹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건 시적 아름다움을 좇은 의미없는 수사일 뿐이라고.

  하여간 이제 50줄에 든 시인은 주천강변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 탁구도 쳐 가며.


  횡성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가을이 다 갔지만 어떤 날은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다 잠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나가 앉아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침부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자작나무 잎들이 춤을 추면 읍내에 나가 술을 받아 와 대낮부터 대취했고 고라니 울음소리에 깬 밤이면 지난날 용서 빌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오지 않는 엄마 오지 않는 아버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러 황성 갔다 지난날 빌지 못한 죄들과 오지 않는 것들이 매일 밤 별처럼 돋아나던   (전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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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 : 평균율 전집 1, 2권 BWV 846-893 [4CD] - [The Glenn Gould Collection Vol. 4]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굴드 (Glenn Gould) 연주 / SONY CLASSICAL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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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율 CD는 가지고 있지만 정작 별로/거의 듣지 않는 레퍼토리임에도, 아 씨, 굴드... 한 20여 년 잘 참았는데 기어이 사고 말았다. 피셔, 니콜라예바, 리히테르, 굴다... 여기에 또 굴드까지. 좋아, 좋아. 눈 침침해져 책 읽기 힘들면 음악이나 듣고 있지 뭐. 세월은 잘 간다, 야야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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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0-2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잘했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4-10-29 13:45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4-10-29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 침침해서 심란한데
음악 들으며 힐링 하겠습니다.
10월도 거의 다 가네요^^

Falstaff 2024-10-29 17:22   좋아요 1 | URL
옙. 심란할 때는 음악 좋지요. ㅎㅎㅎ 이제 정말로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 오는 11월입니다. 이름하야.... 만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10-31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렌 굴드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바하라 읽는게 맞는 발음이라면서요

Falstaff 2024-10-31 15:43   좋아요 1 | URL
역시 청년 굴드의 미친 지랄 <골트베르크 변주곡> 아니겠습니까. ㅎㅎㅎㅎ
 
마차오 사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4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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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냈다가 시리즈를 접는 바람에 세계문학전집 444, 445번으로 갈아탔다. 모던 클래식 시절엔 한소공 작 <마교사전>이었다. 당시 읽어볼까 망설였었다. 이제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온 걸로 보아 민음사가 이 작품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믿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재미있다.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 넓은 땅과 다양한 민족, 무시무시한 번식력을 지닌 나라. 이 가운데 저 동정호洞庭湖 남쪽, 즉 후난성湖南省 멱라강 인근 마차오(馬橋)라는 산골 벽촌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와 주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 즉 허구다.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한 의미에 천착하지만 픽션인 만큼 어느정도 작가가 왜곡한 것일 수도 있으며, 주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 그렇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구라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독법일 것이다.

  요새 내가 민음사를 영 같지 않게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

  마차오 마을에 관한 내력을 소개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건륭 58년, 마차오푸에 마싼바오라는 자가 한 친척 집 잔치에서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인간 어머니와 신견(神犬) 사이에서 태어난 진명천자(眞命天子)의 환생으로 연화태조 (蓮花太祖)인 자신은 연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중략) 1959년 음력 정월 18일, 진간총병 (鎭竿總兵) 안투(몽골인), 부장 이싸나(만주인)가 병사 800명을 두 길로 나누어 진압에 나섰다.” (p.29~30)


  건륭 58년이면 조선 정조 시절로 1793년이다. 그때 일어난 반란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인 1959년에 마오저뚱 시절에 진압했다고? 그럼 연화국의 존속기간이 1959-1793+1= 167년이란 얘기 아냐? 그럼 하나의 왕조로 봐도 되겠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쪼잔하게 숫자 오타 하나가 아니다. 모던 클래식에서 낸 <마교사전>을 보면 확실히 이 내용을 다시 쓰긴 했지만,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을 중국어 발음으로 고쳤을 뿐 내용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말만 중판 또는 개정판이지, 공역한 역자 심규호나 유소영, 그리고 민음사에서 편집 일을 해 먹고 사는 자들은 그냥 날로 먹겠다는 듯, 어느 놈팽이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판을 찍으면서! 개 잡아먹은 데 가서 곡하고 재배할 인간들.

  게다가 초반에 읽으면서 내가 지금 중국 후난성 찌그러진 작은 마을에서 쓰는 언어와 사람 사는 인류학적 이야기를 왜 궁금해하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일야서>를 재미있게 읽어 한사오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만일 중국 독자라면 이 책 역시 흡족할 수 있겠지만 굳이 다른 나라 사람인 내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자꾸 이런 잡생각이 들기도 했던 걸 숨기지 않겠다. 다른 독자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만 극복하면 <마차오 사전>도 한사오궁, 중국 현대문학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문사의 필봉에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다. 표의문자가 한 단어 속에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그래서 글자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지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집단이라 문자/언어에 대한 심각성이 다른 어느 나라 인종들보다 막중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다 언어로 먹고 사는 작가의 직업적 사색까지 보태졌으니 언어/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일 역시 마땅하리라 싶다. 다만 요즘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아 한자어에 멀미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괜히 정말로 읽었다가 욕이나 한 태배기 하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하시기 권한다.


