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평점 :
.
오에 겐자부로의 1973년 작품. 이이의 작품은 뇌 헤르니아를 갖고 태어난 아들 오에 히카리, 중국에서 붉은 가죽 가방을 가지고 귀국해 가족과 함께 살다가 익사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일본의 개화기에 오에 집안 주변에 있었던 민란, 전쟁 후 (대체로 우익 학생들에 의해 저질러진) 반 정부 집단 행동 등 몇 가지에 주목하고 있다. 도쿄 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작가는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천생 지식인이라서 아버지의 생애나 옛 시절의 민란 그리고 젊은이들의 반 정부 집단에 관해서는 늘 관찰자 역할에 충실히 머물렀다. 그렇게 알았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이하 “홍수는”>은 이런 믿음에서 벗어난다. <홍수는>에서 가명 “오키 이사나”를 사용하는 주인공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일종의 도피자들의 그룹인 “자유 해양단”에 기꺼이 가입하여 집단의 일원으로 행동한다. 여태 오에의 여덟 작품을 읽으면서 굳어진 그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산뜻한 경험이었다.
나는 일본 작가 가운데 오에 겐자부로를 가장 좋아한다. 이이의 작품을 읽어보면 어느 하나 빠짐없이 공고한 직조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꽉 짜여진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커다란 구조물을 짓고 있는 벽돌공이랄까, 완성된 건물에서 벽돌 하나, 고인 나무 하나를 빼더라도 모두가 와장창 무너질 것 같지만 정작 지어놓은 건물 자체가 벽돌이나 나무 하나를 빼지도 못하게 완강하게 조여진 듯한 작품. 이것이 오에 겐자부로를 읽는 기분이었으며, 읽을 때마다 나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같은 이유로 작년 말에 한 번에 오에의 장편소설 세 작품을 연달아 읽을 때는 무척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때 읽은 것이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그리고 <책이여, 안녕>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멀미가 나는 거 같다. 그러니 오에의 작품은 적어도 몇 개월의 터울을 두고 읽는 게 좋을 듯. 실제로 오랜만에 읽으니까 문장이나 구절 하나하나 섣불리 지나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어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이렇게 질리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 원래 글이 훌륭해서 이겠지만, 나처럼 아마추어 독자들은 아무래도 심리묘사만 무난히 계속 이어지는 것보다 약간 울퉁불퉁한 서사의 비포장 도로를 달려주는 것이 흥미를 끄는 법인데, 놀랍게도 전혀 오에 답지 않게 등장인물들 거의 모두가 극단적인 성격이랄까, 하여튼 비정상적인 과격성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도무지 대충 읽을 빌미를 주지 않았던 것이 컸다.
주인공 오키 이사나는, 한 시절 일본 정계에서 꽤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의회 거물 의원의 최측근 비서였다. 의원이 정치적으로는 선량한 쾌남이었지만 흔히들 그렇듯이 알고 보면 괴물 가운데 괴물이라서 의원 근처의 모든 이들은 그를 괴물의 ‘괴怪’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심지어 전후 일본이 숭상했던 미국으로 유학해 거의 모든 몸가짐과 사고방식을 미국식으로 탈바꿈해 돌아올 것을 지시받아 그렇게 한 친 딸마저. 후에 괴는 기꺼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오키의 아내로 보낸다.
괴가 괴일 수 있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계 어디를 가나 현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을 자신의 침대 위에 대령시키라는 지시를 비서에게 하달하는 거였다. 이사나 역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괴의 지시를 한치 어김도 없이 수행하였으나, 발칸 반도의 한 나라에서 그만 사고로 괴의 호텔방에서 소년 한 명이 죽어버리는 사고가 생긴다. 이사나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죽은 소년을 방 옆 건물 모서리로 안고 가서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위장하기 위하여 떨어뜨리려는 순간, 소년의 정신이 돌아온 것을 알았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엉겁결에 손을 놓았으며, 소년은 순간적으로 이사나의 손목을 할퀴기까지 해버렸다. 괴와 이사나는 다음날 아침에 곧바로 출국하여 완전한 범죄로 끝날 수 있었으나 사건과 죽은 소년이 남긴 이사나의 흉터는 물론 고스란히 지울 수 없었다.
이후 이사나는 건축회사로 직장을 옮겨 흥미롭게도 핵 셸터를 제작해 판매하는 사업부의 책임자로 일하게 됐다. “핵 셸터”. 띄어쓰기 하지 않고 그냥 핵셸터라고 표시하는 이 건축물은, 20세기 말 한때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건축물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이 발발해 닥칠 심판의 날을 대비한 피난처로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든 3미터 x 6미터 크기의 지하벙커다. 회사는 견본 핵셸터를 무사시노 대지 서쪽 끝자락에 만들었지만 세계적으로 핵전쟁의 위협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로 변함에 따라 기업화까지 진행하지 못했고, 견본 셸터는 일본 유일의 핵셸터로 남았다.
