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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정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1
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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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랜즌은 1959년 여름에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변두리 마을에서 스칸디나비아계 아버지와 동유럽 이민자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혈연 계통은 작품 속의 부모 이니드와 앨프리드 램버트 부부와 같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한 일고여덟 시간 남쪽으로 달리면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가 나오는데, 두 마리의 앵무새를 야구팀 이름으로 사용하는 이 도시의 변두리 부자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생 수정>에서도 가족의 고향집은 세인트주드에 있다. 미국인들은 세인트루이스를 기점으로 서쪽을 서부, 동쪽을 동부라고 생각하니까, 세인트루이스가 정확하게 미국의 중부도시이다. 작품 속에서도 램버트 집안의 세 남매는 세인트주드를 중부도시라고 일컬으니 읽으면서 세인트주드를 세인트루이스와 인접한 작고 부유한 동네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러면 책을 읽기가 수월해진다.
세인트주드. 성聖 주드. 익숙하지? 야나기하라가 쓴 우중충한 이야기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이 주드. 이 책의 마을 이름 성 주드, 세인트 주드. 좌절하는 사람, 절망스러워하는 사람의 수호성인을 마을 이름으로 가져다 붙인 거다. 그러면 이 책에서도 좌절하는 사람, 절망스러워하는 사람이 등장하겠지? 맞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마땅히 좌절하고 절망스러워해야 하는 법. 그러나 생각하기 나름. 세상에 한 번도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이름 대봐라.
이 책 <인생 수정>을 발표한 것이 2001년. 벌써 사반세기가 흘렀다. 당시에 프랜즌은 전미도서상을 받았으며 퓰리처상, 더블린 국제 문학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가 장렬하게 바나나 껍질을 밟았다. 시그리드 누네즈가 쓴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 이 작품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한 출판업자가 조너선 프랜즌이 <수정correction>이란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끔찍한 제목이군. 세 부 정도밖에 안 팔리겠어.”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김시현 번역판이 은행나무에서 출간했다가 이번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21번으로, 남성 작가 작품으로는 머네인에 이어 두번째로, 중판(또는 개정판)이 나왔다. 이 정도가 <인생 수정>과 관련한 작가의 바이오이다.
미국의 중부 지역에 있는 마을 세인트주드는 장로주의가 득세한, 즉 보수적 색채가 강한 곳이다. 이곳 마을의 작지 않은 주택에 일흔다섯 살의 앨프리드 램버트와 그의 아내 이니드가 살았다. 작품은 이니드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지하실에서 펜실베이니아 스벤크스빌 이스트 인더스트리얼 서펀티 24, 액슨 주식회사로 발송하는 등기우편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권이지만 82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이니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몸 속에서 파킨슨 병이 맹렬하게 진행중인 앨프리드는 왕년의 기계 엔지니어로 특허 두 개를 갖고 있는데, 액슨 주식회사가 마침 엄청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앨프리드에게 특허를 5천 달러에 팔라고 권유하는 문서였다. 앨프리드는 이 문서에 동의해 서명하고 세인트주드의 공증인에게 공증까지 받은 다음에 이니드에게 우체국에 가서 서류를 등기로 발송하라고 부탁했었다. 이니드가 암만 생각해도 1만 달러는 받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냥 서류를 어디다 두었다가 깜박 잊은 거였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순서대로 아들 개리(그리고 며느리 캐럴라인과 세 손자), 아들 칩, 딸 데니즈를 두었는데, 작지만 탄탄한 은행의 부점장 개리가 후에 이야기를 듣더니 이건 수십만 달러짜리라고 난리를 죽이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아버지 앨프리드는, 네 일이 아니니까 신경 끄라며 단칼에 정리해버리고 5천달러에 서명한 거다. 더 이상은 미리 알 필요 없다.