  촌사람들 사는 이야기야 채만식, 이기영, 이무영, 이문구 등을 보유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특별한 게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문자, 단어가 갖고 있는 색다른 이야기 몇 개만 풀어보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일 앞에서 이야기할 초나라 굴원의 고사. 초나라 궁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던 굴원이 머리를 산발하고 맨발로 멱라강변을 유랑하며 다니다가 시대를 탄하며 <어부漁夫>에서 이렇게 읊었다.

  “세상 모든 것이 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늘 나만 홀로 깨어있네.”

  그리고 비가 갠 멱라강 흙탕물 속으로 퐁당 빠져 드런 한 세상, 접었다.

  세상에 이런 오만이라니. 세상 사람들은 굴원屈原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우리나라 만화가 고우영도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굴원의 죽음을 추모했지만 평소에 나는 이이를 조금 한심스럽게, 많이는 오만방자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했다. 현대 중국인인 한사오궁은 마차오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전제로 기원전 278년에(민음사의 연표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으니 이걸 워쪄?) 굴원이 혼자 깨 있어 그 대가로 오히려 혼자 죽었으니 이 아니 어리석으냐고 주장한다. 즉 깰 성醒, ‘깨 있음’이 ‘어리석음’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는 거다. 중국에서도 마차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중국인 가운데 ‘깨다’의 의미인 ‘성醒’에 좋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 ‘성醒’자와 같이 어울려 우리에게 늘 경각심을 주는 단어 ‘각覺.’ 두 글자를 합해 각성覺醒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고 있어서 ‘각覺’이 좋은 글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각覺’은, 당연히 마차오 마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지만, “멍청함을 의미해 아둔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철학으로는 “깨어남이란 우둔함이며, 잠을 잔다는 것은 총명함을 의미”하니까. 한사오궁은 중국 현대사의 난관,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 같은 것을 몸으로 겪으며 고달프고 소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생존하려면 마차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깬 상태를 말하는 성醒이나 각覺만큼 어리석은 단어를 또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먼 시절 굴원처럼 스스로 멱라강에 투신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다른 하나는 2권 198쪽에 나오는 ‘연상憐相’, 가련한, 슬픈 모습이다. 이걸 마차오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쓴단다. 마차오에는 아름답다(미려:美麗)라는 말이 없다. 이에 한사오궁은 중국어 표현에서 아름다울 미美 자는 ‘연憐’과 인연이 많다고 주장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것,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 이게 ‘연상憐相’이라니. 일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슬플 비悲를 심미적 감각에 서린 아름다움으로 사용한 적이 많다고. 이 짧은 챕터를 읽으며 반가웠다.

  오래전 맬컴 라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의 독후감에서 “오랜 세월 아리고 가슴 저며왔던 단어 ‘슬픔’의 진정한 의미와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만 잊어버려왔던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멋을 한껏 부리며 썼던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이 챕터 ‘연상憐相’이 반가웠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그래, 슬픈 것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슬픔은 궁상맞겠지만, 아름다운 건 거의 슬프다는 말이지. 그래서 연憐이건, 비悲건, 애哀건 간에, 한사오궁이건 가와바타건 간에 호모 사피엔스의 정서는 늘 통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밥 먹었어?”

  마차오 마을 사람들도 늘 이렇게 인사한다. “밥 먹었어?”

  사람들은 밥을 먹었건 안 먹었건 간에 “예,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 우리나 마차오 사람들이나 다 그렇다. 그런데 만약 마차오 식이 아니라 곧이 곧대로 “밥 먹었니?” 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안 먹었어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같으면 “그래, 그렇구나.”하고 심상하게 지나갈 것 같다. 나는 일단 그렇게 물어봤으니 그걸로 끝난 거니까. 하지만 마차오 사람들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2권 106쪽에 “밥을 먹다, 봄날의 용법”에 나온다. 재미있다. 웃음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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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29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넘 재밌어요. 이 책은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거든요. 요즘 한자를 유심히 보곤 하는데 이 책 참 흥미롭습니다.
굴원이 강에 투신해 죽은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민음사 유툽에서 책 광고는 참 열심히 하던데 문학전집의 퀄리티에도 좀 더 신경써주면 좋겠네요.
저도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Falstaff 2024-10-29 07:43   좋아요 1 | URL
한자에 관심이 있는 분은 무지 재미있을 듯해요. 저 촌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도 잔잔하고요. ㅎㅎㅎ
민음사는 박맹호 사장의 유지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잠 아쉽습니다. 이제 저는 상당히 많이 포기했습니다. 의례 그러려니.... ㅋㅋㅋ