이사나는 아들 진을 낳고, 낳자마자 뇌수술을 해야 했고, 태어난 순간부터 뇌수술을 해야 하는 동안 <개인적인 체험>에서 보듯 아내와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미 사이가 멀어진 괴와는 상종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정상적이지 못한 진이 아무 이유 없이 쓰러져 여기저기 상처를 입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 이사나는, 나중에 보면 분명 유도의 낙법을 사용할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진처럼 그냥 맥없이 고꾸라져 코피가 터지고, 광대뼈가 무너지고, 심지어 생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울증에 진입한 이사나는 아내에게 진과 함께 버려진 핵셸터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부탁해 승낙을 얻는다. 부탁을 한 이유는 지하에만 건설을 한 핵셸터 위에 3층 건물을 증축해 (피난처가 아니라 살림용으로) 오래 살 수 있는 집을 아내나 장인의 돈으로 마련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얼마 후 핵셸터를 포함한 좁은 면적의 3층 건물로 옮긴 부자. 아버지는 프리즘쌍안경을 통해 숲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하면서 자신을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으로 자처한다. 얼마 후 이이는 자신의 이름마저 오키 이사나(大木勇魚: 큰 나무 용감한 물고기)로 개명해버린다. 물론 호적까지 바꾸지는 않지만. 또한 아들은 아버지가 녹음해준 새소리를 들으며 몇 십 종의 새소리를 구분할 줄 알게 된다. 당연히 천재적인 음감을 가졌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오에 겐자브로는 일찍이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핵 공격의 비극에 관해 깊게 이해한 바 있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핵 또는 반핵 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한 평화주의자였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반핵주의자로 핵셸터에 집을 짓고 사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건 독자들의 생각이고, 일반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반핵과 전쟁에 관한 공포로 이상 심리상태가 된 “세상의 이모저모”에서 소개한 별난 외국인 몇 명을 제외한다면 유독 두드러진 사람이기도 하다. <홍수는>에 나오는 핵셸터의 주민들도 이사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이사나가 마을 사람들과 소통을 하지 않는 외톨이로 지내지만 마을의 모든 주민들은 이사나를 알고 있다. 독특하거나 별난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모난 사람”이라서.
그러나 이사나에게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자유해양단.”
이들은 만일 도쿄에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큰 지진이 나면 백 년 전에는 지진 피해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생긴 일이라고 호도하며 조선인을 학살했지만, 이제는 자신들 같은 권력이나 힘 없는 청년들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크지 않은 선박을 (물론 제일 좋은 건 돈 주고 사는 것이긴 하다) 탈취하거나 얻어서 공해상으로 나가 국적을 포기한 후 세계인으로 살겠다는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다. 대개 십대 미성년자로 구성되었으나 “오그라든 남자”로 불리는 전직 잡지사 프리랜서 카메라 기자 단원은 마흔이 넘었다.
이들은 단원 가운데 한 명 있는 여자아이 이나코를 시켜 거구의 형사 한 명을 유혹해 아지트 근방으로 유인했고, 그로부터 권총을 약탈하는 데도 성공했지만, 와중에 형사가 가장 어린 단원 “보이”를 체포하기 위하여 자신과 보이의 팔을 연결해 수갑을 채웠고, 보이는 칼로 형사의 손목이 아니라 자신의 손목을 잘라 도망하려 하자 형사는 할 수 없이 수갑을 풀고 혼자 도망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깊게 자상과 창상을 입은 보이의 손목이 탈이 났다는 것. 보이는 열이 오르고 헛소리도 해대는 등 파상풍 비슷한 증세를 보여 그들도 바라지 않는 바이나 어쩔 수 없이 이사나의 셸터에 보이를 들이고 이나코로 하여금 간호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된 것은 아니어서 이사나와 해양단 서로간의 기싸움도 있었고 음란하게 보이기도 하는 시도도 있었으나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하여간 그렇게 된 후 우연히도 이나코와 이사나의 아들 진이 유난한 친밀도를 유지하게 되고, 덕분에 이사나 역시 조금씩 자유해양단에 관해 호감이 생겨, 결국 자유해양단의 대변인, 작품 속에서는 “말”, 쉽게 말하는 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작품은 이사나와 진, 독특한 성격의 자유해양단 단원, 괴와 그의 딸 등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주축을 이룬다. 주축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스토리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드라마틱해지고, 아주 예외적으로 거친 대단원을 맞는다. 그러니 읽기에 따라 재미가 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 묘사보다 역시 오에 겐자부로를 읽는 진짜 묘미는 문장과 문단 자체가 갖고 있는 긴장과 견고한 맛을 음미하는 것이리라.
.