이렇게 시작한 소설은, 앨프리드와 이니드가 이제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크루즈 여행에 오르기 위하여 뉴욕의 둘째 아들 칩의 아파트를 향하고, 뉴욕 공항에서 아들 칩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작품은 후기 자본주의의 정점에 올라선 미국이 거의 마지막으로 호황을 누려, 상장회사의 자본시장이 무려 35퍼센트 성장하는 시기의 마지막 부근이 시간적 공간이다. 곧 러시아와 한 시절 위성국가였던 나라들, 태국과 한국 등지에 외환위기가 닥칠 예정이니 1996년에서 97년으로 보면 적당하겠다.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후기 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전 미국을 휩쓸던 시절, 한 가족으로 축소, 축약된 미국 혹은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데, 작품의 해설 속에는 “가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점철된 램버트가의 숨막히는 일상 속에서 억압과 굴욕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대물림된다.”라고 하고 있으나, 천만의 말씀. 그렇게 거창하게 읽으면 읽다가 지쳐 죽겠다. 그냥 그 시절의 미국 가정이다. 비록 아버지 앨프리드가 좀 가부장적이고 완고하고, 고집불통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꽉 막힌 구석이 있지만 평생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맹렬하게 돈을 벌었으며, 나중에 알려지지만 꼰대들 특유의 불친절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도 부모의 영향 때문에 성격이 고착되었다고 할 근거는 거의 없다.
얼핏 생각하면 이런 아버지 때문에 아이들이 빗나갔을, 빗나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자식 농사는 기중 잘 지은 편이다.
맏아들 개리. 마흔은 확실하게 넘었다. 좋은 대학 졸업하고 금융권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는데, 너무 크고 좋은 곳 말고 상대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마땅한 작지만 알찬 은행을 골라 들어가서 정말로 두각을 나타내 부행장 자리에 올랐다. 물론 망한 프로젝트도 담당했던 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단한 이익을 가져온 은행의 보배 비슷한 수준. 덕분에 진짜로 돈 많은 집의 외동딸 캐럴라인과 결혼하는데 성공해, 아들만 셋 낳고, 집에서 (약식)미식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저택에 살며, 세상에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사는 처자식한테 조금 불만이 있지만 당연히 공처가에, 아버지처럼 완벽한 옹고집은 아니지만 아내와 아들한테 왕따 당하고 있는 걸 자신도 안다.
둘째 아들 칩. 형처럼 고등학교까지 세인트주드에서 다니고 동부에 있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 드디어 부모한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공부를 잘해서 코네티컷의 D 대학에서 텍스트 공예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는데 당시 조건이 5년 임기의 교수직을 끝내면 곧바로 종신교수로 임용하는 거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열공에 열공을 더한 모범생으로 부자가 되지 않고도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무턱대고 믿었던 순진한 지식인이었다. 쉽게 말해 모든 경제활동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었다는 거.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늘 비싼 월세 때문에 빠듯했으나 하여간 교수 월급으로 충당할 수 있어서 다른 선택은 하지 않았다. 오늘 독후감은 이 둘째 아들에 관해서만 쓰겠다. 작품은 부모와 세 자식들 이야기가 전부 나오는 바람에 8백페이지가 넘어간다. 그거 다 소개하면 내일 아침까지 써도 모자란다.
막내 딸 데니즈. 서른두 살. 둘째 오빠 칩보다 더 좋은 대학을 다니다가 마음먹은 바가 있어서 중도에 때려 치우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돌며 요리를 배웠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요리 공부를 더 하고 고급 레스토랑에 취직한다. 이때 자신의 사수이자 셰프를 잘 만나 이후 요리 솜씨가 일취월장한 것은 물론이고 셰프에 대한 존경심이 사랑으로 바뀌어, 키 작고 못생기고 나이 많은 유대인 셰프와 결혼에까지 이른다. 물론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이후 벤처 사업체를 거액에 팔아 평생 일할 필요가 없어진 거부에게 고용되어 필라델피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수석 셰프 자리에 오르고 각종 메스컴에 등장하는 등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사장과 한 침대에 들었다가 엉뚱하게 사장 아내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장과 딱 한 번의 불륜, 그리고 사장 아내와의 지속적인 동성애가 발각나 단칼에 해고당한다.