stella.K 2024-10-29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 표지 디자인도 예쁘던데 안 나오는군요. 민음사도 범우사나 동서문화사 꼴 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나마 요즘은 표지 디자인도 좀 바꾸고 자구책을 찾는 것 같기도한데 좀 미약하죠?
근데 학교는 이제 한문이란 과목이 없어졌군요. 그건 아닌 거 같기도한데. 근데 저는 왠지 팔님 리뷰 읽는데 점점 읽을 자신없다 쪽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10-29 11:43   좋아요 1 | URL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책등 글씨를 흰 색으로 써서, 눈 침침해지니까 이제 책꽂이에 꽂힌 책이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음사가 세계문학 시리즈를 5백번까지 내기로 오래전에 결정을 했다는데, 얼른 시리즈 끝내려고 예전 작품들을 막 올리고 있나... 이런 의심도 들더라고요. 원래 취지에 맞게 세대별로 번역해야 한다는 건 이제 개가 물어갔습니다. ㅋㅋㅋㅋ

유수 2024-10-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학교에서는 한문을 안 가르치는군요. 저는 그럼 한문이 들어있던 마지막 교과과정 수료자 쯤 될는지. 아무튼 그래서 접으라고? 아니야.. 욕하면서 읽을까? 오락가락하다가 마지막 문단 보니까 너무 궁금해져서 책 담아둡니다ㅋㅋ 욕은 저한테 할거니까요 ㅋㅋ 읽다 보니 일자무식이어도 호모사피엔스의 정서 믿고 가보라는 말씀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ㅋㅋㅋ
재밌는 책 이야기 너무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0-30 16:32   좋아요 1 | URL
우리말에 한자가 하도 많이 있어서 좀 알고 지내자는 의미로 가벼운 한문은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첫 시기라서 혼돈기가 필요하겠지요. 저도 한글전용에는 찬성합니다. 그런데 좀 천천히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ㅎㅎㅎ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트풀
앨리 스미스 지음, 이상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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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 스미스는 2011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인 <데어 벗 포 더>를 읽은 후에 독특한 문장과 구성에 홀딱 반해서 연달아 <호텔 월드>, <우연한 방문객>을 읽고 좋아한 적이 있다. 비록 이후 사계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가을>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이름만 갖고 기꺼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을> 이후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다가 벌써 3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눈에 보인 신간 <아트풀>. 놀랍게도 <데어 벗 포 더>를 출간한 다음 해인 2012년에 나온 것을 12년만에 번역한 책이다. 2022년 작품인 <이어지는 이야기: Companion Piece>가 2024년에 번역, 출간한 걸 보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왜 그랬을까? 뭘 알겠느냐만, 읽어보고 추리는 할 수 있었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듯, 그러나 소설인 작품. 즉 대중성 측면, 쉬운 얘기로 하자면, 팔릴 거 같지 않은 책이다. 전문가적 소양을 가진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읽어본 감상을 말하자면 그렇다. 책 표지 사진은 영국에서 발간한 원서의 표지 사진과 같다. 근데 작품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다른 것이니 믿으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2012년 초에 앨리 스미스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돈 많은 유대인 출판업자 바이덴펠트를 초빙교수로 모셔오는 것을(옥스포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학기금을 공동 설립했으니 이 정도야 성의표시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기념하기 위한 강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작가는 네 가지 주제, ①시간On Time, ②형식On Form, ③경계On Edge, ④제안 및 반영On Offer & On Reflection이었으며, 당시 강연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스토리를 담아 소설 작품으로 만든 것이 <아트풀>이다. 그리하여 네 부part로 구성된 소설도 마찬가지로 시간, 형식, 경계, 그리고 제안 및 반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자. 그리고 이 여자 앞에, 옆에 심지어 같은 침대 위에 아직도 있는 것 같은 바로 그 죽은 연인. 여기서 잠깐. 작가 앨리 스미스는 커밍 아웃을 한 레즈비언이다. 이 죽은 연인을 남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1도 없다. 작가가 레즈비언이니까 죽은 연인도 여자겠거니 생각할 이유 역시 1도 없다. 그냥 연인으로 여기자. 이 연인이 죽기 전에 강연을 했는데 그걸 위한 자료가 우연히 시간, 형식, 경계, 제안 및 반영으로 되어 있을 뿐. 이 강연이 유럽의 비교문학을 다룬 것. 따라서 전체의 반을 넘어서는 분량을 시공 초월한 유럽 각지, 심지어 (라틴 포함)아메리카까지 시인, 소설가의 작품을 인용, 비교하고 있어서, 스미스가 자료로 쓴 작품을 몽땅은 아닐지언정 웬만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아마, 독립감 좀 느낄 걸? 아니면 자만심이 좀 상할 수도 있고.