어떠셔? 이 정도면 자식 농사를 망치지는 않았다. 사회생활 하다가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얼마동안 고난의 행군을 할 때도 있는 법. 이 정도면 괜찮은 농사라 할 만하다. 그러니 “가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점철된 숨막히는 일상 속에서 억압과 굴욕”이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대물림된다”는 건 어째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그럼 둘째 아들 칩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D 대학의 성실한 텍스트 공예학 교수 칩 램버트가 종신교수로 임용되기 바로 한 학기 전에 일이 벌어진다. 자기 수업을 들었던 멜리사라는 학생이 문제였다. 전 학기에 칩을 유혹하려다 실패로 끝나고 만 전력이 있는 멜리사가, 칩의 말에 의하면, 자기를 강박적으로 쫓아다녔다고 하는데, 칩의 차에 팔딱 뛰어 타더니 모텔에 가자는 거였다. 칩이 생각하기에 이제 자기 학생이 아니니까 뭐 그리 크게 잘못될 일이 있을까 싶었다. 이때 칩이 서른여덟에서 아홉. 근데 멜리사 하는 말이 모텔에 가기 전에 어디 한 군데 들렀다 가자고 한다. 그렇게 했다. 어느 건물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멜리사는 멕시칸A 라고 하는 미未승인 향신경성 약물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둘은 모텔에서 멕시칸A를 먹어가며 몇 날 며칠동안 천국에 머물렀다. 오직 그거만 하면서. 이 멕시칸A는 부모가 마지막 크루즈 여행을 하는 배 안에서 한 번 더 등장할 예정이기도 하다. 엽색 여행이 끝난 후에 멜리사는 학교 과제인 리포트 작성에 곤란을 겪으면서 칩에게 리포트의 방향과 기타등등의 지도편달을 부탁했고, 칩은 그렇게 했다. 이후 멜리사는 학교 당국에 이제 한 학기만 있으면 종신교수가 될 칩이 자신과 부적절한 사제간의 관계를 맺었으며 그 대가로 자신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었다고 고발하고, 칩은 당연히 해고당한다.
이제야말로 좌절과 절망의 단계에서 성 주드의 돌보심만 바라게 된 칩이 어떻게 영화사와 연결이 됐고, 영화사 사장의 권유로 시나리오를 한 편 쓰는 과정에서 사장의 비서인 줄리아 브라이스와 애인관계를 만든다. 근데 칩이 지금 벌이가 없잖아? 그는 동생 데니즈에게 2만5백 달러를 빌려 돈이 떨어질 때까지 줄리아와 데이트를 즐기며, 돈이 떨어지자 자기 전공 책을 팔아 또 줄리아와 함께 극장과 식당에 가더니 본격적인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시나리오를 받은 사장은 한 번 휙 읽어보고는 자기 딸의 낙서용 종이로 제공하고 만다.
이 상태에서 성 주드는커녕 세인트주드에서 부모가 크루즈 여행을 위해 자기 아파트로 쳐들어온 것. 이에 맞추어 동생 데니즈도 아파트에 왔는데, 있는 돈, 없는 돈, 그리고 마침 돈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여러가지 식료품, 특히 1킬로그램짜리 연어를 훔쳐 팬티 안에 숨겨 나오는 장면이 포복절도할 만한데, 그렇게 점심 재료를 준비해 놓았으나, 아뿔싸, 부모에게 소개하기로 한 여자친구 줄리아가 그날 부모가 있는 아파트 안에서 칩에게 난데없는 이별을 선언하더니 그냥 나가버리는 거였다. 칩은 부모가 몇 년만에 뉴욕에 왔든 말든, 자기한테 2만5백 달러를 꿔준 데니즈가 왔거나 말거나 줄리아를 찾아 나서고, 결국 셰프, 사실은 해고당한 셰프인 막내딸 데니즈가 점심을 새로 만들어 먹고 크루즈 선박에 오른다.
사실 줄리아는 기혼녀였다. 남편은 리투아니아의 젊은 미국 대사이자, 군부실력자인 지타나스 미세비치우스. 지금 그는 리투아니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니다. 갔다가 왔다. 영화사에서 우연히 칩을 만난다. 돈 한 푼이 아쉬운 칩은 지타나스가 준비하는 리투아니아에서의 대 세계적 특히 대 미국 사기극에 고용되어 애인의 법적 남편 바로 옆 좌석에 앉아 리투아니아로 날아가고, 결과적으로 돈을 벌기는 번다.
이렇게 조너선 프랜즌은 길고 긴 한 가족의 난장판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는데, 유쾌하다고 다 즐겁게 웃긴 건 아니라서 절대적으로 후기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와 가족간에도 극명하게 갈리는 개인주의의 비극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작품 답게 결론은 가족, 가정. 하지만 그렇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돈벼락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읽어 보시라. 후회하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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