  책 제목 아트풀Artful이 뭐냐 하면, 사전적 의미로 기교적인, 교묘한, 교활한, 잔재주 좋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고, 찰스 디킨스가 쓴 <올리버 트위스트>의 조연 가운데 한 명인 잭 도킨스의 별명 ‘아트풀 다저’에서 가지고 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는 초장부터 김이 새면서 앞 문단에서 말한 독립감, 그리고 자만심에 스크래치가 갈 수밖에 없다. 아트풀 다저가 누군데?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데? 괜히 묻지 마시고 얼른 이 책을 덮어 버리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다음에 다시 오시라. 그러면 그걸로 끝나냐고? 천만의 말씀. 내 경우엔 외국 사람이 쓴 시는 읽지 않는다. 근데 소설만큼 많은 시인이 등장하고, 시 구절, 그리고 외국시를 읊을 때 빠지지 않는 두운, 각운 같은 걸 무수하게 이야기하건만, 두운 각운을 더듬더듬 감각이라도 할 수 있게 원시도 첨부했으면 도움이 되겠으나, 애써 우리말로 번역한 시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어떻게 우리글로 번역한 시를 다시 뇌 속에서 영어로 바꾸어 두운, 각운을 알아채고, 그것도 모자라 거 참 귀신이 곡을 할 만큼 절묘하구나, 경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예를 들어서 영국(미국? 아 몰라, 몰라!)에 윌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이런 시를 썼겠다:



  나는 테네시에 병을 두었다.

  둥근 병을 언덕 위에 두었다.

  병은 제멋대로 펼쳐진 황무지가

  언덕을 둘러싸게 했다.


  황무지가 그것을 향해 솟아올라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더는 야생이 아니었다.

  병은 땅 위에서 둥글었고

  키가 크고 공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병은 모든 곳을 지배했다.

  병은 광택이 죽고 닳아 있었다.

  새나 수풀을 선뜻 내어주지 않았다.

  테네시의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이렇게 인용하고 앨리 스미스가 말하기를,

  “시는 그 경계를 넓혀 그 자체의 형식적인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음절적으로나 운율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관점에서 형식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자체적으로 거부한다. ‘수풀’을 위한 운율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건 없다. ‘황무지’를 위한 운율도 없다. ‘테네시’와 유일하게 운율이 맞는 것은 ‘테네시’이다. ‘언덕’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에서 운율은 ‘공기air’와 ‘모든 곳everywhere’을 ‘닳아 있었다hare’와 연결시킨다.”

  어떠셔? 읽을 만하셔?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알겠다. 운율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도 있다는 거겠지. 하필 이 시를 셰익스피어하고 견주어서 ‘쥐랄’이지만. 아니, 그건 내가 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땅의 일개 독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서쪽 끄트머리 섬나라 지식인은 이것을 타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여간 소설의 반이 넘는 분량을 이렇게 나처럼 독립감과 자만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이 상처가 별로 크지 않다. 돈 주고 산 책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거든.) 인내심 함양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는 이야기, 이야기들.

  죽은 연인이 실제로, 아직도 자신의 옆에 있다고, 정말로 눈에 보이는 환시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화자. 갑자기, 난데없이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연인. 칫. 그러나 생각해보라.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태어나기 전의 아무것도 없음과 죽은 이후 아무것도 없음의 무한대라는 거대함에 비하면. 그러나 그건 철학자의 이야기이고 당장 연인을 상실한 여자는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해, 상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훔치고, 집안에서 중요한 부품을 내다 버리고, 그걸 죽은 연인이 한 행위라고 덤태기를 씌워버린다. 호텔 로비에서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난리를 죽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다. 스코틀랜드, 더 크게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기도 한 앨리 스미스가 이이 특유의 그럴 듯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암만해도 소양이 부족한 극동의 독자한테 너무 전문적인 비교문학적 자료를 팽개쳐버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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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0-28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끝까지 읽으셨네요~~^^
저 같았음 그냥 팽개쳐버렸을 듯해요.
앨리 스미스 ... <가을> 읽다가 팽개쳤는데 다시 돌아가지지가 않아요.
몹시 지루하더라구요!

Falstaff 2024-10-29 05:53   좋아요 1 | URL
저도 <가을>이 별로더라고요. 근데 전작들은 꽤 좋지 않았나요? <데어 벗 포 더>, <우연한 방문객>, <호텔 월드> 다 마음에 들었다가 가을에서 확 얹혀 버렸습니다.
저는 좀 더 스미스를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